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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세력의 언론 탄압동아일보 대해부 3권 - 0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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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2.09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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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엿새 뒤인 5월 23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포고 제11호’를 공포하고 제작에 필요한 인쇄시설을 완비하지 못한 신문, 통신 발행에 필요한 송수신(送受信) 시설을 구비하지 못한 통신의 발행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등록 사항을 위반한 정기 및 부정기 간행물은 등록을 취소하며 신규 등록은 당분간 접수하지 않기로 했다.

  1)신문을 발행하려는 자는 신문 제작에 소요되는 제반 인쇄시설을 완비한 자에 한함.
  2)통신을 발행하려는 자는 통신 발행에 필요한 송·수신시설을 구비하여야 함.
  3)등록 사항을 위반한 정기 및 부정기 간행물은 이를 취소함.
  4)신규 등록은 당분간 접수치 않음.

  이와 같은 포고령으로 전국 912개 보도기관 중 대부분이 없어지고, 일간지 39개사와 일간통신 11개사, 주간지 32개사만 남게 되었다. 폐쇄된 언론기관은 월간, 계간까지 합쳐 1,170개사에 달했다. 이것은 쿠데타 군당국이 언론기관을 크게 약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한국현대언론사>, 130~131쪽).


군사작전 식 ‘언론계 정화’를 적극 찬성

동아일보는 5월 27일자 석간 1면에 「언론의 철저한 정화를 위하여」라는 사설을 실었다. 쿠데타세력이 추진하는 일이면 모조리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던 상황에서 그 세력의 ‘대변지’를 자처한 셈이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구악을 일소하는 일단(一端)으로 언론계의 정화를 실시하였다. 4·19 이후 법이 완화된 틈을 타서 하등의 기반도 없이 또 진정한 언론과는 인연이 먼 자들이 엉뚱한 타산 아래 소위 신문·통신사를 남조(濫造)하여 사회의 혼란·부패에 부채질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관계 포고에 의하면 신문사는 신문 제작에 소요되는 제반 인쇄시설을 구비하여야 하고 통신사 또한 송수신시설을 갖춘 자에 한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와 같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 시행되지 못한 것이 5·16 이전의 우리 언론계의 실정이었다. 무턱대고 신문사니 통신사니 하는 간판을 내걸고는 관계당국에 당치도 않은 이권 내지 특권을 강요하고, 이른바 기자증이라는 것을 남발하여 무뢰한에 가까운 자들을 전국 도처에 풀어 놓아 군관민에 대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작폐를 일삼았다는 것은 언론계 자체로서도 씻을 수 없는 수치요 우리 언론계에 일대 오점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결코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에 해당되는 것이 못 되었다. 그것은 언론의 자유라는 미명 아래 언론의 자유를 모독하고 언론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려 국민으로 하여금 언론 내지 언론인을 질시(嫉視)할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들이야말로 자유언론의 적에 틀림없다. 혁명정부의 과단(果斷)으로 언론의 암을 일소케 된 것은 부득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보통 민주주의사회에서는 언론계를 제4부라고 지칭할 만큼 언론의 사명과 영향력은 막중한 바가 있다. 혁명이 지향하는 목표가 진정한 민주사회요, 오늘의 혁명과업은 이 같은 사회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있다면 언론계에 반거(蟠居)하는 부패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버려야 한다는 것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할 필수요건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이 뿌리를 뽑지 않은 채 민주체제로 환원한다면 후환이 없다고 누가 보장할 것인가?
  솔직히 말해서 과거의 언론계의 죄과를 4·19 이후에 족생(簇生)한 군소 신문·통신 즉 이번에 정비된 언론기관에만 돌릴 수는 없다. 정비를 면한 언론기관도 그 책임을 균분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다. 그리고 이 책임을 엄중히 물어야 한다는 것은 과거를 두고 시비하려는 것이 아니라 장차 이룩될 참된 민주사회, 진정한 언론자유의 사회에 대비하는 준비조치로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

