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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개헌과 사사오입개헌동아일보 대해부 2권 - 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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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0.27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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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6월 12일 7개 도의회 의원들과 전국의 시·읍·면 의원들이 부산에 모여 국회의원 소환과 국회 해산을 결의한 뒤 국회의사당 광장과 대통령 관저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에는 18개 친여단체와 조선방직 노동자 등 2천여 명이 동원되었다.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결합한 발췌개헌안

6월 20일 전 부통령 이시영과 김성수, 전 국무총리 장면, 전 내무부장관 조병옥, 독립운동가 김창숙 등 60여명의 재야인사들이 연대 서명을 한 뒤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반독재 호헌 구국선언대회’를 열려고 했다. 그러나 폭도들이 대회장에 난입함으로써 일부 인사들이 머리를 다치는 등 유혈사태가 벌어져 대회는 무산되고 말았다.

그런 공포분위기 속에서 국무총리 장택상은 정부 측 개헌안과 국회 측 개헌안을 절충한 이른바 ‘발췌개헌안’을 제시했다.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라는 정부의 개헌안을 뼈대로 삼고 국회가 국무위원 불신임권을 갖는다는 국회의 안을 ‘수용’한다는 것이었다. 장택상을 중심으로 한 신라회는 원외 자유당과 제휴해서 야당 의원들을 설득하거나 위협하면서 발췌개헌안에 대한 서명 작업을 해나갔다. 초안이 작성된 지 20일 만인 6월 21일에  원외 자유당 63명, 신라회 20명, 원내 자유당 19명, 민우회 11명, 민국당 6명, 무소속 4명을 포함해서 123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6월 21일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뼈대로 한 개헌안이 국회에 상정되었다. 그러자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던 다수 의원들은 국회 출석을 거부하고 잠적함으로써 개헌안 심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신익희, 조봉암 등 국회의장단은 미국 측의 타협책에 동조해 출석을 거부한 의원들에게 출석을 권고하기로 합의했다.

6월 25일 부산 충무동 광장에서 열린 6·25 두 돌 기념식에서 일제강점기의 의혈단원 유시태가 독립투사이자 민국당 소속 국회의원인 김시태의 양복을 빌려 입고 그의 신분증을 소지한 채 이승만의 등 뒤 3미터까지 접근해서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사건이 터졌다. 총탄 불발로 이승만은 무사했고 유시태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경찰과 특무대는 유시태를 조종한 혐의로 김시현과 민국당원 서상일 등 10여명을 구속했다. 이승만 암살미수 사건은 관제 시위에 불을 댕겼다. 

7월 1일 국회의장단이 임시국회를 열려고 했으나 개헌안 의결 정족수인 의원 123명을 채울 수가 없었다. 내무부장관 이범석과 계엄사령관 원용덕은 7월 5일까지는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잠적한 의원 전원을 등원시키겠다는 포고문을 3일 발표했다.

먼저 붙잡혀 온 의원들은 임시의사당에 연금된 채 정족수가 찰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당국은 ‘국제공산당’ 혐의로 체포된 의원 10명까지 석방해서 등원시켰다. 7월 4일 국회의원 185명 가운데 166명이 출석해서 정족수가 채워지자 밤 9시 30분경 경찰과 관제 시위대가 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발췌개헌안에 대한 표결이 시작되었다. 개헌안은 166명 가운데 찬성 163명, 기권 3명으로 가결되었다. 이것으로써 부산정치파동은 막을 내렸다.


동아일보의 발췌개헌 비판

1952년 7월 7일 이승만 정부는 개정된 헌법(발췌개헌)을 공포했다. 비상계엄 때문에 검열이 실시되는 상황에서 동아일보는 7월 9일자 1면에 개정헌법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사설(「자유와 질서」)을 내보냈다.

