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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위 공포 시대와 ‘영웅’ 전두환동아일보 대해부 4권 - 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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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10.12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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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불위의 ‘사회 정화’ 운동

‘광주 사태의 전모’를 발표한 바로 그날(5월 31일) 신군부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발족시켰다. 국보위는 박정희의 국가재건최고회의를 본 따 만든 일종의 혁명위원회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국보위 의장은 대통령 최규하였지만 실질적인 권력자는 전두환이었다. 전두환은 국보위의 위임 사항을 처리하기 위한 상임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장을 차지했으며  군 장성 등 측근들을 위원직에 앉혔다. 실제로 국보위 상임위가 국가의 모든 업무를 관장하는 핵심 조직이 된 것이다. 국보위의 출범은 5공의 시발점이었다.

국보위는 ‘사회 정화’라는 명분으로 무소불위의 권한 행사에 들어갔다. 정당활동을 봉쇄하고 언론을 주구로 만드는가 하면 민주화운동 조직을 파괴했다. 수많은 정치인과 공무원들을 숙청하고 언론인들을 구속하거나 쫒아내는가 하면 언론기관들을 강제로 통폐합했. 또 민주화운동을 벌인 교수와 학생들을 대학에서 쫒아냈다. 불량배를 일소한다면서 수만여 명의 시민을 재판도 없이 군부대에 몰아넣고 기압과 고문을 자행하는 ‘삼청교육’을 벌였다. 노동계 또한 소멸되는 비운을 맞았다. 산별노조가 없어지고 노동조합들은 해산당해야 했다. 그야말로 ‘공포와 암흑의 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국보위 출범 10일 만인 6월 9일 계엄사는 유언비어 유포 등의 혐의로 문화방송·경향신문 조사국장 서동구 등 언론인 8명을 연행해 조사 중이라고 발표했다. 언론이나 언론인에 대한 보도 내용 등을 통제하던 계엄사가 이번에는 유언비어의 유형까지 자세히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그 기사를 6월 9일자 1면 주요 기사로 내보냈다. 연행된 기자들의 이름과 나이는 물론 근무부서까지 자세히 밝혔다. 또 계엄사 발표문을 아무런 해설이나 논평 없이 그대로 실었다. 모든 신문이 검열지침에 따라 똑같이 보도한 것이기는 했지만 당시 신군부에 어느 정도 비판적 자세를 보였던 동아일보라서 ‘굴욕적 전향’의 기미로 보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어려운 난국에 처하여 정부와 국민 모두가 일치단결, 국가 보위와 난국 타개에 정진하고 있는 이 때 확고한 시국관을 가지고 국민을 올바로 계도해야할  언론인이 자신들의 신성한 사명과 책무를 망각하고 도리어 악성적 유언비어를 날조·유포시켜 사회 민심을 자극 현혹시키는 행태를 계속하여왔다. (···)
  이들 8명의 현직 언론인들은 놀랍게도 “고려연방제는 통일을 위한 밑거름이다” “ 김일성 치하에서 살아보았느냐, 현 통치보다는 김일성 치하가 나을 것이다” “광주 사태는 권력에 짓눌려온 민중의 의거이며 민중의 의거가 전국에 확산된다면 궁극적으로 통일이 될 수도 있다” “월남이 망했다고 하나 분명히 분단 월남은 통일되지 않았는가”이상 경향신문·문화방송 간부 및 기자들). “계엄군이 여학생의 유방을 도려냈으며 광주시민을 대검으로 무수히 찔렀다” “계엄군에게 환각제를 먹여 얼굴이 벌겋게 된 군인이 광주시내를 누볐다” “모 운전사가 부상자 4명을 병원에 싣고 갔는데 계엄군이 이 운전사를 공개 처형했다”(이상 동아일보 심송무 기자) 등의 발언과 주장을 서슴지 않았으며 이를 행동화하려는 선동과 유포행위를 자행하여왔다(6월 9일자 기사).

계엄사의 언론인 8명 구속은 신군부의 언론인 숙청을 위한 신호탄에 불과했다. 국보위는 단순한 언론 검열이나 통제에 그치지 않고 민주화 성향의 언론인들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언론인 대량해직은 국보위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의 ‘언론대책반’이 작성한 계획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계획에 따르면 강제해직 대상자 명단은 모두 3백36명이었고 그중 해직된 사람은 2백98명이었다. 그런데 언론사에서 실제로 해직된 사람은 9백33명이나 됐다. 대상자 명단의 2배에 이르는 6백35명이 언론사 자체의 ‘끼워 넣기’에 의해 해직된 것이다. 신군부는 7월 말 한국신문협회 등의 ‘자율 정화 결의’ 형식을 빌려 대량해직을 강행란 뒤 1백72종의 정기간행물을 폐간시켰다.


