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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공화국 중반기의 명암동아일보 대해부 4권 -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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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0.26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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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해금 조치와 김영삼의 단식

전두환 정권은 1983년에 들어서자 2월 25일 정치활동이 금지됐던 2백50명에 대해 규제를 해제하고 정치활동 재개를 허용했다. 1980년 국보위 정치쇄신위원회에 의해 정치활동이 가로막힌지 2년이 훨씬 넘게 흘러간 뒤였다. 그러나 5공 출범 2주년(3월3일)을 즈음해 발표된 해금자 명단에는 김대중과 김영삼을 비롯한 주요 정치인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망명과 구속, 그리고 연금 상태에 놓여 있었다. 동아일보는 2월 25일자 1면에 그 소식을 주요 기사로 보도했다.

2면의 사설(「정치 규제의 1차 해금」)은 그 조치가 전두환 정권의 ‘정치적 의지’라며 오히려 해금자들의 자숙을 요구했다.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정치활동이 규제되었던 5백55명 중 2백50명에게 ‘1차 해금’의 단안이 내려졌다. 대통령의 이번 결단은 “구시대의 재생이 아니라 구시대의 청산을 위해서”이며 화합 속에 참여의 기회를 주려는 데 뜻이 있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
  거듭된 정치규제의 특별입법은 그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는 정치적 의지를 담은 것이었다. 그러나 다시 절대권력이 군림하면서 양극화가 빚어내는 혼란은 재연되었다.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은 도의정치와 민주정치의 구현을 통해서 바로 그 혼란의 되풀이를 단절하자는 데 뜻이 있는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규 제의 불행을 재연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에 참여하는 인사들의 자숙과 함께 혼란을 빚어내는 원인의 제거가 꾸준히 추구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정치적 현실과 정치인의 행태는 불가분의 함수관계를 갖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이어 5공 출범 2년을 기리는 시리즈를 통해 전두환 정권에 대한 지속적 지지를 표현했다. 「5공화국의 2년」이라는 제목으로 2회에 걸쳐 5공 정부의 각 분야별 평가를 긍정적인 치적 위주로 소개하는 홍보기사였다. 동아일보는 2월 28일자와 3월 2일자 그 시리즈를 실은 뒤 이어 5공의 기념일도 그냥 넘기지 않았다. 5공 출범 2년째가 되는 3월 3일에는 사설로 전두환의 5공화국 출범 2년을 융숭하게 다루었다.

  (···) 국민들을 전쟁과 빈곤과 그리고 정치적 탄압 및 권력 남용으로부터 해방시키고 민주·정의·복지사회를 지향하며 출발한 5공화국은 그동안 개방과 자율조치에 의한 국민의 총화합을 이룩하기 위해 간단없는 노력을 해온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통금 해제, 교복 자율화, 김대중 씨를 비롯한 광주 사태 관련 인사들에 대한 석방조치와 2·25 1차 해금조치 등은 그와 같은 노력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러한 조치들은 제5공화국의 정착화에 따른 통치의 자신감에 논거를 둘 수 있겠지만 아무튼 현 정부에 대한 국내외의 인식 개선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는 점에 있어서는 긍정적인 견해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이와 같은 정치적 조치와 더불어 전 대통령은 그 어느 위정자보다도 많은 국내의 출장을 통해 확인 행정을 시범했고 폭넓은 대화를 통한 이해를 구해왔다. 지난 2년 동안 전 대통령은 모두 3백2회에 걸친 국내 출장을 했다. (···)
  (···) 전 대통령은 이러한 행동적인 통치방법으로 국내정치를 펴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 외치에서도 이에 못지않게 자신의 정치 역량을 과시했다. 지난 81년 6월 아세안 5개 국가에 이어 지난해 8월에는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아프리카 4개국과 캐나다를 방문, 정상외교를 벌였다. (···)
  이러한 국제화 시대에의 능동적인 외교전략과 함께 남북한문제에서는 민족화합·민주통일이라는 평화통일방안을 제시하는 등 적극적이고 과감한 자세를 취함으로써 우리의 외교 환경을 개선해 놓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기정기자>(2월 28일자 2면 「5공화국 2년」‘상’). 

