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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체제의 형성과 한국 민주화동아일보 대해부 4권 - 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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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1.23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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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충격

1987년에 학원 사태는 갈수록 악화되는가 하면 정치권의 개헌 논의 역시 갈등과 혼란을 거듭했다. 그 와중에 1월 14일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 박종철이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연행됐다. 수사관들은 그의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대라며 물고문을 시작했다. 그들은 박종철이 박종운의 소재를 모른다고 하자 결박된 다리를 들어 올린 채 물 속에 머리를 밀어 넣었다. 결국 박종철은 욕조의 턱에 목이 눌려 경부압박으로 사망했다. 그때 물고문에 가담한 수사관들은 조한경, 반금곤, 황정웅, 강진규, 이정호 등 5명이었다.

석간 중앙일보는 1월 15일자 사회면에 「경찰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라는 2단 기사를 실었다. 동아일보는 그 기사를 1월 16일자 사회면(11면) 주요 기사로키우고 고문 받은 정황을 매우 구체적으로 보도했다. 또 2면의 사설(「조사받던 대학생의 죽음」)에서는 가혹행위의 가능성에 무게를 두면서 진상과 책임을 가리라고 요구했다. 특히 다음 날인 1월 17일자 3면에 실린 논설위원 김중배의 칼럼(「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은 읽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공안 사건 관련 피의자로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던 서울대학생이 돌 연 사망한 일은 몹시 충격적이다. 그리고 사안이 사안인지라, 여느 사건과 는 다른 관점에서, 민감한 반응으로 사건의 형태와 진상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박종철이라는 스물한 살의 학생이, 하숙집에서 치안본부의 갈월동 대공분 실로 연행되어 숨지기까지의 시간과, 경찰의 발표대로라면 조사가 시작된지 불과 30분만의 갑작스런 사망은, 더욱 우리의 경악과 의문을 북돋우고 있다. 알려진 바로는, 피의자는 조사 도중 느닷없이 ‘억’하며 책상 위에 쓰러졌고, 경찰이 박 군을 차에 싣고 병원으로 가던 중 숨을 거두었다. (···) 왜, 어찌하여 젊디젊은 청년이 짧은 비명(억 소리)을 지르며, 그렇게도 간단히 숨을 거두었는가는, 곧 있을 예정이라는 검찰의 진상 발표를 기다려야 하겠거니와, 우선 나타난 가족들의 사체를 본 소견만으로도, 의문의 여지는 너무나 많다. 온몸에 수십 군데의 멍 자국이 있다는 것도 그렇고, 멀쩡한 청년이 갑자기 사망한 것도 상식적으로는 따라가기 힘들다.
  (···) 이런 비극의 반복을 막고, 여타의 자식 가진 부모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서도, 지금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밝히는 것이 시급하다(1월 16일자 사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
  태양과 죽음은 차마 마주 볼 수 없다는 명언이 있다는 건 나도 안다. 태양은 그 찬란한 눈부심으로, 죽음은 그 참담한 눈물 줄기로, 살아 있는 자의 눈을 가린다.
  그러나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군, 스물한 살의 젊은 나이에 채 피어나지도 못한 꽃봉오리로 떨어져간 그의 죽음은 우리의 응시를 요구한다. 우리의 엄호와, 죽음 뒤에 살아나는 영생의 가꿈을 기대한다. 
  (···) 그의 죽음은 이 하늘과 이 땅과 이 사람들의 회생을 호소한다. 정의를 가리지 못하는 하늘은 ‘제 하늘’이 아니다. 평화를 심지 못하는 땅은 ‘제 땅’이 아니다. 인권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제 사람들’이 아니다.
  (···) 나는 ‘인권이 곧 나라’임을 서슴없이 말해온다. 인권이 희석되면, 나라의 바탕인 민의 연대도 희석된다. 연대의 끈이 끊긴 나라는 ‘사막의 나라’일 뿐이다. (···)
  (···) 이른바 ‘성 고문’ 파동의 한 가운데 섰던 권 양을, 그 변호인단은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건 비록 무너졌으나마 처녀의 마지막 ‘성역’을 지키고자 하는 뜻이다.
  그러나 박종철, 그의 죽음과 이름은 거듭 되새겨지고 거듭 불려져야 한다. 건강과 밝음이 충만했다는 그 젊음이 무슨 변고로 주검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는가. 우리는 그 진상을 한 점의 의문도 없이 밝혀야 한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인(死因)’을 파헤쳐, 되풀이될 수 없는 그 ‘사인’을 죽여야 한다. 그것이 박종철, 그의 죽음을 살리는 길이다.
  (···) 이제 거짓의 하늘은 사라져야 한다. 거짓의 땅도 파헤쳐야 한다. 거짓의 사람들도 다시 태어나야 한다.
  (···· 광주의 5월에 이어지는 ‘5월 시(詩)’ 동인들은 일찍이 ‘하늘아, 땅아, 많은 사람들아’를 외쳤다. 이제 박종철, 그의 죽음 앞에서 ‘하늘이여, 땅이 여, 사람들이여’의 호곡이 피어난다. 그 호곡을 잠들게 하라.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 새로운 사람들이 피어나게 하라. 그것이 그의 죽음을 영생으로 살리는 길이다(1월 17일자 ‘김중배 칼럼’).

