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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파동과 동아일보동아일보 대해부 2권 - 1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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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1.10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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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5월 2일 실시된 제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야당 입후보 방해, 경찰을 비롯한 관권의 개입 등 광범한 부정이 저질러졌는데도 자유당은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총의석 223석 가운데 과반수인 126석을 얻기는 했지만 정당별 득표에서는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했다. 게다가 수도서울에서는 16개 선거구 가운데 14개를 야당에 내주어야 했다.


위기의 자유당, 보안법 전면 개정 강행

총선이 끝난 뒤 야당이 부정선거 규탄운동을 치열하게 벌이자 당선무효 3건, 재선거 8건이라는 악재가 자유당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선거 결과는 자유당 정권에 대한 전반적인 민심의 이반을 말해주는 것이었으나 자유당의 위기는 이러한 정치적 현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경제적 빈곤과 침체 역시 그러한 위기를 가중시키고 있었다. (···) 미 국의 원조경제에 운명을 걸고 있었던 자유당 정권의 경제정책은 미국이 국제수지 적자에 따른 달러방위정책을 선언하고, 대폭적인 원조 삭감을 가하자 심각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
  또한 미군정 이래 이승만의 후견인격이었던 미국조차도 점차 이승만 정권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당시 대소 긴장완화와 한국·일본의 긴밀한 결합이라는 미국의 동북아전략에 이승만의 무모한 ‘북진통일론’과 고집스러운 반일정책이 장애가 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이와 같이 민심으로부터 이반당하고 사회경제적으로나 외교적으로도 궁지에 몰려 사면초가의 신세가 된 자유당 정권은 초조감과 위기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다가오는 1960년의 정부통령선거에서 패배할 것은 필지의 사실로 보였다.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라도 선거에서 승리하여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박원순, <국가보안법 연구 1>, 1989, 역사비평사, 134~135쪽).

자유당 정권은 차기 선거에서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켜야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려면 비상한 법과 장치가 필요했다. 야당의 활동을 원천적으로 규제하고 언론자유를 극도로 위축시키는 방안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유당은 국가보안법 전면 개정을 ‘최상의 방책’으로 여기고 공작에 착수했다.

1958년 6월 12일자 동아일보에는 법무부와 검찰당국이 국가보안법 개정안에 대한 최종 검토를 마쳤다는 내용이 보도되었다. 개정안은 8월 5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9일 국회에 제출되었다.

전문 42조와 부칙 2조로 이루어진 ‘신국가보안법안’의 내용은 기존의 보안법보다 훨씬 많은 독소조항들을 담고 있었다. 동아일보 8월 10일자 2면 <횡설수설>은 신국가보안법안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국가보안법을 다시 뜯어 고치겠다고 한다. 아니, 뜯어 고친다기보다도 전연 성격이 다른 것을 만들겠다고 한다. 현행 중의 국가보안법이 공산당만을 잡는 것인데 반하여 신국가보안법이라고 하는 것을 읽어보면 공산당이 아닌 자들도 공산당과 같이 처벌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까닭. 공산당이 아니더라도 파시스트 도배(徒輩)는 공산당이나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적이니까 공산당처럼 처벌한다고 해서 이상히 여길 수가 없겠으나, 틀림없는 민주주의자인 줄 알면서도 그가 집권당의 정적인 경우에 그를 처벌하는 데 신국가보안법 제4조를 적용시키는 것은 현 정세 하에서 있을 법하다기보다도 꼭 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것. (···) 국가기밀은 공지된 여부를 불문한다고 하였으니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미운 자 싫은 자는 다 걸 수 있게 하자는 것. 특히 언론의 자유를 봉쇄하자는 데 주지가 있으니 군사 이외의 (···) 모든 분야에 걸쳐서 집권자에 해로운 보도나 논평은 외국 정부나 적에게 비밀 보지(保持)할 것을 요하는 것으로 몰아대는 것쯤은 다반사로 할 수 있는 노릇이니 신문은 관보 노릇을 하지 않는 한 폐간을 하거나 망하여야 할 것. 집권의 영속화를 강행하려면 집권자에게는 눈앞의 가시인 신문을 꼼짝 못하게 할 필요가 있으려니와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집권의 영속화가 보장된다는 보장이 있겠소? (···) 공산당을 잡는다는 미명 하에 신문지법 아닌 신문지법을 만들어서 신문을 다 관보화하겠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의 국헌을 변란하겠다는 것 아닌지?


동아일보, 국가보안법 개정을 강력히 반대

동아일보는 6월 11일자 1면에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안고 있는 법적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사설(「국가보안법 개정법안을 보고」)을 실었다.

