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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항쟁’과 김구의 북행동아일보 대해부 2권 - 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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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9.01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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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4월 3일 새벽 2시경 제주도에서 뒷날 ‘4·3 항쟁’이라고 불리게 되는 사건이 터졌다.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 350여 명이 제주도 내 12개 경찰지서를 공격하고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한 것이 시발점이었다. 그날 경관 4명, 민간인 8명, 무장대원 2명이 사망했다. ‘4·3 항쟁’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기까지 6년 6개월 동안이나 계속되면서 민간과 경찰·군대 양측에서 3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다.


‘4·3 항쟁의 배경’

노무현의 참여정부 시기인 2003년 12월 정부기구인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가 발표한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통해 그 사건의 원인과 진행 과정을 짚어 보겠다.

4·3 사건의 동인(動因)은 멀리 1947년의 ‘3·1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제주민전이 주최한 제28주년 3·1절 기념식장에서 경찰의 발포로 관덕정과 도립병원 앞에서 주민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경상을 당했다. 3월 5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3·1사건 대책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3·1 사건에 항의하는 민관(民官) 총파업을 시작했다. 13일까지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인 166개 기관단체 종사자들이 파업에 가담했다. 15일 미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이 제주에서 “파업 주모자들을 검거하라”는 지시를 내린 뒤 17일 중문지서 응원경찰대가 수감자 석방을 요구하는 군중에 발포해 8명이 다쳤다. 20일 미군정보팀은 “제주의 총파업에는 좌우익이 공히 참여하고 있으며, 제주도민 70%가 좌익단체 동조자”라고 보고했다. 3월 22일 남로당은 전국적으로 24시간 파업인 ‘3·22 총파업’을 전개했다.

‘3·1 사건’의 범위가 갈수록 확대되자 미군정은 8월 12일, ‘8·15폭동음모사건’과 관련해서 대규모 검거작전을 시작했다. 전국에서 검속된 사람은 1만3769 명이었다. 11월 3일 극우단체인 서북청년회(서청) 제주도본부가 발족했다. 1948년에 들어 1월 22일 제주 CIC(방첩대)는 “제주경찰이 신촌리에서 열린 남로당 조천지부 불법회의장을 급습해서 106명을 검거하고 폭동지령 문건 등을 압수했다”고 보고했다. 2월 7일 전국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진 가운데 좌파세력은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전국적 총파업으로 몰고 간 ‘27 투쟁’을 시작했다. 3월 28일 남로당 제주도당은 회합을 갖고 무장투쟁 개시일을 4월 3일로 결정했다.


미군정 발표만 따라간 동아의 ‘4·3’ 보도

동아일보는 ‘4·3 항쟁’이 터진 지 사흘 뒤인 4월 6일자 2면 하단에 「4일 제주도서 / 총선거 반대 폭동 / 사상자 12명 발생」이라는 기사를 2단으로 내보냈다. 내용은 단 몇 줄뿐이었다.

  5일 시공관에서 개최된 총선거 촉진 대강연회 석상에서 조 경무부장이 연설한 바에 의하면 4일 제주도에서는 총선거를 반대하기 위한 좌익분자들의 파괴행동이 있었다는데 그 피해 상황은 경찰관서 습격이 11개소, 경찰관 사망이 4명, 일반 청년 사상이 8명, 경찰지서 습격이 5개소나 있었다 한다.

동아일보 4월 7일자 2면에는 미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이 발표한 ‘제주폭동 사건의 진상’이 그대로 실렸다. 동아일보 기자가 현장을 취재해서 보낸 기사는 전혀 없었다.