  신헌법은 이윽고 지난 7일 공포되었다. 4년 전 5·10 선거에 의한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그 헌법은 지난 6일로써 그 기능을 종식한 셈이다. (···) 신헌법이 그 내용에 있어서나 또는 이를 통과시킬 때까지의 법적 절차에 있어서 허다한 문제점을 포장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것이 일단 선포된 이상 이를 준수하는 것은 3개 권부(權府)들의 의무가 아닐 수 없으며 또한 3개 권부들로 하여금 이를 준수하는 것은 우리 백성들의 권리인 동시에 의무이기도 하다.
  우리 주권자들이 권력을 권부들에게 맡긴 것은 집권자들로 하여금 백성들에게 세도나 부리고 압제나 하라고 맡긴 것이 아니라 ‘이민위천(以民爲天)’의 수단으로서 맡긴 것이요 백성들이 안생낙업(安生樂業)할 수 있도록 국궁(鞠躬) 노력하라고 맡겼다는 것쯤은 삼척동자라도 알 수 있는 ABC인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ABC를 이제 새삼스럽게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지난 4년간의 우리 민주정치의 공죄(功罪)를 따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러나 만약에 죄가 있다고 하면 이는 헌법 그 자체의 결함에서보다는 그나마도 이를 엄수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더욱 유래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 헌법이나마 이를 엄수하였던들 개헌투쟁은 없었을 것이요, 신헌법의 선포도 있을 수 없었을는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므로 민주정치의 발전은 완전무결한 헌법을 만든다는 것보다도 설령 결함이 있는 헌법일지라도 이를 엄수하는 데서 더 기동(起動)되고 더욱 추진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제 아무리 좋은 헌법이라도 지키지 않는다면야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 주권자들의 안생낙업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자유와 질서가 보장되어야 하고 자유와 질서를 보장하기 위하여는 권부들의 권력 남용이 없도록 권부들을 규제하는 것이 헌법의 중요한 기능일진대 만일에 헌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하면 이는 곧 권력의 남용을 의미하는 것이요, 자유의 유린과 질서의 혼란을 결과하는 단초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니 ‘헌법을 지키라’는 것은 백 번 강조하고 천 번 역설해도 그래도 부족감을 금할 수 없다. (·····)
  (···) 자유와 질서는 권부들이 헌법을 준수함으로써만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 각자의 자발적이고도 자율적인 준법행위와 보조가 일치될 때 비로소 완전히 보장되는 것이니 과거 4년간에 걸쳐서 자유와 질서가 완전히 보장되지 않은 일이 있다면 그 책임은 권부에만 질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들도 그 일부를 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비판하기 전에 먼저 나를 반성해야 할 것이요, 철저한 자기비판이 거족적으로 여행(勵行)되지 않는다면 이는 우리 스스로 민주주의를 포기하는 행위라는 것을 명념하여야 한다.


대통령에 77세 이승만, 부통령에 81세 함태영 당선

1952년 7월 15일 개정 헌법의 후속법인 정부통령선거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의결되자 정당들은 8월 5일에 치러질 정부통령 선거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원외 자유당은 19일 오전 대전시공관에서 임시전당대회를 열고 대통령후보에 이승만, 부통령후보에 이범석을 지명했다. 이승만은 그 대회가 열리기 전에 전달한 메시지를 통해 이렇게 전했다. “자유당 간부들에게 조용히 부탁하고자 하는 바는 민중이 자발적으로 나를 원하고 원치 않는 것을 시하는 것을 막을 수 없고 오직 내가  받고 아니 받는 것은 자유로 작정할 이지만 자유당에서 이런 말을 발설하는 것은 내 입장을 더욱 곤란케 하는 이므로 자유당에서 이런 말을 발설치 말아야 된다는 것을 부탁하여 둔다.”(조선일보 7월 21일자 1면). 

  (···) 직선제 개헌 파동을 전후해 차기에 출마할 의사가 없음을 수 차례 밝혔던 이승만으로서는 자신의 결정을 번의할 것을 요구하는 민의를 전국 적으로 일으켜야만 했을 것이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재출마 요구 탄원서에 350만명이 서명했다고 주장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이승만은 7월 24일 본의는 아니지만 민의 압력에 굴복하여 양보했다는 걸 밝히면서 자신의 입후보 등록을 허락하였다.
  그 계획의 또 다른 목적은 이범석 제거였다. 이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진 이상 이범석의 역할은 끝난 것이었다. 이범석은 당선을 확신하고 부통령에 출마하였지만, 이승만은 엉뚱하게도 선거 일주일을 앞두고 아직 입 후보 선언도 하지 않았던 목사 함태영을 부통령후보로 지지한다고 발표하였다. 함태영은 81세로 77세인 이승만보다 네 살 연상이었다. 이는 누가 보더라도, 이승만이  “자기보다 나이 많은 연장자를 부통령후보로 선택함으로 써 후계자 선택을 명백하게 회피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 316쪽).

