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언론역사 조선동아 대해부
‘동아일보 사람들’의 친일 행적 - 김성수동아일보 대해부 1권 - 21장(1)
  • 관리자
  • 승인 2021.06.16 10:34
  • 댓글 0

‘국민주주’를 모아 주식회사로 출발한 동아일보사가 김성수 일가의 사유물로 바뀐 과정은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2014년 현재까지 동아일보사 경영권은 1대 김성수, 2대 그의 장남 김상만, 3대 김상만의 장남 김병관, 4대 김병관의 장남 김재호의 차례로 세습되어 있다.


1) 김성수

실질적인 창업주 김상만은 비상한 시기 말고는 동아일보 경영의 전면에 나서거나 노골적인 친일에 앞장서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의 중국침략전쟁이 본격화하면서 그는 적극적으로 친일 대열에 합류했다.


친일인명사전에 나온 김성수의 행적

먼저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되어 있는 김성수의 친일 행적을 보기로 하자.

  (···) 1935년 3월 “조선문화 향상을 위해 도서출판의 진흥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설립된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의 관장 겸 이사로 추대되었다. 1935년 11월 경기도청의 주도로 “경기도내의 사상선도와 사상범의 전향 지도 보호” 목적으로 조직된 소도회(昭道會)의 이사에 선임되었다.
  1937년 (···) 7월에 일어난 중일전쟁의 의미를 널리 확산시키기 위해 마련된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시국강좌를 7월 30일과 8월 2일 이틀 동안 담당했다. 같은 해 8월 경성군사후원연맹에 국방헌금 1000원을 납부했다. 같은 해 9월 학무국이 주최한 전조선시국강연대의 일원으로 춘천·철원 등 강원도 일대에서 시국강연에 나섰다. 1938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발기에 참여하고 이사를 맡았다. 같은 해 8월 경성부 방면위원,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주최한 비상시국민생활개선위원회의 의례 및 사회풍조쇄신부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39년 4월 경성부내 중학교 이상 학교장의 자격으로 신설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참사를 맡았다. 1941년 5월 조직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 및 평의원을 지냈다. 같은 해 8월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위원 및 경기도 위원을 지냈다. 이어 9월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에 참여하고 10월에 감사로 뽑혔다. 1941년 조선방송협회 평의원과 조선사회사업협회 평의원도 겸했다.
  조선에서 징병제 실시가 결정되자 1943년 8월 5일자 매일신보에 「문약(文弱)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 기풍을 조장하라」는 장병격려문을 기고했다. 이 글에서 징병제 실시로 비로소 조선인이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으로 되었다면서 지난 5백년 동안 문약했던 조선의 분위기를 일신할 기회를 얻었다고 주장했다. 이어 상무 기풍을 조장하여 문약한 성질을 고치기 위해서 인고·단련할 것을 청년들에게 요구했다. 그리고 이를 실천할 지름길로서 ‘황국신민의 서사’의 정신을 온몸으로 체득할 것을 당부했다. 10월 20일 조선에 학도지원병제가 실시된 이후 보성전문학교의 지원율을 높이기 위한 각종 활동에 나섰다. 같은 해 11월 6일 매일신보사가 주최하는 ‘학도출진을 말하는 좌담회’에 참석하여 지원율이 저조한 이유를 조선인의 문약한 성질에서 찾았다.
  1943년 11월 7일자 매일신보에 「대의에 죽을 때 황민 됨의 책무는 크다」라는 글을 게재했다. 이 글에서 “의무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독려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무는 “대동아 성전에 대해 제군과 반도 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로서, 살아오면서 받은 국가·가정·사회의 혜택에 보답하는 것이다. 만약 학병에 지원하지 않아서 ‘대동아 건설’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제국의 제일분자로서 ‘내지’와 조금도 다름없는 대우, 곧 권리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게다가 권리를 주장하여 의무를 지는 서양과 달리 동양은 의무를 다함으로써 필연적으로 권리가 생기는 것임을 강조했다. 일본인은 3000년 동안 의무를 수행하여 권리를 얻었지만 조선인은 단시일이라도 ‘위대한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일본인의 오랫동안의 희생에 필적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의무는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 곧 죽을지도 모르는 학병에 지원하는 것이었다. 11월 20일 학병지원 마감일을 맞아서는 경성일보에 학병 미지원자는 모두 원칙대로 징용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12월 7일에는 학병들이 남아 있는 가족 걱정으로 전투할 때 지장을 받지 않도록 후방에서 군인원호사업에 힘쓸 것을 강조했다. 12월 10일 징병검사를 맞이하여 매일신보에 ‘학병을 보내는 은사의 염원’을 밝히면서, 한 사람도 주저함이 없이 ‘광영스러운 군문으로 들어가는’ 징병검사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12월 17일 보성전문학교의 학도지원병 예비군사학교 입소식에서 “제군은 세계 무비의 황군의 일원의 광영을 입게 되었으니 학도의 기분을 버리고 군인의 마음으로 규율 있는 생활을 하라”고 훈시했다(<인명편 1>, 425~426쪽).