제주도 폭동 사건 / 인명 사상 53명 / 방화, 통신 절단 / 조 경무부장 진상 발표

  3천만 민족의 총선거를 방해하려고 공산주의자들의 집단인 각 단체와 개인으로서 가진 모략과 수단을 희롱함으로써 선량한 겨레들이 공분을 스스로 사고 있거니와 지난 4일 제주도 전역에 걸쳐 봉기된 좌익폭동으로 말미암아 한때 치안은 교란되고 민심은 흉흉하여져 총선거 등록 실시의 사무를 정돈(停頓) 상태에 빠지게 하였다.
  이에 대하여 6일 조 경무부장은 사건의 진상을 발표하는 동시 민족 전체의 사활을 결정할 총선거의 중대한 시기에 애국적인 동포들의 냉정한 판단과 열렬한 협조가 있어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훌륭한 선거의 결과를 가져오게 하여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제 피행 상황을 찾아보면 경찰지서 습격 11개소, 테러 11건, 경찰관 피습 2건, 경찰관 사망 4명, 부상 7명, 행방불명 3명, 경찰관 가족 사망 1명, 관공리 사망 1명, 부상 2명, 양민 사망 8명, 부상 30명 등으로 (···) 이 급보를 받은 경무부에서는 즉시 5일 밤 김 공안국장과 수원(隨員) 약간 명을 파송하는 한편 응원경찰대를 급파하여 치안 유지와 도민들의 생명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긴급 적절한 조치를 강구하며 반민족적인 폭력행위자들의 소굴을 발본색원적으로 소탕할 것이라고 한다.”

미군정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으로 제주도가 핏빛으로 물들어가는 데도 동아일보는 4월 13일까지 침묵을 지키다가 4월 14일자 2면에 ‘제주 발 조선통신’을 인용해서 짤막한 기사를 내보냈다. 동도경비사령부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4월 3일부터 7일까지 사망자는 22명, 중경상자는 50명이라는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4월 17일자에 ‘제주 폭동’ 기사(「제주도에 무장한 폭도 / 게릴리전을 전개 / 경찰은 교통을 차단코 만전의 포진」)를 처음으로 2면 머리에 올렸다. 그것도 현지 취재가 아니라 ‘출처 불명’의 내용뿐이었다.

  지난 4일부터 전도에 걸쳐 봉기된 제주도의 공산계열 폭동은 이미 5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도 진압되지 못하고 계속하여 게릴라전이 전개되고 있다.
  즉 지난 14일에는 경찰지서 두 곳을 습격당하고 경찰관 1명이 사망하였는데 폭도들은 대략 3백명 내지 4백명으로 추정되어 전부 강고한 무장을 장비하고 있는 듯 낮에는 한라산 암굴에 은신하였다가는 밤이 되면 경찰지서와 선거사무소 등을 습격하고 양민들을 위협 공갈하는 등 자못 불안을 느끼게 하고 있으므로 제주도도령을 공포하여 외지와의 해상교통 일체를 차단하고 경찰에서는 김 공안국장을 총사령관으로 만전의 포진을 하고 있다.
  한편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폭도들은 기관총까지 장비하고 그 지휘자는 상당히 군사행동에 능란한 자인 듯 경찰에서 한라산을 포위 공격하면 섬멸할 수도 있으나 동포 상호 살상은 전혀 그 본의가 아니므로 될 수 있는 대로 선무공작으로 귀순하도록 하려는 방침이라고 한다.

‘4·3 항쟁’을 폭동으로 몰아붙이는 동아일보의 보도는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4월 29일자 2면 머리에는 「동포 살상의 비극 / 4개월 간 350명 살해 / 제주도는 미증유의 폭동」이라는 기사가 나왔는데 사태의 원인에 대한 설명은 없이 좌익과 우익 진영의 피해에 관한 통계숫자만 나열되어 있다.

그 기사 옆에는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이 발표한 경고문이 그대로 인용되어 있다. “수도경찰은 폭동 사건을 인민행정이란 칭호로 찬미하고 폭동행위를 종용하는 의미의 문자나 혹은 언사는 앞으로 체포 고발하여 사직에 재결을 받게 하겠다. 폭동을 권유 선동하는 도배는 직업의 종류 여하를 물론하고 철퇴를 가하겠다.”