국보위 홍보 경쟁에 나선 한국 언론

특히 국보위는 민심을 얻기 위해 마구잡이식 ‘사회 정화’ 공작을 벌여 나갔다. 1980년 6월 18일 계엄사는 3·4공화국의 인물들 가운데 공화당 총재 김종필 등 권력형 부정축재 혐의자 10명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계엄사는 5월 17일 이들이 연행된 뒤 32일 간에 걸친 수사 결과 10명중 9 명(전 내무부장관 김치열 제외)이 권력과 직위를 이용해 막대한 치부를 했으며 그 총액은 드러난 것만 8백53억1천만 원에 달한다고 밝혔다. 동아일보는 그 내용을 1면 머리기사로 대서특필하고  대형 해설기사를 싣는 등 국보위의 「정치·사회정화 시행 제1보」라고 지지하는가 하면 3면 전체에 계엄사의 수사 발표를 실었다. 이어 6월 19일자 사설(「권력형 축재 수사 발표를 보고」)을 통해 그 조치를 지지했다. 조선일보와 함께 국보위 홍보에 나선 꼴이었다. 

  (···) 권력형 부정축재자의 처리문제는 부정축재자 개인에 대한 법률적 도덕적 응징과 이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 및 불신 풍조를 없애기 위한 필수적인 방안으로서 뿐 아니라 새로운 민주화 시대를 맞이하여 과거부터 누적된 부정부패에 대한 청산작업으로서도 필요하다는 데 이론이 있을 수 없다. 다만 그 방법이 문제라 하겠는데 본란은 5·17 이전에 누차 이 문제의 처리를 정부당국에 촉구했다.
  결국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와 더불어 계엄군당국에 의하여 이 문제가 처리되기에 이르러서는 그동안 그 추이를 국민들이 비상한 관심을 갖고 주시해오던 터였다. 계엄당국의 발표에 의하면 이들은 ‘시대를 대표하는’ 사회악 정치악이라 할 수 있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로서, 이들에 대한 수사 목적과 동기는 10·26 사태 이후 새로운 민주화 시대를 향한 정치 발전에 맞추어 보다 밝고 알찬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하여 안보와 국가 기강 확립의 차원에서 지도층의 정신 자세를 쇄신시키고 국민적 단합의 기반을 견고케 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 한 사회가 옳은 것과 그른 것, 할 수 있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의 구별이 없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 축재만 하면 무사해서는 정의가 살아 있는 사회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웃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이므로 상탁하정이란 도대체 있을 수 없다.

신군부의 국보위는 사회 정화라는 미명 하에 각 분야의 저항세력을 제거하고 국민에게는 ‘정화’라는 이미지를 강조하는 효과를 노렸다. 그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언론의 보조가 필수적이었고 동아일보도 나팔수 대열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동아일보는 이후 공직사회 등 ‘사회정 화’라는 이름을 붙일 만한 일이면 많은 지면을 제공하기에 이르렀다. 국보위는 1980년 7월 이후 강압적 사회 정화 조치를 더욱 강화해갔다. 7월 4일에는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그 사건에 대한 계엄사의 발표 내용을 아무런 해설이나 논평 없이 그대로 대서특필했다. 7월 10일자 1면 머리기사(「고급공무원 232명 숙정  / 사회정화의 전기···대개혁 선풍」)는 국보위의 발표와 해설을 통해 고급공무원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조치를 보도했다. 이어 2면에는 「고급공무원 대량 숙정을 보고」라는 통단사설을 실었다.

  국가보위비상대책 상임위는 9일 지난 6월 초부터 2급 이상의 공무원에 대한 정화작업을 벌인 결과 장관 1명 차관 6명을 포함한 고급공무원 2백32명을 숙정했다고 발표하였다. 이 숫자는 전체 2급 이상 공무원의 12.1%에 해당하는데 고급공무원에 대한 이 같은 대량 숙정은 정부 수립 이후 최대 규모라 한다. (···)
  (···) 이번 조치는 지금까지 누적되어온 공무원 사회의 부정을 도려내기 위한 조치라고 할 때 이 조치는 여기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앞으로 공무원 사회의 올바른 기강을 정착화시키는 출발점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 또 다시 공무원 부정이 누적되어 어느 때 가서 대수술을 가하는 것 같은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공무원 부정을 사전에 막도록 하지 않으면 안 다. 공무원의 부정을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데는 공무원들에게 생활 보장과 국민을 위한 봉사자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지닐 수 있도록 신분 보장을 선행해야 할 것이다. 이와 아울러 요즘에 거론된 공무원부패방지법의 제정 등 여러 갈래의 연구가 있어야 할 줄 안다.


