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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련 철폐투쟁과 서울대생들의 ‘언론 화형식’동아일보 대해부 3권 - 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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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6.02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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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은 박정희 정권이 사회 전체를 ‘병영화(兵營化)’하려고 갖은 힘을 쏟은 시기였다. 문교부가 1970년 12월 27일에 발표한 ‘대학교련교육의 시행요강’은 먼저 대학을 병영화 하겠다는 ‘신호’였다. 대학생들이 4년 동안 받는 수업 시간의 약 20%인 711시간을 교련에 할애하며, 군사교육을 맡을 현역 군인들을 대학에 배치한다는 것이었다. 문교부는 1970년 12월 21일 현재 학생 4백명당 1명인 교련교관을 250명당 1명으로 증원하기로 결정하고 1차로 전군에서 장교 540명을 선발했다.


동아일보, ‘군사교육은 찬성, 교육시간은 과중’

문교부의 ‘시행요강’에 따르면 사회 진출을 준비해야 하는 대학 4학년생들도 170시간이 넘는 교련을 받아야 했다. 동아일보는 1971년 1월 29일자 3면 사설(「학구[學究]에 지장 없는 교련을」)에서 교련 ‘시행요강’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대학생에게 군사교육을 시키는 것이 옳으냐 그르냐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를 수도 있을 것이며 또 그 당위성도 나름대로 갖추고 있을 것이니 만큼 각자 생각하기에 달려 있다 하겠으나 우리로서는 군사교육이 불가피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자 한다.
  원칙을 말한다면 그것이 교련이란 명칭이 붙었을망정 군사교육과 훈련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니 만큼 그러한 군사교육이나 훈련은 병영에서 실시하는 것이 옳은 일이며 바람직한 일이기는 하나 우리가 처해 있는 시국을 직시할 때 군사교육은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미 전쟁 준비를 끝냈다고 호언하고 있는 북괴의 위협이 우리 앞에 엄존하고 있는 이때에 나라의 엘리트를 자처하는 대학생들로서 이에 대처하는 준비나 태세를 갖추는 일은 그 자체가 긴요한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일정한 교련교육은 그것이 올바로 실시되고 실효를 거둘 때 학생들의 정신력을 함양하고 신체를 건전히 하는 별도의 효과도 동시에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일부에서는 대학에서의 교련교육 자체가 학문의 순수성을 잃을 우려가 있다는 반응도 나오고 있는 터에 자칫 잘못할 경우 과중한 교련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전념해야 할 학구생활에 지장을 줄 우려도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할 줄 안다. 앞서도 지적했듯 국가안보와 국제정세 등으로 보아 대학에서 교련교육은 당연한 일이기는 하나 대학은 어디까지나 학문의 전당이며 장차의 국가 동량들을 길러내는 곳이라는 점을 십분 명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다음 그럴 리도 그럴 수도 없는 일이겠지만 만에 일이라도 교련교육이 실시됨으로써 존중돼야 할 학원 분위기가 위축을 가져온다거나 침해를 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점이다. 이에는 벌써 관계 당국에서 충분한 조치를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듣고 있으나 교련교육은 어디까지나 교련교육에 그치고 어떠한 학원 문제에도 초연해 줄 것을 거듭 부탁해 마지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또 하나 특히 직접 교련교육에 임할 각급 교관들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에 각별한 유의가 있을 것을 촉구하고자 한다. 다름 아닌 피교육자는 일반인이나 일반사병이 아닌 대학생인 만큼 그들을 자극하거나 반감을 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사실이다. (·····)
  (···) 요는 다른 일도 매한가지지만 대학의 교련교육도 대학 당국은 말할 것도 없고 무엇보다도 당사자들인 대학생들의 타의 없는 호응을 얻음으로써 비로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관계 당국은 깊이 명심하여 제도를 만드는 것보다 만들어진 제도를 운영하는 데 보다 묘를 기하도록 힘을 기울여 줄 것을 당부해 마지않는다.

동아일보는 ‘북괴의 전쟁 준비’와 국제정세의 변화를 이유로 대학에서 군사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는데, 그것은 제7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학원을 병영화함으로써 학생들의 반독재운동을 미리 차단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공작을 지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동아일보의 사설과 달리 조선일보 1월 30일자 사설(「대학 교련교육의 문제점」)은 박 정권의 교련교육 방침을 단호하게 비판했다.