경찰은 “책상을 탁 치니 박 군이 억하고 죽었다”는 식의 해명성 보도자료를 냈다. 그 보도자료가 세상의 비웃음을 사자 치안본부는 사건 발생 5일 만인 1월 19일에야 자체 조사 결과 박종철이 수사 과정에서 물고문을 당하던 중 질식 사망한 것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그 사건을 담당한 경위 조한경과 경사 강진규를 구속했다고 덧붙였다.

동아일보는 그 날짜 1면 머리기사(「물고문 도중 질식사 / 서울대 박종철 군 사망 사건 발표」)를 통해 사건 내용을 자세하게 보도하고 2, 3, 5, 10, 11면 등에 관련기사를 실었다. 2면에는 사설과 정치권의 충격을 다룬 「경색정국 덮친 고문 회오리」, 3면에는 「‘박종철 군 고문치사’ 발표 안팎」이라는 상자기사와 「고문 사라져야 한다」라는 캠페인 시리즈, 5면에는 박종철의 연행에서 화장에 이르기까지의 현장기사, 10면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둘러싼 각계 움직임과 경찰의 발표문, 11면에는 치안본부장과의 강민창과의 일문일답 및 추기경 김수환의 박종철을 위한 미사 내용 등을 실었다. 사설(「고문경관과 구상 판결」)은 가해자에 대한 책임 가중의 정당성을 지지함으로써 고문 근절을 강조했다. 동아일보는 1월 20일자에도 1면 머리기사를 포함해 2·3·4·6·7면 등에 관련 사설과 기사를 싣는 등 고문치사 사건에 관심을 쏟았다.

같은 날짜 2면 사설은 고문치사 인책 범위의 확대를 요구했다.

  서울대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으로 모두가 침통해 하고 있다. (···)
  (···) 우선 박 군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고문의 진상이 철저히 가려지고 책임 소재가 분명해져야 하리라고 본다. (···) 종전처럼 당국이 사건 진상을 은폐하려고 시도하거나 기억에서 사라질 만하면 또 다른 사건이 터지는 식의 악순환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진상 규명과 함께 책임 소재를 가리는 일도 중요하다. 1차로 고문경관 두 사람이 구속되고 그 무서운 집의 책임자인 대공3부장이 직위 해제되었지만 그것으로 인책이 끝날 수는 없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원인을 가려 보다 높은 데까지 인책 범위가 확대되어야 한다.
  그토록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고문이 정부기관에서, 그것도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건물 안에서 백주의 일과시간에 공무 집행의 일환으로 자행되었다는 것은 수사관 몇 사람의 ‘과잉 집무의욕’에서 빚어진 일이라고 보기 어렵다. (···)
  사건 전날 이례적으로 대공분실에 들러 수배자의 조속 검거를 독려하고 돌아간 내무장관은 사과성명이나 내놓고 넘어갈 일이 아니며, 치안본부장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본다.