  (·····) 3일은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고 새 정부가 들어선지 두 돌이 되는 날이다. 지난 2년 동안 국정은 물론 민주·복지·정의 그리고 문화의 창달을 지표로 전개되어 왔다. 그 지표들은 어떤 정권의 차원을 넘어서 현대사회가 추구해야 할 과녁임이 분명하다. 
  장기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그 지표들과 함께 정부가 지난 2년동안 구체적으로 강조해왔던 정책의 기조는 안정과 자율과 개방의 세 가지로 간추려질 만하다. 그 안정은 물론 정치만이 아닌 경제와 사회의 안정을 포함한다. (···)
  거리로 확산되었던 정치를 그야말로 ‘정치의 장’안에 수렴하기 위한 노력도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이 사실이다. 저물가·저금리·저임금의 ‘3저’로 표현되는 경제의 안정 추구도 이른바 ‘한 자리 선’의 유지로 대표되는 성과를 낳았다. 사회의 혼란도 가셔지고 질서의 강조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도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한 일이다(3월 3일자 사설).

전두환 정권은 일부 정치인들에 대한 해금 조치를 발표하면서도 저항적인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에 대해서는 탄압을 강화하는 일종의 분리지배 정책을 꾀했다. 학원가에서는 시위를 하다 부상하거나 사망하는 경우가 생기는가 하면 강제징집 후 군부대에서 의문사 하는 경우도 속출했다. 1983년 3월 8일에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과 관련해 김현장과 문부식이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판결(후에 감형)을 받기도 했다.

노동자의 투쟁은 당국의 혹독한 통제에도 가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김영삼이 5·18 광주 항쟁 3주년을 맞아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그는 단식에 앞서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구속인사의 전원 석방과 전면해금, 해직교수 및 근로자, 제적학생의 복직·복교·복권, 언론 통제의 전면 해제, 정치활동 규제의 해제, 대통령직선제 개헌 등을 요구했다. 전두환 정권은 김영삼의 단식투쟁이 일으킨 정치적 영향이 심각하다고 보고 언론 보도를 통제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단식 3일째인 5월 20일자 2면 정치 가십란에 그 내용을 모호하게 다루었다. 「고 부의장, 김 총리와 현안 논의」라는  제목의 기사는 선문답 같은 내용이어서 일반 독자들은 사태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최근의 ‘정세 흐름’과 관련, 정가 일각은 19일부터 신경을 쓰는 눈치. 민한 당의 유치송 총재 등 당 간부들은 이 흐름을 관심 있게 관망하고 있다는 전언이나 이에 대한 당 차원의 논의까지는 생각 못하고 있으며 유 총재는 19일에는 당사에 나오지 않았고 20일에는 지역구에 귀향.
  이와 관련, 고재욱 국회 부의장은 개인적인 조정을 위해 19일 저녁 서울 N음식점에서 김상협 총리와 대화를 나누면서 이 흐름을 짚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자리에는 민정당의 L의원도 동석했다는 것.
  한편 정치 규제 해금자 중 황낙주·박용만 씨는 19일 오후 3시 20분 중앙청을 방문, 총리 면담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마침 김 총리는 부재 중이었고 비서실은 몇 가지 이유 설명 끝에 이들을 되돌려 보냈다는 것(5월 20일자 2면 가십란).

동아일보는 김영삼의 단식을 ‘정치 현안’ ‘정세 흐름’ ‘국내 정치 관심사’ 등으로 표현했다. 그 만큼 전두환 정권은 그 사건의 보도 관제를 철저히 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외국 언론들은 그 뉴스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동아일보가 그 사건을 분명하게 보도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언론과 마찬가지로 6월 9일 김영삼이 단식 중단을 선언한 날이었다.  크기나 내용 역시 다른 언론과 비슷했다. 동아일보는 그 날짜 1면 3단 기사( 「전 신민당 총재 김영삼 씨 단식 중단」)로 그 내용을 보도했다.

