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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사람들’의 친일 행적 - 송진우동아일보 대해부 1권 - 21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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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1.06.30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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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와 달리 송진우는 <친일인명사전>에는 올라 있지 않다. 그러나 ‘동아일보 3인방’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앞의 두 사람과 같은 길을 걸어온 그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다르지 않다. 장덕수보다 지위가 더 높은 동아일보 사장으로서 오랫동안 그 신문의 ‘친일매국’을 주도한 바 있는 송진우에 관해서는 <일제하 민족언론사론>의 기록을 참고로 하는 것이 좋겠다.


‘두 시어머니를 섬기는 고달픈 며느리’

  (···) 무엇이 오늘의 그를 그렇게 만들었나? 길게 말할 것도 없다. 하나는 조선의 미쓰비시(三菱)라는 김 씨의 재벌이요, 하나는 남다른 우리들의 정치적 환경이다. 좀 더 간단히 알기 쉽게 적발한다면 김성수라는 배경과 경무국장이라는 차단선(遮斷線)이다. (···) 씨의 사회적 존재는 두 시어머니를 섬기는 고달픈 며느리의 신세와 틀림이 없다. 그 주인 김성수 씨를 큰 시어머니라고 한다면 경무국은 시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처(妻)시어머니일시가 분명하다. (···) 동아일보라는 것이 김성수 재벌의 손익을 초월한 중요한 사업기관의 하나요, 송진우라는 인물이 이 재벌에 없지 못할 ‘한 개의 존재’이다. 이 존재는 이 존재로서의 훌륭한 공적을 쌓고 있다. 그중에도 동아일보를 만들고 지키는 데에 좀 더 뚜렷한 공로를 가지고 있다. (···)
  3천만의 공기를 표방하고 나온 동아일보가 김성수 재벌에 곱게 잠겨버린 것이 동아일보 자체를 위하여 행복인지 불행인지는 여기에 속단을 주저하는 바이거니와 어쨌든지 동아일보가 김성수의 손에 경영되기 전까지에는 김성수 씨의 노력을 감사하기보다 송진우 씨의 커다란 노력과 갸륵한 지략을 찬양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그러나 씨(김성수 씨)가 그렇게 총명한 인물이 된 데는 3분 아니 5분의 힘이 송 씨에게 있었다는 것을 필자는 강조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말하자면 병정을 잘 둔 덕이다. 어폐가 있으면 사과할 셈치고 송 씨라는 빈한한 서생(書生)은 김 씨라는 억만장자의 장남의 ‘병정’이었다(坪江山二, <조선민족독립운동비사>, 일본 동경, 巖南堂, 소화 41년[개정증보]) (<일제하 민족언론사론> 333~334쪽에서 재인용).

송진우는 동아일보가 주식회사 등록을 마친 1921년 9월부터 사장으로서 회사를 경영하면서 1924년 4월 이른바 ‘박춘금 협박사건’을 계기로 한 기자들의 개혁운동에 밀려 잠시 사장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사주 김성수의 절대적 신임을 받던 그는 1924년 10월에 동아일보사 취체역으로 복귀한 뒤 1925년 4월부터 주필로서 편집권을 행사하다가 1927년 10월부터 사장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그는 1936년 8월 ‘일장기 말소’ 때문에 동아일보가 무기정간을 당한 뒤 사장직에서 물러났으나 1940년 8월 강제폐간 뒤에는 동아일보사 대신 생긴 동본사(東本社) 사장 겸 청산위원장으로서 8·15를 맞았다.

  (···) 김성수와 경무국이라는 두 시어머니를 섬기는 고달픈 며느리 신세인 송진우의 처세와 그의 주장은 어떠하였는가? 동아일보의 지면과 논조가 곧 그 반영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직접 그의 글들이나 인터뷰에 나타난 그의 말을 통해 그 일단(一端)을 살펴보자.
  “조선의 독립은 원래 조선인으로서는 희망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한 것을 희망해 봤자 그것이 실현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들은 그런 이상론은 잠시 동안 뱃속 안에 집어넣어 놓고 있다. 다만 실제론으로서는 현 총독정치 하에서 되도록이면 우리들 조선인의 이상에 가까운 정치를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조선인의 이상에 가까운 정치란 우선 조선인의 언론을 해방하는 것과 일선인(日鮮人)의 차별 철폐이다. 조선의 독립 요구라든가, 또 공산주의라든가 하는 무정부주의와 같은 극단한 의론은 금일의 일본의 정책이 허용하는 것이 아니니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는 극단한 취체를 당해서 부득이한 일이라고 각오하고 있기는 하나 (···) 국가의 기초를 위태롭게 하고 일한합병의 정신에 위반하지 않는 한 조선인의 언론에 대해서도 일본인과 같이, 하고 싶은 것 말하고 싶은 것은 시키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東邦生,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 군과 이야기하다」, <조선과 만주>, 1928년 2월호, 33~35쪽)라고 주장한 바가 있다. 조선인의 독립은 벌써 불가능하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어디까지나 일한합병의 정신에 충실한 언론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일제하 민족언론사론>, 336~337쪽).