  문교 당국이 성안(成案) 발표한 ‘대학교련교육의 시행요강’은 지금 사회 각계에 커다란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대학 4년 수업시간의 약 20%인 711시간을 군사교육에 배정하고 이것을 다시 일반교육 315시간, 집체교육 396시간으로 나누어 이수시킬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 동 ‘요강’은 대학교육의 본질과 당면한 국방상의 요청과의 상충 속에서 각양(各樣)한 여론에 부닥치고 있는 것이다. 우선 북괴의 전쟁 준비와 도발행위가 가중되고 있는 현황에서 동 ‘요강’을 구상, 성안한 당국자들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우리는 이것이 내포한 몇 가지 중요한 문제점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총 수업시간의 약 20%를 군사교육에 배정하고 매주 3시간을 학생들이 강의 내지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대학의 목적에 비추어 과중한 부담이라는 것을 지적하게 된다. 이 비상시국에 그만한 정도의 군사교육은 별문제가 아니라는 상식론도 나올 수 있겠으나 6·25 동란 중과 그 직후에도 대학생들에게 병역 연기의 특전을 주었던 것은 대학교육이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나라가 인식했던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대소를 막론하고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 위정자들에 보편화되어 있는 기준이다. 오늘의 격동하는 국제정세에서 국가안보의 난관에 직면하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다. 그리고 유독 우리나라라 해서 대학생의 군사교육이 대학 본래의 목적을 과중하게 억압해도 무방하다는 근시안적 사고가 통용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들리는 말로는 이러한 군사교육을 위하여 대학에 현역 군인이 배치되고, 학생들의 교육과 교관들의 집무를 위한 막사까지 설치할 것을 당국자들이 생각하고 있다고도 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러한 조처는 학원의 분위기를 크게 위축시킬뿐더러, 심지어는 학원 병영화의 길을 트게 되리라는 것은 결코 기우에다만 돌릴 수 없는 중대한 사태라고 할 것이다. 과문의 탓인지 몰라도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대학에 그런 일은 없었다. 필요에 따라 대학에 군인이 배치된 경우에는 반드시 예비역 군인이 배치되어야 하고 학원 내에 막사를 마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들리는 말로는 큰 대학들의 경우는 배치될 현역 군인의 수가 20명을 넘을 것이라고 하니, 이렇게 된다면 이들과 대학 교직원들과의 마찰도 마찰이려니와 학원의 군사화·편제화라는 인상을 자아내리라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 북괴의 호전성이 노정되면 될수록 민주국가는 민주주의적 방법으로 이에 대처하는 것이 떳떳하고 이것은 사상전에서도 이미 그들을 제압하는 소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맹점 많은 전기 ‘요강’보다는 차라리 종래의 학훈단(ROTC)이 합리적인즉, 이것을 부활, 강화시키는 것이 옳으리라고 생각한다.


교련 반대 시위 보도에 소극적인 동아일보

1971년 새 학기가 시작되자 여러 대학에서는 문교부가 1970년 12월 17일 발표한 교련 강화 방침에 대한 비판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1971년 4월에는 대통령선거, 5월에는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될 예정이어서 박정희정권이 학생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학원 병영화를 강행하는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3월 23일에는 전국의 12개 대학 학생회 대표자들이 ‘전국 대학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서 학생들은 “자유와 진리를 본질로 하는 대학이 그 본질을 침해당했을 때, 민족의 장래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라고 역설한 뒤, 박정희 정권이 대학에 군사교육을 강요하는 목적은 학원을 병영화하여 “무사상·무비판·획일적·맹종형 인간을 양성하려는 데 두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군사교육 폐지 요구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군사교육 전면 철폐’를 위한 ‘최후의 투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1968년 이후부터 교련 강화책을 치밀하게 추진해온 박정희 정권이 학생들의 군사교육 철폐에 대한 최후통첩을 진지하게 고려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결국 1971년 4월부터 대학가는 교련 철폐를 놓고 박정희 정권과 학생들이 격렬한 대립투쟁을 벌이는 싸움터로 바뀌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1>, 554쪽).

4월 2일 연세대생 5백여 명이 “교련 강화 반대”를 외치며 신촌로터리까지 시위를 벌인 데 이어 6일에는 서울대 상대, 고려대, 성균관대 학생들이 가두 진출을 시도했다. 교련 철폐 투쟁이 본격화한 것이었다.

