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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외로운 통일운동과 동아일보동아일보 대해부 2권 - 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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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8.25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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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조선 문제가 유엔으로 넘어간 뒤 좌우합작위원회는 사실상 해체되고 말았다. 그런 진공 상태에서 1947년 12월 20일 중간세력의 결집체인 민족자주연맹(민련)이 창립되었다. 의장에 김규식, 부의장에 김봉준·홍명희·원세훈·이극로·김성규 등이 선출되었다.


한동안 오락가락한 김구와 장덕수 암살

이 당시 김구는 오락가락하거나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김구는 1947년 11월 24일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하였으나, 1주일 후인 11월 30일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 그날 김구는 이화장으로 이승만을 방문해 한 시간 정도 요담한 후, 자신과 이승만은 조금도 근본 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사실상 단독정부 참여 의사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성명 발표 후 두 사람은 나란히 서북청년회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훈화를 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협력관계가 강화되어 가던 시점인 12월 2일에 일어난 장덕수 암살 사건은 두 사람의 관계를 파국으로 끌고 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동아일보 3인방’의 막내 격인 장덕수는 동아일보사 취체역이자 한민당 정치부장이었다. 장덕수가 12월 2일 해가 저물 무렵 서울 제기동 집에서 저녁상을 마주하고 있던 때 정복 차림의 경찰관 1명과 사복을 입은 청년 1명이 찾아오자 그의 아내가 집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그들이 “경찰서에서 왔다”고 하자 장덕수가 방문을 열고 나가 현관에서 몇 마디 주고받은 뒤 방으로 돌아가는 순간 두 발의 총성이 울리면서 실탄이 그의 하복부를 관통했다. 범인들은 즉시 달아났고 장덕수는 그 자리에서 숨을 멈추었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경찰은 사건 발생  38시간 만인 12월 4일 오전에 두 사람을 장덕수 ‘살해범’으로 체포한 뒤 주범은 종로경찰서 소속 경관인 박광옥(23세), 공범은 연희대(연세대 전신) 학생인 배희범(20세)이라고 발표했다. 두 사람 모두 임시정부를 절대 지지한 대한학생총연맹 회원들이었고, 경찰이 ‘배후’로 지목한 김석황은 한독당 중앙위원이었다.

미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은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을 위원장으로 하는 수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수도청 수사과장 노덕술과 사찰과장 최운하를 위원으로 임명했다. 노덕술과 최운하는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을 붙잡아 악랄하게 고문한 것으로 유명한 일본 경찰 출신이었다. 그들이 장덕수 피살과 관련해서 한독당의 김구를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났다.

그런 상황 때문에 이승만과 등을 지게 된 김구는 그동안의 극우·반공 노선을 벗어나서 좌우를 초월하는 민족주의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자 그를 지지하던 우익세력이 차츰 멀어져 가고, 환국 이후 그를 절대적으로 지지하던 조선일보조차 결별을 암시했다. 조선일보는 1948년 1월 10일자 사설(「국련위 도착과 전도 관측」)에서 김구의 ‘단독정부 반대론’과 좌우 통합 노력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조선일보 사주이자 발행인 겸 편집인 방응모는 1948년 2월 3일자 1면에 올린 「김구 선생 의견에 대한 우리의 취할 바 태도」라는 글을 통해 김구와 조선일보의 결별을 확실하게 선언했다.

조선일보는 1945년 11월 25일 복간된 직후부터 ‘우리의 위대한 혁명지사’ ‘민족 위해 수화(水火) 불사’ ‘혈(血)의 투쟁으로 일관’ ‘인정과 의지의 투사’ 등 최대의 찬사를 김구에게 바쳐왔다. 특히 방응모는 ‘김구 영웅화’에 앞장섰다. 그러나 방응모는 김구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우익세력의 단독 정부론과 ‘유엔 감시 하의 남북 동시 선거’를 반대하고 나서자 위의 글에서 그를 ‘이상론자’ ‘몽상가’ ‘현실을 도외시하는 모험론자’로 몰아붙였다. 그러면서 글의 결론부에서는 “김구 선생의 견해에 대한 평은 이것에만 그치는 동시에 선생에 대한 과도한 비난과 폭언이 있음에 대하여는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유감되는 바 적지 않다”고 걱정하고 있다.

