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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단독선거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동아일보 대해부 2권 - 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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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9.08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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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가 평양에 도착한 1948년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남북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가 열렸다. 26일부터 30일까지는 남북 요인 15명이 ‘남북한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정치회담을 가졌다.


동아일보, ‘남북협상은 남조선 공격, 북조선 찬양’

4월 30일 남측의 김구와 김규식, 북측의 김일성과 김두봉이 ‘4자 회동’이라는 모임을 가졌다.

  (···) 이 자리에서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를 주장하면서 김일성에게도 북한의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밖에도 ‘4김 회동’에서 이들은 남북요인회의에서 만들어진 4개항의 공동 성명서를 심의해 5월 1일 4개항의 성명서 초안을 채택했는데, 첫째, 우리나라에서 외국군이 철수하는 것은 우리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둘째, 외국군이 철수해도 내전은 일어날 수 없으며 반통일적인 무질서의 발상도 허용치 않음을 확인한다. 셋째, 여러 정당 단체들은 국민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이 정부는 비밀투표로써 통일적인 입법기관을 선거한다. 넷째, 남한의 단정·단선을 반대하며 동시에 지지하지 않는 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
  김구와 김규식은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같이 북행했던 허헌, 백남운, 홍명희, 이극로, 이영, 이용 등은 평양에 잔류하였고, 이들 중 일부는 나중에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였다(<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 122~123쪽).

김구와 김규식이 서울로 돌아온 이튿날인  5월 6일자 동아일보 1면에는 「귀남(歸南)한 정객의 / 금후 태도가 주목 / 재편파와 선거반대파로 대립」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남북협상의 비민주성과 모략성과 더불어 그 의도에 관하여서는 수차 지적한 바 있거니와 동 회담은 결국 총선거 반대 남조선 정책 공격, 북조선 정책 찬양에 시종일관하였다. 그런데 양 김 씨가 귀경하여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소위 공동성명서와 정치결정서를 실천행동에 옮기게 될 것인지 주목을 끌고 있는데 일부 북행하였던 정객들은 남북협상의 일방적인 결과와 민주주의를 참칭한 북조선의 통제정치에 불만을 느끼고 소위 중간노선의 재편성을 주장하고 있다 한다.
  즉 남북협상회의는 남북 노동당에서 미리 기초하였던 모든 결정서에 일부 남조선 정치인을 이용하여 결의하였을 뿐 이는 남조선 정당 대표에게 하등의 발언권이 부여되지 않았으며 김규식 씨는 본회의에 참가조차 하지 않은 것은 남북협상의 의도가 나변(那邊)에 있었던가를 능히 추측할 수 있다 하며 또한 북행하였던 일부 정객들은 북조선의 통제정치의 부당성과 미·소간 타협성이 박약한 현 국제정세 하에서는 중간이라는 정치노선은 도저히 존재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남북 정치회담에 참여한 남측 인사들이 “총선거 반대 남조선 정책 공격, 북조선 정책 찬양에 시종일관”했다는 동아일보의 기사 내용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 김구와 김규식이 5월 6일 ‘귀환 보고서’ 형식으로 발표한 공동성명을 보면 그것을 명백히 확인할 수 있다.

  금반 우리의 북행은 우리 민족의 단결을 의심하는 세계 인사에게는 물론 이요 조국의 통일을 갈망하는 다수 동포들에게까지 금차 행동으로써 많은 기대를 이루어 준 것이다. 그리고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는 조국의 위기를 극복하며 민족의 생존을 위하여는 우리 민족도 세계 어느 우수한 민족과 같이 주의와 당파를 초월하여서 단결할 수 있다는 것을 또 한 번 행동으로써 증명한 것이다. 이 회의는 자주적 민주적 통일조국을 재건하기 위하여서 남조선 단선·단정을 반대하며 미·소 양군 철퇴를 요구하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다. 북조선 당국자도 단정은 절대 수립하지 아니하겠다고 확언하였다. 이것은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적 신발전이며 우리에게 큰 서광을 주는 바이다. 더욱이 남북제정당사회단체들의 공동성명서는 앞으로 양군 철퇴 후 전국정치회의를 소집하여 통일적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우리 민족통일의 기초를 전정(奠定)할 수 있게 하였으며 자주적 민주적 통일조국을 건설할 방향을 명시하였으며 외력의 간섭만 없으면 우리도 평화로운 국가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확증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여하한 험악한 정세에 빠지더라도 공동성명서에 표시된 바와 같이 동족상잔에 빠지지 아니할 것을 확언한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는 것이니 우리가 이것으로써 만족을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거두어진 성과를 가지고 최후의 성공을 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애국동포 전체가 일치하게 노력하는 데 있을 뿐이다.

남북협상에 대한 동아일보의 공격과 비난은 집요했다. 남한 단독 총선거를 이틀 앞둔 5월 8일자 1면 머리에 실린 기사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만적 협상에 동요 말고 / 총선거로 일로 매진 / 남조선 각계, 남북협상을 배격

