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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사람들’의 친일 행적 - 장덕수동아일보 대해부 1권 - 21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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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6.23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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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장덕수

장덕수는 김성수, 송진우와 함께 ‘동아일보 3인방’이라고 부를 만한 인물이었다.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 때부터 초대 주필로 일하기 시작한 그는 1947년 12월 2일 정치적 암살을 당하기까지 김성수, 송진우와 더불어 언론계와 정치계에서 같은 노선을 걸었다.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장덕수

먼저, 장덕수가 일제강점기에 어떻게 친일행위를 했는지를 <친일인명사전>을 통해 살펴보겠다.

  1924년 4월 동아일보사 부사장 겸 주필로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이후 13년간 미국에서 체류했다. 유학 중이던 1925년에 이승만 등이 조직한 동지회(同志會)에서 활동했으며, 1928년 2월 삼일신보사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창간 이후 삼일신보사 주필 등으로 활동했다. (···)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부사장직을 사퇴했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 같은 해 12월 미국에서 귀국해 보성전문학교 강사로 재직했다. 1937년 9월 조선총독부 학무국 주최 제2차 시국순회강연회에서 황해도 지역 연사로 순회강연활동을 했다. 1938년 동아일보사 취체역에 복귀했다. 같은 해 9월, 미국 유학 중의 동지회 활동으로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돼 체포되었다가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이와 동시에 “조선민족혁명을 목적으로 한 동지회에 가입해 활동한 것이 교육자로서 무지했으므로 이에 대해 책임지고 사퇴한다”는 내용의 사직서를 보성전문학교에 제출하고 사직했다. 다음 달인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비상시생활개선위원회 제1부(의식주부) 위원에 선임되었고, 11월에 연맹 주최로 진행된 ‘시국재인식·생활쇄신을 위한 순회강연’에서 평안남도 지역 강사로 순회강연을 펼쳤다. 12월에는 경성의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YMCA)가 주최한 강연회에서 ‘비상시국과 생활개선’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1939년 친일잡지사인 동양지광사가 창립될 때 이사를 맡았으며, 같은 해 2월 <동양지광>이 창간 기념으로 마련한 강연과 영화의 밤에서 ‘전시체제 하의 산업보국’이란 연제로 강연했다. 같은 해 5월에는 전시체제 강화와 강력한 통제를 목적으로 조직된 전시 최대의 관변 통제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참사를 맡았으며, 이해 7월부터 1940년까지 연맹 기관지 <총동원>의 편찬위원으로 활동했다. 1939년 7월 사상 전향자들을 중심으로 일본정신 파악, 내선일체 강화, 사상 정화, 품성 연마 등을 목표로 한 시국대응전선(全鮮)사상보국연맹의 경성지부 제4분회장을 맡았으며, 이후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상임간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8월과 9월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주최의 ‘국민정신현양순회강연회’ 강사로 활동했고, 11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인천분회 주최의 사상강연회에서 ‘애국운 동의 의의와 현하 시국의 중대성’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다.
  1940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복귀했고, 같은 해 5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내지순례단’의 일원으로 일본 각지의 ‘성지’ 순례 및 총후(銃後) 각오를 다지는 참선 등을 하고 귀국했다. 8월 동아일보사 취체역을 그만두고 감사역에 취임해 1942년 8월까지 재임했다. 1940년 10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을 확대·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 겸 후생위원회 위원을 맡았고, 12월에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을 해소하고 사상전향 공작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조직된 대화숙(大和塾)에 참여했다. 1941년 5월 경성대화숙 회원으로 ‘부여신궁조영 대화숙근로봉사대’ 맹서식에서 봉사대 대표로 조선총독부 법무국장의 훈시에 답사했으며, 이후 약 6일간 봉사대 대원으로 조선군사령부·경성호국신사·부여신궁 등지에서 근로봉사를 했다. 같은 해 8월 삼천리사 주최로 자발적 황국신민화운동의 실천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조직된 임전대책협의회(임전대책협력회로 개칭)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같은 달 열린 결성식에서 전장에서 분전하는 황군의 노고에 감사하는 ‘감사문’을 낭독했다. 1941년 9월 흥아보국단과 임전대책협력회를 통합한 전시 최대의 민간 전쟁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0월 이사에 선임되었다. 11월 지원병 열기 고조를 위한 특별실행위원으로 경성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지원병 격려 연설을 했고, 12월 국민 총력조선연맹이 주최한 임전대강연회에서 ‘적성국가의 정체’란 제목으로 강연했다.
  1942년 1월 대화숙이 주최한 군가와 강연의 밤 행사에서 ‘미영의 취약성을 폭로한다’는 연제로 강연했고, 2월에는 매일신보사가 주최한 ‘싱가폴함락 기념 대강연회’에서도 강연했다. 1943년 9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 후생부 후생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11월에는 조선문인보국회 대표로 이광수 등과 함께 출진학도격려대회 개최에 관해 협의한 후, 같은 달 경성일보와 매일신보 주최로 열린 ‘육군지원병제실시 학도사기앙양대회’에 참가해 학병지원을 선전했다. 또 보성전문학교 학부형회에서 육군특별지원병 채용 수속에 대해 학부형들에게 설명했다. 1944년 5월 보성전문학교가 경성척식경제 전문학교로 변경된 후에도 교수로 계속 재직했다. 같은 해 9월 ‘조선에서의 노무동원’을 목적으로 조직된 민간 전쟁협력단체인 국민동원총진회의 이사에 선임되었고, 10월에는 국민동원총진회가 주최한 국민동원대강연회에서 ‘대의(大義)에 철(徹)하라’라는 연제로 “우리들은 어떠한 곤란을 당하더라도 성전 완수에 전력을 바치자”라는 취지의 강연을 했다.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 창립과 함께 명예회원에 선임되었고, 7월에는 전력(戰力)증강운동의 조직적 전개를 위해 조직된 국민의용대 조선총사령부 지도위원에 선임되었다. (<인명편 3>, 318~319쪽).