‘문약을 버리고 상무 기풍 조장하라’

김성수는 호남의 대지주 가문 출신으로 일찍이 ‘농업자본의 산업자본화’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경성방직주식회사, 중앙상공주식회사, 해동은행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김성수는 주식회사 동아일보의 실질적 소유주인 동시에 중앙고등학교와 보성전문학교의 교주이기도 했다.

  (···) 조명모리(釣名謨利)에 능하며 표면에 장구(長久)한 양명(揚名)을 불리하다고 보았던 김성수는 “내 평소의 성격이 무슨 일에든지 옆에 있어서 1개의 조언자가 되기를 좋아하여 직접으로 그 국(局)에 당하는 것은 즐기는 바가 아닙니다”라고 스스로가 말했듯이 동아일보엔 송진우를, 보성전문에는 장덕수를, 경성방직에는 동생 김연수를 총독부 앞에 내세워, 직접 나서지 않던 인촌도 그를 싸고 있던 동아일보가 없어지고 일제가 명사들에 대한 친일행각을 집요하게 강요하게 되자 별 수 없이 일선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
  (···) 폐간 후 그가 보여주는 각종 징병 권유의 글들이나 국민총력조선연맹, 흥아보국단 등 전쟁협력단체에 임원으로 참여하고 명사들의 각도 순강(巡講) 연사로서 활약한 것을 <인촌 김성수전>에 씌어져 있는 대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맹랑한 조작으로만 볼 수 없음이 유감이다. 왜냐하면 인촌의  “왜 성전에 나서지 않느냐”는 질타의 목소리는 해방 후 좌익에서 일제에 협력하였다고 떠들어댄 유일한 증거라고 <인촌 김성수전>에서 예기(例)記)한 그 담화 한 편만이 아니고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 기풍 조장하라」 제목의 10단 내리닫이 기사를 비롯하여 여러 편을 발견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일제하 민족언론사론>, 329~330쪽).