  원천 봉쇄된 ‘고 박종철 군 범국민 추도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계속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고문 추방 운동이 벌어지는가 하면 정부는 고문 근절 대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말 뿐이었다. 정부는 전국적으로 7만여 명의 경찰을 동원해 2월 7일 전국적으로 열릴 예정이던 야권과 시민단체 등의 ‘고 박종철 군 범국민추도회’를 원천 봉쇄했다. 전체 12만여 경찰의 3분의 2 가까이를 동원한 셈이었다. 인권 보호를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할 것 같던 정부의 태도는 손바닥 뒤집히듯 했다. 동아일보는 2월 7일자 2면 사설과 3면 칼럼 등을 통해 정부의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사설(「‘인권’ 빠진 법무부 보고)」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설령 박종철 군의 죽음과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 없었더라도, 인권 옹호는 국정의 최우선 순위에 자리해야 할 정책 목표이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오늘의 민주국가는 그 인권의 토대 위에서만 존립의 정당성을 갖는다. (···)
  (···)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무부의 87년도 업무보고에는 박 군의 죽음을 계기로 더욱 관심이 높아진 수사상의 인권 보호 문제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강력한 검찰권을 행사해야 할 시기에 인권 이야기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 아래, 인권문제가 묵살되었다는 후문마저 들려온다. ‘인권 존중 실천 결의대회’를 가진 일선 경찰서에서도 “언론이 박 군 사건을 밝혀내는 바람에 귀찮은 일만 생긴다”는 투정이 흘러나온다. (···)
  그 모두가 어불성설이다. 검찰권과 경찰권은 공공의 질서와 함께 인권의 옹호를 위해서 국민이 위임한 공권력일 뿐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그 공권력을 기능하게 하는 것도 다른 근거에서가 아니다. 그 위임된 사명을 저버린다면 ‘배임’의 질책을 벗어날 수 없다.
  더구나 오늘은 박군 의 죽음으로 인권의식이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있다. (···) 법무부와 경찰은 오히려 그 고조된 인권의식을 선도해야 하며, 또한 스스로의 인권의식을 다져나가야 마땅하다. (···)
  (···) 오늘, 이 땅의 공권력은 무엇을 위해서 그것이 주어졌는지를 깊이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수권의 원리와 근거에 충실한 행사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공권력이 그 본연의 사명을 인식하고, 책무를 다해야만 끊일 줄 모르는 인권 시비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 사설은 당시 정부의 인권에 대한 인식 정도가 얼마나 형편없었던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진상이 축소·조작됐다는 게 사건 발생 4개월 만에 드러난 점이다. 1987년 5월 18일 광주항쟁 7주기 추모미사가 열린 명동성당에서 미사가 끝난 뒤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 조작됐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제단의 폭로는 국민적 분노를 일으켰다. 그 며칠 후 검찰은 직접 고문에 가담한 경위 황정웅 경위, 경장 반금곤·이정호를 구속했다. 또 범인 축소·조작 혐의로 치안감 박처원 등 간부 몇 명이 추가로 구속됐다. 그러나 민심 이반이 심각해지자 전두환 정권은 5월 26일 국무총리, 부총리겸 경제기획원장관, 재무장관, 안기부장, 내무장관, 검찰총장 등에 대한 문책 경질인사를 단행했다. 그러나 분노한 민심은 6·10 항쟁을 부르고 있었다.


전두환의 폭탄선언 ‘4·13 호헌 조치’

분노한 민심은 대통령직선제를 요구하는 전국적 시위에서도 분출됐다. 그런 가운데 전두환은 1987년 4월 13일 “자신의 임기 중 개헌은 불가능하다”는 ‘4·13 호헌 조치’를 특별담화 형식으로  발표했다. 직선제 개헌운동이 정점으로 치닫고 있던 시기였다. 내각제 개헌 논의를 제안한 ‘이민우 구상’이 물거품이 되고 김영삼의 신당 창당 선언 등이 이어져 가칭 통일민주당이 창당발기인 대회를 갖던 날이었다.

동아일보는 4월 13일자 1면 머리에 올린 통단기사(「현행 헌법으로 정부이양」)를 통해 전두환의 특별담화 내용을 전했다. 또 2, 3, 4, 5, 11면에 사설과 해설, 정치부 좌담 및 담화 요지 등 관련 기사를 실었다. 그 날짜 동아일보의 보도는 전반적으로 ‘충격, 긴장, 착잡’ 등으로 수렴될 수 있으나 서로 엇박자를 내기도 했다. 사설의 제목이 「한국정치의 비극」으로 호헌 조치에 비판적인 반면 3면 해설기사 제목은 「개헌 논란 쐐기 박은 ‘결단 카드’」로 전두환을 두둔하는 흐름을 보였다.

  그동안 나라 안팎의 관심을 모았고 국론을 크게 갈라놓았던 개헌문제가 13일을 고비로 하나의 매듭이 지어지고 있다. 지난해 4월 30일 청와대의 3당 대표 회동을 계기로 ‘호헌’에서 ‘개헌 가능’으로 돌아섰던 정국이 다시 ‘현행 헌법 고수’라는 원점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날 특별담화 형식으로 발표된 전두환 대통령의 중대 결단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하며 정부 이양과 서울올림픽을 치른 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개헌문제를 다시 논의하자는 것이 주요골자다.
  (···) 이 같은 보도를 접하는 국민들은 이럴 바에야 무엇 때문에 그 많은 시간과 정력을 개헌 논의에 쏟아 부었는지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이다. 이 나라, 이 판의 정치인 전체에 대한 실망과 혐오마저 느낀다.
  (···) 그러나 문제는 앞으로 집권당의 ‘신(新) 호헌론’이 차질 없이 추진될 수 있느냐에 관심이 쏠린다. 애당초 호헌에서 개헌으로 선회한 정치적 동기나 배경이 1년 지난 지금에 와서 크게 바뀌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과연 이대로 정국을 끌고 나갈 수 있을지 걱정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 한국정치의 비극이 끝날 날은 그 언제일까(4월 13일자 사설).

