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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화국에 대한 국민의 심판동아일보 대해부 4권 - 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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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1.09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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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2 총선에서 패권 잃은 민정당

동아일보는 1985년 1월 1일자 1면 머리에 「국민심판 ‘총선의 해’ 열리다」라는 기획기사를 올렸다. “정치 활성화의 기대 속에 85년 선거의 해가 그 막을 열었다. 제5공화국 정권이 내건 정치적 목표의 중추인 ‘88년 평화적 정권교체’를 향한 정치 발전과 정계 개편의 서장이 될 12대 총선을 눈앞에 두고 ‘새해 정국’이 숨 가쁘게 움직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동아일보는 또 신년기획으로 「표밭은 뜨겁다」라는 총선시리즈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가 무엇인가 변화를 보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였다.

1월 18일 신한민주당(신민당)이 서울 앰배서더 호텔에서 창당대회를 열었다. 신민당의 모체는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였다. 민추협은 김영삼의 상도동계와 김대중의 동교동계의 연합체로, 공화당 출신 등이 합류해 1984년 5월 18일 정식 출범했다. 그들이 1984년 12월 20일 신민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1985년 1월 18일 창당대회를 갖게 된 것이다. 그 주축은 이른바 ‘정치규제’에서 풀린 재야인사들이었다. 그들의 신민당 창당은 말할 것도 없이 2월 12일의 제12대 총선을 대비한 것이었다.

동아일보의 1월 18일자 1면 머리기사는 ‘민정당 전국구후보 81명 발표’였다. 그날 신민당의 창당대회 기사는 1면 머리기사 옆으로 밀렸다. 그러나 「신한민주당 창당」이라는 그 기사는 머리기사보다 제목이 훨씬 더 큰 데다 창당대회 사진을 곁들이는 편집을 함으로써 사실상 1면 머리기사나 마찬가지였다. 동아일보는 신민당 총재에 이민우, 부총재에 김수한·이기택·김녹영·노승환·조연하가 선출됐다고 보도하고 3면에 해설기사와 창당선언문을 싣는 등 신민당 창당에 큰 비중을 두는 편집을 했다. 또 1월 19일자 3면에는 신민당 총재 이민우 인터뷰 기사(3면)를 내보내고, 2면에 「신민당이 나갈 길」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그 논조는 매우 호의적이었다. 

  정치규제에서 풀린 재야인사들을 중심으로 신한민주당이 18일 창당되었다. 제12대 총선을 목전에 두고 시간에 쫒기면서도 복잡한 각 계파간의 이해관계를 잘 조정하여 72개의 지구당을 거느린 신당을 출범시킨 정치역량을 높이 평가한다.
  (···) 그들은 지난 4년간 정치적 박해와 고난을 감내해온 사람들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제도권으로 흡수된 어떤 정치인들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이다. 이제 그들이 과거의 계보를 초월하여 한 자리에 모였다는 것은 매우 뜻있는 일이다.
  (···) 우리는 솔직히 신한민주당의 앞날이 과거에 걸어왔던 야당의 길 못지않게 더욱 험난하고 고된 가시밭길일지도 모른다고 느낀다. 새 당이 당 내외로 부딪칠 과제는 매우 벅차다. 그들은 민한당과 적자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선명 논쟁을 벌이는 한편 막강한 집권여당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
  (···) 우리는 신한민주당의 출현이 기존 정치질서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를 주목한다. 강한 야당이 있어야 여당도 강해지는 법이다. 신한민주당의 창당을 축하하며 지난날의 고난에 값하는 발전이 뒤따르기를 바란다.

당시 민정당은  패권 유지를 위해 민한당이나 국민당 등을 만들고 지원함으로써 위성정당화했을 뿐 아니라 김대중·김영삼·김종필은 묶어두고, 나머지 규제 대상 정치인들을 단계적으로 풀어줌으로써 그들이 한 정당으로 규합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또 12대 총선일자도 새로 출범한 신민당이 선거운동을 준비하기 어렵도록 2월 12일로 앞당겼다. 게다가 선거일은 대학생들의 방학이자 가장 추운 때여서 투표율을 낮추는 효과도 볼 수 있었을 것이고, 법정 선거운동 기간도 짧아졌다. 모든 것이 신민당에 불리했다.

