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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초기의 동아일보동아일보 대해부 2권 -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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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10.06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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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부터 남한에서는 내전이나 다름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여순군반란’에 참가한 군인 7백여명은 민간인 가담자 1300명과 함께 유격부대를 이루어 지리산을 중심으로 경남의 산청·함양·거창·하동·남해, 전남북의 무주·장수·임실·남원·순창·구례·곡성·고창·장성·무안 등지에 걸치는 유격구를 만들고 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밖에도 오대산과 태백산을 중심으로 영월·제천·단양·영주의 일부에 걸치는 오대산유격구, 영광·함평·장흥 등지를 중심으로 하는 호남유격전구, 태백산·소백산·안동·청송에 걸치는 태백산유격전구, 경북의 경주·영천·영일·청도·경산과 경남의 양산·울산·동래 일대를 포함하는 영남유격전구와 제주도유격전구가 형성되었다. (·····)
  남쪽의 이승만 정권에 불안요인이 많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북쪽의 김일성 정권은 비교적 빨리 안정되어 갔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정식 인민위원회로 발족시켜 통치체제를 더욱 확고히 한 김일성 정권은 경제력을 급격히 향상시켜 갔다. 1949년에는 공업생산력이 8·15 이전인 1944년보다 20%나 향상되고 농업생산도 같은 시기보다 1.4배가 증가하여 그 국민총생산은 8·15 전에 비해 2배나 커졌다고 말할 정도였다. (·····)
  김일성 정권은 소련과 경제·문화협정을 맺고(1949.3.17.) 다시 6개 보병사단과 3개 기계화부대, 비행기 150대의 원조를 내용으로 하는 군사비밀협정을 체결했다. 또한 중국 공산군과의 군사비밀협정으로 중공군에 참가하고 있던 약 5만여명의 조선인을 인민군에 편입시켜 군사력을 급격히 강화했다(1949.3.18.). 반면 이승만 정권은 국내정치의 실패를 호도하기 위해 북진통일론을 내세우고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를 호언했다. 그러나 군사력의 열세는 현격했고 정치·경제적 불안도 가중되어 가고 있었다(<고쳐 쓴 한국현대사>,  277~279쪽).


  국방부의 ‘허위 보도자료’ 받아쓰기

  1950년 6월 26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에는 충격적인 기사가 올랐다.

  괴뢰군 돌연 남침 / 38선 전역에 비상사태 / 정예국군 적을 요격 중 / 국군 방위 태세 만전 / 적의 신경전에 동요 말라

  지난 25일 새벽 5시로부터 아침 8시 사이에 개성, 장단, 의정부 동두천, 춘천, 강릉 등 38선 일대에 걸쳐 북한괴뢰집단 인민군은 돌연 남침을 기도하여 왔으므로 우리 정예 국군 장병은 즉시 이를 요격 중에 있다. 그런데 국방부 정훈국장 이선근 대령은 동 전투상황과 경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금 25일 조효(早曉) 5시부터 8시 사이 38선 전역에 걸쳐 이북 괴뢰집단은 대거(大擧)하여 불법 남침하고 있다. 즉 옹진 전면으로부터 개성, 장단, 의정부 동두천, 춘천, 강릉 등 각지 전면의 괴뢰집단은 거의 동일한 시각에 행동을 개시하여 남침하여 왔고 선척(船隻)을 이용하여 상륙을 계획하였으므로 목하 전기 각 지역의 우리 국군부대는 이를 요격하여 긴급 적절한 작전을 전개하고 있다. 그중 동두천 방면 전투에서는 적측이 전차까지 출동시켜 내습하였으나 아군 대전차포에 격파당하고 말았다.
  금차 이들의 무모한 내습은 제2차 총선거 이래 대내 대외 하여 가일층 융성 발전되는 우리 대한민국을 침해 파괴함으로써 괴뢰집단 자가(自家)의 퇴세(頹勢)를 만회하려는 의도 아래 소위 ‘조통(祖統)’을 통하여 화평통일이니 남북협상이니를 모략 방송하다가 하등의 반향도 없으므로 초조한 끝에 감행하게 된 공산도배의 상투 수단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전과는 추후 발표할 것이며 어떤 모략선전에도 속지 말고 군에 협력하여 주기를 바란다. 이제 군으로서는 저들 반역 비도(匪徒)에 대하여 확고한 결의 아래 단호한 응징의 태세를 취하여 각지에서 과감한 작전을 전개하고 있으니 전 국민은 우리 국군 장병을 신뢰하며 미동도 하지 말고 각자의 직장에서 만단(萬端)의 태세로 군의 행동과 작전에 적극 협력하기 바라는 바이다.

