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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운동을 묵살하다시피 한 동아일보동아일보 대해부 2권 - 2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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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2.01.12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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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혁명 직후 기존의 노동조합들이 개편되는 한편 새로운 노조가 결성되기 시작했다. 다른 부문들에 앞서 노조 결성에 나선 곳은 대구·경북 지역의 교사들이었다.


대구·경북에서 시작된 교원노조 결성

당시 대구시를 포함하고 있던 경상북도는 마산이 자리 잡은 경상남도와 함께 4월 혁명의 진원지라고 볼 수 있었다. 1960년 2월 28일 자유당의 지시에 따라 대구의 고등학교들이 학생들에게 일요일 등교를 지시한 데서 비롯된 시위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사연 때문에 대구·경북의 많은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부채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교원노조 결성은 대구·경북 지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60년 4월 29일 대구 시내 중·고교 교원 대표 60여 명은 ‘대구시교원노동조합결성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날 여기에 참여한 교원들은 다음과 같이 학생들의 희생에 대한 교원의 책임을 강조하면서, 전국적인 교원노조 결성을 촉구하는 격문을 발표하였다.
  “선생님! 정의와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생명을 바쳐 싸워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정열에 불타던 그 눈동자! “비겁합니다! 선생님” 하고  외치던 그들의 울부짖음! 그들의 모습! 우리는 여기 양심의 가책과 자괴(自愧)가 없을소냐. 전국의 교원 동지들이여! (···) 침체한 자리를 박차고 우리들도 진정한 교원의 권리를 찾자. 그들이 갈망하는 민주학원을 건설하여 이 나라 민주주의의 교두보를 구축하자. 우리들은 단결하자. 그리고 투쟁하자! 단결과 투쟁만이 민주학원을 건설하는 길이다(이목, 1989, 18쪽). (<한국민주화운동사 1>, 254~256쪽).

교원노조를 만들자는 운동은 전국으로 번졌다. 조선일보 5월 1일자 석간 2면에 실린 「교원조합 결성 추진 / 학원자유 보장 부패도 제거」라는 기사는 서울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같은 날자 동아일보 석간에서는 이런 보도를 볼 수 없다).

  서울시내 47개 중·고등학교와 3개 국민학교 교직원들은 1일 상오 10시 반 교원조합결성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1)학원의 자유 2)교육행정의 부패 제거 3)교원의 자질 향상과 권익 옹호를 목표로 발족한 이 조합결성준비위원회는 앞으로 대학교수단의 합류도 받아서 전국적인 조직을 꾀할 것이라 한다. 결성준비위원회는 오는 10일 내지 15일경 결성총회를 열기 위해 계엄사령부에 집회 허가를 수속 중에 있다. 한 준비위원은 “학생들이 흘린 피에 보답하고 얼굴을 들고 교단에 설 수 있도록 스스로 불의에 항거하는 정신을 다짐하기 위하여” 교원노동 조합이 결성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교원노동조합결성준비위원회의 임시사무소는 중구 을지로 2가 148에 있다.

서울 동성고등학교에서 열린 교원노조 결성을 위한 모임에 이어 5월 7일 대구시에서 초등교원노조와 중등교원노조가 정식으로 결성되었다. 5월 15일에는 부산지구중등교원노조, 21일에는 부산지구초등교원노조가 결성되었다. 5월 22일에는 서울에서 초·중등학교와 대학교 교원 3백여 명이 ‘대한교원노동조합연합회’를 창립했다.


동아일보에서는 보기 어려운 교원노조 운동 관련 기사

4월 혁명 직후부터 시작된 교원노조 창립과 조직 확대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학원을 전체주의적으로 지배하면서 교원들의 자율성을 침해했음은 물론이고 교원의 노동3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던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침묵하던 교원들이 떨쳐 일어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공정하고 진취적인 언론이라면 그런 역사적 움직임을 대대적으로 대중에게 알리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전교조 운동이 아래와 같이 진행되는 기간에 동아일보 지면에서는 관련 기사나 논설을 거의 볼 수가 없었다.

1960년 5월 말부터 7월 초까지 전국의 단위노조들을 통해 교원노조 도별 연합체를 만드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5월 29일 경북지구교원노조연합회가 결성되어 김문심을 위원장으로 선출한 것을 시작으로 경북지역에서는 울릉도를 제외한 26개 시·군에서 모두 교원노조가 결성되었다. 6월 19일에는 경남초등교원연합회가, 6월 26일에는 전남지구연합회와 충남지구연합회가, 7월 3일에는 전북지구연합회가 결성되었다. 서울특별시를 빼고 경기도와 제주도에서도 연합회가 창립되었다.

