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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서명 운동과 장외투쟁조선일보 대해부 4권 -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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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0.30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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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은 1986년 1월 16일 국정연설에서 “개헌 논의는 89년에 가서 하는 것이 순서’라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17일자 1면 머리에  “대통령 선거 방법의 변경에 관한 문제는, 평화적 정권 교체의 선례와 서울올림픽이라는 국가적 과제가 성취된 뒤인 오는 89년에 가서 그러한 성취의 바탕 위에서 논의하는 게 순서”라는 전두환의 연설 내용을 실었다. 2면에 올린 「전 대통령의 국정연설 / 89년에 가서 헌법 논의하자는 제의」라는 사설과 「전 대통령 국정연설 의미」>라는 해설은 전두환의 입장을 두둔하는 논조를 보였다. 3면 전체는 국정연설의 요지가 차지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국정연설은 헌법문제와 관련해 3개의 기본입장을 분명히 했다. 첫째는 88년까지의 현 임기 중에는 절대로 헌법 논의를 할 수 없다고 하는 점이다. 그리고 둘째는, 헌법 논의를 할 경우 그것은 89년에 이르러서 하는 것이 순서라고 한 대목이다. 끝으로 전 대통령은 대통령 선출 방식으로서 직선제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는 점을 밝혔다.
(…) 만약 정당인, 국회의원, 기타 세력이 이런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선동하는 목소리’를 높이거나, ‘계속 본분을 외면할 때’는 어떤 형태로든 ‘국민적 심판이 준엄해질 것’이라고 연설은 경고하고 있다. 전 대통령의 이러한 논리는 결국 3개의 측면을 내포한다 할 수 있다. 즉, 88올림픽이 겹쳐 있는 집권 후반기에 있어 그 어떤 통치권의 이완 현상도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강한 의지의 천명, 88년까지만은 일체의 정치 현안 논쟁을 유보하여 미루어놓자고 한 정치적 휴전 제의, 그 이후에는 헌법문제를 생각해 볼 수도 있다고 하는 견해의 표명이 그것이다(1월17일자 사설).

(…) 큰 정치라는 말을 정가에선 개헌 논의와 관련, 여야 간 대타협의 뜻으로 써왔다. 그러나 ‘개헌 불가’입장을 거듭 천명한 이날 연설 내용으로 볼 때 전 대통령이 뜻하는 큰 정치는 여야 간이 티격태격하는 대결정치나 개헌의 타협이 아니라 산적한 국가 과제를 여야가 함께 풀어나가, 궁극적으로 국리민복을 증진하면서 현행 헌법에 따른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을 세워가도록 하는 데서 1차 역점을 두고 있다.
이와 관련, 전 대통령은 정치인들이 국민의 대표라는 본분을 계속 외면할 때는 국민적 심판이 준엄할 것이라고 밝혀 앞으로의 정국 전개에 따라서 ‘변수’가 있을 것임을 암시했다. 어떻게 보면 대 정치인 ‘경고’라고 할 수 있는 전 대통령의 이 같은 언급은 현 정치, 특히 2·12 총선 이후의 정치를 보는 대통령의 시각의 일면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대통령이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실상은 반민주적인 일체의 동태에 대해 이제는 국민들이 제동 역할을 해야 할 때”라고 촉구한 대목과도 맥이 통한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이 언급한 ‘국민들의 제동’ ‘국민들의 심판’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을지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1월 17일자 2면 해설기사).

전두환의 국정연설은 전혀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야당이 집권하면 올림픽을 할 수 없다거나, 개헌의 시기를 89년으로 한다거나, 직선제로는 평화적 정권교체를 할 수 없다는 논리가 모두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주장이기 때문이었다. 신민당과 민추협 등 야권과 재야 그리고 학생들은 당연히 개헌을 요구하고 나섰다.

대검찰청은 2월 11일 일체의 개헌운동에 대해 법적 제재를 가하겠다고 발표했다. 대검이 전국 검찰과 경찰에 시달한 개헌운동 처벌 지침은 어이없을 정도였다. 그 내용은 이렇다. 1)개헌 서명을 위한 옥내집회도 집시법을 적용한다. 2) 가두서명을 받을 경우 1년 이하의 징역(도로교통법)에 처한다. 3)호별방문 서명 권유는 주거침입죄를 적용한다. 4)시민의 서명행위는 불법행위 방조죄로 처벌한다. 5)완장·리본·어깨띠를 달면 즉심에 회부한다.

