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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죽음과 동아일보의 유신체제 살리기동아일보 대해부 3권 - 3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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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9.21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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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16일 저녁 7시 40분 청와대 옆의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총성이 울렸다. 천수를 다하기까지 대통령 자리에 머물듯하던 박정희가 죽음의 길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안가’의 총소리

한 소설가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쓴 책에는 ‘그날 그때’의 장면들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 김재규가 방 안에 들어가서 자리에 앉았을 때 신재순(여대생이자 모델-인용자)이 차지철의 지명을 받고 노래를 하려고 일어서 있었다. 심수봉이 반주를 시작했고 신재순은 떨리는 목소리로 「사랑해 당신」을 불렀다. 모기 소리만한 자신 없는 목소리로 두어 소절을 불렀을 때 옆에서 박정희  은 소리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신재순은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대통령까지 끼어드는 바람에 음을 놓치고 갑자기 키가 높아졌다. 심수봉이 기타 반주를 멈추고 말했다.
  “잠깐만요. 키 좀 맞추고 다시 해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제가 노래를 너무 못 불러서 그래요. 죄송해요.”
  신재순이 울상을 지으면서 말했다.
  “아니, 그런데 각하께서 젊은 사람들이 하는 그 노래를 다 아시네요?”
  김계원이 분위기를 무마하려고 화제를 돌렸다. 박정희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나서 방금 자리에 돌아와 앉은 김재규를 쳐다보며 말했다.
  “김영삼이를 브라운 장관이 오기 전에 기소하라고 했는데 유혁인이가 말려서 취소했더니 역시 좋지 않아. 한미 국방장관회의고 나발이고 법대로 하는데 뭐가 잘못이야. 미국 놈들은 법을 어겨도 처벌하지 않나?”
  박정희는 연거푸 양주를 몇 잔 마신 탓에 얼굴이 불콰했다.
  “각하, 김영삼은 이미 총재직을 내놨고 국회에서 제명까지 시켰습니다. 구속까지 하면 이중 처벌하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국민 여론이 나빠집니다.”
  김재규는 몇 번이나 되풀이해왔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간곡하게 전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부산 데모만 해도 그렇지. 선량한 시민보다 식당 뽀이나 똘마니가 많지 않아? 그놈들이 어떻게 선별 수리가 뭔지 알겠어? 다 신민당이 뒤에서 조종해서 하는 짓인데, 중정은 더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야겠어. 또 정보부가 좀 무서워야지. 야당의 비행조사서나 움켜쥐고 있으면 뭐 하나? 딱딱 입건해야지.”
  김재규는 화가 치밀었다. 박정희는 김재규가 싫어하는 말을 집요하게 반복함으로써 김재규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알겠습니다, 각하. 그러나 정치는 대국적으로 해야 합니다.”
  김재규는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로 가져갔다. 발터 권총의 딱딱한 손잡이가 손 안에 들어왔다. 박정희가 김재규의 발언을 불경스럽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울이면서 얼굴이 일그러졌다. 김재규는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면서 먼저 김계원에게 일갈했다.
  김계원이 움찔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김재규는 총구가 그를 향하는 줄도 모르고 끼어들 말을 궁리하고 있던 차지철을 향해 첫 발을 발사했다. 곧이어 김재규의 총구는 박정희를 향했고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김재규의 총알이 박정희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저녁 7시 40분, 이 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총성 두 방이 어둠이 내려앉은 궁정동의 하늘을 뒤흔들었다(문영심, <김재규 평전-바람  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시사IN북, 2013, 100~101쪽).

동아일보 10월 27일자 1면 머리에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라는 기사가 올랐다. 기사의 부제목은 「전국에 바상계엄 / 대통령 권한대행에 최규하 총리 / 어제 저녁 7시 50분경 운명 / 차 경호실장 등 5명도 숨져 / 궁정동 정보부 식당서, 김 부장·차지철 경호실장 말다투다 쏜 총에」이다.