  ‘삼청교육’의 악랄한 인권 유린

신군부의 국보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사회적 긴장을 지속시킴으로써 사회 전체를 공포 분위기로 압박해 순치시키는 효과를 노렸다. 그 주체도 이제 국보위에서 국보위 상임위로 바꾸었다. 상임위는 8월 4일 ‘사회악 일소를 위한 특별조치’를 단행한다고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같은 날짜 1면 머리기사(「폭력·사기·밀수·마약 등 사회악 사범 일제 소탕」)에서  국보위 상임위원장인 전두환의 사진과 함께 계엄령 포고 13호를 발표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이어 8월 5일자 2면 통단사설(「사회악 일소 특별조치 / 온 국민의 적극참여로 그 뿌리를 뽑자」)을 통해 그 조치를 환영했다. 그러나 그것은는 ‘사회악 일소’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야만적 인권유린 사태를 빚었다. ‘삼청교육’은 바로 그때 발표된 계엄포고 13호를 근거로 한 것이었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를 박고 사회 기강과 안녕질서를 어지럽혀 오던 고질적 암적 존재인 폭력배 등 사회악이 그 뿌리를 송두리째 뽑히게 됐다.
  권력형 부조리의 척결, 공무원 숙정, 과외의 추방 등 과감한 사회 정화 조치를 단행해온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는 “그동안 우리 사회의 저변에 서 선량한 국민을 괴롭혀온 폭력·사기·밀수·마약 사범 등 각종 사회적 독소를 뿌리 뽑아 맑고 명랑하고 정의로운 새 시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각종 불량배를 위시한 제반 사회악 일소를 위해 ‘사회악 일소 특별조치’를 단행하게 되었다”고 발표한 것이다. 사실 이러한 과감한 조치는 그동안 온 국민이 극구 바라는 바였다고 아니 할 수 없다. 
  폭력 등 사회를 좀먹는 사회악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결코 용납될 수 없다. 더욱이 폭력 등 사회악 앞에 선량한 시민들이 생업과 일상 생활에 위협을 받고 공포에 떨며 살아가야 한다면 그러한 사회는 이미 정상적인 기능을 상실한 병든 사회라고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번 국보위의 이 같은 조치는 그동안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박고 있던 만성적이고 고질적인 사회적 병폐를 그 밑바닥에서부터 뿌리 뽑으려는 일대 획기적인 개혁이라고 볼 수 있다.

삼청교육은 악랄한 인권 유린의 현장이었다. ‘삼청계획 5호’는 대상자를 모호하게 규정했기 때문에 억울하게 끌려가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경찰서별 강제할당제를 함으로써 경미한 이유로 연행되는가 하면 정치적 보복과 노동운동 탄압을 위해 악용되기도 했다. 삼청교육이라는 이름은 ‘사회악 일소를 위한 특별조치’를 주관했던 국보위 사회정의분과위원회가 삼청동에 위치해 ‘삼청계획 5호’라는 이름을 붙인 데서 비롯됐다.

그러나 국보위 상임위가 특별조치를 발표하기 3일 전에 합동단속반이 이른바 ‘불량배들’을 소탕했다. 합동단속반은 8월 1일부터 11월 말까지 여러 차례 단속을 벌여 6만여 명을 연행했다. 그중 삼청교육대로 넘겨진 사람은 3만9천여 명에 이르렀다. 삼청교육은 3사단 등 전후방의 군부대에서 무장군인들의 인간 이하의 대우와 감시 아래 1981년 1월까지 계속됐다. 그런 야만적 인권 유린의 공범은 언론이었다. 각 신문·방송사들은 국보위의 의도에 따라 삼청교육을 홍보하는 르포를 게재했다. 동아일보도 한 육군부대를 방문해 취재한 기사를 8월 13일자 사회면(7면) 상자기사로 실었다. 「인간 재생 / 검은 과거 씻는 참회의 눈물」이라는 제목의 신파조 내용이었다. 언론이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삼청교육의 후유증은 매우 심각했다. 육체적 고통은 말할 것도 없었고 교육 중 가혹행위 등으로 사망하거나 불구가 된 사람들도 많았다.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삼청교육 이수자’라는 낙인이 따라다녔다. 2002년 10월 1일 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특별조치로 검거된 사람들이 모두 6만7백55명으로, 그중 4만3백47명이 군사훈련을 받은 것으로 집계됐다. 삼청교육과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람은 3백39명이었고 불구가 된 부상자는 약 2천7백명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것이 이른바 국보위 ‘사정활동’의 내용이었다.


‘전두환 영웅 만들기’ 동참한 동아일보

국보위의 ‘홍보대’를 자임한 언론들은 ‘전두환 영웅 만들기’에 나섰다. 동아일보 역시 국보위 상임위원장인 그를 을 띄우는데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전향’한 동아일보의 보도는 갈수록 태산이었다. 그 하나가  8월 6일자 1면 머리기사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 조찬기도회’가 전두환과 한국기독교 교파 지도자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6일 오전 서울롯데호텔 에머럴드룸에서 열렸다는 내용이다. 기사의 핵심은 기도회에서 한경직(목사)의 기도가 끝난 뒤 전두환이 한 인사말이다. 주목되는 것은 전두환의 인사말 자체가 아니라 보통 국가원수와 함께 하는 조찬기도회를 국보위 상임위원장과 가졌다는 점이다. 「국운 개척사명 기필코 완성」이라는 제목의 기사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 상임위원장은 이날 한경직 목사 등의 기도가 끝난 뒤 인사말을 통해 “지금 우리는 무거운 짐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고 전제, “그것은 이 어렵고도 막중한 국운 개척의 사명을 기필코 완수하여 안정된 복지국가를 우리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는 책임인 것”이라고 강조하고 “온 국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힘을 모아 노력한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는 달성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전 위원장은 “지난해 10월 국가원수가 졸지에 서거한 비극적 사태로 엄청난 비상시국을 맞아 정부와 국민은 조금도 침착성을 잃지 않고 슬기와 예지로 난국을 극복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고 “그러나 지난봄부터 나라의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했던 일부 정치인들의 과열된 정치활동, 사회기 강의 해이를 틈탄 갖가지 비리, 그리고 일부 학생들의 몰지각한 활동으로 우리 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으며 급기야는 불순분자들의 배후 조종에 의해 불행한 광주 사태까지 일어났던 것”이라고 지적했다.
  (···) 전 위원장은 이어 “다행히 주님의 각별한 은총으로 우리 정부와 국민은 슬기롭게 이 난국을 극복하고 이제 새 시대 새 사회의 건설을 위한 대열에 서서 힘차게 매진하고 있다”면서 “지금 이 시간이야말로 우리 모두 사심 없이 일치단결해서 나라의 기틀을 바로 잡고 번영을 이루어가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동아일보는 이틀 뒤인 1980년 8월 8일자 1면 머리에「미, 전두환 장군 지지/ 숙정으로 한국민 환영받아」라는 주먹만한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서울에서 AP 기자가 익명의 주한미군 고위당국자를 인터뷰한 내용이었다. 인터뷰 대상자의 이름을 밝히지도 않은 외신 기사를 대부분의 국내 언론이 1면 머리 올린 것은 보도의 기본적 상식에 어긋난다. 특히 동아일보의 그런 보도 행태는 언론의 정도를 포기한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 기사는전두환 띄우기’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때부터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 본격적으로 들어간 것이다.