  남북협상에 대한 기대와 모순성에 대하여는 재언(再言)할 필요조차 없거니와 더욱이 동 협상의 무성과는 소위 양 김 씨의 공동성명에 명확하게 표현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이승만 박사 과정(過政) 정무회와 한민당에서는 7일 남북협상에 현혹하지 말고 총선거만이 조선독립과 국권회복의 첫 단계가 될 것이라고 강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박사 담: (···) 남북협상을 주장하는 소위 정치요인들이 우리 정부를 수립하여 우리 국권을 회복하려는 금반 총선거를 단정·단선이라 하여 민심을 선동시키고 있는데 그 의도가 나변에 있는지 이해키 곤란하다. 그러나 우매하지 않은 우리 애국동포는 이러한 모략과 선동에 동요되지 않을 것을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총선거만이 우리의 국권을 회복하는 길인 것을 잘 인식하여 주기를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바이다.
  한민당 담: 남북협상에 대하여 우리는 처음부터 하등의 기대도 가지지 아니 하였지만 더군다나 김구 김규식 양 씨의 귀경 후의 공동성명서를 읽고 더욱 공허의 감을 증장(增長)하였을 뿐이다. 양군의 철퇴를 주장하고 우리의 총선거를 반대하였다. 그것이 작년 9월 말일에 소련 대표가 국제연합에 있어서 우리의 독립총선거안을 반대하기 위하여 제출한 그 안이 아니었던가?
  (···) 파괴분자들이 이 총선거를 반대하는 것은 민주주의적 민족국가가 확립되면 그들의 존재가 불가능하게 될 줄로 생각하고 불문 시비곡직하고 반대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파괴분자들의 책동에 추호도 동요되지 말고 세계의 공론에 의거하여 우리에게 열린 독립의 길 즉 5월 10일의 총선거로 일로 매진하여 우리 건국의 성업을 완성하여야 할 것이니 우리 동포는 다 이 점을 명찰하여 투표에 1인의 기권자도 없이 참가하기를 재삼 부탁하는 바이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김구와 김규식을 ‘모략과 선동’을 일삼는 ‘파괴주의자’라고 매도했지만, 두 사람이 평양에 가서 어떻게 해서든지 남한 단독선거를 통한 분단 고착을 막으려는 확고한 의지를 가졌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특히 김구는 그 이후 극우·반공이라는 편파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서 갈라진 겨레의 공존과 통합을 추구하는 민족지도자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이승만 세력, 한민당과 함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기한부 신탁통치’를 결사적으로 반대하다가 유엔이 남한 단독총선거를 결정한 뒤에야 비로소 좌우합작 노선으로 방향을 바꾼 데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이 비판을 가한 바 있다. 대표적인 보기로 언론인이자 현대사학자였던 송건호의 평가를 인용해 보겠다.

  (···) 김구가 이승만보다 더 격렬하게 반탁의 선봉에 서서 미·소 협조에 의한 유일하고도 마지막일 통일에의 기회를 스스로 거부하고 이미 미·소 냉전이 격화된 새로운 국제적 상황 속에서 그러한 냉전 상황을 배제하고 민족자결에 의한 통일을 달성하려고 한 것은 당시의 국제정세를 정확히 판단한 투쟁노선이 못됐다. 그가 이승만과는 달리 진정한 통일을 원했다면, 8·15 당시 민족문제 해결에 발언권이 약한 것을 예견한 김구로서는 모순되는 행동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김구가 8·15 때 예언한 대로 그의 협상에 의한 통일노력은 결국 미·소간의 국제적 냉전 상황 속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남북협상에 의한 자주적 통일노력이 좌절됐다는 것은 민족자주연맹의 좌절을 의미하고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냉전편승파의 승리를 의미하며 다시 일제잔재의 재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김구의 1946, 47년도의 정치적 오판, 그리고 일관된 노선을 추구했으면서도 역량 부족이었던 김규식의 비민중적 성격은 이 땅에 있어서의 민족자주세력을 좌절시키고 말았던 것이다(송건호, 「해방의 민족사적 인식」, <해방 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1979, 32쪽).


동아일보의 단독선거 ‘총력 캠페인’

미군정은 1948년 3월 17일 ‘국회의원선거법’을 공포했다. 그 선거법은 3월 20일부터 4월 9일까지 20일 간을 유권자 등록기간으로 정했다.

좌익은 물론이고 김구의 임시정부 주력과 ‘중간파’가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는데도 이승만 추종자들과 한민당은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그 선거가 최선의 방책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선전에 가장 앞장선 것이 동아일보였다. <동아일보사사 권 2>에는 그 경위가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본보만은 시종일관하여 이 선거를 지지하고 좌익의 파괴활동을 낱낱이 폭로하는 동시에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되는 국회의원선거에 유종의 미를 거두도록 최선을 다하여 보도와 논평에 앞장섰다. 이를 위해서 기권을 하지 않도록 호소하고 선거에 익숙치 못한 대중을 위해서 지방색이나 족벌을 초월하여 식견, 지조, 실천력을 구비한 인사에게 투표하도록 계몽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94쪽).

동아일보는 1948년 2월 3일자에 「총선거를 단행하라」라는 사설을 내보낸 뒤 선거일인 5월 10일까지 한민당의 공식 견해를 대변하는 사설을 10 번이나 실었다. 총선 날자가 확정된 뒤 3월 31일자 1면 머리에 오른 사설(「자유분위기 문제」)는 아래와 같다.

  약소국 해방의 국제적 여론을 배경으로 ‘가능 지역의 총선거’가 방금 그 결의의 절차를 실천에 옮기게 되었고 국권회복을 갈망하는 민족적 충동은 5월 9일(나중에 10일로 변경-인용자)의 총선거를 앞두고 바야흐로 온갖 준비에 활기를 띠었다. 국제적 알력 속에 우울한 3년, 이로써 자주조선을 이루려 하는 민족적 흥분과 감격은 다시금 새롭다 할 것이니 앞으로 민족백년의 엄숙한 역사가 이번 선거로 창시됨이라 함에 상도(想到)하게 될 때 우리는 또 한 번 옷깃을 단정히 함으로써 이 선거에 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일체의 방해와 모략을 물리치는 한편 어떻게 하여 우리의 선량을 선택할 수 있을까, 긴급하고도 중대한 당면 문제가 여기에 있음은 중언(重言)할 필요가 없다. (·····)
  (···) 현실의 사태는 법규의 체제와 경찰기능의 제어보다도 선거를 반대하는 파괴와 선동과 모략으로 자유선거를 방해하는 다른 일면의 실재가 더욱더 중대하다는 것을 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항간에는 이미 4월 위기설이 있어 딘 군정장관이 언명한 바와 같이 북조선 지령에 의하여 4월 중에는 남조선 일대를 습격한다는 설이 유포되고 있는 이때 (···) 선량한 국민의 인권이 위축되는 동시에 자유로운 분위기가 아니라 공포의 분위기를 양성(釀成)하게 될 십분의 가능성을 경계하여야 할 것이니 자유로운 분위기의 양성을 위하여 인권보호에 관한 법령의 개정과 아울러 이에 대한 새로운 방안이 수립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선거일인 5월 10일을 열흘 앞두고 1948년 4월 30일자 동아일보 1면 머리에 실린 사설(「총선거에 궐기하라」)은 총선을 통해 세워질 ‘국민정부’가 ‘전 조선을 대표’할 수 있다는 극단적 논조를 펼쳤다.