  (···) 정부대변인 김성진 문공장관은 27일 오전 7시 50분 박 대통령 피격 서거에 관해 “박정희 대통령 각하가 10월 26일 저녁 6시경 궁정동 소재 중앙정보부 식당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마련한 만찬에 참석,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김 정보부장과 만찬 도중 김 중앙정보부장과 차 경호실장 간에 우발적이 충돌 사태가 야기, 김 정보부장이 발사한 총탄에 맞아 26일 저녁 7시 50분경 서거했다”고 밝히고 “박 대통령은 총탄에 맞은 직후 김 비서실장에 의해 급거 군 서울병원에 이송됐으나 병원에 도착되기 전에 운명한 것으로 병원장의 진단이 내려졌다”고 발표했다.
  김 장관은 “차 경호실장을 포함한 5명이 사망했으며 김 정보부장은 지금 계엄사에 의해 구속돼 조사를 받고 있다”면서 “정부는 박 대통령 각하의 서거를 애도하는 온 국민의 뜻을 받들어 국장을 지내기로 결정했다. 국장에 관한 구체적 사항은 추후 발표될 예정이며 국민 모두는 국장 기간 중조기를 달고 다 같이 경건하게 애도의 뜻을 표합시다”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새벽 4시 10분 김 장관은 “헌법 제48조 규정에 의해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여 수행하게 되었음이 10월 26일 밤 11시에 열린 임시국무회의에 보고됐다”고 밝히고 “긴급히 소집된 임시국무회의는 대통령의 유고로 인해 국가의 안전과 사회질서의 유지를 위해 79년 10월 27일 오전 4시를 기해 전국 일원(제주도 제외)에 비상계엄을 선포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짜 동아일보에는 박정희에 관한 기사들이 줄줄이 실렸다.

· 「모든 경제활동 정상 유지 / 신 기획 회견-민생 안정에 최선 / 물가 안정 등 주력」(2면 머리)
· 「박 대통령 마지막 하루 / 심야 6시간 / 삽교 방조제 준공 상경 길 / 전용 헬기 고장 예감 불길」(3면 머리)
· 「박 대통령 집권 18년 5개월 / 출생부터 서거까지 62년 생애 / 소장 때 혁명·63년 대통령 / 틈만 나면 농촌 즐겨 찾아 민정 시찰 / 3선 개헌·유신  제 구축」(3면)
· 「경천(驚天)의 충격 할 말도 잊어 / 유고·계엄 서거에 얼떨떨한 가두 / 정말일까 출근길의 시민들」(7면)


유신체제 살리기에 앞장선 동아일보 사설

동아일보는 같은 날짜 2면에 「비상 사태와 국민적 각오 / 박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며 / 자율적 질서 유지를 당부한다」라는 사설을 실었다.

  (···) 박 대통령의 서거 후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권한대행에 취임하고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신속하게 질서유지에 임하고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인데 오늘의 국가비상사태를 맞아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북괴의 책동과 사회질서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오열(五列)의 장난이다.
  미국 정부도 즉각 성명을 발표하여 북괴에 우리 내부의 사태를 악용하지 말 것을 경고하였고 미국의 확고한 결의를 표시하기 위해 필요한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미국 정부는 또 한국의 사태를 악용하려는 어떤 외부적 기도에 대해서도 대한(對韓) 방위 의무에 따라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도 다 같이 합심하여 내부의 혼란으로 적에게 틈바구니를 주지 않도록 엄중히 경계해야 하겠다. 특히 우리의 일선 지휘관을 포함한 전 장병은 국토 방위라는 신성한 의무에 어느 때보다도 충실하기를 바란다.
  전선뿐 아니라 후방의 국민들도 비상한 각오로써 현재의 위국(危局)을 무사히 넘기기 위해 자율적으로 당국에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모든 공무원은 솔선수범하여 정상상태를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계엄사령부는 질서 유지를 위하여 각종 조치를 취하였거니와 모든 국민은 이에 순응해야 할 것이다. 국가가 어려울수록 유언비어가 나돌게 마련이지만 이 중에는 오열이 조작하여 퍼뜨리는 것이 있을 수 있으므로 이에 특별히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정부당국도 이 점에 대해서는 불필요한 유언비어가 나돌지 않도록 되도록이면 신속한 발표를 통해 국민의 궁금증을 풀도록 하기 바란다. 그리고 계엄당국의 포고가 아니더라도 앞으로 사태가 수습되기까지는 질서 유지에 유해한 일체의 행위는 국민 스스로가 자제해야 할 줄로 안다. 이번 사태는 우리 역사상 가장 불행한 사태의 하나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이런 때야말로 국민 스스로가 자기 나라를 지키고 자기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겠다는 자율적 자세가 절대로 필요하다.
  비록 우리 민족은 많은 시련을 겪어 왔으나 불사조처럼 그 시련과 비운을 딛고 일어날 줄 아는 능력을 가진 민족이다. 지금 온 세계가 주시하는 가운데서 우리는 오늘의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국면에 마주쳐 있으므로 우리 국민의 높은 문화 수준을 발휘할 때가 왔다.
  오늘의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 국민 모두가 자율적 능력을 발휘하기를 당부하는 바이다.