  지난 5일 국무회의에서 통과되어 곧 국회에 제출될 것이라고 전하는 국가보안법 개정법안을 읽었다. 전문(全文) 42조와 부칙 2조로 된 동법 개정안은 현행의 국가보안법을 부분적으로 수·개정한 것이 아니고 이것을 전면적으로 개정한 새로운 입법이라 하겠고, 이 법이 일반 형사법인 형법과 형사소송법에 대한 특별형사법으로서 우리나라의 형벌법 체계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고, 또 이것이 군인이나 일반 공무원에게 한하여 적용되는 것은 아니고 전 국민에게 적용되는 법이라 하는 의미에서, 형법과 형소법에 버금가는 중대한 입법이라 하겠다. (·····)
  첫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법안은 처벌법의 일반 원리인 ‘명확한 구체성의 원칙’이 결여되고 있다. 사람을 처벌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규정 내용이 명확하여 가벌(可罰)행위와의 구별이 분명해야만 한다는 원칙이다. (·····)
  둘째로 이 법안은 ‘국가’ 보안법이요, 이 법률은 제1조에 명시된 바와 같이 “국가의 안전과 이익을 확보함을 목적으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법안 제12조 제2항은 “정당·단체 또는 개인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까지를 가벌행위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
  셋째로 이 법안은 1)피구금자와 변호인 간의 접견을 일정 기간 금하고(제14조) 2)피구금자 또는 그 대리인의 구속적부심 청구를 이 또한 일정 기간 금하고 있거니와(제37조) 이러한 법률상의 제한은 헌법 제9조의 규정과의 관계에서 가능한가? (·····)
  끝으로 이 법안이 가장 비난받아야 할 또 하나의 점은 제39조의 규정이다. “제6조 내지 제20조와 제22조에 해당하는 범죄로 공소된 피고사건”에 대하여는, 검사 이외의 수사기관이 작성한 신문조서에 대해서도 증거능력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 이와 같은 규정은 사법경찰과의 증거 수집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 하게 하고 피의자에 대한 고문을 장려함으로써 인권침해의 폐를 조장할 것이 분명한 것이다.
  요컨대 이 국가보안법 개정안은 그 고유의 영역과 헌법의 원칙을 일탈한 위헌·부당한 입법이요, 이런 법률이 만일에 제정·시행된다고 가정한다면, 더구나 이것이 정치적으로 악용된다면, 그 결과는 가공할 것이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민주공화국의 기초를 송두리째 무너뜨릴 위험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동아일보는 8월 13일자 1면에 다시 「‘국가보안법 개정안과 인권 옹호」라는 사설을 내보냄으로써 ‘악법 제정’에 강력히 반대했다. 사설의 결론은 이렇다. “요컨대 동 법안은 제안자가 인권 옹호와 자유 수호를 각별히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정반대로 국민의 자유를 대폭 제한할 수 있고 인권을 무시하고 유린할 수 있게 되어 있으니 이 점 도저히 찬성할 수 없다. 동 법안은 정말로 ‘인권’ 옹호에 만전을 기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이 되도록 법안의 근본적 수술이 필요하다.”

‘국가보안법 개정안’ 제출과 날치기 통과

이승만 정부는 1958년 8월 9일 국회에 제출했던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11월 18일자로 철회하고 같은 날짜로 전문 40조와 부칙 2조로 기초된 새로운 국가보안법안을 다시 국회에 제출했다.

동아일보는 11월 18일자 석간 1면에 야당이 전면적으로 보안법 폐기 투쟁에 나설 것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국가보안법안이 국회에 제안되던 18일 상오 민주당 대표최고위원 조병옥 박사는 “자기 개인으로서는 국가보안법안을 폐기하는 방향으로 옥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기자들에게 언명하였다. 조 박사는 이어 “국가보안법안은 1960년 정부통령선거에서 암흑세계를 만들어 정권 연장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 뻔하다”고 단언하였다. (·····)
  (···) 조 박사는 “자기 생각으로는 법조계와 언론계를 포함한 범국민운동을 전개할 방침”이라고 전제하고 “원내에 있는 무소속 의원이 공동투쟁하도록 추진하겠다”고 언명하였다.

11월 23일 민주당은 “정부가 제출한 국가보안법은 공산분자를 더 잡을 수 있다는 이점보다는 언론자유를 말살하고 야당을 질식시키며 일반의 공사생활을 위협할 해점(害點)이 심대하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11월 26일자 조간 1면에 「전 국민의 자유를 사수하자」라는 사설을 올렸다.

