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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혁명(2)동아일보 대해부 2권 - 23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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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2.1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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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 고려대생 시위와 정치깡패들의 습격

고려대 학생위원회는 4월 18일 오전 12시 50분, 신입생환영회를 연다는 구실로 3천여 명의 학생을 교내 김성수 동상 앞에 모이게 했다. 학생대표가 그 자리에서 ‘4·18 선언문’을 낭독했다.

  친애하는 고려대 학생 제군, 한 마디로 대학은 반항과 자유의 표상이다. 이제 질식할 듯한 기성 독재의 최후적 발악은 바야흐로 전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고 있다. 우리들 청년학도는 이 이상 역류하는 피의 분노를 억제할 수 없다. 우리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 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여 총궐기하자. (···) 만약 이 같은 극단의 악덕과 패륜을 포용하고 있는 이 탁류의 역사를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후세의 영원한 저주를 면치 못하리라. (···) 우리 고대는 과거 일제하에는 항일투쟁의 총본산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사수하기 위하여 멸공전선의 전위적 대열에 섰으나, 오늘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한 반항의 봉화를 높이 들어야겠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권>, 25쪽).

오후 1시 20분경 고려대 학생들은 “기성세대는 각성하라” “마산사건의 책임자를 즉시 처단하라” “경찰의 학원 출입을 금하라” 등 구호를 외친 뒤 “민주역적 몰아내자” “자유 정의 진리 드높이자”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나섰다. 그들은 안암동 로터리 입구와 신설동 대광고 앞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아 흩어졌다. 그 과정에서 학생 9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다시 모인 학생 1천여 명은 오후 2시20분경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해 연좌데모를 하면서 경찰의 학원 개입 중지와 대통령이나 내무부장관의 부정선거 해명, 그리고 정부통령선거 재실시를 요구했다.
오후 4시쯤 고려대 총장 유진오가 현장에 와서 해산하라고 종용하자 학생들은 연행된 학생들의 석방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오후 6시경 내무부장관 홍진기의 지시로 학생들이 풀려나자 연좌데모를 하던 학생들은 6시 40분경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고려대생들의 귀교 행렬이 을지로에서 종로 4가 쪽으로 빠지려고 천일백화점 앞에 이르렀을 때, 쇠갈고리와 곡괭이, 쇠사슬 등으로 무장한 정치깡패 1백여 명이 그들을 습격했다. 그때가 7시 40분경이었다.
깡패들은 반공청년단(단장 신도환) 종로구단(단장 임화수) 특별단부와 화랑동지회(회장 유지광) 소속이었다. 그들의 공격으로 행렬의 선두에 섰던 학생들과 그 뒤를 따르던 기자 등 50여 명이 다쳤다. 정치깡패들은 당시 경무대 경호실장이나 다름없던 경무관 곽영주와 연결된 자들이었다.
4월 19일 아침 일부 조간신문에는 정치깡패들에게 폭행을 당해 피투성이가 된 고려대 학생들의 사진과 함께 의사당 앞 연좌데모와 귀교 중 피습에 관한 기사가 상세히 실려 있었다. 나중에 오보(誤報)로 밝혀졌지만 동아일보 3면에 나온 「고려대생 1명 피살」이라는 4단 제목의 기사는 이승만 독재대한 국민들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혁명의 날 4월 19일