유신체제를 살리기 위한 동아일보의 노력은 10월 29일자 2면 사설(「국민적 저력 보인 평온 유지」)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지난 주말에 일어난 돌발사태 이후 국내외적으로 평온과 질서가 거의 완벽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은 크게 다행한 일이라고 할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우리 국민이 지닌 국민적 저력을 세계에 과시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지금까지 국민이 우려하던 혼란을 만족스럽게 막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각계각층이 합심하여 질서를 유지함으로써 오늘의 난국을 수습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
  각계각층의 국민들은 각자의 자기 분야에서 시국의 중대성을 잊지 않도록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질서가 확보되는 가운데서 야간통행금지 시간의 환원 등 가능한 범위 내의 정상화 조치가 조속히 이룩된 것으로 본다.
  현재 우리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하루빨리 사회를 안정시키도록 질서와 평온을 다지는 일인데 그렇게 하자면 국민은 계속 비상한 결의를 가지고 대처해야 할 것이다.
  박 대통령의 돌연한 서거로 인하여 빚어진 사태 때문에 국민이 받은 충격과 불안이 차차 진정 사태로 회복되어 가는 것을 우리는 마음 든든하게 생각하면서 당분간 계속 이러한 자세로 국민들이 임할 것을 당부하고자 한다.

11월 13일 박정희의 ‘국장(國葬)’이 치러졌다. 동아일보는 1면 머리에 「고 박정희 대통령 국장 엄수」라는 기사를 올리고 3면에 「박정희 대통령을 장송(葬送)함」이라는 사설을 내보냈다.

  (···) 우리는 국민과 더불어 충심으로 그의 명복일 빌면서 앞으로 다시는  런 비극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국민적 결의를 다짐하고자 한다. 이제 고인을 국장의 예로 보냄에 있어서 그의 지도자로서의 공과를 논하는 것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나 그가 우리 현대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적어도 그가 강인한 의지력과 무서운 추진력으로 일면 건설, 일면 국방을 밀고 나가 우리 한국의 국가적 기초를 마련하고 앞으로 우리 민족이 무한히 발전할 수 있는 터전과 자신감을 남겼다는 사실만은 그의 지지자건 반대자건 다 같이 동의하리라고 믿는다. (·····)
  (···) 지난달 26일 박 대통령이 돌연 서거한 이래 지금까지 9일 간의 국장 기간 동안 우리 국민 모두가 보여준 의젓한 태도는 마음 든든하고 자랑스럽다고 하겠다. 우려하던 혼란을 스스로 막고 질서와 안정을 유지해온 것은 얼마나 우리가 간절하게 이 나라가 잘 되기를 바라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며 또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저력을 지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지난 9일 동안 그만큼 국민적 긍지를 과시한 것도 자랑스러운 일이거니와 그동안 우리 우방이 보여준 신속한 조치도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아무리 우방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자신이 내부적으로 결속하고 단결하지 않았던들 우방의 지지가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를 생각할 때 우리가 현재 국제적으로 지고 있는 책임 역시 크다는 사실을 인식해야겠다. (···)
  이제 박 대통령을 떠나보내면서 우리는 동시에 한 시대의 끝남을 보고 있다. 이 중대한 역사적 순간을 당하여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차질 없이 새로운 한 시대를 맞도록 모든 지혜를 짜내는 일이다. 지난날의 좋은 점은 더욱 살리고 발전시키되 새로운 시대에 맞지 않는 것은 과감하게 이를 시정할 줄 아는 용단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고 새로운 시대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여기에 대처하지 못한다면 공연한 시행착오만을 초래할 것이다.
  오늘의 이 불행이 앞으로 우리 역사에 영원한 교훈이 되기를 바라면서 고 박정희 대통령의 명복을 충심으로 비는 동시에 그의 유족들에게 다시 한번 심심한 조의를 표하는 바이다.