동아일보 최초의 제주 현지 취재 기사

남한 단독총선거를 사흘 앞둔 5월 7일자 동아일보 2면에 「제주도 폭동 현지 답사」라는 장문의 기사기 실렸다. ‘본사 정준수 특파원 발’로 된 기사 제목은 「피의 제장(祭場)으로 변모한 / 남해의 고도 제주 / 평화스런 낙토에 / 파괴책동의 선풍」이다.

  바야흐로 봄빛이 짙어가는 4월 3일 한라산 기슭에 울린 때 아닌 한 방의 총소리는 마침내 전도에 미치어 시(詩)에서 울려 퍼지고 노래에 불리던 남해의 고도 제주는 이제 싸움터로 변하여 초토화하고 말았다. 사태는 극히 중대하고 시급을 요한다. 더욱이 긴박한 총선거를 앞두고 주위 630리, 253킬로의 이 거대한 섬에 거주하는 30만의 인명 재산이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을 생각할 때 더 한층 관심이 심각 아니 해질 수 없다. 이에 기자는 이 섬을 찾아서 총탄 아래를 헤매며 기자의 눈으로 보고 기자의 귀로 듣고 그리고 기자 자신이 체험한 것을 기초로 하여 4·3 사건의 생생한 진상을 밝히어 오늘의 사태 수습에 이바지 하는 동시에 자칫하면 그릇되기 쉬운 여론을 바로잡으려 한다.
  (···) 원주민과 조정에서 버림을 받은 사람들을 조상으로 아는 동시에 오랫 동안 중앙문화와의 교류가 절단되었기 때문에 천하만사를 다 잊어버리고 어부, 농부 또는 초부로서 그날그날의 생계를 영위해 나가고 있어 순박한 이 섬 주민들의 재산 정도를 보면 오늘에 이르기까지 균등 상태를 이루고 있다. 공산주의의 궁극적 목적이 재산 균등을 말할진대 이 섬에서는 이제 비로소 공산주의화하려는 사회적 개혁 내지 경제적 개혁은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러면 어찌 하여 사상 미증유의 피비린내 나는 무자비한 폭동이 이 섬에서 폭발하였는가? 커다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 원인의 하나로서 남조선 각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조국을 적화하여 소련의 위성국화하려는 극좌분자의 책동과 좌파도 아니요 우도 아니며 요행히 정권을 탐내는 소위 중간파의 호응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유독 제주도의 폭동이 심한 근본 원인은 해방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제주도는 그러한 폭동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에 있었으며 그 조건이 날로 성하여 마침내 그네들의 온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환경조건은 무엇이냐?
  그 첫째는 공산계열의 모략선전이 교묘한 것으로 이를 사회적으로 비판할 때 도정(道政)이 철저치 못하여 민심 악화를 조장하고 파괴분자의 온상이 된 것, 교통, 통신의 불편과 주민의 단순성을 이용한 파괴분자의 선전책동이 치열한 것, 경찰의 고문치사 사건이 있었다는 것, 진정한 여론을 대변할 언론기관이 없었다는 것, 지방 유지의 정치두뇌가 부족하여 대개가 기회주의적 회색분자인 것 등과 아울러 패망일본이 패전 당시에 허다한 무기와 탄약 등을 매장한 것을 헤아릴 수 있고 지리적으로 볼 때 4면이 바다이기 때문에 침입과 도피가 쉬운 것, 깊은 풀숲과 돌담이 많고 20만 대군을 수용할 수 있는 일본군대의 유물인 방공진지가 그대로 남아 있어 폭도배의 게릴라전이 용이한 것 등이다. 그리고 둘째는 치안을 담당한 경찰이 미약한 것이다. 도민 출신의 경찰관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고립한 섬 안에서만의 혈통 교류관계로 따져보면 사돈의 8촌이니 무어니 해서 대개가 인척, 그렇지 않으면 친지관계로 부지불식간에 기밀이 누설되고 처단이 깨끗치 못한 경찰 이념의 박약과 아울러 자존심과 배타심이 강한 도민 출신 경관과 육지 출신 경관의 알력 그리고 경찰 내부의 일부 인사의 불공평 등이 마침내 경찰력을 무언중에 박약하게 하지 않은가 한다.

