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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투위의 ‘10·24 민주·인권일지 사건’동아일보 대해부 3권 - 3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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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9.0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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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투위는 결성된 지 39년이 되는 2014년에도 정부를 상대로 부당해임에 대한 정신적 배상을 요구하면서, 동아일보사에 복직을 촉구하고 있다. 그 기나긴 세월 동아투위 사람들이 겪은 고난의 역사는 수십 권의 대하소설에도 모두 담을 수 없을 정도일 것이다.

1975년 3월 17일 동아일보사가 자유언론의 주역들을 폭력으로 추방한 뒤 한국의 언론은 완전히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언론사의 경영주와 기자들이 긴급조치 9호라는 재갈을 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물론이고 모든 신문과 방송이 유신독재체제의 비위에 거슬리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기사나 논설은 전혀 내보내지 않았다.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에 펴낸 ‘민주·인권일지’

그런 상황에서 동아투위는 1978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을 맞이했다. 동아일보사에서 강제 해직당한 사원들 가운데 동아투위에 끝까지 남은 사람은 113 명이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언론과는 관련이 없는 분야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지만 다수는 외국어 서적을 우리말로 번역하거나 시장에서 서투른 장사를 하거나 군소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동아투위 위원들은 ‘거리의 언론인’이 된 뒤 3년 반 남짓 동안 펜과 마이크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제도언론’이라고 부르던 기성 매체들을 ‘권력의 주구, 민중의 배신자, 민족의 반역자’(<동아투위 소식>, 1978년 1월 1일자)라고 비판하면서 분노를 삭이고 있었다.
  1978년 10월 7일에 열린 동아투위 상임위원회는 언론의 ‘비겁한 침묵’과 ‘진실 왜곡’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10·24 선언’ 4주년 기념일에 발행할 <동아투위 소식>에, 1977년 10월부터 1978년 10월까지 한 해 동안 제도언론이 보도하지 않은, 나라 안팎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종합해서 알리기로 결정한 것이다(<폭력의 자유, 250쪽)


서울 명동의 음식점 한일관에서 열린 10·24 4주년 기념식에서 배포된 <동아투위 소식>에는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사건 일지」라는 제목 아래 125건의 사례가 실려 있었다. 「진정한 민주·민족 언론의 좌표」’라는 글은 그 배경을 아래와 같이 밝혔다.

  “(···) 올해 들어 이른바 현 제도적 언론기관들에서 보도된 큰 사건만 하더라도 농협 고구마 수매 부정사건, 아파트 특혜 부정사건, 교사자격증 부정사건, 국회의원 성낙현 씨의 여고생 추행사건 등이 있다. 우리가 굳이 현재의 제도언론기관 앞에 ‘이른바’라는 용어를 쓴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제도언론들이 보도하지 않고 묵살해 버린 더 크고 많은 사건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
  ‘교수가 학생에게 술을 사 먹이는 현실, 학생들이 교수에게 돌멩이를 던지는 현실’을 개탄하고 자책하면서 교수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려고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양심적 선언을 했다고 감옥에 가는 세상,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태가 일어나도 우리의 제도언론에선 그런 일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이 컬러 화보에 ‘밝고 맑은 젊은 지성의 숨결’만 더욱 활짝 웃고 있다.(·····)
  언론의 이 같은 보도 자세는 그 자체가 범죄일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도 국민 모두를 멍들게 한다. 올해 들어 지금까지만 되돌아보아도 마땅히 언론이 하여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또 하지 않음으로써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의 정치적 문제, 경제적 문제, 사회적 문제를 몸으로 제기해야만 했고, 그럼으로써 또 그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박해와 고통을 받고 있는가. (·····)
  우리가 진정한 민주·민족 언론인으로서 언론자유와 사실 보도의 권리를 갖고 다시 현역에 복귀하기 위해서는 자유언론을 압살하는 모든 제도와 법이 당연히 철폐되어야 함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4주년을 맞아 분명히 천명하는 바이다.(<자유언론>, 291~292쪽)

‘10·24 선언’ 4주년 기념행사가 끝난 밤 10시쯤 경찰은 명동성당 앞에서 동아투위 총무 홍종민을 종로경찰서로 연행했다. 이틀 뒤인 26일에는 위원장 안종필과 위원 안성열·박종만이 강제로 끌려가서 「민주·인권 일지」를 작성한 경위를 조사 받았다. 30일에는 위원장 대리 장윤환, 위원 이규만·임채정·이기중·김종철·정연주 등 10명이 연행되었다.