북한 인민군이 남한을 공격하기 시작한 1950년 6월 25일 현재 양측의 전력을 비교하면 북한이 훨씬 앞서 있었다.

  북한은 그 동안 치밀하게 전쟁 준비를 해온 반면, 남한은 이승만의 허풍에 가까운 북진통일론에 대한 미국의 견제로 인해 전쟁에는 무방비 상태였다. 1950년 6월 현재 북한은 13만5천여 명의 지상군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이때 대한민국의 병력은 정규군 6만5천여 명, 해안경찰대 4천여 명, 경찰 4만 5천여 명 등이었다.
  북한군은 소련제 T-34형 탱크 240여 대, 야크 전투기와 IL 폭격기 2백여 대,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반면 남한군은 6·25 직전까지 대공포화가 없는 지역의 경찰만을 위해 쓸 수 있는 5대의 항공기 이외에는 더 허용되지 않았고, 탱크와 기갑 차량은 전무했으며, 포병은 탱크를 격파할 수 없는 바주카포와 화포만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또 남한군은 단지 15일 동안 국방 작전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보급품만 가지고 있었다(<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 46~47쪽). 

그런 상황에서 북한군이 먼저 38선 전역에서 남쪽으로 기습공격을 가해왔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능히 추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국방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보도자료’를 계속 발표했고,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은 그것을 받아 쓰기에 급급했다. 먼저 6월 27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를 보기로 하자.

  국군 정예 북상 총반격전 전개 / 해주시를 완전 점령 / 대한해협서 적함 격침 /종합전과 발표 / 26일 오전 8시 현재

  과감 무쌍한 반격 전투 중에 있는 아국군의 활약은 혁혁한 무공을 수립하고 있는데 26일 오전 8시까지의 그 전과는 다음과 같다.
  [국방부 보도과 발표] 1)천인공노할 공비(共匪)의 대거 남범(南犯)에 대하여 아국군은 육해군의 긴밀한 협동작전을 전개하여 전선(前線)을 정리하는 동시에 각 전선 도처에서 맹렬한 공격을 가하고 있다. 옹진 방면의 부대는 통신 연락이 불량하여 명확치 않으나 그 일부가 해주시에 돌입하였으며 일부는 즉시 전선을 수축(收縮) 중에 있고 임진강 방면에 있어서는 적의 도강 기도를 분쇄하고 과감한 반격을 실시하고 있으며 포천 지구에 있어서는 의정부 전(前) 지점까지 진출한 적 전투부대를 지난 밤 육박 공격 기타로 그 주력 태반을 격파하였으며 아국군은 속속 북상 중에 있다. 춘천 방면에 있어서는 남하해 온 적에 대하여 철저한 타격을 가하고 공세로 전환한 결과 적은 북방으로 도피 중에 있으며 38선 전면에 있어서 국군은 완전한 반격 태세를 취하고 적을 압박하고 있다.
  2)동해안의 아해군 부대는 지난밤 11시 40분경 부산 이남 0킬로 지점에서 600톤 급의 국적 불명의 선박 1척을 발견, 신호를 하였으나 불응하므로 접촉한 결과 무장군을 만재(滿載)한 소련의 선박임을 확인하였으며 해(諧) 선박은 남하를 계속하므로 아해군은 즉시 공격을 개시하여 금효 4시경 격침시켰다. (·····)
  4)현지에서 들어온 확실한 정보에 의하면 포천, 동두천 지구에 있는 적 부대는 소련 장교에 의해서 지휘되고 있으며 적 전차부대의 반수는 소련 장병이 탑승하여 조종하고 있고 강릉에 들어온 확보(確報)에 의하면 소련군 잠수함 1척, 순양함 1척은 괴뢰공비의 남한 상륙을 지원하고 있다.

국방부가 발표한 ‘보도자료’는 그 내용 거의 전부가 허위였다. 북한군의 남침 30여 시간 만에 국군이 반격을 가해 해주를 점령했다거나 38선 전면에서 반격 태세를 갖추고 적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특히 소련군이 전차부대를 몰고 참전하는가 하면 잠수함과 순양함으로 북한군의 남한 상륙을 지원했다는 것은 완전한 날조였다.
국방부가 ‘국민과 군의 사기’를 위해 그런 허위사실들을 ‘공표’했다고 선의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결과 안심하거나 방심한 국민들이 피란 시기를 놓치거나 정부와 군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고 말았다. 동아일보를 비롯한 언론은 그런 보도의 나팔수 노릇을 한 셈이 되었다.


허위 보도를 뒷받침한 동아일보 사설

동아일보 6월 27일자 1면에 실린 사설(「괴뢰 침공에 총력적 방위」) 역시 국방부의 허황한 발표를 바탕으로 독자들에게 근거 없는 ‘안도감’을 심어주려고 했다.