서울대, 연세대, 동국대, 성균관대를 비롯한 서울시내 10여 개 대학 학생들은 4월 21일에 일제히 데모를 하기로 약속한 바 있었다. 그러나 정치깡패들이 고려대 학생들을 습격했다는 보도를 본 다른 대학 학생들은 19일 오전에 집회를 열고 거리로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1960년 4월 19일 오전 8시 50분, 서울대 문리대 게시판에 격문이 나붙었다. 문리대와 이웃한 법대, 미대, 교양과정부, 의대, 약대, 치대, 수의대 등 각 단과대학 게시판에도 똑같은 격문이 일제히 나붙었다. 교정에 있던 학생들이 격문에 시선을 쏟고 있을 때, 종로 5가 쪽에서 한 무리의 고등학생 데모대가 함성을 지르며 동숭동 쪽으로 몰려왔다. 오전 8시50분경 교문을 박차고 나온 신설동의 대광고생 1천여 명이 경찰 저지선에 부딪혀 종로 5가에서 혜화동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고등학생들의 함성이 신호이기라도 한 듯 문리대생들은 마로니에광장으로 우르르 모여들었다. 미리 준비된 선언문, 격문, 구호 등의 유인물이 배부되었다.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역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써, 이성과 진리 그리고 자유의 대학정신을 현실의 참담한 박토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로 시작되는 이 선언문에서는 “한국의 일천한 대학사가 적색전제에의 과감한 투쟁에 거획(巨劃)을 장(掌)하고 있는 데 크나큰 자부를 느끼는 것과 똑같은 논리의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전제에의 항의를 가장 높은 영광으로 우리는 자부한다”라고 투쟁에 나선 대의를 밝혔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126쪽)

서울대 문리대를 비롯한 단과대 학생들이 교문을 나서기 직전, 혜화동의 동성고 학생 5백여명이 “민주주의 사수하자”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교사 30여 명의 ‘엄호’를 받으면서 문리대 정문을 지나 종로 5가 쪽으로 치달았다. 9시 20분경 문리대 학생 2백여 명이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 “대한민국 생명선이 대법원에 달려 있다” 등이 쓰여 있는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나서자 그 뒤를 이어 법대, 미대, 약대, 수의대, 치과대 학생들이 데모에 나섰다. 3천명 남짓이 된 서울대 데모대는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태평로 국회의사당으로 달렸다. 11시 40분경 의사당 앞에는 서울대 사대, 상대, 문리대, 법대, 미대 학생들과 고려대, 건국대, 동국대, 성균관대의 학생 1만5천여 명이 모여 있었다.
서울대 학생들이 토론회를 하는 것을 본 동국대 학생 2천여 명은 “경무대로 가자”고 외치면서 중앙청(현재 경복궁 자리) 쪽으로 달려갔다. 그 뒤를 동성고, 성균관대, 서울대 사대 학생들이 따라갔다.  서울시내 데모 군중의 수가 10만 명을 넘어선 오후 1시 5분경 동국대를 선두로 한 학생 데모대는 효자동 전차종점을 지나 경무대 들머리로 향했다. 경찰은 경무대 정문에서 가까운 언덕길 중간에 최후 저지선을 펼치고 있었다. 

  오후 1시 40분, 소방차를 앞세운 데모대와 경찰의 간격이 10여 미터로 좁혀졌을 때 경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삽시간에 경무대 어귀는 수라장이 되고, 길에는 7~8 구의 시체가 나뒹굴었다. 경찰의 무차별 총격에 쫓긴 데모대는 잠시 후 동국대생을 선두로 대열을 정비하고 다시 경무대 어귀로 육박하였다. (···) 죽음을 각오한 (동성고) 학생들의 대열에 새로 도착한 연세대 데모대가 합류하였다. 경찰은 계속 총격을 퍼부었다. 이처럼 경무대를 향한 죽음의 행렬은 오후 5시 경찰이 시내 일원에 걸쳐 소탕전을 개시할 때까지 계속되었다(같은 책, 129쪽).

이것이 나중에 ‘발포 명령’ 책임자가 누구인지를 밝혀내는 작업의 핵심이 된 4월 19일 최초의 총격사건이었다.


비상계엄으로 ‘벽돌신문’이 된 동아일보

두 차례에 걸친 마산 항쟁에서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면서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요구한 시위의 주동세력은 시민과 고등학생이었다. 그런데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먼저 데모에 나선 데 이어 19일에는 전국의 여러 대학과 고등학교에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가 봇물처럼 터져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동아일보는 4월 19일자 석간 1면 머리에 「부정선거 규탄 학생 데모 전국에 확대」라는 기사를 올리고 그 옆에 「강경일로책은 사태를 악화」라는 사설을 실었다.