쿠데타세력이 단 칼에 없애버린 군소 언론사들이 모조리 부패한 것은 아니었다. 인쇄시설이나 송·수신시설을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외주(外注)로 좋은 신문이나 통신을 발간하는 회사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쿠데타세력은 ‘언론계 정화’라는 이름으로 옥석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폐쇄해버린 것이었고, 동아일보 사설은 그것을 ‘민주체제’와 ‘자유언론’을 향한 ‘혁명적 조치’라고 미화했다. 그리고 쿠데타세력이 극도로 줄어든 언론사들을 통제하기가 한결 쉬워졌다는 점, 또  살아남은 언론사들의 시장이 더 확대되었다는 사실은 지적하지 않았다.

4월 혁명 이후 허정 과도정부와 장면 정부의 자유방임 정책 때문에 언론매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서 그 가운데 다수가 ‘방종’으로 흐르는가 하면 경영이 부실한 언론사들과 ‘사이비 언론인들’이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군사정권이 모든 언론사에 대해 충분한 조사를 하지도 않고 쿠데타 뒤 12일 만에 전국의 912개 보도기관 가운데 82개만 남기고 나머지 전부를 없애버린 것은 전체주의적 체제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동아일보를 비롯해서 ‘살아남은’ 언론매체들은 그런 폭압적 조치에 대해 비판적 기사나 논설을 단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비상계엄령에 따른 검열 때문에 지면에 글을 올릴 수 없었다면 뜻을 같이하는 언론인들이 집단적으로 의사 표시를 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했다는 언론인은 전혀 없었다.

  1961년 8월 4일자 미국 <타임>지는 한국 언론을 가리켜 ‘벙어리 신문’이라고 평하였다. 알릴 것을 못 알리고 평할 것을 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도영 의장을 축출하고 새로 최고회의 의장이 된 실권자 박정희 소장은 7월 19일 기자회견에서 “언론인은 기개가 부족하다”라고 비웃었다.
  5월 16일부터 1962년 6월 22일까지 기자의 신분으로 체포되거나 혹은 재판에 회부된 인원은 960명에 이르렀다. 이 중 신문, 통신의 제작 과정에서 문제를 일으킨 위반자, 포고령·반공법·기타 법을 어겼다고 해서 구속된 인원이 141명에 달했다. 이렇게 많은 기자들을 체포·구속하고서 기자들이 기개가 없다고 비웃는 박정희 의장의 발언은 언론계의 적지 않은 반발을 샀다.
  1961년 11월 17일 방미 중인 박 의장은 미국 ‘프레스클럽’에서 “많은 신문들이 금전에 좌우되고 부패하였으며, 공산주의 색채를 띠었다”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귀로 기상(機上)에서 “부패 언론인들이 언론계 자체에 의해 자율적으로 정리될 것을 바란다. 우리가 손을 대려고 했으나 그것을 기다리겠다”고 말했다(같은 책, 131쪽).

5월 18일 무려 830개의 언론기관을 폐쇄해버린 군사정권의 실질적 제1인자였던 박정희가 미국 프레스클럽의 여러 나라 언론인들 앞에서 “부패 언론인들이 자율적으로 정리될 것을 바란다”고 공언한 것은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사법살인’

군사정권이 언론계를 상대로 저지른 가장 잔혹하고 반인간적인 사건은 민족일보를 폐간한 뒤 사장 조용수를 ‘사법살인’한 것이었다.

5·16 쿠데타 이틀 뒤인 5월 18일 계엄사령부는 민족일보사 사장 조용수와 논설위원 송지영을 비롯한 간부 10명을 구속했다. 동화통신 5월 23일자는 치안국이 발표한 ‘민족일보 배후관계’에 관한 기사를 여러 언론에 전했다.