  ‘중대한 결단’으로 표현된 전두환 대통령의 13일 특별담화의 기조는 파국을 막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란 의미가 짙다. 실제로 이날 담화는 정치·경제·사회·안보적 측면에서 안정이 깨졌을 경우 파국의 위기 가능성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다.
  (···) 개헌 정국의 혼미, 강성 신당의 출현, 평화적 정부 이양, 서울올림픽 완수, 후계 체제의 정립 등 복합적인 변수들이 혼재된 현 상황이란 점에서 배경의 흐름도 간단하지는 않다. 그러한 배경을 반영하듯 국민적 이해와 당부로부터 시작된 이날 담화문은 곳곳에서 강온 양면을 살필 수 있게 한다.
  (···) 이날 특별담화에는 유의해야 할 점이 또 있다. “개헌 파쟁에 골몰하여 불법과 폭력으로 사회 혼란을 조성하는 일은 헌법이 대통령에게 부여한 권한에 따라 단호히 대처한다’” 부분이다. 이는 정치·사회적 소요에 대한 경고로서 상당히 무겁게 표현한 대목이다. 여기에서 ‘중대한 결단’의 최종적인 선택으로서 ‘비상의 조치’가 유보돼 있다는 풀이도 가능할 것 같다(4월 13일자 3면 해설기사).


전두환의 4·13 호헌 조치는 개헌의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됐다. 야당과 시민단체들은 물론 대학가에서 그 조치를 비난하고 반박하는 성명과 대자보들이 봇물을 이루었다. 당장 호헌 담화 다음 날인 4월 14일 추기경 김수환 은 부활절 메시지를 통해 “정치의 새 시대를 열 것으로 기대했던 헌법 개정의 꿈은 기만과 당리의 술수 아래 무참히 깨졌다”고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김수환의 부활절 메시지 내용을 사회면(7면)에 3단으로 싣고 김영삼과의 인터뷰 등 정국의 향방에 관한 관련 기사들을 보도했다. 김수환의 부활절 메시지 내용을 전하는 「기대한 개헌 꿈 깨져 / 국민 슬픔 안겨줬다」라는 기사는 다음과 같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은 현실의 정치가 아무리 허망하고 사회 현상이 어두워 보여도 진리와 정의 사랑의 불을 지피면 주님은 억압된 민중의 짓밟힌 인간성을 살려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14일 오전 올해 부활절(19일)을 앞두고 메시지를 발표, 이 같이 밝혔다. 김 추기경은 “국민은 있어도 주권은 없고 신문·방송은 있어도 언론은 없으며 국회나 정당은 이름뿐이요 힘만 있고 정치는 없는 공허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또 현 시국과 관련, “국민의 여망인 민주화가 정략의 도구로 쓰여지고 보다 밝은 새 시대를 열 것으로 기대됐던 헌법 개정의 꿈은 기만과 당리의 술수 아래 무참히 깨어졌다”고 지적하고 “마지막까지 우리는 통치권자의 마음을 비운 결단을 기대했지만 막상 내려진 이른바 ‘고뇌에 찬 결단’은 한마디로 말해서 국민에게 슬픔을 안겨주었고, 생각하는 이들의 마음은 더 큰 고뇌로 가득 차게 됐으며 이 땅 위에는 다시 최루탄이 그칠 줄 모르고 터져 국민의 눈과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눈물 마를 날이 없게 됐다”고 개탄했다(4월 14일자 7면 기사). 


4·13 호헌 조치가 불 댕긴 6월 항쟁

4·13 호헌 조치에 대한 반대운동은 5월 들어 더욱 거세졌다. 5월 1일에 통일민주당(민주당)이 창당대회를 열고 본격적인 개헌투쟁에 나서는가 하면 대학가에서는 호헌 철폐를 위한 연합회를 결성하고 시위를 계속했다.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이름으로 발표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조작’에 관한 성명은 대대적인 반정부 투쟁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또 5월 27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과 종교계 등 재야단체들과 민주당,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망라한 발기인 2천1백91명 중 1백50명이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하고, 4·13 호헌 조치의 무효와 직선제 개헌 등의 관철을 위한 범국민운동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했다. 국본은 민정당의 후계자 지명일인 6월 10일 ‘박종철 군 고문살인 조작 범국민규탄대회’를 갖기로 결의했다.