11월 1일 안종필, 홍종민, 안성열, 장윤환, 박종만, 김종철이 구속되었다. 서울형사지법 비밀영장 담당인 판사 한정진은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를 인정하고 6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11월 20일에는 「민주·인권 일지」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비판하는 내용을 실은 <동아투위 소식>을 제작·배포한 혐의로 정연주가 구속되었다.


동아투위 위원 10명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

검찰의 공소장에는 ‘민주·인권 일지’의 내용이 거짓이라는 언급이 전혀 없었다. 7명의 피고인에 대한 기소 이유는 언론 행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위원장안종필과 총무 홍종민은 문공부에 등록하지 않고 <동아투위 소식>을 발간하면서 유신헌법을 비방하거나 그 헌법을 철폐하라고 주장한 혐의를 받았다. 박종만은 「진정한 민주·민족언론의 좌표」라는 성명서를 써서 <동아투위 소식>에 실음으로써 유신체제를 비방했다는 것이었다. 장윤환과 김종철은 10·24 선언 4주년 기념식장에서 “남이 읽는 성명서를 눈으로 따라 읽는 방법으로 유신체제를 비방했다”는 것이 공소 사실의 요지였다.

  동아투위는 7명의 위원들이 옥고를 치르면서 재판을 받는 동안 새 집행부를 구성해서 개신교와 천주교의 시국기도회 등을 통해 무죄석방 운동을 벌였다. 1978년 12월 27일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재야인사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동아투위 ‘송년모임’에서는 「자유언론은 영원한 실천과제」라는 성명서가 실린 <동아투위 소식>이 배포되었다.
  그 모임이 열린 지 열사흘 뒤인 1979년 1월 9일, 서울 중부경찰서는 동아투위 위원장 대리 윤활식, 총무 대리 이기중과 위원 성유보를 연행했다. 그들은 1월 15일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것이 ‘제2차 민주·인권일지 사건’이다.
  동아투위 위원 10명이 구속된 사건의 진상은 그 어떤 신문과 방송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 현대언론사상 단일사건으로 가장 많은 언론인이 구속되었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사건을 변호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22명의 변호사들이 무료 변론을 자청했다. 김제형, 이돈명, 홍남순, 김춘봉, 조준희, 홍성우, 황인철, 하경철 등이었다(같은 책, 252~253쪽).


유신독재를 강력히 비판한 동아투위 피고인들의 진술

‘민주·인권일지 사건’으로 먼저 구속된 안종필, 홍종민, 안성열, 장윤환, 박종만, 김종철, 정연주에 대한 1심 첫 공판은 1979년 1월 10일 오전 10시 서울형사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열렸다. 그날은 변호인단의 병합심리 요청으로 특별 기일을 정해 공판을 속행하기로 했을 뿐 피고인들에 대한 심문은 없었다.

2월 2일 열린 두 번째 공판에서 서울형사지법은 변호인단의 사건 병합심리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는 대신 4개의 사건을 모두 한 개의 재판부로 통합, 배당했다.

  (···)서울형사지법 합의12부(재판장 김형기)에 배당되었던 안종필 위원장, 홍종민 총무, 박종만·정연주 위원이 재판을 합의11부 한정진 수석부장판사에게 통합 배당한 것이다. 그래서 ‘민주·인권일지 사건’은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11부(재판장 한정진, 배석 이문재, 강종쾌)가 도맡아 심리하게 되었다.
  한정진 판사는 서울형사지방법원의 수석부장으로 있으면서, 다른 재판부가 심리하기를 꺼려하는 반체제 사건을 도맡아 처리하다시피 했다. 그는 또 ‘비밀영장’ 발부 담당이었으며, 유신독재에 저항한 반체제 사건의 판결문에 예외 없이 검찰의 공소장이나 논고 내용을 그대로 옮겨 쓰는 것으로 유명했다.
  사건이 병합되지 않고 재판부만 하나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사건 심리도 당연히 한 건, 한 건씩 진행되었다. 장윤환·김종철 위원, 안종필 위원장과 홍종민 총무, 안성열·박종만·정연주 위원 순으로 인정신문을 받고 또한 그 순서대로 관여 검찰관인 서울지검 공안부 정경식·금종구·금태수·김기현 검사가 차례대로 법정에 들어오고 나가는 묘한 장면이 벌어졌다(<자유언론>, 299쪽).

