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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혁명에 재를 뿌린 허정 과도정부동아일보 대해부 2권 - 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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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2.22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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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27일 대통령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했다. 1954년에 ‘사사오입’으로 개정된 헌법에는 대통령의 자리가 비면 부통령이 승계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장면이 4월 23일 부통령직을 사임했으므로 외무부장관으로서 수석 국무위위원인 허정이 내각 수반을 맡게 되었다.

과도정부 수반이 된 허정은 4월 28일 외무·내무·법무 3부를 제외한 9부 장관 가운데 6부 장관을 임명했다. 허정 과도정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외무-허정, 내무-이호, 재무-윤호병, 법무-권승렬, 문교-이병도, 농림-미정(未定), 부흥-전예용, 농림-미정, 상공-전택보, 보사-김성진, 교통-석상옥, 체신-미정

1948년 10월 이승만이 교통부장관으로 임명한 허정은 그와 오랜 인연을 맺은 측근으로서 이승만 정부에서 그 뒤 사회부장관, 국무총리 서리, 서울특별시장 등을 지냈다.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4월 28일 대법원장 조용순이 사표를 냈다. 그는 3·15 부정선거 직후 이승만과 이기붕을 찾아가서 축하인사를 할 정도로 ‘어용적인 법조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허정은 조용순에게 ‘번의’를 요청하면서 사표를 반려했다. 허정은 5월 3일 5개 항목의 ‘시정방침’을 발표했다.

  1)현 정부는 과거보다도 일층 더 견실하고도 확고하게 반공산주의 정책을 전진시킬 것이다. 허장성세하는 반공의 물질적 정신적 낭비를 없애고 이것을 유효하고 구체적인 대공(對共) 방위체제를 확립하는 데로 돌려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을 내용이 충실하고 자유가 충만한 반공보루로 만드는 것이 정부와 국민의 우선적 과업이다.
  2)부정선거의 처리에 있어 처벌의 대상은 부정을 강요한 고위 책임자와 국민에게 잔학행위를 한 사람에게만 국한될 것이다. 전단(專斷)정책을 후속(後續)함에 있어서 강압과 폭력으로 제정된 법률들을 폐기하고 또 불법적인 일체 행위를 봉쇄하는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단행하려 하는 것이다.
  작금 정부 각 기관, 사회단체 또는 학원 등에서의 결의 사태(沙汰)와 그러한 압력에 의해서 발생하는 기관 간부들의 사직 사태는 정치, 경제, 사회 활동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진공상태를 초래함으로써 금반 개변(改變)의 성과를 파괴하고 국가를 위기에 몰아넣을 우려가 있는 것이다.
  3)현재 오열의 적발 및 침입 방지와 치안 회복을 위해서 모든 필요한 조치가 급속히 진행 중이니 모든 관민들은 동요하지 말고 각자의 직책에 전심전력을 해야 할 것이다.
  4)한미관계 및 미국의 경제원조를 국내의 집권자 또는 그가 속하는 정당에 유리하도록 왜곡 악용하는 일이 없이 긴밀 성실히 협조하는 토대 위에 올려놓을 것이다.
  5)현 정부는 한국의 맹방들에 대한 종래의 우호태도를 일층 강화할 뿐 아니라 비공산 인방(隣邦)과의 관계를 시급히 조정하는 데 진력할 것이다. 특히 한·일관계의 정상화는 가장 중요한 외교문제의 현안인 바 정부는 회담 재개에 앞서 양국의 이해 증진에 일조가 되도록 약간 명의 일본 신문기자의 입국을 허할 방침이다.

허정이 발표한 ‘5개 시정방침’의 핵심은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단행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었을 뿐 아니라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사임한 지 한 주 만에 나온 과도정부의 정책이 4월 혁명의 성과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뜨거운 반론을 일으켰다. 실제로 허정 과도정부는 1960년 8월 23일 장면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4개월 가까이 그런 정책을 밀고나갔다.

허정은 5개 시정방침의 첫 번째 항목으로 “반공정책을 한층 강화한다”는 것을 내세웠다. 이승만 정권이 ‘북진통일’과 ‘멸공통일’의 외길로 치달아 왔는데 반공정책을 강화하겠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이었을까? 이승만의 유아독존적 반공정책을 반대해온 미국을 향해 허정 과도정부가 ‘온건한 반공정책’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메시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정방침 세 번째 항목인 ‘한·일관계 정상화’는 한국을 동아시아의 ‘반공 교두보’로 삼고 일본을 적극적 협력자로 만들어 미국, 한국, 일본의 삼각동맹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한·일관계 정상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는 미국의 확고한 정책에 허정 과도정부가 ‘화답’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과도정부 비판한 동아일보 기사

동아일보는 5월 4일자 석간 1면 머리에 허정 과도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를 올렸다.