  [서울 AP 합동 본사특약] 미국은 전두환 장군이 지도자가 되어 지도력을 더욱 공고히 한다면 그를 지지하려 하고 있다고 주한미군의 한 고위당국자가 말했다.
  신원을 밝히기를 거부한 이 군인은 그러나 “만약 그가 한국민의 광범한 지지를 보여준다면, 그리고 한국 정세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그를 지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한국 국민이 원하는 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예측에 단서를 달았다.
  이 미 군사당국자의 발언은 서울에 있는 다른 미국 관리의 의견을 반영한 것인데, 49세인 전 장군은 국보위상임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이 국보위는 지난 5월 반정부 데모와 전국적인 계엄령 해제 요구가 있은 후 설치된 것이다. (···)
  이 당국자는 전 장군이 공무원·언론 등의 숙정과 수천명의 깡패를 소탕함으로써 국민의 상당한 지지를 획득했다는 다른 분석가들의 견해에 동의했다.

동아일보는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바로 다음 날인 8월 9일자 1면 한복판에「‘한국민 지지’에 대한 동의/ 미군 고위당국자의 전두환 장군 지지 의미」라는 해설기사를 실었다. 작성 기자의 이름도 없는 ‘유령기사’였다. 물론 전두환에 대한 미국 정부의 지지를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이와 함께 동아일보는 1면 주요 기사들(「미, 전두환 장군을지지 / 안보가 정치자유 우선」 「미국의 전두환 장군 지지/ 일 주요지들 크게 보도」) 로 미국과 일본 언론의 보도 내용을 전했다.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를 주도하는 듯한 편집이었다. 더구나 1면 머리기사는 국보위가 사회 정화 운동의 일환으로 벌인 전국의 지역별 자체 정화 운동을 다룬 내용이었다. 「전국 지역별 자체 정화 운동/ 이·동 단위까지 ‘정화위’구성」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사회악과 부조리 척결 등 판에 박힌 관제운동을 미화했다.

  미국이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장 전두환 장군을 지지할 것이라고 전망한 8일자 외신 보도는 새로운 공화국의 출범을 앞둔 한국의 정치 기상, 그리고 이와 관련한 한미관계의 차원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풀이된다.
  주한미군의 고위간부 말을 인용한 이 보도는 ‘한국정세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지 않는다면’ ‘그가 한국의 지도자가 되어 지도력을 더욱 공고히 한다면’ 이란 조건들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전 장군이 그가 주도한 일련의 숙정작업으로 국민의 광범한 지지를 획득하고 있음을 아울러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조건 없는지지 표명의 뜻을 갖고 있다.
  10·26 사태 이후 12·12 사건, 5·17 사태 등의 고비를 거치는 과정에서 한미관계는 반점을 남기기도 했으나 미 측의 이 같은 태도 표명에 따라 불투명한 것이 투명한 것으로 전환되는 계기를 일단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8월 9일자 1면 해설기사).

  [수원=김봉호·장봉진 기자] 밝고 정의로운 새 사회 건설을 위해 각종 사회악을 일소하고 부조리를 척결하는 데 주민 스스로가 앞장서는 움직임이 각 지역별로 일어나고 있다. 주민들 스스로에 의해 불이 붙기 시작한 이 운동은 시·군·구·읍·면·동 등 각 지역별로 정화추진위원회를 구성, “내가 먼저 내 주변부터 정화하자”는 슬로건 아래 각종 불량배에 대한 자수 권유 신고 순화 및 계도활동을 펴고, 불량배에 대한 사후관리책을 마련, 그들을 밝은 사회에서 따뜻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주며, 지역 및 직장별로 사치·방종·유혹 등 비리 요인을 색출 척결하고, 내 고장 내 직장 내 학교를 내가 스스로 밝고 명랑하게 만들어 서민생활을 괴롭히는 모든 병폐와 비리적 의식구조를 말끔히 씻어내자는 것이다.
  이 운동은 국보위에서 반사회적 행위자를 일제 검거하는 등 사회 정화 작업을 펼치는 것을 환영하면서 주민들도 스스로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이 같은 움직임의 첫 걸음으로 9일 오전 11시 경기도 수원시 수원 공설운동장에 서 경기도민의 자발적인 지역정화운동 추진결의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날의 ‘지역정화추진 경기도민결의대회’에는 각 부락민과 시민이 주축이 돼  각급 지역단위에서 자발적으로 구성된 지역정화위원회 위원 8천명과 기업체 종사원 시민 등 3만여명이 참가했다(8월 9일자 1면 머리기사).