2월 10일에 열린 제3회 공판에서 동아투위 피고인 5명은 변호인들의 반대신문을 받고 박정희 정권이 「민주·인권 일지」를 빌미로 동아투위를 대대적으로 탄압한 데 대해 강력한 비판을 가했다.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 안성열 : 공소장에 있는 ‘비방’이라는 단어가 못마땅합니다. 차라리 유신헌법이 민주헌정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는 사실이라고 검찰도 인정하고 나서, 그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도 죄가 된다고 하여 처벌해야 된다고 하면 저도 달게 처벌받겠습니다. 저는 유신헌법을 ‘비방’한 것이 아니라 유신헌법이 민주헌정의 파괴자라고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 죄밖에 없습니다.
  유신헌법 하에선 대통령을 잡동사니 같은 ‘통대 의원들’이 선출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대통령 출마는 제도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단 한 사람만이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또 국회의원선거 역시 투표 분위기 못지않게 감표, 계표가 중요한 절차인데도 그걸 막연히 ‘덕망 있는 인사’가 맡도록 돼있습니다. (···) 지금은 유신체제를 반대하지 않는 정당만이 활동하게 돼 있습니다. 여·야라는 말은 이제 써서는 안 됩니다. 여·야가 사라진 지 이미 오래이기 때문입니다. 대화하는 국회, 일하는 국회, 능률적인 국회라고 하는데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일하는 국회입니까? 지금 야당은 없습니다. 다만 공화당의 (友黨)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신헌법이 만들어낸 정치상황인 것입니다.

· 박종만 : 우리 동아투위는 1977년 말에 ‘민주·민족언론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지금 우리 민족에게 통일 이상 더 화급한 문제는 없습니다. 그런데 불행이도 그토록 중요한 통일문제가 국민 전체의 문제로 다루어지지 않고 집권자의 손에 농락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통일문제가 집권자의 정권 연장 수단으로 악용되기까지 합니다. 유신헌법이 통일을 지향하는 헌법이라고 했지만, 유신헌법은 통일의 주체가 되는 민중을 억압하기만 합니다. 제도언론은 통일문제를 아예 거론하지 않고 외면하고 있습니다. 민주·민족언론이란, 집권자를 위한 언론이기를 거부하고, 민중을 위한, 민중과 함께하는 언론을 뜻합니다. 지금의 제도언론에선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이 모두 묵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역은 아니지만 언론인이라는 자부심과 사명감을 갖고 적어도 기록으로나마 남겨두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일지」를 제작, 보도한 것입니다. ‘언론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다 잡혀가더라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 정연주 : 성명 내용은 모두 사실입니다. 있는 사실, 있는 진실, 바로 그것입니다. 검찰이 그것을 사실 왜곡이라 하니, 검찰의 주장, 그 거짓말, 그 억지가 바로 사실 왜곡입니다. 나무를 나무라 하고, 흰 것을 희다 한 것을 사실 왜곡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정신병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것을 사실 왜곡이라 하겠습니까? 사실 왜곡의 판단기준이 무엇입니까? (···) 검찰이나 정권 담당자들은 그들의 정권 연장에 방해되는 말은 모조리 사실 왜곡이라고 몰아세웁니다. 기사에 대한 전문가는 검찰이 아니라 바로 신문기자입니다. (·····)
  제도언론이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하여 언론의 정도를 지켰으면, 우리들은 오늘 이 법정에 서 있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금 이 법정에서 있다는 것 자체가 한국 언론이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검찰이 사실 왜곡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진실이며, 이 진실을 사실 왜곡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검찰의 언행이 바로 진짜 사실 왜곡인 것입니다. 우리는 없는 사실이 아니고, 엄연히 있는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했다는 이유로 잡혀 들어와 있습니다. 이것은 1970년대의 후반에 벌어지는 코미디입니다.