  과도정부에 비난 노골화 / 정계, 허정 씨의 무원칙한 시국 수습책 지적 / 인사방침에 불만 집중 / 자유당계 인사 계속 등용에 의혹

  최근 정계에는 허정 씨가 영도하는 과도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가 차츰 노골화하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막연하게 고개를 들기 시작한 동 비판적인 태도는 주로 허 수석국무위원 자신이 최근 국무회의에서 수립한 비상시국수습책이 무원칙하였다는 사실과 최근에 계속 발령되고 있는 정부 인사 등에 집중되고 있다. 과도국무원 조각과 지방장관들의 경질에 대하여서도 전적인 지지의 태도를 표시하지 않고 있는 옵저버들은 허정 씨가 3개월간의 과도기 동안 무난하게 혼란으로부터 질서를 회복하여 비상시국을 타고 넘게 될 것인지에 큰 의혹을 표명하였다. (·····)
  국무원 구성에 있어서 허정 씨는 자유당의 당적을 가지고 있는 인사를 계속 등용함으로써 당적을 갖지 않은 무색투명한 인사를 선택하겠다던 자신의 약속을 어겼다.

허정의 인사는 처음부터 4월 혁명에 재를 뿌리는 방향으로 ‘직진’했다.

  (···) 국무원 구성에 처음부터 자유당 당적을 가진 자를 기용한 것이나, 각 부 차관급 및 지방장관, 경찰국장, 정부 산하 관서장에 아부파들이 상당수 발탁되고 승진한 것이 비판의 대상이었다. 특히 제2차 마산 시위와 4·19 봉기 유혈진압에 대해 책임이 있는 이동환 내무부차관과 조인구 치안국장이 유임된 것이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4월 혁명 후 처음 있은 5월 3일 경찰 인사도 문제였다. 경찰은 이승만 정권의 악정과 3·15 부정선거 등 여러 선거 부정의 하수인이어서 신중히 인사를 했어야 했는데, 각도 경찰국장과 경무관급 인사에서 발포 명령자 등 악질적인 행위를 한 경찰을 기용한 것이다. 이는 민심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처사로서 악감을 샀다. 다음날 이호 내무부장관은 전날의 인사를 취소했지만, 5월 6일 내무부는 서울시경국장을 유임시켰고, 취소된 경무관 인사 중 3명을 그대로 재임용했다. 여론이 비등하자 김창숙, 이강, 김병로, 신숙 등으로 구성된 ‘국민각계 비상대책위원회’ 지도위원은 5월 6일, 시국수습책으로 1)과도정부 개편 2)현 경찰 간부와 모든 공무원의 승진을 중지하고 일제 잔재 경찰을 재등용하지 말 것 3)친일파 및 이승만 정권 아부파를 과도정부의 모든 기구에서 제거, 숙정할 것 4)공명선거를 방해한 법령을 즉시 철폐할 것 5)자유당 및 자유당 산하 사이비 애국단체를 불법화하여 즉시 해체할 것 등 5개항을 제시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164쪽).


처단해야 할 이승만을 해외로 도피시킨 허정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4월 혁명의 주역인 학생들과 시민들은 당연히 “부정선거 원흉을 처단하라”고 요구했다.