  5월 10일의 총선거는 우리가 염원하던 독립의 전초전인지라 애국동포는 자못 긴장한 가운데 그 성과를 주목하고 있다. 선거 결과야말로 우리 민족이 흥하느냐 망하느냐, 우리 조국이 독립하느냐 독립하지 못하느냐를 결정하는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거가 비록 가능지역에 국한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악조건을 극복하여 3천만 민족을 대표할 수 있는 국민정부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남조선이 전 인구의 3분의 2를 포용하고 있으며 또 92%의 유권자 등록을 완료하였으므로 투표 성과만 좋다면 종다수(從多數) 민주주의 원칙에 의하여 명실 공히 국민정부가 전 조선을 대표할 수 있는지라 국련의 일원으로서 조국의 독립을 자주적으로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5·10 총선거의 성과 여하는 국민정부의 주권과 독립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선거 성과가 좋다면 우리가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요 그와 반대로 그 결과가 여의치 않다면 이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독립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따라서 5·10 총선거를 거족적으로 추진하여야 할 이유도 이 점에 있는 것이다.

이 사설은 전체 인구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남조선의 단독총선거를 통해 ‘국민정부’가 세워지면 ‘전 조선’을 대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분단된 국토의 북쪽에 있는 체제가 총선거나 정부 수립을 포기하고 ‘국민정부’ 밑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뜻인가? 게다가 동아일보는 ‘국민정부’가 “국련(유엔)의 일원으로서 조국의 독립을 자주적으로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억측을 하고 있다. 분단된 북조선을 ‘국민정부’의 식민지로 둔 채 유엔에 가입하겠다는 뜻인가?

동아일보의 단독선거 ‘총력 캠페인’은 총선거 당일인 5월 10일자 사설에서 극에 이르렀다. 「기권 없는 선거로  독립정부 수립하자」가 바로 그것이다.

  고대하고 고대하던 총선거의 날 국권을 회복하여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갈 그 총선거의 날은 마침내 오고야 말았다. 반민족적 반애국적 도배들의 살인 방화 등 무소부지(無所不至)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애국국민의 지성(至誠)은 모든 난관을 물리치고야 말았으니 그 성과가 곧 오늘의 총선거인 것이다. 우리의 피와 눈물과 고투로 전취한 오늘의 이 역사적 총선거 날에 당하여 우리의 애국심이 우리에게 요청하여 외치는 바 있으니 그것은 곧 한 사람의 기권도 없이 투표할 것과 정실을 떠나서 진정한 선량을 선출하는 것이다. (·····)
  대내외적으로 복잡다단한 차제(此際)인지라 이에 대한 명확하고 불퇴전의 명식(明識)이 없을진대 어찌 그분에게 국가 대사를 맡길 수 있으랴. 그러기에 우리가 특히 주의할 것은 그분의 정치노선이요 그 소속단체이다. 우리는 어떠한 단체가 우리의 조국을 소련의 연방화를 위하여 신탁통치를 고집하였고 어떠한 정당단체가 감연히 궐기하여 이러한 반역도배들과 싸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개인보다도 정당단체를 더 신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둘째로 양심적 지조 유무의 판단은 해방 전후를 통하여 그분의 실천이 진실로 조국 광복에 어느 정도로 공헌하였는가를 판단하여야 할 것이니 해방 전의 애국자가 해방 후에 정권욕에 사로잡혀 공산파괴분자와 야합한 자도 있을 것이요 해방 전에는 신통치 않았으나 해방 후에 열렬한 독립전사가 된 분도 있을 것이나 과거보다도 현재는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니 일관한 실천력이 없이 입으로만 애국자연하는 일체의 기회주의자에 특히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이 사설은 총선에 입후보한 개인들보다 ‘반탁’에 앞장서서 ‘반역도배들’과 싸운 정당이나 단체 사람들에게 투표하라고 노골적으로 ‘권유’하고 있다. 이승만 세력과 한민당을 뺀 대다수 정당의 후보들을 찍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게다가 “해방 전에는 신통치 않았으나 해방 후에 열렬히 독립전사가 된 분도 있을 것”이라면서 일제강점기에 반민족적 행위를 한 자들까지도 은근히 비호하고 있다.


부정과 폭력으로 얼룩진 단독선거

5·10 총선거는 관권 개입과 탈법행위, 폭력으로 얼룩진 허울뿐인 ‘국민주권 행사’였다. 그런데 선거운동 기간을 전후해서 동아일보에는 그런 현상에 관한 보도나 논평이 전혀 실리지 않았다. ‘자주독립’과 ‘국권회복’을 위한 역사적 사건이라는 기사 일색이었다.

그러나 4월 28일 유엔임시위원단은 선거를 자유롭게 치를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 있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투표자 등록 과정에서 저질러진 부정행위를 아래와 같이 지적했다.

  1)미곡배급통장을 발급하는 지방행정 사무실에서 등록을 실시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 2)미곡배급통장을 몰수하겠다고 위협함으로써 강제등록을 시킨 사실이 있다는 것. 3)경찰과 청년단체가 등록을 권유한 것은 일종의 강제로 간주된다는 것.
  또 유엔임시위원단은 전국선거위원회의 15명 위원 중 12명이 극우 진영의 한민당과 이승만 계열 조직에 속한 인물이라는 점을 염려했다. 이와 관련, 미국 외교문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지방선거위원회는 거의 우익이 차지할 것이다. 우익단체의 테러 활동에 익숙한 주민들은 비우익 인사에게 투표하는 자의 비밀이 유지되고 나중에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는 약속을 믿지 않을 것이다.”(<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 127쪽).

