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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데모’와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동아일보 대해부 3권 - 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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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7.13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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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월 서울 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되고 군대가 대학으로 진주하는 사건이 벌어진 뒤 학생운동 주도자들이 제적당하거나 강제 입영됨으로써 대학가에서는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는 집회와 시위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1973년 8월의 김대중 납치 사건을 계기로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본격적인 반유신체제 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0월 유신’ 이후 최초의 학생 데모 터지다

서울대 문리대의 학생운동권 핵심 인물들은 1973년 2학기가 시작되자 곧바로 반유신독재 시위를 벌여야 하는 지를 두고 은밀히 논의를 했다. 군대를 다녀온 일부 복학생이나 4학년 학생들은 남아 있는 투쟁 역량을 보호하기 위해 더 기다리며 준비하자고 주장한 데 비해 다수의 학생들은 ‘선도적 투쟁’을 즉각 시작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선도적 투쟁론’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1973년 10월 2일 오전 11시 서울대 문리대의 각 강의실에는 “도서관에 불이 났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시위 주동자들은 강의실 밖으로 몰려 나온 학생들을 4·19 기념탑 앞으로 인도하여 준비한 비상총회를 열고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들은 “오늘 우리는 전 국민대중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이 참혹한 현실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어 스스로의 양심의 명령에 따라 무언의 저항을 넘어서 분연히 일어섰다”고 밝혔다. 이들은 선언문에서 박정희 정권의 정보·파쇼통치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을 철저히 말살하고 입법부의 시녀화와 사법부의 계열화를 가져왔으며, 학원과 언론에 탄압을 가해 영구집권을 기도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 경제적으로는 자립경제와 국민복지를 외면한 정권이 소수 독점자본에 영합하여 대일 경제예속을 가속화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너무도 참담한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며 (···) 의연하게 악과 불의에 항거하여 이 땅에 정의, 자유 그리고 진리를 기어코 실현하려는 역사적인 민주투쟁의 첫 봉화에 불을 붙인다”고 선언하고, 다음과 같은 4개 조항의 결의사항을 낭독하였다.
  1)정보·파쇼통치를 즉각 중단하고,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자유민주체제를 확립하라.
  2)대일 예속화를 즉각 중지하고, 민족자립경제체제를 확립하여 국민의 생존권을 보장하라.
  3)정보·파쇼통치의 원흉인 중앙정보부를 즉각 해체하고, 만인 공노할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을 즉각 밝혀라.
  4)기성 정치인과 언론인은 각성하라.

비상총회에 모여든 학생은 5백여 명으로 늘어났다 학생들은 어깨동무를 하고 교내를 돌며 구호를 외치다가 교문 밖으로 나가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출동한 경찰이 교문을 막자 학생들은 연좌 농성을 시작했다. 12시 30분경 경찰이 교내로 쳐들어 와서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붙잡아 연행했다. 그날 연행된 학생은 180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20명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되고 9명은 불구속 기소되었다. 57명은 구류처분을 받았고, 94명은 ‘훈방’되었다.
10월 4일에는 서울대 법대, 5일에는 상대 학생들이 유신반대 시위를 벌였다. 2일부터 5일까지 서울대에서 벌어진 세 차례의 시위에서 215명이 연행되어 95명이 구속, 불구속 입건 또는 구류처분을 받았다. 10월 30일까지 서울대 학생으로 구속된 사람은 30명으로 늘어났다.
“박정희 정권은 저항의 확산을 두려워하여 시위 관련 보도를 엄금하였다. 10월 2일 시위에 관한 기사는 어느 신문에도 실리지 못하였다. 10월 8일 이후에야 시위학생들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전할 수 있을 뿐이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2>, 106쪽).

10월 8일자 동아일보 7면에 1단으로 실린 ‘10·2 데모’ 관련 기사(「 서울대 학생 21명 구속 / 문리·법·상대 시위」)는 아래와 같다.

  경찰은 최근 서울대학교 문리대·법대 학생들의 시위와 상대생의 연좌데모 등에 관련, 210여 명의 학생을 연행, 그 중 21명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6일 서울대학교 측은 경찰에서 구속 또는 불구속 입건된 학생 30명은 제적 처분하고 즉심에 회부, 구류 처분을 받은 학생들은 무기정학 처분을 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일 서울대 문리대생 2백50여 명은 오전 11시20분경 교내 4·19탑 앞에서 비상학생총회를 열고 “자유민주체제를 확립하라”는 등의 선언문을 낭독한 뒤 스크럼을 짜고 교정에서 2시간 동안 데모를 벌이다가 교정으로 들어온 경찰에 의해 해산되고 그 중 1백80여 명이 연행되었다.
경찰은 문리대에서 연행된 학생 중 20 명은 구속하고 9명은 불구속 입건했다.
법대생 2백여 명은 4일 오전 11시경 교내 ‘정의의 종’ 앞에 모여 거리로 나와 문리대 앞까지 나갔다가 경찰 제제로 귀가, 11시 45분경 자진 해산했는데 경찰은 학생회 기획부장 최동준 군 등 31명을 연행, 최 군은 구속하고 4명은 즉심에 회부했으며 나머지 94 명은 훈방되었다.
상대생 3백여 명은 5일 오전 10시 10분경 교정에 모여 15일까지 시한부 동맹휴학을 결의, 연좌데모를 벌이다 학교 측의 제지로 해산됐으며 김병곤 군 등 3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서울상대는 5일 오후 긴급교수회의를 열고 수업을 계속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6일에는 학장 이름으로 학부모들에게 학생들이 등교해주도록 가정통신문을 보냈다.

