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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과 이승만 전 대통령은 닮은꼴?[칼럼]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상임대표ㆍ언론사회학 박사
  • 관리자
  • 승인 2022.12.12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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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집권 6개월을 넘기면서 밝힌 자신의 대북노선과 야권, 노동계에 대한 이념공세의 방향과 수위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그것과 유사한 것으로 들어났다. 윤 대통령은 북한의 군사적 움직임에 대해 국내외 수단을 동원해 초강수를 두고 야권이나 노동계에 대해 타협점을 찾기 힘든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데 이는 이승만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 윤석열 대통령이 화물연대 집단운송거부 사태를 겨냥해 "북한의 핵 위협과 마찬가지"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4일 오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화물연대 집단운송거부 대응과 관련한 관계장관회의를 주재했다.

윤 대통령은 대북 강경노선과 ‘주사파’에 대한 눈높이를 동일선상에 놓는 태도를 들어냈고 제주 4·3에 대한 내용을 교과서에 포함시키던 종래의 기준을 후퇴시켰다. 부당한 공권력에 의한 피해의 진상 규명을 전문으로 하는 진실화해위원회의 수장을 이 위원회의 활동 자체를 부인하던 극우인사로 지명했다.

윤 대통령과 이승만 전 대통령의 대북 정책과 내치과정에서 적용된 이념문제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를 각각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윤 대통령의 대북 태도, 이념 공세 사례

▶ 윤 대통령은 지난 11월 19일 서울 용산구 소재 국방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국민의힘 원외당협위원장 초청오찬에서 "종북주사파는 반민주·반헌법 세력이다. 좌클릭, 협치 할 수도 있으나 종북주사파는 협치 대상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우리 스스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확고한 믿음·확신을 갖는 것"라고 밝혔다.

윤 대통령은 최근 참모들과의 비공개회의에서 화물연대 집단운송거부 사태를 겨냥해 "북한의 핵 위협과 마찬가지"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북핵 위협에서 국민의 안전, 재산을 보호해야 하듯 '불법파업'으로부터 국가 경제와 민생을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을 드러낸 발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 박정하 수석대변인은 서면논평에서 "북한을 대변하는 민노총, 차라리 '민로총'으로 이름을 바꿔라"라고 말한 바 있다.

▶ 윤석열 정부의 첫 국방백서에 북한정권과 북한군을 '적'으로 규정하는 표현이 부활한다. 지난 6일 복수의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다음 달 발간되는 '2022 국방백서'의 초안에 '북한정권과 북한군은 우리의 적'이라는 표현이 담겼다. 정부 소식통은 "국정과제에 제시된 대로 북한정권과 북한군을 적으로 명시하는 표현이 국방백서 초안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주적 개념은 지난 1994년 남북특사교환 실무접촉에서 북측 대표의 '서울 불바다' 발언을 계기로 1995년 국방백서에 처음 명기돼 2000년까지 유지됐다. 이후 남북 화해 무드가 형성되면서 2004년 국방백서부터 '직접적 군사위협' 등의 표현으로 바뀌었고,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에도 '직접적이고 심각한 위협'이라는 표현이 사용됐다.

▶ 윤 대통령이 지난 9일 오후 장관급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에 김광동(59) 상임위원을 임명했다. 그 인선 이유에 대해, 대통령실은 “정치학박사 출신으로 여러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해 온 정치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이며, 지난해 2월부터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차관급)으로 재임해온 점 등을 들었다.

김 신임 위원장은 대표적 뉴라이트 인사로 알려져 있으며 나라정책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던 2008년 뉴라이트 계열의 대안교과서인 '한국 근·현대사' 집필에 참여했다. 해당 교과서는 4.3을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 정치 세력의 반란'으로 규정한 바 있다. 과거사 진상조사를 반대하는 인물이 과거사 조사를 담당하는 위원회의 수장으로 내정된 것이란 비판이 나오고 있다.

그는 2011년 6월29일 제주에서 열린 '제주4.3사건 교과서 수록방안 공청회'에서도 4.3을 "남조선로동당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에 의한 폭동"이라고 발언했다. 그러나 정부가 발행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4.3을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일부 극우단체에서 제기해 온 주장에 대해서도 법원은 각하·기각 처리했다.