조선일보는 대검 발표 내용을 2월 12일자 1면 머리에 올렸다. 그리고 바로 그날 신민당과 민추협이 서명운동을 시작하자 2월 13일자 사설을 통해 2·12 총선의 의미를 왜곡하는가 하면 국민을 호도하는 양비론을 펼치기도 했다.

(…) 신민당과 민추협은 각각 ‘2·12 총선’ 1주년 기념식을 열고 이날을 기해 1천만 개헌서명운동을 앞당겨 실시키로 했다. 이제 힘과 힘의 대결만이 남게 될 것은 불을 보듯 훤한 것이다. 최근에는 신문에서 큰 표제를 접할 때마다 섬뜩한 느낌을 금할 수 없는 것이 국민 다대수의 심정일 것이다. ‘헌정질서를 파괴하는 개헌서명운동은 단호히 대처한다’는 정부당국의 방침이 여러 차례에 걸쳐 발표되었다.
(…) 8번이나 개헌 파동을 경험한 국민으로서는 호헌이나 개헌문제에 대해 오히려 둔감할 지경이어서, 그것이 국사범이건 또는 경범 해당이건 간에 문제가 된다는 자체를 납득하기 어려운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 ‘개헌만이 살 길’이고, 또는 ‘개헌을 막는 길만이 살 길’이라고 주장하는 정치인의 극한대립 상황 속에 내 등이 터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도 정치인들은 살펴주기 바란다. 참다운 민의가 어디에 어떻게 도사리고 있는지를 알아내고, 실천하는 것이 ‘큰 정치’이고 ‘대타협’일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2·12 총선 이후에 그런 ‘큰 판’이 벌어질 것을 국민들은 기대했다. 그런 기대가 1년 후 오늘엔 산산이 부서져가고 있다. 어느 한쪽에 결정적 승리나 신임을 주지 않았던 ‘2·12 민의’를 자기편의 위주로 해석하는 당길심과 고집 때문에 대타협의 큰 정치판이 어울려지지 않고 있다. 이제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이다. 이럴 때야말로 ‘법치’에 앞서 ‘정치’가 전면에 나설 때이며, 정치인의 특별한 위기 극복 능력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2월 13일자 사설).

개헌서명운동에 대한 탄압은 시간이 갈수록 강화됐다. 조선일보는 어이없는 공권력 행사를 전혀 비판하는 않는 채 개헌서명운동이 ‘불법’이라는 전제 하에 개헌운동에 대한 정권의 경고와 검경의 공권력 행사를 중심으로 수많은 보도를 쏟아냈다.

검찰과 경찰은 2월 13일과 14일 신민당사와 민추협 사무실 등을 봉쇄하는 등 탄압을 강화하고, 전국 111개 대학에 대한 야간 수색 등을 통해 수배학생들을 체포하는가 하면 개헌서명 유인물들을 압수했다. 조선일보는 2월 15자에 법무장관 김성기가 개헌서명운동과 관련된 일체의 범법행위를 엄단하겠다고 밝힌 ‘방침’을 전하고 사설을 통해 다시 정치적 양비론과 타협론을 내세우는 등 인간의 기본권적 권리에 관해서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외나무다리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밀어붙이는 이솝우화의 두 마리 양 이야기는 동화를 처음 읽는 또래의 어린애에게도 웃음거리가 된다. 그 명백한 까닭은 그런 싸움에 전혀 장래성이 없다는 것이다. (…) 이솝우화의 시대가 아닌 현대에서 우리는 그런 양의 생산성 없는 싸움을 연상해야 하는 현실을 본다.
(…) ‘개헌서명’ 운동의 강행은 진작부터 신민당이 거듭 천명해옴으로써 후퇴할 수 없는 명분이 되었고, 그 운동의 ‘원천봉쇄’나 집시법, 도로교통법, 광고법, 경범법, 형법 등에 따라 대처·엄단한다는 것은 정부당국의 확고부동한 방침이며 명분이었다. 그리고 양쪽은 한치의 후퇴는 고사하고 더더욱 어깨에 힘만 주고 있는 형편이다.
(…) 더 많은 국민을 곤혹과 걱정으로 몰아넣는 강경의 상승작용은 갈수록 심해지는 형편이다. 결국 한쪽은 ‘옥쇄’를 각오하고 덤비는 것 같고, 한쪽은 여지없이 분쇄한다는 결단을 나날이 굳혀가는 것만 같다. 이를 보면서, 겪은 국민은 아슬아슬하다. 대다수의 국민은 절대로 ‘옥쇄’도 ‘여지없는 분쇄’도 원하지 않는다. 피를 보는 것은 국민이며 나라이기 때문이다.(2월 15일자 2면 사설).