5월 8일자 2면에 실린 「제주 폭동 현지 답사」 제2회에는 ‘폭동이 일어날 수 있는 환경조건’의 세 번째는 “도민 출신의 경찰관과 같이 법을 집행하는 검찰관과 심판관이 대부분 도민 출신이기 때문에 적극적 처단이 곤란”하다는 것이라고 쓰여 있다. 네 번째는 “해방 전 일본의 오사카나 고베 등지의 공장에서 적색지하운동을 해온 자들이 제주도에 돌아와서 순박한 도민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기자가 쓴 ‘현지 답사’ 기사는 ‘4·3 항쟁’을 극우와 반공의 편협한 시각으로 작성한 것이 분명하다. 제주도 주민들의 재산 정도가 균등 상태를 이루고 있어서 “공산주의화하려는 사회적 개혁 내지 경제적 개혁은 필요치 않은 것”이라는 주장이 바로 그렇다. 당시 제주도민 30만여 명 가운데는 일제강점기에 친일행위를 하거나 일제의 특혜를 받아 부자가 된 자들이 상당수 있었던 데 반해, 제 땅이 없는 소작인들이나 일용노동자들, 잠녀(해녀) 등은 고된 노동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4·3 항쟁은 남조선 단독 총선거를 통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남로당 제주도지부의 무장폭동으로 촉발된 것이 사실이지만 미군정이 동원한 경찰과 군대, 서북청년단 등이 무고한 양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자 이데올로기를 떠나서 분노한 사람들이 저항을 함으로써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민중항쟁이 되었던 것이다.

제주 4·3 항쟁이 그 이후 어떻게 전개되다가 끝이 났는지는 ‘제주 4·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펴낸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의 ‘결론’ 부분에 명료하게 정리되어 있다.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쪽에 또 다른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이제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뛰어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그런데 이때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반기를 들고 일어남으로써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에 앞서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킬로미터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와 관련,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 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 학살 계획’을 채택했다”고 적고 있다.
  계엄령 선포 이후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중산간지대에서뿐만 아니라 해안변 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이들은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심지어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 그 부모와 형제자매를 죽이는 ‘대살(代殺)’을 자행하였다.
  12월 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됐지만, 함병선 연대장의 2연대도 강경진압을 계속하였다. 재판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었다. 가장 피해가 많았던 ‘북촌사건’도 2연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선무 병용작전이 전개되었다.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했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그해 6월 무장대 총책 이덕구의 사살로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 검속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 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천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잔여 무장대들의 공세도 있었으나 그 세력은 미미하였다.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되었다. 이로써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 4·3사건은 실로 7년 7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김구와 김규식, 평양 남북회담에 응하다

1948년 4월 3일 제주에서 무장봉기가 시작된 이래 미군정이 경찰과 조선경비대 등을 동원해서 ‘유혈 진압 작전’을 벌이던 4월 내내 정치권과 언론의 초점은 제주가 아니라 김구와 김규식의 ‘평양행’에 쏠려 있었다. 그 발단은 3월 25일 밤 평양방송이 내보낸 메시지였다. “북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중앙위원회가 남조선에서 단독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한 것과 남조선의 단선·단정에 반대함으로써 조선의 통일적 자주독립을 위한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를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열 것에 대해 결의안을 채택했다. 단선·단정을 반대하는 남조선의 모든 민주주의 정당과 사회단체는 참석해 달라.”