7월 3일 대구에서 2백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교원노조 전국대표자대회가 열린 데 이어 7월 17일에는 서울 의사회관에서 교원노조 제1차 전국대의원대회가 개최되었다. 186명이 참석한 이날 대회에서 전국 중앙조직의 명칭이 대한교원노동조합연합회에서 한국교원노동조합총연합회로 바뀌었다. 전국 조직을 실질적으로  총괄할 수 있는 지도부가 구성된 것이었다.

  7월 17일 대회에서 보고된 바에 따르면 총 82개 교원노조가 이미 결성되었고, 조합원 수는 1만9883명이었다. 교원노조 조합원은 전국 전체 교원 수의 22% 정도에 해당하였다. 조합원 수를 지역적으로 보면, 경북이 8100명이었고, 경남이 8천여 명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경상도지역에서는 교사들의 노조 가입 비율이 60% 정도 되었다. 한편 서울은 2백여 명, 충남은 9백여 명, 전북은 370여 명, 전남은 230여 명, 제주는 170여 명 정도였다(같은 책, 259쪽).

지역에 따라 가입자 수에 큰 차이가 나기는 하지만, 전국 교원의 22%가 가입한 교원노조는 한국의 교육은 물론이고 정치, 사회, 문화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했다.
1960년 4월 말부터 시작된 교원노조 운동을 외면하던 동아일보는 7월 18일자 조간 3면에 「해산명령에 항거 / 교조 전국대의원대회서 결의라는 기사를 2단으로 짤막하게 실었다.

  ‘대한교원노동조합연합회’의 제1차 전국대회가 17일 상오 10시부터 186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시내 의사회관에서 개최되었다.
  “교원노조 해체의 불법을 규탄한다” “단결은 우리의 우리의 힘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건 이날 대회장에는 정부에서 교원노조를 불법이라고 규정한데 대한 부당성이 지적되었고 ‘결의문’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들은 대회사를 통하여 “우리의 노동조합 조직의 신고를 반려함은 법 이론상으로나 혁명정신으로나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기사에는 ‘대한교원노동조합연합회’가 언제 창립되어 어떻게 활동하면서 전국 조직을 갖추고, 186명이나 되는 대의원을 모아 제1차 전국대회를 열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동아일보만 보는 사람들은 교원노조가 갑자기 땅 밑에서 솟아오른 단체로 여겨졌을 것이다.

허정 과도정부가 교원노조 운동에 대처한 경위는 다음과 같다.

4월 혁명 이후 교원노조 결성 작업이 진행되자 허정 과도정부 안에서는 그 합법성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났다. 1960년 5월 9일 문교부차관 이항녕은 교원노조 활동을 막지 않겠다고 밝혔으나 5월 19일 문교부장관 이병도는 교원노조를 허가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법무부는 6월 16일 교원노조 합법성 문제에 대해 유권해석을 내렸다. 국 가공무원법 제37조의 “공무원은 정치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며, 공무 이외의 일을 위한 집단적 행동을 하여서는 안 된다”는 규정과 이를 준용한 교육공무원법을 들어 교육공무원은 노동3권을 향유할 수 없으며, 노동조합을 조직할 수 없다고 해석하였다. 6월 22일 문교부장관과 보건사회부장관은 담화문을 통해 이미 결성된 교원노조 해체를 지시하였다. 또한 다음날 이병도 문교부장관은 교원노조에 가입한 교원들이 탈퇴하지 않으면 파면 조치를 취하겠다고 강경한 입장을 피력하였다. 허정 과도정권은 결국 교원노조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미 결성된 교원노조에 신고필증을 배부하지 않았다(같은 책, 260~261쪽).

동아일보가 이런 일련의 사태를 묵살하다시피 한 것과 달리 조선일보는 6월 23일자 석간 1면에 「교원노조에 대한 문교부의 부당한 해산 명령이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올렸다.