‘전시와 산업보국’

김성수가 동아일보사 사주 또는 사장, 보성전문의 교장으로서 친일 활동에 중점을 두고 신문이나 잡지를 통한 ‘문필보국’을 위해 남긴 글이 많지 않은 데 비해 장덕수는 친일하는 글과 강연을 셀 수 없이 많이 남겼다.

장덕수는 <삼천리> 1939년 4월호에 「‘전시와 산업보국」이라는 긴 글을 기고했다.

  현대산업의 그 산업에 종사하는 그 각 개인의 사사(私私)의 것이 될 뿐 아니라 국가적 사명과 사회적 중요성이 있는 것이 전시의 위기를 당하여 가장 적나라하게 발로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병사가 아무리 용맹하다 할지라도 배가 주려서는 싸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식량을 공급하는 농업의 협력을 구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식료(食料)는 충분하다 하더라도 정예한 무기가 없으면 빈주먹을 가지고 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기를 제공하는 산업의 전폭적 협력을 얻게 되는데 산업에는 과학적 발명도 필요하고 조직의 재능도 필요하며 자본가의 돈과 노동자의 힘은 물론입니다. (···) 이것이 곧 산업 총동원이요 이와 같은 총동원의 대사업을 지장 없이 원만히 진출하려면 불가불 그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즉 자본가나 종업원이 모두 일편단심 보국의 정성으로써 봉사를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곧 산업보국의 주지(主旨)이외다. 다시 말하자면 노자(勞資)가 협조하여 산업의 국가적 사명을 다하는 산업의 각 부문이 이것입니다. (·····)
  돌이켜 현하 시국을 살피건대 지나사변이 얼마나 오래 계속이 될는지 나의 천박한 식견으로는 판정할 수 없습니다. 또 제3기의 장기 건설에 들어가서 실지 전쟁이 어떠한 범위와 정도로 전개될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장개석 정권이 여전히 항일의 기치를 들고 그 배척(背脊)에 열국의 원조가 있는 이상 제국정부로서는 어디까지 서아(西亞) 신질서의 건설이 확립될 때까지는 단연코 전쟁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또 일면으로는 나날이 음악(陰惡)하여 가는 국제정국에 대응하기 위하여 군비를 확충하는 동시에 지나대륙의 경제건설을 촉진하기 위하여 물자획득에 전폭적 열력(劣力)을 경주하지 않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규모의 전쟁과 대규모의 경제공작을 동시에 아울러 행하지 아니 하면 안 되고 더욱이 최대 속도와 최소 기간 내에 성취하여야 할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난경에 처하여 가장 유효하며 그 목적을 달하는 방법은 국가 총동원입니다. (·····)
  황국 정신은 70만 동포를 모두 폐하의 적자로 봅니다. 학교에 가 있거나 군대에 가 있거나 기계를 돌리거나 뜰에서 괭이를 잡고 일을 하거나 모두 폐하의 적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모든 적자가 모두 그 곳을 얻어서 생의 은택을 누리게 하는 것이 황은(皇恩)이요 이 모든 적자가 각각 그 생업에 부지런하여 황운부익(皇運扶翼)에 노력하는 것이 적자의 도리입니다. 산업의 책임성은 이러한 도덕 위에 서는 것이며 이 도덕성이 산업계에 빛나는 때 총동원의 대사업이 원활히 진행되어야 시국 타개의 유력한 원동력이 될 뿐 아니라 앞으로 신동아 질서 건설의 아름다운 기초 돌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127~131쪽).