6월 10항쟁은 그렇게 해서 시작됐다. 동아일보 6월 10일자 1면 머리기사(「민정, 노태우대통령후보 선출」)는 민정당 전당대회에 관한 것이었다.  머리기사 옆의 주요 기사는 국본이 주최하는 ‘박종철 군 고문살인은폐규탄 및 호헌철폐국민대회’를 알리는 내용이었다. 2, 6, 7면 등에 관련 기사가 나갔다. 그러나 그날 열릴 예정이던 국민대회는 5만여 경찰의 봉쇄·진압작전으로 무산됐고, 전국 24개 지역에서 50만여 명이 참가한 가두 규탄대회가 벌어졌다. 

그날 시위는 하루 전인 6월 9일 연세대에서 시위하던 학생 이한열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의식불명이 됐다는 소식으로 더욱 격렬해졌다. 경찰에 따르면 그날 전국적으로 4천1백명이 연행되어, 그중 3천2백여명이 훈방됐다. 또 수백여 명의 경찰과 시민이 부상했으며 시청 1곳, 파출소 15곳, 민정당 지구당사 2곳 등이 화염병과 투석 등으로 파손됐다. 특히 그날 이후 명동성당은 6월 항쟁의 중심지로 떠올라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게 됐다.

동아일보는 6월 11일자 1면 머리와 2, 3, 4, 5, 10, 11면 등에 6·10 항쟁 관련 기사를 채웠다. 사설과 현장 르포, ‘기자칼럼’은 물론 「‘6·10’ 이후 정국」이라는 시리즈가 시작됐다. 「최루탄 속의 하루」라는 화보도 지면을 차지했다. 2면 사설(「87년 6월 10일」)과 10면의 ‘기자칼럼’ (「성공회의 ‘6월 10일’」)은 그날의 분위기와 민심의 흐름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1987년 6월 10일, 그 폭풍우는 지나갔어도 유형무형의 상흔은 넓고 깊다. 밤새 최루탄 파편과 돌멩이를 쓸어내고 물을 뿌렸어도 매캐한 최루가스 냄새는 다음 날까지도 도심 거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 무슨 불행이고 비극인가. (···)
  (···) 경찰의 원천봉쇄에 맞선 성난 시위대의 습격으로 파출소 16개소를 비롯, 전국에서 20여 곳의 공공건물이 부서졌다고 한다. 경찰 버스와 사이카 17대가 파손되고 6대는 전소됐다. 쌍방 간의 부상자도 엄청나다. (···)
  (···) 그러나 무엇보다도 젊음의 손실은 참으로 가슴 아프지 않은가. ‘6·10’ 바로 전날 학우들과 더불어 시위를 벌이던 중 ‘최루탄 파편으로 보이는 물체’가 머리에 박힌 연대생 이한열 군은 지금도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한다. (···) 10일 당일에도 시위 도중 부상당한 학생·시민 30명 가운데 10여명은 최루탄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그중 머리에 파편이 박힌 외국어대생 한 명은 중태라는 소식이다(6월 11일자 사설).

  ‘박종철 군 고문살인은폐 조작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린 대한성공회 구내. 이곳은 10일 하루 종일 경찰 6개 중대 9백여명이 철통같이 봉쇄한 가운데 오후 6시 대회가 열리기 전까지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뿐 폭풍 전야와 같은 ‘정적’으로 휩싸여 있었다.
  (···) 대회 시간인 오후 6시. 주최 측은 대회 개최에 앞서 옥외스피커를 통해 애국가를 방송했다. (···) 대회장에서는 “해방 후 42년 동안의 독재에 종식을 고하고 새로운 민주정치의 장을 열게 하기 위한다”는 뜻에서 종을 42번 울렸고 오충일 목사의 사회로 대회가 진행됐다.
  규탄대회가 계속되는 동안 대회장 밖 태평로와 세종로를 지나는 많은 차량들이 10여분 이상 경적을 계속 울렸고 경찰들마저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제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태극기를 흔들고 지나가는 버스 승객,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 보이는 택시 승객, 클랙슨을 굳게 누르는 운전사, 시위 군중에 박수를 보내는 일부 시민들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광경이었던 것 같다. 야 측의 강행과 당국의 원천봉쇄로 개최 여부가 최대의 관심사였던 대회는 불과 70여명만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2시간 만에 끝났다(6월 11일자 10면 기자칼럼 ‘창’). 