‘총독부 대관들과 친교’

송진우가 사장으로 일하던 때 동아일보에 나온 영속사설 「민족적 경륜」은 집필자가 이광수였다 하더라도 발행인인 그의 용인 없이는 지면에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송진우는 민족 단일전선으로 결성된 신간회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자세나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가입조차 하지 않았다.

  (···) 그러므로 그가 총독부 당국과 어떠한 관계였겠는가는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일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그는 신문사장으로서 영업국장, 편집국장, 차장 등을 연이어 사장실로 불러 편집, 영업, 대외관계, 총독부관계 일을 지휘하고 명령하고 토의하는 한편 직접 기자를 앞세우고 왜성대의 암좌(岩佐) 헌병사령관 집을 방문하여 주배(酒杯)도 나누고 총독부 대관이나 민간 유력인사와 교유에 분주하였다(방랑객, 「송진우 씨 배경과 지반 해부」, <삼천리>, 제5권 9호, 1933년 5월호, 32~34쪽). 뿐만 아니라 일찍이 한 기자는 그를 가리켜 “정치가적으로 다소 당파적이다”라고 지적한 바도 있거니와 그는 “자기편 사람을 제출(製出)하기에 분주하다”고 ‘창랑객’을 자처하는 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는 동아일보사 지국장회의라는 전대미문의 기(旗)를 들고 남선(南鮮)에서부터 서선(西鮮), 북간도까지 전 반도를 석권하다시피 돌아다니면서 친히 13도 방방곡곡 쪽의 유명무명의 지국장들과 악수하기에 해가(奚暇)가 없었다. 아니 지국장들과 만나보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겠지만 그보다도 그 지방의 돈 있는 사람, 지위 있는 사람들과 교환(交驩)맺어 두자는 것도 어지간히 중요한 일이었던 모양으로 간 곳마다 반드시 그곳 호상(豪商) 귀신(貴紳)을 청하여 장야(長夜)의 연(宴)을 베풀고 10년 고인(故人) 같은 교의(?)를 맺고 돌아왔다. ‘또 무슨 배포의 전주곡인고?’ 하고 세인이 이를 의아함이 무리가 아니었다. 어쨌든 수천의 거금을 써가며 벌렸던 이 지국장회의를 통하여 사장 권력의 재확립 및 중앙집권의 전제권력의 강력화와 또 지국장을 앞잡이로 송 씨의 심판 및 파토로 망(網)의 조성에 급급하였던 그 의도만은 부인할 수 없겠다.”(창랑객, 앞의 글, 34쪽).

  따라서 그는 1936년 11월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사장직을 물러났으면서도 고문으로서 실질적으로 동아일보와 총독부 관계를 여전히 움직였다. 그는 이 사건으로 내려진 ‘동아’의 무기정간 사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직접 남차랑 총독을 만나 이 사건이 회사의 방침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 아니고 기자의 단독행위임이 명백해진 이상 정간을 계속하는 것은 명분이 없다고 설득하였으며 정간이 풀리자 일제에 대한 친일 언론보국에 충실했다(<일제하 민족언론사론>, 336~338쪽).


프랑스 ‘친나치 언론인 처단’의 교훈

1944년 8월 26일 파리가 나치 독일군의 점령에서 해방되자 샤를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 정부는 ‘나치협력자 숙청’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친나치 행위를 한 자들과 집단들에 대한 단죄가 진행되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진 부문들 가운데 하나가 언론이었다.

