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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문화원 점거 사건과 ‘학원안정법’조선일보 대해부 4권 -2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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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0.23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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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이 되자 광주는 민주화운동의 횃불로 다시 떠올랐다. 신군부의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된 5월 17일에는 전국에서 수만여 명의 학생들이 광주 학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어 23일 오전 12시경 서울대 학생 73명이 서울 중구 을지로에 있는 미국문화원(USIS) 2층 도서관을 전거하고 72시간 동안 농성을 벌였다. 그것은 1982년 3월 18일 고신대 학생들의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한 지 3년여 만에 일어난 충격적 사건으로 ‘광주 항쟁’의 유혈  참극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묻는 항거였다.

조선일보는 5월 24일자 1면 머리에 미국문화원 점거 사건에 관한 기사를 올리고, 같은 면 하단의 <팔면봉> 난에서 “일부 대학생들, 미문화원 점거농성. ‘외세’ 배격한다면서 왜 남한테 매달리나”라고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또 10면과 11면에 「누구를 위한 반미냐」는 시민들의 반응을 실었다. 그리고 2면 사설(「폭력은 반민주다: 미문화원 점거 소동을 개탄함」)이라는 사설을 통해 학생들의 점거 사태를 “용납될 수 없는 폭력행위”라고 비난했다.

일단의 학생들에 의한 미문화원 도서관 점거 사건은 그들의 정치적인 동기와 요구사항 여하 간에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폭력행위였다. (…) 우리가 이 기회에 분명히 재확인해 두고자 하는 것은, 학생들이 ‘광주 사태’의 책임을 미국 측에 묻고 사죄를 요구한 경거망동을 결코 지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끼리의 문제를 ‘반미투쟁’으로 몰고 간 좌경성 때문에 곤혹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도시유격전적인 기습·점거의 폭력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반지성적 행위는 결코 용납될 수가 없는 것이다.
(…) 이러한 일탈자들은 일종의 극단주의자들이며, 극단적인 행동과 사고는 실은 그 반대쪽의 극단주의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결과를 초래하는 역설로 귀결한 것이 세계사의 교훈이었다.
근래 들어 우리 사회의 ‘운동권’에는 이런 극단주의자들의 주장이 적잖이 침윤했다는 것이 직감적인 느낌이었다. 파출소 유리창을 깨고, 총장실 기물을 부수고, 화염병을 던지고 하더니, 이제는 급기야 “엎드려 사과하고 물러가라”는 등의 반미 구호를 외치며 외국의 공관을 점령하는 사태로까지 번지고 말았다. 폭력은 용납될 수 없다. 더 이상의 폭력 재발을 막기 위한 전 사회적인 중지를 모아야 할 때이다.

학생들의 미문화원 점거를 ‘도시유격전’으로까지 비유한 조선일보는 그 후 며칠 동안 그 사건에 관한 속보를 1, 2, 3, 5, 11면 등에 내보내면서 거의 날마다 학생들의 점거농성을 비판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이와 같은 보도의 홍수는 전두환 정권이 의도적으로 그 사건을 부각시키려 한데 ‘호응’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 사건을 계기로 학생운동을 여론의 지원으로부터 분리하겠다는 전략이었다.

5월 25일자 조선일보 주요 기사들의 제목을 살펴보면 1면은「미문화원 점거 단호 대처」「과격·장기화 대응책 협의」 등, 11면(사회면)은「대사관 점거 못해서 아쉽다」「17개 대학 8천여 명 점거 지지 시위」 등 학생들의 과격성을 부각시키는 기사들로 채워졌다. 조선일보는 학생운동권의 현주소를 추적하는 기사에서 미문화원 점거·농성을 벌인 학생단체를 ‘민중혁명의 전위부대’로 소개하기도 했다. 1980년 5월 항쟁 시기의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불렀던 조선일보는 그로부터 5년 뒤인 1985년 5월 25일자 사설에서는 “광주 사태는 ‘터뜨리려고’가 아니라, ‘풀어보려고’ 들고 나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광주 사태는 생각할수록 한국인의 공통되는 아픔이며 슬픔이다. 그러므로 국회에서도 금기되었던 그 문제가 5년이 지난 지금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광주 사태의 논의는 한 역사학자의 글에서처럼 ‘터뜨리려고’가 아니라, ‘풀어보려고’ 들고 나와져야 한다. 광주 사태의 거론이 ‘터뜨리려고’ 혹은 ‘깨뜨리려고’ 들추어진다면 깨뜨림과 깨뜨림의 악순환을 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어떡하든 풀기 위한 슬기를 발휘해야 한다.
미국문화원 점거 학생들의 과격한 구호는 우선 접어두고, 미국에 대한 “광주 사태에 책임지고 사죄하라”와 “미국은 지원을 중단하라”는 요구는 이치 가 아니다. “우리는 미국이 우리의 우방임을 믿기 때문에 미국문화원을 찾았다”는 말과 함께 어리광 같은 억지다. 거기 반해 “…광주문제는 미국이 사과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는 한 문화원 관계자의 말은 온당한 이치다. (…) 점거 학생들의 주장이, 백에 하나 억지가 아닌 정당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폭력적인 그 방법은 억지다. 학생들의 폭력만 억지고, 그런 억지를 유발케 한 근원은 억지가 아니냐는 반론은 억지와 억지의 매듭을 더 꼬고 옭매어감으로써 파국을 재촉하는 논리다.