  지난 25일 오전 5시를 기하여 이북 괴뢰군은 38선 전역을 침범했다. 물론 충용 무비한 우리 국군 정예의 반격에 의해서 괴뢰군의 침범은 격퇴 저지 되었거니와 그러나 38선 전역의 비상사태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추측된다. 괴뢰군의 이러한 침범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요 우리 정부 수립 이래 거의 매일처럼 거듭되어 온 것이므로 이제 새삼 놀라워 할 일은 아니려니와 그러나 그들의 침범 규모가 종래보다 크다는 사실과 그들의 주력이 개성 장단, 포천 등지를 향해서 집결되었다는 사실은 종래의 어느 침범에 대해서 보다도 우리의 더 큰 관심을 요청하고 있다. (·····)
  물론 우리 국군의 사기는 충천하고 있어 최전선에서는 우세 내지 승전을 거듭하고 있거니와 그러나 총후(銃後)가 든든하지 못하다고 하면 최종의 승리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명심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즉 전투 수행에 지장이 없도록 정치적, 경제적 국민생활을 규제하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이 단계에 있어서는 여하한 불평불만도 용납되지 못할 것을 명심하는 것은 우리 국민의 의무려니와 그렇더라도 우리 정부가 국민의 불평불만을 최소한도로 국한시키도록 국민생활을 유루(遺漏) 없이 규제하는 것은 우리 정부의 임무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군사적 대세는 이미 우리 편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으니 우리가 총후만을 좀 더 잘 지킨다고 하면 최종적 승리는 틀림없이 우리의 것이다. 
  (···) 군사적 승리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실정에 있으매 우리 국민들이 평상시와 같은 냉정한 태도로 생업에 종사만 한다면 이 비상사태는 며칠 뒤에 가서는 평온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라도 속히 안정된 생활을 고대한다면 평상시와 같은 냉정한 태도로 생업에 종사하는 것 이외에 다른 도리는 없다. 그리고 정부에 대하여 우리가 원하고 싶은 것은 쌀 매점자를 철저히 조사하여 이 쌀을 출시(出市)케 하는 동시에 지방미 도시 반입을 위한 기차 및 트럭 등에 대한 비상조치를 긴급히 취해 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만 된다면 총후의 태세도 역시 반석 위에 서게 될 것이다.

이 사설은 “충용 무비한 우리 국군 정예의 반격에 의해서 괴뢰군의 침범은 격퇴 저지되었”다면서 “군사적 대세는 이미 우리 편에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으니 우리가 총후만을 좀 더 잘 지킨다고 하면 최종적 승리는 틀림없이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동아일보사는 6월 26일에 이미 “국군은 후퇴를 거듭하고 적군은 전차를 선두로 물밀 듯 쳐내려 온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는 사실이 <동아일보사사 권 2>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 6월 26일 새벽에는 국군이 후퇴를 거듭하고 적군은 전차를 선두로 물밀 듯 쳐내려 온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적의 진격은 너무나  급속도여서 27일에는 의정부를 거쳐 선봉은 미아리 근처까지 육박해 왔다. 외국기관에 출입하던 정인영 기자는 27일 아침, “재경(在京) 기관들이 철수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알려왔다. 사태가 그렇게 되자 아침 호외를 낸 후 최두선 사장은 전 사원을 모아놓고 “우리는 적에게 몰려 일단 해산한다”고 선언하고, 신문사가 갖고 있는 은행 예금을 찾아서 상하의 구별 없이 균등하게 분배하였다. 이날 정오 무렵에는 북쪽에서 밀려오는 피란 농민들이 농우를 끌고 서울 시내를 지나가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고, 동북과 서북 두 방면에서는 포성이 시내에까지 울려왔다.
  오후 4시쯤 외근기자가 모두 편집국에 모여들었다. 전황은 절망적이어서 더 이상 취재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텅 빈 공장으로 내려가 호외를 발행하기 위해서 문선(文選)을 시작했다. (···) 공무국장 이언진이 손수 조판을 하여 3백장 가량의 호외를 수동기로 찍어냈다.
  「적, 서울 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 혈투 중」이라는 마지막 호외는 이처럼 기자들의 손으로 찍혀 나왔고, 그들은 시경에서 지프차를 빌려다가 이것을 시청 앞, 광화문, 중앙청, 안국동의 코스로 시내에 살포하였다. 이미 적의 포탄이 산발적으로 서울 시내에까지 날아드는 마지막 순간이었다(111쪽).