  파리 해방 후 저항운동을 위해 지하에서 비밀리에 창간한 신문과 반나치 저항단체들이 ‘애국언론’으로 인정한 일간지는 모두 14개 언론사뿐이었다. 수도 파리가 나치독일의 점령에서 해방되자 ‘애국적’ 신문들은 모두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언론자유를 만끽했다. (·····)
  콩바 등 레지스탕스 신문들은 반레지스탕스가 나치독일 점령군을 항복시키기 위해 총궐기했을 때, 총탄을 뚫고 파리시민에게 전투뉴스를 알리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저항운동 기간에 태어난 새 신문들은 나치독일과 비시 정권 선전기관지 역할을 했던 반역 언론들이 모두 야반도주한 후 바로 그 건물을 점령해 그 시설로 신문을 발행했다(주섭일,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사회와 연대, 2004, 224~225쪽).

새 언론이 나치협력 언론인들의 명단과 행위 내용을 폭로한 뒤 1945년 말부터 그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파리지방법원은 6개월 간 94건의 나치협력 언론사(출판사 포함) 사건을 다루었다. 그 가운데 70건이 기소되어 재판을 받은 결과 모두 해체되었다.

  1948년 말 모두 5백38개 언론사들이 재판에 회부되어 이중 1백15개 사가 유죄선고를 받아 모두 폐쇄됐다. 나머지 64개 사가 전 재산 몰수, 51개 사는 일부 재산을 몰수당했다. 30개 언론사만이 무죄선고를 받았다. 나머지 3백93개 사는 나치협력 불순언론으로 분류됐으며 이중 35개 사는 재판을 대기하는 상태였다. 무죄를 선고받은 언론사는 복간했으나 재산몰수형을 선고받은 언론사들은 복간을 엄두도 낼 수 없었다(같은 책, 242~243쪽)

1945년 8월 해방 이후의 한국에서 친일언론인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이광수, 최남선 같은 언론인 겸 문인들이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는 했지만 흐지부지 석방되고 말았다. 프랑스 같으면 극형을 받아야 마땅했을 대표적 친일행위자들인 동아일보 사주 김성수와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는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전혀 응징을 당하지 않고 ‘새나라’의 언론사주로 다시 살아났다.

  오늘날 프랑스에서 제일 권위 있는 연감 퀴드(QUID, 2003년판)는 (···) 대숙청에 관련된 프랑스 사람이 1백50만~2백만명에 달했다고 밝히고 “수일 또는 일주일 정도 수감된 사람을 포함하면 체포된 나치협력자 수는 99만여 명에 달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수십만 명이 조기은퇴, 파면, 해임, 직위해제 등 인사상의 처벌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비시 정권 지도층을 재판한 최고재판소는 1백8건을 재판해 18명에 사형선고(이중 사형집행은 다르낭과 라발 총리 및 드 브리농 등 3명), 25명에게는 종신 강제노동형과 징역형, 14명에게 공민권박탈형을 선고했으며 1명만이 무죄 석방됐다고 연감은 밝혔다.
  각 지방재판소는 모두 14만 건을 재판해 4만1천명을 무혐의 석방했고, 4만1천 건을 시민법정에 이송했으며 5만7천 건을 직접 재판했다. 재판 결과 6천7백63명에게 사형선고(이중 4천3백97명이 정식재판, 7백79명은 사형집행)를 내렸다. (···) 사형이 집행된 유명 나치협력자는 쉬아레즈(<오늘>신문 사장), 폴 샤크(예비역 해군장교 및 작가), 브라지야크(<내가 도처에 있다>신문 편집국장), 장 뤼세르(<신시대>신문 사장), 장 파키(<라디오 파리>방송 사장), 페르도네(방송인) 등이었다(같은 책, 339~340쪽).

역사에서 가정(假定)은 부질없는 것이라지만, 그래도 한 번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이 나라와 민족의 밝은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되지 않을까?

‘만약 8·15 해방 이후 한국에서 모든 분야의 친일행위자들을 프랑스처럼 단호하게 처단했다면, 지난 70년 가까이 친일파와 그 후손들이 권력과 대자본을 독과점하면서 민중을 지배하는 체제를 확대재생산하는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요즈음 언론계만 보더라도 대표적 보수신문들은 현재 사주의 증조부나 조부 또는 아버지가 ‘1급 친일파’였다는 사실을 은폐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렇게 불의를 정의로 둔갑시키는 세력이 언론계를 장악하고 있는 한 자유롭고 공정한 언론이 날개를 펼 수 있는 입지는 쉽사리 확보될 수 없을 것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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