그런 상황에서 1월 23일 총선공고가 발표됐다. 동아일보는 그 날짜 1면 머리기사(「여야 기선 잡기 총력전 / ‘2·12 총선’ 공고 공식 선거운동 돌입」)를 통해 총선 일정을 소개하고 2, 3, 9면 등에 관련 기사를 실었다. 특히 이 신문은 2면 사설(「선거일 공고」)은 ‘2·1 2총선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선심 행정과 관권 개입 시비, 금품 물량공세와 흑색선전 등 변칙 탈법행위가 전 지역구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어수선하고 착잡한 마음으로 총선 공고를 지켜본다. ‘공명’의 다짐과 외침은 그 어느 때보다 높지만 그에 못지않게 ‘우려’의 소리 또한 높다.
  (···) 여건과 분위기가 아무리 공명을 기대할 수 없다손 치더라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일임에 우리는 여기서 관과 후보자·유권자 모두에게 자숙과 자제와 각성을 호소코자 한다. 공명의 다짐이 진정이라면 정부와 여당은 성의를 다해 가시적인 노력의 흔적을 보여야 할 것이며 국민의 대표자가 되겠다고 나선 후보자들은 분위기를 혼탁시키는 짓거리 등을 당장 걷어치워야 할 것이다.
  (···) 선거는 민주주의의 처음이자 끝이라고 말해진다. 선거가 무의미해지면 다른 모든 것도 무의미해진다. 선거가 잘못되면 다른 아무 것도 제대로 될 것이 없다. 환멸만 또 한 번 안겨줄 뿐이다. 우리는 앞으로의 20일을 지켜볼 것이다.

선거운동이 시작된 1월 24일 문교부는 대학의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10년 만에 새 학기부터 학생회를 부활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그것은 정부가 대학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선거용이라는 의혹을 받았다. 하필이면 총선을 앞두고 그런 발표를 하는 배경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그 날짜 1면 머리에 「학도호국단 사실상 폐지」라는 제목으로 한국대학교육협의회의 건의를 받아들인 문교부의 발표를 보도하고 해설을 덧붙였다. 이 다음 날인 1월 25일자에는 그 조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설 2편을 실었다. 「선거와 ‘정치안정’의 뜻」 「‘호국단’의 사실상 폐지」라는 사설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최근 때가 선거철이어서 그런지 정치적 안정이 자주 얘기되고 있다. 선거라는 큰 정치행사를 치르는 과정에서 정치·사회적 안정이 손상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 우리는 선거철만 되면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다시 한 번 민심의 동향에 민감해지고 국민이 바라는 시책을 펴려고 애쓰는 것을 보게 된다. 지난 한 해 동안 온 국민을 우울하게 했던 학원문제의 해결을 위해 학도호국단을 사실상 폐지하고 학생 자치기구를 부활키로 한 조치도 이런 맥락에서 파악하려 한다. 새봄의 신학기를 걱정스런 눈으로 지켜보아온 우리는 이 같은 조치가 학원 안정화의 주춧돌이 될 것을 바란다.
  사실 바른 정치보다 더 좋은 안정의 처방은 없다. 참다운 의미의 정치적 안정이란 강요된 침묵 아래 놓여 있는 정태적인 상태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정치의 침체가 안정과 동의어일 수는 없다(1월 25일자 제1사설).

  지난 여름 이래의 대학 분쟁은 일부 과격한 학생이 일으키고 있다는 견해는 부정확하고 깊은 사회적 이유가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 분쟁의 첫 시작이 학도호국단 폐지와 학생자치기구의 설치 요구였고, 이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
  (···) 이번 학도호국단의 사실상 폐지로 대학의 자치는 새 단계로 접어든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방향이다. 학생자치회라고 하지만 그 자치의 범위와 방식에는 어려운 문제가 있다. 인사문제, 재정문제까지 어떤 형식의 ‘참가’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순전한 학원 내의 활동, 시설의 관리에 상당한 발언권과 표결권을 주는 것에는 이론이 없다(1월 25일자 제2사설).