조선일보는 개헌서명운동이 가열되고 있는 미묘한 시기에 2개의 시리즈를 연재했다. 그 하나는 야당의 개헌서명운동이 시작된 2월 12일자 1면에 파격적으로 편집해서 내보낸 「한국경제, 전기는 왔는데…」라는 경제기획 시리즈였다. 국제유가와 달러화는 물론 국제금리까지 하락하는 ‘3저 현상’의 호재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기획기사였다. ‘정치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로 읽히는 대목이다. 3저 현상은 이미 나타난 것인데, 개헌논쟁이 불붙은 시기에 조선일보가 시리즈를 시작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또 하나의 시리즈는 「유럽 사회당 그 후」>로, 2월 18일자부터 3면에 5차례에 걸쳐 연재되었다. 이 기획기사는 ‘유럽 사회주의가 퇴조하고 있으며 사회주의 정권들은 현실과 타협, 보수화하고 있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역시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해 조선일보가 여론몰이용으로 만든 기획이었다.

그러나 개헌서명운동은 정부의 탄압이 강화되는데도 더욱 치열해졌다. 그렇게 정국이 뜨거워지자 전두환은 2월 24일 민정당과 신민당 등 3당 대표를 청와대에 초치해, “89년에 헌법을 개정할 수 있을 것”이라며 “국회와 대통령 직속의 헌법특별위원회를 구성해서 검토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그 내용을 1면 머리기사로 대서특필하고 2면에 「시국 전환의 대전기 / 2·24 청와대 회담의 전진화를 위해」라는 통단사설을 올렸다. 3면에는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문 열린 개헌 논의」라는 해설을 실으면서전두환이 개헌 논의의 돌파구라도 마련한 것처럼 “시국 전환의 대전기를 맞았다”고 확대 해석하며, 야당의 양보를 촉구했다.

이제 무언가 실마리가 풀릴 것 같은 느낌이다. 갑작스레 알려진 24일의 전두환 대통령과 여야 3당 대표의 청와대 회동은 꽁꽁 얼어붙었던 정국이 녹아들고, 시국 안정을 위한 첫걸음이 내디뎌진 것으로 보아진다.
(…) 전 대통령의 2·24 제의는 89년에 가서야 헌법 논의를 시작하자는 1·18 제의에 비하면 엄청난 진전이다. (…) 개헌발의권을 가진 정부와 국회가 각기 ‘좋은 헌법’을 마련하기 위한 기구를 만들고 전문적이고 학문적인 연구와 심의를 거쳐 국민 앞에 개헌안을 제시한다는 것이 2·24 제의의 골자이다. 두 개의 안이 통합될 수 있다면 다행이고, 복수안이 될 경우에는 국민투표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행 헌법에 의해 선출된 88년의 새 대통령은 헌법 개정을 위한 과도기적 대통령이 되는 셈이며, 89년에 가서 개헌 여부를 마무리지어야 할 정치적 의무를 지게 된다. 따라서 개헌이 되는 경우, 새 헌법에 따른 권력구조는 89년에 다시 창출된다고 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헌법 논의를 장내에 수렴하고, 88년에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하되, 그 교체정권은 개헌할 것을 공약하게 된다.
야당은 이제 확실한 태도를 정할 때로 본다. 체제 안에서의 개혁을 바라고 수권정당으로서의 태세를 갖추려면 무조건 반대나 타협 없는 투쟁만으로 정치발전을 이룩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현실의 길을 찾아야 한다. (…) 2·24회담이 우리 정치와 정치사에 획기적 기원이 되길 바라면서 여야 정치인의 대동화합을 촉구한다(2월 25일자 사설).

이러한 ‘개헌 꼼수’가 공감을 받을 리 없었다. 신민당은 3월 8일 헌법개정추진위원회 서울시지부 현판식을 열면서본격적인 장외투쟁에 나섰다. 조선일보는 3월 9일자 사설(「여야는 협상하라」)는 사설을 통해 전두환의 2·24 제의에 대한 여야의 협상을 다시 촉구했으나 메아리 없는 공허한 주장에 불과했다. 개헌서명운동은 갈수록 확산됐다.

