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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간 뒤 ‘동아일보 사람들’의 동태와 한민당 창당동아일보 대해부 2권 -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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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7.07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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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8월 10일 동아일보가 강제폐간을 당한 이래 사주 김성수와 그의 최측근이던 장덕수는 ‘친일’을 넘어 ‘부일(附日)’이라고 불러 마땅한 반민족적 행태에 몰두했다.


‘김성수와 송진우는 은둔했다’

김성수와 장덕수는 공개적으로 친일 활동을 했고, ‘동아일보 3인방’의 한 사람인 송진우도 동아일보사의 인적 자원과 자산을 승계한 동본사 사장으로 공개적으로 움직였는데, <동아일보사사 권 2>(동아일보사 발행, 1978)에는 그들의 동태가 전혀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1940년 2월에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8월에 동아·조선 양대 민족지를 폐간한 일제총독부 당국은 곧 이어 국민총력연맹을 조직하여 한국 전역에 걸쳐 황국(일본)신민화운동을 강력히 추진하고 한국인 간의 일상용어마저 일본어를 상용할 것을 강요하였다. 다음해 3월에는 사상범예비구금령을 공포하여 죄의 유무를 불문하고 자기들이 지목하는 자는 누구든지 마구 체포 구금하니 민족의 생명은 날로 쇠잔하여 갈 수밖에 없었다.
  이 살벌한 조건 하에서 양식 있는 인사들은 국외탈출을 생각했으나 일제 경찰의 빈틈없는 감시망을 뚫을 길이 없었다. 김성수는 전곡의 해동농장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졌고, 송진우는 원서동 자택에서 세상을 등지고 대세를 관망하였다(25쪽).

동아일보사의 공식 사사(社史)에 나오는 위의 내용은 명백한 거짓이다. <친일인명사전>에 나와 있듯이, 김성수는 1941년 5월 조직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 및 감사로 활동했고, 같은 해 8월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위원 및 경기도 위원을 지냈다. 그리고 9월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에 참여하고 10월에 감사로 뽑혔다. 1941년에는 조선방송협회 평의원과 조선사회사업회 평의원을 겸했다. 조선의 대표적인 친일단체들에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동아일보의 사사는 그가 마치 경기도 연천군의 전곡에 있는 해동농장에서 은둔생활을 한 듯이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양식 있는 인사들은 국외탈출을 생각했으나 일제경찰의 빈틈없는 감시망을 뚫을 길이 없”어 김성수가 은둔했다는 투의 주장은 또 무엇인가? 조선의 대자본가이자 대표적 ‘친일보국언론’인 동아일보의 사주인 그가 망명까지 고려했다는 뜻인가?

김성수는 1943년 여름부터 연말까지 조선청년들을 향해 ‘대동아 성전’에 지원병으로 나가 ‘천황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라고 선동하거나 강권하다시피 하는 글을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 등에 연재하느라고 어디 가서 은둔할 여가를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송진우는 공개적으로 친일활동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김성수와 총독부’라는 ‘두 시어머니’를 충실히 모시기 위해 열심히 움직였을 것이다.


한국민주당 창당을 주도한 ‘동아일보 사람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왕 히로히토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연합국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그가 발표한 「조서(詔書)」는 아래와 같다.

  짐은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을 깊이 생각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하고자 여기 충량한 그대들 신민에게 고하노라.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영·중·소 4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하게 하였다. 생각건대 제국 신민의 강령(康寧)을 도모하고 만방공영의 낙을 같이함은 황조황종(皇朝皇宗)의 유범(遺範)으로서 짐이 마음에 두고 간직하여 잊지 않고 지키는 바 이전에 미·영 양국에 선전(宣戰)한 까닭도 또한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바란 것일 뿐이고 타국의 주권을 배(排)하고 영토를 침범함은 물론 짐의 뜻이 아니었다. 연이은 교전이 이제 4년을 넘겼다. 육해군 장병들의 용전(勇戰), 짐의 만조백관의 여정(勵精), 1억 중서(衆庶)의 봉공 등 각각 최선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전국(戰局)은 호전되지 않고 세계의 대세 역시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다. 게다가 적은 새롭게 잔학한 폭탄을 사용하여 빈번히 무고한 살상을 하고 참해(慘害)를 가하여 그 피해는 이루 측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교전을 계속한다면 우리 민족의 멸망을 초래할 수밖에 없고, 이어 인류의 문명도 파괴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짐이 어떻게 억조의 적자(赤子)를 지키고 황조황종의 신령에 사죄할 것인가. 이것이 짐이 제국 정부로 하여금 공동선언에 응하게 한 까닭이다.
  짐은 제국과 함께 시종 동아의 해방에 협력해온 여러 맹방에 대하여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제국 신민으로서 전진(戰陣)에서 사망하거나 순직하고 비명에 죽은 자와 그 유족을 생각하면 온몸이 찢어지는 듯하며 전상(戰傷)을 입거나 재화(災禍)를 당하고 가업을 잃은 자의 후생에 대해서는 짐이 깊이 진념(軫念)하는 바이다. 생각건대 금후 제국이 받을 고난은 심상치 않을 것이다. 신민의 충정(衷情)도 짐은 잘 알고 있다. 짐은 시운(時運)이 나아가는 바를 따라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고 참기 어려운 것을 참아 만세(萬世)를 위해 태평을 열고 싶다.
  짐은 이에 국체를 호지(護持)하여 충량한 신민의 적성을 믿으면서 언제나 신민과 함께 있을 것이다. 만약 정에 격하여 사정을 어렵게 하거나 동포끼리 서로 비방하여 시국을 어지럽힌다면 대도(大道)를 그르쳐서 세계에 신의를 잃게 될 것을 짐은 가장 걱정한다. 거국일가(擧國一家)와 자손상전(子孫相傳)을 확실히 하고 신주(神州)의 불멸을 믿으며 책임이 중하고 갈 길이 먼 것을 생각하여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쏟아 도의를 두텁게 하고 지조를 굳게 함으로써 국체의 정화(精華)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進運)에 뒤지지 않도록 신민이 노력하여 짐의 뜻을 실현하라.
어명(御名) 어새(御璽)
소화 20년 8월 14일