  정치적인 이유로 지난 5월 18일부터 단식을 벌여온 전 신민당 총재 김영삼 씨가 단식 23일째인 9일 오전 입원 중인 서울대학병원에서 단식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김 씨는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정치활동을 규제받고 있었는데 지난 달 18일 정치피규제자 해금 등을 주장하면서 서울 상도동 자택에서 단식을 시작, 그 달 25일 서울대병원에 입원, 단식을 계속했다.
  김 씨는 지난 3일부터 매일 10%의 포도당액 2천cc ,아미노산 용액 5백cc의 링거 주사를 맞아왔고 이온수·보리차 등 음료수를 섭취하면서 의사들의 가료를 받아왔다. 병원당국에 의하면 김 씨는 주사에 의한 영양 공급을 받아왔으므로 현재 의학적으로는 건강에 이상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영삼의 단식은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세계에 알리고 민주인사들을 하나로 연대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에 망명 중인 김대중은 6월 4일 “김영삼 씨를 구출하라”는 플래카드를 목에 걸고 워싱턴 집회에서 데모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반정부투쟁을 위한 공동전선을 구축하기로 하고 “백의종군하는 자세로 하나가 되어 손잡고 나가겠다”는 ‘8·15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그 성명에서 두 사람은 “국민 여러분, 우리들이 부족하였음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고 여러분의 민주전열에 전우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두 사람은 국민과 함께 그 뜻을 받들어 민족과 민주제단에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칠 것을 엄숙히 맹세하는 바입니다”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최고 시청률 ‘이산가족 찾기’의 이면

1983년에 최대의 관심을 모은 사건 중 하나는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었다. 6월 30일 밤 10시 15분부터 KBS 1TV를 통해 특별 생방송된 이산가족 찾기 ‘누가 이 사람을 아시나요’는 새벽 1시까지 예정됐던 방송시간을  3시까지 연장했다. 시민들의 반응이 폭발하자 KBS는  모든 정규방송을 취소하고 5일 동안 ‘이산가족 찾기’라는 단일 주제로 릴레이 생방송을 진행했다. 그 프로는 그 기간에 78%라는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산가족 찾기’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그해 11월 14일까지 총 4백53시간 45분 동안 방송되는 기록을 남겼다. 모두 10만9백52건의 신청이 접수돼 1만1백80명의 이산가족이 상봉했다. 한국방송공사 사옥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가족을 찾는 벽보가 수없이 나붙었다. 그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프로그램으로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동아일보는 그 소식을 사회면에 소개했으며 7월 4일자 2면에는 「한민족의 상처와 눈물/이산가족 찾기 KBS생방송에 느끼는 것」이란 제목의 사설을 내보냈다. 사설은 프로그램의 감동을 전하면서 ‘북한 김일성 집단’을 이산가족의 책임 당사자로 비난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이산가족들의 처절한 상봉 장면들을 KBS 화면을 통해 지켜면서 이 겨레는 분단의 고통이 얼마나 괴로우며 전쟁의 상처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하면서 모두가 흐느꼈다.
  (···) KBS의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통해 만날 수 있었던 가족은 5백여 명이고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남한에만도 이산가족이 5백여만에 달하고 북한의 5백만을 합치면 1천만이나 된다. 1천만 이산가족들의 대부분은 차라리 가족 찾기를 포기하고 있다. 이산가족이 남한에 나와 있지 않고 휴전선 북방에 남아 있다는 데서 그렇다.
  (···) 북한 김일성 집단은 이산가족 재회를 위한 적십자 측의 간절한 대화 재개 촉구나 이산가족 찾기 범국민운동이 단순한 행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요 이산가족들의 피 맺힌 통한의 표출임을 직시하여야 한다. 인간의 천륜을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정치 또는 충성만으로 억누를 수 없다. 오직 이들에게 상봉의 길을 열어주어 30여 년 동안 시커멓게 썩어온 응어리를 풀러주는 길 뿐이다.