  언론자유를 총포화약류처럼 위험시하고 자유언론에 의한 공정한 비판을 사갈(蛇蝎)처럼 미워하던 집권당은 마침내 ‘국가보안법 개정안’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자유언론을 말살코자 하고 있으니 이는 비단 이 나라 언론계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건전한 성장을 바라는 모든 국민을 위해 중대한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른바 ‘허위보도’를 단속한다는 동 법안 17조 5항이나 ‘헌법상의 기관에 대한 명예훼손’을 엄벌한다는 제22조가 국가보안을 빙자하여 보도의 자유와 비판의 자유를 말살하려는 데 그 참다운 목적이 있고 만약에 이 법안이 그대로 실정(實定)되는 날에는 자유 또는 공정한 언론이 존재할 수 없다는 데 대해서는 여기 구차스럽게 재론할 필요가 없을 줄 안다. 자유당 국회나 정부가 심심하면 ‘국권옹호’라는 허울 좋은 구실 밑에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려 든다는 것은 심히 유감된 일이었었는데 기타 위기 상황의 연속을 구실로 국가보안법을 개악하여 경찰국가 파시즘체제를 완성코자 책동한다는 것은 민주공화정의 기본원리를 유린하는 것이요 우리 백성이 피땀으로 세워놓고 육성한 대한민국의 국가 목적을 변질시키려는 것이니 기실 하나의 혁명적인 책동이라 할 것이다.
  하물며 국가보안법을 개정하려는 동기가 간첩의 침입을 막아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수호하는 데 있다기보다도 국민의 이목을 막고 암흑사회를 형성함으로써 일당일파의 집권을 유지하려는 데 있다는 데 이르러서는 우리는 애국적인 분노를 금할 수가 없다.
  5·15 정부통령선거나 5·2 총선거를 통해 투표에 의한 정권 유지의 자신을 잃어버린 자유당은 계속해서 정권을 확집(確執)하기 위해 개헌을 기도하다가, 이것마저 자신이 생기지 아니 하니 최후의 수단으로서 국가보안법을 개악하여 집권 연장의 뜻을 이루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헌법이 보장한 언론자유와 기본인권을 분명히 침해하는 보안법 개악운동은 말하자면 ‘형식을 바꾼 일종의 개헌운동’이라 할 것이니 우리는 이와 같이 동기에 있어서 불순하고 표현에 있어서 비겁한 국가체제 변경 책동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보안법 개악안이 결정되어 정부가 야당과 언론기관을 탄압하기 시작하면 정치적인 자유도 사상 발표의 자유도 모두 없어지고 말 것이요, 자유당은 과거의 수배(數倍) 하는 부정과 협잡을 가지고 차기 정부통령선거에 있어서 간단히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본다면 정부통령선거는 내명년에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 방금 행해지는 것이라고 해석함이 타당할지니 주권을 가진 국민대중은 사태의 중대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무기력한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아야 한다.

민주당을 포함한 야권은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새로운 국가보안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투쟁을 시작했다.

  민주당 의원 81명과 무소속 의원 10명이 국가보안법 개악 반대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나서자, 서울시경국장 이강학은 ‘중대한 정보 입수’라는 구실을 들어 일체의 옥외집회 금지령을 내리며 야당의 행동을 제약하고 나섰다. 자유당도 12월 2일 반공투쟁위원회를 구성해 강행 통과의 전의를 다졌다.
  신국가보안법은 12월 19일 법사위에서 자유당 법사위원 10명만 참석한 채 날치기 통과되었다. (·····)
  자유당은 23일 밤 전국의 무술경찰관 3백명을 임시국회 무술경위로 특채하는 식으로 급조해 24일 새벽 국회의사당으로 쳐들어가게 만들었다. 무술 경찰관들은 농성 중이던 야당 의원들을 끌어내 5시간 동안 지하실에 감금하였다. 이들은 그 과정에서 폭력을 행사해 12명의 의원들이 부상을 입고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오전 10시를 기해 무술경찰관들이 사회를 맡은 부의장 한희석을 에워싸고 본회의장에 들어왔다. 자유당 의원들만으로 개회된 본회의는 순식간에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12월 24일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이를 ‘2·4 국가보안법 파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3권>, 209~210쪽).


동아일보는 12월 24일자 석간 1면에 「민주주의의 종언」이라는 제목으로 국가보안법안 날치기 통과를 강력히 규탄하는 내용의 사설을 올렸다.

