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재 재단 편집기획위원이 최근에 4년여간 재직했던 신문사를 떠나면서 남은 기자와 구성원들에게 남겼던 글을 소개합니다. 이 위원은 내부 구성원들에게 남긴 글을 공개하는 것을 꺼렸지만, 이것이 단지 한 개인, 한 신문사를 넘어 우리 언론계에서 함께 돌아보고 고민해야 할 문제들을 제기하는 ‘공(公)적’인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공유하는 게 좋겠다는 재단측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약간의 수정작업을 거쳐 재단에 원고를 보내왔습니다. -편집자 주

이번 달(3월) 말이면 4년여 간 몸담았던 신문사를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이번 주 사직 휴가를 떠나면서 이 신문의 구성원으로서의 저의 신분은 사실상 이미 종료됐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 특히 친하게 지내던 회사 뒤편 식당 부부 사장님께 앞으로 자주 못 오게 됐다고 하니 그분들은 눈물을 보이시고, 저도 눈가가 촉촉해졌습니다. 일터뿐만 아니라 이 서울 도심의 인정 넘치는 동네에 제가 그렇게나 정이 들었나 봅니다.

그러나 제가 다소 갑작스런 - 제가 모르는, 갑작스럽지 않은 사정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퇴사를 맞아 우울하거나 가라앉아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직장이라는 새장, 안온한 울타리이지만 아니 안온한 보호막이어서 감옥이기도 한 그 새장에서 벗어나게 돼 자유와 해방감에 적잖이 고양돼 있습니다. 아직 구체적으로 뭘 할지는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뭔가 새로운 도전을 해 볼 수 있는 새출발의 계기를 얻었다는 점에서 마음이 무척이나 설레기까지 합니다. ‘바람은 딴 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는 김수영 시인의 시구처럼 생각지 않게 선물을 받은 듯한 감사의 마음까지 갖게 됩니다.

다만 이 자유가 방외인으로서의 무책임으로 비쳐질까 조심스러운데, 그러나 앞으로도 저는 신문사 밖의 논설위원(혹은 농설위원)으로서, 언론 밖의 언론인으로서, 언론이 아닌 다른 어떤 곳에 가 있더라도 ‘더 큰 신문사’의 일원으로서, 우리 신문에 대한 소속감을 늘 현재화하려고 합니다.

제가 지금 이 글을 쓰는 것은 자신이 몸담았던 조직, 특히 언론이라는 공적인 일을 수행하는 기관에서 일했던 이로서의 설명 책임, 자기평가 책임을 최소한으로 감당하려는 마음에서입니다. 이는 작년 말 이후 제가 공개적으로 말과 글을 통해 얘기하려고 했던 것의 연장선상이기도 하며 남은 이들에게 남기고 싶은 당부이기도 합니다. 이는 공물(公物)로서의 언론의 직업인으로서 지난 4년여 간의 한 결산이기도 합니다. 그 4년간 나는 무엇을 얻었는가, 무언가를 남겼다면 무엇을 남겼는가를 돌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의 이 글은 남에 대한 요구 이전에 회사를 좀 더 건전하게, 견실하게 만들어내지 못한 책임의 일단에 대한 자책에서 출발합니다. 이 글은 답변이나 결론이 아니라 질문이며 그 질문은 남에게 향한 것이기보다 먼저 저 자신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읽기를 바라기보다는 함께 생각하기를 요청 드리는 것입니다.
저의 질문은 이 일터에 대한 우리의 애정이 던지는 요구이며, 사회적 공기라고 하는 언론에 몸담고 있는 직업인으로서의 자문이며, 우리의 미래를 위해 함께 풀어야 하는 숙제이며, 우리 신문에 성원과 기대를 보내고 있는 독자와 언론소비자들의 기대와 요청에 대한 답을 묻는 것입니다.



지난 4년간의 이곳에서의 저의 자취를 돌아보며 우리 신문과의 인연, 그 생각지도 못했던 인연에 대해 생각합니다. 처음 그 인연을 맺었던 순간은 저의 삶에서 분명 ‘결정적 순간’, 사진가 브레송이 말한 것과 같은 ''결정적 순간’들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신문이 한국의 언론에서 전례 없는 과정을 거쳐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 신문으로 발전해 온 과정, 사원들의 일치된 의지로써 부당 경영을 바로잡고 사원들 자신의 신문사로 만들어낸 동료들에게서 느껴지는 매우 특별한 애사와 자긍심, 중도 합리적인 논조로 나름 상식과 양식을 지키려 하면서 성장을 달성해 온 역사. 제게 우리 신문은 언론의 후발이지만 한 선도를 보여준 것이었고, 진심을 다해 다닐 만한 한 일터를 이룩한 것이었으며, 오늘보다 나은 미래에의 희망을 제시해 준 것이었습니다. 안으로는 구성원들의 애정과 자부를, 밖으로는 사회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았습니다.