한편 윤 대통령은 최근 4.3을 폄훼해 온 극우 성향의 김태훈 변호사를 국무총리실 산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위원으로 위촉해 4.3 관련 단체들의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제주4·3의 역사가 빠질 위기에 처하면서 제주 사회가 반발하고 있다. 오영훈 제주도지사와 김광수 제주도교육감, 오임종 제주4·3희생자유족회장은 9일 제주도청 기자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교육부의 2022 개정 교육과정에 제주4·3 기술을 명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기존 고등학교 한국사에서는 제주4·3이 ‘학습요소’에 포함돼 있었지만, 이번 행정예고에서는 제주4·3을 포함한 학습요소와 성취기준 해설을 삭제했기 때문이다. 교육부의 뜻대로 교육과정이 개정되면 출판사는 제주4·3을 교과서에 서술하지 않아도 된다.

이번 기자회견은 최근 교육부가 ‘2022 개정교육과정’을 행정예고 하면서 촉발됐다. 교육부가 2022 개정교육과정 심의안을 국가교육위원회(국교위)에 상정하면서 고등학교 한국사의 전근대사 성취기준을 변경하면서 제주 4.3 부분이 종전과 달라진 것이다. 역사과의 경우 ‘자유민주주의’, ‘민주주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함께 사용하는 행정예고안이 유지됐다.

교육부의 이 조치에 대해 ‘2022 개정 역사과 교육과정 시안 개발 연구진 일동’은 성명을 내고 “공적인 논의 없는 밀실 수정”이라고 비판하며 심의안 폐기를 촉구했다.

▶ 윤 대통령은 일본에게 적극 다가가는 식으로 한일관계를 정상화시켜 대북 공조를 취하려하거나 북대서양조약기구와나 인도태평양지역 안보관련기구와의 대북 압박을 강화하려는 관계 증진을 시도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지난 6월 29일(현지시간)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동맹국·파트너국 정상회의에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은 유엔안보리 결의에 대한 명백한 위반이고, 한반도와 국제사회의 평화, 안보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그간 북한 문제에서 나토가 우리를 일관되게 지지해 온 것을 평가한다”라며 “북한을 비핵화의 길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북한의 무모한 핵미사일 개발 의지보다 국제사회의 북한 비핵화 의지가 더 강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지난 10월 13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동아시아정상회의(ESA)에 참석해 "평화로운 인도·태평양을 위해서는 북한의 비핵화가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 국제사회의 거듭된 우려와 경고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재차 발사하거나 핵실험을 감행한다면 국제사회가 단호하게 대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정부는 미일과 공조해서 대북 단독 제재 움직임도 가속화하면서 대북 당근정책인 ‘담대한 구상’을 통해 북한이 비핵화 협상에 참여할 경우 그 초기 단계에는 ‘한반도 지원·식량 교환 프로그램’을 가동해 협상의 모멘텀을 유지하고, 완전한 비핵화 단계에서는 미북관계 정상화 및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한다는 구상을 밝혔다. 이 같은 한국 정부의 구상을 실현할 수 있는 첫 관문이 북한의 호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북한이 긍정적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이나 단계를 제시했어야 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 윤석열 정부는 최근 대북 독자 제재를 취했는데 이는 한미일 3국 간 조율을 통해 이뤄졌다고 미국 백악관이 밝혔다. 에이드리엔 왓슨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은 2일(현지시간) 성명에서 한미일 3국의 대북 제재에 대해 "동시에 이뤄진 이 조치는 한미일간 3자 관계의 힘이 강화됐음을 입증한다"며 "이는 지난 11월 바이든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윤석열 한국 대통령의 회담 후속 조치로 당시 정상들은 올해 북한의 전례 없는 수준의 탄도미사일 발사를 규탄하고 (대북) 억지력을 강화하며 안보와 그보다 넓은 영역에서 더 긴밀한 3자 협력을 구축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왓슨 대변인은 "북한을 국제금융 체제에서 고립시키려는 미국과 유엔의 복합적인 제재에 직면한 북한은 가상화폐 강탈과 다른 사이버 절도 등 갈수록 필사적인 방법을 통해 무기 프로그램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고 있다"고 말했다.