  5월 22일  치안국장은 민족일보와 동 사장 조용수의 일당들의 죄상 및 그 배후 관계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전기 조의 일당은 지난 58년 1월에 간첩사건으로 병보석 중 일본으로 도피한 바 있던 조봉암의 전 비서 이영근(47)의 지령 하에 평화통일 방안을 주창하면서 혁신지도자와 혁신 제 정당 및 기관지 발간에 열중해왔다.
  전기 이는 일본 조총련계로부터 소위 정치자금 2억 환을 국내에 도입하여 혁신계 지도자인 장건상 등에게 자금을 공급하여 괴뢰집단에서 주장하는 평화통일을 선전하여 사회주의 노선을 밟도록 국내 신세력을 규합해왔다.
  특히 혁신정당 기관지인 민족일보사를 61년 2월 11일 발간하고 약 1억 환 불법자금으로 전기 조용수와 안신규(민족일보사 감사역)이 주동이 되어 국내 혁신 제 정당의 기관지 발간을 계획하고 민족일보사의 논설위원 000 외 수 명과 야합하여 괴뢰집단이 지향하는 목적 수행에 적극 활약해왔다.
  이들 일당 중 장건상과 조용수, 안신규와 해성물산 사장 윤주성, 남방물산 전무 마영호 등은 이미 체포하고 나머지 미체포된 자는 계속 체포에 노력할 것이다.


민족일보는 4·19 10개월 뒤인 1961년 2월 13일 창간되었다. 사장은 조용수, 취체역(지금의 임원)은 서상일, 이종률, 고정훈, 최근우, 윤길중으로, 재일동포로 재일거류민단(민단) 계열 출신인 사장 말고는 모두 혁신계 사람들이었다. 논설위원은 유병묵, 이건호, 이상두, 초대 편집국장은 이종률, 2대 편집국장은 양수정이었다.

1930년 경남 진양에서 태어난 조용수는 일본 메이지대학 3학년을 수료한 뒤 재일 민단 본부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1959년 ‘조봉암 처형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그 뒤 귀국한 그는1960년 7·29 총선 때 사회대중당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경북 청송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 민족일보는 민족통일을 열렬히 염원하고 통일논의를 성원하였으나 북한 주장을 비판하는 논조도 보였던 신문이다. (···) 조용수는 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주동자인 박정희의 혁신적인 성격을 낙관해 우호적인 사설을 쓰기도 했다.
  조용수는 일본 유학 시절 재일교포 북송에도 결사적으로 반대한 우익 청년의 지도자였다. (·····)
  민족일보의 창간 주역 중 한 명은 이영근이었다. 자금의 일부가 이영근에게서 나왔다. 이영근은 조봉암의 비서였는데, 군사정권은 일본에서 활동하던 이영근으로부터 받은 돈을 공작금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영근은 조용수가 사형당한 뒤 박정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기도 했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권>, 327~328쪽).

8월 12일 혁명재판소에서 열린 ‘민족일보 사건’ 제8회 공판에서 검찰관(중령 오재옥)은 조용수(사장), 안신규(감사역), 송지영(한국전통 사장), 양신규(선원) 피고인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논고 요지는 아래와 같다.

  민족일보사는 조용수 단독 출자로 되어 있고 다른 중역은 아무런 출자도 하지 않은 명목상 회사이고 그 실질적 내용은 이북 괴뢰와 통하는 혁신계 인사들의 정치적 집합체이며, 피고인들은 모두 민족일보의 노선이 불법단체인 북한괴뢰를 이롭게 한다는 데 대하여 ‘확정적’ 또는 ‘미필적’ 고의가 있었고, 개전의 정이 전혀 없으니 추호도 동정할 여지가 없다(동아일보 8월 13일자 조간 3면).

쿠데타세력은 국가보안법을 3년 반까지 적용했다. 혁명재판소 제2심판부(재판장 대령 김홍규)는 8월 28일 조용수와 송지영, 안신규에게  특수범죄처벌법 제6조(특수반국가행위)를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했다.

12월 21일 오전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확정판결을 받은 조용수, 최인규(부정선거), 임화수(고대생 데모대 습격사건), 최백근(사회당 사건), 곽영주(중앙 발포 사건)에 대한 형 집행을 확인하고, 사형선고를 받은 송지영, 안신규, 한희석, 이갑영, 유지광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바로 그날 오후 1시 40분부터 4시 24분 사이에 조용수를 비롯한 5명에 대한 사형집행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전광석화’처럼 이루어졌다.