  같은 책에 정리되어 있는 5·10 총선거 부정의 내용을 요약해 보겠다.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은 5·10 선거 1개월을 앞두고 선전과 동원을 위해 경찰보조대인 향보단(鄕保團: 향토보위단)을 1백만 명 규모로 조직하였다. 군정장관 딘의 명령에 의해 선거를 위해 한시적으로 결성된 조직이었다. 향보단은 “남조선 전역에 걸쳐 향토정신의 고취와 민족 공동의 책임관념의 앙양 등을 꾀한다는 의도 아래 만 18세 이상 35세 이하 남자 전부로써 구성”되었다.
  향보단은 온갖 탈법을 저지르면서 선거의 자유 분위기를 크게 저해하였다. 족청도 미군정에 의해 대대적으로 동원돼 폭압과 공포로 유권자들의 선거 등록을 강요하고 불법선거에 깊이 개입하였다.
  한국민주당은 선서 직전인 5월 5일 「총선거에 임하여 만천하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신문광고를 게재해 “한국민주당이야말로 독립을 최고 목표로 하며, 우리 민족의 행복을 제일 위에 두고 공산당과 싸워 온 정당이라고 자랑하며, 이 과정에서 송진우와 장덕수를 잃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
  한 외신기자는 선거 당일의 분위기에 대해 “서울에서는 수천 명의 경찰과 특임된 민간인이 미국 군대 지원 하에서 각 중요 도로와 교차장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했으며 각 골목 입구에는 경비대가 배치되었다”고 묘사했다.
  “민간 경비대원은 도끼자루, 야구배트, 곤봉 등을 휴대하고 있었고 모든 조선 경찰은 미국 카빈총으로 무장하였다. 선거일은 휴일이나 분위기는 계엄 하의 도시 같았다. 조선 부인들은 보통 일요일 기타 휴일에는 황색 녹색의 신선한 의복을 입는데 이날은 흐릿한 황백색 의복 또는 바지를 착용하고 투표장으로 가면서 가만가만히 주위를 살펴보는 기색이 있었다.”
  유엔임시위원단 위원장 머기는 “우리는 투표소 둘레나 안에서 향토보위단의 존재를 발견했다”며, “그들은 투표자의 자유를 제한한 것 같다. 어떤 투표소에서는 경찰이 투표소 안에 있었다. 청년단체 회원들도 투표소 둘레나 안에 정복을 입은 채로 있었다. 어떤 투표소는 (투표의) 비밀이 결여되었다”고 했다(128~131쪽).

5·10 총선거에는 모두 948명이 입후보함으로써 평균 경쟁률은 4.7 대 1이었다. 이승만 계열의 대한독립촉성회 소속이 235명으로 가장 많았고, 48개 정당과 사회단체에서 후보가 난립했다. 무소속은 전체 입후보자의 44%를 차지했다.

개표 결과 당선자는 무소속이 85명, 대한독립촉성회가 55명, 한국민주당 29명, 대동청년당 12명, 조선민족청년당 6명, 대한독립촉성농민연맹 2명, 기타 11개 정당·단체에서 각 1명씩으로 나타났다.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을 비롯해서 좌익과 중도의 여러 정당이 총선거에 불참한 가운데 동아일보가 총력을 다해서 지원한 한국민주당은 압도적 우위를 보일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후보 91명 가운데 겨우 29명 당선이라는 초라한 성적을 냈다.


‘총선은 세계에 수범이 될 만한 호성과’

동아일보는 5월 16일자 사설(「총선거의 교훈」)을 통해 부정과 탈법과 폭력으로 얼룩진 5·10 총선거를 극찬했다.

  조선 역사상 처음 보는 5·10 총선거는 좌익의 맹렬한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세계에 수범(垂範)이 될 만한 호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과연 5·10 총선거야말로 결사적으로 단행되었던 것이다. 선거를 전후하여 발생한 불상사만 매거(枚擧)하더라도 방화가 50건, 파괴가 77건, 피살이 46건, 부상이 111건에 달하며 이와 같이 선거를 반대하는 살인적 분위기에서 선거를 추진한다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사업인가는 국(局)에 당한 인사가 아니고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독립 일념에 불타는 일반 애국동포는 그와 같은 공포와 강박에 굴치 않고 그럴수록 선거의식은 왕성하여 이와 같은 거족적인 지지 하에서 모범적인 호성과를 거두었다는 것은 민주독립을 열망하는 우리 겨레의 자랑이려니와 자유와 평등을 애호하는 세계 인사의 괄목하는 바일 것이다. (·····)
  (···) 등록 비율, 투표 비율, 무효 비율 등이 모범적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선거 사무를 집행하는 데 있어 퍽 조직적이고 능률적이었다는 것은 내외 인사가 다 같이 찬양하는 바이다. 그뿐 아니라 선거인의 정치 판단 역시 건전하여 서울시내와 같이 입후보가 난립하여 선거전이 격렬한 데서도 인물다운 인물이 선출되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정치의식이 얼마나 발달했는가를 여실히 증명하는 바이다. 지방에 있어서는 다소 의외의 결과도 없지 않으나 대체에 있어 인물 본위로 선량(選良)을 결과하였다. 이와 같은 선량의 결과는 이후 정치인의 활동에 큰 교훈이 되리라. 정치라는 것은 민의를 이탈하여서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정권욕에서 나온 일시의 감언이나 모략에 일반 대중은 결코 속지 않는다. 정치인은 모름지기 5·10 총선거의 성과를 교훈 삼아 이후 민주주의 발전에 더욱 기여하기를 절망(切望)하는 바이다.


제헌국회 구성과 대통령 간접선거

1948년 5월 31일에 제헌국회가 구성되었다. 동아일보 6월 1일자 1면에는 「역사적 신국회 개막 / 의장에 이승만 박사 피선 / 부의장은 신익희, 김동원 양씨」라는 기사가 나왔다. 198명으로 이루어진 제헌국회 첫 총회가 선거위원장 노진설의 제의에 따라 최연장자인 이승만을 만장일치로 의장으로 선출한 것이다.