우리 신문의 급성장은 많은 이들이 경탄하는 것입니다. 그건 4년여 전 제가 이 신문에 처음 들어왔을 때 며칠간 이 신문에 대해 알게 되면서 신선한 충격과 기대가 점증했던 기억과도 겹칩니다.
우리 신문은 매우 특별한 성장과 발전을 해 왔습니다. 아마 기성 미디어 시장의 견고한 장벽을 뚫고 들어와 이렇게 짧은 시간에 상당한 위상을 확보한 매체는 최근의 우리 언론사에서 매우 희귀한 사례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같은 급성장의 비결,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인터넷 환경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기민함이 큰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한 이유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다른 많은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 미디어권력을 이용한 일방적인 ‘영업’ 행태들이 횡행하는 언론-특히 경제지- 시장에서 무리한 행태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 논지의 중립성과 논설의 중도·합리성, 신생 매체로서의 패기와 투지 등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 아니 그것 아니면 다른 많은 것들이 제대로 설명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6년 전 사원들의 힘으로 부실 경영을 바로잡고 주체적인 힘으로 회사를 정상화시킨 것. 그것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우리의 신문’을 지키고 키워왔다는 경험이 주는 자부심과 긍지일 것입니다. (물론 저는 이미 회사가 제대로 정상화된 뒤에 들어온 무임 승차자입니다만)

저는 지인들에게 우리 신문을 주목해 달라고, 응원해 달라고, 한 의미 있는 언론의 성장과 발전을 애정으로 지켜봐 달라고 제가 만나는 이들에게 부지런히 얘기했습니다. 저로서는 10여 년 전에 떠났던 예전의 신문사에서의 마지막 몇 년간 잃어버렸던 신명과 보람을 다시 찾게 해 준 시간들이었습니다.

제가 지나치게 우리 신문을 이상화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신문에는 열 개의 얼굴, 백 개의 얼굴이 있습니다. 그 얼굴들에는 명과 함께 암도 있으며, 그래서 가리고 싶은 면모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새로운 언론으로서의 발전의 맹아(萌芽)를 우리 자신과 사회 앞에 보여줘 왔습니다. 새로운 언론-특히 또 하나의 경제지가 아니라 ‘다른’ 경제지에 대한 사회적 요청에의 응답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성장 가능성과 잠재력에서 다른 어느 신문이 갖지 못한 역사와 자산을 갖고 있다는 것을 거듭 재확인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문은 제가 보기에-그리고 제가 만나는 사내외의 적잖은 이들이 보기에- 지금 고비에 처해 있습니다. 이는 언론과 기업이라는 이중성 속에서 그 균형을 잡는 어려운 작업을 해낼 수 있느냐의 고비이며, 조직의 건강하고 합리적인 운영을 지켜내느냐의 고비이며, 4차 산업혁명과 촛불혁명의 시대변화에 상응하는 지혜와 안목을 갖출 수 있느냐의 고비입니다. 이 고비를 넘기 위해서는 높은 지적 역량, 민주 역량, 소통 역량, 반성 역량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에만 눈을 파묻는 정도의 단순 협소한 시야로는 이뤄낼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우리 신문 홀로 맞닥뜨린 과제가 아닙니다. 언론과 비언론의 공존, 언론이라는 이름의 반(反)언론의 기승, 비판이라기보다는 조롱, 분노보다는 동정을 받는 지경인 지금의 언론 상당수 앞에 놓인 고비이며, 언론과 사업체의 이중성 속에서 활로를 찾아야 하는 언론 일반에게 닥치고 있는 고비입니다.

쉽지 않은 난제입니다. 이를 넘어서는 것은 지성의 작업이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의 복잡성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한 작업입니다. 우리의 진로와 행로에 대한 많은 고민과 연구가 필요한 작업입니다. 그 작업을 제대로 해내느냐는 것은 우리에게 큰 시험입니다. 그것은 우리 앞의 도전에 대한 응전역량의 시험이며, 문제해결 역량에 대한 시험이며, 지적 역량에 대한 시험이며, 미래설계 역량에 대한 시험이며, ‘우리를 우리답게 할 수 있느냐’는 역량에 대한 시험입니다.

다만 우리에겐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변화, 앞으로 더욱 전면적으로 펼쳐질 변화를 큰 기회로 삼을 수 있는 역사와 자산이 있습니다. 그 역사와 자산은 우리 자신에게 소중할 뿐만 아니라 우리 신문 밖의 많은 이들에게도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 신문의 미래에 대한 고민과 연구에서 반드시 놓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한국 사회의 대전환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대대적 변화는 지금껏 한국의 언론에 없는 것, 매우 드문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 어떤 매체는 이 변화를 두려움과 불안으로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과거의 업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이 대변화가 우리에게 새로운 공간, 더 넓은 공간을 열어줄 가능성으로 다가온다고 믿습니다. 그것에 우리의 자산과 보전해야 할 자원, 더욱 다져야 할 토대가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언론 기업’, 즉 언론으로서의 기업, 기업으로서의 언론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있어서 의사결정 구조에 대해 특히 얘기하고자 합니다. 우리 조직은 최선의 사리와 분별에 의해 다수의 고민과 지혜를 모으는 문화를 확립하려 애써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유롭고 열려 있는 문화가 지금 막히고 눌려 있습니다.