동아일보는 12월 22일자 석간 2면 머리에 「어제 하오 교수형 집행 / 최인규·곽영주·임화수·조용수·최백근 / 몸부림치는 가족 / 최인규·곽영주 부인, 형무소 앞서 쓰러져」라는 기사를 실었다.

  박 최고회의 의장에 의하여 20일 사형판결이 확인된 최인규(43·전 내무부 장관), 곽영주(37·전 경무대 경무관), 조용수(32·전 민족일보 사장), 임화수(41·전 반공청년단 서울 종로구 단장) 그리고 최백근(48·전 사회장 조직부장) 등 5명은 21일 하오 2시40분부터 4시24분 사이에 서울형무소 안에서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들이 혁검 검찰과 입회 아래 형장으로 사라지기 전후의 형무소 문 앞에는 피고인 가족들의 통곡으로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슬픔에 잠긴 가족들은 영하 3도의 찬 날씨도 아랑곳없이 울부짖고 있었다. 구 자유당 정권에서 일신의 영화와 권세를 누리다가 3·15 부정선거라는 어마어마한 불법선거를 치른 최인규는 44세를 일기로 극형을 당하였는데 이들 5명은 1시간 44분에 걸쳐 차례로 교수대에 올랐던 것이다. 시체는 22일 상오 중으로 가족들에게 인도될 예정인데 이날 서울형무소 앞과 가족들의 표정은 다음과 같다. (·····)
  최인규, 곽영주, 임화수, 조용수, 최백근 등 5명에 대한 박 의장 확인조치 발표가 있은 이날 하오 1시 45분경 곽영주의 부인 신옥균 씨가 시발택시 편으로 달려와 신 씨는 친척 되는 부인과 함께 형무소 정문 앞 형무관을 붙들고는 “이게 웬 일이냐”고 통곡하기 시작하였고 좀 뒤에 달려온 곽의 어머니도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까” 하며 통곡하였다. (·····)
  한편 조용수의 친동생(현재 가족은 이 사람뿐이라고 함)이라는 청년이 “오늘 아침에도 면회까지 하였는데 사형을 집행한다니” 하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조용수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교수형을 당한 최인규와 곽영주는 이승만의 ‘충견(忠犬)’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독재자에게 절대적 충성을 바치면서 젊은 나이에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자들이었고, 임화수는 ‘문화예술사업가’라고 자칭하던 ‘정치강패’였다. 그런데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의 자주적 통일을 지향하는 신문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용공’으로 조작되어 극형을 선고 받은 조용수가 그들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는 것은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동아일보는 쿠데타세력이 민족일보를 폐간한 뒤 사장과 그 신문의 간부들을 구속하고, 마침내 조용수를 죽음의 길로 몰아넣기까지 심층취재를 전혀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설도 싣지 않았다. ‘용공주의자들이 만드는 신문과 그 주도자들은 당연히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조용수의 동생 조용준은 2006년 1월 10일 정부기구인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상 규명을 신청했다. 같은 해 11월 28일 위원회는 “사형을 선고한 혁명재판소의 판단이 잘못됐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국가에 재심을 권고했다. 유족이 재심을 청구하자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 22부는 2008년 1월 16일 조용수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쿠데타세력이 그에게 조작된 혐의를 씌워 ‘사법살인’을 자행한 사실을 법원이 인정한 것이다. 같은 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3부는 안신규(민족일보 감사)의 유족이 신청한 재심에 대한 선고 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내렸다. “피고인을 비롯해 조용수 등이 민족일보에 남북관계에 대한 사설과 논평을 게재한 것이 북한의 활동을 찬양·고무한 것이라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2009년 9월 1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20부는 조용수의 유족과 생존한 피해자 양실근 등 10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대해 “정부는 정신적 피해에 따른 위자료로 조용수의 유족 8명에게 23억 원, 양실근 등 2명에게 각각 2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법원이 산정한 위자료 29억 원에 40여 년 간의 이자를 더하면 실제 배상액은 99억 원에 이르렀다.