경찰의 강경 진압에도 전국의 도시와 거리에서 시위의 물결은 계속됐다. 서울지검은 6월 13일 ‘6·10 대회’와 관련해 국민운동본부의 간부인 양순직(민주당 부총재) 등 12명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했다. 강경책의 일환이었다. 정부는 “이번 6·10 불법집회 및 폭력시위는 국법질서를 파괴하고 사회 혼란을 조성함으로써 폭력혁명을 유도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같은 날짜 1면 머리에 ‘양순직 등 12명 구속’에 관한 소식을  올리고 시위에 관한 관련 기사들을 쏟아냈다. 그 긴박함은 시위 현장뿐 아니라 「이래서는 안 된다」라는 2면의 사설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요 며칠 사이 시국은 참으로 급박하다. 큰 파도, 작은 파도가 주거니 받거니 증폭을 더해가면서 어떤 비등점을 향해 줄달음치고 있다. 강 대 강이 전면에 나서 이렇게 앞뒤 분간 없이 휘몰아칠 경우 우리가 흘러가 닿을 곳은 어디인가. 정치도 흔들리고 민심도 흔들리고 가파른 시국을 지켜보는 우리들의 마음도 한없이 흔들린다.
  (···) 대안 없는 급류에 몸을 내맡긴 표류 정국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그저  울고 싶은 심정뿐이다. 지금은 누가 정권을 잡고 못 잡고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이제 스스로 정치지도자들은 여와 야 또는 정권적 차원이 아닌 국가, 민족의 차원에서 판을 바꾸기 바란다. 집권의 차원이 아니라 역사적 요청인 국권 안정, 민주화의 차원으로 돌아가라. 스스로 못 돌아가면 결국 타율적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역사의 섭리 앞에 모두 경건하자.

 
김수환의 ‘4·13 호헌’ 철회 요구

동아일보는 6월 19일 1면 상자기사에 김수환과의 회견 내용을 간추려 보도하고 5면에 일문일답을 실었다. 그 회견은 ‘6·10 대회’ 이래 농성시위의 중심지가 된 서울 명동성당에서 사제단의 중재로, 학생과 시민들이 6월 15일 농성을 풀고 경찰 병력이 철수한 후 이루어진 것이었다. 회견 기사의 제목은 「“‘4·13’철회만이 위기 수습”」이었다. 김추기은  정부의 4·13 선언 철회와 개헌 논의 재개를 요청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정부는 4·13 선언을 철회하고 개헌 논의를 즉각 재개하는 것만이 지금의 정치 위기를 수습하는 길이다”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18일 본지와의 회견에서 이같이 강조하고 전두환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김영삼 씨 등 실세와 대화를 한다면 국민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을 것이며 내년 2월 영예롭게 퇴진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또 내년 평화적 정권 교체와 88 서울올림픽 등 양대 행사를 원만히 치르기 위해서는 여야 모든 정치인들이 정권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워야 한다면서 이것은 윤리 강의가 아니라 현실적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이어 정부·당이 민심의 소재를 똑바로 보지 못하면 더 큰 불행이 올 것이라고 지적하고 정부가 야당과 대화하고 개헌한다면 광주 사태에 대해서도 국민들은 나라의 단결을 위해 관대하게 보아줄 것이라고 말했다. 김추기 경은 명동성당 농성 사건은 교회가 중재하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한 실례며 시민들의 호응도 문제 해결에 상당히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대화와 타협의 ‘명동 식 해결 방식’이 정치의 장으로 확산되어 모든 시국관계 구속자들을 하루빨리 석방하고 시국관계 수배자들에 대한 수배도 즉각 해제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6월 19일자 1면 상자기사).


바로 그날(6월 19일) 민주당 총재 김영삼은 난국 타개를 회담을 갖자고 대통령 전두환에게 공식 제의했고, 6월 24일 두 사람이 만났다. 전두환은 청와대에서 김영삼과 3시간 대화를 했는데, 개헌 논의 재개를 다짐하고 김대중 등의 연금 해제에 관해서도 긍정적 견해를 표시했다. 동아일보는 6월 24일 자 1면 머리에「개헌 새 정치 일정 여야 합의로 / 전 대통령·김 총재 회담」이라는 통단기사를 올리고 전두환이 ‘4·13 조치 철회의 뜻을 밝힌 것’으로 전했다. 또한 김대중의 연금도 해제됐다고 밝혔다.