야권 대통령후보로는 이시영(82세, 전 부통령, 무소속), 조봉암(53세, 국회 부의장, 무소속), 신흥우(67세, 전 주일대사, 무소속)가 출마했다. 8월 5일 치러진 선거 결과는 9일 발표되었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승만은 총투표의 74.6%인 703만여 표, 부통령에 당선된 함태영은 294만여 표(41.3%)를 얻었다. 대통령선거에서 조봉암은 79만여 표(11.4%)를 얻어 장차 이승만의 잠재적 경쟁자가 될 가능성을 보였다.

무명에 가까운 함태영이 부통령이 된 데는 국무총리 장택상과 내무부장관 김태선이 전국의 지방행정 조직과 경찰을 동원해서 선거운동을 벌인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이승만은 1952년 8월 15일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동아일보는 8월 16일자 1면 머리에 「정부통령 취임식 성대 / 지극 간소하게 거행 / 임시국회서 선서, 각계 축사는 생략」이라는 기사를 실었을 뿐 사설로 다루지는 않았다. 그 날자 1면 사설의 제목은 「강토 통일의 염원」으로, 이승만과는 관련이 없었다.


이승만의 종신집권 기도

1952년 8월 5일로 예정된 대통령선거에 앞서 이승만이 직선제 개헌의 ‘최고 공로자’인 족청계 수장 이범석을 배제하고 무명의 목사 함태영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해서 당선시킨 사실은 앞에서 살펴본 바 있다. 이승만에게 충성을 다하다가 배신을 당한 이범석이 절치부심했을 것은 물론이다. 이범석은 원외 자유당에서 가장 조직력이 강했던 족청계를 동원해서 그해 가을 중앙당부터 지방당에 이르기까지 반(反)족청계 숙청을 단행하고 자유당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1953년 3월에 열린 전당대회 전후에 원내 자유당과 원외 자유당이 통합되어 4월 14일 자유당이라는 명칭으로 등록을 마쳤다. 이범석이  자유당을 지배하면서 자신에 대한 강력한 도전자로 입지를 굳히는 것을 노회한 이승만이 방치할 리 없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조인된 뒤이승만은 9월 들어 이범석을 제거하기 위해 먼저 당수제부터 폐지한 뒤 당수 이범석을 평당원으로 강등시켰다.

  (···) 이승만은 1953년 9월 21일 자유당에서 족청계를 축출하고 당을 정화, 재건하라는 요지의 특별선언문을 발표하였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이승만은 족청계 제거를 위해 김창룡의 특무부대까지 투입하였다.
  이제 모든 건 이승만의 뜻대로 가게 돼 있었다. 11월 2일 이승만은 새로운 9인 부장의 당 간부를 임명하고 그들로 하여금 중앙으로부터 지방의 세포조직에 이르기까지 족청파를 축출하고 당내 조직을 정비하도록 지시했다.
  이승만은 각 부장을 자신이 직접 임명하였으며, 이기붕을 총무부장으로 기용하였다. 새로 구성된 부장단은 1954년 1월 30일 이범석을 비롯하여 족청계의 지도급 인사 16명을 제명 처분하는 것을 시작으로 당내의 족청계를 완전히 일소하고 당 조직을 재건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기붕 중심의 당체제가 서게 되었는데, 1954년 3월에 열린 자유당 제5차 전당대회가 족청계 제거를 공식적으로 알린 행사였다. 이기붕은 이 전당대회에서 자신의 반대파인 배은희와 이갑성을 축출하고 당 조직을 장악하였다(같은 책, 156쪽).