방응모가 대표하는 조선일보가 김구에 대한 결별 선언을 명백히 함으로써 가뜩이나 한민당의 기관지나 다름없는 동아일보의 무차별 공격에 시달려오던 그는 강력한 지원군이었던 조선일보마저 잃고 황량한 벌판에 홀로 선민족주의자, 통일지상주의자가 되고 말았다.


동아일보, 김구의 단독선거 반대를 맹공

1948년 1월 7일 입국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유엔위원단)이 북한 지역을 방문하려고 했으나 소련은 1월 22일 그것을 거부한다고 공식으로 발표했다. 그런 상황에서 김구는 1월 28일 유엔위원단에 보낸 「의견서」를 통해 단독정부를 반대함을 명확히 하면서 남북지도자회의를 소집하라고 요구했다. 이승만세력 및 한민당과 완전히 다른 정치적 노선을 걷겠다고 다시 한 번 밝힌 것이었다.

  김구의 이런 방향 전환에 대해 “어제까지 김구를 최고영도자로 받들던 극우세력은 일제히 비난과 모략으로 나왔다.” 한민당 관계자 등으로 구성된 한국독립정부수립대책위원회는 김구를 다음과 같이 매도하였다.
  “소련은 조선의 김구에게서 그 충실한 대변인을 발견하였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의 자살적 행동으로서 참으로 해괴한 일이라고 하지 아니 할 수 없다. 우리는 금후에는 김구를 조선민족의 지도자로는 보지 못할 것이고, 크레믈린궁의 한 신자라고 아니 할 수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다.”(<한국현대사산책- 940년대편 2권>, 87쪽).

한민당을 대변하는 동아일보는 2월 3일자 1면 머리에 올린 사설(「총선거를 단행하라」)에서 김구에게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민족의 운명을 좌우하고 자주독립을 전취(戰取)할 총선거 실시는 우리가 갈망한 지 이미 오래였고 57개국으로 구성된 국제연합 또한 이를 보장하였으니 실시 안 될 리 없건만 이를 방해하려는 비민족적 비민주적 책동도 우심(尤甚)한 바 있으니 또 한 번 이를 강조하여 겨레에 새로운 결의와 용기를 종용하는 동시에 유엔조위(朝委:유엔위원단-인용자) 제공(諸公)의 심경에도 이에 추호의 동요 없이 그 사명 완수에 매진하여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유엔 결의에 의한 총선거 실시에 반대하는 3대 집단이 있다는 것이 조위의 협의와 제출문서를 통하여 나타났으니 제1은 공산파요 제2는 중간파요 제3은 법통파다. 소련의 맹우로 자처하는 비민주적 독재주의 신봉자들이 소련의 보이콧에 추종하여 남한의 총선거는 단선(單選)이니 단정 수립이니 하고 반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예상하던 바이었거니와 유엔 결의를 지지하는 듯 아니 하는 듯하면서 요컨대 총선거를 연기하려는 점에 있어서 공산파와 호흡을 맞춘 중간파는 또 한 번 그 교묘한 줄타기를 보여주었고 민족진영의 중견적 존재로 자위(自威)하던 법통파가 그 법통에 연연한 나머지 민주적 총선거를 반대하여 군정을 연장하려 하고 심지어 국제경찰군을 동원하여 조국을 국제신탁에 넣음도 불사하려 함에 있어서는 그 지성의 상실에 당목(瞠目) 실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3파의 동기 자별(自別)타 하더라도 유엔 결의에 반대하여 총선거를 지연하려는 점에 있어서는 일치한 바 있으니 이제 좀 더 그 동기를 추궁해 보기로 하자. (·····)
