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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정치 술수와 언론의 부역동아일보 대해부 4권 -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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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1.02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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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논설위원 김중배의 절필

  동아일보는 1984년 1월 1일자에 주목할 만한 신년사를 실었다. 그 제목부터가 「‘1984’와 1984」였다. 무엇인가 심상치 않은 신년사임을 시사한다. <1984>는 조지 오웰의 장편소설 제목이다. 1948년에 나온 그 소설은 36년 후인 1984년을 그린 미래소설이자 정치소설이다. ‘빅 브러더’라는 정치적 상징을 내세워 전체주의적 지배로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까지 통제하는 가상의 나라를 그린 소설이다. 세계 각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됐던 그 소설의 모델은 옛 소련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빅 브러더 역시 스탈린의 다른 이름으로 상정된 셈이었다. 동아일보의 신년사는 그런 의미에서 전두환 정권 아래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도전’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첫 문장부터가 그렇다. 그 장문의 신년사 중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새해 1984년은 ‘1984년’이다. 이 숫자는 조지 오웰의 가공의 산물이었으나 세계의 문화비평가, 사회학자, 정치인, 경제학자들은 저마다 이 마술적인 숫자를 응시해오며 84년을 맞이했다.
  ‘1984년’은 전체주의적인 감시 관리사회의 비인간성에 대한 경고이고 풍자였다. 그것은 결코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닌 현대사회의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어떤 측면에선 우리는 이미 ‘1984년’을 앞지르고 있는 까닭에 우리들은 인간으로서 또 국민으로서 주위를 생각하며 바라보아야 할 때라고 느낀다.
  (···) 우리는 현실의 84년을 인간으로서 다시 바라보며 우리가 어떠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자각을 깊게 해 볼 때다. 사람답게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자유사회를 지킬 결의를 스스로 다짐하는 마음으로 84년을 맞이하고 싶다. 새해 1984년을 ‘1984년’이 안 되게 하려면,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발밑도 중요하지만 먼 앞을 두루 옆을 그리고 높이 위를 살피며 생각해야 한다.
  생각하는 새해를 맞자.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신년사가 나가고 난 다음 달인 2월 25일 동아일보의 인기칼럼이었던 논설위원 김중배의 「그게 이렇지요」가 중단됐다. 그 토요칼럼은 1982년 3월 6일자 「입술은 떨려도 진실만은···」이란 제목의 첫 회를 시작으로, 회를 거듭할수록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직설적이지는 않았지만 전두환 정권에게는 ‘눈엣 가시’ 같은 내용들이었다. 그런 칼럼이 2년 만에 갑자기 타의로 절필의 비운을 맞은 것이다. 마지막 칼럼 「미처 못다 부른 노래」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마침내 절필의 날은 오고야 말았다. 「그게 이렇지요」는 이제 요절한다.  미처 못다 부른 노래들을 머금은 채 가슴의 무덤 속으로 묻혀가야 한다.
  그 요절의 유언을 엮으면서, 나는 기이하게도 새벽의 종소리를 듣는다. 지금은 새벽이다. 그 누가 가로막아도 태양은 찾아든다. 동이 트기 전의 하늘은 한 때 마지막 어둠으로 멍 들 뿐이다. 그러나 새벽의 종소리는 그 무렵부터 울려온다. 울려오는 건 오늘의 종소리만은 아니다. 천년 묵은 종소리도 함께 들려온다. 그 가운데서도 머리 위를 덮쳐오는 건 전설 속의 산새가 난타했던 그 종소리다.
  (···) 나는 그 산새의 종소리 속에서 머리로 왕궁의 난간을 들이받았던 옛 언관(言官)의 뜨거운 숨결을 듣는다. 한마디 바른 말을 위해서 그는 산새처럼 스스로의 머리를 으깨지 않았던가. 그 종소리, 그 숨결 앞에서 나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딴엔 머리가 으깨지더라도 달을 해라고는 부르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정작 달을 달이라고 바로 부르지는 못했다. 겨우 그려낸다는 게 상징과 비유로 얼룩진 추상화였다. (···)
  (···· 내 고향 광주에 갈 때마다 무등의 산허리에 겹쳐지는 빛의 십자가도 노래하지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젊은 후배 박관현의 죽음에도 나의 재주는 침묵일 뿐이었다.
  (···) 오늘, 그리고 내일, 누군가는 기필코 바르게 말해야 한다. 어두우므로 도리어 밝은 정론의 횃불을 올려야 한다. 점화된 불씨는 끝내 꺼뜨리지 말아야 한다. 설령 횃불을 올린 이들은 어두운 균열 속으로 묻혀 가더라도 횃불은 날로 빛나야 한다. (···)
  (···) 그러나 나는 믿는다. 오늘, 서산에 저무는 태양은 아주 저물어버리기 위해서 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내일, 새롭게 다시 떠오르기 위해서 저물어 간다는 것을 끝내 믿는다.