2월 들어 총선 합동연설회가 본격화되면서 유권자들의 관심과 참여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2월 8일 사실상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이 귀국하면서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 귀국에 관한 기사는 1면에 2단으로 쓰라는 ‘보도지침’을 모든 신문사에 내려보냈다. 동아일보 역시 2월 8일자 1면에 2단으로 그 기사를 다루었다. 동아일보는 같은 날짜 사설에서 각 당 후보들의 합동유세 현장이 매우 뜨거웠고 그 열기를 통해 정치를 옥내에서 옥외로 끌어냈다고 평가했다. 합동선거 유세장의 열기가 심상치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유세와 투표 사이」라는 제목의 사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되돌아보면 지난 열흘 동안은 짧지만 화려했던 정치의 해빙기였다. 전국적으로 4백만명 이상의 인파가 유세장에 몰려들어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정치가 동면에서 깨어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우리는 이번 유세 과정을 통해 그동안 국민들이 얼마나 표현의 자유에 굶주려 있었으며 속 시원한 소리에 목말라 있었던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우리는 그동안 택시 안에서는 물론이고 서너 사람만 모여 있어도 옆 사람을 힐끗 쳐다보면서 입을 여는 것이 어느덧 습관화되어 있었으며 친구끼리 만난 자리에서도 정치 얘기는 으레 뒷전으로 밀리고 술만 마시기 일쑤였다.
  그런데 유세장에 몰린 인파와 유권자들의 폭발적인 정치적 관심이 침묵의 벽을 깨뜨리고 통제된 언론과 폐쇄된 회로에 갇혀 있던 정치를 옥외로 끌어낸 것이다. 정치는 언제까지나 옥내에 가두어 둘 수 없으며 국민의 입 또한 오래 막아놓을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뜨거웠던 유세 일정이 모두 끝나자 유권들은 유세 기간이 너무 짧아 후보자를 대할 기회가 적었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단 한 번의 개인연설회조차 허용되지 않고 앞뒤를 돌아보아도 금지규정뿐인 현행 선거제도 아래서 그나마 유일하게 후보자와 유권자가 직접 대면할 기회는 합동연설회뿐인데 열기가 오르자마자 싱겁게 끝나버렸다는 것이다.

사실 민정당이 총선을 앞두고 벌인 공명선거를 위한 ‘1천만명 서명운동’은 애당초 일종의 선거운동으로 지목을 받았다. 신민당이 그것을 관권선거라고 비난하며 중지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신민당은 그 성명에서 “민정당이 전개하고 있는 공명선거 1천만 서명운동은 전 유권자를 민정당원화하고 서명자들에게 중압감을 주는 부정선거운동”이라고 주장했다. 또 그 성명은 “TV의 공명선거 캠페인 프로는 선거와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유발시키며 정치를 희극화하려는 선거 장난”이라고 지적하면서 시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동아일보 등 대부분의 언론은 별다른 논평을 내놓지 않았다. 그런 관권선거를 무색하게 한 것이 짧은 합동유세였고 거기서 민심이 어디 있는지를 확인하게 된 것이다.

2·12 총선에서 나타난 민의는 변혁을 의미했다. 일종의 선거혁명이라고 할 만 했다. 우선 높은 투표율이 그것을 대변한다. 투표율은 84.2%로 5·16 이후 최고를 기록했으며 11대 총선 투표율 78.2%를 훨씬 상회했다. 지역구 당선자는 민정당 87명, 신민당 50명, 민한당 26명, 국민당 15명이었으며 전국구는 민정당 61석, 신민당 17석, 민한당 9석, 국민당 5석이었다. 득표율은는 민정당 35.25%, 신민당 29.26%, 민한당 19.68%, 국민당 9.16%였다. 특히 신민당은 서울·부산·광주·대전 등에서 후보 전원이 당선했고 서울에서 43.2%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동아일보는 2월 13일자 1면 머리에 「신민 대도시 압승 제1야당」이라는 기사를 올렸다. 2면의 사설(「‘큰 정치’ 생각할 때」) 그 의미를 ‘야당다운 야당의 출현’이라고  평가했다.

  국민의 선택은 끝났다. 그리고 그 심판은 가혹하리만큼 분명하고 서릿발 같았다. 그동안 정치의 뒤안길에서 무관심의 존재로만 치부돼오던 국민들의 침묵은 결국 더 없는 유관심의 침묵이었음이 확인됐다. (···)
  (···) 특히 어느 누구의 눈에도 제1야당이 분명할 것으로 보이던 민한당이 무참하리만큼 침몰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지금까지 제1의 견제세력임을 자임해온 그들을 버리고 또 다른 야세를 대타로 택한 것은 기존의 견제세력에 대한 불신임이자 야당은 야당다워야 한다는 혹독한 질책이 아닌가. (···)
  (···) 야당에 대한 냉혹한 심판은 또 정치를 주도해오고 있는 정부·여당에 대한 비판과 충고에 다름 아닐 것이며 이 점 민정당으로서는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전국구를 합쳐 1백49석으로 원내 제1당이라는 안정세력은 구축했지만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대부분 힘겹게 당선됐다는 사실에서 뼈저린 자기 성찰과 현실 직시가 있어야 하리라고 보는 것이다.


