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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지로 변모한 동아일보동아일보 대해부 2권 - 1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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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0.20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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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5월 15일 국회에서 이시영의 후임으로 제2대 부통령에 선출된 김성수는 5월 18일 오후 국회 본회의에 참석해서 취임인사를 했다. “공산주의를 격멸하기 위하여 우리와 더불어 싸우고 우리를 원조해주는 여러 민주우방과의 제휴와 친선을 촉진시키는 한편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확보하여 확고부동한 민주주의를 이 나라에 확립하겠다”는 것이 요지였다(동아일보 5월 19일자 2면).


부통령 김성수와 동아일보의 정치적 동행

동아일보의 실질적 창업자이자 사주인 김성수는 그 신문에 절대적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이승만 정부가 수립된 뒤 정치 일선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지만 한국민주당과 그 후신인 민주국민당의 ‘영수’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동아일보는 물론이고 한민당에서도 일제강점기에 친일행위를 한 사람들이 그를 중심으로 강력한 보수조직을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사사 권 2>에는 김성수가 부통령으로서 어떤 길을 걸어갔는지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부통령에 취임한 김성수는 이승만 대통령의 권유로 국무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대통령이 출석하지 못할 때에는 이를 주재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정치조직법 상으로는 부통령은 국무회의의 구성원이 아니어서 발언은 할 수 있어도 표결권은 없었다. 그는 그러나 국정을 바로잡자는 성의에서 열심이었고, 여러 가지의 제안을 통해서 특히 공무원의 처우 개선을 역설하였다. 부정부패를 근원적으로 막는 데는 그것이 제1요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6월 26일 국방부장관 재임 중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사건 등으로 악명 높던 신성모를 주일대표에 임명한다는 이 대통령의 결정에 크게 실망한 김성수는 도저히 그와 더불어 일할 수 없음을 깨닫고 또 이 무렵 병석에 눕는 일이 잦아져서 국정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135쪽).

김성수가 아무리 실권이 없는 부통령이라고 해도 민국당과 동아일보는 그의 정치적 노선을 철저히 지지하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동아일보가 1952년 4월 1일 창립 32주년을 맞아 내보낸 사설(「본보 창간 32주년 돌」)에는 그런 정치적 노선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그것은 이승만 정권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간접적으로 드러낸 시발점이었다.

  (····) 이 나라는 바야흐로 입국(立國)의 정신을 몰각하고 있다. 우리는 안으로 인심을 귀일케 하고 밖으로 외국의 신뢰를 획득하려면 저 유유히 계승할 숭고한 입국정신인 민주주의의 구현에 먼저 노력하여야 하겠거늘 민주주의의 기본조건인 자유를 방기(放棄)하는 경향, 그럼으로써 권력주의로 흐르는 경향은 조장되고 정당화해 가는 것이 이 나라의 꼴인지라 여기에서 민족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절대적 요소인 인심의 귀일과 외국의 신뢰가 양성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라면 기적을 바라는 우둔한 우리일 것이다. 혹은 반문하되 의식적인 혹평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행정부 대 국회의 심각한 대립에서 민중의 진정한 판단이 어떠하다는 것을 냉정히 생각하여 본 일이 있었던가. 지난 2·5 보궐선거와 앞으로 전개되는 지방선거를 위요(圍繞)하고 발생하였고 발생할 허다한 참을 수 없는 사태를 국민적 양심에 묻는 기회를 가져 보았던가. 또한 민주주의적 권리의 최고위에 속하는 언론 출판의 자유의 침해가 공연히 행하여지고 있는 것을 반민주화의 지표로서 중요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일부의 의사만이 공공복지에 합치하고 일반 의사는 이에 무조건하고 추종하여야 한다는 가공할 생각을 버리고 이 나라의 현상을 직시하려는 용의를 가져본 일이 있는가. 그리고 자유의 방기에서 파생하여 이 나라의 정치적 위기, 생활의 위기, 도덕의 위기, 문화의 위기가 층생첩출(層生疊出)하는 모든 사태를 엄중히 비판해보지 않으련가. 국민의 의사와 외국의 관찰은 반문(反問)한 자의 원한 대로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이모저모로 국내외의 정세를 심찰(審察)할 때에 우리는 한심함을 느낀다. 그러나 우리가 한심하다는 것만으로 능사를 삼을 수 없다. 우리는 저 엄중한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의 역량을 집결하고 우방에 호소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그리 하려면 우리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아니 될지니 이 때에 있어서 본보는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본보는 본보의 주지가 소시(昭示)하는 길을 걸어갈 뿐이다. 민족의 표현기관으로서 민족과 더불어 형극의 길을 걸어가되 붓이 뭉그러지도록 그 사명을 다할 것이며 민주주의를 앙양하여 민중과 더불어 권력의 적이 되되 먹물이 마르도록 그 사명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이 중대한 사명을 본보 동인의 성충(誠忠)으로만 감당할 수 있으리오. 본보의 뒤에는 3천만의 성원이 있다는 것을 든든히 여기는 바이다.

