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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의혹 사건’과 공화당 불법 창당동아일보 대해부 3권 - 0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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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2.23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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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이 언론 탄압과 통제에 주력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민정 이양’에 대비해 ‘혁명주체세력’이 참가할 정당을 비밀리에 만들기에 앞서 그런 작업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면 언론을 침묵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거액의 ‘정치자금’을 조성하기 위해 군사정권이 일으킨 것이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으로, ‘증권 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 사건(세칭 빠찡꼬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증권 파동’을 강 건너 불 보듯 한 동아일보

‘4대 의혹 사건’ 가운에 가장 규모가 크고 많은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친 것은 김종필이 부장으로 있던 중앙정보부가 개입한 ‘증권 파동’이었다.

1962년 5월 29일자 동아일보 석간 2면에는 「증권 시세 급격 후퇴 / 대증신주 차별대우설에 자극?」이라는 기사가 3단으로 실렸다.

28일 증권시장에서는 대증(大證), 연증(聯證) 등 주력주를 비롯하여 한전주 등 인기주의 시세가 급격한 후퇴세를 형성하였으며 은행주와 미창·해공 등의 주가도 하락, 경방주만이 성장세를 견지하였다.
  이날 시장에서는 대증주 실물이 전일 비(比) 한 주에 7환60전이 급락, 연증도 96환에서 75환으로 21환이나 퇴세하였고 한전주는 한 주에 7,300환의 급격한 후퇴를 시현하였는데 경방주만은 전일 비 한 주에 300환 상승이고 은행주에도 약간의 기복이 있었다. 최근에 보기 드문 이와 같은 시세의 급변은 이날 하오 4시 현재로 마감되는 대증주의 프리미엄 부(付) 공모에 응하기 위한 자금과 연증주를 비롯한 각종 주식의 보통거래 수도(受渡) 기일이 박두하는 등 증권계의 자금 수요가 급증함으로써 매물(賣物 )이 많아 이에 영향된 것이라는 관측도 있으나 프리미엄 부 공모를 비롯한 대증신주를 구주와 차별대우 할 것이라는 설이 유포되고 있어 이에 자극된 고객들이 투자를 주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관측도 있어 극히 주목되고 있다.


이것이 나라 안을 뒤흔든 ‘증권 파동’의 시작이었다. 하루 사이에 거의 모든 주식 가격이 10%나 떨어졌다면, 그것은 단순히 ‘결제자금 조달을 위한 방매’ 때문이라고 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공기관을 비롯한 강력한 조직의 개입이나 ‘작전’ 없이 그런 돌발적 사태가 빚어질 수 없음은 물론이다.

6월 1일 증권 거래 대리인들은 ‘자진해서’ 거래를 중지했다. 같은 날짜 동아일보 석간 1면 머리에는 요란한 제목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어마어마한 반국가 사건’의 진상을 발표했다는 것이었다. 전 민주당 간부들인 조중서, 김상돈, 김인칙 등이 과도정부 후 8·15에 민정 이양을 목표로 6월 13일에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계획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른바 ‘전 민주당 간부들과 일부 예비역 간부들’이 관련된 ‘반혁명사건’이라고 불린 그 사건은 나중에 흐지부지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증권 파동에 쏠렸던 국민의 시선은 잠깐 그쪽으로 옮겨 갔을 것이다.

  증권 파동에 관한 기사는 6월 10일자 동아일보 조간에서 처음으로 크게 다루어졌다. 재무부가 증권 파동 수습을 지시하는 한편 청산거래의 기간을 단축하도록 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6월 9일 오후 7시 반에 ‘증권 파동’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군사정부가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는 뉴스가 바로 그것이었다. 화폐가치를 10 대 1로 절하하고 종전의 ‘환’을 ‘원’으로 바꾸기로 했다. 박정희는 긴급통화조치법을 공포한 뒤 “경제 안정을 위해 혁명 초부터 화폐 개혁을 준비했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증권시장은 6월 11일부터 휴업에 들어갔다. 주식에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본 사람들(속칭 ‘개미들’)은 시장이 문을 닫자 속수무책으로 땅을 쳤을 것이다.

6월 27일 최고회의는 ‘증권시장 육성책’을 마련하라고 내각에 지시했다. 증권 자금을 ‘연증’이 전담하도록 하고, 소요자금은 가능한 한 자체 자금으로 충당하며 선의의 투자자 피해는 줄여주라는 내용이었다.

동아일보 7월 4일자 조간 1면 머리에는 「증권시장 10일부터 개장」이라는 기사가 올랐다. “관계 고위 당국자는 3일 증권거래소의 신임원이 결정된 것을 계기로 거래소의 ‘파동 수습과 육성’을 위한 조치가 재무부에서 성안되었다고 밝혔다. 재무부는 방인영 씨를 이사장으로 하는 거래소의 신임원을 4일 중으로 승인할 것이며 형식상 신임원과의 협의를 거쳐 곧 증권시장 정상화의 구체 방안을 발표할 것이라고 동 당국자는 밝혔다.”