  이윽고, 국회의사당에서는 금 24일 여야 의원들 간의 격돌이 벌어지고 말았다. 의정 10년 유여(有餘)에 의사당을 선혈로써 물들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이다. 의장이 경위권을 발동한다는 선언도 있기 전에 3백명의 괴한들이 의사당 안으로 몰려들더니 30명밖에 안 되던 경위들은 순식간에 땅에 서 솟아 생겼는지 혹은 하늘에서 떨어졌는지 3백명으로 증가되어 85명의 야당 의원들을 완력으로써 끌어내서 지하실로 몰아냈다 한다.
  이러한 경위권 발동이 국회법에 위반되지 않는 것이 아닐 것은 두말을 요치 않거니와, 자유당 의원들은 합법적 절차로써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우격다짐으로써 기어이 통과시킨 것은 우리 국회가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또 하나 더 기록한 것으로서, 대한민국에 생을 향유한 자는 불행한 일이지만 단기 4291년 2월 24일을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오늘을 최후로 종언을 고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 ‘정치파동’도 우리들로 하여금 죽음과 같이 무거운 전율 속에 잠기게 하였었지만, 우리의 입을 막으려고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통과된 국가보안법 개정안은 국민의 입을 막고 귀를 막는 것이기 때문이다. 입 있으되 말 못하고 귀 있으되 듣지 못하는 곳에 공명한 행복은 깃들 수 없기 때문이다. 언론의 자유가 없는 곳에 비판의 자유가 있을 수 없으니 그러한 나라에 있어서 여당과 다른 정책을 제창할 수 있는 야당이 존립할 여지가 없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고 정부의 비정(秕政)을 공격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야당이 없는 나라에 일당 독재가 군림할 것은 명약관화한 노릇이니 도시 일당 독재가 군림하고 있는 나라에 암담과 불행만이 차 있을 것도 불견가지(不見可知)의 일일 것이다. (·····)
  자주독립은 제2차 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의 선물로서 성취된 것은 거의 천우(天佑)에 의한 것이거니와, 국토의 북반이 공산괴뢰의 작란(作亂) 하에 있을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햇빛을 한 줄기나마 이를 견지하려고 애써왔으나 국가보안법의 개악으로 말미암아 일루의 촛불마저 꺼지고 말았다.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자유 없는 암흑 속에서 우리는 어이 살 것인가. 자주독립이 귀하지 않을 리 있으리오. 그러나 자유 없는 자주독립은 불행한 자주독립이요 비극의 자주독립이다. (·····)
  “우리에게 자유를 다오. 그러하지 못하겠거든 죽음을 다오”라고 외친 것은 4백 년 전에 가톨리시즘의 절대주의와 싸우던 마르틴 루터의 절규지만, 자유는 죽음보다도 고귀한 것이니 자유 없는 생은 생으로서의 내용을 갖출 수 없는 까닭이다. 국가보안법에, 우리의 언론자유를 말살한 조항이 삽입됨으로써 우리의 언론자유는 죽었다. 결사의 자유도 신앙의 자유도 언론의 자유를 기초로 해서만 존립할 수 있는 것일진대 언론자유의 죽음은 모든 자유의 죽음을 뜻하지 않으리오.

국가보안법이 국회에서 자유당의 폭력적 수단으로 ‘통과’된 뒤 민주당은 어정쩡한 자세를 보였다. 박원순은 그 경위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민주당은 1958년 12월 27일자 성명에서 “의원직을 총사퇴함으로써 역부족을 국민 앞에 사과할 것도 생각하였으나 국회의석을 포기함은 정당활동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자유당의 호구(虎口)에 내어 맡기는 것”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국회 내 투쟁원칙을 포기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보안법 사태를 규명하기 위해 임시국회 소집 요구서를 1959년 1월 1일 국회에 제출함으로써 아직도 국회에서 얻을 무엇인가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민주당의 자세는 사실상 국가보안법의 통과 이전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민주당은 보안법 논쟁이 한창 가열되고 있던 1958년 11월경 온건파인 유진산을 원내총무로 새로이 선출하였고 유 총무는 11월 9일 “여야 감정을 악화시켜 시간을 허송할 심산은 추호도 없다고 부드러운 제일성을 말하고 (···) 격돌 직전에 있는 여야의 감정을 늦추어 주는 데 적지 아니 한 청량제가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낳았던 것이다.
  더구나 국가보안법의 내용에 관하여 민주당이 지적한 문제점도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민주당은 국가보안법안이 규정하고 있던 언론조항이나 기밀개념의 확대 그리고 전반적인 남용 가능성은 지적하면서도 남북한 관계의 전망이나 사회체제의 진보적 발전 등의 측면에서 국가보안법의 근본적 문제점을 인식하고 개정 반대 의견을 주장하지는 못하였다. 즉 국가보안법이 지니고 있는 분단법제적 성격이나 사상규제적 성격에 주목하여 이를 폐지하거나 대폭 개정하는 의견은 전혀 나온 바가 없었고 오히려 당시의 반공이데올로기에 전폭적으로 동의하고 국가보안법의 존재와 부분적 확대는 인정한 채로 다만 정치적 악용 가능성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민주당의 입장은 민주당 자체의 형성 과정과 배경, 소속 의원들의 성향에 비추어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권력에만 소외되어 있었을 뿐 출신 배경, 우익보수적 경향 등이 자유당과 근본적 구별을 지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러한 성격은 4·19 혁명 이후 집권여당으로서 새로운 반공법을 만들게 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민주당의 타협적 태도와 기본적 속성으로 인해, 1959년 1월 30일 일본의 재일교포 북송안이 발표되어 우리 정부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강행되는 과정에서 국가보안법 무효화투쟁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던 것이다(<국가보안법 연구 1>, 150~151쪽).


