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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대 악법 반대투쟁’과 남북학생회담동아일보 대해부 2권 - 2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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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1.26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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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8월 23일 수립된 장면 정권은 이듬해 5·16 쿠데타로 무너지기까지 9개월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집권했다. 장면 정권이 후반 들어 가장 시달린 문제는 학생운동권과 혁신정당, 그리고 진보적 사회단체들이 주도한 통일운동과 ‘2대 악법 반대투쟁’이었다.

7·29 총선 직후 내각책임제의 수장인 국무총리 자리를 두고 민주당 구파와 극한대결을 벌인 끝에 가까스로 집권에 성공한 신파는 취약한 정치적 기반 때문에 정권 안팎에서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특히 4월 혁명 이후 사회 각계각층에서 터져 나오는 집회와 시위, 거기서 쏟아지는 요구는 장면 정권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장면을 중심으로 한 집권세력은 특히 통일운동에 대해 이승만 정권처럼 ‘반공’을 앞세워 탄압하려고 했다. 나중에 ‘2대 악법’으로 불리게 된 ‘반공임시특별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통칭 데모규제법)’ 제정 시도는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악법 제정을 강하게 비판한 동아일보 ‘횡설수설’

1961년 3월 8일 정부 대변인 정헌주(국무원사무처장)는 반공임시특별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이하 데모규제법) 제정에 관한 안건을 임시 각료회의에 붙이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3월 10일 오전 전문 9조와 부칙으로 이루어진 반공임시특별법안을 각료회의에 상정했다. 법무부장관 조재천은 “어떤 사람이 김일성 만세를 부르거나 「적기가」를 고창(高唱)해도 현행 국가보안법으로는 처벌할 방도가 없다”고 특별법 제정 이유를 설명했다.

동아일보 3월 10일자 석간 1면 기사(「정부 반공법안 성안」)는 그 내용을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정부는 10일 각의에서 국가보안법의 미비점을 보완하기 위한 ‘반공임시특별법안’과 ‘집회와 시위운동에 관한 법률안’의 시안을 민주당 정책위원회에 회부하여 최종 성안토록 의결하였다.
  각의는 이날 양 법안의 제안자인 법무 및 내무부 장관의 제안 설명을 듣고 이를 심의한 끝에 10일 하오에 열릴 당 정책위에 회부하기로 한 것이다.
  이날 발표된 전문 9조, 부칙의 이 시안에 대하여 민주당은 이날 하오부터 정책위 및 기획위 연석회의를 열고 구체적으로 검토할 예정인데 여기에서 검토가 끝나면 의원총회를 거쳐 야당 측과 ‘충분한’ 사전협의를 한 다음에 국회에 제출할 방침이다.
  이러한 새 입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가능성이 많다 하여 이미 그 안이 공표되기 직전부터 재야정당으로부터 상당히 많은 비난을 받아왔던 것인데 이날 이 시안을 발표한 김대중 선전부장은 이 새 법은 반공이라는 목적 이외에는 언론의 자유나 그 외 어떠한 국민의 자유도 제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4월 혁명 이후 5·16 쿠데타 직전까지 집회와 시위가 꼬리를 물고 일어남으로써 정부가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혁명을 치른 어느 국가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황이라고 이해하고 정권이 냉정하고 차분하게 대처할 문제였다. 그런데 장면 정권은 오히려 국민의 기본권과 언론자유를 억압하는 법을 만들어 집회와 시위를 막으려고 했다.

  당시 집회와 시위와 관련된 법률로는 4월 혁명 직후인 1960년 7월 1일 제정된 ‘집회에 관한 법률’이 있었다. 이 법률은 집회 및 시위를 하려면 24 시간 전에 관할 경찰서에 신고하도록 되어 있는 것으로 전문 3조의 간단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장면 정권이 새로 만들고자 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는 정지해서 시위할 경우 중요 건물 20미터 이내 지역에 접근을 불허하며, 동일 건물 앞에서 1시간 이상의 시위를 금지하고, 일몰 후에는 시위를 금지하는 등의 자세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당시 언론과 정치인들은 이를 통상적으로 ‘데모규제법’이라 불렀다.
  반공임시특별법 제정 또는 국가보안법 개정은 1958년 이승만 정권의 국가보안법 개정을 연상시키는 것이었고, 데모규제법도 4월 혁명의 결과로 확장된 시민의 민주적 권리를 제약하기 위한 기도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323~324쪽).