전두환 정권은 그 기회를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했다. 정부는 이산가족 찾기사업을 범국민운동으로 추진하기로 하고 외무·내무·문공부와 국토통일원 등 관계 부처를 총동원해 종합대책을 마련하는 등 대대적인 사업과 홍보활동을 폈다. 동아일보 역시 지면을 통해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대한적십자사 총재 유창순이 7월 6일 ‘1천만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적십자 회담을 재개하자’는 담화를 발표하자 동아일보는 1면 주요 기사로 보도하고 7월 7일자 사설(「남북적 회담 즉각 재개하라)로 그것을  사설로 이를 뒷받침했다. 동아일보 역시 이산가족 찾기를 통해 정부와 함께 대북 공세에 나선 것이다.

  혈육을 찾고자 몰려드는 이산가족들로 서울 KBS 건물 안팎은 발 들여 놀 틈이 없을 정도로 붐빈다. 마치 6·25 공산당 남침 당시 임시수도 부산의 들끓던 국제시장을 연상케 하기에 족한 어둡고 슬픈 인파다. KBS 건물을 넘친 이산가족들은 5·16광장으로 확산되었다. 만나서 통곡하고 못 만나서 울부짖는 이산가족들로 5·16광장은 이제 ‘눈물의 광장’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분명히 이산가족이면서도 이 ‘눈물의 광장’에 나가 호소 한 번 못하고 남몰래 가슴을 치며 울어야 하는 이산가족들이 있다. 북한에 가족을 두고 내려온 피난민들이다. 이들은 헤어진 혈육이 북한에 갇혀 있으므로 KBS에 호소해야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해 유창순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6일 북한 측에 남북 적십자 회담의 재개를 요구하고 나섰다. 유 총재는 그동안 여러 차례 북한 측에 1천만 이산가족의 생사·소재 확인 및 상봉과 재결합을 추진하도록 제안했으나 북한 측의 거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음을 개탄하면서 남북적 회담을 즉각 재개할 것을 다그쳤다. (···)
  (···) 북한은 이 겨레의 가슴을 찢는 통곡과 몸부림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 우선 이산가족들의 상봉만을 위해서라도 ‘사상이나 이념, 체제를 초월’, 즉각 남북적 회담에 응해야 한다. 전 인류가 함께 울어버린 이 겨레의 슬픔을 직시, 북한은 상봉의 길을 주저 없이 터주도록 호응해 오기를 거듭 촉구하는 바이다.

예상대로 북한은 그 제의를 즉각 거부했다. 광주 항쟁이 북한의 지원으로 일어났다고 주장한 전두환 정권의 제의를 일종의 평화공세로 평가절하한 것이다. 그러자 외무부는 7일 남북한의 이산가족 재회를 위해 유엔 사무총장에게 협조공한을 발송하는 한편 민간기구를 통해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는 등 남북 이산가족 찾기 운동 추진을 위한 방안을 수립했다고 밝혔다. 이산가족 찾기가 남북 간의 골을 더욱 악화시키는 역할을 한 결과를 빚은 것이다. 어쨌든 KBS의 이산가족 찾기는 11월 14일까지 계속될 만큼 국민적 호응을 받았고 6·25에 대한 아픈 기억을 또 다시 되살리는 계기가 됐다.