  어용신문으로 3·4월 항쟁에서 분노의 표적이었던 서울신문은 4월 28일 자진 휴간했다. 이날 한희석 ‘자유당 정부통령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 최인규 전 내무부장관, 이강학 전 치안국장 등에 대해 체포령이 내려졌다. 4월 29일 서울지검에 자진 출두한 최인규와 서울신문사 사장 손도심이 의원직  사임서를 제출했다. 5월 3일 최인규가 정식 구속되었고, 다음날에는 이강학이 구속되었다. 5월 7일에는 한희석이 자수해 모든 부정은 자유당 당무회의에서 결정했다고 진술했다. (···) 정부 내에서 부정선거를 지도한 것은 최인규, 홍진기(당시 법무부장관), 김정렬(당시 국방부장관) 등 6명의 국무위원으로 구성된 6인위원회인 것으로 밝혀졌다. 자유당 기획위원 등이 구속될 것으로 예상되자 자유당은 수사에 반발해 5월 13일 의원총회를 열어 의원 총사퇴 불사 결의를 했다. 5월 18일을 전후해 송인상(당시 재무부장관), 홍진기, 자유당 간부 이중재와 정기섭 등이 구속되었다. 5월 23일 자유당 강경파인 장경근, 박만원과 유각경이 구속되었고, 이재학, 임철호 등 6명의 자유당 간부에 대한 구속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이때 국회에서 파란이 일어났다. 이재학을 구제하려는 민주당 구파의 주장으로 24일 개별 표결에 부친 결과 자유당 원내총무였던 박용익 의원 구속동의 안만이 통과된 것이다. 이에 여론이 들끓었고, 6 의원이 의원직을 사퇴함으로써 사태가 수습되었다. 이로써 5월 28일까지 자유당 기획위원 전원이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1959년 3월에 국무위원들로 6인위원회를 구성하고 최인규를 내무부장관에 임명하는 등 사실상 3·15 부정선거를 총지휘한 이승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정의 권유로 4월 28일 경무대에서 이화장으로 옮긴 이승만은 부정선거 원흉들이 구속되자 좌불안석이었다. 그는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제일 먼저 피신한 바 있었다(같은 책, 165~166쪽).

  동아일보 5월 30일자 석간 1면 머리에는 「이승만 박사 부처 미국으로 망명」이라는 기사가 크게 나왔다.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이승만 박사는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29일 상오 CAT 항공기(B-1) 004호 쌍발 편으로 김포공항을 출발, 하와이의 호놀룰루시로 향함으로써 다시 조국을 떠난 망명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동 출발에 앞서 이 박사 부처는 28일 상오 정식으로 주한미대사관에 대하여 미국으로의 입국사증을 발급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미대사관은 동일 하오에 입국사증을 발급하였다고 동 대사관 마셜 그린 참사관은 언명하였다. 28일에 과도정부 외무부에서는 이 박사 부처의 여권 발급 사무를 하루 동안에 완료해버렸으며 이 박사의 미국 망명을 둘러싸고 주한미대사 매카나기 씨와 허정 수석국무위원은 근 2주일간 극비리에 접촉을 추진하여 왔었다. (·····)
  이날 이 박사가 망명길을 떠나는 김포공항에는 허정 수석국무위원과 이수영 외무차관만이 전송을 나와 비행기에 올라타는 이 박사 부처와 악수를 교환하였다. 허 장관에 의하면 이 박사의 이때의 모습은 평상시와 다름없었다고 하며 마지막 고별인사를 할 때 이 박사는 격앙된 감개무량한 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듯하였다고 한다.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려고 이날 상오 6시 45분 이화장을 그의 승용차로 출발하면서 이 박사는 이화장 관리인들과 경호원들에게 “집들을 잘 보라”는 한 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동아일보는 이 기사 바로 옆에 「이 박사의 망명」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 부처는 29일 이른 아침 표연히 망명의 길을 떠났다. (···)
  두말 할 것도 없이 4·26 혁명 성취와 함께 이 박사의 하야는 10유2년 동안 자유당 정권 아래서 신음하던 국민들에게 얼마만치 진통제적 안도감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가 하야성명을 한 뒤 경무대로부터 이화장으로 우거(寓居)를 옮긴 이래 오늘에 이르는 월여 동안, 그의 노후를 편안히 주접(住接)케 한 것도 실상인즉 우리 국민들의 금도(襟度)가 그만치 관대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국민 가운데엔 대다수가 다년간 독재·폭정으로 일관한 그를 그렇듯 관용한다는 것은 유혈혁명의 의의를 흐리게 하는 것이라고까지 극단론을 주장하는 여론이 드높던 차에, 그가 타의에서거나 자의에서거나 간에 악의 씨를 뿌릴 대로 뿌려 병균이 만연될 대로 된 이 땅을 떠났다는 것은, 어느 의미로 보나 불행 중 다행하다고도 볼 수 있다.
  더더구나 이 박사 같이 죄과가 심중한 위험인물을 둘러싸고, 아직껏 몰지각한 일부 정상배가 ‘복고(復古)’ 망계(妄計)에 사로잡혀, 세간에 훤소(喧騷)한 잡음을 퍼뜨리고 있던 차에 늦게나마 망명을 하고 말았다는 것은 주언(做言)·부어(浮語)를 일소하는 데도 하나의 소독제가 되었다고 할만하다.
  이 박사 그는, 이미 조국을 하직하고 망명의 길에 오른 사람, 그를 상대로 우리가 여기서 새삼스레 전비(前非)와 구악을 추궁한다는 것은 마치 ‘부관참시’와도 같기에 더 이상 추궁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비록 이 박사가 이 나라를 떠났다 할지라도, 그가 집권 중에 저질러 놓은 모든 죄악은 ‘망명’ 그것만으로 결코 속죄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지금 부정선거를 비롯해서 김구 씨 등 살해 사건, 거창양민대량학살사건, 장 부통령 저격사건, 조·장 양 박사의 대통령암살음모조작사건 등등에 이르기까지 숱하게 묵은 죄상이 새록새록 노출되는 데 대해서, 그 최종적 책임은 이 박사 그에게 묻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그 이유를 따지자면, 두말 할 것도 없이 ‘대통령책임제’ 아래서의 집권·통치자였던 이 박사 그 사람에게 정치적 내지 법적 책임을 따지고 들어가지 않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은 그가 아무리 자기가 모르는 가운데 그를 포위한 자유당 악질 도배의 소행이었다고 전가한다 하더라도 도저히 면책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사설은 앞과 뒤가 맞지 않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설의 앞부분에서는 이승만이 “타의에서거나 자의에서거나 간에 악의 씨를 뿌릴 대로 뿌려 병균이 만연될 대로 만연된 이 땅을 떠났다는 것은, 어느 의미로 보나 불행 중 다행하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를 하고 있다. 무엇이 ‘불행 중 다행’이라는 뜻인가? 그 ‘해답’은 곧 이어 나온다. “몰지각한 일부 정상배가 복고 망계에 사로잡혀” 온갖 잡음을 퍼뜨리고 있는 판에 그가 ‘망명’을 떠나버렸으니 유언비어가 ‘일소’되었으므로 ‘다행’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리야말로 4월 혁명의 이념과 본질을 완전히 망각한 치졸한 ‘애국심’에 불과하다.