당시 민족일보 등 혁신계 언론은 물론이고 보수적 언론도 ‘2대 악법’에 대한 비판적 논설이나 칼럼을 실었다. 동아일보 3월 11일자 석간 1면의 무기명칼럼 <횡설수설>은 ‘2대 악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현행 국가보안법을 보강한다는 간판을 내걸고, ‘반공에 관한 특별법’을 새로이 만들어내려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오늘의 국가보안법만을 가지고선, 조수처럼 밀려들고 벌떼처럼 일어나는 붉은 간첩도배를 근절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언뜻 듣기엔, 장 정권이 타공(打共)에 ‘전가의 보도’를 이제야 빼 들게 되나보다 하고 일부 국민에겐 믿음직한 생각을 갖게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이란 그 놈이 이승만 정권 시대, 공산 박멸과 함께 야당도 때려잡자는 불순한 의도에서 만들어졌던 것임은, 누구보다도 현 정권 담당자들이 야당으로 있을 때 뼈저리게 체험한 일이니 군더더기의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야당의 민권투쟁사를 혈루로 점철시킨 ‘2·4 파동’이란 것도 그 국가보안법의 반민주성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서, 오늘의 민주당 장면 내각에 자리잡고 앉은 인사들 중에도 온갖 압력과 구박과, 심지어 몽둥이찜질까지도 받은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점고(點考)해 볼 때, 어쩐지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못 한다”는 속담이 연상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한편, 허울 좋은 ‘반공임시특별법안’ 속엔, 특히 언론 탄압의 독소가 들어 있다는 것이 은연중 아른거린다. 보도의 자유와 비판의 자유까지도 ‘이적(利敵)’이란 올가미를 씌워, 구제(拘制) 또는 억압하려는 흉략(凶略)이 숨어 있음은 중대한 문제다. 여기서 우리 언론인들에게 또 하나의 ‘언론 파동’을 전제로 한 지대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민주당의 ‘임시특별법안’ 입안자의 한 사람으로 보이는 조재천 법무장관에 대해서 문득 생각나는 일이 있다. 즉, 그는 자유당이 ‘신국가보안법’을 만들려 할 당시, 본지에다가 ‘독재국가를 우려’하느니, ‘위헌적’이니, 또는 ‘인권을 유린하는 악질’이니 하는 장문의 비판문을 기고한 그것이다. (···)
  이렇던 조 법무요 그 같았던 민주당이, 오늘엔 자기네가 왕년에 사갈시(蛇蝎視)하던 이신(異身)·동체의 그따위 유사법안을 짜내고 있으니, 이다지도 인심이 ‘양극’으로 변화할 수 있을까 하는 해괴하고도 허무한 생각만 든다. ‘집권 전’과 ‘집권 후’가 약간의 시차밖엔 없다. 엊그제까지 “악법을 만들지 말라”고 호통을 쳐서 국민의 절대 신뢰를 받던 사람들이, 집권 불과 반년에 그 같은 이곡(異曲)·동조(同調)의 독법(毒法)을 좋아라고, 한 술을 더 떠서 강화시키려 해서 치열한 반대여론의 앞에 서게 됐다.
  실정·비정(秕政)의 연속이 민심의 이반을 부채질한다. 때문에, 공산도배에게 준동의 기회를 주고, 또 악선전의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신문 그것은 현실 그대로 보도와 비판을 하건만, ‘반공’을 구실로 해서 언론자유마저 그 법의 함정 속에 함께 몰아넣으려 하고 있다.


혁신세력과 사회운동단체의 극렬한 악법 반대투쟁

장면 정권의 ‘2대 악법’ 제정 기도에 맞서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투쟁을 벌인 조직은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를 비롯한 통일운동단체와 혁신정당, 그리고 진보적 사회운동단체들이었다. 3월 14일 4개 혁신정당과 민자통, 조국통일민족전선 등 3개 통일운동단체를 포함한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은 ‘반민주악법 공동투쟁위원회(정당·사회단체 공투위)’를 결성하고 “민주수호 정신에 입각해서 반민주악법 제정을 반대하고, 원내외투쟁을 효과적으로 단행하기 위하여 광범위하고 강력한 대중운동을 추진한다”는 내용의 ‘공동투쟁 강령’을 채택했다. 각 지방에도 공투위가 조직되었다.