‘명령보다 전진 / 열성을 시범’

1940년 10월 31일자 매일신보 2면에는 「보성전문 교수 장덕수 씨 담(談)」을 전하는 기사가 실렸다.

  “직업별 민중조직을 한층 굳게 통합한 다음 이것을 국민총력연맹의 합동단위로 하는 것이 2천3백만 애국반원을 한 덩어리로 하여 일으켜질 조선의 신체제운동을 위하여 절실히 요구되는 문제일 것이다.” 이것은 11월 초하룻 날의 애국일부터 새로운 국민운동을 일으키고자 준비에 바쁜 국민총력연맹의 참사 장덕수 씨의 부르짖음이다.
  “원래가 이 국민총력운동이라는 것은 관청이나 혹은 그밖에 지도자들이 하라고 한 대서 하는 것이 아니요, 어디까지든지 민중 속에서 우러나오는 열성이 뭉치어 힘차게 일어나야만 할 것으로 이 같은 민중조직의 강화라는 그것부터도 일반 민중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있어야만 될 것이다. 이렇게 직업별로 조직계통이 세워진다면 각 조직 부문에서는 자기네 직장을 중심으로 힘써 시국을 인식하고 이에 대응할 만한 일을 연구할 것은 물론인데 연맹본부에서도 무슨 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때는 그 내용을 이 같은 민중 조직에 미리 설명하는 동시에 그들의 의견도 충분히 들어 가지고 방청을 결정하여 실행으로 옮기도록 하였으면 좋을 것이다. 이렇게만 된다면 일반 민중들도 남이 시키는 것이 아니요, 자기 자신들이 제창한 것을 실행하는 것이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게 될 것이니 이 운동이 활발하여질 것은 불을 보듯이 훤한 일이다. 한 가지 쉬운 예를 들어본다면 식량배급 같은 것도 총력운동의 일꾼인 애국반원의 자격과 양심으로 배급도 하고 배급도 받는다는 미풍을 가지고 관계자가 힘써 나간다면 모든 폐해는 없어질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 되는 것은 일반 민중 전부가 시국 내용을 연구하고 이에 대응할 진보적 태도를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식층에 속한 민간 사람들은 특히 이에 힘써 가지고 항상 민중을 지도하여 나갈 각오로써 시국문제를 자세히 연구하는 동시에 일선에 나서서 그 내용을 일반 민중에게 일깨워주고 힘써 실행하도록 선전하고 지도하는 것이 무엇보다 긴요한 일일 것이다.”


‘적성국가의 정체’

<삼천리> 1942년 1월호는 장덕수의 연설문 ‘적성국가의 정체’를 「대동아전쟁과 반도의 무장 / 결전대 연설속기록의 특집」으로 실었다. 장덕수는 1941년 12월 10일 국민총력연맹이 주최한 ‘결전대연설회’에 연사로 나섰다.