쿠데타세력이 조용수를 ‘사법살인’한 동기는 ‘박정희의 좌익 경력 콤플렉스’에 있다는 증언이 여러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조용수와 대구 대륜고 동기동창인 전 국회의장 이만섭은 “그의 죽음은 박 장군이 본인의 사상적 문제를 의식적으로 입증하기 위한 희생양이었다”고 말한다.
  김삼웅도 박정희의 사상적 콤플렉스가 주요 원인이라고 말한다.
  “해방 후 남로당 등 좌익에 관계한 바 있는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하는 과정에서 미국 측으로부터 사상적 성향에 의혹을 받게 되면서 혁신계 인사들을 자신의 면죄부의 제물로 삼았다는 것이 민족일보 사건의 정치적  배경이다. 민족일보 조용수는 박정희의 사상적 콤플렉스가 불러온 희생양이었던 셈이다.”(같은 책, 328~329쪽).


언론의 목을 계속 조른 군사정권

1962년 4월 16일자 한국일보 사회면 머리기사 (「쫒겨난 관광」)를 문제 삼아 군사정권은 기사와 사진을 취재한 기자 정범태와 사회부장 이목우를 ‘반공법과 특례법 3조’ 위반으로 구속했다. 「전등사 주변의 잃어버린 휴일 / 폭력배가 난무 / 부녀 등 2백명이 놀이 훼방」이라는 부제가 달린 그 기사는 2장의 사진을 곁들여 군인들의 위세를 빌려 행패를 부리는 강화도 깡패들의 행태를 고발했는데, ‘사진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구속의 이유였다.

1962년 6월 28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언론정책 25개 항’을 발표했다. “신문체제의 일대 혁신을 기하여 조·석간 복간제(複刊制)의 경향을 조절하여 조간지, 석간지 및 일요지를 단간제로 하여 증면하고, 통신사는 1~2 개로 자진 통합하도록 하는 한편 신문용지, 원목(原木)의 수입관세를 인하 조치한다”는 것이었다.

  (···) 군사정부가 언론을 지배하고 장악하기 위해 (···) 구상 공포한 이 언론 정책은 기본방침 5개항과 세부지침 30개항으로 구성되었는데, 기본방침은 우선, 1)언론자유와 책임 2)언론인의 품위와 품격 3)언론기업의 건전성 4)신문 체제의 혁신 5)언론 정화 등 다섯 개 항목으로 나누어져 있고, 세부방침에는 이제까지의 언론 풍토를 쇄신하는 여러 시책이 밝혀져 있다. 6월 28일 최고회의 공보담당 강상욱 위원은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은 주목할 발언을 했다.
  “언론정책의 기본 정신은 이른바 정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론을 기업으로서 성립시키도록 육성하고 그 내용을 향상시키는 데 있다. (···) 과거 일부 언론의 부패 요인이 기업의 부실에 의한 부정자금의 반입, 보수 부족에 의한 부정 기자의 발호에 있었다.”(<한국현대언론사>, 134~135쪽).

최고회의가 발표한 언론정책은 ‘자율’과 ‘권고’를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권력의 타율로 언론계를 정비하고 통제하겠다는 것임이 분명했다. 거기에는 ‘신문용지와 원목의 관세 인하’와 ‘기자의 취재 편익 제공’이라는 당근이 들어 있었다. 게다가 ‘시행세칙’은 신문 발행 요건을 까다롭게 함으로써 신규 언론사 등록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동아, 경향, 조선, 한국 등 치열한 판매경쟁을 해야 하는 주요 일간지들이 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도록 하는 ‘배려’로 해석될 수도 있고, 통제할 매체를 줄이겠다는 계책일 가능성이 컸다.