미문화원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인 학생들은 3일 후인 5월 26일 새벽 자진 해산했다. 그들은 “미국이 우리에게 진정한 우방과 자유세계의 수호자로서 인식되기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확인했다”며 더 이상 대화의 필요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학생들 중 3명은 탈수 현상 등으로 입원하고 70명은 연행됐다. 그 사건은 1980년 ‘5월 광주’와 관련된 미국의 배후 역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크게 일깨웠다.

10월 2일 서울형사지법은 선고공판에서 미문화원 사건을 주도한 함운경에 징역 7년을 비롯해서 관련자 19명에게 징역 3~7년을 선고했다.


유신의 망령 학원안정법

1985년 7월 26일자 조선일보 1면 머리에는 「<학원안정법 제정 추진 / 소요 사태 근절…면학 분위기 돕게」기사가 올랐다. “정부가 갈수록 좌경·폭력화하고 있는 학원 소요 사태를 근절, 학원 정상화를 촉진시키기 위한 법적, 제도적 장치로 ‘학원안정법’(가칭)을 제정하는 문제를 신중히 검토해온 것으로 25일 알려졌다”는 것이었다. 정치계는 물론이고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주는 내용이었다.

법안의 요점은 운동권 학생들을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하고 선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보도는 하루 전 7월 25일자 경향신문의 ‘특종’이었다. 안기부는 경향신문 1판 신문 배달을 저지하고 사회부장강신구와 기자 김지영을 남산 안기부 조사실로 연행해 폭력을 가했다. 5공은 2·12 총선의 충격이 가시지 않은 데다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 등이 잇따르자 삼청교육대와 유사한 음모를 꾸민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학원안정법 제정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대학당국이나 정부의 견해를 크게 소개하는가 하면 정치부 기자 좌담회 등을 통해 분위기를 띄웠다. 정치부 기자 좌담회에서 나온 얘기 중 한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정부가 학원안정법을 발상·추진하게 된 것은 당국의 학원관계 수사 결과, 밖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일부 학생들의 좌경도가 심하고 ‘체제 부정’의 심도가 깊어 그대로 방치하거나, 현행법으로만 대처해나갈 경우 나라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진다는 판단을 내린 것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즉, 학원문제는 이제 반정부 또는 반정권 차원을 훨씬 더 벗어나 있으므로 국가 유지 차원에서 다뤄야 한다는 인식인 것입니다. 정부 고위관계자들은 소련의 공산 혁명 당시 볼셰비키나 월남의 학생운동을 보더라도 그들의 수는 극소수에 불과했으나 철저한 조직, 효과적인 이데올로기 확산 등을 통해 목적을 달성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학원안정법은 우리나라를 제2의 월남화로 몰고 갈지도 모를 학생운동에 결정적으로 쐐기를 박아야 한다고 판단한 정부 측의 대증요법적 처방으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내용은 문제 학생에 대한 특별교육, 문교부의 불온서클에 대한 해산권 부여 등입니다. 법안 자체가 그동안의 당·정 의견 조정 과정에서 일부 내용이 제외된 결과 이 두 가지가 골격으로 남았고, 또 중요한 초점으로 지적되고 있습니다(7월 28일자 3면).