「그게 이렇지요」는 모든 언론이 전두환 정권에 대한 충성 경쟁에 나섰을 때 독자들의 타는 목을 적셔주는 역할을 했다. 많은 독자들이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전두환 정권의 무지막지한 폭력의 시대에 ‘행간의 깊은 의미와 공감’을 자아낸 김중배의 「그게 이렇지요」는 사람들에게 매주 토요일을 기다리게 했다. 첫 번째의 「입술은 떨려도 진실만은···」을 시작으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1982년 4월 3일자), 「서울은 지금 몇 시인가」(1982년 5월 15일자), 「마르케스의 귀향」(1982년 10월 23일자) 등 회마다 독자들은 그의 상징과 비유가 가리키는 달을 찾아 검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절필 후 도쿄대 비교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1년간 일본에 머물다 귀국해야 했다. 그는 귀국 후 편집국장 재직 시절인 1991년 경영진의 편집권 개입에 반발해 동아일보를 떠났으며 그 후 한겨레신문과 MBC의 사장 등을 역임했다.

김중배의 절필 선언이 있던 날인 2월 25일 전두환 정권은 1차 해금조치(1983년 2월 25일)에 이어 나머지 정치활동 피규제자 3백명 중 2백2명에 대해 2차 해금조치를 실시했다고 밝혔다. 그들은 5공에 위협이 되지 않는 사람들로 인식됐고,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 주요인사 99명은 여전히 규제대상이었다. 동아일보는 그 날짜 1면 머리에「202명 추가해금」이라는 기사를 크게 보도하고 2면 사설을 통해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도 해금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우리는 이 조치를 환영한다. 정치활동 피규제자는 적을수록 좋고 궁극적으로는 없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회 안정, 화합과 관련된 국민의 열망이기도 하다. 앞으로 나머지 99명 피규제자도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풀려나기를 기대하면서 그들의 운명에 관심을 갖는다.
  이들 99명은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로 조사를 받거나 당리당략에 ‘급급’하여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선동과 불법행위로 국가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혐의라고 한다. 즉 정치풍토쇄신법을 위반해온 사람들로서 이들을 풀어주면 불법행위가 활개치는 비리가 재연되고 현실적인 부정의와 불공평의 결과가 초래될 우려로 해서 여전히 묶어놓고 있다는 것이다.
  (···) 제5공화국은 이미 출범 4년째에 들어섰고 어느 만큼의 안정과 자신을 가지고 대화· 책임·청렴 정치에 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국민 화해, 국민과 더불어 나아가는 정치, 모든 사람에게 행복과 희망을 주는 것을 국민 정치의 방향으로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해왔다.
  이제 출범 4년째에 접어든 그간의 시정과 총선거를 앞둔 지금의 정치상황에서 앞으로의 정국의 전환을 꾀하려면 그 길은 대화와 신뢰의 정치여야 한다. 성실과 용단의 정치여야 하고 국민과 대결하는 정치가 아니라 국민 융화의 정치가 더욱 돋보여야 한다.