이 기사가 1단으로나마 나가게 된 배경에는 동아일보사 젊은 기자들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최초의 ‘유신 반대 학생시위’에 관한 보도를 철저히 막았다. 10월 3일자 신문에 ‘문교부 소식’이라는 제목으로 “각 대학의 학생처장 회의를 소집해서 최근 학생들의 동태에 관해 논의했다”는 짤막한 기사가 나간 것이 전부였다.
  서울대를 출입하던 동아일보사 기자가 써낸 ‘서울 문리대 10·2 데모’에 관한 기사는 휴지통으로 들어가버렸다. 법대와 상대의 시위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동아일보는 10월 4일과 5일 이틀에 걸쳐 서울대 시위를 7면(사회면) 한 구석에 1단으로 실으려고 시도했지만 인쇄 과정에서 송두리째 깎여버렸다. 동아일보사에 상주하던 ‘기관원’의 압력에 경영진이 굴복한 것이었다. 동아일보사의 공채 10·11·12·13기 출신 젊은 기자 50여 명은 ‘마땅히 보도해야 할 기사를 누락시킨 데 항의’하는 뜻으로 10월 7일 편집국에서 밤샘 농성을 시작했다. 유신체제가 들어선 이래 처음으로 신문사에서 언론 탄압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기자들은 편집국 한 가운데 있는 사회부 책상을 에워싸고 자리를 잡았다. (···)
  ‘이 살벌한 유신독재 아래서 박정희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저 용기는 도대체 어디서 솟아난 것일까?’
(···) 그 자리에 모인 모든 기자들이 그런 표정이었다. (···)
서울대 학생들의 시위에 관한 기사는 10월 8일에야 처음으로 신문 지면에 나타났다. 그런데 그것은 데모 발생에 관한 보도가 아니라 ‘서울대생 21명 구속’이라는 제목이 붙은 정부의 발표문을 앞세운 것이었다. (···)
10월 11일자 동아일보 1판 사회면에 1단으로 실려 있던 「경찰 교내 투입」이라는 기사는 2판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중앙정보부의 압력 때문임이 분명했다. 그날 이후 기사 누락이 되풀이되는 것과 함께 동아일보사 젊은 기자들의 밤샘농성도 거듭되었다(<폭력의 자유>, 180~181쪽).


동아일보 기자들의 언론자유 수호운동

동아일보 10월 8일자 7면에 서울대 문리대의 ‘10·2 데모’ 기사가 1단으로 나감으로써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학생운동권의 움직임이 처음으로 언론에 보도되었으나 이튿날인 9일자 동아일보 7면에는 「최근 서울대생 시위는 반정부적인 집단행동 / 불의의 불행 안 당하도록」이라는 제목으로 문교부장관 민관식이 총학장들에게 보낸 공한 내용이 4단으로 크게 실렸다. 그 바로 밑에는 「서울상대생 2명도 구속」이라는 기사가 1단으로 나와 있다.

  동아일보는 10월 11일에도 1판에 ‘경찰 교내 투입’이라는 제목의 1단 기사를 게재했다가 2판부터 빼버렸다. 이날 이후 기사 누락-철야-기사 누락-철야의 악순환이 여러 차례 거듭됐다. 젊은 기자들은 같은 해 11월 5일에 도 경북대생들의 시위 사건과 함석헌 선생, 김재준 목사, 천관우 선생, 지학순 주교 등이 참여한 ‘민주수호국민협의회’의 시국선언문 발표 사건이 보도되지 않은 데 항의하는 철야농성을 벌였다. 이날 밤 기자들은 다음과 같은 2개 항을 결의했다.
  1)보도해야 할 중요한 기사가 누락되었을 때 그 누락 경위를 알아보고 그날 밤으로 편집국에 모여 가능한 모든 대책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2)선후배 동료가 기사와 관련, 부당하게 연행되었을 때, 이 사실을 즉시 보도하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편집국에서 기다리기로 한다.(<자유언론>, 79쪽).