‘눈 가리고 아옹’ 하기 식의 관제운동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지만, 이런 언론의 나팔수 역할이 전두환의 5공화국을 ‘탄생’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동아일보 8월 9일자 1면은 온통 전두환에 대한 기대와 찬사, 그리고 국보위 활동에 대한 홍보로 뒤덮였다. 박정희 정권 시기의 새마을운동을 벤치마킹한 ‘박정희 아바타’를 만드는 데 ‘공헌’한 셈이었다. 동아일보는 이틀 후인 8월 11일자 1면 머리에  뉴욕타임스의 전두환 인터뷰 기사를 크게 올렸다. 「“한국 새 세대의 지도자 필요” / 야망 아닌 천명 맡겨야-전두환 장군 NYT 회견」이라는 그 기사는 전두환의 위상을 한껏 높이는 역할을 했다. 2면에는「한국을 보는 미국의 눈 / 한국의 현실과 전두환 장군 지지의 배경」이라는 통단사설을 내보냈다. 

  [서울=뉴욕타임스 본사특약] 전두환 장군은 8일에 가진 한 인터뷰에서 한 국민은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 시간에 걸친 이 인터뷰에서 전 장군은 한국이 “명백히 군부의 지도력(리더십)과 통제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 장군은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생각할 때 우수한 지도력이 없으면 어려운 처지에 빠질 것”이라고 말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지 10개월도 되지 않았다. 10월 26일 이전에 나는 군대 밖에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국민들도 나를 몰랐고 국제사회도 물론 나를 몰랐다”고 전 장군은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그때 이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어려운 문제들이 닥쳐왔고 나는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이제는 나는 국민의 주시를 받게 되었다”고 말했다.
  (···) 그는 “한국에서의 지도력은 단순히 본인이 원한다거나 야망만 가지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전 장군은 “이것은 기독교인이 말하는 신의 섭리나 중국인들이 말하는 천명에 맡겨져야만 한다”고 덧붙였다(8월 11일자 1면 머리기사).

  한국의 정치 현실에 대한 미국 측의 일부 반응이 최근 연이어 미국의 언론매체를 통해 보도되고 있다. AP통신과 뉴욕타임스 그리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등의 최근 잇단 보도가 그것이다. 뉴욕타임스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인 전두환 장군의 프로필과 회견 기사를 실었고 AP통신과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주한미군 고위당국자의 말을 인용해서 미국이 한국의 정치 현실을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전했다.
  (···) 사실 미국이 70년대에 후진 우방국들에 강력히 내세운 인권과 민주 문제는 반공정책에서 온건노선을 주장하는 진보주의 무드의 여파였다. 그러나 그 진보무드는 미국 내의 여러 변화 요인과 월남의 적화로 후퇴하기 시작하였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보수주의에 밀려가고 있다. (···) 그밖에도 미국은 박동선 사건 등을 계기로 한국과 미국 사이에는 정치문화상 크나큰 벽이 있음을 실감했을 것이 틀림없다. 동양적 정치문화와 서양적인 것이 다르다는 인식은 이번 주한미군 고위당국자가 “미국식 민주주의가 한국에 적당하다고 믿지 않으며 또 한국도 미국식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사실이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
  따라서 한국의 정치 현실을 인정한 어느 미군 고위당국자의 발언과 그에 대한 일부 미국의 매스컴 보도는 미국의 대 한국관이 70년대 초반의 이상·진보주의적 차원에서 현실·보수주의화 되어가고 있음을 실증한 것으로 보 인다. 원래 미국인의 사고체계가 실용주의에 바탕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할 때 보수 물결 속의 미국이 한국의 정치 현실을 현실적으로 인식하려 한다는 것은 이상할 게 없다(8월 11일자 사설).


최규하의 강요된 하야

1980년 8월 15일은 광복절 35주년이었다. 대통령은 최규하는 그날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광복절 35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경축사를 했다. 그리고 하루만인 16일 ‘대통령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이에 앞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8월 13일 총재직을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밝혔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신군부의 시나리오에 의한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8월 15일자 3면에 김영삼의 정계 은퇴 선언에 관한 해설기사(「새 정치질서의 재편」)를 내보냈다. 그 기사 무기명의 ‘유령기사’였다.