  (···) 이승만은 처음 국회의원선거에도 “나는 원래 출마할 의사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국민들이 서면으로 구두로 권고하기에 거부하기가 미안스러워 비로소 승낙을 하고 입후보를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승만은 동대문구에서 출마, 무투표 당선됐다. 함께 입후보했다가 등록이 취소된 최능진은 나중 정부 전복 혐의로 구속됐다가 6·25 때 출감, 정전(停戰)운동을 하다 1951년 사형 당했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 8월 초 조각을 완료하고 8월 15일 정부를 수립하기까지 이승만은 몇 가지 정치적 술수를 행한다. 그 하나는 헌법 제정 과정에서 애초에 스스로 동의했던 내각책임제 헌법을 완강한 고집으로 대통령 중심제로 바꾸는 것이다. 이승만의 주장으로 국왕이 없는 처지에 구태여 내각책임제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며 또 미국식 제도에 낯익어 있기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이승만을 도와 단독선거를 치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우고 실질적인 여당을 형성하고 준비내각까지 짜고 있던 한민당이 정권에 참여하는 것을 막고자 함이었을 것이다(김도현, 「이승만 노선의 재검토」, <해방전후사의 인식>, 323쪽).

제헌국회의 헌법 초안 작성은 유진오가 맡았다. 그 초안은 6월 초 국회헌법기초위원회에 제출되었다. 당시 이승만을 포함한 모든 정파는 의원내각제를 지지했으므로 헌법 초안은 당연히 그것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6월 15일 이승만이 갑자기 헌법기초위원회에 나와서 의원내각제를 대통령제로 바꾸지 않으면 자신은 대통령직을 맡지 않고 일반 시민으로 남아 개헌운동을 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결국 헌법기초위원회는 그의 고집에 굴복하고 말았다.

제헌국회는 7월 12일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해서 17일에 공포했다. 7월 20일에 국회에서 치러진 대통령 간접선거에서 이승만이 180표를 얻어 당선되었다. 동아일보 7월 21일자 1면에 실린 기사(「대한민국 정부[正副] 대표 선출」)는 이렇게 시작된다. “불행의 인자(因子)인 38선을 타파하고 국권을 회복할 중대 사명을 부하(負荷)한 초대 대통령에는 70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쳐온 우리의 최고 영도자 이승만 박사가 추대될 것이 이 민족의 염원이었고 또 자랑이었으니 이제 국회에서 압도적 다수로 이것이 구현됨에 3천만의 감회는 더욱 새로운 바 있다.”

1차에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서 2차 투표까지 치러진 부통령선거에서는 이시영이 133표로 당선되었다.

동아일보는 위의 기사와 같은 날짜 신문 1면 머리에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라는 사설을 실었다.

  기다리던 대통령선거는 17일 발포(發布)된 대한민국 헌법에 기(基)하여 20일 오전에 실시되었다. 재석의원 196명 중 180명의 압도적인 득표로써 이승만 박사가 당선되었다. 박사는 70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치었고 귀국 이래 국내외의 제반 악조건과 과감히 투쟁하여 오늘의 서광을 가져오게 한 공적으로 보아 박사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3천만 민족이 다 같이 존경하고 지지하는 이 박사를 국가의 대표요 행정권의 수반인 대통령으로 맞이하는 기쁨도 기쁨이려니와 도대체 민의에 의하여 대통령을 선출하고 또한 정무를 신탁한 예가 없던 우리로서 이 대통령선거야말로 민주주의를 향유하는 역사상 처음 출발인 만큼 또한 감격이 크지 않을 수 없다. 개표를 완료하고 당선자를 발표하는 그 순간 국회의원의 감격은 다시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 희소식이 원외에 전해지자 가두(街頭)는 환희에 넘치고 있다. (·····)
이 박사의 대통령 당선은 그 인망으로 보거나 국내 정국의 귀추로 보아 당연한 일이며 대외적인 신망으로 보아 국제적으로도 다대한 호감을 가지게 되리라고 생각한다. 외국인도 박사에게 중임(重任)이 낙착될 것은 이미 예측한 것 같으며 또 미·소가 세계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현 정세 하에서 박사 이외에 인물이 없다는 것도 잘 알 것이다. 여하간 우리는 우리의 자율적인 의사를 가지고 대통령을 선출하여 정부 수립을 앞둔 박사로부터 국민의 공복이 될 것을 우리는 또한 들었다. 대통령 취임 후에 있어서도 일생을 갖은 압제와 폭압에 굴하지 않고 고절(苦節)을 지키던 그 위대한 정신을 살려서 여생을 독립 완수에 헌신하기를 바라며 박사의 전도에 더욱 건강과 영광이 있기를 바라 마지않는 바이다.

동아일보는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에게 최고의 찬사와 최대의 축하를 보냈다. 그러나 그날부터 겨우 13일 뒤에 이승만에 대한 ‘실망과 낙심’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사설을 내보내게 되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승만, 대표적 친일파를 내각에 중용

이승만은 7월 27일 국회에 출석해 이윤영을 국무총리로 지명했다고 통고했다. 이윤영은 북조선에 기반을 두고 있던 조선민주당의 부위원장을 지냈으므로 남북통일에 기여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졌으나 국회는 찬성 59, 반대 132로 인준을 거부했다.

이승만은 이범석을 다시 총리로 지명했다. 그는 임시정부 휘하의 광복군 출신으로 극우단체인 조선민족청년단(족청) 결성을 주도한 인물이었다. 국회는 8월 2일 110 대  84로 이범석 총리 지명을 인준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8월 4일 초대 내각 명단을 발표했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국무총리 이범석(국방장관 겸임), 내무장관 윤치영, 외무장관 장택상, 재무장관 김도연, 법무장관 이인, 문교장관 안호상, 농림장관 조봉암, 상공장관 임영신, 사회장관 전진한, 교통장관 민희식, 체신장관 윤석구, 공보처장 김동성, 법제처장 유진오(무임소장관 이윤영과 지청천, 총무처장 김병연, 기획처장 이순탁, 심계원장 명제세, 감찰위원장 정인보, 고시위원장 배은희는 나중에 임명되었다).