동아일보사 기자들은 그 결의에 따라 11월 7일, 17일, 20일에도 편집국에서 밤샘을 하면서 학생들의 시위를 비롯한 중요한 사건들에 관한 기사가 삭제되거나 누락된 경위를 듣고 대책을 논의했다. 그러나 동아일보 편집책임자들이 기관원의 감시와 압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중요한 기사들을 계속 누락시키거나 축소하자 젊은 기자들은 11월 20일 밤 편집국에서 ‘언론자유 수호 제2선언문’을 채택했다.

  민주주의는 이 나라가 추구해야 할 이상이며 언론의 자유가 바로 민주주의의 대 전제임을 확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의 자유가 언론인 스스로의 무능과 무기력으로 인해 수호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오늘의 현실은 국민의 알 권리와 알릴 의무가 침해당하고 있다. 신문, 방송, 출판물이 국가권력의 간섭에 의해서 사실상 사전 검열을 당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요한 사실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음으로써 국민의 참다운 여론은 방향을 잃고 있으며 국민들 사이엔 근거 없는 소문이 나돌아 국민의 결속을 저해하고 있다.
  심지어 국내의 움직임을 외국의 출판물을 통해서 알기가 일쑤다. 언론은 국민들로부터 불신당하고 언론인들은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못해 긍지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다. 우리는 오늘날 한국의 언론이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음을 통감하고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정부는 언론에 대한 부당한 간섭을 하지 말라.
  2)모든 언론인은 용기와 신념으로 외부의 압력을 배제하고 언론의 본분을 지키자.
  3)우리는 언론의 자유가 확보될 때까지 모든 힘을 바친다(같은 책, 79~80쪽).

10월 말부터 학생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0월 30일 오후 경북대 학생들이 “언론은 중립을 지켜야 하며 정의의 필봉을 들어야 한다”고 외치며 교내 시위를 시도한 데 이어 11월 5일 오전에는 10개조로 나뉜 학생들이 강의실로 뛰어 들어가 ‘경북대학교 반독재구국위투쟁위원회’ 명의로 된 「반독재민주구국선언문」을 뿌렸다. 그러자 강의실을 뛰쳐나온 학생 2백여 명이 “박정희 물러가라”고 쓴 현수막을 앞세우고 유신헌법 철폐, 민주헌법 제정, 언론자유 보장, 민중생존권 보장,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 규명 등의 구호를 외쳤다(<한국민주화운동사 2>, 108쪽).

경북대 학생들은 박정희가 종신집권을 포기하고 권좌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그것도 그의 ‘정치적 아성’인 경북 대구에서.
그들의 요구대로 유신헌법을 철폐한 뒤 민주헌법을 제정하려면 박정희가 비상국무회의에서 개헌을 하고 대통령 선거를 다시 하도록 하는 길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아일보사 젊은 기자들의 움직임은 대학가에 출입하는 기자들의 입을 통해 널리 전해졌다. 11월 초부터 격화된 학생들의 시위에는 침묵하던 동아일보사 기자들의 언론자유 되찾기 운동이 큰 영향을 끼쳤음이 분명하다.
동아일보사 기자들이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에 맞서 철야 농성을 하는 데 자극을 받은 경향신문사의 견습 출신 기자들은 10월 19일 모임을 열고 외부 압력 배제, 사실보도 충실, 인사 쇄신, 급료 인상 등을 회사에 요구했다. 23일에는 경향신문사 전체 기자들의 모임인 ‘소공회’가 집회를 열고 이렇게 결의했다.

  1)국민이 알아야 하고 국민에게 알려야 할 모든 것이 기사화되도록 최대한 노력하며 여론을 오도할 우려가 있는 기사는 적극 배제할 것을 촉구한다.
  2)만부득이 기사화되지 못한 사항은 보도 관제를 요청한 기관과 경위를 명기하여 역사적인 기록물로 공식 보관한다.

한국일보 기자들도 입사한 지 몇 년 안 되는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11월 7, 19, 20일 등 여러 차례에 걸쳐 회사 안에서 철야를 하거나 모임을 갖고, 시위 기사 등 중요한 기사들이 누락된 데 대해 항의했다. 그리고 22일엔 “우리가 목격하고 취재한, 보도되어야 할 사실이 명백하게 부당한 외부 작용에 의해 침해되었을 경우 이의 시정을 위해 적절한 행동에 나선다”는 것 등 3개 항의 「언론자유 확립 결의문」을 채택했다.

  또한 11월 12일엔 기독교방송국(CBS), 11월 17일엔 조선일보사, 11월 28일엔 문화방송, 11월 30일엔 중앙일보, 12월 3일엔 신아일보사 기자들이 각각 언론자유 수호를 위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특히 중앙일보 기자들은 11월 30일 오전, 중앙매스컴 부·차장 31명이 언론의 정도를 지키지 못한 것을 반성하는 의미에서 사표를 제출한 가운데, “언론과 언론인에 대한 어떤 외부 압력도 거부하며 언론자유를 침해하는 어떤 압제에도 뭉쳐 싸운다는 것” 등을 결의하고 이를 관철한다는 의미에서 이날 하루 동안 제작에 불참했다(<자유언론>, 80~81쪽).