  남북요인회담으로 통일조선을 주장함은 중간파나 법통파나 동일타 하더라도 그 의도에 있어서는 전연 딴판이다. 전자는 통일조선을 염원하는 민중의 심리를 이용하는 동시에 멸시할 수 없는 공산세력에 추파를 던져 좌우에서 지지를 받음으로써 자파 세력을 확충하려는 것이며 자파 세력이 미약한 현하 정세로서는 선거를 연기함이 유리하다는 데 불과한 것이요 후자는 풍상 30년간에 임정 간판을 사수하였는데 그대로 법통을 인정치 않고 총선거란 무엇이냐는 반발심에서 실현성 없는 양군 철퇴니 남북요인회담이니 하여 이것도 저것도 되지 않으면 정권은 결국 자파에 돌아온다는 시대착오적 계산으로 이 결정적 순간에 있어서 전 민족적 의사에 반하여 반대를 감행한 것인데 입국 이래 반복된 허다한 과오가 여기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한 감이 있다.
  문제는 간단하고 결정적이다. 양군 즉시 철퇴와 남북요인회담을 천만 번 부르짖어도 한 개의 단어는 될지언정 정치는 될 수 없는 것이다. 현실을 떠나서 정치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 날로 우심해 가는 남한의 민생 도탄은 급속한 정부 수립을 절실히 요청하고 있으매 이북을 보류하지 않을 수 없는지라 3분의 2 이상의 인구를 보유한 남한에서만이라도 총선거를 단행하여 정부를 수립하여야 할 것이다. 군정을 철폐하고 대외적으로 발언권을 갖는다는 것은 통일조선에의 획기적 진전인 것이다. 우리는 이 이상 군정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운명을 개척하는 것만이 우리의 노력으로 일보일보 개선해 가는 것만이 자주적인 것이다. 남한에 총선거를 단행하라! 정부를 수립하라! 이것만이 이 단계에 있어서 우리의 최선이며 통일조선에의 필연적 과정인 것이다. 유엔 결의의 본의 또한 여기 있으매 유엔조위 제공도 우리의 이 절실한 요망에 아낌없는 협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동아일보가 이 사설에서 말하는 ‘법통파’는 김구가 이끄는 임시정부 세력을 가리킨다. 1920년 창간 이래 동아일보가 일정한 기간을 빼고는 ‘친일 매국’에 몰두하던 때 김구와 임시정부 구성원 대다수는 목숨을 걸고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분투했다. 그런데 해방 이후에도 김성수를 비롯한 친일파가 경영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동아일보는 위의 사설에서 법통파를 이렇게 비난한다. “민족진영의 중견적 존재로 자위하던 법통파가 그 법통에 연연한 나머지 민주적 총선거를 반대하여 군정을 연장하려 하고 심지어 국제경찰군을 동원하여 조국을 국제신탁에 넣음도 불사하려 함에 있어서는 그 지성의 상실에 당목 실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동아일보는 ‘중간파’를 “공산세력에 추파를 던져 좌우에서 지지를 받”으려 하는 기회주의 집단이라고 매도한다. 그리고 법통파는 “풍상 30년간에 임정 간판을 사수하였는데 그 법통을 인정치 않고” 총선거를 실시하려고 하니 ‘반발심’ 때문에 ‘시대착오적 계산’을 하면서 “전 민족적 의사에 반하여 총선거를 반대”하는 치졸하고 근시안적인 집단이라고 공격을 퍼붓고 있다.