한민당 당원으로 입각한 사람은 김도연과 이인이었는데, 이인은 당적만 한민당일 뿐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승만이 한민당에서는 김도연 한 명만을 발탁한 셈이었다. 

이승만 정부 초대 내각 20명 가운데 <친일인명사전>(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2012)에 올라 있는 사람은 2명이다. 그들의 친일 경력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 내무장관 윤치영: 1938년 5월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9월 3일 신흥우·갈홍기 등과 함께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40년 <청년>지에 「황군(皇軍)의 무운장구를 축도(祝禱)함」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어 “지나사변 하 제3년이 되는 신년을 맞이함에 당하여 우리는 한마음 한뜻으로 아세아대륙에서 신동아 건설을 위하여 신성한 사명을 다하고 있는 무운장구를 축도합니다 (···)”라며 침략전쟁을 찬양했다.
1941년 12월 동양지광사가 주최한 미영타도좌담회에 참석하여 양주삼과 함께 ‘미국은 왜 싸우는가’에 대해 발표하면서 결론부에서 “대동아 성전(聖戰)을 위하여 정의의 검을 빼든 제국의 사명은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이상과 대동아 건설의 위대한 사업을 달성해야 하며 일억일심(一億一心) 매진하는 것이 이론상으로부터도 저들의 모순을 제재할 교훈”이라고 역설했다. 1942년 3월 <동양지광>에 「싱가폴 함락에 부쳐」라는 제목의 글을 실어 “대략 3세기에 걸쳐 동아 확장세력의 아성이었고, 세계적으로 그 견루(堅壘)임을 자랑한 싱가폴 대요새도, 신동아 공영권 건설의 위대한 사명을 갖는 광휘무용(光輝武勇)한 황군의 앞에서는 무조건 항복을 서약했습니다. (···) 이 세기적 장대한 결과에 대해서, 총후(銃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경의(敬意)의 심경으로 축하의 말을 대신합니다”라고 축하했다. 1944년 9월 “결전 하 전의(戰意) 앙양과 근로동원에 관한 주지(主旨)의 보급 철저”를 목적으로 조직된 국민동원총진회의 중앙지도위원을 맡았다.

· 법제처장 유진오: 1939년 7월호 <삼천리>에 “동아 신질서 건설을 위하여 대륙의 전선에 분전하는 용사를 위문하기 위하여 금차 도지(渡支-지나로 건너감-인용자)하는 제위의 건강을 빌며 이 중대한 사명을 무사히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전쟁이란 실로 인간의 가장 심오한 금선(琴線)을 울리는 가장 절실한 인간 활동이라 금차의 제위의 전선 위문은 반드시 위대한 문학적 성과로 나타날 것을 아울러 기대합니다”라며 북지(北支)황군위문단을 격려하는 「신질서 건설과 문학」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친일활동에 가담했다. 11월 3일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가 결성될 때 발기인과 간사로 참여했다. 1943년 2월 국민총력조선연맹 선전부가 주도한 국어(일본어-인용자) 문예작품 총독상 전형위원으로 활동했다.

유진오가 문학활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친일논리는 대동아공영권 건설이었다. 그는 동양질서를 중심으로 세계질서를 재편할 것을 주장하는 동시에 조선 민족의 일본국민화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주장했다. 그는 기고, 좌담, 대담 등 다양한 형태로 일제의 식민정책을 옹호·지지하고 미화·찬양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이승만이 대표적 친일행위자인 윤치영과 유진오를 요직에 기용했다는 것은 그의 정권이 앞으로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을 단죄하는 중대한 일을 어떻게 다룰는지를 예고하는 지표나 다름없었다.

이승만에 등을 돌린 한민당과 동아일보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부터 초대 내각을 구성하기까지 동아일보가 어떤 논조를 펼쳤는가를 상세히 보기로 하자.
1948년 7월 24일 국회 주최로 중앙청 광장에서 정·부통령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그날 저녁 유엔한국위원단은 이승만의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는 만찬을 주최했다.

  헌법의 대통령제 채택에서부터 대통령 당선에 이르기까지 이승만은 한민당의 협조를 받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새 공화국의 총리는 김성수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유엔한국위원단의 메논이 김성수에게 건배를 제의했는데, 바로 그 순간 이승만은 “김성수에게는 총리직보다 더 중요한 자리를 맡겨야만 한다”고 말했다.
  7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출석해 이윤영을 총리 지명자로 발표했다. 이윤영은 북한에 기반을 두고 있던 조선민주당의 부위원장이었으므로 민족통일을 위한 상징적인 의미는 있었지만, 국회는 132 대 59의 표결로 인준을 거부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광복군 지도자이며 한때 중국 국민당 정부군에서 장교 생활을 했던 이범석을 총리로 지명하였다. 이승만과 이범석은 적극적으로 한민당의 협조를 요청하였고, 이범석은 8월 2일 110 대 84의 표결로 국회의 인준을 받았다. 이범석은 국방장관도 겸하게 되었다.
  이승만이 김성수에게 주겠다던 ‘총리보다 더 중요한 자리’는 재무장관이란 것이 밝혀졌지만, 김성수는 모욕적이라고 생각하여 이승만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 
  이 내각의 특징은 미국(4명), 유럽(2명), 일본(2명), 중국(1명), 소련(1명) 등에서 유학을 한 외국 유학파가 많다는 점이었지만, 한민당은 단 1명의 장관(재무장관 김도연)만 배출했다는 사실이었다.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한민당이 내각책임제를 채택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에 앉히고 실권자인 국무총리에 김성수를 옹립함으로써 신생국가의 권력을 장악하려던 꿈은 두 번에 걸쳐 깨지고 말았던 것이다(<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 147~149쪽).