교황의 방한을 둘러싼 교회 안팎의 논란

전두환 정권의 ‘꼼수’ 같은 정치적 유화조치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5월 3일 4박5일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1984년은 한국 천주교 200주년 행사와 함께 1백3위 순교자에 대한 시성(諡聖)미사가 열리는, 한국 교회사의 중요한 해였다. 그 뜻 깊은 사건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방한계획 중 일부가 교회 안팎에 논란을 일으켰다. 그 시기는 광주 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정권이 ‘정의사회 구현’을 강조하면서 광주 학살 등에 대한 사과와 반성은 고사하고, 관련자들과 가족들을 탄압할 뿐 아니라 노동자와 학생들을 연행하는가 하면 정권 안보를 위한 간첩·용공 조작을 서슴지 않던 때였다. 그래서 교황의 한국 방문과 관련된 문제들이 불거진 것이었다.
특히 신부 함세웅은 민주화운동의 증언집 <암흑 속의 횃불> 제6권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무엇보다 교황의 한국 방문은 사목자로서의 방문임에도 그의 방한은 국빈방문으로 온통 정치적 방문을 방불케 한 것이었다. 광주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억울하게 숨져간 이들의 외침이 여전히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그 시간, 불의한 독재 권력자들이 국민을 짓밟고 총칼로 다스리고 있는 그 때에 교황은 전두환 대통령의 마중을 받고 그와 악수하며 담소를 나누었고 이 장면이 전국에 TV방송으로 전해졌다. 이보다 더 기막힌 일이 있는가.”

동아일보는 교황의 한 국방문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에 도착하기 하루 전부터 1, 2, 6, 7면 등에 관련 기사를 실었다. 5월 2일 사설(「교황의 방한을 환영함」)은 사목활동 외에 정치적 의미를 거론하기도 했다.

  (···) 우리는 교황의 이번 방한이 로마교황으로서 최초의 것이며 또 한국 천주교 전래 2백주년 축하행사와 때를 맞춘 것이라는 점에서 뜻 깊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의 방한을 온 국민과 더불어 환영한다. 아울러 그의 모든 여정이 순조롭기를 빈다.
  (···) 그런 점에서 그의 방한 목적은 발표된 바와 같이 주로 사목활동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교황의 방한을 앞두고 로마의 주요 일간지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그의 한국 방문에는 정치적 의의도 있다고 하겠다. ‘이 땅에 빛을’이라는 천주교회의 표어와 ‘화해의 날’이라는 광주 행사의 주제가 보기에 따라 이런 뜻을 함축하고 있으며 그의 방한은 한국을 국제정치 무대에서 급속히 성장하는 나라, 종교의 나라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켜 줄 것이다.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평소 한국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깊은 분이었다. 그의 모국 폴란드가 세 차례나 강대국의 분할통치를 받고 지금도 동포들이 공산독재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과 한국의 지난 역사와 현재의 남북 분단 등 두 나라가 겪고 있는 고통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교황은 한국에 대해 각별한 동정을 느꼈던 것 같다.