1896년 12월 충북 괴산군에서 태어난 이기붕은 이승만보다 21년 아래로 조선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16대 손이었다. 세종의 형 양녕대군의 16대 손인 이승만은 같은 조상의 피를 물려받은 이기붕에게 각별한 친밀감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이기붕은 1945년 1월 중순 이승만이 귀국한 뒤 그의 사저인 돈암장에서 비서로 일했을 뿐 아니라 아내 박마리아가 이승만의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와 아주 가까운 사이라서 ‘출세의 사닥다리’를 급속히 오를 수 있었다. 그는 이승만의 비서실장을 거쳐 1945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고, 1949년 6월부터 1951년 5월까지 서울특별시 시장을 지냈다. 1951년 5월부터 1952년 3월까지 국방부장관으로 일한 바 있는 이기붕은 1953년 12월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이 되면서 이승만이 ‘1당 독재체제’를 굳히는 데 앞장섰다. 1954년 6월부터는 제3·4대 민의원 의장 자리를 지켰다.

이승만이 자유당에서 족청계를 숙청한 것은 1당 독재 체제로 가는 첫 걸음이었다. 그것은 이승만의 ‘충복’인 이기붕이 당권을 장악함으로써 당시 78세이던 대통령이 종신 집권할 수 있게 하는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동아일보 지면에서는 이승만이 종신집권을 위해 족청계를 숙청한 과정에 관한 자세한 보도를 볼 수 없다. 동아일보는 당시 정부의 환도 직후 서울로 돌아와 광화문 사옥에서 신문을 내고 있었다. 

이승만은 총선을 앞둔 3월 11일부터 5월 17일까지 11번이나 선거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1952년의 발췌개헌 파동 때 대통령은 2차에 한해 중임할 수 있다는 헌법 조항을 삭제하고 싶었지만 당시 여론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으므로 제3대 국회에서 개헌을 하려고 작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5·20 총선에는 정당이 선거구마다 후보 1인을 공천하는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이승만은 그것을 이용해서 “개헌을 조건부로 입후보 하게 하라”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관권과 금권이 난무한 총선에서 전국 203개 선거구 가운데 자유당이 114석(56.1%), 무소속이 68석(33.5%), 민국당이 15석(7.4%), 국민회와 대한국민당이 각각 3석을 차지했다. 국회의장에는 이기붕(자유당), 부의장에는 최순주(자유당)와 곽상훈(무소속)이 선출되었다.

당시 헌법에 따르면 중임 제한 철폐를 위해 개헌을 하려면 전체 의석의 3분의 2인 136 의석이 필요했다. 그래서 자유당은 최소한 22석을 더 확보해야 했다.

  자유당은 막대한 정치자금을 동원해 무소속 의원 매수작전에 돌입했다. 그래서 무소속 의원이 많으면 대가가 싸고 적으면 값이 올라간다는 말이 나돌았다. 매수와 더불어 부정선거 고발 위협도 동원됐다. 이렇게 해서 자유당은 무소속 당선자 23명을 자유당에 입당시키는 데 성공했다.(같은 책, 202쪽).


희대의 코미디가 된 사사오입 개헌

자유당은 1954년 9월 7일 “선거 공약을 실현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국회에 개헌안을 제출했다. 대통령중심제 유지, 국무총리제 폐지, 대통령 궐위 시 부통령의 자동 승계, 중대 사항에 대한 국민투표제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었지만, 개헌안의 핵심은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 철폐였다. “이승만은 개헌안을 제출하면서 ‘개헌에 반대하는 자는 국가시책에 대한 파괴행위자 내지 반역행위자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정부에 반대하는 어떠한 정당이나 단체라도 개헌안의 국민투표 조항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10월 8일자 1면에 「개헌안을 철회하라」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올렸다.