히로히토는 떨리는 음성으로 「조서」를 4분 10초 동안 읽어 내려갔다. 그는 아시아에서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은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바랄 뿐인 것이고’ 타국의 주권을 배척하고 영토를 침범한 것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고 발뺌을 했다. 일본 제국의 ‘대원수’이자 이른바 ‘대동아전쟁의 총책임자’인 사람으로서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었다. 게다가 그는 ‘황조황종’ ‘신민’ ‘국체’ ‘적자’ ‘적성’ ‘신주’ 같은 말들을 온 세계를 향해 공공연히 외침으로써 그가 이끌던 일본이 항복의 순간에도 ‘신국(神國)’임을 강조했다.
8월 15일, 비록 민족의 독자적 힘으로 이루어낸 해방은 아니었지만, 일제의 패망이 확실해지자 한반도는 “만세” 소리로 떠나갈 듯했다. 전국에서 굳게 닫혔던 감옥문이 열리고 애국·항일투사들이 자유의 세상으로 쏟아져 나왔다.
온 나라가 떠나갈 듯한 열광의 도가니를 보며 김성수와 송진우, 장덕수가 대표하는 ‘동아일보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1930년대 후반 이래 일제의 ‘성전’을 찬양하는 나팔수 노릇을 하고 ‘황국신민화’ ‘내선일체’ ‘팔굉일우’에 앞장섰던 전과를 되돌아보며 민중의 응징을 피해 숨을 곳을 찾고 있었을까?

그들이 8·15 직후 어떤 행동을 했는지는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해방이 곧바로 나라와 민족의 독립으로 이어지지 않고 미군이 남한에,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하면서 군정이 실시되기 전후해서 ‘동아일보 3인방’은 ‘해방정국’ 정치의 일선에 나서게 된다. 그 과정을 자세히 보기로 하겠다.
세계 제2차 대전 연합국의 일원인 소련은 1945년 8월 9일부터 청진, 웅기, 나진 등을 점령해 나간 끝에 8월 24일 평양에 입성했다. 소련은 8월 28일까지 북한 전역에 병력 12만5천여 명을 배치하고 나서 각 도·시·군에 점령군 지역사령부 설치를 끝냈다. 그에 앞서 8월 25일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는 ‘조선 인민들’에게 보내는 포고문을 통해 실질적으로 군정(軍政)을 선포했다.

한반도 남쪽에서는 미군이 진주하기 훨씬 전인 8·15 직후부터 좌익세력이 ‘건국’ 작업을 시작했다.

  (···) 일본이 포츠담선언 수락을 통보한 8월 10일 이후 조선총독부는 패전 후에 있을지 모를 보복을 막고 조선에 있는 80만여 명의 일본 민간인과 군인의 신변보호 및 안전귀환을 위해 당시 국내의 지도급 인물인 여운형·송진우 등과 행정권 이양 교섭을 벌였다.
  송진우 측은 이에 불응했을 뿐만 아니라 여운형 측과의 협력마저 거부했고, 이에 행정권 인수 문제는 여운형 측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여운형 측은 이미 조직했던 건국동맹을 모체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켜 정치범을 석방하고 치안대를 조직하여 활동을 개시했다. 그러나 건국준비위원회의 치안대가 경찰관서를 접수해 가는 과정에서 조선총독부는 갑자기 행정권의 이양을 거부하고(8.16) 조선군사령관의 이름으로 “민심을 교란하고 치안을 해치는 일이 있으면 일본군은 단호한 방침을 취할 방침이다” 하고 포고령을 내리는 한편 경찰관서·신문사·학교 등을 다시 접수했다.
  이후 미국군이 서울에 진주하고(9.6) 그 진주군 사령관 하지와 조선총독 아베(阿部信行) 사이에 항복조인이 체결되어 35년 간에 걸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배는 끝났다(1945.9.9.). 그러나 진주한 미군당국은 당시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건국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선포된 조선인민공화국을 모두 승인하지 않았다. 일본의 총독통치 대신 미국의 군정통치가 실시되고 38선이 표면화되어 갔다(강만길, <고쳐 쓴 한국현대사>, 창비, 2010, 261~262쪽).