소련의 KAL기 격추와 아웅산 테러

이산가족 찾기가 계속되던 8월 31일 뉴욕에서 김포로 향하던 대한항공(KAL) 007편이 소련군의 미사일에 맞아 격추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KAL기가 격추된 사실을 처음 알아낸 것은 미국 정부였다. 일본에 있던 미국 첩보기관이 무선 교신 감청을 통해 밝혀낸 것이었다. 미국은 KAL 007편이 일본 북부에서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으로 들어간 뒤 사할린 부근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에 맞아 격추됐다고 발표했다. 그 여객기에는 2백40명의 승객과 29명의 승무원 등 모두 2백69명(한국인 85명, 중국인 42명, 일본인 27명, 미국인 21명 포함)이 타고 있었다. 동아일보는 그 소식을 9월 1일자 1면 머리에 「KAL기 소 사할린 부근서 실종」이라는 제목으로 내보내는 등 연일 그 사건 관련 기사에 거의 모든 지면을 할애했다. 9월 2일자부터 며칠 동안에는 소련을 비난하는 사설을 연속적으로 게재하기도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고 비통한 일이다. 비무장 민간여객기에 대해 소련의 전투기가 무력공격을 가해 격추시키는 믿기 어려운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 이번 참변을 보고 소련이 평화 애호국이니 뭐니 하는 독백이 얼마나 허구에 찬 것이며 그 체제가 얼마나 경직되고 융통성과 관용이 없고 엄청난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있나를 여실히 절감케 한다.
  이번 사건은 평화적이고 합리적이고 상호 협조적이어야 할 이 시대의 국제질서를 파괴하는 도전행위로 간주할 수밖에 없으며 이와 같은 불상사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 피해당국들은 물론 전 세계가 소련의 만행을 규탄·제재하는 조치가 취해져야 할 것으로 믿는다.
  소련은 스스로 진상 해명과 진사 그리고 응분의 사후 보상에 최대한의 성의를 다하고 이런 과오를 되풀이 않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보여야 할 것이다(9월 2일자 사설).

  소련 전투기에 의해 KAL기가 격추된 지 5일이 지나가도록 소련 정부는 공식 사과는커녕 도리어 들끓는 전 세계의 분노를 비난하고 나서는 등 뻔뻔스러운 작태를 감추지 않고 있다.
  (···) 항공기가 국가 간의 여행수단으로 이용되면서 체결된 모든 국제협약이나 조약들은 조난당한 항공기에 대해 실현 가능한 구조조치를 취하도록 명기하고 있다. 소련도 한국과 같이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 가입돼 있으므로 격추시킨 KAL기의 잔해 수거와 시신 수색에 협력하여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격추된 해역이 소련 영해임을 내세워 당사국인 한국을 비롯, 관련 국가의 수색 작업을 방해하고 있다. 이 또한 유례를 찾기 어려운 행위로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 전쟁 중에 일어난 피해에 대해서도 가해국이 보상해 왔다는 엄연한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소련은 즉각 진실 규명에 나서야 하며 사죄하고 적정한 보상에 성의를 보여야 한다. 소련의 인류 양식에 기초한 신속하고 정중한 반응을 거듭 촉구하는 바이다(9월 5일자 사설).

대통령 전두환의 대통령의 특별담화가 발표되고 유엔안보리가 긴급 소집되는가 하면 전국에서는 소련을 규탄하고 분노하는 각종 대회가 벌어졌고 민간단체와 기업들의 소련 규탄 광고가 신문의 지면을 장식했다. 그 여론을 형성하는 데 언론이 앞장 선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사건의 진상은 KAL기가 운항 미숙으로 소련 영공으로 들어가자 소련 대공부대 사령관이 첩보비행을 하는 것으로 판단해 격추 명령을 내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로 인해 미국과 소련 간에는 ‘민간 첩보기’ 논쟁이 치열했으나 진실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소련의 KAL기 격추가 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에게 큰 정치적 선물을 안겨주었다는 점이다. 미국 내 반소감정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그 덕분에 레이건은 대외정책에서 강경책을 추진할 수 있게 됐을 뿐 아니라 정책 추진에 있어 의회 승인을 얻는 데도 결정적 도움을 받았다. 물론 전두환 정권에도 그 사건은 플러스로 작용했다. 정권 안보 차원에서 적지 않은 도움이 된 것만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1983년 10월 9일 KAL기 피격 사건의 충격이 잊히기도 전에 전두환을 겨냥한 폭탄테러가 버마의 수도 랭군에서 발생했다. 버마 독립전쟁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웅산의 묘역이 테러 목표 지점이었다. 그날 오전 10시 28분 전두환이 묘소 참배를 위해 도착하기 직전 묘소 앞에 도열해 있던 수행원들인 경제부총리 서석준을 비롯해 16명이 사망하고 15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전두환은 나머지 일정을 중단하고 10일 새벽 급히 귀국했다. 결국 그 사건으로 부상자 1명이 더 사망함으로써 사망자 수는 17명으로 늘었다. 동아일보는 10월 10일자 1면에 그 사건을 1면 통단기사로 전하고 11일자부터 13일자까지 거의 모든 지면에 관련 소식과 사설 등을 실었다.