학원안정법의 발상이나 추진 동기가 얼마나 일방적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선일보는 이후 학원안정법에 관한 보도를 계속함으로써 법 제정의 대한 불씨를 살려나갔다. 8월 6일자 1면 머리에는 「학원안정법 금명 시안 발표」라는 예고기사까지 실으면서, 정부와 민정당이 학원안정법을 제정하기로 결론을 내렸다고 보도한 뒤 학생들의 좌경화에 관한 기사들을 쏟아냈다. 특히 같은 날자 5면에서는 「민중교육 왜 문제인가」>라는 분석기사를 통해 교사들의 <민중교육>지 기고 내용을 좌경화로 몰아갔다.

조선일보는 이어 8월 7일자 1면에 서울대와 이화여대 총학생회의 유인물인 <깃발>과 <이화언론>을 용공 유인물로 규정하고 관련 학생들을 구속·수배한 검찰의 발표를 주요 기사로 실었다. 2면 사설에서는 검찰의 주장을 토대로 학생들의 좌경화를 우려했다.

조선일보 8월 8일자 1면 머리에는 ‘학원안정법 시안 내용’이 문교부의 발표에 앞서 ‘특종’으로 보도되었다. 3면에는 시안의 주요 내용과 관련 기사가 나왔다.

정부·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학원안정법 시안 내용이 7일 밝혀졌다. 이 시안은 법안의 관심사인 선도교육과 관련, 선도교육 대상자 선정 및 선도 기간 결정을 위해 문교부에 준사법적 성격을 가진 ‘학생선도교육위원회’를 별도로 설치하도록 했으며, 선도위원회는 교육전문가와 법관 자격을 가진 사람이 각각 3명 이상씩 참여한 11인 이내로 구성토록 했다.
시안은 선도교육 기간을 6개월 이내로 하되, 교육 중이라도 교육 성과가 우수한 자에 대해서는 조기에 수료시킬 수 있도록 했으며, 교육자 선정과 교육기관에 인도하기까지 일정한 장소에서 15일 이내에 보호 위탁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시안은 그러나 교육을 거부하거나 교육장소를 무단 이탈하는 경우에는 형사처벌하는 것을 비롯, 학원 소요를 선동·조장·지원하기 위해 금품 등 편의를 제공한 행위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백만 원 이하의 벌금, 학원 소요를 주도한 단체가 학교의 지도·감독에 불응한 때는 학교장 또는 문교장관이 해산명령을 내릴 수 있게 했다(8월 8일 1면 머리기사).

학원안정법 시안은 사법부의 재판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행정처분만으로 6개월 이내의 인신 속박을 가할 수 있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그 법안은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지원단체 및 일반인 등도 사법처리 대상으로 삼고 있다. 조선일보는 유신독재시대의 긴급조치 같은 시안 내용을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가 하면 정부당국의 ‘시안 풀이’까지 크게 다룬 반면 반대 측의 논리는 거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편집하는 등 일방적으로 시안을 홍보하는 경향을 보였다.

야당과 재야세력, 그리고 학생들은 학원안정법에 반대 운동을 격렬하게 펼쳤다. 결국 대통령 전두환은 8월 17일 긴급 당정회의에서 학원안정법 제정을 ‘일단 보류’하기로 결정했다. 조선일보는 그 내용을 8월 18일자 1면 머리기사로 전하고 2면 사설에서는 정부·여당의 ‘일단 보류’에 대한 ‘온건 반대세력’의 지원을 강조했다. ‘일단 보류’가 포기는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하며 반대세력의 내분을 노리는 듯한 논지다. 그러나 학원안정법 제정은 ‘일단 보류’됨으로써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학원안정법’의 8월 중 강행 처리 방침이 “좀 더 시간적 여유를 두고 검토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결론부터 앞세워 잘된 일이다. (…) 야당이나 기타 신중론자들도, 학원 내에 좌경적 요소가 증식되는 것을 방치하자는 입장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 다행히 이 법안의 처리문제는 일단 ‘더 시간을 두고 검토’하는 방식으로 유보되었다. 이 말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데 대해선 또 사람마다 견해가 다르겠으나, 어쨌든 애초에 생략되었던 국민적 토론과 논쟁의 여유는 얻어진 셈이다.
이와 관련해 우리는, 여측이 이 문제를 순전한 법률주의적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보다 정치적 관점에서 깊이 헤아려서 숙고해 볼 것을 권유한다. (…)한편, 야당과 기타 법 제정에 반대한 온건 반대세력의 지도층에도 당부하고자 한다. 이, 잠정적일지도 모를 완화기에 들어서야말로, 야당은 이민우 총재가 언약했듯이 학생들에 밟히는 한이 있더라도 학생들의 자중을 설득하는 일에 오히려 여당보다 적극 나서야 할 때다(8월 18일자 사설).