동아일보 사설 ‘자유당은 어디로’

동아일보는 ‘국가보안법 파동’이 막바지를 넘어선 12월 29일자 석간 1면에 「보안법 파동 후의 자유당은 어디로」라는 사설을 실었다.

국민은 기억도 쓰라린 ‘12·24’ 보안법 파동의 역사적 치욕의 날을 보내고 난 작금에 이르러, 비록 겉으로는 흥분도 가라앉고 냉정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이고 있으나, 실상 속으론, 날이 지나갈수록 그날의 비분이 골수에 더욱 파고들어 거친 심적 파도를 걷잡을 수 없이 일으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요사이 부산·대구를 비롯한 지방 각 도회처에서 시위운동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신성한 국회의사당 내에서 급조 경위 3백 명으로 하여금 무저항 무방비한 농성투쟁 의원 80여 명을, 인간 이하로 다루어 연금 또는 폭력으로 몰아냄으로써 열 명에 가까운 선량들에게 중경상을 입혔다는 것은 국민들로 하여 금 ‘국회 무용론’ 또는 ‘야당 불필요론’을 외치게 하였고, 더욱이 “그럴진대 ‘민주정치’에서 ‘독재정치’로 바꾸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 하는 극단의 비관론까지도 부르짖게쯤 되었다.
  이렇듯 자유당이 민주한국 헌정 10년 사상 가장 죄악적인 처사를 하고 나서도, 추호도 양심상 가책을 느낄 줄 모르며, 특히 평소에 우리가 ‘그래도’하고 기대의 폭을 넓혔던 이기붕 의장마저, 국민 앞에 일언·반사(半辭)의 진사(陳謝)는커녕, 도리어 “24일의 조치는 회의를 열고 필요한 질서 유지를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한 것”이라는 자가 변만 되풀이했을 뿐이다. 이를테면 “그날의 유혈비극은 자기의 직접 지시에 의한 부득이한 것이었다”는 것을 솔직·대담하게 고백·표명한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이재학·한희석 두 사람의 부의장도 꼭 같은 말로 동감·동조를 표시하였다. (·····)
  그럴수록 양양자득(揚揚自得)하는 자유당은, 그렇듯 자손만대에 길이 씻지 못할 ‘민주 죄과’를 범하고 나서, 또 하나의 ‘속죄 구실’을 내세웠으니, 즉 ‘민심 수습’이란 방패를 들고 나선 것이 그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해서 민심을 수습하겠단 말인가? 이미 짓밟아 쑥밭을 만들어 놓은 민주화단을, 어찌 원상 복구시키겠다는 것이며, 또 그 ‘화단의 주인’이 되는 국민의 울분을 부채질해서 일으킬 대로 다 해놓은 뒤에, 무슨 재간으로 진정 위안시킬 것인가. (·····)
  자유당은 “이제 전쟁은 끝났다”고 극히 낙관적인 태도로 자가도취하고 있는 상 싶다. 그러나 과연 ‘대야’나 ‘대여’ 간의 공방전이 이것으로 종국되었다는 것은 시기상조다. 야당의 본격적인 작전은 앞으로 전개될 것이고, 또 한 거기에 ‘국민대회’를 모체로 한 범국민운동도 일어날 기운이 짙어가고 있음을 생각할 때, 지나간 날 자유당의 승리보다도 이제부터 부닥칠 험관(險關)이 그들의 활로를 타개하는 데에 더욱 중대하다고 본다. 그것은 국내적으로도 그러려니와, 국제적으로도 또한 그렇다 할 것이다.

이 사설은 마지막 대목에서 자유당이 나라 안팎에서 험한 난관에 부닥칠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 그런 일은 1960년 봄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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