  헌법개정안의 공고기간은 7일로써 완료되었다. 공고된 이래 이 안은 국민의 여론 앞에 신중히 검토되어 왔는데 저간의 추세로 볼 때에 여론의 대세가 이 개헌안을 찬성하지 아니 한다는 것은 공평한 눈으로 보아 사실인 것 같다. 총리제도의 폐지라든가, 대통령 임기제한 예외규정 같은 문제가 가장 중요한 비판 대상이 되고 있는데, 국내 여론의 대세를 귀 막고서, 이러한 중대한 기본 국시의 변경을 강행한다는 것은 국가민족의 안위와 발전을 위해서 특히 위험스러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으니 본안을 철회하지 않으면 안 될 하나의 이유요.
  다음에는 절차상으로 보아 참의원 성립 전에 헌법을 개정하는 것은 위헌이라고 하는 논(論)이 형식적으로는 반박될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반박이 실제적으로, 즉 헌법의 근본정신에 비추어 지나친 해석이라 아니 할 수 없으니 이를 철회하지 아니하면 안 될 둘째의 이유요.
  또는 아직까지 국민투표제 자체의 가부도 논란의 대상이 되었거니와 개정 안에 나타난 문면이 법적 정확성을 결여했다는 점에서 이 원칙을 채택하는 경우에라도 자구 수정을 가하여야 할 것이 분명하여졌으니 이 안을 일단 철회해야 할 이유의 셋이다.
  그런 중에 아직까지 공론에서 그리 상세히 논급되지 아니 한 점 하나가 있으니 그것은 곧 국무회의 결의권의 존속이다. 본 개정안은 종래의 절충제도를 시정하여 완전한 대통령중심제를 확립한다는 것이 그 주지이거니와 그 주지 하에서 볼 때에 국무회의의 의결권을 존치한다는 것은 중대한 모순이다. (·····)
  혹은 가로되 대통령에게 국무위원 임면권이 있는 만큼 국무원이 의결기관이라 하되 대통령과 의견이 배치될 때에는 반대의사를 가진 국무위원을 경질시킴으로써 대통령의 의사를 관철할 수 있다고 하리라. 그렇다면 국무위원을 한 개의 자문기관으로 하여 숫제 헌법에서 국무회의 또는 국무원의 제도를 빼어버리는 것이 타당할 것이지 구태여 의결기관이라 해놓고 로봇을 만들어 놓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과거의 실례에 비추어 보아서 대통령이 국무회의의 의결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정을 하는 경우가 생긴다 가정하면 그때는 법적으로 비상히 곤란한 처지에 함입(陷入)할 것이다. 현 대통령을 종신토록 모셔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초안자는 그런 경우를 설정해 본 적이 있는가? (·····)
  미숙한 안을 반대에 불구하고 억지로 통과시키려고 하다가는 표결 과정에서 혼란을 야기시킬 염려가 있을 뿐 아니라 설사 통과가 되더라도 적지 않은 후환을 남길 수 있으니 차제에 제안 측인 자유당은 재사 숙려하여 깨끗이 철회하고 다시 안을 세워 보기를 충고한다.

개헌안에 대한 여론의 반대는 아주 거셌다. 한국일보 1954년 10월 11일자에 보도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개헌안의 내용 가운데 국가 안위에 관한 중대 사항을 국민투표로 결정한다는 데 대한 찬성은 28.5%, 반대는 65.7%였다. 국무총리제 폐지는 찬성 28.8%, 반대 63.7%, 초대 대통령 중임 제한 폐지는 찬성 16.9%, 반대 78.8%였다. 이런 수치는 이승만의 종신집권 기도에 국민 대다수가 반대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개헌안은 야당과 여론의 반대에 부닥쳐 10월 말까지 국회에 상정되지 못했다. 그러자 국회에는 매카시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국회는 11월 4일 긴급동의로 들어온 ‘남북협상 중립 배격 결의안’을 통과시킨 데 이어, 11월 6일과 11일에도 계속 반공 결의문을 채택했다. 국회 밖에서는 이른바 ‘민의(民意)’가 동원되었다. 지방의회 의원들이 부산 정치 파동 때처럼 다시 들고 일어나 “국민 전체가 갈망하는 개헌안을 조속히 통과시키라”는 결의문을 전달하였다. 또 백주에 자동차로 수십만 장의 전단이 뿌려지고 벽보가 나붙었다. 11월 하순 들어 헌병총사령관 원용덕은 “휴전감시위원단 중 적성국 대표들은 일주일 이내에 철수하라, 불응하면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11월 24일에는 서울운동장에 170개 학교 10만여 중고등학생들이 모여 주권수호 학생총궐기대회를 열었다 (같은 책, 205~206쪽).