동아일보가 대변하는 한민당이야말로 친일파와 대지주, 어용적 지식인들이 주류를 이룬 기회주의 세력의 대표였다. 그런데도 동아일보는 분단의 길로 치닫는 한민당은 ‘애국애족’하는 집단이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지켜온 임시정부 세력은 ‘반민족적’이라고 비난한 것이다.

한민당과 동아일보가 김구를 ‘비현실적’ 정치인이라고 공격하자 그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렇게 반박했다.

  세상에 가장 현실적인 방법과 수단이 어찌 한두 가지에 그칠 것인가. 땀을 흘리고 먼지를 무릅쓰며 노동을 하는 것보다 은행 창고를 뚫고 들어가 금품을 도취(盜取)하여서 안일한 생활을 하는 것도 현실적이라 할 수 있고 청빈한 선비의 정실이 되어 곤궁과 싸우기보다 차라리 모리배나 수전노의 애첩이 되어서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도 가장 현실적인 길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도(正道)냐 사도(邪道)냐가 생명이라는 것을 명기해야 합니다.
  외국의 간섭이 없고 분열 없는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것은 민족의 지상명령이니 이 지상명령에 순종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망명생활을 40여년간이나 한 것도 가장 비현실적인 길인 줄 알면서도 민족의 지상명령이므로 그 길을 택한 것입니다. 과거의 일진회도 현실적인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오늘날 외세에 아부하여 반쪽정부의 요인이라도 되어보려고 하는 이들은 통일정부 주장은 공염불이라고 비방하지만 (···) 우리는 5천년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가 독립국이고 자주민족임을 확신하는 것이니, 우리의 주장은 공염불이 아니라 3천만의 일관된 신조요 일관한 구호입니다(송건호, <한국현대인물사론>, 한길사, 1984, 78쪽).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1948년 5월로 예정된 제헌국회 총선거가 남쪽의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결과를 낳을 것이 확실해지자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되어 있던 남조선노동당은 민주주의민족전선과 함께 2월 7일 전국적인 파업을 일으켰다. 이 파업은 미군정장관 A.L. 러치가 미군 철수설을 부인하는 성명을 낸 지 이틀 뒤에 일어났다. 남로당의 단선반대구국투쟁위원회가 지휘한 노동자 파업을 중심으로, 전기노동자들이 송전을 중단하고 철도노동자들은 철도 운행을 중단했다. 통신노동자들은 통신 설비를 파괴하며 미군정을 압박했다. 전국 곳곳에서 농민들이 가두 시위에 나서는가 하면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벌였다. 3월 초까지 연인원 2백만여 명이 참여한 이 총파업에서 좌익세력은 90회쯤 경찰을 공격해서 18명의 경찰이 사망하게 했고, 좌익 가운데 12명, 군중 70명이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숨졌다.

좌익의 파업이 한창이던 2월 10일 김구는 남조선만의 단독정부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니, 자기의 생명 을 연장하기 위하여 남북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 민족을 사갱(死坑)에 몰아넣는 극악극흉의 위험한 일이다. 이와 같은 위기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의 최고 유일의 이념을 재검토하여 국내외에 인식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내가 유엔위원단에 제출한 의견서는 이 필요에서 작성된 것이다. 우리는 첫째로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이며, 이것을 완성하기 위하여 먼저 남북 정치범을 동시 석방하며, 미·소 양군을 철퇴시키며, 남북 지도자회의를 소집할 것이니 이 철과 같은 원칙은 우리의 목적을 관철할 때까지 변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불변의 원칙으로써 순식(瞬息) 만변(萬變)하는 국내외 정세를 순응 극복하여야 할 것이다. 독립이 원칙인 이상 독립이 희망 없다고 자치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을 왜정 하에서 충분히 인식한 것과 같이 우리는 통일정부가 가망 없다고 단독정부를 주장할 수 없는 것이다. 단독정부를 중앙정부라고 명명하여 위안을 받으려 하는 것은 군정청을 남조선 과도정부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사사망념(詐思妄念)은 해인해기(害人害己)할 뿐이니, 통일정부 수립만 위하여 노력할 것이다. (·····)
  3천만 자매형제여!
한국이 있고야 한국 사람이 있고, 한국 사람이 있고야 민주주의도 공산주의도 또 무슨 단체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지고야 땅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내가 불초(不肖)하나 일생을 독립운동에 희생하였다. 나의 연령이 이제 70 유 3인바 나에게 남은 것은 금일금일 하는 여생이 있을 뿐이다. 이제 새삼스럽게 재화를 탐내며 명예를 탐낼 것이랴! 더구나 외국 군정 하에 있는 정권을 탐낼 것이랴! (·····)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생전에 38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궂은 날을 당할 때마다 38선을 싸고도는 원귀의 곡성이 내 귀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으면 남북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동포들의 원망스러운 용모가 내 앞에 나타난 것도 같았다.
  3천만 동포 자매 형제여!
  붓이 이에 이르매 가슴이 억색(抑塞)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어 말을 더 잇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나의 애달픈 고충을 명찰하고 명일의 건전한 조국을 위하여 한 번 더 심사(深思)하라.

2월 19일 열린 유엔 소총회에서 임시위원단 의장 크리슈나 메논(인도인)은
조선 문제 처리방안으로 네 가지를 제시했다. 미국은 그 가운데 제1안을 지지하면서 남한에만 선거를 실시하라고 권고하는 결의안을 소총회에 제출했다. 2월 26일 소총회는 미국의 제안을 찬성 31, 반대 2, 기권 11로 채택했다. 주한미군사령관 존 하지는 3월 1일 총선거를 5월 9일에 실시한다는 포고를 발표했다. 그러나 그날이 일요일이라 기독교단체들이 반대하고 일식(日蝕)까지 겹쳐서 5월 10일로 선거일을 바꾸었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3월 1일 ‘정부수립결정안 축하 국민대회’를 열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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