사실 모든 언론의 편집 방향은 사목자로서보다는 국빈으로서의 방한에 방점을 두고 있었다. 동아일보 역시 ‘교황의 역사적 방한 ’소식과 함께 전두환이 직접 공항에 나가 교황을 영접한 뒤 정상회담 가진 것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교황이 서울에 도착한 5월 3일자 1면 머리기사(「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역사적 방한 / 절두산 참배 청와대 예방」)는 전두환의 환영의식을 사진과 함께 주요 내용으로 소개했다. 5면에는 교황의 내한사와 전두환의 환영사 전문을 나란히 실었다.  1, 3, 5, 10, 11면에는 관련 기사를 보도했다. 1면 머리기사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류의 양심, 평화의 사도의 자비로움이 한국의 땅에 입을 맞추었다. 로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3일 오후 2시 10분 교황특별기(알리탈리아 소속 DC10기) 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 역사적인 방한 일정(4박5일)을 시작했다. (···)
  교황과 전 대통령은 환영식단에 올라 교황가와 애국가 연주 속에 21발의 예포로 경례를 받았다. 전 대통령은 환영사에서 “성하의 방한은 우리나라 가톨릭 신도는 물론 국민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의 축복을 받게 되는 소중한 기회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인류의 평화는 사랑과 관용을 바탕으로 한 화합 위에 이룩돼야 한다는 성하의 신념에 공감을 표한다”고 말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내한사에서 “오늘날 한국에 대해서는 그 용기와 근면과 잿더미로부터 모범국을 세우려는 의지를 누구나가 일컫게 됐다”고 말하고 “모든 생명이 신성시되고 사는 것이 곧 남을 위해 일함이요 다스리는 것이 곧 섬김이며 그 누구도 한갓 도구로 쓰이지 않고 아무도 억눌리지 않는 모든 이가 진실한 형제애로 사는 그런 사회를 이루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동아일보는 5월 4일자 1면 머리에 「교황 광주서 옥외미사 / 불화와 증오에서 화해와 평화로」라는 제목으로 교황이 7만여 신도의 환영 속에 ‘화해를 주제로 한 성인입교 예식 및 미사’를 집전했다고 전했다.  “이 미사에서 교황은 ‘개인적 체험이나 근래의 여러 비극으로 말미암아 여러분 마음과 영혼에 아픔을 주는 깊은 상처, 단순히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특히 광주 출신 여러분의 경우 극복하기가 너무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다’면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세례를 통해 여러분에게 화해의 은혜가 내려진 것으로 그 덕은 하느님의 자비의 선물인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 항쟁을 직접 지칭하는 대신 에둘러 공감을 표시하는 강론이었다. 동아일보의 그 날짜 중점 보도는 청와대에서 가진 교황과 전두환의 회담, ‘남북한 직접 대화’를 촉구하는 등 9개항의 공동발표문이었다. 동아일보는 그 기사를 1, 3면에 실은데 이어 2면에 「전 대통령과 교황 공동 발표」라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했다.

  (···) 사목 방문으로 서울을 찾은 요한 바오로 2세는 먼저 절두산성지를 참배한 후 청와대로 전두환 대통령을 예방, 정상회담을 갖고 9개항의 공동 발표문을 내놓았다. 전 대통령과 교황의 공동발표문은 당사자 간의 분쟁점을 해결하기 위한 여느 외교문서와 같은 것은 아니다. 국경과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여 모든 인류의 평화와 사랑을 기원하는 인류애의 공동메시지라는데 의미가 있다.
  (···) 뿐만 아니라 공동발표문에서 요한 바오로 2세는 남북한의 이산가족이 겪고 있는 ‘고통에 관심’을 표명하고 이들이 하루속히 재결합돼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우리는 교황이 공산주의 체제의 핍박 속에 신음하는 우리 이산가족들의 재회를 위해 앞으로도 계속 기도하고 노력해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밖에도 교황은 한국 천주교회가 ‘종교적 성격의 테두리 안에서 그리고  국가와 교회의 각자의 별도 권능을 존중하면서’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려는 한국민의 의지에 협조하고 기여할 것이라고 언명한 데 주목코자 한다. 국가와 교회의 별도 권능 존중을 명시함으로써 요한 바오로 2세는 그의 교회관을 솔직히 피력했다.
  교황은 작년 5월 중남미 순방에서도 교회와 국가의 별도 권능을 강조한 바 있다. ‘해방신학’의 발호로 교회가 분열된 중남미 현장을 방문한 교황은 일부 교회의 폭력혁명 노선을 꾸짖었던 것이다. 우리는 세계 평화를 역설한 서울의 공동발표문이 43억 인류의 가슴마다 울려 퍼지기 바란다.

동아일보의 이와 같은 사설 내용은 광주 항쟁을 총칼로 짓밟은 전두환 정권에게는 흡족할 만했다. 교황의 한국 방문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데 성공했다고 판단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함세웅이 교황의 방문에 비판적 견해를 보였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함세웅은 “교황의 그 어느 강론에서도 주교들의 그 어떤 언급에서도 불의한 정권에 대한 분명한 지적과 질타는 찾아볼 수 없었다. 글쎄 이것이 교회의 한계일까? 사목의 포용일까? 불의한 체제 앞에서 목숨을 건 순교자들 앞에서 그리고 십자가의 예수님 앞에서 신앙인이 다짐해야 할 결단과 실천은 과연 무엇일까? 이러한 현실적 고뇌가 이어지고 있다”고 자문한 바 있다(<민족의 횃불> 제6권 서문).


