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영국인 베델이 창간한 신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 신문을 이끈 주역은 단재 신채호, 백암 박은식, 우강 양기탁 등 3인이었다. 이들은 당대의 지식인이자 선각자였으며, 당시 지면을 통해 ‘항일필봉’을 드날린 논객이었다.

그런데 이들에겐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으니 다들 역사학도였다는 점이다. 외국의 신문명이 밀물처럼 밀려오던 시절, 신문명 소개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대중들에게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리는 일이었다.

단재는 국내외에서 언론활동을 하면서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艸)> <조선사론> 등 여러 권의 역사서를 펴냈다. 그런 인연으로 한길사와 단재신채호기념사업회는 각각 ‘단재상’을 제정해 매년 역사학 분야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을 선정해 시상해오고 있다. 또 백암은 <동명성왕실기> <발해태조건국>을 비롯해 한국근대사를 다룬 <한국통사(韓國痛史)>를 펴내 통한의 우리 역사를 독자들에게 설파했다.

일제하 언론인으로 활동하던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은 우리 역사를 기획물이나 소설 등 다양한 형태로 다루며 한 때나마 민족적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해방 후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 하에서도 이같은 전통은 이어져 왔다. 대표적인 인물로 반독재·민주화운동을 전개했던 언론인 천관우를 꼽을 수 있는데, 그는 <근세조선사연구>를 비롯해 <고조선사·삼한사연구> <가야사연구> 등을 펴냈다. 평생을 한국고대사 연구에 바치며 식민사학의 폐해를 걷어내려 했던 그는 민족주의 계열의 역사학자로 꼽힌다.

언론인의 본분 가운데 하나는 당대의 기록자 역할과 함께 지난 역사를 제대로 알리는 것이랄 수 있다. 특히 외세 지배나 독재정권 하에서 언론인의 역사인식과 올바른 기록은 참으로 중요하다고 하겠다. 일제 말기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일제는 조선과 일본이 같은 조상이라는 이른바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을 퍼뜨리며 창씨개명과 징병제 동참을 강요했다. 그러나 당시 그 어떤 언론인도 일제의 주장에 맞서기는커녕 오히려 식민사관의 나팔수 노릇을 하기에 바빴다. 이는 과거 독재정권 하에서도 비슷한 형국이었다.

최근 TV조선과 채널A 두 종합편성채널(이하 종편)이 5.18광주항쟁 당시 북한군이 침투해 활동했다는 주장을 내보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었다. 급기야 두 방송사는 호된 비난과 함께 여론에 떠밀려 결국 사과방송을 내보냈다. 그러나 5.18 관련단체 등이 두 종편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 중이어서 이걸로 사태가 수습될지는 미지수다. 사회적 공기를 자임하는 언론사가 논란의 소지가 다분한 사안을 검증없이 내보냈다는 점에서 이같은 비난은 응당해 보인다.

이번 두 종편의 5.18 역사왜곡을 두고 부진한 시청률을 끌어올리기 위한 ‘선정적 편성’에서 기인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비단 이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는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 결핍과 소홀한 편성태도에서 기인한 측면도 없지 않아 보인다. 최근 들어 지상파 3사는 경쟁적으로 사극을 쏟아내고 있는데 시대배경은 전부 삼국시대나 조선시대다. 근현대사물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는 역사를 오락물로만 접근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

언제부턴가 신문에서 시대사를 다룬 연재소설이 사라지더니 뒤이어 무게 있는 역사기획물도 자취를 감췄다. 이 시대에 ‘역사’는 학교 교실에서 뿐만이 아니라 언론에서도 홀대받고 있음이 분명하다. 거기엔 정치적, 사회적 배경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언론사 내부에 역사물에 대한 배척, 두려움 같은 게 있어서가 아닐까. 친일의 역사, 독재의 역사, 나아가 가진 자, 즉 ‘갑(甲)들’의 역사를 제대로 쓰기 어려운 불편함 혹은 껄끄러움 같은 거 말이다.

▲ 정운현 국민TV 보도·편성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