언론자유를 되찾으려는 젊은 기자들의 운동이 불길처럼 번져갔지만 신문 지면과 방송의 전파에 반영되는 기사에는 변화가 없었다. 정부가 학생들을 제적하거나 징계한 데 관한 기사들이 조그맣게 보도될 뿐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11월 중순 신문 발행인들과 편집국장들을 간담회 형식으로 여러 차례 불러 모아 ‘자제’를 요청했다. “국내외의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을 인식하고 유신체제나 안보에 해가 되는 기사는 싣지 않겠다”는 ‘자율 지침’을 유도하기 위한 공작이었다. 국무총리 김종필은 12월 3일 언론사 발행인들과 간담회를 갖고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 안보에 관한 중대 문제, 국민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기사에 대해서는 자제를 해달라고 압력을 가했다.
동아일보사 이사회는 “기자들의 이러한 움직임을 이해할 수는 있으나 사내 철야는 금지한다”고 기자들에게 통보했다. 회사 경영진이 언론자유를 회복하는 일에 동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동아일보사 기자들은 12월 3일 편집국에서 총회를 열고 「언론자유 수호 제3선언문」을 채택했다.

  우리는 언론의 자유가 한국 민주주의의 대전제임을 재확인한다. 우리는 그동안 외부의 억압과 우리 스스로의 무기력으로 시들어 가는 이 땅의 언론자유를 회생시키기 위해 몸부림쳐 왔다. 지난 1971년 4월 15일 우리가 천명한 언론자유 수호 제1선언과 11월 20일의 제2선언, 그리고 최근 수차에 걸쳐 벌여온 철야 농성 등은 이 같은 몸부림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최근 당국과 일부 발행인들이 한국신문협회를 통해 자율의 미명 아래 안보문제와 데모 사태 등을 보도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언론의 목을 조르려는 책동이 자행되고 있음을 우리는 통탄한다. 이제 한국 언론은 사활의 기로에 와 있다. 이제 우리는 언론에 대한 부당한 간섭을 배격하고 언론의 자유가 확보될 때까지 모든 힘을 바친다는 지난 번 선언을 재확인하고 이 땅에 언론자유를 소생시키기 위해 끝까지 투쟁할 것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우리는 당국이 자유를 빙자한 발행인 서명 공작을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한다.
  2)우리는 이 같은 탄압에 맞서 언론 본연의 임무를 지키려는 양심 있는 언론인의 의연한 자세에 경의를 표하며 함께 투쟁한다.
  3)우리는 이 시점까지 서명을 거부해 온 본사 발행인이 당국의 강압에 못 이겨 끝내 서명하게 되는 불행한 사태가 올 경우 신문 제작과 방송 뉴스의 보도를 거부한다.(같은 책, 82쪽).

1973년 11월부터 학생들의 ‘유신 반대투쟁’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5일 경북대생들의 격렬한 시위에 이어 서울대 사대, 공대와 상대, 문리대에서 동맹휴학이 결의되었다. “박정희 물러가라” “김대중 납치 사건 진상을 밝혀라” “구속학생 석방하라” “언론자유 보장하라” 등 다양한 구호가 등장했다. 11월 12일에는 이화여대 학생 4천여 명이 대강당에 모여 민주체제 확립, 언론·집회의 자유 보장을 요구했다. 일찍이 볼 수 없던 대규모 집회였다.
12월이 되자 유신체제 반대 시위는 고등학교로 번졌다. 5일 광주일고, 8일 서울 신일고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박 정권은 유화책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 12월 7일, 박정희는 10월 2일 이후 구속된 학생들을 석방하고 처벌을 백지화하라고 문교부장관 민관식에게 지시했다.
학생들의 유신 반대투쟁에 침묵을 지키고 있던 동아일보는 12월 8일자 2면 사설(「학원의 정상화」)을 통해 학생들을 불온하게 보지 말고 그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라고 촉구했다.

  (···) 첫째 우리가 바라고 싶은 것은 학원은 어디까지나 교육의 장으로서 학생들은 교육의 대상이며 처벌을 해야 할 경우도 형사적 처벌보다 교육적 처벌이 바람직스럽다는 점이다. 학원을 문교부 아닌 다른 기관이 사찰하고 처벌에 있어서도 교육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가 오해받을 만한 일견 지나친 인상을 주는 ‘사형’이나 다름없는 퇴학을 대량 단행하는 그러한 학생대책은 지양되어야겠다.
  대학생은 그 나이로 보나 사회의식, 민족의식에 눈 뜰 때며 사회현실에 민감하고 정의감에 불탈 나이다. 따라서 이들을 불온시만 하지 말고 그들의 주장이 무엇인가 일단 귀를 기울이는 아량과 여유를 보여주었으면 한다.
  둘째는 학원문제는 학원에 맡겨야 한다는 점이다. 당국자가 학원 사찰을 않겠다고 이미 말한 바 있으나 학교에 일이 생겼을 때에는 학교당국에 수습을 맡겨야 한다. 총학장이나 교수들의 권위를 우선 존중해야 하고 문제를 수습할 수 있는 자유재량권을 교수들에게 부여해야 한다.
  오늘과 같이 교수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여건 속에서 학원의 정상화는 바라기 힘들다.
  셋째는 학생들의 사회의식을 행동적 차원 아닌 학문적 생활 속에서 승화시킬 수 있도록 그들의 학원 내 생활에 폭 넓은 자유가 부여되었으면 한다. 학문적 차원에서의 현실 참여엔 교수들의 지도가 크게 기대된다. 학생 처벌의 백지화 지시를 계기로 학원 정상화의 참된 길이 무엇인가에 좀 더 진지한 연구가 있어야겠다.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본부 발족