전면적인 해금조치와 여야의 정면 대결

신민당이 총선에서 승리한 후 야권에는 큰 변화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1985년 3월 6일 정치활동 피규제자에 대한 전면적인 해금조치가 이루어졌다. 12대 총선 결과 정치활동 규제가 별 효과를 발휘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었다. 동아일보는 해금조치 하루 전인 3월 5일자 1면에 “김대중·김영삼·김종필 씨를 비롯한 14명의 정치활동 피규제자에 대한 전면 해금이 6일 단행될 것으로 알려졌다”고 보도했다. 2면 사설(「마지막 해금」)에서는 “묶고 묶이는 악순환은 다시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 전면 해금이 6일 단행되리라 한다. 보도대로 완전 해금이 단행되면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제정된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은 4년 4개월 만에 그 기능을 상실한다. 새로 개원되는 국회에서 폐지법안만 처리하고 나면 그것으로 또 하나의 정치적 소급법은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 사실 12대 총선의 열기는 강압적이고 획일적인 정치, 소외된 실체를 외면한 채 하는 정치는 더 이상 안 된다는 교훈을 남겨주었다. 총선 후 집권세력이 보이고 있는 일련의 자세 변화도 풀 것은 풀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현실 대처 없이는 이끌기 힘들다는 인식과 자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된다. (···)
  (···) 건국 이후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네 차례에 걸친 정치규제의 소급입법을 경험해오면서 그때마다 심각한 정통성 시비의 악순환을 거듭해왔다. 그 같은 악순환이 또 다시 되풀이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묶고 묶이는 정치는 묶인 자뿐만 아니라 묶는 자에게도 동시에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우리는 진작부터 깨달아야 했었다.

동아일보는 1985년 3월 6일자 1면 머리에 「김대중·김영삼·김종필 씨 해금」이라는 주먹만한 제목으로 “김대중·김영삼·김종필 씨 등을 포함한 마지막 전면 해금 조치가 6일 취해졌다”고 보도했다. 2, 3, 4, 5, 7면 등에는 관련기사를 싣는 등 그 조치에 큰 의미를 두었다. 2면에는 사설과 함께 「‘전면 해금’이후 정국」이라는 제목으로 기획시리즈를 시작했다. 3면에는 전체를 털어 해금자들의 소감을 싣는가 하면 4면에는 정치부 기자들의 긴급좌담을 통해 해금 전후의 정국과 향후 정치역학을 전망했다. 5면에는 해금조치의 정치적 의미와 함께 관련 칼럼을 실었다. 7면(사회면) 머리에는 「“다시 이런 사태 없었으면···”」이란 제목으로 해금자들의 주변 표정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3월 15일 회담을 갖고 신민당을 중심으로 야권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민한당 간부들이 대거 탈당해 신민당에 입당했다. 신민당은 재적의원 3분의 1이 넘는 1백3석을 확보하면서 단독으로 국회를 소집할 수 있는 거대 야당이 됐다. 그것은 대통령직선제 등 헌법개정운동과 함께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가는 발판이 됐다.


동아와 조선의 뜬금없는 민족지 논쟁

신민당의 거대화로 정국은 민정당과 신민당의 대결로 첨예화되며 더욱 긴장감을 일으켰다. 총선 후 민주화가 가열되는 양상이었고 대통령직선제를 놓고 여야의 갈등이 깊어갔다. 그런 시기에 뜬금없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민족지 논쟁이 벌어졌다. 1985년 4월 일어난 그 논쟁은 시기나 내용이 적절하지 않다는 여론의 비판을 받았다. 논쟁의 근원지는 동아일보의 창간 기념기사였다. 고려대 명예교수 조용만이 1985년 4월 1일자 창간 65주년 기념호 3면 기고문에서 조선일보를 ‘친일신문’으로 기술한 내용이 조선일보를 자극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또 4월 12일 6면 상자기사에 ‘동아일보는 반일신문이며 조선일보는 친일신문’이라고 주장한 일본의 한 우익신문 자료를 소개하기도 했다. 조용만이 쓴 기고문의 ‘문제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 총독부당국은 신중히 고려한 끝에 민족진영 측으로 동아일보를 허가하고, 다음으로 실업신문을 내겠다고 하는 대정실업친목회 측에 조선일보 를 허가하고, 끝으로 신일본주의를 표방하는 국민협회 측에 시사신문을 허가하였다. 이렇게 해서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신문 하나, 실업신문 하나, 친일신문 하나를 허가해서 균형을 잡히게 하였다고 발표했지만 실상은 다른  속셈이 있었던 것이다.
  즉, 총독정치에 비판적일 동아일보의 허가에 대해서는 자기네들 속에서도 이론이 많았지만 실업신문임을 위장한 친일신문과 진짜 친일신문인 시사신문이 합작하면 2 대 1로 그까짓 민족진영의 동아일보를 누르지 못하겠느냐는 판단 아래에서 동아일보를 허가한 것이었다. (···)
  (···) 한편 대정실업친목회에서 발행하기로 된 조선일보는 상업은행 두취(頭取)인 조진태를 사장으로 앉히고, 친목회의 중견인 최강을 편집국장으로 하여 실업신문을 표방하고 나타났다. 우선 주식회사를 만든다고 주 모집에 착수했으나 민중들은 내용으로 친일신문임을 알고 있으므로 주 모집에 응하지 않았고 독자들은 자꾸 떨어져가서 발간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경영난에 허덕이고 기회주의 신문으로 전락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전두환 정권과의 유착관계 속에 ‘무서울 게 없는’ 신문으로 커나가고 있었다. 그런 조선일보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조선일보는 4월 14일자 3면에 논설고문 선우휘가 직접 나서 「동아일보 사장에게 드린다」라는 글을 실었다. 선우휘는 “동아일보가 당시 친일파였던 박영효에게 허가한 신문이라며 민족주의 신문을 만들라고 허가받았다고 자랑하는 것은 웃지 못 할 난센스”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이제 변명하거나 화해하는 기회는 잃어버리고 말았고, 오직 동아일보가 가만히 있는 사람을 비방한 행위에 대하여 사과할 일만이 남았다”며 “그러면 나는 조선일보 사원들과 함께 마음을 풀겠다”고 했다.