김구와 김규식은 평양방송을 통한 북의 제의에 대해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남북회담에 응하겠다고 밝혔다. 4월 1일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강하게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4월 2일자 1면에 실은 「‘남북협상 찬성은 / 소련 목적에 추종」이라는 기사를 통해 이승만의 발언을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세계평화기구인 유엔에서 조선 독립 문제가 가결되어 국권회복의 서광은 5월 9일 실시될 총선거로써 획기적 단계에 이르고 있는데 일부 비민주적이며 비현실적인 정치가들은 이를 반대하여 북조선당국이 남조선에 혼란을 일으키기 위한 모략적인 남북협상에 호응하여 국권회복의 중대 시기에 민심을 혼란케 하고 있는데 민족진영의 최고 영도자인 이승만 박사는 1일 왕방(往訪)한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남북협상의 비민주성을 지적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남북회담 문제는 세계에서 소련 정책을 아는 사람은 다 시간 연장으로 공산화하자는 계획에 불과한 것으로 간파하고 있는데 한국 지도자 중에서 홀로 이것을 모르고 요인회담을 지금도 주장한다면 대세에 몽매하다는 조소를 면키 어려울 것이다. 더욱이 이번 북한에서 온 회한(回翰) 내용 발표와 같다면 이것은 소련 목적을 성원하는 이외에 아무 희망도 없는 것을 다 알 수 있는 것인데 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국사에 방해되는 것을 생각지 못한다면 우리는 더욱 낙심한다. 지금이라도 국권회복을 하루바삐 성취하자는 합의로써 총선거를 충분히 진행하여 가지고 우리 힘으로 남북통일을 우리 정부에서 달성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안다.”

미군정장관 윌리엄 딘은 강경한 어조로 김구와 김규식을 비난했다. 동아일보 4월 2일자 1면 머리기사(「정치 술책에 빠져 노예가 되지 말라 / 북행은 그들의 자유 / 남북회담에 딘 장관 태도 표명」)를 보기로 하자.

  딘 군정장관은 1일 기자단과과 회견하고 남북회담에 관한 기자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다.
  (···) 동 회담에 초청을 받은 조선인과 일반인은 북조선민전이 총선거의 성공을 불원(不願)하며 또 동 회담이 조선 국민으로 하여금 자유선거에 있어서 그들의 의사를 자유로 발표할 수 없도록 방해하기 위하여 혼란을 확대시키려는 노력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심사숙고한 일이 있는가? (·····)
  (···) 여러분은 여러분의 투표로써 여러분의 대표를 선출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든 문제에 있어서 여러분을 대표케 할 것이다. 여러분은 조선을 일제하에서 받은 것보다 더 비참한 노예 상태에 빠뜨리고자 하는 정치적 술책에 오도되지 않기를 바란다. 조선인이여! 생각하시고 또 잘 생각하라. (·····)
  (···) (양 김 씨의 북조선행에 대한) 나의 태도는 냉소적인 것이다. 만주와 북조선에 있는 조선인들이 그들이 천국이라고 하는 북조선을 버리고 매일 수천 명씩 남하하고 있다. 만일 남조선으로부터 하루에 천 명씩이라도 북조선으로 가준다면 남조선에 있는 여러분의 식량 배급도 증가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 반대로 주린 사람들은 무슨 까닭인지 그들이 천국이라 부르는 북조선을 버리고 남조선으로 오고 있다. 이런 등등의 사실이 나로 하여금 냉소적 태도를 취하게 한 것이다.

남조선주둔 미군사령관 존 R. 하지는 4월 6일 “총선거 실시만이 진정한 통일의 길”이라면서 “남북협상은 소련의 기만책”이고 “초청된 인사는 남조선을 대변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소위 남북협상이라는 것은 조선의 총선거를 방해하려는 공산계열의 간계이니 조선 국민은 이에 속지 말고 5월 10일의 역사적 총선거에 총 참가하여 중앙정부 수립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내용의 특별성명을 발표했다(동아일보 4월 7일자 1면).
 
미군정을 이끌던 하지를 비롯해서 군정장관 윌리엄 딘 등이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참가 결정을 냉소에 붙이면서 ‘착각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비난하자 “행동을 보류하고 추후에 떠나겠다”고 밝힌 김규식과 달리 김구의 태도는 단호했다.


김구의 외로운 북행

4월 13일 남북협상파가 모인 자리에서 김구는 북행 의지를 확실히 밝혔다.