· 장윤환 : 1974년 10월 당시 문공부는 언론기관의 ‘협조’라는 미명 아래 3개 항목에 대해서는 보도를 금지시켰습니다. 긴급조치 1호와 4호가 선포된 상황에서 서울대 농대생 데모가 있었습니다. 동아일보는 당시 이를 보도했습니다. 이 보도와 관련, 당시의 편집국장 송건호 선생을 정보부가 연행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기자들이 편집국에서 농성을 벌였습니다. 이 농성 중에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 기초되고 발표된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가 존립하려면 자유언론이 사회의 기본적 기능이 되어야 합니다. 언론자유는 당국이 허용하거나 누가 갖다 주는 것이 아니고 언론인 스스로가 쟁취해야 될 과제입니다. 당시 대학생, 종교인들의 신문에 대한 불신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신문사 밖에서 “부패기자 각성하라”고 학생들이 외쳤습니다. 우리들은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각성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게 된 것입니다. (·····)
  완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까지 제도언론이 감히 보도하지 못했던 학생 데모, 구속자 가족들의 기도회 등 중앙정보부가 금지한 사항을 보도했습니다. 편집국 기자도 권력에 동화된 일부 간부를 제외하고는 전부 자유언론의 실천에 앞장섰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광고 탄압을 받았고, 격려광고가 쇄도했으며, 결국 동아일보사의 배신으로 75년 3월 17일 새벽 폭도들에게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 김종철 : 저는 동아일보가 민족언론을 자처하면서 일제치하에서 갖은 오욕을 저지르고, 그 후 부끄러운 과거를 왜곡, 날조하는 것을 알고 동아의 허상을 깨달았습니다. (···) 그렇게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자는 것이 우리의 ‘민주·민족언론선언’이었습니다. 자유언론은 우선 민족공동체가 잘 살자는 것, 인간답게 살자는 것입니다. 고문과 폭력과 공포로부터 해방되어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 우리의 주장입니다. 허구의, 안일한, 강요된 총화를 깨뜨리고 진정한 국민적 화합을 이룩하자는 것이 저희의 소망입니다. (·····)
  동아일보사는 광고 탄압이 시작되자 은밀히 정부와 내통하고 있었습니다. 광고 탄압을 받았지만 그동안 격려광고로 들어온 돈이 1억5천만 원이나 되었습니다. 이것은 동아일보사가 공식 확인한 것입니다. (···)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하라고 준 돈입니까? 리어커꾼부터  학생, 가정부, 대학교수들까지 동아일보사가 권력에 대항해서, 민중의 편에 서서 자유언론을 실천하라고 성원한 것이 아닙니까? 이것은 재판부도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동아일보사는 (···) 술 취한 폭도들을 동원해서 산소용접기로 철문을 끊어내고 각목을 휘두르게 하면서 우리를 거리로 내몰았습니다. (···) 동아일보사는 이렇게 권력과 야합해서 역사와 민중을 배반하고 독재권력에 아부, 굴종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선언했습니다. 우리가 동아일보를 마지막으로 제작했던 1975년 3월 10일자로 동아일보의 지령(紙齡)은 끝났다고. 그리고 동아일보의 정통성은 우리에게 있다고 선언했습니다(같은 책, 301~306쪽).

1979년 5월 9일 열린 제1차 ‘민주·인권일지 사건’ 1심 마지막 공판에서 재판부는 검찰의 공소사실을 그대로 인정해서 다음과 같이 선고했다(괄호 안은 구형량).

  안종필 : 징역, 자격정지 각 2년(징역, 자격정지 각 5년), 홍종민 : 징역, 자격정지 각 2년(징역, 자격정지 각 3년), 장윤환 : 징역, 자격정지 각 1년 6월(징역, 자격정지 각 2년 6월), 안성열 : 징역, 자격정지 각 2년(징역, 자격정지 각 3년), 박종만 : 징역, 자격정지 각 2년 6월(징역, 자격정지 각 3년), 김종철 : 징역, 자격정지 각 2년 6월(징역, 자격정지 각 3년 6월), 정연주 : 징역, 자격정지 각 2년 6월(징역, 자격정지 각 3년).

1979년 8월 8일 열린 항소심 마지막 공판에서 재판부는 아래와 같이 선고했다.

  안종필 : 기각, 장윤환 : 징역, 자격정지 각 1년, 안성열 : 징역, 자격정지 각 1년 6월, 박종만 : 징역, 자격정지 각 1년 6월, 김종철 : 징역, 자격정지 각 1년 6월, 홍종민 : 징역, 자격정지 각 1년, 정연주 : 징역, 자격정지 각 1년 6월

제1차 ‘민주·인권일지 사건’의 상고심은 1979년 12월 10일 자정을 기해 대통령긴급조치 9호가 해제됨으로써 더 이상 소송을 진행할 수 없게 되었다. 대법원은 이 사건을 기소한 법적 근거가 사라졌기 때문에 기소되어 재판을 받은 동아투위 위원들 전원에 대해 12월 27일 면소(免訴) 판결을 내렸다.


‘제2차 민주·인권일지 사건’ 공판

제2차 ‘민주·인권일지 사건’으로 구속된 동아투위 위원장 대리 윤활식, 총무 대리 이기중, 위원 성유보에 대한 첫 공판은 1979년 6월 4일 서울형사지방법원에서 열렸다. 담당 재판부인 서울형사지법 합의14부(재판장 이재화, 배석 제차룡, 민형기)가 구속 5개월이 넘도록 재판을 미루다가 그날 첫 공판을 연 것이었다.