선우휘의 글에 대한 대답으로 동아일보는 4월 17일자 3면 광고 난에 동아일보사의 이름으로 내보낸 글(애독자 제현에게 알려 드립니다」)을 통해  “조선일보가 친일신문으로 창간된 것은 사실 기록에서 착오가 없는 것”이라고 재차 설명하고 독자들의 성원을 부탁했다. 조선일보와 더 이상의 논쟁을 하지 않겠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주요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본보는 지난 4월 1일자 창간 65주년 기념 특집에서 우리나라의 신문 창간기념호 발행의 관행으로 창간의 역사를 회고했습니다. 원로 문학자이신 조용만 교수의 「본보 창간의 시대적 배경」의 글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
  (···) 지난 14일자 조선일보 3면에서 한 칼럼니스트는 조 선생의 글이 조선일보를 친일지로 몰았다고 단정했습니다. 조 선생 글을 제목 그대로 그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한 창간 과정의 소개로 보면 흥분할 일이 아닐 것입니다. 조 선생은 이와 같은 글을 84년 10월 20일자 중앙일보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서 또 금년 4월호 월간조선 조선일보 창간 65주년 특집에서도 쓰셨습니다.
  (···) 우리는 월간조선 4월호 조선일보 창간 65주년 특집의 조 선생 글을 소개함과 동시에 본보 창간 65주년 기념 특집의 조 선생 글에 본사의 첨삭이 없었으며 그 글이 사실 기록에서 착오가 없었다는 점도 밝혀두고자 합니다. 또한 ‘작가·논설고문’되는 분이 원로 문학자에게 폭언을 서슴지 않은데 개탄을 금치 못하며 결과적으로 조 선생의 명예에까지 누가 미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 우리는 양자가 65년 전의 기록 시비로 지면을 더 이상 소비하고 자제를 잃을 경우 역사에 흠을 남기고 사회적 안정을 해칠 것을 걱정합니다.
동아는 어떤 경우도 민족지·민주지·문화지로서의 정통을 지키기 위하여 용기와 인내를 잃지 않을 것을 애독자 여러분에게 약속합니다. 

이에 화가 난 듯, 조선일보는 4월 19일자에 조선일보사 명의로 낸 장문의 글(「우리의 입장: 동아일보의 본보 비방에 붙여」)을 통해 동아일보가 그 태생부터 친일신문이었으므로 차제에 민족의 정통과 이단의 옥석을 가리는 작업을 벌이자고 제의했다. 조선일보사는 그 글에서 “식민통치의 동맹군이었던 토착귀족·지주·기성 친일언론인으로 혼성된 측에 허가된 것이 바로 동아일보였다”고 강조했다. 동아일보가 더 이상의 논쟁을 벌이지 않음으로써 두 신문 간의 민족지 논쟁은 그 정도에서 마무리된 셈이었다. 논쟁의 시기나 내용으로 보아 두 신문의 주장대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치고받기’였다.