  문교부는 22일 전국의 20여 개 교원노조와 동 연합회에 대하여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 해산 명령의 근거는 교원노조가 국가공무원법 제37조와 교육공무원법 제29조에 위반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문교당국의 법 해석이 전적으로 그릇되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바이다. 첫째 문교부는 교원노조가 국가공무원법 제37조의 “공무원은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없으며 공무 이외의 일을 위한 집단적 행동을 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규정을 주요 이유로 들고 있지만 이것은 교원노조의 합법성 여부를 검토할 경우에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할 노동조합법 제6조의 규정을 모르거나 또는 무시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노동조합법 제6조에 의하면 “노동자는 자유로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할 수 있다. 단 현역군인, 군속, 경찰관리, 형무관리와 소방관리는 예외로 한다”고 하여 전기 이외의 근로자는 그들이 설사 국가공무원인 경우라 할지라도 자유로이 노조를 조직 가입할 수 있도록 허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근로자의 자립적 단결권, 단체교섭권 및 단체행위자유권을 보장하고 근로자의 근로조건을 개선함으로써 경제적 사회적 지위 향상과 국민경제에 기여케 하려는 헌법정신에 비추어 당연한 규정이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이러한 규정에 의거하여 과거 이 정권 하에서조차 철도공무원들의 철도노조와 체신공무원들의 체신노조를 허용하였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번에 문교부가 취한 교원노조 해산 조치는 명백히 노동법을 무시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문교당국이 법률의 초보적 상식인 근로자의 특별한 권익의 보호를 헌법으로써 보장하게까지 된 20세기의 정치법률 상의 변천을 홀시(忽視)하려고까지 않았던들 이와 같은 억설적(臆說的) 법이론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
  문교당국은 4월 혁명으로 학원의 자유와 독립을 되찾고 확고부동한 민주학원을 건설하려는 교원들이 그들의 자주적인 단결운동을 어떻게 강제로 저지시킬 수 있는가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문교당국의 금반 조치는 4·26 이후 점차 안정의 길을 모색해가고 있는 학원에 또 하나의 파문을 던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질없는 교원노조 해산 명령은 즉시 철회하고 분규학원의 수습을 비롯하여 부패학원에 대한 과감한 수술 등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에만 전념하기 바란다.

이 사설은 허정 과도정부의 교원노조 해산 명령이 법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부당하다는 사실을 명백히 지적하고 비판했다.


정권의 교원노조 외면에도 거의 침묵

7·29 총선이 끝나고 새로운 정권을 세우는 작업이 진행되던 1960년 8월 9일 경북도청은 경북지구교원노조연합회 위원장 김문심을 비롯해서 대구시내에서 근무하는 교원노조 간부 23명 전원에 대해 전보조치 발령을 내렸다. 통상적으로 교원 인사는 3월 말과 9월 초에 있었는데 경북도청이 기습적으로 ‘보복 인사’를 강행한 것이었다. 그러자 대구시내 교사 3백여 명은 방학 중이던 8월 11일부터 14일까지 나흘 동안 30도가 넘는 무더위 속에서 “교권과 민주학원을 되찾자”고 외치며 경북도청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였다. 8월 20일에는 대구 달성공원에 교사 3천~5천여 명이 모여 교조탄압 반대 전국 조합원 총궐기대회를 열었다. 그것은 교원노조 창립 이래 최대 집회였다. 동아일보는 장면 정권이 수립되기 전인 8월 9일 허정 과도정부가 대구시내 교원노조 간부 23명 전원을 전보조치 한 사실을 보도하지 않다가 8월 12일자 석간 3면에 비로소 관련 기사를 3단으로 내보냈다.

  교조서 투쟁 개시 / 날마다 연좌데모키로 / 간부 대량 지방 전출 발령에 항거

  [대구 발] 교조간부급 대량을 지방으로 전출발령한 데 반기를 든 경북지구 교원노조는 11일부터 발령자인 조준영 지사를 상대로 항거투쟁하는 서막을 올렸다. 이날 하오 2시50분에 경북도청 광장에 들이닥친 교조원 150여 명은 하오 5시까지 연좌데모를 하고 해산했다. “교조는 교원의 생명이다. 부당한 인사조치를 철회하라”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끝까지 질서정연한 지성인다운 투쟁방법을 취했다. 이들은 도지사의 부당인사를 철회할 때까지 갖은 극한투쟁 전개를 각오하고 오는 14일까지 연일 이 같은 연좌데 모를 하고 15일은 다시 교조총회를 가져 최종 투쟁방법으로 개학하는 22일부터 9천 교조원은 일제히 연가 20일의 휴가 제출을 내어 20일 간의 휴학 방법을 택할 뿐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집단사퇴까지 할 것이라고 한다. 한편 도지사는 교직원 인사문제에 교조 측이 이의를 제출한다는 것은 직권의 침해라고 지적하고 극구 교조 측을 비난했다.