  4월 14일 설의식, 유진오, 정지용, 김기림, 염상섭 등 문화인 108명의 이름으로 「남북협상을 성원함」이라는 글이 발표되었다. 이 글은 남한만의 5·10 선거가 38선의 ‘실질적 고정화’이자 ‘민족 분열의 구체화’라고 지적하면서, 자주독립을 달성할 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1인까지 남북협상의 태도를 추진하여 통일국가의 수립을 기필(期必)하자”고 주장하였다. 또 이들은 “우리의 지표와 우리의 진로는 가능·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가위(可爲)·불가위의 당위론인 것이니, 올바른 길일진대 사력을 다하여 진군할 뿐인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남북협상만이 조국의 영구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막는 조국의 길이다”라고 역설하였다(<한국현대사산책-1940년 대편 2권>, 118쪽).

김구의 북행을 조소하거나 소홀히 다루던 동아일보와 달리 그때까지만 해도 그의 정치적 노선을 지지하던 조선일보는 4월 17일자 1면 머리에 「불귀(不歸)의 각오로 북행 / 김구 씨의 결의 비장!」이라는 기사를 올렸다. 그 기사에는 북행을 앞둔 김구가 4월 15일 밤 기자 초대연에서 남북협상에 임하는 심경을 아래와 같이 밝혔다고 쓰여 있다.

  미·소공위나 그리고 유엔까지도 조선 민주독립에는 실망 이외의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나는 이 이상 외국인에게 희망을 가질 수 없으므로 죽으나 사나 말과 피가 같은 동포끼리 마지막으로 내 일을 하여 보자는 것이다. 회담의 성과에 관하여서는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을 것이며 반드시 뚜렷한 성과를 가지고 오겠다고 단언하기 어려움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남북에서 각각 정부가 선다면 국토는 영구히 분할될 것이며 또 명칭이야 어떻든 남조선에 수립될 단정(單政)은 불구자밖에 안 된다. 이것을 어찌 우리 자손에게 넘겨줄 수 있겠는가. 나는 일신의 영화(榮華)의 길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나는 금차 이북행에 있어서 사실은 나의 운명까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며 이것은 이번 김은황 문제에 아무 관계 없는 나를 출정(出廷)시켜 증인커녕 죄인 취급하다시피 한 것으로 보아도 잘 안다. 내가 북행 전 대개 추측할 수 있는 있는 바와 같이 5월 10일의 선거 전후 무슨 폭동이나 일어난다면 그 책임을 나에게 뒤집어씌울 것이 뻔하다. 나는 시시로 나를 구박하려는 손이 있다는 것도 또 점차로 험악해지는 나의 신변의 위험성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70 평생을 두고 그래도 조국 독립에 몸을 바쳤다는 나로서 조국이 절벽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북선(北鮮)에서는 김구가 김일성 장군에게 항복하러 온다든지 또 조선 분열의 책임은 반탁자(反託者)에 있다든지 여러 공격이 많이 있으나 나 역시 할 말이 없지도 않으며 내가 이런 서한을 보내되 외인이 먼저 알게 될 것이므로 다만 좋은 말만 써서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주의가 다르다 할지라도 같은 조상과 같은 말과 같은 피를 가진 동족들이 서로 만나서 하면 무엇이든지 될 줄 알고 마지막 길을 떠나려는 것이다. 만약 못 돌아오게 되더라도 민족과 독립을 위하여 마지막 길을 갔노라고 여러분이 써주면 감사하겠다.