그렇게 살벌한 분위기에서 11월 20일 개헌안이 국회에 상정되었다. 표결은 토요일인 11월 27일 제90차 본회의에서 실시되었다. 개헌안은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로 부결되었다.

표결에 참여한 의원은 203명이었는데, 헌법을 개정하는 데 필요한 것은 136표였다. 찬성표 135는 203의 3분의 2인 ‘135.333·····’이기 때문에 135에서 1이 분명히 모자란 것이었다. 그래서 자유당 소속인 국회 부의장으로서 사회를 본 최순주도 부결을 선포했다.

동아일보는 11월 29일자 1면 머리에 「개헌안 부결! / 일괄표결 결과 / 아슬아슬한 1표 차」라는 기사를 올리고 그 옆에 「개헌안 부결’」라는 사설을 실었다.

  전 국민과 전 세계의 주목리에 표결에 붙여진 개헌안은 소요(所要)의 136표에 대하여 1표가 미달함으로써 불성립의 결말을 지었다. 이로써 우리 국민의 민주정치의 위기가 수습된 것은 일당일파보다도 전 국민적인 승리라고 할 것이다.
  만일에 개헌안이 통과되었더라면 우선 정치제도상으로 보아서 입법부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이를 지나치게 견제하여 3권분립의 원칙을 깨뜨릴 염려가 있었을 것이요, 행정부의 권력을 너무나 강화시켜서 집권자의 독선을 조장하며 세도를 장기 연장시키어 폐단을 재래(齎來)할 가능성이 농후하였었다는 것 등은 질의와 토의 석상에서 지적된 바와 같았으나 개헌의 불성립은 그러한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여 민주발전상 있을 수 있을 장해를 예방할 수 있는 것이라 할 것이요, 또는 5·20 총선거의 결과를 냉정히 분석할 때에 유권자 중에서 개헌을 지지하는 수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혹시나 여당 측의 책략과 수단으로써 국회 내의 표수를 긁어모음으로써 개헌이 결행되지나 않는가 하는 추상(推想)도 어그러졌으니 어느 쪽으로 보거나 우리나라의 민주발전상에 한 개의 노표(路標)를 이루었다 할 것이다. (·····)
  금후에 정국은 어떻게 전개될 것이며 또는 어떻게 추진되어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목하의 급무는 경제재건에 최대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개헌안 토론 당시에도 이 시기는 개헌보다도 민생문제 해결과 산업재건에 있다는 논이 나왔거니와 오래  끌던 한미 교섭도 일단락을 지었고 7억 불에 달하는 우방의 원조가 실현되게 된 이때에 있어서 입법부나 행정부나 또는 모든 국민이 일심 합력하여 바른 정책을 세우고, 바른 마음과 능률 있는 실천으로 이를 추진한다면, 우리의 재생의 길은 스스로 열릴 것이다. (···)
  그리 하기 위해서는 한두 개인의 국한된 판단과 능력에 의존함보다도 조직된 역량의 발휘에 기대함이 가할 것이니 헌법의 명문에 있는 대로 국무총리의 제청권을 명실이 상부하게 실시함으로써 연대적 책임을 지는 내각을 조성(組成)케 하고 그 조직적 집회적 역량에 의하여 국정을 바로 잡는 것이 급무다. 개헌 불성립의 책임을 지고 일부 국무위원의 인책 퇴임이 고려될 수도 있을지 모르거니와 국민이 원하는 것은 그러한 형식적인 문제보다도 좀 더 실질적인 의미에서 유능 유위한 인물의 등장을 기대함에 있다. (···)
  한 걸음 나아가 2년 후의 대통령 개선기(改選期)와 그 후의 정치적 안정을 미리 염려한다면, 현 대통령은 지금부터 유능한 후계자를 물색하여 이를 육성함이 필요할 것이며, 동시에 미국 국부 조지 워싱턴의 고지(高志)를 빌어, 적어도 두 사람의 후보자를 상정하고 여야 양대 정당을 건전하게 육성하여, 장래에 민주적인 정권 수수(授受) 제도가 확립되는 길을 닦아 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개헌에 대한 민의원의 판단은 국민의 의사를 정당히 반영한 판단이라고 말할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는 바다. 이 결론에 입각하여 허심탄회로써 헌법을 수호하고 진정한 민주정치의 발전을 기도하는 때에 비로소 반공전 승리의 기초가 굳어질 것이다.