이 사설은 박정희의 상습적 헌정 파괴와 쿠데타, 정치적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수시로 선포한 긴급조치와 비상사태, 그리고 집권 18년 동안 헤아릴 수도 없이 자행한 인권 탄압과 반민주·반민족적 행위들에 관해서는 한마디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려면 종신집권을 위해 민중을 탄압하고 민주주의의 숨통을 조인 그를 비판하는 말이 당연히 나와야 했다.

박정희는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비명횡사하던 날 저녁에도 질탕한 ‘주색 놀이’를 벌이고 있었다. 

  대통령이 술을 좋아하고 그 자리에 여자가 있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을 국가권력을 이용해서 지속적으로 해왔다면 그것이 과연 보호받아야 할 프라이버시인가. 더구나 박정희의 그런 술자리 여자는 중앙정보부의 의전과장이 연예계와 요정 마담들을 동원해 조달해온 것으로 밝혀졌다. 중앙정보부는 그가 항상 내세우는 국가안보를 담당하는 정보기관으로서 일반에게 베일에 가려진 기밀부서다. 그런 허울 좋은 비밀보호 명분으로 국민의 눈을 가린 채 대통령의 은밀한 술판을 무분별하게 벌인 것이다. (·····)
  유신정권 말기 박정희의 비밀요정 행사는 지나치게 잦았다. 대통령이 혼자서 하는 소행사나 측근 권력자 서너 명이 함께하는 대행사가 한 달이면 열 차례씩이나 열렸다. 그러니까 사흘에 한 번 꼴로 주연을 벌였다는 얘기다. 그때마다 외부에서 술시중 드는 여자들을 불러왔다. 대통령의 주연 담당이던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는 휴일도 없을 만큼 하루도 쉴 수 없었다. (·····)
  당시 중앙정보부에서 술자리 여인들에게 주는 화대(花代)는 지금 돈 가치로 쳐서 보통의 경우 1백만 원 정도였고 유명세를 계산해 더 보태는 경우 2백만 원이었다. 일반인들이 상상하기보다는 꽤 짠 편이었다. (···)
  물론 권력의 힘도 작용했겠지만 시중의 유명한 ‘마담’들이 거느리는 화류계 여인 중엔 대통령의 술자리에 가고 싶어 하는 자원자가 상당히 많았기  문이었다. 대표적으로 그런 자원자들을 골라 보내주는 마담이 장충동 모  정의 ‘김 마담’이었다. 특히 연예계에서 스타로 뜨기 전인 20대 초반의 나이 어린 신참들은 김 마담으로부터 은밀한 제의를 받으면 대부분 쾌히 승낙했다. 이들은 그 자리에 갔다 온 ‘경력’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며 그것으로써 연예계의 정상에 한 발 다가간 것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
  술자리 여자를 최종 심사했던 차지철 경호실장은 요정에 소속돼 있는 여자들은 데려오지 못하게 했다. 고위층과 함께하는 술자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연예계 지망생이 가장 무난한 대상이었다. 그 중엔 유수한 대학의 연예 관련 학과 재학생도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원칙은 같은 여자를 두 번 이상 들여보내지 않는 것이었다. 단골을 만들면 보안상이나 기타 부담스런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반강제 차출도 있었다. 박 대통령이 국산영화를 시사관람 하거나 텔레비전 연예프로 등을 보다가 마음에 든 배우나 가수의 이름을 대며 “한 번 보고 싶다”고 하면 큰 물의가 일어나지 않는 한 대개 불러왔다 (김재홍, <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 책보세, 2012, 66~71쪽).


김재규는 반역자인가 혁명가인가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본부장 육군소장 전두환)는 11월 6일 오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수사본부장 전 소장이 발표한 이수사 전모는 박 대통령 시해 사건 경위를 자세히 밝히고 주범인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54)가 지난 6월부터 개인적인 비위로 대통령의 친서 경고를 받은데다 부산·마산 소요 사태와 관련, 정책 무능 등으로 대통령의 질책을 받아왔으며 차지철 경호실장의 방자한 월권으로 수모를 당한 데 불만을 품어오다 최근의 요직 개편설과 관련, 인책 해임을 우려해 그의 부하들을 지휘하여 일으킨 국헌 문란 기도 사건”이라는 것이었다(동아일보 11월 6일자 1면).