2·12 총선의 충격과 그 파장

전두환 정권의 이념서적 압수 등 출판물 탄압은 무자비했다. 정권은 이미 1980년부터 언론의 자유를 말살하는 조치를 취해왔다. 1980년 7월 모두 172종에 이르는 정기간행물의 등록을 취소한 이후에도 출판물에 대한 각종 단속은 계속됐다. 1985년 2·12 총선의 결과에 충격을 받은 5공은 5월 3일 이념서적 50종과 유인물 46종 등 96종에 대한 무기한 단속 방침을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5월 3일자 사회면(11면) 머리기사로 그 사실을 보도했다.  압수당한 서적들 가운데는 <겨울공화국> <김대중 옥중서신> <노동운동과 노동조합> <어느 청년노동자의 죽음> <항일농민운동 연구> <유럽 노동운동사> 등이 들어 있었다. 5공은 또 이념서적의 온상지로 지목했던 일월서각과 풀빛출판사 등을 영장도 없이 압수수색했다. 동아일보는 그런 단속에 대해 5월 6일자와 11일자에 비판적인 사설을 내보냈다. 「불온서적의 한계」(5월 6일자), 「‘출판의 자유’의 법리」(5월 11일자)라는 사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출판가에 갑작스럽게 몰아닥친 이른바 ‘이념서적’의 압수단속은 헌법이 보장한 원천적인 출판자유와 정부가 당위로서 내세우고 있는 ‘불온사상’의 사회침 투 방지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 그러나 대상이 책이라는 점에 유의하는 우리는 이번 조치가 궁극적으로는 출판의 자유와 학문 연구의 위축을 가져올 것에 짙은 우려를 표명한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은 이런 문제에 단속·압수로만 대응할 것이 아니라 사회의 폭넓은 의견을 묻고 집약하여 ‘불온’의 한계나 기준을 내놓고 토론에 붙임으로써 사후의 부작용을 막는 일이라고 본다.
  (···) 또한 이번 일을 계기로 ‘불온’이 관의 의사에 따라서만 판정될 것이 아니라 관민 공동으로 구성되는 심의기구에 의해서 운영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더 좋은 것은 중간집단이 자율적으로 이를 주관하는 일이다(5월 6일자 사설).

  출판의 자유는 언제나 언론의 자유와 더불어 논의된다. 한 묶음으로 표현되는 ‘언론출판의 자유’는 서로 다른 의견과 사상의 보호를 통해 국민자치의 원리를 구현한다는 정치적 의미에서도 따로 떼어 논의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
  따라서 민주제의 헌법들은 언론출판의 자유를 거의 불가침의 기본권으로 한 조항에 규정한다. 다만 그 예외로서 사회와 개인의 권익을 침해할 경우, 실정법에 따른 사법적 소추 등의 길을 터놓았을 뿐이다. 우리의 법체계도 ‘법을 통한 제한과 유보’만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선 크게 보아 그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한창인 이른바 ‘불온서적’ 또는 ‘금서’의 압수를 둘러싼 논의들은 그 기본적 법리를 외면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짙다. 가령 현실적 정황론이나 독서층의 문화적 소화력을 강조하는 논의들은 어떻게 보면 행정부처가 ‘금서’의 판정권을 당연히 갖는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는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 한마디로 어떤 현실론도 기본적 법체계의 원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출판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나 억제는 정연한 법리를 토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 구체적 준거는 물론 실정법이며 또한 사법적 판단이다. 그리고 그 실정법을 통한 제한이나 억제도 명확성의 원리나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의 기준 등을 바탕으로 정밀하게 가려져야 한다(5월 11일자 사설).

1985년 5월이 되자 ‘광주’는 민주화운동의 본격적인 쟁점으로 다시 떠올랐다. 5월 17일에는 전국에서 수만여 명의 학생들이 광주 학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어 5월 23일 12시경 서울대 함운경을  포함한 73명의 학생들이 서울 중구 을지로에 있는 미국문화원(USIS) 2층 도서관을 점거하고 72시간 동안 농성을 벌였다. 1982년 3월 18일 문부식과 부산 고신대 학생들이 부산 미국문화원에 방화한 데 이은 충격적 사건이었다.

동아일보는 5월 23일자 1면에 「서울 미문화원 대학생 난입 농성」이라는 큰 제목을 싣고, 관련 기사는 사회면인 11면에 게재했다. 동아일보는 농성이 계속되는 동안 연일 사설 등으로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 5월 24일자 「민주방식의 민주화를」, 25일자 「농성을 풀고 보자」, 27일자 「미 문화원 농성 풀린 뒤」라는 사설은 동아일보가 그 사태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충격적인 일이다. 일부 대학생들의 미문화원 점거 사건은 그 동기와 목적의 정당성 여부를 넘어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폭력은 민주화의 촉진에 도움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그 장애요인이 될 뿐이다. (···)
(···· 그러나 ‘장내’의 정치인들도 깊은 자성이 없을 수 없다. 폭력에 대한 비난만으로 그 재발은 억제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환부’의 절제를 넘는 ‘소지’의 내과적 치유가 요구된다. 그러자면 “왜 이렇게도 불행하고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야 했던가”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이른바 민주화의 방향과 속도에 문제는 없었던가. 또한 그 목표의 설정에는 잘못이 없었던가, 민심 파악의 깊이에도 모자람이 없었던가가 두루 점검되어야 한다. 그 뼈저린 성찰과 궤도의 재설정 위에서만 불행한 사건의 재발은 억제된다(5월 24일자 사설).