3월 9일 추기경 김수환은 ‘정의와 평화를 갈구하는 9일 기도’를 마무리하는 미사에서 직선제 개헌을 촉구하고 나섰다. 3월 13일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가 1천만 개헌서명운동에 동참할 것을 천명하는가 하면 많은 시민단체와 대학교수들도 시국선언문 등을 통해 개헌을 지지했다. 이후 개헌운동은 결국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일보의 성고문 사건 왜곡

시국이 온통 개헌문제로 시끄럽던 때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 권인숙에 대한 경찰의 성고문 사건이 폭로되었다.

권인숙은 1986년 5월 20일 경기도 부천시의 가스배출기 제조업체인 주식회사 성신에 취업했다. ‘허명숙’이라는 가명으로 ‘위장취업’을 한 것이다. 그는 학생시위와 야학 및 농활 참가를 통해 본격적으로 운동권에 뛰어들었다.  6월 4일 권인숙은 위장취업을 위해 주민등록증을 위조했다는 혐의로 부천경찰서에 잡혀갔는데, 형사인 경장 문귀동에게 6월 6, 7일 두 차례에 걸쳐 성고문을 당한 것이다. 사건 발생 20여일만인 7월 3일 권인숙은 인천지검에 문귀동을 성고문 혐의로 고소했고, 본인은 같은 날 공문서 변조 등의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권인숙의 변호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그 사건에 대해 조선일보는 7월 3일자 11면에 「근로자 가족 30명 부천경찰서 농성」이라는 기사를 1단으로 내보냈다.

인천지역 구속자 가족 30여명이 2일 오후 2시쯤 경기도 부천시 심곡동 부천경찰서에 몰려가 “부천경찰서 조사계 소속 문 모(39) 형사가 해고근로자를 신문하면서 옷을 벗기는 추행을 했다”고 주장, 관련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1층 현관에서 농성을 벌였다.
이들은 문 형사가 지난 7일 밤 9시쯤 해고근로자 권 모(23·서울대 의류학과 4년 제적) 양을 조사계 2호실에서 단독으로 취조할 때 이같이 부당한 행동을 했다면서 이날 오후 2시쯤 경찰서 정문에서 전경 30여명과 대치하다 1층 현관으로 몰려가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벌였다. 부천경찰서 옥봉환(53) 서장은 이에 대해 “조사 당시 동료형사 4명이 같은 방에 있었기 때문에 그 같은 일이 있을 수 없다”며 “자체 조사 결과도 그 같은 사실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이들이 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권 양은 지난 5월 20일 부천시 소재 주식회사 성신에 ‘허명숙’이라는 가명으로 위장취업했다가 6월 4일 오후 9시쯤 부천서에 연행돼 공문서 위조 등의 혐의로 지난달 7일 구속됐었다.

조선일보는 권인숙에 대한 성고문 사건의 실상을 보도하지는 않고 ‘근로자 가족 30명의 부천경찰서 농성’을 기사의 주제로 삼았다. 기사의 초점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이후 조선일보 지면에서 권인숙 관련 기사는 검찰의 발표가 있기까지 1단 혹은 2단 기사로 축소 편집됐다. 조선일보는 7월 6일 권인숙의 변호인단이 수사관 6명을 고발한 내용 역시 「수사관 6명 고발-추행 사건 변호인단」이라는 제목의 1단 기사로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7월 8일자에야 비로소 인천지검이 수사에 착수했다고 보도하고 제목을 「성적 고문 진상조사」로 뽑았다. 7월 10일자에서는 2단 기사 제목을 <성고문 본격 수사>라고 붙였다. 그러나 7월 13일자 기사에서는 ‘부천서 고문 조사’, 그 이후부터는 ‘부천서 사건’이라고 부르면서  ‘성고문’이라는 핵심용어를 아예 빼버렸다.

조선일보는 7월 17일자 11면(사회면) 머리에 인천지검의 수사 결과 발표 내용을 올렸다. 그때까지 1~2단 기사로 보도해왔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큰 제목은 「‘성적 모욕’ 없고 폭언·폭행만 했다」로 돼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조선일보가 그 날짜 신문이 10면(제2사회면)에 보도한 공안당국의 ‘부천서 사건 분석’에 관한 기사다. 조선일보는 “혁명을 위해서는 ‘성’도 도구화”한다는 공안당국의 분석을 그대로 전했다.