  정부의 비위불법을 규탄하고 , 빼앗긴 자유와 권리를 다시 찾기 위한 민권운동은 학생 데모 혹은 대중 데모의 형식으로 전국적으로 파급할 기세를 보이고 있다. 그중에서도 지난 18일 서울과 부산에서 일어난  학생 데모는 대규모적이었던 것이니 서울 데모에 있어서 대학생이 처음으로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시위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시사하는 것으로 주목을 요한다.
  이 자유·민권운동이 근본적으로는 자유당 정부의 실정의 누적과 그 가혹한 민권탄압정책의 반박인 동시에, 3·15 부정·불법선거를 규탄하기 위한 운동이요 가까이는 제1 마산 사건 및 제2 마산 사건에서 정부가 보여준 민중 적대시 정책과 야수적인 보복정책에 대한 국민대중의 참을 수 없는 분노의 표지라고 볼 수 있다. 이 대중운동의 성격이 그러하고, 그 운동의 형식이 평화·합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 당국이 이를 적색으로 몰아 그 여지없이 실추된 위신을 회복코자 하고 협박·공갈에 가득한 강압정책을 가지고 이를 유린코자 한다는 것은 심히 유감된 일이라 아니할 수 없으니 이 점 우리는 여당과 정부에 대해 몇 가지 경고 및 충고를 솔직히 발해둘 필요를 느끼는 바이다.
  (···) 자유와 권리를 찾기 위한 국민대중의 집결·조직화를 무엇보다도 겁내는 자유당 정부는 이 기본자유 중의 기본자유를 침해함으로써 부정·불법사태를 기정사실화하여 간신히 정권을 붙잡아 왔지만, 이것이 위헌·위법적인 처사로서 심히 부당한 일임은 물론이려니와 민중운동을 분산화하여 각개격파로써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시기는 아마도 이미 지나갔을 것이다. 평화적인 집회와 시위가 평화와 질서를 존중하는 한 경찰은 이를 제지할 하등의 정당한 법적 권한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니, 경찰은 평화적 시위에 대한 폭력적인 강압책과 발포·살인정책이 군중을 자극하여 마산 사건과 같은 비극적인 불상사를 일으켰고 또 오늘과 같이 험악한 시국을 조성하였다는 사실을 교훈 삼아 데모에 참가한 국민이나 이를 성원하는 국민에 대해 자극적인 언동을 일절 삼가고 질서 유지에만 주력해주어야 할 것이다. (·····)
  속고 또 속고 눌리고 또 눌렸던 대중의 에너지는 3·15를 계기로 분류(奔流)처럼 발산하기 시작한 것인데 시간과 흥분만 지나면 이 운동도 흐지부지 가라앉으리라는 안일한 사고방식과 낙관적인 기대는 아마도 현실적인 타당성을 갖지 못할 것이다. 민권운동을 적색운동과 억지로 관련시켜 이를 가혹히 탄압하려다가는 대중의 불만은 더 한층 격화할지니 정부나 여당의 지도자는 오늘의 위기가 무엇을 의미함인가 이를 직시하고 에누리 없이 평가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 사태 수습의 근본적인 방향이 무엇인가 엄중히 자성·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승만 정부는 4월 19일 오후 3시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나 학생과 시민의 데모는 더욱 거세어져 오후 4시경에는 시위대가 ‘자유당의 나팔수’였던 서울신문 사옥과 정치깡패들의 본거지였던 반공연맹 건물에 불을 질렀다.

  계엄령 선포와 함께 신문 검열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검열이라 해도 정세의 대세를 반영한 탓인지 웬만한 사태 보도 기사는 그대로 통과되었다. 오후 5시 계엄령은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지로 확대되었다. 오후 7시부터 새벽 5시까지 통행이 금지되었고 제15사단이 서울로 진주했다. 계엄사령부의 발표에 따르면, 19일 하루 동안에 발생한 사망자 수는 민간인 111명, 경찰 4명이었고, 부상자 수는 민간인 558명, 경찰 169명이었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권>, 28~29쪽).