▲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공포되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승만 전 대통령. (사진=연합)>


이승만 전 대통령의 대북 태도 및 내치 과정 이념 공세사례

이승만은 미국이 1947-1948년 유엔을 앞세워 주도한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적극 동참한 후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이어 남한이 충분한 군비태세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북진통일만을 주장하고 남북 협상을 원천적으로 외면하다가 6.25 전쟁 발발 직후 한강다리를 폭파하고 수원으로 피신했다. 이때 미국 군사고문단에 사전통고도 하지 않았다. 미국은 정전협정 협상과정에서 이승만이 국군으로 단독 북진하겠다고 주장할 때 제거할 계획까지 추진했다.

이승만은 정전협정이 타결되면 한국군 병력이 60만 명 가까이 되는 상황인데도 중공군 등의 남침으로 남한이 궤멸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북진통일을 계속 주장하다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조건으로 정전협정 체결을 수락했다. 그는 4.19 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날 때까지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이상과 같은 내용 등을 구체적으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이승만 전 대통령은 1947년 가을 미국이 유엔을 통해 한반도 단일 정부 수립 을 추진하기로 결정한 뒤 이에 적극 동조하면서 김구 등이 추진한 좌우합작 사업을 외면했다. 그는 1948년 정부 수립이전부터 북진통일을 주장했고 초대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남북간에 무력 충돌이 빈발했지만 남북간 대화를 통한 긴장완화 작업을 시도한 적이 없다.

남한 단독정부수립을 목표로 추진된 5.10선거는 투표일전 5주 동안 무려 589명이 선거와 관련하여 목숨을 잃었고, 총 1 만 명이 넘는 선거사범이 구속되었다. 결국 5월 10일 날이 밝자 남한 전체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실시되었다. 제주도의 두 선거구에서 투표가 실시되지 못한 그날 51명의 경찰과 11명의 공무원이 피살되었다. 그리고 166곳의 선거관련 관공서와 대부분이 파출소로 구성된 301개 국가기관이 피습 당했다.

선거 당일, 서울에선 수천 명의 경찰과 특임된 민간인이 미군 지원 하에 중요 도로와 교차로에 바리케이드를 쳤으며 각 골목 입구에는 경비대가 배치됐다. 민간 경비대원은 도끼자루, 야구배트, 곤봉을 휴대했다. 경찰은 카빈 소총으로 무장했다. 외신 기자들은 이 광경을 "계엄 하 도시 같다"고 했다. 부인들은 투표장으로 가면서 가만가만히 주위를 살피는 기색 이었다.

▶ 제주에서 4.3 참극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은 대통령에 취임한 뒤 군에 “한라산 중턱에 거주하는 주민들 가운데 무장대로 인식되면 즉각 살해한다.”라는 내용의 특명을 내렸다. 이후 5개월 동안 한라산 중턱에 있던 마을 95%가 소각되고 그곳 주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미국은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군작전통제권을 이양 받아 제주에서 소탕작전을 지속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8월 24일 이승만 전 대통령과 하지 주한미군사령관 사이에 체결된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에 따라 임시군사고문단이 설치돼 미군은 여전히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갖게 되었다. 제주 4·3 에 이어 여순 사건을 미군이 지휘한 법적 근거였다. 미군은 이 협정을 근거로 갑이 되고 한국군은 을이 되어야 했다. 이는 미군 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이 1948년 9월 이범석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에게 보낸 한미협정의 관련 내용을 상기시킨 서한에서도 확인된다.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여전히 미군에게 있다. 군 작전에 관한 모든 명령은 발표되기 전에 해당 미군 고문관을 거쳐야 한다,”

1948년 8월 26일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직후 미군 철수가 결정되지만 한미 두 나라는 군사안전잠정협정을 맺어 군사관계를 확고히 했다.

“한미 두 나라는 한국 정부가 국가안보를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미국이 한국군을 훈련시키고 무장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면서 한국군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한다.”