대학생들이 불을 댕긴 유신체제 반대운동은 젊은 언론인들의 ‘사내 투쟁’에 힘입어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거기에 자극을 받은 재야인사들이 11월 5일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하고 나섰다. 김재준, 함석헌, 천관우, 지학순, 홍남순, 계훈제 등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에 속한 재야운동 지도자들은 그날 서울 YMCA에서 발표한 ‘시국선언’을 통해 “독재정치와 공포정치로 국민의 양심과 일상생활은 더없이 위축되고, 우방 각국의 신뢰와 친선관계는 극도로 실추되어 대한민국은 내외로 최악의 상태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박정희 정권을 비판했다. 그들은 “이 중대한 현실을 직시하여 무엇보다도 민주적 제 질서를 시급히 회복하되 결코 어떤 미봉으로 될 일이 아니요, 민주체제를 근간에서 재건설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3년 12월 24일 유신독재체제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민수협의 시국간담회에 참석했던 재야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던 것이다(‘유신헌법’에는 개헌운동 자체가 금지되어 있어서 ‘청원’이라는 방식을 택했던 것 같다). 운동본부에는 장준하, 함석헌, 법정, 김재준, 이희승, 김수환, 김관석, 안병무, 천관우, 지학순, 문동환, 계훈제, 백기완 등 30 명이 참여했다.
동아일보는 12월 24일자 1면에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 재야인사 30명 민주주의 회복 위해」이라는 기사를 4단으로 실었다. 당시의 억압적 상황에서 다른 신문들은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이었다.

  함석헌·장준하·천관우·김동길·계훈제·백기완 씨 등은 24일 오전 10시 서울 YMCA 2층 회의실에서 유진오·백낙준·김수환·이인·김홍일·이희승 씨 등 각계 인사들을 포함, 30명이 서명하여 현행 헌법 개정청원운동본부를 결성키로 했다고 밝히고 이날부터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현행 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백만인의 청원운동을 전개키로 결의했다고 장준하 씨가 발표했다.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는 오늘의 사태는 “경제의 파탄, 민심 혼란, 남북 긴장의 재현이란 상황 속에서 학원과 교회, 언론계와 가두에서 일고 있는 자유화의 요구”로 요약된다고 말하고 “그러나 현행 헌법은 그 개정의 발의권이 사실상 대통령에게만 속해 있는 것”이라고 지적, 대통령에게 현행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백만인청원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장준하 씨는 “이 운동은 현행 청원법에 의한 청원은 아니며 10여 일 전부터 학원, 종교계 등에서 음성적으로 벌였던 서명운동을 지금부터 양성화하게 된 것”이라고 밝히고 “현재까지 약 5천 명의 서명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운동방식은 특이했다. 개헌청원서명운동본부의 최초 서명자 30명이 각자 ‘본부’ 역할을 맡아서 대학생 연령층 이상 국민들의 서명을 접수하기로 했던 것이다.
국무총리 김종필은 12월 26일 방송연설을 통해 개헌청원서명운동을 ‘다스리겠다’고 경고했다. 동아일보 1면 머리를 차지한 기사는 다음과 같다.