미군은 서울에 들어오기 앞서 9월 7일 맥아더의 포고령 제1호와 2호, 3호를 발표했다.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한반도에 진주하고,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할 것이며 미국에 반대하는 사람은 가차 없이 사형에 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미군의 상륙 이전 건국준비위원회(건준)의 활동이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세를 관망, ‘정당의 시기상조론’을 주장했던 송진우는 미군이 장차 서울에 입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행동을 개시했다. 송진우, 김성수, 김준연, 서상일, 장택상, 설의식 등 송진우의 측근인사와 동아일보 관계자들이 중심이 되어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 1945년 9월 7일 동아일보사 강당에서 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는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지지할 것을 선언했으며 송진우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
  한편 건준에서 9월 6일 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자, 창당도 하기 전인 9월 8일 한민당은 발기인 명의로 성명서를 발표, 조선인민공화국의 선포는 “인심을 현혹하고 질서를 교란하는 죄”라고 단정하고 이들을 “정무총감, 경기도 경찰부장으로부터 치안유지 협력의 위촉을 받고 피를 흘리지 않고 정권을 탈취하겠다는 야망을 가지고 나선 일본제국의주구”라고 비난했다.
  9월 16일 창당대회를 가진 한민당은 중경임시정부를 지지하며 건준을 타도한다고 선언하고 영수에 이승만, 김구 등 7인을 추대하고 수석총무에 송진우를 선출했다. 이들은 급진적인 행동을 회피해 가면서 당세를 확장시켰으며 급진세력에 대립, 보수세력으로 등장했다. (·····)
  한민당의 구성원들은 (···) 비교적 풍부한 경제력을 토대로 하여 미군정의 옹호 하에 미군정과 손잡고 대부분의 당 소속원들이 군정관리로 등용되어 실권을 장악함으로써 해방 후 시작된 권력투쟁에서 “외세 의존적인 자가 승리한다는 외세 지향적 정치 분위기가 심어진 것은 반성해야 할” 점으로 지적되고 있다(심지연, <한국민주당 연구 1>, 도서출판 풀빛, 1982, 48~50쪽).


‘동아일보 사람들’ 미군정의 품에 안기다

한민당 창당에 합세한 사람들은 대다수가 일제강점기의 지주, 자본가, 관료, 해외 유학파 출신으로서 다수가 동아일보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람 동아일보의 사주인 김성수와 사장인 송진우가 한민당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한민당의 수석총무를 맡은 송진우가 동아일보 사장을 겸하고 있어서 한민당은 동아일보 사장실을 사무실로 썼다. 한민당의 지방조직도 거의 동아일보 지국장들이 맡았다.

한민당은 1945년 9월 당시 보수진영에서는 가장 많은 당원을 확보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자금력과 홍보력도 막강했다. 미군정은 한민당의 주류가 ‘친일파’로 이루어져 있는데도 그들을 요직에 기용했다.

  10월 5일 점령군 사령부는 한민당 인사들 중심으로 11명의 군정장관 행정 고문을 임명했다. 김성수(고문회의 의장), 김용무, 김동원, 송진우, 이용설, 전용순, 오영수, 강병순, 윤기익, 조만식, 여운형 등이었다. 조만식은 잘못된 정보에 의하여 들어간 것이며, 여운형은 이러한 조치가 “한국의 주인이 누구이고 손님이 누구인가 하는 사실을 전도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거절했다. 여운형은 처음엔 하지가 요청하자 참여할 뜻도 있었지만, 첫 회의장에 나가 나머지 9명 전원이 한민당 출신이거나 관련 인사들임을 알고선 즉시 사퇴하고 나가 버렸다.
  미국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한 해방정국에서 가장 강력한 생존 무기는 단연코 영어였다. 영어를 할 수 있는 통역관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일제시대 때 해외유학을 했거나 국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이 영어를 잘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해방 전엔 친일파, 해방 후엔 친미파 노선을 걷는 사람들이었다. 정당으로 보자면 바로 한민당이 그런 사람들로 구성된 정당이었는데, 한민당은 사실상 해방정국을 지배한 ‘통역정치’의 주역으로 부상했다(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88~89쪽).

여기서 일제강점기 말에 김성수와 송진우가 이끌던 동아일보가 미국과 영국을 ‘귀축(鬼畜(귀축)’ ‘신동아 질서 건설의 파괴자’ ‘대일본제국의 적’이라고 몰아붙이던 일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런 언론을 지배하던 김성수가 ‘해방된 조선’에서는 미군정의 고문회의 의장을 맡았고, 송진우는 행정고문이 되었으니 옛날의 동아일보 독자들이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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