박정희의 목숨을 빼앗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렸다. 박정희를 추종하던 세력과 보수언론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사살한 것을 ‘반역적인 시해(弑害) 사건’이라고 매도했다. 그러나 김재규는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혁명’을 위해 박정희를 쏘았다고 진술했고, 그의 변호인들, 그리고 학계와 종교계의 여러 인사들은 그가 단순한 ‘국가원수 살해범’이 아니라 민중의 거대한 항쟁에 몰려 유신체제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박정희 정권의 유혈 진압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사’를 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재규는 군법회의에서 아래와 같이 진술했다.

  전에는 유신체제를 가로막고 있는 핵심이 각하요,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전체가 각하입니다. 보십시오. 각하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대통령 권한 대행께서 바로 민주주의 하겠다고 국민에게 공표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결국 혁명이 없었으면 그런 말씀을 할 수 있었겠느냐, 따라서 그분도 혁명을 인정은 하면서도 시인을 안 한다 이것뿐이죠. 그분도 평소 국민의 생각을 알기 때문에 제일 먼저 내놓은 것이 자유민주주의 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 유신체제가 계속되는 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막대한 희생자가 난다, 이건 불을 보듯 뻔합니다. (···)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저는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이고, 동향이고, 동기생이고, 이런 관계이지만 그 순간에는 내가 마음을 야수의 마음으로 바꿔서 행동했습니다(같은 책, 137~138쪽).

김재규는 2심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 한 분을 희생시켰다는 것은 매우 가슴 아픈 일이고, 역사적으로 엄청난 일이 되기는 했습니다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모든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이 다 똑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는 걸 말씀드립니다.”

함세웅(신부)은 <김재규 평전-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의 「추천사」에서 김재규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추모했다.

  ‘박정희의 죽음’만이 한국사회의 희망이라는 확신을 가진 김재규 장군과 부하들의 의지는 재판과 죽음에 이르는 고통 속에서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 저희들이 느끼는 연민조차 이분들은 정중하게 거절하였을 것 같은 당당함이었습니다.
  이분들이 목숨까지 바치면서 추구했던 가치는 과연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 공동선(共同善)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성을 상실한 권력과 부패에 대한 항거였습니다. 권력자들의 오만함과 국민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 이성을 마비시킨 부도덕과 부정에 대한 단죄였습니다.
  친일 반민족, 군부독재 반통일분자들은 침략국 일본이 한국 근대화에 기여했고, 박정희 유신독재가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지금도 펼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강도 살인자가 내놓은 몇 푼의 돈을 자선이라고 예찬하는 것과 같은 모순입니다. 김재규 장군은 부마 항쟁의 원인이 개발독재를 통해 재벌 중심의 경제체제에 희생당한 서민들의 분노라고 법정에서 진술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 가장 심각한 양극화 문제는 개발독재 시기 노동자와 사회구성원 모두를 희생으로 삼아 재벌에게 인적·물적 지원과 토대를 만들어준 박정희 군부독재의 불의한 정책 때문입니다. (·····)
  4·19 민주혁명정부를 전복시킨 5·16 군사반란의 어설픈 과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쓰라리고 아픕니다. 유신의 핵을 제거했음에도 전두환 신군부가 집권하여 광주학살을 자행한 일을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아픕니다. 김재규 장군은 부마 항쟁 현장의 확인자입니다. 우리가 만일 김재규 장군을 살렸다면 광주의 비극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김재규 장군은 광주 항쟁  간인 1980년 5월 24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따라서 김재규 장군은 부마 항쟁의 동지이며 광주 항쟁의 희생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모두 김재규 장군에게 역사적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6~7쪽).

박정희의 비명횡사는 18년 동안 그의 밑에서 독재를 지탱하면서 ‘영화’를 누려온 보수세력에게는 청천벽력이었을 것이다. 1975년 3월 박정희 정권과 야합해서 ‘자유언론 실천운동’의 주역들을 폭력으로 몰아낸 동아일보사도 그의 죽음 이후 민주체제가 성립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극도로 긴장했음은 물론이다. 동아일보가 그런 위기감을 갖고 1980년 ‘서울의 봄’에 어떤 지면을 만들었는지는 이 총서의 다음 권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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