이성과 자유의지를 지닌 젊은이라면 독재정권이 학원을 병영화 하려는 기도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학생들의 시위는 양식 있는 대중의 지지를 받기에 충분한 것으로서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져야 했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4월 2일자 7면(사회면)에 연세대 학생들의 교련 반대 시위를 2단으로 보도했다.

  교련 강화 반대 데모 / 연대생 5백명 한때 교문 나서

  2일 낮 12시 반경 연세대학교 학생 5백여 명은 교내 대강당 앞에 모여 교련강화반대 성토대회를 갖고 “전 연세인은 당국이 교련강화 시책을 변경하지 않는 한 교련 수강을 거부하겠다”는 결의문과 전국 언론인과 대학생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한 뒤 교문을 나서려 했으나 경찰의 제지를 받아 다시 교내로 돌아가 1시간가량 시위를 벌이다가 이날 오후 1시 40분경 다시 교문을 나와 1백 미터가량 전진하며 시위를 벌이며 기동경찰 1백여 명과 대치하다 2시 5분경 교내로 돌아가 자진 해산했다.
  이날 성토대회에서 학생들은 “대학은 자유와 진리 정의를 구체화시키는 전당임에도 불구하고 당국은 대학의 본질을 그르치고 있다”고 주장, 이를 즉각 시정할 것과 “우리나라 언론은 호화롭고 자랑스런 역사의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병들어 치료조차 할 수 없게 됐다”고 지적, “국민의 소리를 외면 말라”고 요구했다.

동아일보는 잇단 교련 반대 시위를 아주 작게 보도했다. 「1천여 고대생 데모 / 교련 등 두 차례 가두 나서」(4월 6일자 7면 2단), 「서울상대생·성대생도」(같은 날자 같은 면 2단)처럼 짤막한 기사로 내보냈던 것이다.

4월 8일자 동아일보 7면에는 「대학생들 사흘째 데모 / 교련 등 성토 / 서울·고려·연대 등 / 교련복도 태워, 서울문리대」라는 3단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렸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다른 일간지들에 비하면 상당히 상세한 내용이었으나 독자들의 눈에는 단숨에 들어오지 않게 되어 있었다. 7면 머리에는 「조류 보호 우리 손으로 / 학계 인사들, 보호위 설치 추진」이라는 기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언론계에서는 “학생들이 박 정권에 맞서 치열하게 벌이는 투쟁보다 조류 보호가 훨씬 더 큰 가치를 갖는 뉴스인가”라는 자조의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4월 13일자에 교련 반대 데모에 관한 기사를 처음으로 7면 머리에 올렸는데, 그것은 “데모를 계속하면 휴강 조치를 하겠다‘는 문교부와 대학 당국의 발표 내용이었다.

동아일보는 대학가에서 교련반대투쟁이 시작된 지 열흘이 넘은 4월 14일자 3면에 처음으로 관련 사설(「대화할 여유가 아쉽다」)을 내보냈다.