동아일보가 6월 27일 오후에야 「적, 서울 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 혈투 중」’이라는 호외를 내는 대신 26일 밤에 “국군이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는 정보를 본지 또는 호외를 통해 시민들에게 알렸다면 그 뒤의 ‘한강다리 폭파’로 인한 희생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동아일보 사원들이 27일 늦게 호외 3백장을 뿌린 ‘용기’는 인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27일 아침 신문에 국방부의 허위 보도자료에 기대어 ‘국군 필승’ 투의 사설을 내보낸 것은 씻을 수 없는 오보의 보기라는 냉혹한 비판을 받아야 마땅하다.


피란길을 막은 이승만의 ‘사기 행각’

6월 25일 전쟁이 터진 직후 국가원수이자 국군통수권자인 이승만이 벌인 ‘사기 행각’은 나중에 국민들을 분노에 떨게 만들었다.
역사학자 서중석은 인터넷신문 프레시안 2013년 8월 14일자에 실린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 한국전쟁, 첫 번째 마당」에서 이승만의 행태를 아래와 같이 전했다.

  (···) 6월 25일 일요일 당일엔 국무회의 같지도 않은 국무회의, ‘간담회’라 고도 불리는데 그걸 열었을 뿐이다. 거기서 서로 잡담 비슷한 걸로 돼 있지, 대책다운 대책을 세운 게 없다.
  대통령은 6대 독자라 그런지 자기 목숨을 굉장히 중시했던 분 같다. 그날(6월 25일) 밤이 되니까 불안해졌는지, 피신하겠다고 했다. 존 무초 초대 주한미국대사가 오니까 무초 대사에게 “피신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계속 했다. 내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에 있는지 아느냐, 내가 없으면 이 나라 큰일난다는 식의 이야기였다. 무초 대사가 오히려 말렸다. “당신이 피신하면 군은 붕괴한다. 모든 방어 능력을 상실한다. 당신이 지켜야 한다. 우리가 당신을 보호해주겠다”고. 그래서 그날은 이 노인네가 안 움직였다. (·····)
  신성모 국방장관과 채병덕 총참모장은 “우리가 이기고 있다”는 헛소리를 했다. 그러자 6월 26일 밤에 열린 심야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은 수도 사수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같은 시간에 열린 비상국무회의에서는 수원 천도 결정을 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이 대통령은 6월 27일 새벽 2~3시경 서울역에 비상 열차를 세워놓고 거기 타버렸다. 서울을 떠난다는 이야기를 장관들에게도, 군 수뇌부한테도, 국회에도 일절 안 하고 혼자 가버렸다. 비밀이 새나갈까 걱정돼서 그랬는진 몰라도, 다른 누구한테도 얘기 안 하고 비서진한테만 얘기해서 그 열차를 끌고 대구까지 내려갔다. 그런데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엔 다시 대전으로 올라갔다.
  (···) 대전에서 대통령이 방송국 책임자를 불러 자기 말을 전국 방송으로 내보내게 했다. 거기서 녹음한 거다. 우리가 이기고 있으니 안심하고 있으라는 그 유명한 거짓말 방송을 6월 27일 밤 10시에서 12시 사이에 내보냈다.
  하지만 그땐 이미 미아리 근처에서 쿵쾅거리고 있었다. 인민군이 거기까지 내려온 거다. 오죽하면 “이 방송 이대로 안 된다”고 해서 27일 자정쯤 방송국에서 꺼버렸겠나. 전쟁이 나고 나서 처음으로 나간 대통령의 방송이 그랬다. 대통령이 그렇게 무책임할 수가 없었다.
  그 직후인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에 한강 다리가 폭파됐다. 윗선에서 지시한 일이었다. 이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피란을 못 갔다. (그런데) 대통령은 대전에 가서 비상국무회의를 주재하다가 7월 1일에 또 피신했다. 대전이 함락되는 건 7월 20일이다. 그러니 적어도 7월 10일 이전에는 그렇게까지 위태롭다고 볼 수가 없었다. 피신할 준비를 하더라도, 7월 초까지는 대통령이 전체 상황을 파악하면서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7월 1일 새벽 3시에 이번엔 대구 쪽으로 가면 게릴라 같은 게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호남선을 타고 목포로 갔다. 그러고 나서 목포에서 또 배로 부산까지 갔다. 그런 식으로, 대통령은 전쟁 났을 때 피신만 하고 다녔다.

6월 27일 밤 이승만이 대전방송국에 지시해서 서울중앙방송국을 통해 내보내게 한 담화문은 내용 자체가 국민을 상대로 한 사기이자 협잡이었다.

  정부는 대통령 이하 전원이 평상시와 같이 중앙청에서 집무하고 국회도 수도 서울을 사수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일선에서도 충용무쌍한 우리 국군이 한결같이 싸워서 오늘 아침 의정부를 탈환하고 물러가는 적을 추격 중이니 국민은 군과 정부를 신뢰하고 조금도 동요함이 없이 직장을 사수하라(한수영, 「한국전쟁기 도강파와 잔류파」, 역사비평편집위원회 엮음,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 <역사비평> 통권 50호 기념호 별책, 역사비평사, 2000,  193쪽).