▶ 이승만은 여순사건이 발생한 지 17일 지난 1948년 11월 5일 남녀아동까지 불순분자이면 제거하라는 초강경 담화문을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 “공산분자들에 의해 여수, 순천 등지에서 통곡할만한 동족상잔이 발생했다. 그중에 제일 놀랍고 참혹한 것은 어린 아이들이 앞잡이가 되어 총과 다른 군기(軍器)를 가지고 살인충천(殺人衝天)하고 "여학생들이 심악(甚惡: 몹시 악함)하게 한 것과 살해 파괴를 위주하고 사생(死生)을 모르는 듯 덤비는 상황이었다. 정부는...각 학교와 정부기관의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제히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고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라.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표되더라도 전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만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비해야 될 것이다.”

여순 사건이후 6.25 전쟁을 전후해 미군의 직간접적 개입 속에 발생한 보도연맹 학살사건, 거창학살 사건 등 수많은 양민학살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9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경고문이 진압작전 지휘관으로 하여금 민간인을 상대로 무리한 작전을 펼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 수 십 년 전의 학살 사태에 대해 뒤늦었지만 이승만의 책임을 추궁했다.

이승만의 제주 4·3과 여순 사건에 대한 대처는 같은 민족이라는 점을 의식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집권 직후 제주 4·3을 공산주의자의 반란으로 보고 철저한 진압을 지시했다. 이승만은 제주 4·3 발생 직후 도쿄로 가서 맥아더 장군을 만나 진압작전에 대해 합의했다.

“한국군 국방경비대와 경찰이 무초 대사와 미군사고문단의 협조를 받아 진압한다.”

이승만은 이어 여순 사건이 발생하고 한국군경이 초기 진압작전에서 실패하자 주한미군이 로버트 장군과 미 군사고문단에게 필요할 경우 진압작전을 지휘해 사태를 진정시키라고 지시했다.

▶ 여순사건이 진압된 후 이승만 정부는 내부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물리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군대와 경찰을 정비했다. 군대에서는 좌익세력 색출을 위한 숙군(肅軍)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949년 7월까지 국군 병력의 약 5%에 이르는 총 4,749명이 숙청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또 좌익세력 색출을 위한 강력한 법제를 마련했다. 급속하게 만들어진 국가보안법은 1949년 한 해 동안 전국 교도소 수용자의 70%에 달하는 11만 8천 명에 적용될 만큼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이 법은 여순사건이후 공산주의자를 민족과 국민의 범주로부터 추방함으로써 반공체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70여 년 째 유지되고 있다.

▶ 이승만 전 대통령은 친일파 처벌에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반민특위의 활동을 비난하는 담화를 여러 차례 발표했다. 나아가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 반민특위의 활동을 불법시하고 친일파를 적극 옹호하였다. 반면에 대법원장 김병로는 반민특위의 활동은 불법이 아니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정부의 협조를 촉구하였다. 이승만은, 반민특위가 반민족행위처벌법 5조에 따라 일제 치하에서 고위 관리를 지내다가 정부 수립 후 정부 고위직에 기용된 부역세력을 공직에서 추방시킬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했다.

이승만은 제주 4·3 비극이 진행되는 동안 반민특위가 친일경찰들을 구속하자 반민특위를 와해시키는 식으로 친일경찰을 적극 비호했다. 1949년 5월 하순, 이승만 정부는 이문원, 최태규, 이구수, 황윤호 의원 등 4명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전격 구속하면서 이들이 남로당 프락치라고 발표했다. 6월에는 다시 김약수 국회부의장을 비롯해 노일환, 서용길 의원 등 13명을 구속했다. 소위 ‘제2차 국회프락치사건’이다. 이들 소장파 의원들은 외국군 철수 등을 주장한 진보 성향이었는데, 노일환, 서용길 의원은 반민특위 위원이기도 했다. 구속 의원들에 대한 석방결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고 국회는 크게 위축되기 시작했다.

▶ 미군정은 남한 군경에 대한 무기 지원 등을 한 뒤 1948-1949년 38선 경비를 남한 군경이 담당하게 했다. 당시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면서 미국에 중무기 제공 등을 요구했지만 미국은 소련을 의식해 이를 거부했다. 남북한은 1949년 5월 이전까지 38선에서 소규모 총격전을 벌이다가 그 이후 6개월 동안 400 여 차례의 총격전을 벌였다.