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에 실린 「문약의 고질을 버리고 상무 기풍 조장하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자(玆)에 조선 징병령 감사주간에 당하여 소감의 일단을 들어 삼가 반도 청년 제군의 일고(一考)를 촉(促)코자 한다.
  작년 5월 8일 돌연히 발포된 조선에 징병령 실시의 쾌보는 실로 반도 2천 5백만 동포의 일대 감격이며 일대 광영이라 당시 전역(全域)을 통하여 선풍 같이 일어나는 환희야말로 무엇에 비유할 바가 없었으며 오등 반도 청년을 상대로 교육에 종사하는 자로서는 특히 일단의 감회가 심절(深切)하였던 바이다. (···) 그런데 이 징병제 실시로 인하여 우리가 이제야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의 자격을 얻게 된 것은 일방으로 전 반도 청년의 영예인 동시에 반천년 문약의 분위기 중에서 신음하던 (···) 모든 병근(病根)을 일거에 쾌치(快治)하고 거일(去日) 생신(生新)할 제2의 양질(良質)을 여는 것이다. 어찌 반갑지 아니 하며 어찌 감격치 아니 하리요. 하고(何故)냐 하면 상술한 문약의 고질을 치료함에는 오직 상무의 기풍을 조장함이 유일무이의 양약인 까닭이다.
  그러나 여하한 능라주단이라도 차(此)를 재지봉지(哉之熢之)하여 의상을 만들어 착용치 아니 하면 금수(錦繡)의 가치가 없을 것이요, 아무리 기효(奇效)를 주(奏)할 양약이라도 이를 전지환지(煎之丸之)하여 복용치 아니하고는 필경 그 실효를 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이 징병제 실시의 이 영예를 청년 제군은 여하히 적용하며 이 양약을 여하히 복용하여 외관으로나 내용으로나 그 실효(實效) 실예(實譽)를 완전히 현양하려는가. 무릇 의외의 영예가 돌아올 때에는 그 영예의 소종래(所從來)를 잘 생각하여 그것을 완전 향수할 준비가 없지 못할 것이며 양약이 입수되었을 때에는 먼저 잘 조리 복용하여 완전히 효험을 발휘케 할 연찬(硏鑽)이 없지 못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오인은 금후 제군에게 일단(一段)의 인고와 일층의 단련을 요청하는 바이다. 그러면 이것을 실천할 첩경은 어디 있으며 비방은 무엇인가.
  오인은 이제 새삼스럽게 제군에게 지교(指敎)할 것도 없이 4~5년 이래로 우리가 일석(日夕) 제송(齊誦)하는 황국신민서사를 한 번 다시 되풀이하고자 한다.
  (1)아등은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써 군국(君國)에 보(報)하자.
이 조(條)는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생존 목표를 달(達)하는 대관절(大關節)이다. 특히 조선청년은 누구보다도 먼저 이 목표를 확정함으로써 제일 주장을 삼는 것이다. 이 목표가 확정됨으로부터 만상(萬象)이 정시(正視)되고 군의(群議)가 해소되는 것이다.
  (2)아등 황국신민은 서로 신애(信愛) 협력함으로써 단결을 굳게 하자.
  이 일절이야말로 종래 우리 조선인의 정문(頂門)의 일침(一針)이다. 우리 종래의 모든 결점이 오로지 호상 신애 협력을 못하는 것과 그 결과로 10인 10색, 100인 100색인 기(幾)로 단결이 되지 못하는 바 있었던 것이다. 폐일언하고 인간은 일종의 집단 동물이다. 집단의 위력을 발휘치 못한다면 그 실력이 저 봉의(蜂蟻)에게도 멀리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 집단이 즉 단결이요, 단결이 되려면 그 분자 분자가 호상 신애 협력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신애 협력을 지분(肢分) 절해(節解)하여 설명하려면 기천권 수신서로써도 부족할는지 모르나 간명 적절히 말하면 손쉬운 방법으로 우리 일상 경송(敬誦)하는 교육칙어의 일절을 봉서(奉書)해 보자.
  “부모에게 효하고 형제에게 우(友)하고 부부 상화(相和)하고 붕우(朋友) 유신(有信)하라.”
  이 일절 중에 소위 신애 협력의 전부가 포함된 것이다. 여기에 특히 ‘충군(忠君)’ 2 자는 표시되지 아니 하였으나 기실 효도 충군의 일단이요, 우도 충군의 일단이요, 화신(和信)도 그러하다. 신민이 모두 호상 신애 협력하여 단결을 굳게 하였다가 일단 완급이 있으면 의용봉공(義勇奉公)하는 것이 충군의 지상(至上) 방법이며 우리 생활의 의미가 전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즉 자(子)가 되어서는 자의 직(職)을 다하고 형제간에는 형제의 책(責)을 다하고 부부 붕우가 각기 그 소처(所處)의 직책을 다하는 것이 곧 신애 협력의 요체이다.
  (3)아등 황국신민은 인고단련을 양(養)함으로써 황도(皇道)를 선명(宣明)하자.
  금은주옥도 차(此)를 단련 조탁(彫琢)치 아니 하면 일개 토석(土石)에 불과하고 교목(喬木) 거재(巨材)도 차를 승연(繩硏) 부단(剖斷)치 아니 하고는 고루거각의 동량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위인성자의 소질이 있다 할지라도 인고단련이 없이 생지천성(生知天成)은 바라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면 1도 인고단련이요, 2도 인고단련이다. 저 금옥이 열화(熱火) 중에 용해되며 철석(鐵石)으로 조탁될 때에 그 고통이 여하하였으며 저 동량이 탁지단지(拓之斷之) 준지부지(準之斧之)할 때에 또한 얼마나 고통을 받았으랴. 그 온갖 고통을 인내하였으므로 만인이 경앙(景仰)하는 동량이 되며 진중(珍重)하는 금옥이 되지 않는가. 인간도 또한 절대적이므로 이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 같이 인고단련을 쌓아 완전 차(且) 위대한 신민이 됨으로써 황도를 양(揚)하는 것이 곧 오등의 최종 목적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상의 이론이야 누가 모르리오만 금후의 성과는 오직 이상 서사의 심송(心誦) 체행(體行)에 달렸음을 다시 한번 강조하여 자타의 경성(警醒)에 공(供)코자 한다.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김성수는 1943년 11월 7일자 매일신보 1면에 「학도여 성전에 나서라 / 대의에 죽을 때 황민 됨의 책무는 크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내가 지금 새삼스레 여기서 더 말할 것도 없이 항상 교단에서 혹은 시시로 청년학도 제군에게 늘 말하여 온 바이지만, 제군은 학창에서 지적 수련에 노력하는 한편 굳센 윤리적 연마에 힘써 왔다. 교육은 이 두 가지 방면으로부터 제군을 완전한 인간으로 만들어 올리는 것이다. 더구나 현재와 같은 신질서가 건설되는 시대에 있어서는 윤리적 방면이 일층 더 고조되어야 할 것은 제군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평소부터 자주 제군에게 말하여 온 나의 생각을 제군의 출진을 앞둔 오늘날 다시 말하고자 한다. 이를 한마디로 말하면 “의무를 다하라”는 데 그칠 것이다. 의무를 위하여는 목숨도 아깝지 않다고 나는 늘 말하여 왔거니와, 지금이야말로 제군은 이 말을 현실에서 몸으로써 실행할 때가 온 것이다.