4월 20일자 동아일보 석간은 계엄사의 검열 과정에서 글자 자체가 지워지거나 ‘벽돌장’처럼 깎여버린 부분이 1면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3면 머리기사(「서울에 밤 10시 기해 중무장군대 진주」)의 부제목에서는 「수십만 군중 하루 종일 데모」 가운데 ‘수십만’이 ‘수만’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3면 기사들의 여러 군데가 삭제되어 ‘반신불수’의 뉴스가 되고 말았다. 이런 현상은 비상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승만 하야를 재촉한 미국의 압력과 대학교수단 데모

4월 19일 밤 주한미국대사 월터 매카나기는 경무대로 가서 이승만을 만났다.

  국방부장관 김정렬과 법무부장관 홍진기가 배석한 자리에서 이승만은 “나는 선거부정에 대해 들은 바 없소. 내가 믿는 김 장관이나 홍 장관이 그럼 나에게 거짓말을 했거나, 아니면 이 사실을 숨겨왔다는 말인가요?”라고 말했다. 매카나기는 현 사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6월로 예정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방한 계획은 취소될 것이며 연간 2억~3억 달러에 달하는 미국의 대한 경제원조도 재검토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
  4월 21일 미 대사 매카나기는 다시 이승만을 찾았다. 외무장관 대리 최규하와 미국 부대사 마셜 그린이 배석한 자리에서 이승만은 여전히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한 주장을 되풀이했다. (·····)
  이에 매카나기는 이승만에게 장면과 천주교가 선동자가 아니라는 걸 납득시키려 했지만, 이승만은 흥분하면서 곧 장면의 음모에 대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매카나기는 갈수록 흥분하는 이승만에게 미 국무장관 허터의 각서를 읽어 내려갔다. 그 각서는 “미국은 데모가 민중의 분노의 반영이라고 믿는다”며 부정선거 철저 조사와 관련자 제거 등을 주문했다. 매카나기는 회담 후 국무부에 이승만이 위험할 정도로 정보에 어둡고 오보를 갖고 있으며, 그건 80대 후반의 나이 탓과 더불어 아첨을 잘 받아들이고 비판자의 동기를 의심하는 그의 ‘잘 알려진 편견’ 때문인 것 같다고 보고하였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권>, 29~30쪽).

비상계엄 때문에 주춤했던 데모는 4월 24일부터 다시 거세어졌다. 전주에서 3천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전북도청에 들어가 도지사에게 사표를 내라고 요구한 뒤 자유당 지부 사무실과 서울신문사 지국을 부쉈다.
동아일보는 비상계엄이 해제되기 직전에 발간된 4월 25일자 조간 1면의 사설(「자유당의 지연전술」)을 통해 이승만의 책임을 추궁했다.