5공의 정권 안보를 위한 언론 조작

교황의 방한을 맞이해서도 전두환 정권은 정권 안보를 위해 언론을 보조수단으로 이용했다. 그것이 스포츠라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5공 정권의 특징으로 지목된 3S(스포츠, 섹스, 스크린) 정책 중 특히 스포츠에 대한 언론의 5공 지원은 거의 광적이었다. 1984년 7월 29일 개막된 로스앤젤레스(LA)올림픽에 대한 동아일보의 대대적 보도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동아일보는 LA올림픽이 열리기 하루 전날인 7월 28일자부터 「LA올림픽 내일 개막 / 141국서 만2천명 참가」라는 기사를 1면 머리에 올렸다. 정작 올림픽 당일에도 미국 뉴욕타임스의 1면 머리기사는 레바논 사태였고, 워싱턴포스트는 미소 우주무기회담이었다. LA올림픽에 가장 흥분한 나라가 미국이 아닌 한국인 셈이었다. 같은 날짜 동아일보는 특별취재반의 예고기사로 1면 머리를 장식했고 2면에는 「LA올림픽 개막」이란 사설을 실었다. 

  [로스앤젤레스=특별취재반] 제23회 로스앤젤레스 하계 올림픽이 한국시 간으로 29일 오전 8시 반(현지시간 28일 오후 4시 반) 이곳 메모리얼콜리시엄에서 1백41국 1만2천여명의 선수단이 참가한 가운데 개막된다. 이날 개막식에서 한국선수단은 레이건 미국 대통령, 사마란치 IOC 위원장 등 10만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케냐에 이어 67번째로 입장한다. 이어 레이건 대통령 부처가 본부석에 등단, 개막무드가 달아오르며 레이건 대통령이 개회를 선언한다.
  입장식은 성화대 점화를 절정으로 선수선서, 임원선서가 있고 11시 50분 선수단의 퇴장으로 끝난다. 개막식에 점화될 성화는 전날인 28일 코리아타운을 통과했다. 10만여 교민들의 환호, 태극기의 물결을 뚫고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영웅 손기정(72) 씨는 태극기가 박힌 모자를 쓰고 48년 전 베를린의 신화를 재현하려는 듯 꿋꿋이 달렸다 (7월 28일자 1면 머리기사).

  (···) 이번 올림픽은 다음 개최지가 서울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유난히 많은 관심과 기대를 안겨주고 있는데 그 첫째는 말할 것도 없이 4년 전의 모스크바 때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오염되고 분열된 대회라는 것이다. 불참한 나라는 소련·동독을 비롯한 13개 공산국에 불과하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경기력의 잠재용량이나 실세에 비추어 볼 때는 반쪽 축제의 느낌을 씻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서울대회 때부터는 불참국들에 대한 제재가 논의되고 있으므로 주역을 떠맡은 우리로서는 그 귀추를 주목해야 할 시점이다.
  우리가 또 한 가지 이번 올림픽에 관심을 돌리는 것은 조직위원회의 철저한 구두쇠정신이다. 시민의 세금은 일전 한 푼 거두지 않고 어디까지나 비즈니스로 일관하고 있어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우정보다 돈, 신뢰보다 계약이 우선하고 있다’” 말이 나올 만큼 흑자대회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 그것이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는 잠시 차치하고 우리에게 올림픽도 여기까지 왔다는 타산지석의 예가 될 것이다. (···)
  그러나 우리는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선수들의 선전에 기대를 모은다. (···)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수들이 시티어스 알티어스 포르티어스(더 빠르게 더 높게 더 강하게)의 이상을 향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들의 땀 값을 너무 요란스럽지 않게 담담히 지켜보는 일이다(7월 28일자 사설).