  물론 제군은 말로 쉽사리 목숨을 바치라 운운하는 나나, 또는 다른 선배들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심경에 있을 것을 나는 잘 안다. 어제 아침에도 제군을 모아놓고 교단 위에서 제군의 그 수많은 시선을 바라볼 때, 나는 다만 말로써는 표현키 어려운 엄숙한 감격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종사해 온 교육자의 양심에서 말한다. “제군아, 의무에 죽어라”고. 내가 이렇게 한마디 최후의 부탁을 제군에게 하더라도 물론 제군은 이 말을 아무런 회의도 반문(反問)도 없이 솔직하게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제군은 일반 국민보다는 지적 수준이 높은 만큼 어떠한 명제에 대하여서라도 일체 마음의 반문을 하는 것도 당연하다. 더구나 오늘과 같이 제군이 대사일번(大死一番)의 신념만이 다른 어떠한 결의보다도 요지부동의 것일 것을 나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의무를 위하여 목숨을 바쳐라” 하는 나의 말에 대하여 제군은 당연히 어떠한 의무인가를 명시하라고 할 것이다. 나는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서 소중한 제군을 제군의 부모로부터 훌륭한 완성된 인간으로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자로서 조금도 허위와 양심에 없는 말을 할 수는 없다. 이러한 중대 책임을 가진 나는 이곳에 대담 솔직하게 말하려 한다. 현하 우리가 당면한 의무라고 하면 제군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새로운 여명을 맞이 하여 인류 역사에 위대한 사업을 건설하려는 대동아 성전에 대한 제군과 우리 반도 동포가 가지고 있는 의무인 것이다.
  제군은 이 땅에 생을 받아 이때까지 그만한 인간으로서의 자질과 품격을 갖추기까지는 가지가지 은택(恩澤)을 입고 있다. 국가와 가정과 사회의 은택은 모두 이것이다. 이러한 지나간 날의 은택이 제군에게 각자가 그 의무를 다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또 이보다 훨씬 더 위대하고 무거운 의무는 미래에 대한 의무일 것이다. 만일 제군이 금차 대동아 성전에 치참(馳參)치 못하고 대동아 신질서 건설이 우리의 참가 없이 완수된 날을 상상하여 보라. 우리는 대동아에서 생을 받았으면서 썩은 존재로서 이 역사적 시대에 영원히 그 존명(存命)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제군은 비록 이 성전의 전열로부터 빠져나와 개인의 조그마한 생명을 보전하고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제군의 뒤를 이어 이 땅에 생을 받은 제군의 동생과 누이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제군은 실로 반도의 미래에 대한 절대(絶大)한 의무를 지고 있다.
  나는 생각하건대 제군의 번뇌가 현재 이 점에 부딪쳐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순간은 제군의 그와 같은 번민과 반문을 무시하고 각일각 추진되고 있다. 대동아의 건설은 제군의 사소한 존재를 돌아볼 사이도 없이 매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매진 앞에 제군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잃어버리고 그로 말미암아 반도가 이에 뒤떨어질 때 우리는 대동아 건설의 1 분자는 그만두고 황민으로서 훌륭히 제국의 1 분자가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제군이 위에 말한 의무를 다할 때 비로소 제군은 제군이 이 땅에 살아 있을 것이고 제국의 1 분자로서 내지와 조금도 다름없는 빛나는 대우 즉 권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보통 권리와 의무를 논할 때 서양에서는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의무를 지는 것이지만 동양에서는 고래로부터 의무를 다하는 데 필연적으로 권리가 생기는 것이다. 나는 우리가 황민화를 고창하여 온 이래 제군이 자주 자신의 황민으로서의 권리를 일반 사회에 대하여 요구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하면 일본은 3천년이라는 오랫동안 금일의 제국의 광영을 빚어내는 데 온갖 의무를 수행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는 겨우 그동안 30년밖에 안 된다. 3천년과 30년의 차이를 가지고 권리에 있어서 평등을 요구할 수 있을까. 이것은 제군이 권리만을 주장하는 서양인의 학설에 현혹된 잘못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한 바가 있다. 의무의 수행에 있어 시간의 장단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의무의 대소는 시간의 축적에 있지 않고 의무 자체의 성질에 있다. 우리는 단시일일지라도 위대한 의무를 수행함으로써 내지인이 오랫동안 바쳐온 희생에 필적할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까. 이 임무를 수행할 절호의 기회가 지금 이 순간에 우리 앞에 열려진 것이다.
  제군의 희생은 결코 가치 없는 희생이 아닐 것을 나는 제군에게 언명한다. 제군이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으로서의 자격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니 반도의 미래는 오직 제군의 거취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을 쓰던 때 보성전문학교 교장이던 김성수는 ‘교육자’임을 특히 강조하면서 대학이나 전문학교에 다니는 청년들에게 “성전에 나서라”고 ‘독려’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권유가 아니라 강요나 다름없었다.