간첩·용공 조작 사건들

전두환 정권은 박정희 정권처럼 마찬가지로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해서 받아낸 온 자백으로 간첩·용공 건을 조작해 정국 전환용으로 활용하는 짓을 밥 먹듯 했다. 1980년 6월의 아람회 사건과 이른바 무림·학림·부림 사건(1980~1981년) 등이 그렇다. 1982년 11월의 오송회 사건도 같은 맥락이다.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대표적인 용공·간첩 조작 사건으로 떠올랐던 사례 중의 하나가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이다. 1985년 9월 9일 안기부와 보안사는 미국에서 공부하다 북한을 방문한 양동화 등 20여명이 국내 대학에서 간첩활동을 했다고 발표했다.

조선일보는 그 사건을 9월 10일자 1면 머리기사로 다루고 2, 3, 10 면에 관련 기사를 실었다. 학원 소요 사태에는 간첩의 사주가 있다는 전두환 정권의 주장을 충실히 대변하며 오히려 한 술 더 뜨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분석기사와 사설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9일 발표된 해외유학생 간첩단 사건의 특징은 북괴가 좌경운동권 학생들을 이른바 학원 혁명기지화 전술의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 북괴는 그들의 대남 침투공작에 변화를 꾀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우선 재일 조총련을 통해 벌였던 우회침투 공작을 미주와 유럽지역에까지 확대, 재미 <해외한민보>, 재독 <우리나라> 등 해외 반정부지를 대남공작 거점으로 삼은 사실이다. 이는 북괴가 최근 일본의 정치우경화 추세와 관련, 혁명 거점을 점차 잃고 있어 새로운 돌파구로 ‘사상의 낙원’으로 알려진 유럽을 택한 것으로 당국은 보고 있다.
둘째, 북괴가 혁명 완수에 필요한 대상으로 학생운동 경력이 있는 해외유학생들을 꼽은 점이다. 수사 결과 드러났듯이 북괴는 이들을 대동 입북하거나 헝가리, 동독 등 공산권 국가의 북괴 공작 아지트에 수용, 단기간의 간첩교육을 시켜 국내에 잠입시켰고 이들을 통해 새로운 혁명기지를 구축하려 했다.
(…) 당국은 이밖에도 북괴는 김주열 군의 죽음이 4·19의 계기가 된 점을 들어 혁명의 계기를 새로 조작할 구상까지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한 북괴는 남한은 군경 인구밀도가 높고 3면이 바다여서 유격전이 부적합하며, 투쟁 형태는 무기를 탈취, 도시 무장봉기로 서울을 우선 장악한 뒤 동시 다발적으로 전국 주요 도시를 쟁취, 혁명정권을 수립하려 했음이 드러난 것이다(9월 10일자 3면 기사).

이번에 적발된 간첩 사건은 여러 측면에서 과거의 사례와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우선, 두 간첩이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운동권이란 특징이다. (…) 이런 사실은 전에 없던 일이다. 과거의 간첩들은 대개가 운동권의 ‘권내’엔 들어 있지 않았으며, 이 사회의 주류에는 직접 참여하지 못한 처지에서 빙빙 돌기만 했다. 그리고 나이로 보아도 대개는 구세대에 속했다.
(…) 그런데 이번의 간첩들은 20대 운동권의 현역 내지는 적극 활동가들이었다는 점이 충격적이다. 이 점은 북괴의 촉수가 그만큼 한치한치 더 다가섰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각별한 경계를 요하는 대목이다. 이들은 일부 지방대학을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의 일각에 침투한 것을 기화로, 운동의 노선과 방향을 반미·친북괴 민중혁명론으로 유도하기 위해 지하서클 활동, 이념 확산 공작 및 실천투쟁 조장을 획책해왔다.
(…) 이번의 간첩 사건은 구미지역의 간첩 통로화에 대해서도 커다란 경종을 울려 주었다. 세계가 점차 사통팔달로 뚫리는 개방 추세에 임해서, 당국은 과연 어떤 묘안으로 북괴 침투를 봉쇄하려 하는지, 그렇다고 우리의 개방을 다시 폐쇄로 역전시킬 수도 없는 문제이고, 보다 기술적인 대응이 불가피하다고 하겠다(9월 10일자 2면 사설).