동아일보는 8월 16일자 1면 머리에  최규하의  하야 성명을 통단기사로 보도하고 그 의미와 전망에 대한 해설을 덧붙였다. 「앞당긴 과도 종막 새 정치 출발 신호」란 제목의 머리기사는 전두환의 집권을 당연시하는 내용이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정계 은퇴 선언으로 구 정계를 이끌어온 ‘3김 씨’가 모두 정계를 떠났다. 이로써 구 정치질서는 전면적으로 사라지고 새로운 정치질서를 위한 정계 개편이 주목의 초점으로 등장하고 있다.
  (···) 3김 씨의 퇴장은 그동안 조성되어온 분열과 낭비와 비리의 정치 풍토에 일대 개혁을 불가피하게 했다는 데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정치권은 새로운 가치관에 입각한 새로운 정치 질서를 형성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기성 정치인들의 퇴진은 한국의 특수 현실에 대한 인식 없이  10·26 이후 정권자체에만 집착,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는 노력을 외면하고 대중 선동과 낭비적인 정치 행태를 불식하지 못한 데서 그 책임을 찾을 수 있다.
  국가의 안보적 상황 정립과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거리가 먼 비생산적 정치 풍토는 이제 종식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기존의 정치 관습은 새 시대의 정치에 교훈적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 전두환 위원장은 최근 회견에서 직업정치인 배제에 두 가지 주목되는 발언을 했다. 우선 민주정치를 하되 서구의 것을 무조건 모방하지 않고 민주정치를 토착화시키겠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해방 후 건국을 했으나 명목상의 독립이었을 뿐이고 진정한 민족국가의 건설은 지금도 진행 중에 있다고 말한 점이다(8월 6일자 1면 해설기사).

  (···) 그러나 이와 같은 과도기적 백화제방 현상은 5·17 조치와 그에 이어 설치된 국보위의 사회 정화 작업을 계기로 하나하나 정리되는 양상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특히 정치적인 분야에서 혁명적인 모습을 보여 지도세력의 전면 교체라는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서 국보위의 활동을 주도해온 전두환 상임위원장의 급속한 부상은 앞으로의 정국 전개와 관련, 주목을 끌고 있다.
  전 장군은 지난 6일 ‘국가와 민족을 위한 조찬기도회’에 나가 “막중한 국운개척 사명을 꼭 완수하여 안정된 복지국가를 후손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다짐한 데 이어 8일자 외신을 통해 미국의 지지를 받을 것으로 보도됨으로써 내외의 이목을 한꺼번에 받게 됐다. (···)
  내외의 많은 관측자들은 이제 전 장군이 새 시대 새 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할 가능성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있다. 지도세력의 확연한 부각과 함께 논의가 분분하던 개헌안의 권력구조 문제에 있어서도 의견을 귀일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정부 형태로는 대통령중심제, 대통령선거 방법은 간선, 임기는 6년 단임제를 채택할 것이 유력하다(8월 16일자 3면 해설기사).

‘전두환 대통령 만들기’에는 온갖 수단이 동원됐다. ‘전두환 장군 대통령후보 추대’를 위한 각종 관제대회와 통일주체국민회의 의원들의 추대 결의대회가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또한 수많은 기업과 단체들이 전두환을 지지하는 광고를 신문에 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8월 21일에는 전군지휘관들이 나서 전두환을 국가원수로 추대하자는 결의를 하는가 하면 전 대통령까지 최규하가 ‘전두환지지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동아일보의 ‘전두환 장군’ 예찬론

  전두환은 이미 대통령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4성 장군에서 퇴역해야 했고 언론들은 그의 전역식 또한 ‘극진하게’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8월 23일에 열린 전두환의 전역식을 1, 2, 3, 7면에 내보냈다. 내용은 ‘황송’의 정도를 훨씬 넘어 아부 이상의 수준이었다. 1면의 사진과 상찬을 곁들인 사진설명, 2면의 통단사설, ‘전비어천가’나 다름없는 3면의 대형 상자기사, 7면의 전역 현장 스케치 등이 바로 그랬다.

동아일보는 2면 사설(「전두환대장의 전역」)에서 전두환의 전역을 ‘40대 이하 자주적 민주세대의 등장’이라고 평가하는가 하면 3면 해설 기사에서는  ‘새 시대가 바라는 새 지도자상’이라며 그의 지도자로서의 등장을 국민이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소도 웃을 일이었다. 

  전두환 육군대장이 22일 오후 전역식을 마쳤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져 갈 뿐이라는 말을 남기고 군복을 벗은 2차대전의 어느 영웅이 퇴역했던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그동안 수많은 노병들이 병영을 떠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전 장군의 전역은 그들의 전역과는 달리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
  (····) 전 장군은 오는 27일로 다가선 대통령선거를 닷새 앞두고 군복을 벗으면서 “새 역사 새 질서 창조에 신명을 바치겠다는 구국의 신념과 불퇴전의 결의로써 30년간의 현역 군생활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고 천명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지난 몇 달 동안 단행한 여러 사회 부조리 척결에서 목격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병폐는 ‘불퇴전의 결의’를 요청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 전 장군이 장기집권의 통폐를 미워하고 평화적 정권 교체의 전통을 세우겠다고 분명히 하였다는 것은 그가 권력의 속성이 빚어내는 부작용과 비극의 원천을 간파하고 있으며 자신이 민주한국에서 교육되었음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된다. (···) 전 장군의 성장 과정으로 미루어 그가 장기집권을 혐오하고 평화적 정권 교체의 절대성을 강조하였다는 것은 차라리 당연하며 40대 이하 자주적 민주세대의 등장을 뜻하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8월 23일자 사설).