이 창간 기념사는 이승만 정권을 직설적으로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강력한 ‘선전포고’를 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조건인 자유를 방기하는 경향” “민주주의적 권리의 최고위에 속하는 언론 출판의 자유의 침해”를 지적하면서 “민주주의를 앙양하여 민중과 더불어 권력의 적이 되되 먹물이 마르도록 그 사명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한 것이다.
1920년 4월 1일 일제의 기만적 ‘문화정책’의 산물로 탄생한 동아일보는 ‘조선 민중의 표현기관’을 자임하면서 ‘민주주의를 지지한다’고 선언했으나 1940년 8월에 폐간당하기까지 그런 주지에 충실한 신문을 만들기는커녕 ‘자치를 청원’하거나 일본의 침략전쟁을 지지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런데 창간 320주년 기념사에서 밝힌 비장한 각오는 그 이후 동아일보 지면에 생생하게 반영된 적이 많았다.


이승만의 직선제 개헌안 국회 제출

1951년 ‘8·15 기념사’에서 이승만은 대통령 직접선거제와 양원제(兩院制)를 위한 개헌을 하자고 주장했다. 외신은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부산 14일 발 AP 합동]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제3주년을 맞이하는 이승만 대통령은 미리 준비된 성명서에서 “대한민국의 탄생과 존립은 대부분 미국과 유엔에 의존한다”라고 요지 다음과 같이 기념사를 발표하였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발전을 위하여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면서 유엔이 공산군 침략자와의 협상에서 정당한 결말을 짓고 모든 자유국가를 위한 집단적 안전보장책이 수립될 것을 희구하여 마지않는다. 우리 민국 정부의 탄생과 존립은 대부분 미국과 유엔에 의존하고 있다. 오늘 조용한 아침 우리가 이 자유의 탄생을 기념하는 이 순간에도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현재 목표로 하고 고난을 겪고 있는 것은 확고부동한 평화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합심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될 희망인 것이다. 우리가 항상 명심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공산진영과 민주진영 간에 전개된 거대한 세계적인 쟁투에 휩쓸려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이  양 사상의 공존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 2자 중 하나만이 생존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세대가 봉착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되는 위대하고 비극적인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는 합심하여 민주주의를 보호해야 할 것이며 만약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공산주의의 희생물이 될 것이다. 나는 우리 정부의 진실한 기초로서 국민이 각자의 정당한 지위를 보장하기 위하여 헌법의 2개 조항 수정을 국회에 요구하였다. 그 중 하나는 대통령선거를 직접선거제로 할 것이며 또 하나는 국회를 양원제로 할 것인데 이것은 우리 국가를 민주주의적으로 건전하고 안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모든 국민들에게 각자가 선출한 국회의원으로 하여금 이 2개 수정안을 지지하도록 요구할 것을 바라는 바이다.

이승만은 이 ‘기념사’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민주주의의 승리를 강조했지만, 그것은 그가 관철하려는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를 위한 수식어에 불과했다. AP통신 기사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승만은 8·15 기념사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일반 국민이 정당의 의미를 철저히 알기 전에는 정당제도를 실시하는 것이 이르다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정당의 제도는 각각 국가의 복리를 위해서 주장하는 정견(政見)으로 되는 것이요 정권을 잡기 위해서 사당(私黨)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은 시기가 와서 전국에 큰 정당을 조직해서 농민과 노동자들을 토대로 삼아 일반 국민이 나라의 복리와 자기들의 공동복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정당(正當)한 정당을 만들 때가 왔다는 것입니다(<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 132쪽).