  제1·2차 마산 사건과 4·19 학생 데모 사건의 형태로 폭발된, 현 집권세력에 대한 전 국민의 일대 반항은 국내외에 비상한 정치적 선풍을 일으켰고, 여사한 선풍에 압박감을 느끼고 당황하기 시작한 집권층에서는 뒤늦게나마 그 어떠한 정치적 배려와 구급 연명책을 강구하여 난국을 돌파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 같다. 작금 이 대통령이 구 관료 변 모, 허 모씨 등을 경무대로 초치하여 그들의 ‘직언’을 청취했다든가 이기붕 의장과 협의하고 동 씨의 부통령 당선을 자진 사퇴할 것을 ‘고려’하기로 했다든가 하는 등사(等事)와, “현 사태의 수습과 안정을 기하기 위하여 보수세력의 합동으로써 정당을 개편하고 내각책임제를 기조로 한 정치제도로 개혁”해보겠다는 담화를 이기붕 씨 자신이 발표하는가 하면, 이 대통령은 또한 자유당 총재를 사퇴하고 모든 정당관계를 떠나 ‘대통령에만 전념’하기로 했다고 보도되고 있는 등사는 모두 현 집권층의 초조한 구급 연명책의 일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 우리들 국민은 과거에서 현재에 이른 10여 년의 정치가 이 박사 1인에 의한 독재정치였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으며, 또 3·15 부정선거로 말하면 동 박사가 직접 지휘하거나 명령한 일은 없었다 할지라도 그러한 선거의 부정을 몰랐다거나 또는 알고도 제지하지 못했다는 데 대한 책임은 면할 길이 없다고 보지 아니 할 수 없다. 대통령 책임정치 하에서 대통령이 실정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면제될 수 있다는 사고방식처럼 위험한 사상은 없고 그러한 방식으로 이끌고자 하는 시국 수습책처럼 국민을 이중으로 우롱하는 술책은 다시 없다고 하겠다.
  (···) 이기붕 씨의 부통령 당선만을 사퇴케 함으로써 국민의 울분을 풀어보고자 하는 방식의 정국 안정 내지 시국 수습책도 우리로서는 수긍키 어렵다 함은 본란이 이미 강조한 바이다. 그러한 이 씨만의 ‘당선’ 사퇴는 3·15 부정선거를 합법시 하려는 데 첫째로 그 기만성이 있고, 지난번의 선거가 동시·동장소에서 동일한 기관과 동일한 수법에 의한 불법·부정선거였다는 사실을 은폐코자 하는 데에 그 둘째의 기만성을 엿볼 수가 있다. (·····)
  (···) 이 박사가 자유당의 당적을 떠나는 것은 그의 자유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당적 이탈이 민심 수습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 가 없다. 이 박사가 자유당 총재의 지위와 자격으로 독재를 해왔고 이 때문에 국민의 인기를 상실했다는 말인지, 또는 동 박사가 대통령으로서는 훌륭했지만 자유당 총재로서는 그렇지가 못했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 (·····)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박사와 이 의장 및 자유당 간부가 진심으로 시국을 수습하고 국민의 여론에 보답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긴급조치를 즉각 취해야 할 것이다. 즉, 하나는 중앙선거위원회로 하여금 3·15 정부통령선거를 취소하고 재선거를 공고케 하는 일, 둘은 3·15 부정선거를 지휘한 고위 책임자들을 체포 처단케 하는 일, 셋은 마산 사건과 4·19 사건의 관련자를 석방함과 동시에 고문경관을 색출하여 철저히 처벌하는 일이다.

4월 25일 오전 민주당 의원들이 국회에서 다수파인 자유당 의원들을 압박해서 비상계엄령 해제를 결의한 뒤 이승만 하야 권고 결의안을 제출했다. 같은 날 오후 3시경 서울대 의대 구내에 있는 교수회관에 대학교수들이 모였다. 이희승(서울대), 이종우(고려대), 정석해(연세대), 조윤제(성균관대) 등이 그날 모이기로 정한 것은 봉급날이라서 정보기관의 의혹을 사지않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모임을 주동한 교수들은 50~60 명이 나오리라고 예상했는데 의외로 250여 명이 참석했다.
오후 3시에 시작된 회의에서 임시의장에 정석해가 선출되었다. 이희승 등 9명이 시국선언문 기초위원으로 뽑혀 교수회관 별실에서 선언문을 작성했다. 오후 5시30분, 이승만의 대통령직 하야를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자 참석자 258명 전원이 서명했다.

  시국선언문 채택이 끝나 회의장 안이 잠시 웅성거릴 무렵, 동국대 교수 김 영달이 자리에서 일어나 “폐회하는 대로 데모합시다”라고 긴급동의를 냈다. 이 긴급동의가 박수로 채택되자 교수들은 바로 데모 준비에 들어갔다. 1960년 4월 25일 오후 5시50분, 교수들은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거리로 나섰다. 교수들이 “3·15 선거를 규탄한다” “이 대통령은 즉시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데모를 하자, 도서관과 연구실에 있던 학생들이 하나 둘 달려나와 스승들의 행렬 뒤를 말없이 따랐다. 질서정연한 데모 행렬이 종로 4가를 지날 무렵, 뒤따르는 학생과 시민들은 7천~8천 명을 넘어섰고,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 이르렀을 때는 1만 명을 헤아렸다. 하지만 계엄군이나 경찰의 제지는 없었다.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했을 때 시위대는 4만~5만 명으로 불어났다. 오후 6시 50분경, 교수단은 이날의 목표 지점인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하여 시국선언문을 다시 한 번 낭독 하고 만세삼창과 애국가를 부른 뒤 해산하였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139쪽).