  서울대 문리대·법대 두 학교 당국은 ‘학원의 안녕질서를 되찾을 때까지’라는 조건을 붙여 13일부터 임시휴강에 들어갔다. 그간 교련의 강화를 반대하는 대학 일부가 데모를 벌여 가두로 진출하는 등 학원이 소란해지자 이를 수습할 길 없다 하여 두 대학 당국이 우선 휴강이라는 비상조처를 취한 것이다. 학교는 공부를 해야 하는 곳이며 따라서 휴강이라는 조처는 학원의 질서가 중대한 위협에 놓여 있다고 생각될 때 마지막으로 쓰는 조처로서 휴강을 선언했다는 것은 이미 당국이 이성 있는 사태 수습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
  대학생들의 군사훈련을 어느 정도 강화시켜야 할 것이냐는 각자 의견이 다를 수 있고 더욱이 여야 선거의 쟁점으로도 되고 있어 성급히 그 ‘정도(程度)’를 말하기는 어려우나 그럴수록 이 문제는 관계 당국과 대학생들 사이에 이성으로써 원만한 상호 이해가 이루어져야 하며 또 이루어지도록 노력이 여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데 그간 당국과 학생 간의 태도를 보면 우리의 이러한 기대에 너무나 어긋나는 일들이 많았다. 학생들이 교련에 찬반 태도를 표시하는 것은 그것이 자기들의 문제인 만큼 있을 수 있고 또 바람직한 행동은 아니라 해도 가두데모를 시도하는 것도 동기가 어디에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 학생들의 구호에 교련문제 아닌 구호가 있었다고 들림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없게 한다. 지금은 여야 간에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선거철이다.
  만약 학생들이 교련문제가 아닌 다른 구호를 내걸면 학생들의 행동은 단순한 교련반대에 그치지 않는 모종의 선거운동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사게 되며 사태를 도리어 악화시킬 위험성이 없지 않다. 이것은 학생을 위해서도 문제를 바람직하게 해결하는 길이 못되며 검토해야 할 태도다. 학생은 먼저 학생 신분임을 잊지 말아야 하고 우선 학생에 관련된 문제의 해결부터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
  학생들에게 교련을 과하는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을 반공의 간성으로 만드는 데 있다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먼저 필요한 것이 그들에게 이러한 취지를 이해시키는 일이며 이해가 따르지 않은 강제는 효과를 크게 감소시킬 것이다. 이러한 국가적 중대 문제가 단순한 교내 문제로 책임 전가될 수는 없고 총학장이 일방적으로 책임지고 문교부는 방관만 할 문제는 더욱 아니다. (·····)
  학생들도 사태의 원만한 수습을 위해 당국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계속 마련하는 여유를 가져주기 바란다. 당국이 고압적 태도를 버리고 학생이 좀 더 인내성을 보여준다면 사태 수습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고 우리는 확신하는 것이다.

이 사설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다고 보는 데 바탕을 두고 있다 교련반대투쟁을 벌이는 학생들과 문교 당국이 대화를 통해 사태를 수습할 수 있다고 보는 ‘환상’이 바로 그것이다. 학원을 병영화하겠다는 것은 문교부장관이나 관료들의 ‘결단’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박정희 자신의 대통령 3선을 위한 정치적 공작의 일환인 동시에 학생운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려는 책략의 소산이었다. 그런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학생들이 문교부나 대학 당국을 상대로 대화를 해서 교련을 철폐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는 전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동아일보는 ‘대화할 여유가 아쉽다’고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다.

게다가 이 사설은 “학생들이 교련문제가 아닌 다른 구호를 내걸면 학생들의 행동은 단순한 교련반대에 그치지 않는 모종의 선거운동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사게” 된다고 걱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구호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는다. 당시 한창이던 대통령선거전에서 박정희에 불리하고 김대중에 유리한 구호라는 뜻일까? 설령 학생들이 박정희의 독재를 규탄한다 하더라도, 4월 혁명 때 이승만 독재에 맞서 싸운 학생들의 태도와 다른 점이 무엇이 있을까?

학생들의 교련 반대 시위는 4월 13일부터 20일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대학생들의 격렬한 교련반대투쟁에 직면한 정부는 강압적인 시위 진압, 대학 휴강 등의 강경 대응조치를 취했다. 재야 민주인사들은 학생들에게 인체에 해로운 화학무기를 발사하고 심지어는 대항하지도 않는 시민들까지 경찰이 잔혹하게 구타한 것은 치안 유지의 차원을 넘어선 일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정부 당국은 학생들의 반대시위가 일부 학생들만의 시위라고 주장했다. 정래혁 국방부장관은 “대학 교련의 철폐를 주장하는 학생은 전체 학생의 10%”에 불과하기 때문에 시위 학생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언급하며, 각 대학의 교련 반대를 소수 학생들의 반발로 평가절하했다. (·····)
  휴강 조치와 함께 정부는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공안사건을 터뜨렸다. 4월 20일 국군보안사령관 김재규는 고려대와 서울대에 재학 중인 재일교포 학생 4명을 포함하여 41명이 연루된 이른바 ‘재일교포유학생간첩단사건’을 발표했다. 보안사령부는 4개의 사건을 동일 발표했다. (···) 보안사는 재일교포 재학생들이 각기 고려대와 서울대 등에서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고자 암약하다가” 검거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북한이 이들에게 “학생운동투쟁 기세를 계속 고조시키고 휴교반대투쟁을 강력히 전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다.
  이 간첩단 사건은 민주화운동의 침체를 위해 만들어진 전형적인 공안사건 중 하나였다. 피의자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가하고, 교련철폐투쟁과 대선 열기가 고조된 4월 20일이란 시점에 사건 전모를 발표한 것은, 박정희 정권이 공안정국을 조성하여, 대학생들의 학원병영화반대투쟁에 찬물을 끼얹고, 공명선거 쟁취와 같은 민주수호운동을 위축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군 정보 당국이 발표한 51명의 간첩단 사건 관련자 중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람은 17명,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5명에 불과했다(같은 책, 557~558쪽).