조선일보 6월 29일자 석간 1면 사설(「언론에 대한 최고회의의 정책 발표를 보고」)은 박정희에 대한 ‘용비어천가’나 다름없는 내용으로 ‘언론정책’을 높이 평가했다.

  (···) 이번에 발표된 ‘언론정책’이 (···) 박 의장의 최종정책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관찰에 따라서는 한국 언론사상의 획기적인 신기원을 이룩하려는 야심작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의 각 분야에 긍(亘)하여 주저 없이 소신껏 개혁을 속단 즉결해온 혁명당국이 이렇듯 언론부문에 관해서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했다는 것은 그것이 곧 민주국가에 있어서의 언론의 기능을 중대시하고 언론인을 존중했다는 양식의 증좌인 것으로 마지 않는 것이다. 그와 함께 이번의 언론정책 공표를 계기로 ‘정책’ 중 기본 방침 제5로 명시한 “언론인의 과거는 일체 불문에 부(附)함”을 원칙으로 하는 공약의 첫 실천으로써 현재 필화사건으로 구속 중에 있는 전 언론인의 석방을 박 의장이 지시한 데 대하여 우리는 깊은 감회를 느낀다. 법률적인 견지에서 여러 가지로 음미할 만한 문제이긴 하나 대담 솔직하게 언론계의 새 출발을 고무해준 훌륭한 선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언론정책’에 표현된 혁명당국의 의도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좋은 계제가 될 것이다.
  ‘언론정책’은 “입법 없이 권장적 방법으로 정책 수행을 기”하는 하나의 거대한 정책이지 결코 어떤 강제력을 띤 통제적 방식은 아닌 것이다. (·····)
  (···) 끝으로 대부분의 언론기업체가 ‘언론정책’에 순응한 재출발을 하게 되기에는 방대한 자금이 소요될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또한 그 대부분이 ‘정부의 원조’에 의존해야 할 실정에 있으니 만큼 그만큼 언론계에 대한 정부 권력 작용의 비중이 높아질 것이다. 그것은 운영에 여간 세심한 주의를 하지 않는다면 ‘원조’와 ‘재출발’의 ‘빠타(바터)’ 형식으로 곡해되기 쉬운 요소를 갖춘 것이다. 혁명당국의 양식을 신뢰하는 우리는 절대로 그와 같은 일이 없기를 기할 것을 다짐하면서 모처럼 영단적(英斷的) 언론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 불필요한 잡음이 일어나지 않고 명랑한 분위기 리(裡)에 일대 혁신이 가해지기를 기망(冀望)하는 바이다.

이 사설은 결론 부분에서, 언론정책에 순응해서 재출발을 하려면 ‘방대한 자금’이 필요할 테니 ‘정부의 원조’에 의존해야 하고 “그 만큼 언론계에 대한 정부 권력 작용의 비중이 높아질 것”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원조’와 ‘바터(물물교환)’ 형식이라는 곡해를 받지 않으려면 ‘혁명당국의 양식을 신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의 옹호’와 ‘불편부당’을 사시(社是)로 내건 조선일보가 쿠데타권력의 원조를 받으면서도 자유롭고 독립적이며 공정한 신문을 만들 수 있으리라는 뜻이니 이보다 심하게 독자를 우롱하는 사설이 일찍이 또 있었을까.

조선일보와 달리 동아일보는 6월 30일자 석간 1면 사설(「신문기업에 정부가 관여할 수 있는 명분과 그 한계」)을 통해 군사정권의 새 ‘언론정책’에 대해 부분적으로 비판적인 견해를 밝혔다.