  국민의 총단결을 호소 / 김 총리 어제 방송연설 / ‘소요·선동 다스리겠다’ / 개헌서명 등 삼가 주길 / 국민에 과도한 괴로움 준 것 자성

  김종필 국무총리는 26일 밤 “유신체제에 대한 본질적인 차원에서의 도전은 우리나라의 국가적 안전이 허락할 수 있는 자유의 한계선을 벗어난 행위”라고 전제, “세상을 시끄럽게 하거나 선동하거나 어지럽히는 행위는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했다. 김 총리는 이날 밤 9시부터 한 시간 40분 동안 전국 공·민영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을 통한 특별방송에서 이 같이 밝히고 “어떤 사람들은 헌법을 고치자고 하나 지금이 그런 시기며 그런 이유가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반문한 다음 “지금 헌법을 고쳐야 되느니 가두에서 무슨 서명운동을 하겠느니 민주를 회복하느니 하는 구호 아래서 자유의 선을 넘어 행해지는 일체의 행위는 삼가줄 것을 부탁한다”고 호소했다.
  김 총리는 “우리나라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불안이 조성되거나 불안 상태가 야기되었을 때는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원하는 그러한 상태가 된다”고 지적, “정치적 사회적 안정은 여하한 경우에도 유지되어야 하므로 안정기조 위에서 경제성장이 계속 이룩될 수 있도록 국민들은 정부를 믿고 협조해 달라”고 호소했다.
  김 총리는 “서울에서 불과 30마일 북방에 우리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혁명 분위기의 조성으로 간주, 이를 조장하려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특수한 여건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 “유신체제나 유신의 이상은 이러한 위협에 대비, 군사적인 방위 태세와 정치·사회적 안정 태세를 확고히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정희는 12월 29일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즉각 중지하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동아일보 그 날짜 1면 머리기사에 나온 담화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나는 최근 일부 지각없는 인사들 중에 현 유신체제를 뒤집어엎고 사회 혼란을 조성하려는 불순한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정부는 지난 12월 26일 국무총리로 하여금 현 시국의 중대성과 백척간두에 서 있는 조국의 현실에 비추어 우리의 생존과 독립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유신체제의 불가피성을 누누이 설명하고 절대로 경거망동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점을 온 국민에게 간곡히 호소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일부 불순분자들은 아직도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가지가지 교묘한 수단과 방법으로 선동과 유언비어를 유도하면서 동조세력을 규합하는 데 여념이 없는가 하면 3,4월 위기 운운하며 민심을 불안케 하고 혼란을 더욱 조장할뿐더러 각계 인사를 찾아다니면서 소위 개헌청원서명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언필칭 민주니 자유니 하고 국민을 선동하고 다니는 그들의 저의가 과연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나는 이들의 황당무계한 행동이 자칫 국가안위에까지 누를 미칠까 염려하여 그들에게 한 번 더 냉철한 반성과 자제를 촉구하는 동시에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현 유신체제를 부정하고 뒤집어엎으려는 일체의 불온한 언동과 소위 개헌청원서명운동을 즉각 중지할 것을 경고하는 바이다.


12월 28일 정부는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낸 정책질문서에 대한 답변서면을 통해 언론·종교·학원사태, 남북관계·경제·안보·외교 등 당면한 주요 시책에 관한 방침과 내용을 밝혔다. 경제·비경제 등 두 부문으로 구분, 국정 전반을 망라하고 있는 이 시책문답서에서 정부는 언론의 자율적인 규제 기준으로 1)10월 유신에 대한 부정이나 도전 2)국가안보 및 외교상의 중대한 위협을 초래하는 사항 3)사회불안을 조성하거나 경제안정 기반을 와해하는 것 등 3개 항을 제시, 이 한계는 지켜져야 할 것이라고 밝히고 이 기준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국가보안적 차원에서 규제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또 종교를 빙자하여 사회질서를 파괴하거나 국가안보를 해치는 활동을 할 때는 관계법령에 따라 제재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동아일보 12월 28일자 1면).

문공부가 공화당 의원총회에 통보하는 형식을 빌려 크게 보도된 ‘정부 주요 시책’은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에 관한 언론의 보도를 철저히 막고, 서명운동을 주도하는 재야인사들이 기독교가 운영하는 건물에서 집회를 하는 것을 봉쇄하려는 의도에서 나왔음이 분명하다. 중앙정보부 ‘요원’이 상주하는 언론사 편집국이나 보도국에서 이런 ‘시책’을 어기는 보도와 논평을 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긴급조치 1·2·3호’ 선포와 재야인사 구속

국무총리 김종필이 개헌청원 서명운동을 ‘다스리겠다’고 엄포를 놓고 문공부가 극단적 ‘언론 규제 시책’을 발표했는데도 그 운동에 호응하는 국민의 수는 놀라운 속도로 불어났다.

  (···) 먼저 신민당이 합류하였다. 개헌청원 서명운동이 폭발적인 지지를 얻자 제1야당으로서 이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신민당은 개헌 추진을 결정하였다. 민주통일당도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에 적극 참여하기로 하였다. 이어 개헌을 주장하는 시국선언이 시작되었다. 12월 31일 윤보선, 유진오, 김수환 등 15명의 인사들이 대통령에게 민주체제 회복 조치 등을 건의하였다. 이어 1974년 1월 7일 오전 공화당 초대 총재와 당의장을 지낸 정구영이 탈당 성명을 발표하였고, 전 사무총장 예춘호도 탈당계를 제출하였다. 정구영은 동아라디오방송(DBS)과의 대담에서 유신체제를 ‘3권귀일(三權歸一)체제’라 평가하고, 공화당을 본연의 자세로 되돌린다는 것은 헛된 생각일 뿐이며, 자신도 재야인사들과 함께할 시기를 기다린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문학인들도 개헌청원 서명운동에 참여하였다. 1월 7일, 이희승, 이헌구, 김광섭, 안수길, 이호철, 백낙청 등 문인 61명은 성명을 발표하여,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포함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하고, 헌법개정청원은 국민의 당연한 권리이며 이 권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의 결의를 밝혔다(같은 책, 121~122쪽).