  지나사변은 완전히 끝막고 동아 천지에 공영권을 확실히 세우는 것은 제국이 중외에 선포한 회천(回天)의 대업입니다. 이 대업을 방해하는 나라가 즉, 적성국가인데 이러한 적성국가는 말할 것도 없이 이른바 ABCD의 국가군입니다. 아메리카, 영국, 지나, 난인(蘭印: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인용자)입니다. 그중에서도 지도적 지위를 점령하고 있는 강국은 영미의 두 나라입니다. 이 두 나라야말로 대일(對日) 포위진의 본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불란서도 일찍이 영미를 추종하는 나라로서 제국의 진로를 방해하는 적성 국가였지만 한 번 독일의 철퇴를 맞은 이후로는 칠령팔락(七零八落)하여 유공불급(惟恐不及)이외다. 독일과 이태리는 제국의 맹방이요 소련은 동아 정국에 관한 한에 있어서는 제국과의 중립조약을 근본 국책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가 아직도 공산주의에 입국(立國)하고 있고 대독(對獨) 결전에 있어서 영미의 후원을 절대조건으로 하고 있는 이상, 그리고 그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는 지나의 공산당이 의연히 항일전을 계속하고 있는 이상 어디까지든지 제국의 우호국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미상불 장래에 경계를 요하는 바이지만 여하튼 현하 실정에 있어서는 제국과의 중립조약을 부동의 국책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형평에 있습니다.
  그런즉 이때에 제국의 동아정책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적대성을 발휘할 수 있고 또 현실에 적대성을 발휘하고 있는 나라는 영미의 두 나라뿐입니다. ABCD진영의 그 외의 국가들과 또 장래 미국을 추종하리라고 볼 수 있는 남미의 제 소국가와 같은 것은 그야말로 개수일촉(鎧袖一觸), 족히 괘론할 것도 못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본의 적성국가로서의 영미의 정체는 어떠한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영미는 모두 세계 최대의 부를 자랑하는 부국이외다. 세계 최대의 해군을 자랑하는 강국이외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 부강의 실상 여부를 논의코자 하지 않습니다. 원래 영미가 제국의 적성국가가 되는 것은 그들이 부강한 까닭이 아니라, 그 부강을 의지하여 동아의 신질서, 나아가서는 세계의 신질서 건설을 방해하는 구세력이 있는 때문이니 나는 차라리 영미문명의 근본 이데올로기를 검토하여 그 정체를 이 방면으로부터 폭로하고자 합니다.
  첫째, 영미는 예수교 국(國)이라 칭하고 있지만 예수교 국이 아닙니다. 그와 반대의 강권국가입니다. 예수의 사랑 위에 나라를 세우고 그 도의에 의하여 행동을 규정하는 예수교 국이 아니라 한갓 세욕(世欲)에 의하여 강력 위에 선 국가입니다. (·····)
  둘째, 영미는 자유주의·개인주의 나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 도적질을 공연히 허락하는 전통을 가진 나라가 참으로 개인의 존엄을 느끼는 개인주의를 세울 수가 있으며 인격의 자유를 존중하는 자유주의를 엿볼 수 있습니다. 대개 사람의 가치를 무시하고는 도덕의 터를 닦을 수가 없고 도덕의 터가 무너진 곳에 개인주의나 자유주의의 집을 세울 수는 없습니다. 영미의 개인주의는 결국 이기주의요 자유주의는 방자주의에 불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리(天理)가 끊어진 곳에 사욕만이 춤을 추는 것이 영미의 개인주의요 자유주의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토대 위에 쌓아 놓은 것이 곧 이른바 산업주의입니다. (·····)
  (···) 자국 내에 공리주의의 문명 당초(堂礎)를 가진 영미가 밖으로 도덕의 손을 펼 수가 있습니까. 인자의 덕을 쌓을 수가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사실이 증명입니다. 동아의 열(列) 민족은 그 착하(搾下)에 피가 마르고 그 포학 하에 뼈가 굽었습니다. 인도는 어떠합니까. 말레이는 어떠합니까. 난인과 지나는 어떠합니까. 여러분, 선한 나무는 선한 열매를 맺고 악한 나무는 악한 열매를 맺습니다. 황도 일본제국의 적성국가인 영미의 정체는 이에 있습니다. (박수)

장덕수는 이 연설에서 ‘대일본제국’의 신동아 건설, 다시 말하면 중국침략전쟁을 통한 동남아시아 지배를 ‘방해’하기 때문에 영국과 미국이 ‘적성국가’라고 단정한다. 그리고 영국과 미국은 예수교 국가이면서도 실제로는 인권을 무시하는 강권국가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신국(神國)’이라고 자처하면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전체주의에 빠져 이웃나라들을 침략하는 일본은 강권국가가 아니라는 말인가?