동아일보 사설은 이승만의 망명(실질적으로는 해외 도피)은 다행이라고 서둘러 결론을 내려놓고 나서 뒷부분에서는 김구 암살사건을 비롯한 여러 가지 죄상에 대한 최종적 책임을 그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실정법으로 엄중한 처단을 받아야 할 ‘국사범’이 나라 밖으로 달아나버린 사건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그에게 최종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비논리의 ‘극치’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재직 당시의 모든 죄과에 대해 사임 뒤에 마땅히 정식 재판을 받아야 했다. 허정 과도정부가 그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결과 이승만은 극우보수세력의 ‘국부’ 또는 ‘영웅’으로 부활해서 21세기에 들어선지 15년이 가까워지는 시점에도 그 세력의 추앙을 받고 있다.

이승만이 갑자기 한국을 떠난 사건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는 과도정부 수반 허정과 주한미국대사 매카나기가 ‘야합’해서 그를 하와이로 도피시켰다는 사실이다. 허정은 이승만의 정치적 제자이자 측근이라는 인연을 떠나 과도정부 수반으로서, 3·15 부정선거를 비롯해서 그가 12년 동안 저지른 악정과 학정 등 민주주의 파괴의 책임을 물었어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정식으로 수립될 새 정부에 그 과제를 넘길 때까지 이승만의 신병을 확보하고 있어야 했다.

허정의 월권 또는 직무유기에 못지않게 심각한 것은 주한미국대사가 4월 혁명의 심판을 받아야 할 ‘국사범’ 이승만의 해외도피를 방조하거나 허정과 함께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내정 간섭이 분명하다. 그런데 동아일보 사설은 이런 점을 전혀 지적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의 요양병원에서 병사한 뒤 7월 27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한편 허정은 6월 2일 부정선거 원흉 처벌은 관대히 하겠으며 더 이상의 검거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언론에는 “불과 기십 명의 원흉이 검거되고 1백여 명이 도태되었을 뿐인데, 부정선거를 자행한 일선 책임자들은 거의 모두 승진하거나 영전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부정축재자 처벌에 소극적인 과도정부

부정선거 처리에 버금가는 과도정부의 과제는 부정축재자 처벌이었다. 당시 재벌이나 대기업은 이승만 정권과 결탁하거나 권력의 비호를 받지 못하면 부를 쌓을 수가 없었다.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던 대다수 국민은 4월 혁명 뒤에도 ‘건재’하는 부정축재자들을 응징하지 않는 허정 과도정부를 비난했다.