그 가운데 대부분은 수색대간의 총격에 그쳤으나 개성, 춘천, 옹진 등에서 벌어진 충돌은 양측에 큰 피해를 입혔다. 당시 가장 심각한 충돌은 남한군이 38선 이북까지 방어진지를 구축하려다가 북한군의 강력한 반격을 받으면서 일어났다고 미군사고문단이 상부에 보고했다.

▶ 이승만 전 대통령은 덜레스 존 포스터 덜레스 상원의원이 한국을 방문한 1950년 6월 18일에도 자신은 북한을 점령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덜레스 의원은 1953년부터 1959년까지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래 제52대 국무장관을 지내면서 이승만의 북진통일 주장을 심각하게 우려하기도 했다.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북한군이 총공격을 개시해 1950년 6월 26일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할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승만은 육성으로 서울 사수의 각오를 밝히는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 국민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이승만은 27일 정부 각료들과 함께 서울을 탈출하면서 한강교 폭파를 지시했다. 한국군이 피난민이 교량을 건너가는 상황에 이 대통령의 지시를 이행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거짓방송을 한 뒤 서울을 빠져나간 도피행각은 국민을 기만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미군사고문단은 전쟁이 발생한 직후 한국군이 한강교에 폭약을 설치하는 작업을 지휘하고 서울을 포기할 경우에 대비했다. 그러나 한국군이 사전통고도 없이 폭파해 버리는 긴급사태가 발생하자 혼란에 빠졌다. 주한미군사고문단은 서울을 탈출하는데 큰 곤욕을 치른 끝에 한강 부근에서 만난 한국군이 나룻배를 구해주자 그것을 이용해 한강을 건넜다. 미군사고문단은 겨우 수원에 도착해 이승만 정부와 합류한 뒤 패주한 한국군을 수습하면서 지휘권을 발동해 방어태세를 갖추도록 독려했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에 항의했다.

이승만은 6.25 전쟁 직후인 1950년 6월 27일 보도연맹원이나 남로당원들을 처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퇴각하던 한국군 등이 보도연맹원을 살해했으며 강원도 횡성군에서 그 다음날인 28일 첫 처형이 집행됐다.

▶ 1953년 4월 9일 정전협정 타결이 임박한 시점에서 이승만은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정전협정이 타결된다면 미국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한다. 한국군은 휴전협상을 하기보다 독자적으로 싸우겠다.”고 밝혔다. 미국은 정전협정을 조속히 타결 짓기 위해 핵무기로 중국과 북한을 위협할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의 최후통첩을 받고 경악했다. 아이젠하워는 1953년 4월 23일 이 대통령에게 보낸 답서에서 “이 대통령의 친서를 받고 크게 불편했다. 이 대통령의 태도는 한반도에서의 적대행위를 끝내려는 미국의 노력을 심각하게 방해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유엔군은 1953년 정전협정 체결 당시 한국군 59만 명을 포함해 17개국 총 93만 2964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그러나 1953년 5월 30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정전협정에 반대한다는 자신의 의지를 강조하면서도 정전협정 수용 조건을 제시했다. 이승만은 중공군이 한반도에 계속 잔류하게 되면 한국은 사형선고를 받는 것과 다를 바 없다면서 주한미군이 떠나게 되면 중국과 북한에 의해 남한이 괴멸된다는 주장을 폈다.

이런 태도는 주권국 원수로서 50 만 명의 국군이 전투중이고 미국이 정전협정이후 한국군에 대한 지원 등을 약속한 것을 감안할 때 납득하기 어려운 태도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과도한 전쟁 공포증이나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 적대감을 지니게 된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될 수 있는 부분이다.

▶ 미국은 1952년 4월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추진 과정에서 남한을 철저히 배제했는데 이승만이 이를 방치했다. 결과적으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의 경제적 배상 문제는 일제에 의해 피해를 당한 국가들과 일본이 개별적 협상을 통해 추진토록 하는 방식으로 결론이 나면서 일본이 전후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룰 토대가 되었다.