3월 18일 경북 학생 공투위 주최로 대구역 광장에서 열린 ‘악법반대 규탄대회’에는 1만여 명의 군중이 참여했다. 3월 22일에는 ‘반민주악법반대성토 대강연회’가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개최되었다.

  이 시청 앞 시위는 정당, 사회단체, 청년학생단체 공동 성토대회였는데, 3만여 명이 참가하였다. 트럭 두 개를 이어서 만든 연단 앞엔 사람들이 “피로써 찾은 민권 악법으로 뺏을 소냐” “반공이란 이름 밑에 생사람 잡지 마라” “4월의 피는 통곡한다” 등 수십 4개의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이날 시위에서는 “장면 정권 타도하자”라는 수준을 넘어서 “외세에 의존하는 장 정권 물러나라” “미국놈들 물러가라” 등의 반미구호가 공개적으로 표출되었다. “반공보다 빵을 달라” “반공보다 직장을 달라”는 구호도 등장하였다.
  (···) 횃불을 든 시위행렬이 중앙청에서 장면의 사저가 있는 혜화동으로 향했다.
  이 시위에서도 대구에서처럼 좌우 대결이 벌어졌다. 낮부터 마이크를 단 지프차들이 “반공 없는 나라로 가라”는 등 방해구호를 외쳤으며, 멸공의거단, 멸공애국동지회 등의 단체가 반공법 지지 전단을 살포하였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권>, 215쪽).

3월 23일 국방부장관 현석호는 “경찰이 못 막으면 군대를 동원해서 난동 저지에 전력할 것”이라고 기자들에게 말한 뒤 “계엄령 선포까지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3월 22일 서울시청 앞에서 벌어진 집회와 시위는 4월 혁명 이후 규모가 가장 크고 격렬한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3월 23일자 석간 3면 머리에 장면 정부 내무부장관의 담화를 크게 보도했다.

  악법 반대 야간데모 / 공산당 수법과 꼭 같다 / 난동 배후를 엄중 수사 / 대회 책임자로 고정훈·선우정 씨도 구속 / 구속된 123명 모두 소요죄로 처단

  신 내무부장관은 23일 상오 22일 밤의 데모 사태에 대하여 “그들의 행동은 공산당의 수법과 꼭 같다”고 규정하는 동시 난도의 배후를 추궁하기 위해 대회(반민주악법반대성토대강연회) 책임자로서 통사당의 고정훈 씨와 선우정 씨 등을 긴급 구속,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신 장관은 이번 난동을 계기로 “정부는 그 원인이 정부의 실정에 기인된 것으로 보지 않는가? 또한 반성할 점이 없는가?”라는 기자들 질문에 대하여 “정부가 치정에 관해 반성한다는 것과 22일의 난동과는 별개의 문제이며 이날 밤의 행위는 소요를 일으키기 위한 의식적인 난동이며 공산당의 수법과 동일한 것이다”라고 답변하여 주목을 끌었다. (·····)
  이어 신 장관은 이들이 중앙청 문을 부수고 택시를 강압하고 유리마저 깨고 해산한다고 하면서 목적 외의 코스로 간 것은 공산당의 수법과 같은 것이며 긴급 구속된 123명을 전원 ‘소요죄’로 처벌할 것이며 사후 조사를 위한 별도의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고 말하였다.

정부는 3월 30일 오전 각의에서 ‘국가보안법개정안’과 ‘집회와 시위운동에 관한 법률안’을 의결하고 국회에 제출했다.

  민주당 정부가 처음 기획한 2대 악법은 5·16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반공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로 제정되었다. 쿠데타 직후 군사정권은 통일운동, 진보적 사회운동에 관련된 인사들을 대거 검거하였다. 이때 진행된 특별재판 과정에서 2대 악법 반대투쟁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특별히 무거운 형을 선고받았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334쪽).


좌절된 남북학생회담

3·22 대회 이후 서울에서는 더 이상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지만 여러 지방에서 2대 악법 반대투쟁이 계속되었다. 23일 부산에서 경상남도 학생 공투위 주최로 열린 ‘악법 반대 경남 학생 총궐기대회’에는 1만여 명의 시민과 학생이 모여 “배고파 못 살겠다. 통일부터 먼저 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민주당사 앞까지 시위행진을 했다. 25일 전남 광주에서는 5천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악법 반대 강연회가 있었고, 전북지역에서는 3월 25일과 30일 2대 악법 반대 집회가, 30일 충남에서는 악법 반대 궐기대회가 열렸다.