김성수가 여기서 펼치는 주장은 “황국신민의 의무를 다하다가 자랑스럽게 죽어라”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일본의 역사까지 왜곡하고 있다. “일본은 3천년이라는 오랫동안 금일의 제국의 광영을 빚어내는 데 온갖 의무를 수행하여 왔다”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신화시대까지 합쳐도 2600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 일본의 역사를 3천년으로 부풀려, 마치 그 기나긴 세월 일본의 군주와 관리들, 그리고 이름 없는 백성들이 하나 같이 ‘제국의 광영’을 빚어내기 위해 일심동체가 된 듯이 과장하고 있다. 게다가 김성수는 조선의 역사를 일제의 병탄 이후 30여년으로 축소했다. 침략자들의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던 시기만을 ‘조선사’로 보는 억지를 부린 것이다.
김성수는 이 글을 쓰던 무렵 고등교육을 받고 있던 자기 아들들에게도 “너희의 희생은 결코 가치 없는 희생이 아닐 것”이니 “너희가 생을 받은 이 반도를 위하여 희생됨으로써 이 반도는 황국으로서의 자격을 완수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을까?


‘학병을 보내는 은사의 염원’

서울에서 발행되는 일본어신문인 경성일보 1943년 11월 20일자 1면에는 김성수가 “우리의 완승을 목표로 하는 연락과 격려를”이라고 말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미지원자에 대해서는 목하 연락·격려 중이다. 반도인은 이조시대에는 무관을 극력 경멸하여 오히려 천민층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번의 지원제에도 부형 측에서는 망설인 사람도 있었던 듯하다. 만약 한 명이라도 지원에서 빠지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원칙으로서 징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는 학무국의 지시가 있을 것이므로 우리들로서는 그것에 따를 뿐이다.
  학교 경영방침의 변경은 지난번 총독 각하의 훈시에서 보여준 대로 문과를 이과계로 전환할 것인가, 혹은 문과계와 문과계 동지(同志)의 통합으로 할 것인가, 이 또한 학무당국의 지시에 따라서 이행한다. 그러나 완승을 목표로 멸적(滅敵)의 투혼에 불타는 철 같은 오체(五體)의 청년 육성이 근본 요체가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43년 12월 7일자 석간 2면에는 「절대로 협력」’이라는 제목 아래 김성수가 발언한 내용을 전하는 기사가 실렸다.