‘부천서 사건’을 수사 중인 인천지검은 16일 “권 모 양의 고소 사실 중 성적 모욕행위 부분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으나 폭언·폭행 부분은 일부 사실이 인정된다”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은 그러나 문귀동 경장의 폭언·폭행은 조사에 집착한 나머지 우발적으로 저지른 과오였고 10년 이상 경찰에 봉직하면서 성실하게 근무했으며 현재 자신의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있는 점 등 여러 정상을 참작, 불구속입건해 기소유예 처분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공안당국은 부천서 사건에 대해 “권 양의 성모욕 주장은 급진 세력 등이 상습적으로 벌이고 있는 소위 의식화 투쟁의 일환으로서 자신의 구명은 물론이고 사회 일반의 반정부· 반공권력) 투쟁을 확산하려는 선동적 조작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권의 성모욕 주장은 혁명과 폭력을 속성으로 하는 급진세력의 투쟁 전략전술에서 살펴볼 때 그 진위가 더욱 분명하게 판명된다.
(…) 급진좌경노선의 전위활동=권은 85년 7월 서울대 가정대 의류학과 4년 제적 시까지 <러시아혁명사> 등 불온서적을 탐독하는 등으로 의식화되어 반정부 시위에 적극 가담(82년), 근로자 야학 등을 통해 노동의식 고취(83년), 반정부 투쟁 선동 유인물 제작·살포(85년 5월), 86년 6월 피검 당시 <현대유물론의 기본과제> <민중혁명 지침서> 등을 소지하는 등.
(…) 혁명을 위해서는 ‘성’도 도구화=권과 같은 좌경 의식화된 핵심 문제학생들은 그들 스스로의 의식화 과정과 조직활동 투쟁 과정에서 상호 연대의식 고취, 일체감 조성 및 조직 이탈 방지 등을 위해서 ‘성’을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의식화된 문제 남녀학생 간에 ‘성’을 공유함으로써 ‘성’을 평등 소유한다는 이유로 삼고 있으며 사회의 규범과 인간의 윤리파괴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 투쟁전술로서 고문·폭행·추행 사건을 조작=권의 수사과정에서의 성모욕 주장은 인간성의 침해를 빙자하여 대중의 혁명적 투쟁을 선동하려는 저의가 깔려 있다. 좌경 의식화된 자들은 의식화 과정에서부터 투쟁활동 시 검거되어 조사·구속·수감될 때에는 이를 또 다른 투쟁의 기회로 최대한 활용하고 자신의 석방 구명을 위하여 사실이 아닌 고문·폭행·추행을 날조, 주장하도록 철저히 교육받고 있다(7월 17일자 10면 기사).

조선일보는 7월 18일자 11면에 “‘부천서 사건’ 쇼크로 일선경찰이 가혹행위 등의 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크게 실었다. 문귀동의 성고문은 기사에서 사라져버렸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짜 2면 사설(「부천 사건에서 얻는 것」)에서도 성고문은 거론하지 않은 채 “공권력이 부분적이나마 가혹행위를 시인한 것은 진일보한 자세”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그 사건이 정치적 쟁점으로 확산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부당국은 이른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을 내용은 부인하고 관계경찰관은 처벌하는 양면성으로 처리했다. 이 시점에서 수사권 밖의 사람이 진실이 어떠했는가를 가릴 능력도 없고 그럴 입장도 못된다. 다만 우리는 발표문안만을 따져볼 때 수사 과정과 그 처리에 어딘가 가슴이 시원히 뚫리지 않는 미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과거 이와 유사한 사건에서 좀처럼 가혹행위를 인정하는 데 인색했던 공권력이 부분적이나마 잘못을 시인하고, 관계 경찰관을 행정상 엄벌한 것은 진일보한 자세로 긍정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경찰관의 ‘가혹행위’를 인정은 하면서도 형법상의 책임은 묻지 않기로 한 것은 이번 사건의 특수한 성격상으로 보아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이번 사건에서 미진한 점들이 남아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이 사건이 자칫 정치적 쟁점으로 확산될 때, 모처럼 ‘타협정국’에 찬물을 끼얹을 소지가 없지 않을 뿐더러 이미 그런 편승의 조짐들이 꿈틀거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 나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 보고서는 조선일보의 ‘권인숙 성고문 사건’ 관련 기사들을 대표적인 왜곡보도의 사례로 꼽기도 했다. 또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부천 성고문 사건과 관련해 전두환 정권은 언론사에 많은 보도지침을 내렸으며 조선일보는 보도를 선도하는 역할을 한셈이었다.