동아일보는 당초부터 북한의 범행 가능성에 주목했다. 10월 10일자 사설(「아웅산묘의 참변」)은 북한을 테러의 범인으로 지목했다.

  버마의 아웅산 묘소에서 9일 낮 12시 58분 지축을 뒤흔든 폭발의 굉음은 인류의 양심을 찢는 폭음이요, 테러와 폭력으로 목적을 달성하려는 잔인무도한 집단의 발악의 표출이었다.
  (···) 아웅산 묘소의 폭탄은 다름 아닌 한국의 국가원수인 전 대통령을 위해하기 위한 테러였다는 데서 단순한 살인범죄가 아니다. 국가적 외교문제이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우리 국민의 격분을 촉발시킨 중대 사안이 아닐 수 없다. (···)
  (···) 우선 참극의 현장이 버마 영토 내의 아웅산 국립묘소였다는 데서 버마 정부는 경호 태만의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 다름 아닌 일국의 국가원수를 초청해놓고 공식 순방 여정에 든 장소에 대형 폭탄이 장치돼 대통령 도착시간과 맞춰 폭발하도록 방치되었다는 것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범인이다. 버마와 북한과의 관계를 보거나 북한의 지난날 대남 도발 행태 그리고 외신들의 분석을 참고로 한다면 아웅산 학살은 북한이 저지른 흉계인 것으로 지목된다. (···)
  김일성의 저와 같은 만행을 접한 우리로서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증오를 참을 수 없다. 또 다시 그런 무도한 도발을 하지 못하도록 강한 응징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국가 목표가 평화통일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국민은 이성을 잃지 말고 국가 발전에 흐트러짐 없이 차분히 매진해야함을 당부해 두는 바이다.

버마당국은 사건 발생 후 한 달 가까운 11월 4일,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이 북한 군부에 의해 저질러졌다고 최종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 사건으로 버마는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버마 주재 북한대사관 요원들에 대해 48시간 이내에 출국하도록 명령했다. 동아일보는 11월 5일자 1면 통단기사로 그 소식을 전하고 범인들은 북한의 특공부대원들로 1명은 사살되고, 2명이 생포됐다고 전했다. 같은 날짜 사설은 북한의 만행을 규탄했다.

  사필귀정-모든 일은 반드시 정리로 돌아가고 만다는 뜻이다. 아웅산 암살 폭발이 북한의 소행이었다는 버마 정부의 최종 발표와 대북 외교 단절 조치는 바로 사필귀정의 글귀를 떠올린다.
  (···) 북한은 6·25 남침을 자행해 놓고서도 남한이 북침한 것이라고 이때까지 잡아떼고 있는가 하면 68년 1·21 청와대 기습 기도도 남한 내부의 소행이라고 덮어씌웠다. 뿐만 아니라 아웅산 암살폭발도 남한 내의 ‘자작극’이라고 생떼를 써왔다. 상식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 북한 김일성의 광적 생리임을 전 세계는 직시해야 한다.
  차제에 객관적으로 실증된 북한의 만행적 타성은 다시 고개 들지 못하도록 규탄되고 규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유엔은 북한의 만행을 전 인류 앞에 규탄하는 특별결의안을 채택해야 한다. 동시에 북한과 거래를 트고 있는 나라들은 예측 못할 북한의 도발과 배신 행위를 경계하고 적절히 사전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전두환의 버마 방문 동기에 의구심을 보이는 견해도 적지 않았다. 버마가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기는 했지만 북한에 편향된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당초 전두환의 서남아 및 대양주 순방에는 인도와 호주, 뉴질랜드 등 3개국만 포함되었는데 막판에 버마가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5공의 핵심부는 버마 통치체제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으며 전두환의 버마 방문은 그 나라의 실력자였던 네윈의 통치체제를 현장 경험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이다.