8월 23일 출범한 장면 정권은 교원노조 합법화 문제에 관해서는 법원의 판결을 기다리겠다면서 신고필증을 배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민주당 정부는 교원의 노동조합 결성은 인정하지 않고 새로운 교원단체 창립을 허용하는 ‘교원단체법안’을 마련하기 위한 논의와 준비를 계속했다. 교원들의 단결권은 일부 인정하지만 단체교섭권은 크게 제약하는 법을 만들어 교원노조운동을 약화시키겠다는 의도였다.

9월 13일 민주당 구파였던 곽태진 등 의원 16명이 교원노조를 원천적으로 불법화하는 내용의 노동조합법 개정안을 민의원에 제출했다. 노동조합법 제6조의 노조 결성 제한 항목에 ‘교육공무원’을 추가해서 교원노조 결성 자체를 완전히 불법화하겠다는 것이었다.

교원노조는 9월 26일 경북교원노조를 시작으로 ‘노동조합법 개악’을 반대하는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단식농성 사흘째인 28일부터 교사들이 교단에서 잇달아 쓰러지자 29일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이 교원노조 합법화투쟁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였다. 28일에는 서울 사직공원에서 교원노조 불법화 반대 전국대표자대회가 열렸다. 경남교원노조연합회원 880명, 경북교원노조연합회원 515명 등 전국 여러 곳에서 온 조합원들과 서울시내 조합원 등 2천여 명이 그 대회에 참가했다.

동아일보는 9월 27일자 석간 3면에 「교조 불법화 반대 / 부산·대구에서 단식농성」이라는 기사를 4단으로 실었다.

  지난 13일 민의원 곽태진 의원(고령)의 ‘교조’ 불법화를 규정하는 노동조합법 제6조 단서조항 삽입 제안에 반기를 든 교원노조원들의 결의대회가 26일 하오 대구와 부산 두 군데에서 열려 또 다시 파란이 예상되고 있다.
  대회에 참가한 교조원들은 곽 의원의 제안이 철회될 때까지 극한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하고 즉각 행동으로 돌입, 사태는 험악해져 가고 있다.
  [대구 발] 극한투쟁으로 전국적 투쟁 기록을 세운 바 있는 ‘경북 교조’는 또 다시 26일 하오 5시30분부터 대구역전 광장에서 ‘노동조합법 개악 반대’ 단식농성투쟁 결행 선언대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노조법 개악안을 철회하라” “근로3권을 달라”고 한 플래카드를 내걸고 1천5백여 명의 교사와 5백여 일반 시민이 참석했다. 이들은 노조개악법안을 폐기하고 9인위원회를 해산할 때까지 단식이든 아사이든 유혈이든 수단을 가리지 않고 목적 관철을 위해 결사 투쟁하겠다는 결의를 천명하였다.
  한편 이 자리에 참석한 대구시내 초·중·고 교조원 2천여 명은 이날 저녁식사를 마치고 밤 11시까지 각기 침구를 갖고 학교로 나가 직원실에서 철야농성에 돌입하였다.

동아일보는 9월 28일자 석간 3면에 교원노조원들의 단식투쟁에 관한 속보를 4단으로 내보냈다. 기사 제목은 「심각해진 교단의 단식투쟁 / 졸도자·병자 속출 / 학생들은 딱해서 못 배우겠다고」였다. 이렇게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데도 동아일보는 사설이나 시론을 통해 그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교원노조는 1960년 9월 14일 보건사회부장관을 상대로 ‘노동조합 설립신고 각하처분 취소 청구소송’을 서울고등법원 특별부에 냈다. 그리고 1961년 들어 신고필증을 교부하고 합법성을 인정하라는 투쟁을 계속했다. 2월 11일 다양한 사회단체로 구성된 교원노조지원투쟁위원회는 전국적 연대투쟁을 도왔다.

  교원노조가 제기한 소송은 계속 지체되다가 선고공판을 3일 앞둔 1961년 4월 23일 정부 측에서 교원노조의 설립신고를 각하처분한 조치를 취소하겠다고 하여, 피고 측이 소송을 취하하는 해괴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법원 판결이 정부 측에 불리하게 날 것으로 예상되자 민주당 정부가 소송을 포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판술 보건사회부장관은 계속 교원노조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발언했고, 5·16 쿠데타가 발생할 때까지 끝내 신고필증은 교부되지 않았다. 결국 5·16 쿠데타가 발생하여 교원노조는 탄압을 받아 해체되었다(같은 책, 267쪽).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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