박정희는 1974년 1월 1일 발표한 ‘신년사’에서 “‘10월 유신은 결코 한 정권이나 특권계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안정과 번영, 그리고 평화통일을 바라는 민족적 염원을 성취하기 위한 민족사적 소명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따라서 지금은 주저하고 회의할 때가 아니라 헌신적으로 참여하고 용기 있게 실천할 때’라고 강조했다.”(동아일보 1월 1일자 1면)
박정희가 그렇게 강한 어조로 개헌청원서명운동을 중지하라고 위협했는데도 그 운동의 기세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자 마침내 그는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선포했다. 동아일보 1월 9일자 1면 머리에 보도된 긴급조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8일 오후 5시를 기해 시행케 된 이 긴급조치는 이날 오후 3시 박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심의 의결되어 선포된 것인데 제1호는 1)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고 2)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발의·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며 3)유언비어를 날조·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고 밝히고 있다. 동 조치 제1호는 이어 4항 앞의 1,2,3 항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선동·선전하거나 방송·보도·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을 금하고 5)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되 이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고 6)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하며 7)이 조치는 1월 8일 17시부터 시행한다고 밝히고 있다. (·····)
  긴급조치 2호는 대통령 긴급조치에 위반한 자를 심판하기 위해 비상군법 회의를 설치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 명칭은 비상고등군법회의와 비상보통군법회의로서 각각 전국을 관할구역으로 하여 국방부 본부에 두기로 했으며 이 비상군법회의는 대통령긴급조치를 위반한 자가 범한 일체의 범죄를 관할 심판한다고 밝히고 있다.

박정희가 발표한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조차 무시하는 초헌법적 비상수단이었다. 헌법의 개정을 청원하는 행위조차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대통령 자신이 정해서 국무회의의 형식적 결의를 거쳤기 때문이다. 게다가 헌법의 개정, 폐지를 발의, 제안하는 행위를 불법화하고 그런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등의 방법으로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까지 사법처리 대상으로 삼았다. 유신체제와 유신헌법은 불가침의 ‘성역’이라는 뜻이었다.
박정희는 1월 14일 긴급조치 3호를 선포했다. 1974년 12월까지 갑근세와 주민세를 대폭 감면하고 복지연금을 1년 동안 보류하며, 2월부터 버스통행세를 면제하고 텔레비전과 사치성 물품에는 중과세를 하는 한편 추곡수매가를 인상하고 재산세 면세점도 올린다는 내용이었다. 이 긴급조치에는 ‘국민생활 안정을 위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었다. 긴급조치 3호는 반유신체제운동을 탄압하는 긴급조치 1호와 달리 박 정권이 ‘민생’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발동시킨 ‘선심성 조치’라는 인상을 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긴급조치 1호에 관해서는 아무런 비판도 하지 못했던 동아일보는 긴급조치 3호가 선포되자 1월 15일자 2면에 「국민생활의 안정」이라는 통단사설을 실었다. 주요 대목은 아래와 같다.

  (···)  9개 조치와 7개 지시로 되어 있는 긴급조치 3호는 담고 있는 내용이나 넓이나 변화의 폭으로 보아 일대 결단임에 틀림없다.
  담화에서도 문제의 제기로 옳게 설명했듯이 경기후퇴와 인플레의 동시 진행이란 스태그플레이션의 심화와 자원 경쟁이란 국제경제의 파동으로 모든 나라가 다 같이 겪는 시련이지만 특히 우리나라가 그 충격과 시련이 더욱 심각할 것을 예상하고 있는 것은 부득이 일대 결단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부 안이한 성장 타성 주장을 뒤엎고 상황의 위기성에 대처하여 고도의 융통성과 적응력을 보여준 점은 높이 평가해야겠다.
  고도성장의 관성이 붙어 있는 정부로서 특히 작년에 유례 없는 17%의 성장을 기록한 정부가 긴급조치 3호로써 서민생활 안정에 정책의 초점을 모으고 내실을 다지기 위한 1년 시한부 조정을 시도한 것은 용단이라 부를 수 있다. (···)
  74년의 경제적 시련을 국가적 민족적 역량의 시련으로 규정하고 이의 극복은 모두가 시련의 쓴맛을 고루 나눌 수 있는 국민적 합의와 새 시대를 여는 창조력에 있음을 강조한 우리로서는 우선 무엇보다도 국민적 합의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조치가 평가될 수 있다고 믿는다. (·····)
  기업은 긴급조치로 단속이 늘어나고 경영여건의 악화, 임금인상 압력의 가중 등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기업인에겐 이때야말로 기업은 망해도 기업인은 산다는 오랜 악덕을 벗어나고 낭비를 제거함으로써 불신을 씻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국민 역시 부담의 완화가 결코 실질소득의 증대가 아니라 인플레와의 경쟁을 보조하는 데 그치는 것임을 명심하고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긴급조치 1호로 가장 먼저 군사재판을 받게 된 재야인사는 장준하와 백기완이었다. 동아일보 1974년 1월 16일자 1면에는 그 사실이 5단 기사로 보도되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비상보통군법회의 검찰부가 발표한 내용이었다.