  멀리 전선에 용약 출전한 군인들이 만일 그 사투가 감행되는 결전장에서 고향에 남아 있는 외로운 어머니나 또는 아내의 일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 이것이 곧 전투에 영향 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총후에서 상이장병들을 위하여 또는 출정 유가족을 위하여 행하는 원호사업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이다. 이번 학병들이 출진함에 당하여 신문을 통하여 보더라도 가정 사정이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용약 출진을 결행한 학도들의 수효가 적지 않은 모양이다. 이러한 학병들을 위하여 또는 징병제 실시에 따라 금후 출정할 반도출신 장병들을 생각할진대 군인 원호 역시 한층 확대 강화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인데 이번 조선금융단에서 20만원을 제공한 것은 일대 쾌사가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이 사업의 중요성을 더욱 인식하고서 원호사업에 절대 협력하여야 할 것을 더욱 각오할 것이다.

12월 10일자 매일신보 석간 2면에 실린 「학병을 보내는 은사의 염원 / 이 시대 최고의 광영 빛나는 조선청년의 특권을 살리라」는 기사 내용은 김성수가 학병으로 나가려고 ‘검사’를 기다리는 청년들에게 ‘스승’으로서 보내는 격려와 축하의 말이었다.

  생각하면 이 시대의 최고 광영은 젊은 청년과 학도들에게 있다. 나라의 흥륭을 결하는 결전의 마당으로 총을 메고서 돌격하는 그 열화와 같은 조국애와 동포애는 오직 젊은이들만이 가장 힘차게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이제 광영스러운 군문으로 들 수 있는 ‘검사의 날’이 우리 학도를 맞이하게 되었다. 궐연히 발분하여 학병을 지원하는 원서를 내고 이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우리 학도들의 가슴은 숭고스러운 공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날이 밝으면 각 검사장엔 태양이라도 정복하려는 기세로 찬 젊은 학도들의 약동하는 육탄군상을 볼 수 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그들이 전부 ‘갑종’으로 합격하기를 축수하는 바이다.
  지원한 학도들은 잘 알고 있겠지만 원서를 내던 그 순간에 가졌던 각오와 전심은 원서 내민 것만으로는 아무 가치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고 군문에 드는 첫 관문은 검사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혹이나 지정된 검사일에 검사를 받지 않을진대 그가 어떻게 위대한 조국애를 소유하였다 하더라도 다 못할 뿐으로 그 각오, 그 결의는 영구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이다. 지정된 검사일에 여러 가지 사정이 있어 지장이 생길는지 모르나 이 위에 더 중대하고 긴급한 일이 어디 있을 것인가. 한 번 길이 열린 이 ‘순국의 대도’에 시종여일하게 돌진함으로써 학도의 머리에는 최대의 광영이 길이 빛날 것이다. 나는 검사장으로 나아가는 학도들의 빛나는 금후 활약을 (···) 축원하고 싶다.

김성수는 학병 지원자들이 “지정된 검사일에 검사를 받지 못”하는 일이 벌어질까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그런 일이 생기면 “대일본제국을 위해 순국의 대도”로 ‘돌진’할 기회를 놓치게 되리라는 것이다.


‘인촌 김성수전’이 주장하는 ‘매일신보의 왜곡·조작’

김성수가 1943년에 조선의 청년들을 일제의 총알받이로 내모는 데 앞장섰음을 보여주는 매일신보 기고문과 그의 발언을 전한 기사들에 대해 <인촌 김성수전>은 왜곡이거나 좌익세력의 날조라고 주장했다.