나라 안팎에 널리 알려져 있었듯이 이승만은 철저한 보수주의자, 반공주의자인 동시에 귀족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농민과 노동자들을 토대로 삼아’ 정당을 만들겠다는 것은 대중을 상대로 한 명백한 기만이었다.
당시 이승만은 국회에서 선출된 대통령으로서 임기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나중에 드러난 바이지만 종신 대통령을 원하던 그에게 강력한 여당은 절실한 것이었다. 이승만은 최대의 목적인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위한 작업을 서둘러, 정부통령직선제에 양원제를 끼워 넣은 개헌안을 10월 17일 국무회의에서 통과시킨 뒤 11월 30일 자신이 직접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했다.
그런데 불가사의하게도 동아일보 10월 18일자는 물론이고 그 며칠 뒤까지의 신문에는 개헌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했다는 기사가 전혀 나와 있지 않다.
동아일보는 12월 2일자 1면 머리에 「대통령, 개헌안을 제안 / 전 국무위원 서명 하 지난달 30일에 / 대통령 직선·상하양원제 창설」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대통령을 국민의 보통·평등·직접 비밀투표에 의하여 선거하며 입법에 신중을 기하기 위하여 국회에 상·하 양원을 두는 제도를 창설하자는 대통령의 헌법개정안은 지난달 27일 국무회의를 통과하여 30일 국회에 제안되었다. 그런데 헌법 제98조 규정에 의하면 헌법 개정의 제의는 대통령이 30일 이상 공고하며 기결(畿決)은 국회에서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하게 되어 있다. 한편 헌법 개정의 제의는 앞서 제헌국회 당시 내각책임제 창설에 관한 제안이 부결된 후 이것이 두 번째의 일이다.


두 개의 ‘자유당’ 탄생과 국회의 개헌안 부결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한 이승만은 개헌을 위한 구체적 작업을 시작했다. 정당을 만드는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 작업의 책임은 이범석에게 떨어졌다.

(···) 대통령의 임기가 반년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개헌안을 통과시키려면 서둘러야 했다. 이승만의 입장에선 국회의 다수가 자신에게 적대적이므로 민의(民意)를 포섭하고 동원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범석의 탄탄한 민족청년단(족청) 조직 기반을 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 가장 조직이 큰 5개 사회단체(대한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노동조합총연맹, 대한부인회)를 자유당 산하 기간 단체로 편입시킨 것도 이들의 전국적인 조직망과 수백만 회원들의 힘을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드디어 12월 17일 이범석을 중심으로 한 자유당이 탄생했다. 그러나 12월 23일 소장파 의원들이 중심이 된 또 다른 자유당이 탄생했다. 당시 정당 등록은 공보처에 하게 돼 있었다. 원래 소장파 의원들은 14일에 등록을 하러 갔다. 공보처는 “결성대회를 마친 후 오라”고 했다. 그래서 결성대회를 치른 23일 공보처에 등록하러 갔더니 이미 17일에 자유당이 등록돼 있으니 다른 이름으로 하라는 게 아닌가. 그러나 끝까지 자유당을 고집해 등록했고, 그래서 의원 중심의 ‘원내 자유당’과 족청 중심의 ‘원외 자유당’이  생겨난 것이다.
  이승만은 개헌을 반대하는 원내 자유당은 무시한 채 개헌을 열렬히 지지하는 이범석의 원외 자유당 결당식에만 선언문을 보내 치하하였다. 이승만은 그 선언문에서 “오늘 자유당 결성식은 나의 반백 년 꿈의 성취를 보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 260쪽).

고의인지 누락인지 동아일보 지면에는 원외 자유당과 원내 자유당 창당에 관한 기사가 전혀 나오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든지 1952년부터 정치에 큰 파동을 몰아올 두 정당이 한국에 생겼다는 사실을 동아일보만 보는 사람들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개헌안 공고기간이 끝난 1952년 1월 28일 국회 본회의에서 표결을 한 결과 재석의원 163명 가운데 찬성 19표, 반대 143표,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이 시기 원내 분포는 민국당 39명, 민우회 25명, (원내) 자유당 93명, 무소속 18명이었다. 대개가 부결될 것이라고 보았지만 엄청난 참패였다. 직선제 지지자들은 국회의원들이 ‘자기들 사사권리(私事權利)’라고 부른 정부통령 선출의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여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그 면도 작용했겠지만, 이미 1951년 5, 6월에 국회는 이승만의 국정 운영에 대한 대안으로 각파 모두가 내각책임제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두 개의 자유당이 발당대회를 가졌을 때도 마찬가지여서, (원내) 자유당, 민우회, 민국당 모두 내각책임제를 선호하고 있었고 그것이 투표로 연결된 것이었다. 또 이 시기에 대통령직선제는 무리였다. 정당 하나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고, 그만큼 민주주의 훈련이 덜 되었다.
(···) 그래서 심지어 표결 직전에 이승만의 추종자인 이진수 의원조차 개헌안을 6·25 사변 종료 시까지 보류하자는 토의를 제안할 정도였다(<이승만의 정치 이데올로기>, 141쪽).