기업은 많은 경우 주식회사라는 형식으로써 그 소유를 사유가 아닌 사회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언론은 공기(公器)라는 것에서 더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보통의 기업이 그러해야 하거늘 헌법과 법률에 의해 권리를 보호받고, 의무가 부과되는 언론 기업은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는 것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입니다. 예컨대 저는 평상시에 ‘오너’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 해 왔습니다. 그건 그 말에 대한 거부감 이전에 실질에서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물(公物)인 언론사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기업이라는 조직에서의 의사결정은 어떠해야 하는가. 조직을 지배한다는 것의 참뜻은 무엇인가. 그 지배는 자본의 지분과 하달의 지시에 의한 임명으로 완결되지 않습니다. 권력은 권능을 갖춰야 비로소 참다운 권력이 되는 것입니다. 권한은 상응하는 의무와 책임을 가질 때 권한의 정당성이 확보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기업 문화는 전근대에 미달하는 현대에 머무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신문이 바람직한 기업 문화, 언론사 문화의 한 모범을 보여주려 했던 것에서 퇴보한 것이 더욱 안타까운 이유입니다.

옛말에 ‘출문여견대빈 사민여승대제(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밖에서 사람을 대할 때는 큰 손님을 맞듯이 하고, 백성을 부릴 때에는 큰 제사를 받들 듯이 공경히 하라는 것입니다. ‘아래 사람들’에게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존경을 받아야지 총애를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어쩌면 여기에 민주주의 한 요체, 조직 운영의 한 핵심 또한 있는지 모릅니다. 민주주의의 한 모범인 북유럽 사민주의의 권력의 견제와 균형에도 우리의 이 같은 공경과 자제심이 들어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일에는 그 자체로 귀하거나 천한 것이 있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 일을 귀하게 하느냐, 천하게 하느냐가 있을 뿐입니다. 이는 직급의 상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적용돼야 할 것이지만 특히 위계의 상부에 있는 이들일수록 더욱 갖춰야 할 태도입니다. 권력이든 금력이든 절제의 온유한 힘이 아닌 거친 완력으로 남을 누르고자 한다면 그건 결국 자신과 자신의 조직에의 자해행위입니다. 남을 파괴하려는 것인 듯하지만 실은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며, 남을 구차하게 하려 하나 결국 자신을 구차하게 만들 뿐입니다.

고은 시인은 만인보의 서문에서 ‘진선미만으로는 사람을 다 밝힐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네 삶이 다 그럴 것입니다. 고난과 진통이 성장과 발전의 양식이라고 믿습니다. 어떤 승리는 실은 패배이고 어떤 패배는 실은 승리이며, 얻는 것은 곧 무언가를 잃는 것입니다. 이 글의 앞 부분에서 ''결정적 순간’이라고 했지만 결정적 순간이란 실은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선택되는 것이며, 특별한 찰나가 아니라 순간을 바라보는 깊이에서 나온다고 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것은 경험을 넘어선 체험에 의해서, 우리 자신의 행위능력에 의해서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는 것은 우리 모든 구성원들의 몫입니다. 그 설계와 대비에는 우리 신문이 급성장하는 동안 성취와 함께 드러낸 적잖은 문제들에 대한 냉철한 진단과 처방이 함께 필요합니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우리의 문제를 우리 자신의 문제의식과 고민으로 풀어내려고 한 기풍과 작풍이 자리를 잡아 왔습니다. 다른 언론사에선 보기 드물게 그런 소통과 논의가 제도적으로뿐만 아니라 실질에서도 굳건히 확립돼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그 논의와 고민의 장들이 언젠가부터 활력을 잃고 있습니다. 이는 노는 물론 사(使) 측에게도 손실입니다. 앞으로 활발한 논의와 모색을 기대합니다.

신문사를 떠나는 마음이 무겁고 착잡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에겐 이 진통을 잘 헤쳐 나가고, 그래서 더욱 비약의 계기로 삼을 수 있는 역량과 지혜가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앞의 이 도전, 그리고 우리가 치르고 있는 비용은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도전에 지혜로이 응전하고, 비용 이상의 성과를 거둔다면 지금의 이 진통은 오히려 새로운 기회가 될 것입니다. 젊은 기자, 젊은 사원들의 성실과 형형한 눈에서 여전히 굳건한 희망을 봅니다. ‘밖’에서도 늘 성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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