허정 과도정부는 6월 1일부터 20일까지 부정축재 자수기간을 두었다. 동아일보는 6월 9일자 1면 사설(「다시는 불법축재 없도록」)을 통해 과도정부가 부정축재 문제를 미온적으로 다루는 것을 비판했다.

  불법축재를 국가에 환원시키겠다고 한 허 수석의 특별성명 이래, 불법축재의 색출과 그 처단 한계에 관하여는 관계당국뿐만 아니라 전 국민들의 논의의 적(的)이 되어 있거니와, 이 과업은 4월 혁명을 기점으로 한 정치혁명과 병행시켜야 할 경제혁명의 일환으로서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특별한 노력이 요청되고 있음은 이미 지적된 바 있는 만큼 불법축재 색출에 대한 관계당국의 태도와 불법축재처벌임시조치법안에 관해서 한 마디를 아낄 수 없다.
  불법축재에 대한 환원조치를 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강조할 필요를 느끼지 않거니와, 그러나 관계당국자들의 태도를 살필 때 환원조치를 할 의사가 있는지조차 의심되는 점이 없다 할 수 없는 것은 유감이다. 즉, 작일 재무부 당국자가 재확인한 바 “과도정부의 불법축재 환원조치는 탈세 및 각종 국세와 귀속재산 불하대금의 체납 등 현행법으로써 처벌 가능한 것에만 국한할 것이며, 정치적으로 볼 때에는 부정축재의 대상이 될 수 있어도, 현행법상으로는 형식상 적법 절차를 밟고 있는 은행귀속주 불하대금 납부 기일 연장 등에 대하여는 손을 대지 않을 방침”이라고 한 것은 의심의 대상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
  이러한 당국자의 발언은 불법축재에 대해서 관계당국이 과연 성의를 가지고 있는지를 의심케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음에 문제를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불법축재에 관해서 불법축재한 자들로 하여금 자진 신고케 한 사실에 대해서다. 즉, 탈세 같은 것은 세법이 비현실적으로 높았기 때문에 탈세하지 않는 자가 태무한 실정이어서, 이 문제를 옳게 다루려고 한다면 ‘5년간 탈세액이 얼마 이상’이라는 한계가 명시되지 않고 있으므로, 1억 환을 포탈한 자도, 1만 환을 탈세한 자도 모두가 신고케 된 것이니, 실지로는 한 명도 신고해 올 자가 없도록 만들어졌다고 해서 무방할 것이다. 여기에 불법축재자를 들추는 데 있어서 그 한계가 문제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다시 말하면, 큰 고기만 잡으라는 말인데, 50만 환짜리 대지도, 1백만 환짜리 가옥도 일일이 뒤지자고 한다면 관계관청의 공무 집행력을 그리로 총집중시켜서 다른 일은 하지 않고 몇 해를 지낸다 하더라도 될 수 없는 일일뿐만 아니라,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을 일으켜서 4월 혁명의 피를 헛되게 할 걱정조차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적은 귀재(歸財)라 하더라도 악질적인 불법불하는 이 역시 환원조치를 않아서는 안 될 것도 물론이다.

장면 정부가 수립된 뒤인 8월 31일에야 비로소 재무부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부정축재한 4명 46개 업체에 대해 5년간의 탈세액 109억 환과 그중 최근 2년간의 탈세액에 대한 벌과금 87억 환 등 총 196억 환을 국가에 환원하라고 통고했다.

  허정 과도정권이 이승만 체제를 청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허정은 이승만이 가장 신뢰한 측근의 한 사람이었고, 과도정부의 관리나 경찰, 판검사는 거의 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복무했던 자들이었다. 허정은 부정축재자와 부정선거 원흉을 미온적으로 처리해 그들로 하여금 증거를 인멸하고 재산을 도피할 기회를 주었을 뿐 아니라 시민들의 혁명전신을 냉각시켰다. 그는 부패한 군 고위 지휘관을 숙정하지 않았고, 경관은 자리바꿈만 했으며, 부정공무원을 그대로 눌러 앉혔다. 그렇지만 권력에 대한 미련을 갖지 않고 3개월여 동안 관리내각을 지키고 별 무리 없이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한 것은 평가할 만하다(같은 책, 167쪽).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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