당시 ‘상아탑’이라고 부르던 대학의 교수들이 무장한 군대와 경찰이 서슬 퍼렇게 지키고 있던 서울의 대로를 지나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한 것은 이승만과 자유당에게는 ‘최후의 일격’이나 다름없었다.
교수단 데모에 합세했던 군중은 그날 밤 늦게까지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다. 계엄군이 오후 8시경부터 최루탄를 발사했으나 그들은 “국군 만세”를 외치며 애국가를 불렀다. 방독면을 쓰고 있던 병사들은 끝내 그들과 함께 울어버렸다.
데모대의 일부는 서대문의 이기붕 집으로 몰려가서 경비실을 부수었다. 계엄군이 진압하러 달려왔지만 군중이 환호와 박수로 맞이하자 군인들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4월 26일 이른 아침부터 군중이 서울시내 중심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전 9시경에는 3만여 명이 세종로 일대에 들어찼고, 오전 10시경 경무대로 다가갈 때는 10만 명을 넘어섰다. 이승만과 자유당이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을 것은 물론이다.

  오전 9시 10분 매카나기는 국방장관 김정렬에게 전화를 걸어 사태가 매우 심각하므로 “즉시 이 대통령을 만나서 학생대표단 면담, 선거 재실시에 관련된 성명 발표, 이 대통령의 향후 정치적 역할에 대한 고려 등을 건의하라”고 말했다. 9시40분경 미 CIA 책임자 피어 드 실바도 김정렬에게 전화를 걸어 “이승만이 경무대와 한국을 떠나는 문제를 매카나기와 협의할 준비를 하라”고 촉구하며 “2시간 안에 총사퇴를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모두 죽게 될 것”이라고 사태의 심각성을 전했다. 김정렬은 “국민의 뜻이라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수 있다”는 내용을 포함한 4개 항의 대국민발표문을 기초해 이승만의 승인을 얻었으며, 이를 10시 15분에 매카나기에게 미리 알려주었다.
  매카나기가 유엔군사령관 카터 매그루더와 함께 경무대를 방문할 때에 라 디오에서는 이승만의 하야 성명이 발표되고 있었다. 이때가 오전 10시 30분 이었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권>, 33쪽).

4월 26일 오후 2시에 시작된 국회 본회의는 2시간에 걸쳐 격론을 벌인 끝에 “1)이 대통령은 즉시 하야할 것 2)3·15 부정선거는 무효로 하고 재선거를 실시할 것 3)과도내각 하에 완전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한다 4)개헌안 통과 후 민의원을 해산하고 즉시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결의했다. 이승만은 사임하기를 망설이다가 허정 등의 설득에 굴복해 27일 정오 공보실을 통해 사임서를 발표했다. “나 이승만은 국회의 결의를 존중하여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물러앉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나의 여생을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바치고자 하는 바이다.”

4월 28일 새벽 5시 40분경 경무대 별관 경비실 옆의 제36호 관사에서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렸다. 이승만의 양자이자 이기붕의 장남인 이강석이 두 자루의 권총으로 아버지, 어머니 박마리아, 동생 강욱을 차례로 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었다. 독재자 이승만의 후계자가 되려고 갖은 부정과 술수를 동원해 3·15 선거에서 부통령에 ‘당선’된 이기붕과 그 가족은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기붕과 가족이 세상을 등진 직후 이승만은 경무대를 떠나 이화장으로 갔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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