이번에도 동아일보 지면에는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졌다.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었다는 사실이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은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보도 금지’라는 ‘지침’을 내렸기 때문일까?


‘부산 정치파동’과 동아일보의 침묵

국회가 개헌안을 부결시키자 이승만은 “국회의원이 잘못하면 국민의 투표로 소환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통해 반대표를 던진 의원들을 협박했다.

  그 성명의 정신을 이어받은 ‘원외 자유당’은 18개 사회단체들을 규합해 개헌안 부결 반대 민중대회를 개최하는 한편, “민의를 배반한 국회의원들을 소환하라”는 소위 국회의원 소환운동을 전개했다. 1952년 1월 말부터 부산에는 백골단, 땃벌떼, 민족자결단 등 각종 단체들 명의로 된 “살인국회를 해산하라”는 구호 및 각종 전단이 넘쳐흐르는 등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국회는 1952년 4월 17일 개헌선을 한 명 초과하는 123명의 연서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 281~282쪽).

동아일보는 ‘개헌안 반대 민중대회’는 물론이고 백골단과 땃벌떼 등이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벌인 테러 성격의 움직임을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대통령 이승만이 국회에 제출한 직선제 개헌안이 압도적 반대로 부결되면 폭력집단들이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데서 시작된 일련의 사태를 ‘부산정치파동’이라고 한다. 그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2권> 282~291쪽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부산정치파동’ 항목 참조)

  1952년 4월 17일 국회에 내각제 개헌안이 제출된 뒤 4월 25일에는 시·읍·면의원 선거가, 5월 10일에는 도의회 의원 선거가 치러질 예정이었다. 서울을 비롯한 한강 이북 지역은 전쟁을 이유로 지방의원 선거에서 제외되었다.
이승만은 지방의원 선거를 대통령 직선제 개헌에 적극 활용했다. 국회가 지방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휴회에 들어간 뒤 국회의원들이 모두 출신지역으로 내려가자 원외 자유당 중앙총본부에서 보낸 지령문에 따라 청년단체들이 내각제 개헌안에 서명한 국회의원들을 공개적으로 성토했다.
  이승만세력에게 호재가 된 것은 내각제 개헌 추진의 선봉에 섰던 국회의원 서민호가 4월 22일 지역구인 전남 순천에서 육군 대위 서창선을 권총으로 사살한 사건이었다. 한 요정에서 서민호의 경호원과 서창선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서창선이 권총을 뽑아들자 서민호가 호신용 권총으로 그를 사살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전시인 당시 국회의원을 비롯한 요인들은 몰래 총기를 휴대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이 서창선을 시켜 서민호를 본보기로 잡기 위해 꾸민 일이었으나 사건의 파장은 예상 외로 확대되었다.”
  지방선거는 이승만을 추종하는 원외 자유당과 친여세력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지방은 관청, 자유당, 어용조직의 독무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승만세력이 ‘서민호 사건’을 야당 공격의 재료로 이용한 데다 전시의 공포분위기까지 곁들여져서 야당과 무소속 후보들은 참패하고 말았다.
  5월 14일 국회는 “서민호의 살인은 정당방위이고, 구속은 정치적 책략”이라는 이유로 그에 대한 석방 결의안을 가결했다. 5월 19일 서민호가 석방되자 부산시내에서는 백골단, 땃벌떼, 민족자결단 등 정체불명의 단체들이 관제데모를 벌이면서 “살인 국회의원 석방한 국회는 해산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정부와 국회, 대법원의 청사를 에워쌌다.
지방의회와 원외 자유당을 통해 국회를 압박할 수 있게 된 이승만은 5월 24일 공석 중인 국무총리에 장택상을 임명하고 전 총리 이범석을 내무부장관 자리에 앉혔다. 장택상은 자신이 이끌던 신라회 회원인 국회의원 21명을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지지하는 쪽으로 유도했다. 
이승만은 5월 25일 자정, “경상도와 전라도에 아직 남아 있는 공비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와 전라북도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언론 검열이 실시되는 한편 25일 밤부터 내각책임제 개헌 추진을 주동한 서민호 등 의원들이 체포되었다. 그리고 26일에는 국회에 등원하는 의원 50여명이 탄 버스를 헌병대가 크레인으로 끌고 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들 가운데 12명은 이튿날, “국제공산당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로 구속되었다. 국회는 5월 28일 비상계엄령을 해제하라는 결의안을, 30일에는 구속된 의원들을 석방하라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5월 28일(미국시각) 국제연합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은 “헌법과 계엄법을 위배한 계엄령의 즉각 해제”를 요구하는 성명을 냈다. 그러나 이승만은 묵묵부답이었다.