  혁명정부는 28일 ‘언론의 창달·육성’과 ‘구악적 잔재의 시급한 불식(拂拭)’을 위한 광범한 언론정책을 공표하고 이의 조속한 실현을 신문계에 ‘권장’하였다. (·····)
  그러나 좋은 동기는 반드시 좋은 결과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고, 목적이 반드시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고 볼 때, 앞으로 공보부에서 책정하는 구체적 ‘기준’이라든가, 또는 구속력을 갖지 않는 이와 같은 정책이 어떻게 구체적 결실을 맺게 되는가 하는 실천 과정에 더욱 큰 뜻이 있다고 보아 이에 몇 마디 우리의 견해를 밝혀 두는 바이다.
  첫째로 언론정책의 의도가 건전한 언론 창달에 있고, 특히 한국 신문기업의 육성 발전에 있음은 명백한 것이다. 이러한 고귀한 목적을 위하여 “신문 경영인의 자격과 기업의 자진 정리를 권장한다”는 방침은 사회적으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
  만일 항간에 유포된 소문처럼 인위적으로 무조건 중앙에 몇 지(紙), 지방엔 몇 지라고 고정시키는 일이 있다면, 이는 원칙에서 벗어나고 한계에서 넘어선 조치가 될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정부가 할 수 있는 규제는 신문을 책임지고 발간할 능력 있는 시설에 신문 발행만이 목적인 사람은 모두 자유롭고 공정한 신문기업에 참가해서 선의의 경쟁을 통해 사회에 이바지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그쳐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신문 지면의 증면 여부, 단간제(單刊制) 여부, 현실적인 보수 기준 등 문제는 원칙적으로 정부가 이에 개입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지적하고 싶다. 오늘날 현실에 새 지면을 대폭 늘리고 단간제로 한다든가 종업원의 보수를 올려준다는 것 등은 업체의 형편에 따라 가능한 경우도 있을 것이요, 또는 어려운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한 단간제에 장점이 있다면 조석간제도 이점이 있고, 증면을 단행하는 것이 독자에 더 많은 정신적 양식을 보급하는 일이지만, 물질적·금전적 부담이 될 것이며, 종업원의 봉급을 올리는 것이 받는 측엔 좋겠지만, 자칫하면 이 역시 독자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이 되거나 기업적 자살로 그치고 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
  이렇게 고찰할 때 정부가 보수, 증면, 단·복간제 등에 일률적으로 기준을 세운다는 것이 기술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임을 알 수 있으며 자칫 잘못하면, 그 동기가 아무리 숭고하고 그 목적이 순전히 신문기업의 육성에 있다 할지라도, 결과적으로 기업적 붕괴를 재촉하는 일이 없다고 누가 단정하겠는가.

송건호는 군사정권의 새 언론정책을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 한국 언론기업은 이때부터 재정적으로 점차 권력과 밀착하는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군사정부에 의한 이 언론정책의 특징은 첫째로 (···) 상당 규모의 기업인이 아니면 도저히 신문을 발행할 수 없게 만들었다. (···) 신문 발행의 자유는 허용하고 시설기준을 엄격히 규정한 결과 사실상 몇몇 기성 신문만 명맥을 유지하고 새로운 언론의 출현이 사실상 봉쇄되고 말았다.
  둘째로 그때까지의 조·석간제를 단간제로 만들어 소위 ‘교양 오락’ 면에 치중하도록 규제하여 보도를 시간적으로 그만큼 뒤늦게 국민에게 알리고 보도의 양도 지면에서나 시간적으로 조·석간제 당시보다 크게 뒤지게 만들었다. 당시 필자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사실 보도의 양이 조·석간제 당시보다 거의 50%가 줄어 있었다. 신문이란 보도가 생명이다. 그런데 조·석으로 알려지는 뉴스의 양이 현저하게 줄어든 것이다. 군정 당국이 조·석간제를 단간제로 바꾸게 한 저의는 뉴스의 양을 그만큼 줄이자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당국은 보도 위주에서 ‘교양 계몽 위주’라는 구호를 내걸었으나 1962년 8월 단간제 실시의 결과는 신문을 더욱 잡지화시켰고 보도의 질이나 양은 현저히 떨어졌다(같은 책, 135~136쪽).

8월 4일 군사정권은 6대 중앙 일간지가 조간이냐 석간이냐를 선택하도록 했다. 동아일보, 경향신문, 서울신문, 대한일보는 석간을, 조선일보와 한국일보는 조간을 택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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