장덕수는 “영미의 개인주의는 결국 이기주의요 자유주의는 방자주의”라고 공격한다. 이 말에 일리가 있다 하더라도, 그가 ‘제국의 맹방’이라고 부르는 히틀러와 독일과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는 그럼 어떤 나라인가? 이기주의와 방자주의조차 허용하지 않는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뜻인가? 그의 눈에는 일제 침략자들에게 인권 유린과 착취를 당하는 조선의 민중, 이른바 ‘성전’에 총알받이로 끌려 나가야 하는 조선의 청년들은 보이지 않고 먼 나라의 부정적 현실만 돋보였음이 분명하다.


‘학병을 보내는 명사의 말’

1943년 11월 22일자 매일신보 2면에는 보성전문 교수 장덕수가 자기 학교에서 ‘학병 지원 실적’이 뛰어남을 자랑하는 발언이 기사로 나왔다.

  우리 학교에서는 적격자의 거의 전부가 지원을 하였습니다. 그간 연단에서 혹은 지면을 통해서 또는 가정방문으로 지원병제도의 취지를 철저히 하는데 미력을 다하여 왔습니다만 오늘의 이 결과는 무엇보다도 지원한 당자의 불타는 애국지성의 결과라고 믿습니다. 금후 이들 학병의 활약으로 말미암아 대동아가 해방되고 또는 반도 2천5백만 민중이 황민 되는 데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생각할 때 감개무량합니다. 참으로 특별지원병제는 전 반도에 광명을 가져올 천재일우의 기회인 동시에 지난 한 달의 감격은 영원히 반도 역사에 빛날 것입니다. 앞으로 남은 문제는 이들 지원자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합격되어야 할 것뿐인데 나는 우리 반도 학생들은 군문에 들어가더라도 결코 손색없는 제국 군인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이 기회에 지원자 제군에게 부탁하는 말은 당자가 자발적으로 지원을 했거나 혹은 부형이나 학교 당국의 격려에 의한 사람이거나 일단 군문에 들어간 이상에는 한마음 한뜻으로 성심성의 힘껏 훈련에 노력하여 00에 한 몸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나는 총후에서 학도들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부득이한 사정으로 지원에 빠진 학생들일지라도 금후 더욱 황국신민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연성을 하여 빨리 동아 해방의 성전에 참가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출진하는 반도인 학우에게’

장덕수는 <반도의 빛>(조선어판) 1944년 1월호에 「출진하는 반도인 학우에게」라는 글을 기고했다.