이후 한국 언론들은 올림픽이 끝난 후까지 ‘과잉 보도’를 이어갔다. 특히 KBS와 MBC 등 방송사들의 열띤 올림픽 보도 경쟁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올림픽이 끝난 후에도 두 방송은 여의도 광장에서 ‘LA올림픽 개선 국민축제’라는 초호화판 대형 쇼를 공동으로 벌였다. 2천여명의 대형합창단과 조용필 등 인기 연예인이 총출동한 놀자판은 그야말로 5공의 정치문화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8월 13일자 사설( 「LA올림픽 폐막」)에서 ‘과잉 보도’의 문제를 거론해 눈길을 끌었다.

  제23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마침내 막을 내렸다. 이 시점에서 우리 선수단이 거둔 금6 은6 동7로 세계 10위의 성적을 올린 것에 대해 ‘즐거운 의외성’을 확인하고 선수들이 보여준 선전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
  (···) 지난 16일 동안 매스컴들이 자고 새면 올림픽 일색으로 들떠 있는 것에 불만을 표시하는 의견도 있었음을 우리는 유의한다. 거기에는 ‘현실도 피’ ‘의식 잠재우기’의 혐의도 있었음을 모르는 바 아니며 특히 순박한 한국적 기쁨의 표현방식에 부자연스런 ‘연출’이 덧붙여지지 않았는가를 염려하는 의견에도 접하고 있다. (···)
  (···) 우리가 또 하나 반성해야 할 것은 승자에 대한 갈채만을 보내는 동안 패자에 대한 위로와 관심이 적었다는 것이다. 초반에 탈락한 우리 선수들이 네 차례에 걸쳐 88명이나 귀국했는데도 신문이나 방송은 최선을 다하고도 진 그들의 어깨를 두드려주기에 인색했던 것은 우리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


전두환의 방일과 언론의 마사지

LA올림픽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인 1984년 8월 14일 청와대는 전두환 내외가 9월 6일부터 8일까지 2박3일 동안 국빈으로 일본을 공식 방문한다고 발표했다. 발표 시기 역시 8·15 광복절 특사와 함께 올림픽의 흥분이 가시기 전이어서 전두환을 홍보하기 위한 좋은 타이밍으로 보였다.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인 전두환의 일본 방문은 그 자체로 큰 뉴스이자 전두환 개인은 물론 정권을 위한 또 하나의 이벤트였다. 동아일보는 그것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하고 3, 5면에 관련 기사를, 8월 15일자 2면에는(「‘한일’을 다시 생각한다」)을 실었다. 사설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방된 지 39년, 한일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진 지 19년 만에 다시 8·15를 맞는다. 바로 하루 전에는 마침 전두환 대통령이 한국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한다는 발표가 있던 터라, 올 광복절은 유독 한일관계의 현주소와 앞으로의 전개를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새삼스럽게 숫자를 꼽아볼 것도 없이, 어느덧 우리는 일제강점의 36년보다 많은 세월을 살아왔다는 감회와 함께, 많이 퇴색은 했을망정 ‘그 날’의 감격을 되 일으켜 세우고,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일본이 심어놓은 식민지 잔재를 청산했는가를 돌아보게도 한다. (···)
  (···) 한 나라와 한 나라의 친선이 어떤 모양으로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관점이 있겠으나, 지금까지는 정부 규모로 진전되어 왔기 때문에 그 어간에서 국민은 쉽게 따라가지 못하고 주춤거린 일도 있었음을 상기하고 싶다. 정치·경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안보문제에까지 ‘협력’이 진전되었으나, 정작 국민들의 마음과 마음끼리 통하는 길은 그다지 넓지 못했다. (···)
  29일은 국치일, 역사의 생채기를 기억하면서, 우리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한일관계를 유지하고 싶으며, 이번 전두환 대통령의 방일이 ‘총론적’인 각도에서 양국관계가 재검토되고 서로를 올바르게 재인식하게 되는 실마리이기를 바란다.

전두환의 일본 방문이 시작된 1984년 9월 6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에는 「전 대통령 방일 오늘 한·일정상회담 / 일황 만나 ‘유감’ 사과 받아」라는 기사가 올랐다. 2, 3, 7면에는 관련 기사를 실었다. 동아일보는 2면 사설( 「전 대통령의 방일 등정」)을 통해 ‘한일 신시대’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또 7면(사회면)는 전두환의 출국 현장 기사를(「“큰 성과를···” 시민들 ‘기대의 환송’」)를 내보냈다. 일본을 2박3일로 방문하는 데도 수십만의 인파가 전두환을 환송하기 위해 연도를 메웠다는 내용이다. 그 이면의 시대상을 잘 보여주는 기사다.