동아일보는 6월 25일자 2면 사설에서 “청와대 회담이 폭발하는 민심을 가라앉히는 데는 미흡했다”며 정치의 대전환을 모색하라고 촉구했다. 

  온 국민의 기대와 관심 속에서 열린 전두환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간의 청와대 회담은 오랜만에 여야 영수의 웃음 띤 얼굴과 악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회담 이후의 정국’에 깔린 먹구름은 완전히 걷어내지 못한 것 같다. 세 시간 동안이나 계속된 회담이 시국 수습에 관한 전반적인 합의에는 이르지 못하고 다만 ‘할 말을 다한 것’과 4·13 조치의 사실상 철회를 가져온 데 그쳤기 때문이다.
  (···) 이번 청와대 회담의 성과가 비상시국을 진정시키고 폭발하는 민심을 가라앉히는 데 미흡한 점이 있는 건 사실이다. 4·13 조치를 사실상 철회하고 개헌 논의를 다시 국회에 되돌린다고 해서 사태가 해결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지난 1년 동안 아무런 진전도 못 본 국회에 공을 다시 던진다는 것은 4·13 이전의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데 불과하기 때문이다. (···)
  (···) 이번 청와대 회담이 미흡하게 비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김대중 씨 등 재야인사들의 사면·복권문제가 아무런 변화도 없기 때문이다. 그 문제는 ‘지난 정치의 청산’이라는 의미와 함께 앞으로의 정국을 평화롭게 풀어가는데 매우 중요한 변수이다. (···)
  정부·여당은 무엇보다 작금의 시위 사태를 통해 민심의 향방을 제대로 파악, 정치의 대전환을 모색해야 하리라고 본다.


동아일보의 사설이 지적했듯이 사태는 다시 ‘4·13 호헌 조치’ 이전으로 돌아간 상황이었다. 민주당과 국본 측은 6월 25일 “4·13 조치의 즉각 철회, 직선제 개헌 또는 선택적 국민투표 실시, 시국사범의 전면 석방과 사면·복권 등의 요구가 전혀 수용되지 않았다”며 6월 26일로 예정된 국민평화대행진에 참여하기로 결의했다. 6월 25일 전두환은 청와대에서 김수환을 만나 시국 수습을 위한 의견을 교환했고 6월 26일에도 종교계 지도자들을 만났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 이루어진 6월 26일 저녁의 평화대행진은 6월 항쟁의 절정을 이루었다. 전국의 37개 도시 2백69곳에서 1백80만여 명이 시위에 참가한 것으로 보도됐다. 특히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중산층과 사무직 시민들의 참여는 전두환 정권뿐 아니라 해외 언론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리고 국민평화대행진이 벌어진지 3일 만에 이른바 ‘6·29 민주화 선언’이 나온 것이다.


  노태우의 6·29 민주화 선언

동아일보는 1987년 6월 29일자 1면 머리에「직선제 연내 개헌/ 김대중 씨 사면복권 구속자 석방」이라는 통단기사를 싣고 민정당 대표 노태우의 이른바 ‘6·29선언’을 보도했다. 부제는 「연내 대통령선거 내년 2월 정부 이양 / 언기법 개폐 지방의회 구성 예정대로 / 대학 자율성 보장 교육자치 모두 실현」 등이었다. “민정당의 노태우 대표위원이 29일 대통령중심제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고, 김대중 씨 사면복권과 모든 시국사범의 석방 등 시국 수습을 위한 8개 사항을 자신의 ‘특별선언’으로 밝히고 이 8개항 제안을 전두환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만약 이 결심들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민정당 대통령후보와 대표위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어 2, 3, 4, 5, 11면 등에 관련기사들이 실렸다.

동아일보는 2면 사설(「민주화를 향한 대결단」)로 ‘6·29 선언’을 환영했다.

  드디어 민주화의 문을 여는 대결단이 내려졌다. 그것은 집권당 스스로가  역사와 국민 앞에 ‘대화합과 위대한 국가로의 전진’을 다짐하면서 내린 결단인 것이다.
  (···)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여당이 민주 발전에 앞장서야만 국민의 희생 없이, 그리고 광주 사태와 같은 과거의 아픈 상처도 아물릴 수 있다고  주장해온 우리는 이제야말로 화해와 타협의 정치를 새로 시작할 때라고 본다.
  확실히 노 대표의 이번 구상은 이 나라를 어둡게 했고 국민의 가슴에 응어리를 남겼던 먹구름을 걷히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본다. 한결같이 민주화를 위한 결단을 촉구해온 민주당 등 야당과 재야세력도 이 결단을 바탕으로 대타협의 현실적 방안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여야 정치인이 이번 구상을 재집권을 위한 정치적 술수로 이용하려 하거나 민주화 그 자체보다는 집권 욕에만 사로잡힌다면 모처럼의 기회를 무위하게 흘려보낼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 1987년 6월 29일이 민주발전사의 빛나는 첫 페이지가 되도록 여야 정치인과 국민 모두가 다 함께 힘을 합해 노력하자.