해가 바뀐 1987년 4월 권인숙은 1년6개월의 형 확정 판결을 받았으며 6월 항쟁 이후인 7월 8일 가석방됐다. 1988년 2월 9일 대법원이 변호인단의 재정신청을 받아들였고 1989년에는 문귀동에게 징역 5년의 실형이 선고됐으며 권인숙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언론계 최대 사건- ‘보도지침’ 폭로

1986년 언론계 최대의 사건은 ‘보도지침’ 폭로였다.
전두환 정권은 언론에 대해 ‘채찍과 당근’ 정책을 썼다. 이와 함께 문공부 내의 홍보조정실을 통해 언론사에 이른바 ‘보도지침’을 내려보냈다. 보도지침은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언론사의 보도를 통제했던 수법에서 비롯됐다. 전두환 정권은 그것을 ‘발전’시켜 신문이나 방송 제작의 세부사항까지 개입하는 구체적 통제 수법을 만들어냈다. 보도지침의 존재는 언론현장의 기자들 사이에 직접 간접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 실체가 공개되지는 않았다.

보도지침의 실체가 알려진 것은 1986년 9월 9일이었다. 1984년 해직기자들이 중심이 돼 결성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가 보도지침 폭로의 주역이었다. 민언협의 기관지로 1985년 6월 창간된 <말>지 1986년 9월 특집호가 한국일보 기자 김주언에게서 자료를 제공받아 보도지침의 실체를 폭로한 것이다. 특집호는 1985년 10월 19일부터 1986년 8월 8일까지 약 10개월 간의 보도지침 내용을 공개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보도지침 공개 기자회견은 1986년 9월 9일 오전 10시 명동성당 소강당에서 천주교 의구현전국사제단과 민언협 공동 주최로 열렸다. 그 자리에서 발표된 성명은 보도지침 자료집이 “현 정권의 언론정책은 물론 도덕성을 가늠해 주는 귀중한 현대사의 자료로서 그리고 자유언론 쟁취를 위한 획기적인 기원으로서 기억되고 평가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자 전두환 정권은 그날의 ‘보도지침 폭로’에 대해 ‘보도 불가 지침’을 언론사들에 보냈다.

전두환 정권은 민언협 사무국장 김태홍과 실행위원 신홍범, 그리고 한국이일보 기자 김주언을 국가보안법 위반 및 국가모독죄로 구속했다. 김태홍은 1980년 해직기자, 신홍범은 1975년 해직된 조선투위 소속이었다. 김태홍은 법정에서 보도지침 공개가 국민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검찰 질문에 “국내 최대의 범죄집단인 현 정권의 비행의 뒷면을 밝혀줄 이 자료를 알리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공개된 보도지침 중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 관한 내용은 조선일보의 보도 왜곡 배경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지침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7월 9일: 부천서 형사의 여피의자 폭행(추행) 사건은 당국에서 조사 중이고 곧 발표할 예정, ‘성폭행 사건’으로 표현하면 기정사실화한 인상을 주므로 ‘폭행 주장 관련’으로 표현 바꾸도록.
7월 10일: 1)현재 운동권 측의 사주로 피해여성이 계속 허위진술 2)검찰서 엄중 조사 중이므로 내주 초 사건 전모를 발표할 때까지 보도를 자제해줄 것 3)기사 제목에서 ‘성폭행 사건’이란 표현 대신 ‘부천 사건’이라고 표기하기 바람.
7월 11일: 검찰 발표 때까지 관련된 모든 기사를 일체 보도하지 말 것. 부천 사건의 검찰 발표 시기에 관한 것이나 항의시위, 김대중의 부천 사건 언급 등 관련된 일체를 보도하지 말 것. (…)
7월 17일: 1)오늘 오후 4시 검찰이 발표한 조사결과 내용만 보도할 것 2)사회면에 취급할 것(크기는 재량에 맡김) 3)검찰 발표 전문은 꼭 실어줄 것 4)‘사건의 성격’에서 제목을 뽑아줄 것 5)이 사건의 명칭을 ‘성추행’이라고 하지 말고 ‘성모욕 행위’로 할 것 6)발표 외에 독자적인 취재보도는 불가 7)시중에 나도는 ‘반체제 측의 고소장 내용’이나 ‘KNCC, 여성단체 등의 사건 관계 성명’은 일체 보도하지 말 것.
7월 23일: 1)대한변협, 부천 성고문 사건 재조사 요구는 1단 기사로 처리할 것 2)명동 수녀들의 성고문 규탄 기도회는 1단 기사로 처리하기 바람
※일부 신문에 김 추기경 강론 요지가 실렸으나 즉각 삭제시켰음.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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