이승만의 측근이던 로버트 T. 올리버에 따르면, “이승만은 유엔의 승인을 염두에 두고 국무총리는 북한 출신이면서 부유 계급 출신이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으며, 김성수에 대해선 ‘내가 함께 일하고 싶은 인물이지만 그의 가까운 사람들이 맹랑한 정책을 중심으로 한데 뭉치고 있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올리버는 이승만이 김성수를 국무총리로 삼을 생각도 했었지만, 한민당이 7석의 각료 자리를 요구하는 바람에 이승만이 이범석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했다(같은 책, 148쪽).

그런데 <동아일보사사 권 2>의 기록은 전혀 다르다.

  (···) 조각 과정을 보고서는 그대로 참을 수 없었다. 민주주의정부는 간단히 말해서 국민의 의사를 충분히 반영하는 정부요, 구체적으로는 국민의 추앙을 받는 인사들로 구성되는 정부다. 그런데 이승만의 조각은 그렇지 않았다.
  해방 후 입국할 때부터 항상 민주주의를 부르짖었고, 민주주의의 깃발 아래 총선거도 치렀고, 헌법도 제정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일단 권력을 장악하자 민주정부의 기본이 되는 행정부를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진용으로 구성하였다. 국민의 추앙을 받는 인물들이 아니라 대부분 이러저러한 인연으로 자신과 가까운 측근 인사들을 망라한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측근 정부란 광범히 중지(衆智)를 종합하여 운영하는 민주정치와는 거리가 멀고, 유유낙종(唯唯諾從)하는 측근 인사들로 하여금 자기 개인의 의도를 실천케 하는 전근대적인 전제 형태와 다를 것이 없었다.
  이 나라 민주주의의 앞날에 깊은 암영(暗影)을 본 본보는 비로소 이승만  노선과 손을 끊고 그의 작태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97쪽).

‘동아일보사사’가 주장하는 ‘광범히 중지를 종합하여 운영하는 민주정치’란 과연 무엇일까? ‘민족언론’이라는 이름으로 ‘친일매국’에 몰두한 바 있는 김성수를 국무총리에 앉히고, 그를 추종하던 극우보수적 인물들을 내각에 다수 포진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민주정치’일까?

이승만이 김성수와 한민당을 조각에서 배제한 것은 자기중심적 정략 때문에 정치적 의리를 저버린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와 똑같은 생각을 품고 있던 한민당과 그 기관지인 동아일보가 이승만 혼자만을 ‘비민주적’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설득력이 박약하다.

동아일보 8월 7일자 사설(「측측[惻惻]한 국민의 심정」)은 한민당을 대변하는 듯이 이승만에 대해 ‘결별’을 선언하면서 ‘선전포고’를 했다.

  건국정부의 구성 인물을 보고 국민의 실망과 낙심은 너무나 크다. 무거운 국민의 부탁을 받은 대통령은 민의와 민원(民願)의 소재를 통감(洞鑑)하고 널리 중망(衆望)이 높은 인물을 거용(擧用)하여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밖으로는 우방의 신임을 두텁게 하여 신방(新邦)의 승인 원조를 촉구하고 안으로는 민생을 수화(水火)에서 구제하여 전국의 태안(泰安)을 도모하여야 하겠거늘 그 조각 구상에는 기개(幾個)의 중대한 과오가 내포되었기 때문에 드디어 국민의 기대와 너무나 현격한 위약(萎弱) 정부를 출현시키고 말았으니 과연 이 정부의 역량으로써 국보민운(國步民運)을 타개할 수 있을까 국민은 회의하지 않을 수 없는지라 국민의 실망과 낙심이 클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국민은 대통령의 조각 구성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것이 아닐지로되 그가 금반 조각으로 하여금 이 모양으로 만든 몇 가지 중대한 과오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대통령은 자기의 우월성을 너무도 과시한 나머지 국회의 세력관계를 전연 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모와 덕망에 있어서 유위(有爲) 유능(有能)의 사(士) 없지 않거늘 조금도 포섭하지 못하고 차선(次善) 삼선(三善)의 인물을 산초(散抄)와 같이 규합함으로써 만족하지 않았던가? 또한 대통령은 정실을 경계하면서 스스로 정실에 흘렀고 파당성을 배척하면서 스스로 파당성을 초월하지 못한 유감이 없지 아니하였으며 민의와 민성(民聲)을 끝끝내 물리치고 그 사람만을 기용하지 않으면 아니 될 이유가 무엇인가? 국민은 도저히 납득하기 곤란하다. (·····)
  그러면 대통령은 국민의 심정이 불만에 싸여 있으면서도 오히려 자숙을 맹서하는 이 국민의 측측한 심정을 어떻게 보려는가? 이 측측한 심정에 감촉이 있다 할진대, 대통령은 좀 더 민의에 토대한 객관성에 봉사가 있어야 할 것이다. 국민의 현 정부에 대한 태도를 신중히 가지려는 결심이 있다면 그것은 대통령의 주장에 맹종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국가민족의 생존 발전에 방해될 것을 염려하여서이다. 적어도 인심을 제일(齊一)시키고 역량을 집결하여 능히 이 난국을 담당할 강력 정부의 출현을 염원하는 마음을 국민이 포기하는 것이 아니며 대통령은 모름지기 이 민의에 봉사하여 정부의 강화에 경(更) 일층의 성의가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이다. 과오는 과오로 알고 개조하는 데 발전이 있는 것이니 과오의 청산에 주저하지 말고 도(圖)를 촉(促)하여 일대 개조의 단(斷)이 있기를 국민은 대통령에게 간원하는 것이며 금반 영예의 발탁을 받은 미지수의 국무위원 제위는 이제 국민의 앞에서 엄중한 비판과 감시를 받을 것이며 행정의 효율을 올리고 건설을 추진하는 데 더욱 진충보국함으로써 건국 정부의 사명을 완수하여야 할 것을 부탁하여 둔다.

이승만이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뽑혔을 때 동아일보는 사설과 기사로 그에게 최고의 찬양과 최대의 축하를 보내면서 ‘박사’라는 호칭을 썼다. 그런데 이 사설에서는 그것이 사라지고 ‘대통령’이라는 단어만 되풀이되고 있다.