김구는 4월 19일 오전 거처인 경교장을 나서 북행 길에 오르려고 했다. 그러나 경교장 일대는 그가 평양에 가는 것을 막으려는 군중 때문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 청년단체, 학생, 기독교단체, 월남 인사들의 단체들까지 모두 나서서 북행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김구는 “가야만 해. 38선을 베고 죽을망정 가야만 해!”라고 외쳤지만 군중은 말을 듣지 않았다. 김구는 몰려든 군중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나는 독립운동으로 나이 70이 넘었다. 더 살면 얼마나 더 살겠나? 여러분은 나에게 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 달라. 이대로 가면 한국은 분단될 것이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김구가 말리는 학생들을 뿌리치고 승용차에 오르자 그들은 정문을 가로막고 차 앞에 드러누웠다. 김구는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 학생들은 김구의 승용차 바람을 빼버렸다. 김구는 베란다에 올라서서 격앙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한 번 간다고 내가 결심했으면 누가 말려도 쓸데없어! 백 마리 소를 모아서 나 김구를 끌려고 해도 내 마음은 끌려가지 않아! 누가 뭐라고 해도 좋다. 북한의 공산당이 나를 미워하고 스탈린의 대변가들이 나를 시베리아로 끌고 가도 좋다. 김일성도 다 우리와 같은 조상의 피와 뼈를 가졌다. 나는 이 길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지만 이북의 우리 동포들을 뜨겁게 만나야 한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야. 어서 집으로 돌아가.”
  결국 김구는 경교장 뒷담장을 넘어 빠져나갔다. 김구가 북행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홍명희도 19일 저녁 북행하였으며, 조소앙·조완구·엄항섭 등은 20일에 북으로 출발하였다. 김규식 일행은 21일에 출발하였다(같은 책, 119~121쪽).


동아일보, 남북협상을 묵살

조선일보는 김구가 아들 신과 비서 선우진을 데리고 38선을 넘어가는 장면부터 평양에 도착해서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상세히 전했다.

조선일보 22일자 1면 머리기사(「김 박사도 작일 북행 / 일행 20여 명 동시 출발」)는 “남북 협상에 참가 여부가 주목되어 오던 김규식 박사가 21일 오전 6시 반경 일행 20여 명을 대동하고 발정(發程)하였다”고 보도했다.

이 기사 바로 밑에는 「38선의 존속은 부당 / 김구 씨 평양에서 제일성」이라는 기사가 자리 잡았다. 김구는 평양에 도착한 뒤 아래와 같은 결의와 포부를 밝혔다는 것이었다. “위도(緯度)로서의 38선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지만 조국을 양단(兩斷)하는 외국 군대들의 경계선으로서의 38선은 일각이라도 존속시킬 수 없는 것이다.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뿐이랴. 대중의 기아가 있고 가족의 이산이 있고 동족의 상잔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 (···) 우리는 조국을 위하여 현하 민주자주의 통일을 전취(戰取)하는 단계에 처해 있다. 우리에게 통일독립이 없이는 세계의 평화도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는 4월 23일자 1면 머리에 올린 「남북협상 수(遂) 개막 / 대표 545명 참가」라는 기사를 통해 “확실한 보도에 의하면 남북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는 4월 19일 오후 6시 김일성 씨 사회 하에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각 당 각 단체 대표 545명 참석 하에 개막되었다”고 보도했다. 참가단체는 남로당, 인민공화당, 민주독립당, 사회민주당, 신진당, 민주여성동맹, 민중당, 전민, 전평, 근로인민당, 문화단체총연맹 등이었다.