이승만 정부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쯤 한강다리를 폭파했다.

  폭파를 목격한 이형근은 “아비규환이니 인류의 비극이니 하는 것은 그때의 정경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목격자는 “북쪽 두 번째 아치를 끊었는데, 눈 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참상이었다.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사람들이 손으로 밑바닥을 긁으며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하지(下肢)만을 잃고서 어머니를 부르고 있었다. 50대 이상의 차량이 물에 빠졌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미군 장교는 50명에서 80명이 폭사했을 것으로 추정하였고, 다른 증언자는 4천명 이상의 사람이 다리 위에 있었다고 말했다. (·····)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자, 이승만 정권은 나중(8월 28일)에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인 대령 최창식을 ‘적전비행죄’로 체포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최창식 혼자서 폭파 결정을 내렸을까? 그러나 최창식 혼자서 그 책임을 뒤집어썼다. 바로 이런 무책임과 기만에서부터 이승만 정권은 무너지고 있었다(<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 59~60쪽).


98일 동안 신문 못 낸 동아일보

동아일보는 1950년 6월 28일자를 마지막으로 한동안 신문을 낼 수 없었다. 경영진을 비롯한 사원들이 피란을 떠났기 때문이다.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내려간 국군이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과 함께 반격에 나서 9월 28일 서울을 탈환하자 동아일보는 10월 4일자부터 신문을 다시 낼 수 있게 되었다. 타블로이드 2면으로 발간된 10월 4일자 1면에 실린 「속간사」는 아래와 같다.

  6월 28일 이래 휴간하였던 본보는 이제 다시 나오게 되었다. 다시 나오게 된 이 사실을 우리는 만천하 독자와 더불어 즐기고자 한다. 속간하게 되었다는 이 간단한 사실의 배후에는 이 나라 이 민족의 운명을 쌍견에 걸머지고 혈전 고투한 충용 무비한 우리 국군과 53개 민주우방의 물심양면의 적극적인 원조와 유엔군의 고귀한 희생을 내포한 기나긴 석 달 세월이 흐르고 또 흘러 갖은 신고(辛苦)와 공포와 기아, 아니 생사의 노도(怒濤)가 교착(交錯)한 무거운 암흑과 같은 석 달 세월이 천추와 같이 흐르고 또 흘렀다. 그 동안 우리의 설움과 억울함이야 다 어떻게 표현할 수 있으리오. 이제 그 저주받은 암담한 세월은 지나가고 광명과 축복의 날이 왔다. 대한민국 정부의 서울 환도(還都)는 실현되고 우리의 가슴에는 새로운 환희와 용기가 넘쳐흐른다. 모든 일을 일장의 악몽으로 잊어버리고 새로 찾은 우리의 생을 즐기고 빛내기 위하여 전력을 다할 때는 왔다. (·····)
  이제 우리는 알았다. 자유 없이 살 수 없음을. 그리고 자유가 얼마나 귀중한가를. 동시에 우리는 공산주의가 얼마나 악착스러운 인류의 적인가를 뼈에 사무치게 알았다. 이제야말로 공산주의를 이 지상에서 말살하고 민주주의의 기치를 높이 들고 53개 민주우방과 어깨를 겯고 민주주의를 이 나라에 확립하는 사업의 위대함과 광영스러움을 우리 몸소 체득하였다.
  이 광영스러운 사업을 추진함은 본보 창간 이래의 사명이던 바 금반의 민족적 수난을 극복하고 이제 속간하게 되는 이 마당에 일층의 노력과 분발을 독자 제위 앞에 맹서하는 동시에 그동안 제반 악조건에 의하여 언론기관으로서의 사명을 다할 수 없었음을 궤감(潰感)히 생각하고 심심한 사과를 올리는 바이니 관용하고 배구(倍舊)의 편달과 애호가 있기를 간망하는 바이다.

동아일보는 국군과 유엔군의 서울 탈환에 감격한 나머지 ‘광명과 축복’의 날이 왔다고 사설에 썼으나 그런 시간은 길지 않았다. 1951년 1월 4일 중국군의 대공세에 밀려 다시 서울을 버리고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유엔에 때 이르게  ‘전후 처리’를 요망

속간된 바로 그날부터 동아일보 지면은 국군과 유엔군의 거침없는 ‘북진’에 관한 기사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1950년 10월 4일자 1면 머리에는 「제3사단 고성을 점령 / 국련군의 북한 진격로는 5개소 / 최선발 부대는 원산시에 육박」이라는 기사가 실렸고, 그 옆과 아래에는 「파죽지세 북상 / 괴뢰군 신병으로 저지 기도」 「중앙선을 돌파 / 잠복한 적을 완전 섬멸」「괴뢰병력을 근멸(根滅) / 소제안 불수락은 확실」이라는 기사가 자리 잡고 있다.
동아일보는 10월 6일자 1면에 실은 「이북 진격을 유엔에 요망」이라는 사설을 통해 유엔이 ‘전후 처리에 대한 결의안’을 통과시켜 달라고 호소했다. 전쟁이 진행 중인데 국군과 유엔군의 승리가 확정된 것으로 보고 그런 사설을 올린 것이었다.