증권시장은 정식 휴장 32일 만인 7월 13일 오전에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나 시장은 갈팡질팡하다가 7월 말에 붕괴 상태에 빠졌다. 동아일보는 7월 28일자 조간 1면에 그 실상을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증권시장 큰 혼란 / 대증주 폭락, 거래소선 추락 폭 5%로 제한 / 시장대리인은 전원 철수

  27일 증권시장에서는 주력주인 대증신주가 전일 시세 비 10%의 비율로 대폭락, 구주는 17%의 하락세를 보여 한때 시장에서는 투자고객들의 아우성이 요란하였다.
  이날 시장에서는 비단 대증주뿐 아니라 유력주인 증금주와 한전·미창주 그리고 각 은행주도 전 종목에 걸쳐 약세를 보였는데 특히 대증신주는 전일의 83전 시세에서 18전 낙(落)인 65전, 구주는 15전 낙으로 7일 전 시세를 형성하였는데 매성(賣聲)은 요란하면서 매기(買氣)가 약하였으나 거래량은 첫 장에서만도 신주 1,410만 주에 구주는 770만 주에 달하였다.
  27일 하오 1시 30분 증권거래소 당국은 이날 전장의 심각한 가격 폭락에 뒤이어 대증신구주에 대하여 하루 5%라는 가격 등락에 대한 제한조치를 취하였다.

폭락했던 대증주는 8월 1일 급등세를 보였다. 재무부장관이 청산거래를 재개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시세 낙폭 제한조치를 철폐한 것이 자극이 된 것이라는 해설이 언론에 나왔지만 증권시장이 널을 뛰게 하는 배후에 어떤 세력이 있는지 여부에 관한 기사나 해설은 동아일보에서 볼 수 없었다.

조선일보가 8월 5일자 조간에 처음으로 ‘공개조작론’에 관한 기사(「시세, 폭락을 거듭 / 증권시장, 공개조작론도 대두」)를 4단으로 실었다. “서울증권시장은 주력주인 대증주가 증자에 의한 번식률을 제외하고도 최고시세 6원으로부터 13전에까지 격락(激落)함으로써 가격 파동이 휘몰아치고 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증권업계에서는 정부당국의 소극적인 시책에 비난을 퍼붓는가 하면 관계자 사이에서는 시장공개조작론이 대두하고 있어 이제는 막다른 골목에서 새롭고 적극적인 시장 육성책이 제기되고 또한 혹종(或種)의 암시도 있음직한 시기 같다.”

  (···) 최고회의 감찰위원장으로서 감사를 했던 채명신은 이렇게 말한다.
  “증권 파동은 육군 소령인 강 모와 통일·일흥증권의 윤 모 사장이 합작해 벌인 조작극이었다. 윤 사장은 강 소령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62년 2월부터 5월까지 주가를 엄청나게 올려놓곤 개미군단이 몰려들자 상투에서 팔아 30억 환을 모았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다. (···) 게다가 증권거래소는 액면가 50전에도 미달되는 38전짜리 대증주를 폭발장세를 틈타 액면가의 29배인 14환 50전에 공모증자를 하기도 해 공화당 창당 멤버들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주었다. 급기야 그해 5월부터 7월까지 수도 결제 불능이란 사상 초유의 사태를 초래해 5천여 명의 선량한 투자자들이 피해를 입었다.”(채명신, <사선을 넘고 넘어>:채명신 회고록, 매일경제신문사, 1994, 407쪽).
  구체적인 사기 수법은 가격만 형성시켜 놓고 실질적 매매는 이뤄지지 않는 일종의 변태적인 거래방법인 ‘불성’이었다.
  “예를 들면 8전 하던 주식 수백만 주를 권력을 이용해서 증권사에서 빌려다가 1원 20전까지 올려서 팔아치우고 증권거래를 불성으로 몰고 간 다음 8전으로 주가를 떨어뜨려 놓고 빌려온 주수만큼 싸게 시장에서 구입해서 빌려온 곳에 반환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1원 20전에서 8전 사이에 발생한 주당 1원 12전이 고스란히 소득이 된 이치였다. 군사정권이 아니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만행이었다.”(김준하, <대통령과 장군:윤보선 대 박정희>, 나남, 2002, 155쪽)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2권>, 153~154쪽).

증권 파동의 책임자인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나중에 최고위원들의 추궁에 대해 당당하게 말했다고 한다.