  비상보통군법회의는 15일 오후 통일당 최고위원이며 전 국회의원인 장준하(56) 씨와 백범사상연구소 소장 백기완(42) 씨에 대해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 1,4 항등 위반 혐의로 구속영장을 발부받고 즉각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 위반 혐의로 구속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 1항은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고, 4항은 “긴급조치가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을 금한다”고 되어 있다.

동아일보 2월 2일자 1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왔다.

  비상보통군법회의 제1심판부(재판장 박희동 중장)는 2월 1일 오후 3시 국방부 군법회의 법정에서 열린 장준하(56), 백기완(42) 두 피고인에 대한 대통령긴급조치 제1호 위반 사건 선고공판에서 구형대로 각각 징역 15년에 자격정지 1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날 판결문을 통해 “격변하는 국제정세 하에서 북한의 남침 야욕을 저지하고 조국의 존립을 수호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국민의 총화로써 정치·경제 및 사회적 안정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데도 피고인들은 긴급조치가 선포된 이후에 있어서도 헌법 개정을 빙자,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적 불안을 조성함으로써 국가의 안전보장과 공공의 안녕질서에 중대한 위협을 준 사실은 추호도 용서할 수 없으며 국민의 이름으로 마땅히 응징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판결이유를 밝혔다.

이 기사에는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이나 변호인들의 변론 내용이 전혀 들어 있지 않다. 그런 사실들을 보도하는 것조차 긴급조치 1호 위반이 되기 때문이다.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되자 기독교계를 필두로 항거가 시작되었다. 1974년 1월 17일 이해학 전도사, 김진홍 전도사, 이규상 전도사, 박윤수 전도사, 김경락 목사 등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실에서 구국선언기도회를 개최하여 긴급조치 1호 철회, 개헌 논의 허용, 유신체제 폐지와 민주질서 회복 등을 주장하는 내용의 선언문을 낭독하고, 기독교회관 내 사무실에서 서명운동을 벌이다 즉시 출동한 경찰에 구속되었다. 이들 선언식 참석자들과 인명진 목사는 1974년 2월 7일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0~15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의 구국선언기도회 사건이 극심한 언론통제로 제대로 보도되지 않자, 권호경 목사, 김동완 전도사, 이미경(에큐메니컬 현대선교협의체 사무간사), 박주환(한신대 3), 박상희(한신대 3), 김용상, 차옥숭(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사무간사), 김매자(이화여대 3) 등이 「개헌청원운동 성직자 구속사건 경위서」를 작성하여 전국 교회에 우송하였다. 이들은 곧 구속되어 3~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같은 책, 121~122쪽).

박정희는 1월 18일 연두기자회견을 열고 남북한이 불가침협정을 체결하자고 제의했다. 그는 “이 불가침협정에는 1)남북한이 절대로 무력침략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만천하에 약속하고 2)내정 간섭을 절대로 하지 말며 3)여하한 경우에도 휴전협정의 효력은 존속되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정희는 또 “국민들이 적극 협조해서 긴급조치가 필요 없게 되면 빠른 시일 안에 해제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해마다 봄철이 되면 학생들이 술렁술렁 하는 풍조가 생긴 것은 불행한 일”이라면서 “앞으로 학원의 자유를 빙자해서 학원 내에서의 비판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탈선행위는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했다(동아일보 1월 18일자 1면).
‘국민들이 적극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긴급조치는 1979년 10월 26일 밤 박정희가 비명횡사하기까지 한국사회를 실질적인 감옥으로 만들었다.

  박정희가 연두기자회견에서 학생들을 향해 “앞으로 학원의 자유를 빙자해서 학원 내에서의 비판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탈선행위는 용납하지 않겠다” 고 위협한 뒤에도 긴급조치에 대한 학생들의 저항이 일어났다. “1월 21일 서울대 의대 3학년 이근후, 김영선, 김구상 등 3명이 유신헌법 반대시위에 참여하였다가 구속되어, 3월 30일 비상군법회의에서 징역 5~7년을 선고받았다. 이어 1월 24일 연세대 학생 고영하, 황규천, 이상철, 문병수, 김석경, 김향, 서준규 등이 학교 강당에서 유신헌법 철폐를 요구하는 성토대회를 열었다가 구속되어 3월 2일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3~7년을 선고받았다(같은 책, 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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