  전두환 대통령이 우리나라 국가원수로서는 6일 처음으로 일본 공식방문길에 올랐다.
  (···) 작년 1월 나카소네 야스히로 일 본수상의 공식 내한을 계기로 ‘한일관계의 신시대’라는 말이 두 나라에서 유행어처럼 번지고 있다. 1980년대 중반에 들어서고 있는 양국이 서로 ‘신시대’ 전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구시대를 탈피해야만이 한일 두 나라의 관계가 원만하게 교차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일관계 구시대의 독소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일본의 36년간 한민족 식민착취, 그 후에도 말끔히 지워지지 않고 있는 일본의 대한 경멸 태도, 1965년 수교 이후 누적만 되어가고 있는 대일무역적자,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대우 등이 한일관계를 불편하게 만들어 온 구시대의 유물이다.
  바로 한일관계의 고민을 해결하고자 뛰어든 외교적 대응이 전 대통령의 일본 방문이 아닌가 한다. 일본 천황으로부터 유감의 표시도 받아내고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향상을 현장에서 촉구하며 한일교역 불균형의 부당함을 지적함으로써 양국관계를 호혜평등의 방향으로 잡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
  문제는 일본 측에 있다. 다행히 들리는 바에 의하면 일본은 전 대통령의 방일을 ‘거국적으로 환영’하는 무드라고 한다. 일본 측도 전 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한국에 대한 눈을 달리하는 계기가 되도록 바란다. 전 대통령의 방일에 즈음해서 한일 신시대의 기초가 다져지기를 기원해 마지않는다(6월 4일자 사설).

  전두환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하기 위해 출국한 6일 오전 서울 거리와 공항에는 많은 시민들이 나와 환송했으며 중앙청에서 김포에 이르는 연도 변에는 태극기와 일장기가 나부꼈다.
  3부 요인 등 3백55명의 환송인사들이 도열한 가운데 김포국제공항 환송식장에 도착한 전 대통령 내외는 21발의 예포 속에 애국가 연주가 끝난 후 진의종 국무총리와 함께 의장대를 사열했다. (···)
  이날 정부 제1종합청사 시청 앞 등에는 “이웃에 빗장 열고 세계 속의 한국으로” 등의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이른 아침부터 시민들과 청소원들이 도로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는 모습도 보였다. 곳곳의 육교와 고층건물에도 환송문구가 적힌 플래카드가 나붙어 환송무드를 자아냈다.
  대통령 내외와 수행원들이 탄 차량들이 지나간 광화문~합정동 로터리~성산대로~김포공항에 이르는 연도에는 수십만명의 시민이 나와 태극기를 흔들며 환송했다(9월 6일자 7면 기사).

  9월 6일부터 8일까지 전두환이 일본을 방문하는 동안 한국 언론은 엄청난 양의 관련 기사들을 쏟아냈다. 그것도 주로 전두환 중심의 보도였다. 동아일보 역시 많은 양의 보도를 했지만 그나마 상대적으로 절제된 자세를 보였다. 동아일보는 9월 7일자 1면에 「일황 ‘일제 과오’ 첫 공식 사과/ “불행한 과거 진심으로 유감”」이라는 아래 전두환고 일황의 첫 대면기사를 실었다. 일황의 ‘유감’ 표명을 ‘사과’로 해석한 것이다. 5면에는 일황의 ‘유감표명’ 의미와 관련해 「‘유감’은 ‘사과’의 외교적 표현」이라는 제목으로 애써 유감 표명이 사과임을 강조하는 대형 상자기사를 싣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9월 8일자에 한일 정상의 공동성명 내용을 1면 머리기사로 전하고 2면에서 그 의미를 강조했다. 그러나 그렇게 요란한 보도에도 불구하고, 한일 공동성명의 주요 사항 말미에는 ‘상호 노력한다’는 외교적 수사가 주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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