  (···) 어쨌거나 이제 사흘이 지났다. 농성 학생들은 그동안 소금물만 먹고 지냈다는데 그만하면 주장할 것은 주장했고 또 그것이 국내외에 알려질 만큼 알려진 터이므로 농성을 푸는 쪽으로 의견을 모아주기 바란다.
  (···) 안에서의 이런 노력과 함께 밖에서도 우선은 이 미증유의 돌발 사건을 푸는 데 너무 성급하게 대처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문제의 핵심을 보려 하지 않고 미리부터 ‘극좌’나 ‘용공’으로 몰아세우는 것은 사건을 더 악화시키고 극한화 시키는 것이다. (···)
  당사자인 미국 정부가 학생을 끌어내는 수단을 빌지 않고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고 그 건물을 점거한 학생들도 초기 단계의 ‘난입’ 후에는 기물을 부수는 일이 없이 평온을 지키고 있으며 결코 ‘반미’가 아니라는 그들의 주장에도 유의하는 우리는 당장은 그런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학생들 스스로가 농성을 풀도록 유도해 갔으면 한다 (5월 25일자 사설).

  미문화원 농성이 풀렸다. 점거 72시간 만인 26일 정오경 대학생 73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이 건물에서 자진 퇴거한 것이다. 누가 끌어낸 것도, 끌려 나온 것도 아니다. 
  (···) 이제 농성이 해제된 이 시점을 바탕 삼아 본원적인 문제 해결의 방향으로 한 걸음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 학생들의 일방적 집단행동과 같은 과격한 방식으로 문제 해결이 어렵다는 사실 인식과 한편 국회 등 영향력 있는 제도권이 제 구실을 되찾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는 이 사건 후유증이 ‘극소화’하기를 바라면서 한미관계의 장래나 기본적인 틀에 어떤 나쁜 영향도 끼쳐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학생들이 문화원에서 물러날 때까지 어떤 강권 발동도 자제하면서 꾸준히 인내를 가지고 대화를 계속한 미 측의 대응 태도는 지난번 민정당사 사건과 비교, 우리에게 많은 시사를 던져준다.
  (···) 앞으로 미문화원 농성 사태의 상처를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큰 테두리에서 민주화의 과제를 풀어나가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책임일 수밖에 없다(5월 27일자 사설).

학생들의 미문화원 점거를 ‘도시유격전’으로까지 비유하며 ‘용납할 수 없는 폭력 사태’라고 단정한 조선일보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학생들은 점거 3일 후인 5월26일 자진 해산했다. 그들은 “미국이 우리에게 진정한 우방과 자유세계의 수호자로서 인식되기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확인했다”며 더 이상 대화의 필요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학생들 중 3명은 탈수 현상 등으로 입원하고 70명은 연행됐다. 그 사건은 광주 사태와 미국의 역할 등과 관련해, 한국 사회에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0월 2일 서울형사지법은 선고공판에서 함운경에 징역 7년 등 19명에게 징역 3~7년을 각각 선고했다.


5공의 위기정국 전환용 ‘용공·간첩 사건’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과 마찬가지로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해 받아낸 자백으로 용공·간첩 사건을 조작해 위기정국 전환용으로 활용하는 짓을 밥 먹듯 했다. 1980년 6월의 아람회 사건과 이른바 무림·학림·부림 사건(1980~81년) 등이 그렇다. 1982년 11월의 오송회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그중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대표적 용공·간첩 조작 사건으로 떠올랐던 사례 중 하나가 구미(歐美)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었다. 1985년 9월 9일 안기부와 보안사는 미국에서 공부하다 북한을 방문한 양동화 등 20여명이 국내 대학에서 간첩활동을 했다고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그 날짜 1면에 「학원 침투 유학생 간첩단 22명 검거」라는 기사를 대서특필하고 2, 3, 10면 등에 관련 기사를 실었다. 그것은 학원데모에 간첩이 개입했다는 5공의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쓰기’의 전형이었다. 동아일보는 이어 2면에 「‘유학생 간첩’ 사건 발표」라는 제목의 사설, 3면에 「민주화 위장 좌경의식 기도」라는 해설기사를 싣고, 10면에는 「미·서독 유학생 간첩단 사건 개인별 범죄사실」이라는 제목 아래, 발표된 개인별 범죄 혐의 내용과 얼굴 사진까지 보도했다.