김성수의 부통령직 사임

동아일보가 개헌 문제에 관한 기사를 처음으로 내보낸 것은 1952년 4월 19일자 지면이었다. 개헌추진위원회의 성명을 그대로 전달한 기사(「민중의 오랜 열망을 / 구체화시킨 것이다」)가 바로 그것이었다.

  개헌추진위원회에서는 17일 123 의원의 서명으로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안하는 동시에 개헌안을 제안하게 된 동기와 그들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표명하였다.
  1)123 의원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국무원책임제 개헌안이 오늘 국회에 제출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거듭되어온 실정을 제도의 개혁으로써 해결해 보려는 민중의 오랜 열망을 구체화시킨 것이다. 즉 정부의 무원칙한 시책에서 초래되는 행정의 빈곤과 혼란을 책임의 소재가 명백한 일정한 정책에 의하여 혁신 광정(匡正)해 보려는 일반 국민의 강한 정치적 욕망을 입법화시키려는 것이다.
  1)그러므로 이 초안은 처음부터 완전무결한 것으로서 제출된 것은 아니다. 123명의 찬성 의원 중에서도 약간 명의 견해와 해석의 차이가 있는 것이며 상하원 기타 문제에 있어서도 많은 추가와 수정을 할 여지를 남기고 있다.
  1)무릇 어떠한 입법일지라도 민중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아니 된다. 오늘의 민의가 현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우매한 국회의원 소환 운동에 있지 않고 현 제도를 개혁하려는 책임정치의 구현에 있다는 것은 너무나 명료한 일이었다. 이는 말하지 않는 국민의 양심과 민족의 지혜가 그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완전한 수정을 장래에 미룰지라도 미비한 대로의 이 초안을 상정치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전혀 그 때문이다.
  1)민족의 심장이며 국가의 두뇌인 국회의원 제위는 정당한 민족의 양심 위에서 이 초안을 검토할 것이며 일반 국민은 이 초안이 자기의 생활 운명에 어떠한 영향을 가져오는가를 깊이 연구해 볼 것이다.

개헌추진위원회는 이승만 세력이 온갖 수단을 다해 성사시키려던 대통령직선제를 저지하기 위해 123명의 국회의원을 규합해 어렵사리 내각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만 전인 4월 1일자 ‘창간 32주년 기념사’를 통해 이승만 독재에 맞서 싸우겠다는 결의를 밝힌 바 있는 동아일보는 내각제 개헌안 국회 제출에 관해 사설로 논평하지 않았고, 국민의 반응을 전달하지도 않았다.
부산 정치파동이 살벌하게 진행되던 5월 29일 부통령 김성수가 국회에 사임서를 냈다. <동아일보사사 권 2>에는 그 배경과 과정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위장된 민의를 배경으로 이승만은 반대세력의 타도에 착수하였다. 첫 조치로 5월 23일 전 국무총리 이범석을 내무부장관에 임명하여 경찰력을 강력히 장악하고, 다음날에는 부산을 포함한 경남·전남북 일대에 공비의 준동이 심하다는 이유로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여 영남지구 계엄사령관에는 원용덕 소장을 임명하였다. 원용덕은 즉각 야당 의원들의 탄압에 나서, 일단 구금되었다가 국회의 결의로 석방되어 불구속으로 재판을 받고 있던 서민호 의원을 당일로 구속하고 50여 명의 의원들이 탑승한 국회버스를 헌병대로 끌어다가 전원 억류하였다. 다음날인 27일 대부분 석방하였으나 이로부터 수 일간에 걸쳐 12명의 의원을 체포 구금하여 놓고, 이들이 국제공산당의 비밀공작비와 관련이 있다고 공표하였다. 이리하여 민심이 극도로 긴장된 가운데 7개 도의회는 각각 국회 해산을 결의하였고, 29일부터는 신문의 사전 검열제가 실시되어 해방 후 처음으로 삭제된 지면을 보게 되었다.
  이 터무니없는 조작극에 대항하여 국회는 28일 부산지구 계엄령 즉각 해제를 결의하고, 30일에는 체포된 국회의원 전원 석방을 결의하였으나 정부는 이를 묵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국회를 가리켜 ‘하늘 아래 둘도 없는 국회’라 매도하고 해산해 버릴 의도를 감추지 않았다. 부통령 관저에까지 몰려와서 국회 해산을 외치는 불량배들의 난동 속에 대노한 김성수 고문은 부통령 사임서를 국회에 송치하여 이승만을 준열히 규탄하고 그 자리를 물러났다. 동 사임서는 계엄 하의 검열로 신문에는 게재되지 못하였으나 29일의 국회 본회의에서 낭독되어 그 내용이 널리 항간에 퍼져서 민심에 심대한 충격을 주었다(164쪽).

