[세계]리먼사태 5년, 월스트리트 제 버릇 못 버렸네(경향)

[세계]리먼사태 5년, 월스트리트 제 버릇 못 버렸네

월스트리트의 구조적 문제는 2008년과 달라진 게 없는데도 금융업자들은 집단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듯 다시 고위험·고수익 파생상품에 눈길을 주고 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2008년의 월스트리트를 만화영화에 나오는 아둔한 고양이에 비유했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시위가 벌어지던 2011년 10월 미국 뉴욕 주코티공원에서 행한 연설에서였다. 이 만화에서 쥐를 쫓던 고양이는 벼랑에 다다른 것도 모른 채 계속 달리다가 발 밑을 내려다본 후에야 추락할 운명인 것을 알게 된다.

2008년의 월스트리트는 이 고양이와 다르지 않았다. 더 높은 수익률을 쫓던 금융가들은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 채 내달렸고, 2008년 9월 15일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보호를 신청한 뒤에야 시장의 붕괴가 이미 시작됐음을 깨달았다.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최악의 위기가 월스트리트를 뒤흔든 지 5년이 지났다. 그간 금융업계의 탐욕을 규제하기 위한 개혁조치가 잇따랐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2010년 7월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금융규제 법안으로 꼽히는 ‘도드프랭크법’을 발효시켰다. 규제기관을 통합해 효율성을 높이고, 금융시장에 대한 포괄적 규제를 시행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국제사회는 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을 기존 2%에서 3%로 상향 조정하는 내용의 바젤3에 합의했다. 지난 7월 미국 규제당국은 은행 자기자본비율을 바젤3보다 높은 5%로 조정하는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경제지표와 달리 체감경기는 “글쎄요”
그러나 한쪽에선 월스트리트가 ‘정신 못차렸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현상이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점령 시위대가 상위 1% 위주로 돌아가는 불공정한 정치·경제 시스템을 바로잡으라며 내세웠던 ‘우리는 모두 99%’라는 슬로건도 허공으로 흩어진 구호에 그치고 말았다. 미국 상위 1%와 나머지 99%의 소득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8월 23일 미국 월스트리트의 주식 중개인들이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전자 단말기를 확인하고 있다. | 뉴욕/AP연합뉴스

지표상으로 미국 경기는 좋아지고 있다. 2008·2009년 마이너스 성장을 했으나 2010년부터 플러스로 돌아서 지난해엔 2.2% 성장률을 기록했다. 2008년 위기의 진원지인 주택·부동산시장도 살아나고 있다. 미국 대도시 주택 가격을 보여주는 케이스실러 지수는 아직 2006년 상반기 고점의 70%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지난 6월 지수가 지난해 같은 달보다 12.1%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식시장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2009년 3월 6700선까지 떨어졌던 다우지수는 1만5000선을 넘어섰다.

그러나 ‘살림살이가 나아졌는가’라는 질문에 대다수 미국인들은 ‘아니다’라는 대답을 내놓고 있다. 지난해 8월 8.1%였던 실업률은 지난 8월 7.3%로 낮아졌지만, 이는 일자리가 증가해서가 아니라 구직활동을 포기한 사람이 늘어서라는 분석이 나온다. 소비를 통해 내수에 활기를 불어넣어야 할 중산층은 2001년 54%에서 2011년 51%로 줄었다. 같은 기간 중산층 가구의 평균소득은 4.8% 감소했다.

소득불평등은 1928년 이래 최대로 벌어져
소득불평등은 더 커졌다. 지난 9월 11일 AP통신 보도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상위 1%와 나머지 99%의 가계소득 격차는 대공황 직전이었던 1928년 이래 최대로 벌어졌다. 지난해 상위 1%의 가계소득은 전체의 19.3%로, 이전 최고치였던 1927년의 18.7%보다 0.6%포인트 높았다. 지난해 상위 1%의 평균 가계소득은 약 39만4000 달러(약 4억2600만원)였다. 상위 10%의 가계소득(평균 11만4000 달러·약 1억2300만원)은 전체의 48.2%를 차지했다. 이는 미국 UC버클리와 프랑스 파리경제학교, 영국 옥스퍼드대 경제학자들이 1913년부터 지난해까지 100년간의 미 국세청 자료를 분석해 밝혀낸 것이다.

은행 자산 중 높은 레버리지(차입금) 비율과 위험한 파생상품 개발·거래 등 월스트리트의 관행도 달라지지 않았다. 대형 투자은행들은 자기자본비율을 5%까지 끌어올리고 있다며 성과를 자랑하지만 이 역시 경영 안정성을 보장하기엔 미약한 수준이다. 아나트 아드마티 스탠퍼드대 교수는 지난 8월 25일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일반 기업의 부채 비율은 70%를 넘지 않는데 유독 은행에 대해서는 국제 기준(바젤3)도 95%까지 허용하고 있다”며 “자기자본이 자산의 5%에 불과하다면 손실규모가 자산의 2%만 돼도 뱅크런(대량 예금인출 사태)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어떤 위기에도 도산하지 않는다는 ‘대마불사’(大馬不死)의 전례를 남긴 대형 은행들은 오히려 덩치가 더 커졌다. 2008년 미 재무부가 진두지휘했던 금융기관 인수·합병은 시장 참여자들의 다양성을 감소시키고 종전보다 더 크고 강력한 금융기관을 탄생시켰다. 현재 월스트리트는 뱅크오브아메리카와 시티그룹, 골드만삭스, JP모건체이스, 모건스탠리, 웰스파고 등 불과 6개 금융기관이 지배하고 있다.

기억상실증 걸린 월스트리트, ‘제2의 리먼사태’ 가능성
월스트리트의 구조적 문제는 2008년과 달라진 게 없는데도 금융업자들은 집단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듯 다시 고위험·고수익 파생상품에 눈길을 주고 있다. 제로에 가까운 기준금리가 장기간 유지되면서 수익률 높은 상품을 찾는 투자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9월 8일 USA투데이는 올해 들어 현재까지 발행된 부채담보부증권(CDO)이 440억 달러(약 47조7000억원)를 넘어섰다고 보도했다. 위기 직후인 2009년 CDO 발행 규모는 43억 달러(약 4조6000억원)였다. 주택담보대출·자동차담보대출 등에서 발생한 채권을 재포장해 증권을 만들고, 이 증권을 담보로 또 다른 증권을 만드는 월스트리트의 ‘마법’은 2008년 구조적 위기를 불러온 주범이었다.

JP모건체이스의 영국 런던지사는 2012년 5월 공격적인 파생상품 거래로 대규모 손실을 입었다. 사건 초기 JP모건체이스는 손실금액이 20억 달러(약 2조1600억원)라고 축소 발표했다가 파장이 커지자 60억 달러(약 6조5000억원)라고 정정했다. 금융상품 거래인(트레이더) 한 명에게 과도한 권한을 몰아주는 등 위험관리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던 사실도 조사과정에서 밝혀졌다. 월스트리트가 2008년의 위기에서 아무 교훈도 얻지 못했다는 점을 방증하는 사건이었다.

미국 로젠블라트 증권사의 시장전략가 브라이언 레이놀즈는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2008년과) 똑같은 사람들이 똑같은 짓을 다시 하고 있다”며 “우려해야 할 만한 현상”이라고 말했다.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한 지 5년이 된 현재, 어떤 경제학자도 제2의 리먼 사태가 재발할 가능성이 없다고 장담하지 않는 이유다.

< 최희진 국제부 기자 daisy@kyunghyang.com>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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