4월 21일부터 전국 대학의 학생들은 교련철폐시위를 중단하고 수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국립대학에 대한 휴강 조치와 문교부의 사립대학 휴강 압력이 학교 폐쇄로 이어질 것을 고려했던 것이다. 학생들은 대통령선거와 총선거 시기에 공명선거 쟁취에 역점을 두기로 했으나 이미 박 정권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부정선거를 자행하고 있었다.


서울대생들, 동아일보사 앞에서 ‘언론 화형식’

대학생들의 교련철폐투쟁이 시작되기 전인 1971년 3월 24일, 서울대 법대 학생총회는 교내에서 ‘언론 화형식’을 갖고 언론의 타락과 무기력을 통렬히 규탄했다. 3월 26일에는 50여 명의 서울대 학생들이 동아일보사 앞에서 “민중의 소리 외면한 죄 무엇으로 갚을 텐가”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언론인에게 보내는 경고장」과 「언론 화형 선언문」을 읽은 뒤 언론 화형식을 가졌다. 「언론인에게 보내는 경고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오라, 사이비 언론인들이여 나오라. 이 민주의 광장으로 나와 국민과 선배에게 속죄하라. 선배 투사의 한 서린 해골 위에 눌러앉아 대중을 우민화 하고 오도하여 얻은 그 허울 좋은 대가로 안일과 축재를 일삼는 자들이여!
  안타깝다. 그 자리 그 건물이건만 민주투사는 간 곳 없고 잡귀들만 들끓는가. 이것이 일컬어 제7적이런가. 정치문제는 폭력이 무서워 못 쓰고, 사회문제는 돈 먹었으니 눈 감아주고, 문화기사는 판매부수 때문에 저질로 치닫는다면 더 이상 무엇을 쓰겠다는 것인가. 듣건대 일선기자의 고생스런 취재는 겁먹고 배부른 부차장 선에서 잘리기 일쑤고, 힘들게 부차장 손을 벗어나면 편집국장 옆에서 중앙정보부원이 지면을 난도질하고 있다니 이것이 무슨 해괴한 굿거리인가. 통탄할 언론의 무기력과 타락은 이미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객관적인 상황의 요구가 그렇기 때문만이 아니라 언론의 주체적 상황을 볼 때 더욱 그렇다. 스스로 움츠리고 스스로 썩고 있는 것이다. 홍두깨 맞은 놈 젓가락만 보고도 도망하는 꼴 아닌가. 동아야, 너도 보는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올라만 가는 조선의 저 추잡한 껍데기를. 너마저 저처럼 전락하려는가. 동아야, 너도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았는가. 우리는 신문 경영자가 이미 정상배로 전락했음을 단정하고, 또한 신문을 출세의 발판으로 이용하려는 가짜들이 적지 않음을 알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닥 양심을 지니고 고민하는 언론인이 어딘가에 있으리라 믿으며 그들에게 호소한다. 신문은 이미 인적(人的)으로 동일체성을 상실하고 있으며 거기에는 엄연한 대립관계가 존재함을 직시하고 과감히 편집권 독립투쟁에 나서라.(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엮음, <자유언론>, 해담솔, 2005, 70~71쪽)