7월 9일의 구형공판에서 피고인들이 한 ‘최후 진술’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 윤활식 : 언론자유는 언론인 스스로가 쟁취해야 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언론인은 스스로 지식인임을 자처하고 있다. 지식인은 언행이 일치해야 한다. 실천이 따르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언론자유는 언행일치가 그 생명이다. 우리가 짊어진 사회적인 막중한 책임과 사명을 절감할 때 입으로만 부르짖는 정의는 무력한 것이다.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는 참 언론인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참 언론인의 자세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켜야 한다. 언론자유는 아무도 언론인을 대신해서 찾아주지 않는다. 용기를 내서 국민의 기본권인 언론의 자유를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언론인의 신뢰를 되찾기 위해 오늘날의 언론인은 너나 할 것 없이 각성해야 한다. 이것이 민주회복이요 자유언론 보전의 길이다.

  · 이기중 : 오늘의 슬픈 현실이 가슴 아프다. 이 땅, 이 나라에는 지금 긴급조치라는 이름 아래 수백, 수천 명이 신음하고 있다. 여기 검찰관이 있지만 눈이 있어도 눈앞의 사실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동아투위가 기업 내부의 문제라느니,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라느니 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무엇 때문에 투옥됐는가? 긴급조치는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긴급조치인가? 투옥된 학생과 시민들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개인의 희생을 무릅쓰며 긴급조치 철폐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긴급조치는 마치 애국심을 독점하기 위해서 만든 것 같다. (·····)
  언론은 크게 두 가지 갈래가 있다고 본다. 국가의 종속기관으로 기능해서 통치수단이 되는 경우와 정치권력과 대응해서 기능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전자는 공산주의 국가의 언론이고 후자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언론이다. 전자의 언론은 통치수단의 한 기관으로 전락한 것이기 때문에 민중을 외면하고 상의는 하달되나 하의는 상달되지 않는다. 모든 법과 제도는 민중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법과 제도는 민중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에 위배되는 법과 제도는 악법이다. 유신헌법과 긴급조치도 마찬가지다. 오늘날 제도언론은 온갖 비난을 받고 있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자기를 방어할 능력까지 상실한 현실이 참으로 슬프다. 사법부에 대한 온갖 이야기가 있지만 아직 희망을 걸고 있다. 재판부는 용기있는 판결을 통해서 그나마 희망의 싹이 움트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기 바란다.

  · 성유보 : 검사는 우리들을 삼국지의 마속에 비유했다. 그렇다면 검찰이나 이 정권이 제갈량이란 뜻인가. 읍참마속 이야기는 전쟁터에서 군령을 어긴 사건이다. 지금 우리가 총칼을 휘두르며 전쟁을 하고 있는가. 자유언론 문제는 전쟁의 문제가 아니다. 정권이라는 것, 정치라는 것은 민주사회에서는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고, 정권을 꿈꿀 수도 있는 것이다. (···)
  언론이란 것은 막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 외교, 국방 전 부문에 보장되어야 한다. 이것을 정치적 차원에서만 보려는 것은 독단이다. 우리가 당면문제를 해결하려면 자유와 인권이 제한되어야 하고 민중은 참아야 된다고 검사는 말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이 바로 정치발언이고 정권적 차원에서의 발언인 것이다. 이것이 법률을 다루는 검사의 입장에서 말한 것인가. 나는 법 이전에 사실과 진실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현 통치질서의 비리, 민주주의와 자유언론의 갈등은 왜 생기나? 자유를 방종으로 오해하지 말라. 자유를 대폭 제한해야 한다는 것은 사회가 대폭 혼란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자유라는 개념 속에는 이미 책임과 존엄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언론자유에는 사실 왜곡, 거짓말을 할 자유는 절대로 없다. 자유언론이 없는 곳에서 사실 왜곡과 불신이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
  언론자유는 그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지 않는다. 국민 스스로가 쟁취해야 한다. 민족분단의 극복, 민족의 존엄회복, 민족의 번영을 위해서는 민주회복, 자유언론회복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역사적 소명인 것이다(같은 책, 362~366쪽).

제2차 ‘민주·인권일지 사건’의 선고공판은 1979년 11월 8일 열렸다. 재판부는 윤활식에게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과 집행유예, 이기중에게 징역 1년과 자격정지 1년에 집행유예, 성유보에게 징역 1년과 자격정지 1년을 선고했다. 세 사람은 12월 10일 자정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된 뒤 12월 27일 대법원에서 면소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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