  남북통일은 8·15 이후 이 민족의 숙원일 뿐 아니라 1947년 이래 유엔 자체의 과업이었다. 세계평화를 위한 유엔의 한국통일안은 이북 괴뢰의 완강한 거부와 철의 장막 정책에 의하여 그 실현을 볼 수 없었고 가능 지역의 선거에 의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그 국제 승인을 보았다. 한국통일의 주체는 확립되었으나 통일 실현의 방법으로서는 끝끝내 평화적 방법을 견지하여 유엔한국위원회에 의한 외교적 절충과 더불어 국내적으로는 민주적 건설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평화적인 노력은 그러나 저 6월 25일 포악무도한 동족살상의 침략으로써 보답되었다.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전 세계 민주우방은 의분에 떨며 분연히 궐기하였고 고귀한 성혈(聖血)을 이 땅에 흘리며 3개월간의 혈전 고투 끝에 드디어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용감한 우리 국군이 원산에 육박하고 있는 이때에 유엔 총회는 하루속히 이북 진격과 함께 전후 처리에 대한 결의안을 통과시켜 주기를 바라마지않는다. (·····)
  적색제국주의를 이 지상에서 청산하는 이 인류사적 사업은 우선 침략자 이북괴뢰의 응징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하고 그 최선의 방법은 침략자의 근거지를 말살하고 자유와 평화의 민주주의를 거기에 확립하는 것이다. 이북괴뢰가 38선을 넘어서 대한민국을 침략한 그 순간부터 38선은 이미 해소된 것이다. 해소된 이 38선을 후안무치하게도 다시 복구하려 하거나 인류의 전범자를 옹호하여 그 발언권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용인할 수 있으며 인류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침략자의 응징에 유엔은 추호의 주저와 순준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을 강조하는 소이이며 이 사업의 성불(成不) 여하에 유엔 자체의 권위가 달렸다고 강조하고자 하는 바이다. 우리는 유엔을 믿는다. 그리고 유엔이 반드시 이 인류사적 사업을 적극적으로 또 조속히 추진할 것을 확신한다.

동아일보에 이 사설이 나간 지 이틀 뒤인 10월 8일 유엔 총회는 ‘전 한국의 자유통일 정부 수립’을 요청하는 8개국 공동결의안을 47대 5(기권 7)로 가결하는 한편 유엔군의 북한 진격을 승인했다.


국군과 유엔군 평양 점령에 흥분한 동아일보

1950년 10월 20일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했다. 동아일보 10월 21일자 1면은 관련 기사로 뒤덮였다. 기사들의 제목은 아래와 같다.

· 「침략의 본거 평양시를 완전 탈환 / 아군 국경 기선 제압 / 퇴로 잃은 괴뢰, 게릴라로 전락 / 4개월간의 초연(硝煙)도 종식(終熄) 가기(可期)」
· 「괴뢰 질서 없이 산주(散走) / 김일성 도당은 희천에 도망」
· 「통일에 용진 승전 / 대통령, 평양 탈환에 치사」
· 「게릴라 소탕은 3개월 내 / 평양 탈환은 침략 패배를 의미」
· 「아군 전격적 진공으로 / 국련 작전을 경신」

동아일보는 10월 24일자 1면 머리에 이승만의 담화를 다음과 같은 제목 아래 대서특필했다.

  남북 동포는 협력하라 /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망한다 / 진정한 통일은 합심에