이 사설은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발췌개헌안이 단 한 표 차이로 국회에서 부결된 것을 ‘전 국민적인 승리’라고 ‘축하’하면서 ‘민주발전상의 한 개 노표’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 결론 부분에서 “현 대통령이 유능한 후계자를 물색하여 육성할 필요”가 있으며, 미국의 조지 워싱턴처럼 두 사람의 후보자를 내세워 양대 정당을 육성하라고 조언한다. 이승만이 이 사설을 읽었다면 아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을 것이다.
그런데 동아일보가 선언한 ‘전 국민적 승리’는 단 며칠도 못가서 깨어지는 ‘한낮의 꿈’으로 바뀌고 말았다.

  개헌안이 부결된 27일은 토요일이었다. 자유당 간부들은 즉시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 구수(鳩首) 협의하고, 일요일인 이튿날도 부산하게 움직였다. 시민들은 심상치 않은 동정에 의아해 했고 일부에서는 자유당이 전일의 결의를 뒤집으리라는 풍문이 떠돌았는데 다음날인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이 풍문은 사실로 나타났다. 그들은 재적 203명인 경우 개헌 정족수는 그 3분의 2인 135.33·····이라는 순환소수로 나오는데 수학에서 항용하는 약산법(略算法)에 따라 사사오입을 하면 135로 족하다는 논리를 들고 나왔다. 따라서 전전일에 개헌안의 부결을 선포한 것은 계산의 착오에 의한 잘못이니 가결로 정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극도로 소연(騷然)한 의장(議場)에서 앞서 부결을 선포한 최순주는 방망이를 두드려 가결을 선포하고, 야당계 부의장 곽상훈은 노호(怒號)와 통곡이 뒤섞인 가운데 그 방망이를 빼앗아 부결을 선포하는 등 장내는 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힘으로 밀어붙인 자유당의 가결이 숭리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동아일보사사 권 2>, 195~196쪽).

11월 30일자 동아일보 1면은 ‘사사오입으로 개헌안 통과’에 관한 기사들로 뒤덮였다. 머리기사 제목은 「태풍 일과 후에 온 태풍 / 개헌안 통과 정족수 위요(圍繞) / 수라장화한 의사당 / 강 의원 제외, 야당계 일제 퇴장」이다.
1면에 실린 다른 기사들의 제목은 아래와 같다.

· 「위헌 대책위를 구성 / 야당 의원 60명이 서명」
· 「개헌안 통과를 보고 / 이 의장 담화」
· 「3분의 2 이상의 찬성의 의미 / 개헌안은 가결인가 부결인가? / 이종극」
· 「수학엔 에누리 없다 / 사사오입이란 이해할 수 없는 것 / 대법원장 김병로 씨 사적 견해」
· 「개헌안은 통과되었다 / 공보처장 갈홍기 씨 담 / 단수(端數)는 계산에 넣지 않아야 한다」
· 「개헌은 부결된 것이다 / 헌법학자 유진오 씨 담 / 결국 국회 부의장 선포한 대로다」

동아일보는 12월 1일자 1면 머리에 「헌법 개정 공포 / 정부서 12일자로 / 4처 2청 대통령에 직속 / 정부기구 개혁 앞서 임시조치」라는 기사를 올리고 사설은 사사오입 개헌과는 무관한 「은행주 불하 방법의 재검토」를 내보냈다.

  사사오입 개헌을 계기로 강력한 집권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야당세력의 단결이 요청되었다. 11월 30일 우선 61명의 야당계 의원들이 ‘호헌동지회’를 결성하여 원내교섭단체로 등록했고, 재야세력을 총규합한 정당 조직의 움직임도 활발히 전개되어 12월 3일에는 신당 조직추진위원회가 발족하였다. 자유당 내에도 파동이 없지 않아 14명의 의원들이 탈당하는가 하면 4명의 의원은 반당분자로 몰려 제명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은 일부 무소속 의원들을 포섭하여 124석을 확보함으로써 계속 원내 안정세력을 유지하였다(같은 책,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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