  4월 혁명 1주년을 전후하여 학생들 사이에는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4·19 1주년을 맞아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위기설과 군사쿠데타설이 파다하게 나돌고 있었다. 학생들은 의도적으로 기념행사를 조용하게 거행하였다. (·····)
  마침내 1961년 5월 3일 서울대 민통련은 대의원회의에서 논란 끝에 남북학생회담을 공식적으로 제안하기로 결정하고, 다음날 이를 제안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성명서는 1)빠른 시일 안에 남북학도회담을 개최하며 2)회담 의제는 학생기자 교류, 학술토론대회 개최, 예술·학문·창작 교환, 체육대회 개최로 하며 3)남북 행정 당국은 학생들의 결의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 등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5월 3일 ‘민통전학련 결성준비대회’에서 서울대 민통련의 제안을 전국적 학생 민통련의 결의로 재확인하였다. 이날 민통 전학련 관계자들은 학생회담 장소는 판문점으로 하며, 회담 시일은 5월 이내로 하고, 민통전학련이 지역별로 회담 대표를 선정하겠다고 계획을 구체화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335~337쪽).

국무총리 장면은 5월 11일 오전 “한국 통일문제는 이미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국제문제의 하나가 되어 있다”면서 “국제문제화한 한국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민족의 자주성 내지 주체성을 잘못 이해하여 북한괴뢰와 직접 협상을 운위하는 것은 공산당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그들의 교활한 각본에 속아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동아일보 5월 11일자 석간 1면).

정부와 보수적 언론이 남북학생회담 제의를 강력히 비판하자 서울대 민통련 학생들은 5월 12일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내세우면서 사회단체가 주최하는 남북학생회담지지 집회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민통전학련은 5월 14일부터 일부 일간지에 「남북 학생 및 통일축제에 관한 우리의 요구라는 광고를 실었다. 그 광고문안에서 핵심적인 것은 “남북학생회담 지지 여부를알기 위해 국민 또는 전 학생의 투표를 실시할 것”이었다. 회담 강행 의사가 없음을 명백히 한 셈이다.

5월 13일 민자통 중앙협의회가 주최한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민족통일촉진 궐기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열렸다. 이 대회가 시작될 때는 5천여 명이 모였는데 가장 많을 때는 1만 명 정도였다고 언론이 보도했다. 집회가 끝나자 1천여 명의 군중이 종로와 을지로를 지나 시위행진을 하면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고 쓰인 피켓을 흔들면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 하느냐” “배고파 못살겠다 통일만이 살길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 궐기대회는 사흘 뒤 5·16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정치·사회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사건이었다. 그러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지면에서는 그 대회에 관한 기사도 논설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경향신문이 5월 13일자 석간 3면에 「판문점행 여비 모금 운동 전개키로 / 북한 가족에 보낼 편지 수집도 / 대구 혁신계 회의서 결의」라는 기사를 4단으로 내보냈을 뿐이다.

  [대구] 민통련 주최로 13일 하오 민통련 사무실에서 혁신정당·사회단체 및 일반인들 약 40명이 모인 회합에서 오는 17일 하오 4시 두 번째의 남북학생회담 지지 궐기대회(장소 미정)를 갖기로 결의하는 한편 이번 궐기대회에는 판문점 회담에 갈 학생들의 여비 조달 가두 모금운동을 전개키로 결의했다.
  또한 이북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서신 교환을 위해 편지 수집도 아울러 실시키로 했다. 한편 동 서신 교환은 학생들이 판문점에서 이북 학생들과 직접 하기로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경찰당국은 가두 모금은 기부금지령에 저촉되는 것이며 서신 교환은 법에 저촉된다 하여 허용치 않겠다고 말하고 있다. 한편 이번 대회에서는 서울대학교 민통련 남한 학생대표로 선출된 이수경 군 등 4명의 강연을 비롯하여 대대적인 시가 데모도 예상된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육군소장 박정희가 주도한 쿠데타가 일어남으로써 학생들과 혁신세력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펼쳐지던 통일운동은 오랫동안 깊은 겨울잠에 빠지게 된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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