  전쟁이 종국을 고하는 이때에 이 대통령은 지난 23일  남북의 동포에 다음과 같은 유시(諭示)를 발표하였다.
  “단군기자의 유업으로 4천여 년 역사적 민족으로서 40년간 적국의 압박 하에서 고통을 면하게 된 후 소련의 세계정복주의 하에 공산당 괴뢰악마의 반역행동으로 소위 38선을 한정(限定)하고 남북을 강제로 분열시켰으나 이남에서는 총선거를 실시하고 민주정부를 수립해서 세계 문명국가의 승인을 얻어 날로 진전시켜 나가는 중 주야로 분투한 바는 우리의 힘으로 남북을 통일해서 이북 동포들을 하루바삐 속박과 압제 하에서 해방시키려는 것이었고 또 이것을 뼈에 맺히고 피가 끓도록 주장해온 것이나 세계 대세에 끌려서 우리의 뜻대로만 하고 기회를 기다려 오던 중 이번에 공산도배들이 소련의 후원을 의지하고 대전쟁을 차려가지고 우리나라를 소련의 속국으로 만들고 우리를 타국의 노예로 만들려고 도처에서 살인방화를 일삼아 우리가 일면 위장(危墻)에 이르렀던 바 연합국이 들어와서 소련의 침략을 방비하고 우리를 보호하고서 싸운 결과 38선을 삭제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 국군이 승승장구해서 며칠 안에 압록 두만 양강까지 밀고 올라가서 국토를 완전 회복할 것이니 이로써 우리 조상의 유업을 다시 회복시키고 이북 동포를 비로소 해방시켜 완전무결한 통일국가로서 세계 우방의 원조를 얻어 파상(破傷)된 도시의 교량과 가옥과 공장을 일일이 복구시키는 동시에 공업과 상업을 발전시켜 신국가를 이루어 민국정부 밑에서 신생활을 영위하여 만세복리(萬歲福利)의 자유기초를 굳건히 함으로써 자손만대에 영구히 강토를 유전케 하자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목적이니 이북 동포들은 조금도 통일이나 방한(防限)이 없이 남북이 똑같은 권리와 직책을 분담해서 한 민족 한 족속의 정신과 행동을 동일히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이승만의 담화는 마치 남북통일 이후에 대한 ‘유시(諭示)’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가 기정사실화한 무력통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뜻밖의 암초에 부닥치게 된다.


평양 방문한 이승만에게 바친 최상의 찬사

10월 25일 국군 제6사단 7연대가 압록강변의 초산을 점령했다. 그러자 대통령 이승만은 10월 29일 오전 8시 35분 미군 특별비행기를 타고 평양으로 날아갔다. 그는 평양시청 앞에 모인 군중 10만여 명의 환영을 받으면서 ‘민주 쟁취를 맹서하자’라는 요지의 ‘유시’를 했다.
동아일보는 10월 31일자 2면 머리에 「39년 만에 입북 / 천지를 뒤흔드는 시민의 환호성 / 대통령 평양 환영대회 임석(臨席)」이라는 기사를 크게 실었다.

  이 대통령 각하께서는 10월 29일 상오 7시 40분 경무대 관저를 출발하시어 신 국방부장관, 이 공보처차장, 김 공군참모장, 김 비서관, 이 정훈국장, 김 한청단장 등을 대동하시고 동 8시 35분 여의도공항을 떠나 일로 평양을 향하시어 동 9시 30분 정 참모장을 비롯한 군부 요로의 환영리에 평양 능라도비행장에 안착하시었다. 대통령께서는 1911년 평양을 다녀가신 후 39년 만의 감격적인 재림(再臨)이신 것이다. 공항에 내리시자 곧 지프차를 타시고 대한민국 만세를 환호하는 남녀 동포의 모습에 일일이 답례하시며 5년간 공산괴뢰 치하에 유린된 고도의 시가를 달리시며 환영대회장인 전 평양시청으로 향하시었다. 이곳에서 외국 기자 및 선임된 평양시장 등을 접견하신 후 동 10시 45분 5만 애국시민이 태극기를 휘저으며 그칠 줄 모르는 만세와 환호 속에 식장에 임석하시었다. 간단한 국민의례와 임 시장의 환영사에 뒤를 이어 대통령께서는 약 70분 간 (···) 감명 깊은 훈화를 끝마치신 후 시민 각계각층에서 드리는 화환과 기념품을 받으시고 곧 회장을 떠나 하오 0시 40분 평양비행장을 출발, 동 하오 1시 35분 서울에 안착하시었다.
  자유의 종소리가 천지에 고이고이 퍼져 울려나오는 가운데 노대통령 각하는 마이크를 손에 드시고 감개무량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평양 동포에게 훈화를 보내시었다.
  (···) 여러분, 우리는 유엔의 지원을 얻어 다시 통일되었습니다. 이제는 어떠한 나라일지라도 우리를 다시 분단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공산당은 한국 내에서 축출되었으며 앞으로 중공이나 소련이 나온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등 겁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싸울 뿐이요 우리가 합하면 감히 덤벼들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나와 같이 맹세합시다. 자유와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하여 싸울 것을! 우리 대한민국은 앞으로 국토를 튼튼히 방위하기 위하여 강력한 군대를 보유할 것이며 유엔은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세계는 우리 한인들이 얼마만큼 훌륭히 잘 일을 해 나갈 것인가 많은 기대를 가지고 보고 있습니다. (···) 멀지 않아 도지사 선거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의식주인데 우리 다같이 모자라는 것은  나누어 먹고 서로서로 살아나갑시다. 정부는 하루속히 교통이 통하는대로 쌀과 광목을 남에서 가져와 여러분에게 나눌 작정인데 모자랄 경우에는 외국에서 쌀과 광목 같은 것이라도 우선 사다가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정부는 현재 만반 준비를 가지고 여러분과 같이 한 살림을 하려고 하고 있는데 유엔을 비롯한 국제적인 관계로 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대통령 이승만에 대해 ‘각하’라는 호칭을 붙이고 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래 동아일보가 주로 사용한 말은 ‘이승만 박사’ 또는 ‘이 대통령’이었다. 아무리 전시이고 ‘평양 탈환’에 흥분한 상태라고는 하지만 기사의 주어에 ‘각하’를 붙인 것은 동아일보가 1930년대 후반에 일본 왕을 ‘천황 폐하’라고 극존칭으로 섬기던 것을 연상시킨다.
이 기사를 보면, 한국전쟁이 터지자 수도 서울과 시민들을 버리고 재빨리 남쪽으로 피신해서 ‘거짓 방송’을 통해 많은 국민이 피란에 나서지 못하게 한 대통령 이승만, 예고도 없이 한강다리를 폭파해서 무고한 시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정부의 최고책임자는 사라지고 금세라도 남북통일을 이룰 듯이 기세가 등등한 ‘개선장군’의 모습만이 두드러질 뿐이다. 
이승만은 통일이 완성되었다고 선언하면서 도지사 선거를 치르겠다고 평양시민들에게 ‘공약’했다. 이승만이 그렇게 허장성세를 부리기 3주 전인 10월 8일 중국은 참전을 결정하고, 19일 4개 군, 12개 사단의 병력이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미군과 국군은 10월 25일에 처음으로 중국군을 포로로 잡았다.