조선일보가 평양회담의 전개 과정을 객관적으로 보도한 것과 달리 한민당을 대변하던 동아일보는 남북협상 관련 기사를 전혀 내보내지 않다가 4월 27일자 1면 머리에 「남북협상의 모략성」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지난 19일부터 적도(赤都)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협상은 양 김 씨의 참가를 얻어 본격적 단계에 들어간 모양인데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금월 내로 유엔 결의 반대, 유엔조선위원단 철거, 남조선 총선거 반대, 양군 즉시 철퇴 등을 결의하고 일부 인사를 다시 남하케 하여 총선거 연기 내지 중지 운동을 전개하리라 한다.
  남북협상의 비자주성과 모략성에 관하여서는 이미 본란에서 지적한 바 있었거니와 민족의 운명을 정궤(正軌)에 올리려는 5·10 총선거를 방해, 중지케 하려는 그들의 집요한 선전과 선동은 날로 우심한 바 있어, 민심을 현혹케 하고 있으니 그들의 기본적 의도를 결척(抉剔)하여 여하한 모략에도 부동하는 태세를 갖추지 않는다면 국권회복의 홍업(鴻業)이 일대 난관에 봉착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으리오. 애국동포의 철 같은 단결과 협조로 일체의 총선거 방해·중지 모략 격퇴에 총궐기하기를 촉(促)하고자 하는 소이이다. (·····)
  국련 결의를 극력 반대하는 북조선에서는 인민공화국을 선포하여 이를 전국 정부라고 참칭(僭稱)하려면 이남의 정객을 참가시키는 것이 효과적인지라 그들의 매수에 전력을 다한 결과가 오늘에 소위 남북협상의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일찍이 임정 요인의 일부분이 남조선민전의 의장단에 참가하여 그들 공산파의 이용물로 화한 것을 보았다. 이제 임정의 수뇌부로 자처하는 인사들이 자기의 정권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적도 평양에서 공산파에 아유(阿諛)하고 소련에 국궁(鞠躬)하는 것을 본다. 이들이 자기의 과오를 반관심성(反觀審省)하는 대신 이러한 반동을 감행하게 됨을 슬퍼하노라. 그러나 가는 자로 하여금 가게 하라. 우리는 국제정의에 입각한 유엔 결의의 총선거를 완수하여 우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개척할 것을 굳게 맹서하는 바이다.

동아일보의 이 사설은 한민당이 남북협상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그대로 옮긴 것 같다. 평양에서 남북회담을 하고 있던 김구와 임정 요인들, 그리고 중간파라고 불리던 인사들 대다수는 한민당의 핵심 인물들과는 달리 친일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위의 사설은 그들을 향해 “자기의 정권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적도 평양에서 공산파에 아유하고 소련에 국궁”한다고 조롱했다.

게다가 이 사설은 “가는 자로 하여금 가게 하라. 우리는 국제정의에 입각한 유엔 결의의 총선거를 완수하여 우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개척할 것을 굳게 맹서”한다고 외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동아일보 사주와 간부들인가, 아니면 한민당 사람들인가?

같은 보수신문인 조선일보가 동아일보와 같은 날짜(4월 27일)에 내보낸 사설(「남북회담은 어디로」)은 평양회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생산적 결과를 내라고 촉구했다. 좋은 비교 자료가 되리라고 보고 아래에 옮긴다.

  (···) 지금 우리가 남북회담에 기대하고자 하는 바는 기상천외의 것이 아니다. 실로 일국의 대사(大事)요 저간의 경과가 또 착잡한 만치 최소한도로 좌우가 화합하여 성실하게 통일의 일로로 매진코자 한다는 방향과, 따라서 미·소 양국이 이에 동정적 협조의 정신으로써 가히 접근할 수 있는 무엇을 보여줄 것만으로도 1차 회담으로서는 성공이라 할 것이나 이러한 방향을 명시하는 데서 통일의 기운은 전 민족적으로 추진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범위와 방향이라면 응당 회담이 도달하여야 할 대강령이 될 것이다. 물론 회담에 회동한 제 인사가 이에 노력할 것을 믿고 바라고자 하거니와 제일에 회담을 어느 일국이나 당파적 입장에서 다른 일국을 비방 공격키 위한 정략적 전술적 경향으로만 끌고 들어가서 자기 민족의 공명정대한 입장조차 그 반영이 불투명하게 된다든가 또 어떤 불상용(不相容)의 결렬과 같은 경우에 도달한다면 회담은 민족적 의사와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 될 뿐더러 혼란을 더 악화할 염려 있는 양국의 점령정책은 38선을 가일층 철벽화하게 될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뿐인가. 그러한 비관적우리 의사에 반대적 결과에 이른다면 방금 진행 중인 미 측의 남조선 선거 결과나 소련 책전(策戰)은 또 무엇을 가져올 것인가. 회담은 모름지기 꿈에도 평화를 그리는 선량한 민중의 소리에 화답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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