  동아 일각에 빛으로써 입국한 제국은 지금 세계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태평양전쟁을 수행하는 최중(最中)에 있다. 전쟁은 날로 가열의 도를 더하여 바야흐로 결전단계에 돌입하고 있다. 이 중대한 시국에 반도인 학우가 부르심을 받들어 출진하게 된 것은 그 의의가 심장하여 참으로 감격에 넘치는 바이다.
  반도인 학도여, 제군은 일찍이 일본제국은 고사(枯死)하고 반도의 진퇴성쇠에 관하여 의논을 받은 일이 있으며 그 운명에 관하여 책임을 분담한 일이 있는가. 제군이 학창에 있어서 진리탐구에 몰두할 때 그것은 한갓 제군 일인일가의 의식을 위함이 아니요, 실로 천하국가의 경륜을 위함이거늘 사실은 제군의 지도자로서 자부를 허사화(虛事化)하고 제군의 경륜을 공상화(空想化)하지 아니 하였던가. 제군은 모든 일에 심각하고 최대한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 관심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제군은 부르심을 받들어 출진하게 된 것이다. 폐하의 고굉(股肱)으로서 황군의 운명을 두 어깨에 걸머지게 된 것이다. 국사에 대한 종래의 방관자적 지위로부터 일약(一躍)하여 황국의 초석이 되고 간성이 될 것이다. 일본제국은 폐하를 원수로 받드는 제군의 제국이다. 이제야말로 우리나라라는 말은 명실이 상합하게 된 것이다. 제군은 폐하의 신민인 동시에 제국을 구성하는 요원이라는 의미에서 제국의 국민이다. 이 사실을 고요히 회상할 때 우리는 끝없는 감격을 새로이 하는 바이다.
  태평양전쟁은 성전이다. 동양인의 동양의 건설전이다. 미영의 횡포를 배제하는 해방의 전쟁이요, 착취를 제거하는 공존의 전쟁이다. 정의와 자유가 인도(人道)라 할진대 그리고 인도가 인성에 입각하여 역사의 구축이 될진대 태평양전쟁은 필승불패의 성전이다. 일본민족의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영토전도 아니요 명예심을 위한 쟁패전도 아니요 참으로 팔굉위우(八紘爲宇)는 이 전쟁을 계기로 하여 신기원, 신출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전쟁에 참열(參列)하는 제군이야말로 세계사 창조의 성된 역군이라 할지니 가위 남아의 본쾌(本快)가 아니고 무엇인가.
  제군은 성심성의, 일심전력하여 황군의 진면목을 발휘하라. 반도청년의 명예는 이를 요구한다. 그리고 돌진하라. 전 세계의 역사는 이를 요구한다. 무릇 정의와 죽음은 죽어야 하는 죽음이다. 동아공영권이 이 죽음 위에 혁혁한 성과를 맺게 될 것이요 동아공영권이 확립되는 날 제군의 전정(前程)에 광명이 비칠 뿐 아니라 전 세계 역사가 신기원을 세우는 것이다.
  누가 생(生)을 버리고 사(死)를 원하리오만 인생은 필경 죽음을 면치 못하는 인생이니 생사를 관일(貫一)하는 대도에, 생사를 초월하여 사는 것만이 인생의 가치를 가장 깊이 또 크게 할 뿐 아니라 참으로 영원한 생명을 취하는 이유가 된다. 제군이 의를 위하여 피를 흘릴진대 그 죽음은 한갓 청사(靑史)에 빛날 뿐 아니라 의로 더불어 사는 신의 전(殿)에 영원한 생명의 불이 될 것이다. 제군의 출진에 신의 가호를 믿고 또한 빌어마지 아니 한다.

장덕수는 이 글에서 조선의 청년들에게 “천황 폐하의 부르심을 받들어” “제국의 운명을 두 어깨에 걸머지”고 죽음의 길로 가서 “신의 전에 영원한 생명의 불”이 되라고 외치고 있다. 1894년생으로서 당시 50세이던 자신은 그렇게 하고 싶어도 나이가 많아서 못하겠으니 젊은이들이 전쟁에 나가서 대신 죽어달라는 뜻이었을까?

이 글에서 장덕수가 특히 강조한 말들은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한 뒤 그 정반대 개념으로 바뀌어버렸다. “제국이 세계의 역사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는 태평양전쟁”은 “일제가 일본 자체와 동아시아, 그리고 미국의 일부를 참담의 극치로 몰아넣은 침략전쟁”으로 드러났고, “미영의 횡포를 배제하는 해방의 전쟁”은 ‘일본과 독일, 이탈리아를 비롯한 추축국들을 파멸에 빠뜨린 치욕의 전쟁’으로 끝장이 났다. 그 전쟁은 장덕수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일본민족의 이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영토전”인 동시에 ‘명예심을 위한 쟁패전’이었다.

장덕수는 마치 사이비종교의 교주처럼 조선 청년들을 향해 “의를 위하여 피를 흘리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주문을 읊었던 것이다.

  황해도 재령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사환 노릇을 하면서 공부해야 했던 장덕수에게 일본 유학 시절 김성수의 학자금 공여와 미국에 있던 15년간 그의 체제비 급여와 동아일보의 주필, 부사장 예우를 해주었던 김성수의 호의가 끝내 그로 하여금 김성수를 위하여 친일매국의 길을 자청하게 하였는 지 모른다. 여하튼 그의 성망(聲望)이라는 것도 그리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일제하 민족언론사론>, 3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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