  “새 정당을 조직하려니까 돈이 많이 듭니다. 정당을 만드는 데 국고금을 쓸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증권시장에서 조달하여 쓴 것입니다. 원래 증권시장은 투기꾼들이 모이는 곳 아닙니까. 재미 보는 사람도 있고 손해 보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지요. 이 방법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CIA가 부족한 공작비를 보충하는 방법으로 썼는데 우리도 그 방법을 모방해 보았습니다.”(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5> :김종필의 풍운>, 조선일보사, 1998, 196쪽). (·····)
  피해액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다. 선의의 투자자 5천242명이 138억 원의 피해를 입었다는 설이 있다(한용원, <한국의 군부정치>, 대왕사, 1993, 252쪽). 63년 3월 28일 미 안보회의가 케네디에게 올린 한국 정세보고서엔 “김종필이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증권 조작을 통해서 2천만~3천만 달러를 벌었다”고 썼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2권>, 154쪽).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빠찡꼬 사건

워커힐은 중앙정보부 제2국장 석정선 등이 주동해서 1961년 9월 서울 성동구 광장동의 부지 18만 평을 수용한 뒤 휴가를 받아 일본으로 가던 주한미군을 유치하려고 만든 종합위락시설이었다. 공사 도중 산업은행이 융자를 거부함으로써 시설 공사가 어려워지자 교통부장관 박춘식, 관광공사 사장 신두영은 62년 8월 13일부터 63년 2월 21일 사이에 법적으로나 업무상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정부주식 출자금 5억3,590만여 원을 워커힐 이사장 임병주(당시 중앙정보부 제2국 제1과장, 중령)에게 전용 가불하게 해서 워커힐을 지었다. 임병주는 그 가운데 막대한 자금을 횡령했다. 중앙정보부는 교통부장관과 각 군의 공병감에게 압력을 넣어 61년 9월부터 62년 2월 사이에 4,158대의 각종 장비와 연인원 24,078명을 무상 노역하게 하는 등의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이 사건으로 석정선과 임병주는 타인의 권리행사 방해와 횡령, 신두영 등은 업무상 배임 등 죄로 63년 3월 13일 서울지검에 송치되었다(<한국근현대사전>, ‘4대 의혹 사건’ 항목에서).

중앙정보부는 무대장치부터 시멘트에 이르기까지 일제품을 무관세와 무검사로 수입하면서 150만여 달러의 부당이득을 취했다.

  “62년 봄 일본의 주간지들은 앞 다퉈 “한국의 군사정권이 미군 장병을 끌어들이기 위해 술과 여자와 도박판 위주의 위락시설을 짓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언론도 62년 10월 “이 시설은 매춘굴, 카지노, 미인 호스티스 등을 갖추고 있다고 보도했으며, 이에 미국 부인단체가 유엔군사령부와 한국 정부에 강력 항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워커힐은 원래 목적인 미군 장병 유치엔 실패해 적자경영을 면치 못했으며, 그 대신 박정희가 기생파티를 위해 자주 이용했다(같은 책, 155쪽).

새나라자동차 사건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1961년 12월 한일회담 재개를 위한 교섭을 명분으로 일본에 가서 야사다상사 사장인 재일동포 박노정을 만나 자동차공업에 관한 의견을 나눈 데서 비롯되었다. 그 뒤 박노정은 회사 전무인 안석규를 한국에 파견해서 중앙정보부 차장보 석정선과 접촉하게 했다. 안석규는 석정선의 도움으로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정부는 관공용 자동차 4백대를 수입할 계획을 세우고 대행 업무를 안석규에게 맡겼다.

62년 5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자동차공업 보호법’을 제정해 향후 5년 간 자동차 부품 수입을 무관세로 했고, 이런 바탕 위에 새나라 조립공장이 건설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완성된 일본산 소형 자동차 2천여 대를 관세 없이 수입해 시중 업자에게 팔아 넘겨 이익을 취하는 방식이었다. 수입가격은 1대에 13만 원인데 25만 원으로 팔아 약 2억5천만 원의 이익을 취했다. 물론 이 돈은 공화당 창당기금으로 사용되었다.”(같은 책, 157쪽).

‘빠찡꼬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그때까지 금지되어 있던 도박기구인 회전당구대(빠찡꼬)를 일본에서 5백대나 수입하게 해주고 영업 허가를 내준 대가로 돈을 챙긴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김태준 등이 관세법 위반, 문서위조 및 동행사죄로 1963년 3월 15일 수도방위사령부 보통군법회의에 넘겨졌다.

워커힐·새나라자동차·빠징꼬에 중앙정보부가 깊숙이 개입한 사건들이 터졌을 때마다 동아일보는 그 진상을 파헤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특히 중앙정보부 간부들이 법원이나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은 데 관한 기록도 동아일보에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 언론이 군사정권의 핵심인 중앙정보부를 ‘불가침의 성역’으로 여겼다는 증거이다. 쿠데타세력이 주장하는 민주당의 ‘구악’보다 군사정권의 ‘신악’이 훨씬 더하다고 언론이 보도하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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