큰 선물 주고받은 전두환과 레이건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이 북한의 소행으로 최종 확인된 지 며칠만인 11월12일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3일간의 예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소련의 KAL기 격추 사건과 아웅산 묘소 폭파 사건은 그의 강경한 대외정책 수행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한미관계의 돈독함을 보이는 기회이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은 레이건의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2백만여 명의 환영 인파를 동원할 만큼 총력을 기울였다. 동아일보는 레이건의 한국 방문 하루 전인 11월 11일자부터 그가 서울을 떠난 11월 14일자까지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매일 7~8개 면에 레이건의 방한 관련 기사를 쏟아냈다. 동아일보는 11월 14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채택한 15개항의 공동성명 발표 내용을 1면 머리기사로 올렸다.

레이건의 방한을 정리하는 11월 14일자 사설(「레이건의 서울 3일」)은 한미 간의 관계가 최상임을 강조하는가 하면 동아일보의 한미관계에 대한 시각을 잘 보여주었다. 

  그의 서울 2박3일은 한국민 모두에게 ‘잔잔한 흥분’ 그것이었다. 누가 무슨 말을 안 했어도 전국에 자연발생적으로 반가움이 물결쳤다. 그것은 두 나라의 관계가 최상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들에게 미국이라는 맹방의 존재와 힘을 충분히 인식시켜 주었다.
  이번 레이건 대통령의 방한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의 적극적인 자세였다. 그가 휴전선 최전방의 관측초소를 방문하고 미국 대통령으로선 처음으로 쌍안경으로 ‘저쪽’을 살펴보았을 때 왕년의 주한미군 철수 운운 때의 미국의 소극적 자세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자유의 최전선에 서서 한반도의 안보를 강조하고 한국의 역할을 힘주었고 두 나라의 긴밀한 협조관계를 온 세계에 과시했던 것이다. 그것은 북에 대한 경고였고 동북아시아 지역의 긴장에 대처하는 미국의 결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 공동성명에 담긴 15개항 하나하나가 또 그것을 적시하고 있다. 한국군의 현대화와 전투능력 분야의 질적인 향상을 위해 적극 지원하며 주한미군의 계속 유지와 그 전력 증강을 약속하고 있다. 세계적인 악동 북한의 반문명적이고 비인도적인 만행에 대해 외교 역량을 총동원하여 규탄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전두환은 레이건과의 회담 결과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자신을 얻었는지 12월 21일 이른바 ‘학원자율화 ’조치 등을 취했다. 미국행정부의 권고에 따른 것이었다는 설도 있었지만 어쨌든 학원에 대한 획기적 유화정책이었다. 1984년 5월로 예정돼 있던 교황의 한국 방문과 1986년 아시안게임, 국내적으로는 1985년 2월 12일의 총선거도 그 배경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유난히 사건·사고가 많았던 1983년 말을 장식한 조치였다. 동아일보는 12월 22일자1면 머리에 전두환의 유화정책에 관한 기사(「공안 관련자 석방 172·복권 142명」)를 실었다. 석방자 중 1백31명이 학생이었다. 동아일보는 2면 사설 (「제적학생의 복교허용」)을 통해 그 조치를 크게 환영하고 정부의 ‘결단’을 치하하면서 그 이상의 조치가 필요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12월 23일자 2면 사설(「특사와 복권 이후」)은 정치적 사회적 ‘앙금’의 해소를 위해 규제와 해직의 대상이 됐던 인사들에 대한 문제 해결을 촉구했다.