  (···) 전두환 국보위 상임위원장은 10·26 사태 이후 심지어 구 여권까지 일부 정치군중에 영합했던 허위의식에 대해 실천적으로 반론을 제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또 10·26 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정권 전환의 호기로 착각했던 일부 정치인들을 한반도문제가 본질적으로 안보문제라는 콘텍스트 속에서 엄격히 징계했다.
  그는 모든 것을 미국적 척도로 가늠하려는 미국의 한 때 오도된 대한정책에 확고한 역사의식을 갖고 의연히 대처했으며 종국적으로 그들의 이해를 얻었다는 평가다. 아마 민족주의자임에 틀림없는 전 위원장은 최근 워싱턴포스트지의 “미국은 전 장군이 한국 정부 수반직을 맡는 데 대해 반대하지않기로 했다”는 보도를 읽고 쓴웃음 지었을 것이라는 얘기들도 있는 것이다.
  (···) 그가 해낸 일들은 단순히 구 정권의 연장선상에서 결코 이해될 수는 없는 것이며 더욱 소위 반체제에 대한 어떤 반응과는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세평이다. 말하자면 새 시대를 주도적으로 준비한 새 지도자의 창조적 노선으로 국민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시대적 상황은 다르지만 정치세력의 관계와 부침에서 볼 때 자유당 시기를 ‘야합’의 시대라고 한다면 5·16 이후를 ‘타협’의 시대로, 그리고 다음 장은 옥석을 가려놓고 시작하는 새 시대로 예고되면서 전 위원장이 새지도자로 추대되고 있는 것이 의미 있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8월 23일자 3면 상자기사).


체육관 선거로 당선된 ‘제11대 대통령 전두환’

이미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국보위 상임위원장 전두환은 8월 25일 대통령후보로 등록하고, 27일 단일후보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날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7차 회의에서 전국 재적의원 2천5백40명 중 2천5백25명이 참석한 가운데 무기명 비밀투표를 통해 단일후보 전두환을 찬성 2천5백24표, 무효 1표로 11대 대통령에 선출한 것이다.

동아일보는 전두환의 대통령 당선을 그 날짜 1면 머리에 올렸다. 그리고  3면에 관련 기사, 7면에 현장의 표정과 기대 등을 실었다. 동아일보는 이후 9월 1일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 때까지는 물론 그 이후에도 시리즈 등 전두환에 관한기사들을 쏟아냈다. 특히 8월 29일자 전체를 전두환 개인에 대한 장문의 칭송 기사와 결혼 및 가족 사진 등으로 장식했다. 마치 전두환 정권에 대한 충성경쟁에서 조선일보에 뒤진 상황을 만회라도 해보겠다는 모양새였다. 「새 시대의 기수 전두환 대통령 / 애국 충정 30년···군 생활을 통해 본 그의 인간상」이란 제목의 기사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전 대통령을 아는 많은 사람들은 그를 신념과 의지의 인물이라고 부른다. 29년 군 생활을 통해 공사(公私)생활을 막론하고 전 대통령은 신념과 의지로써 일관해왔다고 한다. 가장 평범한 진리를 가장 철저히 지킴으로써 ‘평범 속의 비범’을 실천해왔다. 전 대통령의 여러 가지 성품을 정직·성실·정의감으로 요약할 수 있다는 것도 소박한 생활신조를 투철한 의지력으로 행동해왔기 때문이다.
  만난 극복의 의지력을 많은 사람들이 그의 두드러진 성품으로 꼽았다. 또 주변에서는 ‘위기에 강한 인물’이라고 평한다. 평화 시보다는 어려운 상황일수록 강한 의지력을 발휘, 좌절과 실망과 기피를 모르며 ‘최악의 상황에서 도 최선은 있다’고 믿는 전 대통령의 신념에 찬 자세에서 선도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들 했다. (···) 
  (···) 청렴결백의 성품은 전 대통령의 또 다른 특성이다. 공화당 정권 18년 동안 군인으로서는 상당 기간 축재를 할 수 있었던 권력의 주변에도 있었으나 그는 물질적으로는 결코 썩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사치를 모르고 물욕을 초월한 그의 성격 때문이다. 사치스러운 외국제 물건을 전혀 모를 정도로 청렴결백한 생활로 일관했다. 아직도 전 대통령이 차고 다니는 시계는 파월 연대장 때부터 갖고 있는 투박한 군용시계다. (···) <최규철 기자>(8월 29일자 3면 상자기사).

 

언론인 강제해직에 이은 언론 통폐합

신군부는 1980년 5월 광주 항쟁과 관련해 제작을 거부한 언론인들을 구속한데 이어 7월 9백명이 넘는 언론인을 강제 해직시킨 바 있다. 언론을 순치시키고 저항적인 언론인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신군부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80년 11월 12일 전대미문의 대규모 언론 통폐합에 관한 계획을 발표했다.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살벌한 계엄 하에서 그날 서울 보안사령부는 서울지역 언론사 대표들을 불러 언론사 포기 각서를 받았다. 지방 언론사에 대해서는 보안사 지방부대가 각서를 받았다.

그리고 불과 이틀 후인 11월 14일 전두환의 신군부는 신문협회와 방송협회에 강요해 발표하도록 한 ‘건전언론 육성과 창달을 위한 결의문’을 빌미로 언론 통폐합을 강행했다. 그 내용은 신문 및 통신사 통폐합, 방송 공영화, 신문과 방송의 겸영 금지, 중앙지의 지방주재기자 철수, 지방지의 1도 1사제 등이었다.