미국은 패전국 일본이 신속하게 경제회복을 실시할 수 있도록 그 배상책임을 최대한 가볍게 하는 방식으로 강행하면서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에서처럼 패전국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응징하는 차원에서 가혹한 배상책임을 지게 하는 방식은 철저히 배제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가 일제에 의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주체인데도 일본과의 강화조약 체결을 위한 협의단계나 최종 협정 서명국에서 한국을 배제했다.

미국이 1950년 6 · 25 전쟁을 계기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을 서두르는 과정에서 남한을 철저히 배제하는 것에 대해 이승만은 방관하는 입장이었다. 당시 미일 협상 과정에서 미국 측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로 가능해진 근대화 등은 배상액보다 훨씬 많다는 식의 식민지 기여론을 유포하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이전인 1951년 5월 미 국무부는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남한에 남아 있는 일본인 재산과 남한이 주장하는 배상요구 액과 비교하는 자료를 내놓았다.

이 자료에 따르면 38선 이북의 북한 땅을 제외한 남한 땅에 남겨진 일본인 자산은 한국이 일본에 대해 요구하는 배상액의 4배에 달한다는 내용 이었다. 그러나 이런 해괴한 논리에 대해 이승만은 침묵한 채 북한과 중국을 군사적으로 제압해야 한다며 한국군이 단독으로 북진을 하겠다며 무기를 미국이 공급해 달라는 식의 주장을 미국 대통령을 상대로 계속했을 뿐이다.

▲ 서울 서대문구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27일부터 3월 1일까지 통일로 변 3.5km 구간에 등록문화재 제458호인 진관사 태극기 복사본을 게양했다.


향후 한반도 정세 전망과 대책

윤석열 대통령과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북한 정책과 사상, 이념차이에 따른 국민 편 가르기 시도나 정책에 대해 살펴보았다. 두 지도자가 집권했던 상황은 동일하지 않다 해도 여러 가지 점에서 유사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전쟁 사례가 그렇듯이 전쟁 시작과 진행과정 등은 군통수권자인 최고 지도자의 품성 등에 의해 큰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유권자를 포함한 전사회적인 경각심이 요구된다. 전쟁은 그 발생 자체를 막아야지 일단 발생하면 우크라-러시아 전쟁처럼 보복전이 반복되면서 규모가 커지게 되어 결국 국민적 희생이 막대해진다.

최근 대만에서 실시된 지방의회 선거에서 ‘친미반중’을 앞세우며 독립, 분리를 주장하던 집권당이 대패했다. 양안간 경제관계가 밀접(대만의 대중 수출 비중 전체의 40% 전후)한 특성 등이 유권자의 표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향후 미국의 대만 정책과 대북정책에 어떤 식으로 든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한국 유권자들도 2024년 총선에서 어떤 이유이든 전쟁은 안 된다는 의사 표현을 확실히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전쟁은 한민족에게 회복 불능의 피해를 줄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올 초부터 시작된 한미와 북한간의 무력대치는 그 심각성의 수위가 점차 높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전쟁 위협이 피부로 느껴지는 상황이었는데 전문가들은 향후 길게는 수십 년 유사한 대치상태가 지속될지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북한은 올해 들어 최근까지 한미 군사훈련 등을 계기로 탄도미사일을 40 차례 가까이 쐈고, 순항미사일을 3차례 발사한 것으로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25번째 미사일을 발사했다<연합뉴스. 2022. 11.18.>. 지난해까지만 해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공세적 태도로 평가되고 있다.

한미 두 나라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도발’로 규정하고 북한에 다양한 방식으로 군사적 응징 메시지를 보내면 응수하고 있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실험 발사한 직후인 지난 18일 한미 공군은 F▲35A 스텔스 전투기를 동원해 북한의 이동식발사대 타격 훈련을 처음 시행했고 미국 전략폭격기 B▲1B가 한반도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미국은 최근 발표한 세계군사전략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최우선적 적대세력으로 규정하고 북한은 그 하위에 두고 관리한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최근 발사한 것에 대해서도 기존의 중국, 러시아를 겨냥한 세계군사전략의 틀 속에서 대처한다는 방침을 확인하면서 주한미군에 우주군 부대 창설 방침을 밝혔다. 한국 정치권 일각에서 주장하는 미국 전술핵의 남한 배치에 선을 긋고 북한 핵을 미국의 기존 세계전략체제 속에서 대처한다는 것이다 .