  이른바 학원 사태와 관련된 제적학생들의 복교허 용 조치는 우선 배워야 할 젊은이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그 경위와 이유를 넘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번 정부의 결단은 대학의 자율과 정치적 화합을 추구하는 현실적인 전기가 되리라는 점에서 보다 무거운 의미를 갖는다.
  (···) 그러나 이른바 오늘의 학원 사태는 비단 대학만이 안고 있는 문제는 아니며, 그 근원 역시 학내에서만 파생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한마디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원천적인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른바 ‘기성사회’의 여러 기능들은 ‘사회의 예비역’인 학생들에 앞서 그 원천적인 문제의 해결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마디로 학생들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되는 사회기능의 정상적인 가동에 전념해야 한다. 그것이 이룩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도 다행한 일일 수 없는 악순환을 바로 잡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제적학생들의 복교 허용과 함께 일련의 구속학생들에 대한 사면과 복권 등의 조치가 결단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의 사회에는 참여가 억제된 ‘소외 계층’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 없다. 구체적으로 지적하면 정치 피규제자와 해직교수 및 해직언론인 그리고 노동운동 관계자 등이 그들이다. 그들에게도 참여의 제한이 말끔히 해소되어 우리 모두 고개를 맞대고 서슴없이 당면의 문제를 논의하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12월 22일자 사설).

  제적학생들의 복교 허용에 이은 정부의 특사 및 복권 조치는 우선 복역 중인 인사들이 풀려나고 공민권이 제한되었던 인사들이 정상의 권리를 되찾았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일련의 ‘해빙’ 조치가 갖는 보다 무거운 의미는 정치적 사회적 갈등이 남긴 ‘앙금’들을 되도록 해소하고, 그 갈등 조정의 정상적인 질서를 추구하려는 결단이라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특사 및 복권 조치의 발표문만을 보더라도 우리 사회가 안아온 ‘아픔의 앙금’들이 얼마나 많았던 것인지가 그대로 실감된다. 광주 사태와 김대중 사건을 비롯, 부림 사건과 아람회 사건, 그리고 원풍모방 사건과 피복노조 사건 등 갈등이 남긴 자국들도 다양하다. (···)
  (···) 우리는 어느 계층이나 참으로 민주제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이견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조정을 기약하는 정치적 역량을 갖춰야 한다고 믿는다. 이번 정부의 특사 및 복권 조치가 그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바람이 간절한 것도 그 때문이다.
  더 이상 강경과 관용의 조치가 되풀이되는 악순환은 누구에게나 불행일 수밖에 없다. 그 악순환은 흔히 사회의 룰인 법과 정당한 절차를 외면하는 데서 파생한다. 이번 조치가 그 정도 회귀의 전기가 되기를 바라는 우리는 후속조치로 정치 피규제자의 해금과 함께 5·17 이후 법률과 ‘정당한 절차’에 의하지 않은 ‘규제’와 ‘해직’의 대상자들 모두에게 ‘불이익의 제한’이 해소되는 결단이 내려지기를 바란다(12월 23일자 사설).

전두환 정권의 ‘학원 자율화’가 학원에 대해 손을 놓자는 것은 아니었다. 상황에 더 유연하게 대처하자는 의도였다. 예를 들면 대학에 선도위원회와 홍보위원회 등을 설치하여 학생 시위에 대처하도록 하는가 하면 학교당국은 시위 학생들을 적극·소극 가담자로 분류해, 단과대학별 집단 지도나 수시 지도, 가정방문 지도 등을 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러한 통제는 이미 시효가 지난 규정처럼 힘을 잃었으며 1984년 학생회의 부활로 광주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학생운동의 불꽃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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