특히 위의 사설에는 독자가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 있다. “지모와 덕망에 있어서 유위 유능한 사 없지 않거늘 포섭하지 못하고 차선 삼선의 인물”을 기용한 것이 대통령의 과오라고 지적했는데, 이 말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이 그런 사람인지, 그의 경력과 정치적 이념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밝혀야 할 것이다. 이승만이 ‘정실에 흘렀고’ ‘파당성을 초월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는 주장도 한민당을 배제한 조각에 대한 불만으로 들릴 뿐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8월 15일 오전 11시 중앙청 광장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기념식이 열렸다. 이승만의 조각을 격한 논조로 비판했던 동아일보는 그 기념식에 대해서만은 감격에 벅찬 기사(「장엄! 민국 조기[肇基]의 성의[聖儀] / 세계 만방과 견비[肩比] 병진[倂進] / 통일 완수의 결의 공고」)를 16일자 1면 머리에 올렸다. 기사의 앞부분은 아래와 같다.

  8월 15일 해방 세 돌을 맞이하여 감개도 무량한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역사적인 대축전은 거행되어 40년간의 외정(外政)을 물리치고 이 나라의 독립을 세계 만방에 선포하였다. 이리하여 이 민족은 우호 연합 제국(諸國)의 협조와 더불어 이제 진정한 해방을 찾게 되어 주권을 확립하게 된 것이니 우리는 이 역사적인 순간에 제회(際會)하여 앞으로 최단기일 내에 분단된 강토를 통일하고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로서 세계 우방과 열(列)을 같이하게 된 것으로 우리의 맹서를 더 한층 공고히 하여야 할 것이다.

정부 수립 기념식에는 일본 동경의 미 극동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참석했다. 그는 ‘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의의 위력이 용진하는 이 찰나에 그 정의의 개선은 근대 역사의 일대 비극인 귀국 강토의 인위적 장벽과 분할로 무색해졌습니다. 이 장벽은 반드시 파열해야 될 일이요 또한 파열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유국가의 자유로운 국민으로 결국 통일하는 데 있어 이것을 금할 것이 천하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국 국민은 너무나 위대한 선조의 후손이라 그들의 성업을 희생할 철리(哲理)에 굴할 리가 없습니다(동아일보 8월 16일자 1면).

이승만의 ‘취임사’는 맥아더의 축사에 대한 ‘화답’을 넘어 아부에 가까운 ‘헌사(獻辭)’나 마찬가지였다. 취임사의 첫 머리를 차지한 ‘헌사’는 다음과 같다.

  (···) 이 자리에 미 극동최고사령장관 맥아더 장군과 그 부인을 환영하게 되는 것은 우리에게 큰 영광입니다. 우리는 맥아더 장군의 경력을 ‘빼타안’ 반도에서 모험하던 날부터 승전하고 일본에 들어가서 한국을 해방시킬 때까지 심심한 관심과 상쾌한 기분을 가지고 주시하여 오던 바입니다. 태평양전쟁 중 미군 최고지휘관으로 있을 때와 승전 후 재일본연합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다만 미군의 영도자뿐 아니라 가혹한 일본의 침략 하에서 유린을 당하고 있던 많은 민족들에게 유일한 희망의 표적이었습니다. 우리 한국도 일본의 모욕을 무한히 받았던 것이므로 맥아더 장군의 지도 하에서 일본 사람들이 전적으로 변화해서 진정한 민주제도를 흡수하여 새 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정치학자 진덕규는 이승만의 기념사는 ‘30분이 넘는 지루한’ 것이었지만, 모든 내용이 결국 한 가지 사실로 모아졌다며 “그것은 맥아더에 대한 감사였다”고 지적했다.

  광복의 본질적인 지향, 그리고 민족해방을 이룩하기 위하여 해내외에서 독립투쟁에 일신 일가를 던졌던 독립운동가에 대한 찬사는 고사하고, 일본의 압제 하에 고통 받으면서 독립국가 쟁취를 열망했던 일반 민중의 노고에 대해서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오직 대한민국의 수립은 미군, 특히 맥 아더의 대일 전승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표현했으며, 이것에서 사실상 신생 독립국가의 성격의 한 가닥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진덕규, <한국 현대정치사 서설>, 지식산업사, 2000, 32쪽).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1948년 4월 27일에 열린 북조선인민회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을 승인했다.

  북한에선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선거가 실시돼 212명의 대의원이 선출되었다. 8월 21일부터 26일까지 해주에서는 이른바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라는 것이 열렸는데, 이 대회에서 360명의 대의원을 뽑아서 남북한을 합해 모두 572명의 대의원이 선출되었다.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의 주장에 따른 다면, 남한 총 유권자의 77.5%가 지하에서 실시된 투표에 참가해 대표자 1천8백명을 뽑았다는 것인데, 남한에서 그러한 선거가 실시됐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어쨌든 이렇게 선출된 대의원들로 9월 3일에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가 열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헌법을 최종 채택했다.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이 선포됐으며,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각료가 구성되었다. 김일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토가 한반도 전체임을 상기시키면서 ‘국토의 완정(完整: 완전히 갖춘다)’이 가장 큰 당면과제라고 역설했다(<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2권>, 156쪽).

8월 15일 남한에 이어 9월 9일 북한에 각각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한반도에는 ‘1 민족 2국가’ 체제가 확립되어 분단이 고착되었다. 그 앞날에는 동족상잔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일보는 9월 11일자 1면에 「북조선에 인민공화국 / 김일성 내각 성립 / 부수상에 박·홍·김 3씨」라는 제목으로 <공립통신> 기사를 내보낸 뒤 9월 12일자 사설(「통일과업의 전망」)을 통해 한반도의 앞날을 예측하면서 동족상잔의 전쟁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극렬주의자들을 향해 강력한 경고를 보냈다.

그러나 동아일보에서는 북한 정권 수립에 관한 기사는 물론 사설도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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