미국은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북한의 ICBM이 미국 본토까지 타격할 수준에 이른 것으로 평가됨에 따라 주한미군이 외기권으로 날아가는 비행체를 탐지 감시할 수 있도록 우주군 구성군사령부를 연말까지 설치할 계획이다. 미국 국방부는 “미국이 인도태평양사령부 예하로 우주군구성군사령부를 창설한 것처럼 주한미군에도 우주군 구성군사령부가 들어서게 된다. 주한 미해군, 주한 미공군이 있듯이 주한미우주군이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연합뉴스 2022. 11. 26>.

한미일은 금년 들어 강경해진 북한의 군사적 움직임에 대한 대응작전을 전개하면서 군사적 결속력을 강화하고 있다. 또한 한미일은 유엔안보리의 대북 제재 움직임이 중국,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로 발동되지 못하자 독자적 제재 방침을 밝히면서 북한의 반발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다.

미국은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치 않지만 파키스탄, 인도처럼 실질적인 핵보유국으로 보고 세계군사전략 차원의 한 부분으로 대처하겠다는 방침을 굳히고 있다. 미국을 북한을 세계평화위협국가, 테러지원국가로 지목해 선제타격 대상의 구실로 삼아 주한미군 군사력을 증강하는 것은 대만에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경우 중국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동시에 미국의 이런 대북정책이 중국을 불편하게 할 경우 중국의 대북 견제를 추동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미국의 대북전략은 북한 핵이나 미사일이 실질적으로 미국 본토를 위협할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설령 한반도에서 충돌이 발행한다 해도 미국에게 결정적 타격을 주지 않을 것이란 계산이 깔려 있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오바마 시절과 같은 ‘전략적 인내’를 앞세우면서 한미, 한미일 동맹 강화를 우선시하면서 북한에 대해 적극적인 대화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미국은 한일 두 나라에서 제기된 전술핵 배치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현재의 핵우산 정책으로 충분하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미국의 이런 태도와 달리 한국은 일본과 함께 북한 핵과 미사일을 발등의 불로 인식하는 초조한 태도를 보이며 대책 수립에 적극 나서고 있다. 북한의 단·중거리 미사일은 한일 두 나라에 군사적, 정치적으로 큰 위협과 불안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입장이고 일상적으로 북한 핵과 미사일은 현실적 위협으로 의식하면서 불안에 떨어야 하는 발등의 불이 되고 있다. 한국정부는 미국 전술핵 배치 등이 어려워지자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한다는 전제하에 한미합동군사훈련 강화와 미 전략자산을 실질적으로 상시 배치하는 것과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미국과 합의하고 한일 군사협력도 강화하면서 자체 첨단 무기 개발 등으로 북한을 압박하고 있다.

미국은 향후 상당기간 북한 핵과 미사일에 대해 자국에 직접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태도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고 이럴 경우 북한은 미국을 협상장으로 끌어내기 위한 군사적 충격 수위를 높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윤 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과 유사한 대북정책과 내치 과정에서의 이념적 편 가르기 전략에 더욱 박차를 가할 가능성도 있다. 한미와 북한간의 주고 받기식 무력시위가 향후 수년 또는 수십 년 지속될 가능성과 함께 이로 인해 남북한의 위기 지수가 높아지면서 자칫 우발적 충돌 가능성도 우려되고 있다.

한반도의 두 진영이 맞장을 뜨는 식의 ‘강대강’으로 치달을 경우 큰 비극적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따라서 남북은 미중과 미러가 국방장관이나 군 최고사령관이 서로대화 하듯이 군사적인 핫라인을 개설해서 우발적 충돌이 국지전 또는 전면전으로 비화하지 않을 안전판을 만들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남북이 재통합을 해야 할 같은 민족이라는 점에서 한반도의 대치상황을 원천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전쟁 방지 안전판의 확보와 함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는 방향으로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 이글은 2022년 12월 12일 폴리뉴스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칼럼 원문 보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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