민정당은 긴급 의원총회를 열고 ‘노태우 구상’을 당의 공식 입장으로 추인했고, 전두환은 7월 1일 특별담화를 통해 6·29 선언을 대폭 수용하겠다고 발표했다. 6·29 선언이 나오기까지의 뒷이야기에는 수많은 주장과 증언들이 담겨 있었다. 그것들을 종합해보면 어느 정도 윤곽이 나온다. 6·10 항쟁에 대한 대응책으로 전두환은 비상계엄 선포 계획을 세웠으나 그에 따른 부담과 미국의 반대 등으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만든 전두환의 또 다른 각본이 6·29 선언인 셈이었다. 야권의 분열을 이용하고, 정부·여당의 막강한 조직과 자금 동원력을 활용한다면 직선제에서도 정권 유지가 가능하다는 계산을 전제로 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언론기본법 폐지와 언론노조 결성

6·29 선언이 나온 지 보름 후인 7월 14일 문공부장관 이웅희는 언론기본법(언기법)을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6·29 선언 이후 민주화 분위기에 힘입은 바 컸다. 언론자유의 창달을 위해 언기법을 폐지하겠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 또 지방주재기자제 부활, 프레스카드제도 폐지, 그리고 신문의 증면을 약속하기도 했다. 노태우는 ‘6·29 선언’에서 “정부가 언론을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고 말한 바 있었다. 그의 선언이 문공장관의 언론기본법 폐지 방침으로 이어진 것이다. 동아일보는 7월 14일자 1면에 4단 기사를 싣고, 7월 16일자 2면에 「언기법 폐지 후의 새 질서」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근래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언론의 자유와 자율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다. 그동안 언론자유를 억압하는 주범(?)처럼 알려진 언론기본법 폐지가 확실시되면서 그 이후에 어떤 형태의 새 언론 질서가 들어설 것인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 한마디로 우리는 언론이 모든 통제의 굴레에서 벗어나 원칙적으로  언론 본래의 자율기능에 맡겨져야 한다고 믿는다. 정부를 비롯한 정치권력은 기본적으로 노태우 대표가 ‘6·29 선언’에서 말한대로 ‘언론을 장악할 수도 없고 장악하려 시도해서도 안 된다’는 원칙을 굳게 지켜나가야 한다.
  (····) 이제 언기법 폐지와 함께 80년에 출발했던 현행 언론구조는 마땅히 해체, 개편되어야 한다고 본다. 아무런 법적 뒷받침도 없이 이른바 ‘신문협회의 자율 결정’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언론통폐합 조치는 새 시대에 맞춰 재구성돼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그동안 ‘보이지 않는 관행’으로 제작에 간여해왔던 ‘보도지침’이니 ‘홍보정책실’이니 하는 정부 통제의 손길도 마땅히 거두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언기법 폐지 발표 후 8월 1일 ‘각 시도 단위 1명씩 주재’를 원칙으로 하는 지방주재 기자의 부활이 이루어지는가 하면 10월부터 기독교방송의 뉴스방송을 부활시키는 ‘CBS 기능 정상화’ 조치도 시행됐다. 그리고 1987년 11월11일 국회는 언론기본법을 폐지했다. 언론기본법 대신 ‘정기간행물 등록 등에 관한 법률’과 ‘방송법’이 제정됐고, ‘보도지침’ 파문의 진원지가 됐던 문공부 홍보조정실이 문을 닫고 프레스카드 제도는 폐지됐다.

언론사 내부에도 변화가 크게 일어났다. 노동조합의 결성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것은 6월 항쟁 이후 거세게 불어닥친 노동계의 민주화운동에 힘입은 바 컸다. 언론사의 노조 결성은 1987년 10월 29일 한국일보를 시작으로 11월 18일 동아일보, 12월 1일 중앙일보로 이어졌으며 12월 9일에는 MBC에 최초의 방송노조가 탄생했다. 언론사의 노조들은 자연스럽게 편집권 또는 편성권의  독립을 지향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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