  일본은 1944년부터 실시하려던 조선징병령을 1943년 8월 1일자로 단행하여 12월부터 우리 장정들을 그들의 군문에 징집해 가는 한편 동년 10월 20일에는 갑자기 특별지원병제라는 것을 공포 실시하여 조선의 모든 전문대학교생들을 전쟁에 내몰게 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학도병 또는 학병이라는 것이다.
  처음에 일제는 사상이 불온한 학생 등은 제외하기로 하였으나 자진해서 지원하는 자는 전무했기 때문에 방침을 변경해서 모조리 끌어가기로 하였다. 이에 신문 잡지 방송을 최고도로 활용함은 물론, 그들의 행정력을 동원해서 갖은 협박 공갈로 지원을 강요하고 듣지 않으면 체포 구금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이와 병행하여 지도자들을 동원하여 각처에서 강연회를 열고 이른바 학도 출진을 권유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런 광란을 보고 인촌은 전곡농장에 내려가 병을 핑계로 세상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한 번은 칭병(稱病)이 통하지 않아 억지로 춘천에 끌려갔다. 연단에 오르기는 했으나 인촌은 단 한마디만 하고 내려왔다.
  “이 사람은 대중 앞에서 연설할 줄 모르기 때문에 다음에 나와서 하는 사람의 말을 이 사람이 하는 말과 같은 것으로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에 나오게 된 사람은 장덕수였는데, 두 사람 사이에는 미리 그렇게 하기로 되어 있었다. (·····)
  그런데 학도병들이 끌려가서 입대한 이틀 후인 (1944년-인용자) 1월 22일자 매일신보에 ‘보전 교장 김성수 담’이라 하여 「징병이 닥쳐왔다. 군인 원호사업에 한층 분발하자」라는 제하의 기사가 실린 것이다.
  매일신보는 우리말로 발행되는 유일한 신문인 동시에 총독부 기관지로 허위와 왜곡을 일삼는 그들의 꼭두각시였다.
  이러한 매일신보의 기자가 계동으로 찾아와서 “다음은 선생님의 차례”라면서 제자들을 학병으로 보낸 학교장으로서의 감격을 써달라고 한 일이 있었다.
  “아시다시피 나는 글을 쓸 줄 모르오.”
  “이것은 신문사의 청탁이 아니고 총독부의 지시올시다. 꼭 써주셔야 합니다.”
  “총독부의 지시라고 없는 재간이 생겨나겠소?”
  글을 받아내지 못한 기자는 몇 마디 말씀이라도 해달라고 졸랐다. 말도 할 줄 모른다고 할 수는 없는지라 인촌은 그가 묻는 대로 한두 마디 대답했다. “조선의 청년들이 전장에 나가게 된 것은 현실적 사실이 아닙니까?”
  “그렇지요.”
  “뒤에 남은 우리들은 그들의 가족을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와야지요.”
  내용은 이것뿐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장황하게 각색되어 다음과 같이 지면에 나타났으니 그들의 맹랑한 조작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요즘 한결 같은 순충(純忠)의 마음으로써 군문에 들어간 우리 학병들의 전도는 승리와 광명이 있을 뿐이다. 이제 대망의 징병이 실시됨에 따라 우리는 학생이 없는 가정이라도 적령기의 청년남아를 가진 집에서는 모두 이 며칠 동안 반도 전역이 감격으로 전송하는 장쾌한 병역의 성사(盛事)를 보게 될 것이다. (···) 당국에서도 일찍이 ‘군인원호회 조선본부’를 두고 각도에 지부 분회를 설치하여 각종 사업으로써 유가족의 직업 보도(輔導) 또는 의료 교육 등 각 방면으로 원호의 손을 뻗치고 있기는 하지만, 반도에서 군인들이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이 원호사업도 더 확충하여 가야 할 것이고, 이러한 사업이야말로 반도 민중이 다함께 키워 나아가도록 힘써서, 싸우는 반도의 책임을 완전히 수행하도록 할 것이다.”

  (···) 인촌은 이 엄청난 조작에 분개했으나 상대가 총독부 기관지라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총독부 관리들은 이것도 크게 불만이었다. “지금이 어느 때라고 한다는 소리가 겨우 이것뿐이야” 하는 것이었다. 뜻있는 독자들은 또 그들대로 “인촌이 이런 말을 했느냐”고 실망이었다. 그렇다고 일일이 변명할 수도 없는지라 인촌은 이럭저럭 괴롭고 난처했다.
  이것이 해방 후 좌익에서 인촌이 일제에 협력했다고 떠들어댄 유일한 증거로 이용되었고, 그들은 이것을 영문으로 번역까지 하여 외국인들에게 배부하기도 하였던 것이다(431~434쪽).

<인촌 김성수전>에는 김성수가 1943년 8월 초부터 학도병과 관련해서 매일신보에 기고한 글과 기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단 한 건, 1949년 1월 22일자 매일신보가 조작한 기사가 있을 뿐이고, 그것도 해방 후에 좌익세력이 그를 ‘친일분자’로 몰아세우는 데 이용한 유일한 증거라는 주장만 하고 있을 뿐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저작권자 © 자유언론실천재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