김성수의 사임서에는 이승만의 독재와 악정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 담겨 있었다.

  (···) 현 정부의 수반인 이 박사는 충언과 직언을 염오(厭惡)하고 아첨만을 환영하며 그의 인사정책은 사적 친분으로 일관된 중에도, 자기의 하료(下僚)조차 항상 시기의 눈으로 보아 모든 국사를 그 자신이 일일이 직결(直決)하려 하고, 자신이 임명한 장관을 견제하기 위하여 그의 심복인을 차관에 배치하고, 차관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른 심복인을 국장에 임명하는 것과 같은 수단으로써 그의 밑에서는 아무도 가진 바 역량과 포부를 발휘할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 사변 발발 전에는 국민을 기만하며 저 무수한 애국자를 희생시킨 천추의 통한사를 저질러 놓고도 한 사람도 책임을 지고 국민의 앞에 사과하는 자가 없었을 뿐 아니라 도리어 마치 구국의 영웅이나 된 양 권력을 남용하여 (···) 중대한 인권 유린을 감행하였으며 (···) 다수의 귀중한 자질(子侄)들을 소위 국민방위군이라는 명목 하에 기한(飢寒)에 병들게 하고 참혹하게 폐사(斃死)케 하였던 것입니다. (···) 신성모는 가장 비민주적인 권모와 술수로써 국정을 혼탁(溷濁)케 하여온 장본인으로 (···) 죄당만사(罪當萬死)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 징벌을 주기는 고사라고 외교의 요직(주: 주일대사)에 등용하여 국가를 대표케 한다는 것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 정부에서는 여전히 위헌 위법 부당의 처사를 거듭할 뿐 아니라, 소위 신당운동을 일으켜 우리나라의 애국적인 민주세력을 분열 약화시키기에 갖은 책략을 다하였고 (···) 대통령직선제를 압도적 다수로 가결하고 국무원 책임제를 재적의원 3분의 2의 연명으로 제안한 국회를 ‘민의 위반’이니 ‘의회 독재’니 ‘반민족적’이니 하여 험구 욕설할 뿐 아니라 (···) 일부 정상배를 선동하고 관력(官力)을 이용하여 소위 소환운동, 국회의원 규탄운동을 개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시 하의 사회질서를 교란하고 도처에 소요를 일으켜 국민을 불안 공포에 떨게 하고 (···) 심지어 난도(亂徒)들은 나의 주거를 포위하고 (···) 가장된 민의와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건전한 이성을 말살하고 절대권력을 장악하려는 전형적 독재주의의 노선을 걷는 것입니다. (···) 불법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 허무맹랑한 누명을 날조하여 (···) 50여 명의 국회의원을 체포 감금하는 폭거를 감행하였습니다. 이것은 곧 국헌을 전복하고 주권을 찬탈하는 반란적 쿠데타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 여기에 있어서 나는 이 이상 단 하루라도 이승만 정부에 머물러 있지 않기로 하였습니다(같은 책, 165쪽).

부통령직 사임으로 김성수가 이승만 정권과 결별하자 동아일보는 권력과의 관계에서 홀가분해질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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