동아일보는 11월 15일자 1, 3, 7면에 언론 통폐합 관련 뉴스를 보도했다. 1면에는 「언론기관 통폐합」이라는 머리기사와 신군부의 강압에 의해 발표된 ‘건전언론 육성과 창달을 위한 결의문’을 싣고,  「언론 80년···초유의 대개편」이란 해설기사를 내보냈다. 해설기사는 무기명으로 된 ‘유령 기사’였사다. 11월 17일자 동아일보는 동아방송이 KBS에 통합된다는 뉴스 등 후속기사를 1면 머리에 싣고 2면에는「한국 언론의 전환기 / -신문·방송협회의 ‘통폐합결의’를 보고」라는 통단사설을 게재했다. 동아일보는 이 사설에서만은 언론에 관한 기본적 문제들을 지적하기도 했다. 

  한국신문협회와 방송협회가 14일 결의문을 통해 밝힌 ‘언론구조의 자율적 개편’과 ‘신문 및 방송, 통신의 통폐합 원칙’은 질과 양 면에서 모두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족하다. 결의문이 ‘자기 혁신의 결단’으로 표현한 이 같은 조치는 그동안 계속 거론돼온 것으로 80여년의 우리 언론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방대한 개편으로 풀이된다. (···)
  신문·방송협회가 이 같은 결의를 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자료로 내놓은 ‘우리 언론의 현실과 문제점’에 따르면 우리 언론은 빛나는 전통에도 불구하고 구조와 풍토 면에서 전근대적인 잔재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방송의 경우 5·16 이후 미국과 일본 유형의 상업방송체제를 도입, 운영해와 ‘새 시대가 요구하는 건전한 국민정서와 국민정신 개조’에 상충되는 것으로 지적됐다. 따라서 방송의 공영화와 공익성을 확보하자면 현행 텔레비전 분포 등을 탈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건국 이후 정치적 압력과 이해관계가 엇갈려 신문·방송·통신이 난립, 외국에 비해 숫자가 많다는 것이 자율개혁의 한 이유로 꼽혔다. 난립 현상에 따라 일부 언론은 기업구조가 악화돼 명목상의 임금만 지급하는 경우도 나와 부조리를 빚는 일도 있었다는 진단이다(11월 15일자 3면 해설기사).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는 14일 언론기관도 ‘새 시대 상황에 창조적으로 적응하기 위해 언론구조를 개편하고 기관을 대폭 통폐합할 것’을 결의했다. 자율 형식으로 추진하게 된 이 결정에 따라 전국 신문·방송·통신사 중 신문 7개사, 방송 6개사 등 합계 19개사가 통폐합되며 방송은 민방체제가 없어지고 완전히 국영 또는 공영화체제로 바뀌게 됐다. 한국의 80년 언론사상 일찍이 없었던 대변혁을 내포한 충격적인 결정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
  아무튼 두 협회의 결의에 따라 오는 25일까지 해당사 상호간의 협의로 통폐합 작업을 마친 뒤 12월 1일부터는 새로 개편된 언론기관 하에서 신문과 방송이 그 기능을 발휘하게 됐으며 신문은 산업사회의 정보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서 81년 1월부터 증면하게 된다.
  신문의 증면은 폭주하는 정보시대에 우리가 적응해가는 데 필요한 것으로 때늦은 감마저 없지 않고 독자들이 입을 모아 지지하는 조치이다. 그 밖의 결정사항도 소기의 목적이 순수하게 구현되기를 기원하면서 이 혁명적인 조치와 관련, 몇 가지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첫째, 통합된 매체의 종사자들은 원칙적으로 통합한 회사에서 흡수하게 돼있는 것으로 알지만 이 흡수는 일시적인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며 장기적으로 직장을 확보해줘야 할 줄 안다. (···) 둘째, 통폐합이 언론의 획일화 현상을 촉진시키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것이다. (···) 민주주의는 상대주의와 다양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국론을 어느 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데도 대화와 설득을 통한 고도의 정치적 기술이 요청되고 있다. (···)
  셋째, 언론기관 특히 방송은 앞으로 공익 기능에 더욱 역점을 둘 것으로 짐작하거니와 금후 국영이나 공영방송은 최소한 BBC와 같은 공정한 보도와 알맹이 있는 교양프로를 제작하도록 노력해서 선택이 좁아진 시청자들을 실망시키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끝으로 언론구조의 일대 개편이 언론의 자유를 위축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언론기관에 ‘창조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행동의 폭을 넓혀주는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해두고 싶다.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서 자유가 허용되어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1월 17일자 사설).

전두환 정권은 1980년 연말을 ‘언론악법’인 언론기본법 제정으로 장식했다. 언론 통폐합이라는 폭압적 조치를 취한 데 이어 이전의 언론 관련법들을 통합해 12월 26일 입법회의를 통과시킴으로써 언론기본법을 확정했다. 12월31일 발효된 그 법은 전문 57조와 부칙 4조로 구성돼 있으며 정기간행물의 등록의무제(사실상의 허가제)를 실시하고, 문화공보부 장관의 발행정지 명령권 및 등록취소 권한을 두는가 하면 방송위원회·방송심의위원회·언론중재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함으로써 언론 통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언론기본법은 언론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정치체제에 순응하는 언론체제를 만들어내면서 그 반대급부로 언론사에는 증면과 각종 세제상의 혜택, 그리고 언론인들에게는 다양한 특혜를 주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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