그 무렵 대학생들은 취재기자들에게 “취재해 봤자 신문에 나가지도 않을 텐데 무엇 때문에 취재하느냐”면서 욕설을 퍼붓기도 하고 “집에 가서 애나 보라”고 야유를 하는가 하면 취재차에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언론에 대한 언론계 밖으로부터의 지탄은 언론인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하던 양심적인 기자들을 크게 자극했다. 1968년 ‘신동아 사건’과 1969년 ‘3선 개헌 파동’을 거치면서 권력의 탄압과 언론의 타락을 더 이상 그대로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공감대를 형성해 가고 있던 동아일보의 젊은 기자들은 1971년 4월 15일 ‘언론자유 수호선언’을 결행했다. 사회부 심재택을 중심으로 몇몇 젊은 기자들이 주동이 되어 추진한 이 ‘언론자유 수호선언’은 당초 편집국에서 전체 기자들이 모인 가운데 결행할 예정이었으나 편집간부들의 만류와 일부 사내 세력의 방해 때문에 할 수 없이 별관 회의실에서 30여 명의 기자들만이 모인 가운데 진행됐다. (·····)

  “자유언론의 일선 담당자인 우리는 오늘의 언론 위기가 한계상황에 이르렀음을 통감하고 민주주의의 기초인 언론자유가 어떤 압력이나 사술(詐 術)로도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고 엄숙히 선언한다. 오늘의 언론이 진실의 발견과 공정한 보도라는 본연의 기능을 거의 거세당하고 만 것은 주로 외부로부터의 불법 부당한 제재와 간섭 때문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돌이켜보면 자랑스러운 선배 언론인들은 숨 막히는 외족(外族)의 억압 아래서도 국민의 알 권리와 국민에게 알릴 의무를 떳떳이 싸워 지켰다. 그러나 우리는 수년래 강화된 온갖 형태의 박해로 자율의 의지를 앗긴 채 언론 부재, 언론 불신의 막다른 골목까지 밀려나왔다. 작게는 뉴스원의 봉쇄로부터 기사의 경중과 보도 여부에까지 외부의 손길이 미쳤고, 이른바 정보기관원의 상주(常駐)가 빚어내는 모든 불합리한 사태는 일선 언론인인 우리들에게 치욕과 슬픔을 안겨주었다.
  이에 우리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언론의 자유가 어떤 구실로도 침해되어서는 안 되며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회복되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기관원의 상주나 출입은 허용될 수 없으며 신문 및 방송의 제작 판매의 전 과정은 언론인의 양식에 따라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한다. 아울러 우리는 오늘의 언론 위기의 책임을 전적으로 외부로만 전가하려 하지 않으며 권리 위에 잠잔 스스로의 게으름을 반성하려 한다.
  1)우리는 기자의 양심에 따라 진실을 진실대로 자유롭게 보도한다.
  2)우리는 외부로부터 직접 간접으로 가해지는 부당한 압력을 일치단결하여 배격한다.
  3)우리는 우리의 명예를 걸고 정보요원의 사내 상주 또는 출입을 거부한다.(같은 책, 72쪽).

동아일보사에서 ‘언론자유 수호 선언’을 주동한 젊은 기자들은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정권 핵심세력의 탄압을 각오해야 했다. 그러나 어쩐 셈인지 박정희 정권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언론자유 수호운동은 4월 16일 전국의 언론기관들로 번졌다. 그날 저녁 한국일보사에 이어 17일에는 조선일보사와 중앙일보사, 19일에는 경향신문사, 신아일보사, 문화방송 기자들이 비슷한 내용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5월 초까지 서울의 7개 일간지와 1개 민간방송, 2개 경제지, 2개 통신사, 그리고 경남매일, 국제신보 등 모두 14개 언론기관의 기자들이 그 운동에 참여했다.

그해 5월 15일 한국기자협회는 전국 분회장, 시도지부장 회의를 열고 ‘언론자유수호강령’과 결의문을 채택했다. 결의문에는 이런 대목이 들어 있다. “기자들은 진실을 진실대로 기사화하고 관계기관의 불법적인 기자 연행을 일체 거부하며, 정부는 지금까지의 언론에 대한 유형무형의 불법 부당한 간섭과 압력을 즉각 중지하고 신문, 방송, 통신의 제작은 언론인의 양심과 자율에 맡겨야 한다.”

그러나 일부 기자들의 힘만으로는 박 정권의 언론 통제와 탄압을 물리칠 수가 없었다. 언론사 경영주들과 많은 편집·제작 간부들이 언론자유를 되찾는 운동에 동조하기는커녕 권력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동안 중단되었던 ‘기관원’의 언론기관 출입과 상주는 다시 일상사가 되어버렸다. 움츠러든 언론계는 그런 상태로 1971년 12월의 ‘국가비상사태 선포’에 부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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