  1951년 1월 1일 중국군 6개 군단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12월 24일 서울시민들에게 대피령을 내렸지만, ‘빽’과 줄이 있는 사람들은 얻어들은 게 있어 이미 12월 초부터 피란길에 나섰다. 12월말 80만 명이 넘는 서울시민이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했다. 이들은 부교(浮橋)와 얼어붙은 한강을 걸어서 건넜다. 1월 3일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옮겨갔고 남행길은 피란민들로 메워졌다. (·····)
  1월 4일 공산군이 서울에 입성했다. 그래서 ‘1·4 후퇴’라는 말이 나왔다. 1월 5일 서울과 평양에서 24발의 축포가 쏘아졌고 같은 날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서는 승전을 축하하는 인민들이 밤을 새워 열광했다(<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 1권>, 183~185쪽).

동아일보는 1950년 12월 31일자를 마지막으로 발행을 중단했다. 그 날짜 1면에 실린 「송년사」는 아래와 같다.

  다난하였고 다화(多禍)하였던 이 해도 오늘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피란 갈 사람은 거의 가고 남아 있는 사람도 처자를 소개(疏開)시켜버려서 삭막의 정도를 지나 처량한 기분으로 이 해를 보내게 되었다. 따뜻한 떡국 한 그릇 먹지 못하고 쓸쓸하고 구슬픈 분위기 속에서 한숨으로 이 해를 보내게 되니 아아 경인년이야말로 이 민족의 역사상 유례없이 불행한 한 해였다. 우리는 누차의 전화(戰禍)를 경험하였다. 그러나 조국과 민족을 무시하고 동족상잔을 일삼는 공산괴뢰의 이렇게도 야만스러운 전화는 일찍이 그 유례가 없었다. 그것도 부족하여 중공군을 끌어와서 조국의 통일을 방해하고 동족을 살육하는 이렇게도 야만스러운 전화는 일찍이 그 유례가 없었다.
이와 같이 인간의 도의심을 여지없이 유린하고 적색제국주의의 야만적 침략성이 이와 같이 노골적으로 표시된 것은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금년이었다. (·····)
  여하튼 살육과 공포의 노예화 정책을 일삼는 적색제국주의와 자유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민주주의와의 전쟁은 이미 치열하고 집요하고 잔혹하게 폭개(暴開)되고 있다. 이 전쟁을 세계대전으로 확대시킬 것인가 한국에 국한시킬 것인가는 스탈린이 대답해야 할 것이다. 정의의 십자군이 불의의 침략군에 격퇴당할 이유는 추호도 없는 것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정의를 사수하는 용사의 편에 있으니 우리는 다 같이 자유의 대의 밑에 굳게 뭉쳐서 멸공의 결의를 새롭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불행한 경인년이 전 인류의 장래에 무한한 행복이 되기를 빌고자 한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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