  이번 해외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큰 특징은 북괴가 재일 조총련을 통한 우회 공작에 치중해온 대남공작 수법을 바꿔 미주나 유럽지역까지 확대, ‘해외한민보’ ‘우리나라’ 등 해외 반정부지를 대남공작 거점으로 활용한 점이다.
  (···) 안기부와 보안사령부는 이번 간첩들이 학원 내에 침투, 좌경 의식화를 확산시키기 위해 민주화운동을 위장한 수법들은 매우 놀라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 당국도 간첩단 사건 수사 결과 극렬 학원시위 특히 일부 반미시위의 배경에 입북간첩의 손길이 뻗치고 있었음이 밝혀져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9월 9일자 3면 해설기사).

  또 하나의 간첩 사건이 발표되었다. (···)
  (····) 발표에 따르면 이들은 북괴 공무여권을 가명으로 교부받아 평양에 가거나 헝가리·동독 등지에서 교육을 받고 입국, 서울·대구·광주를 거점으로 학원과 지식인을 상대로 한 침투공작을 벌여왔다는 것이다. 특히 이들은 반미 선동과 체제 전복을 주장하는 책자와 유인물을 제작, 학원가에 배포했는가 하면 광주에서는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에게 접근, 광주 미문화원 폭파, 조선대 학군단 무기고 습격 등으로 제2의 광주 사태 유발을 획책해왔다고 한다.
  간첩 사건이 발표될 때마다 우리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지만 특히 이번 사건의 경우 안기부와 보안사가 공동으로 사건 전모를 밝혔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9월 9일자 사설).

이른바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대해 대법원은 1986년 9월 외국여행 경력이 있는 양동화와 김성만에게는 사형, 황대권과 강용주에게는 무기징역, 다른 10여명에게는 장·단기간의 실형을 선고했다. 당시 전남대 의예과에 다니던 강용주는 유학생도 아니었고 북한에 다녀오지도 않았지만, 고등학교 선배인 양동화에게 포섭돼 <광주백서> 등 국가기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과 함께 국내의 용공단체로 조작된 것이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였다. 1985년 10월 29일 서울지검 공안부는 민추위 위원장 문용식(26·서울대 국사학과 3년·휴학)과 그의 ‘배후 조종자’ 김근태(38·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등 관련자 26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17명을 수배했다고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검찰의 발표를 1면 주요 기사로 보도하고 사회2면(6면) 전체를 털어 「민추위 사건 검찰 수사 발표문」과 「민추위 사건 공안검사 일문일답」을 실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사를 쓴 기자의 이름이 빠진 ‘유령 기사’였다.

  최환 서울지검 공안부장은 ‘민주화추진위원회’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한 뒤 이 단체의 성격과 활동 등에 관해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서울지검 공안부 신광옥·김원치 부장검사, 최연희·정진규·고영주·전창영·김종남·조명원 검사 등이 배석, 보충답변을 했다.
  -민추위가 이적단체라는 물적 증거는 확보했는가.
  “북괴의 주장에 동조하는 의사를 가진 사람끼리 모여 객관적인 조직의 형태를 이루었으므로 명백한 이적단체이다.”
  -북괴와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나.
“북괴집단이나 북괴집단에서 나온 유인물을 직접 접촉한 사실은 없다. 자생적 사회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금은 어디서 나왔나.
“조직의 모임은 대개 관련자들의 자취방에서 열므로 많은 돈이 필요 없다. 그리고 외국어 실력이 우수한 학생들이 많다. 출판사로부터 번역물을 위탁받아 그 번역료로 필요 경비를 충당했다. 최근 출판되는 정체불명의 이념서적들 중에는 이들이 번역한 것들이 많다.” (10월 29일자 6면 머리기사).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과 마찬가지로 ‘민추위 사건’도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다. 전두환의 5공 정권 하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시국사건이 그렇듯 스 사건 역시 5공 정권의 야만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김근태는 1985년 12월19일 법정에서 자신이 받은 고문 사실을 폭로했는데, 5공의 인간성 말살에 대한 대표적 증언이었다. 그는 수없이 당한 전기고문과 물고문, 그리고 집단폭행과 성적인 모욕 등 인간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을 진술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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