조선일보는 같은 날짜 10면에 「유학생 간첩단 사건 개인별 범죄사실」을 안기부·보안사 발표대로 실었다. 22명의 사진과 함께 보도된 내용 역시 고문 등으로 조작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1986년 9월 대법원은 외국 여행 경력이 있는 양동화와 김성만에게는 사형, 황대권과 강용주에게는 무기징역, 다른 10여 명은 장·단기 실형을 선고했다.

당시 전남대 의예과에 다니던 강용주는 유학생도 아니었고, 북한에 다녀오지도 않았지만, 고등학교 선배인 양동화에게 포섭돼 <광주 백서> 등 국가기밀을 누설했다는 이유로 무기징역을 받았다. 특히 주범으로 구속된 사람들이 풀려났을 때도 강용주는 끝내 반성문을 쓰지 않아 14년간 복역한 끝에 1999년 2월 특별사면으로 출옥했다.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과 함께 국내의 용공단체로 조작된 것이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민추위)’ 사건이었다. 1985년 10월 29일 서울지검 공안부는 민추위 위원장 문용식(26·서울대 국사학과 3년·휴학), 배후 조종자로 김근태(38·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등 관련자 26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17명을 수배했다고 발표했다.

조선일보는 10월 30일자 1면 머리에 발표 내용을 그대로 보도하고, 민추위가 서울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과 대우어패럴 근로자 동조시위 사건 등 학원 및 노조의 각종 폭력시위를 배후조종했다고 전했다. 조선일보는 그 사건 역시 검찰이 발표한 내용을 그대로 전하며 사설을 통해 검찰의 주장을 옹호했다.

29일 서울지검 공안부가 발표한 서울대 ‘민추위’ 조직 26명 구속·기소(22명) 사건은 놀라움과 충격과 아울러 짙은 안타까움을 안겨준다. 그들이 모두 20대의 학생이고, 한 명(그 한 명도 일류대생이다)을 제외하고는 고교 졸업생들의 선망의 대상인 서울대 학생들이다. “반성시킬 여지는 없는가”라는 기자들의 물음에는 한창 공부할 나이의 자식들을 둔 많은 부모의 안타까운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요소조차 있다.
검찰 발표는 ‘학내외의 각종 시위와 위장취업 등 노사 분규의 배후에 좌경용공 학생들의 지하운동 단체’가 있었는데, 그것이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라는 단체라고 했다. (…) 그것이 북괴와 직접 닿아 있건, 순 자생적이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젊은 학생들의 국가관·사회관이다.
그들은 현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미·일 제국주의’ 세력에 예속된 ‘군부독재정권과 매판독점재벌’이 민중과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 폭력적으로 ‘현 정권을 타도한 뒤 민중정권을 수립함으로써’ 그 구조적 모순을 해결한다는 목적을 내세우고 있다고 한다. 이것은 자유민주주의체제에 대한 도전으로서 정부 차원보다도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논리며 행동양식이다(10월 30일일자 2면 사설).

조선일보는 그 사건을 학내외 시위와 노사 분규를 배후조종한 ‘자생적 사회주의 집단’의 문제하고 규정하고  사건의 배후로 발표된 김근태에 관한 상자기사를 통해 그의 사생활까지 파헤쳤다. 10월 30일자 10면에는 「민추위사건 검찰 수사 발표」의 요지를 대형 상자기사로 도표와 함께 보도하고 검찰 공안부장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노동자·농민 학생의 연대투쟁을 혁명의 유일한 방법으로 삼았다고 주장했다. 김근태에 관한 조선일보의 보도 내용 중 주요 부분은 다음과 같다.

학원가와 노동현장의 과격 시위를 주도해온 ‘민추위의 배후 인물’로 검찰은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의 전 의장 김근태(38) 씨를 지목했다. (…) 김 씨는 경기도 부 천출신. 고3 때부터 한일협상 반대시위 등에 참가했으며, 지난 65년 3월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했으나 과격한 학생시위 등에 매달려 제적, 복학을 거듭했다.
(…) 김 씨는 당시 오는 2000년까지의 ‘평생노동운동계획표’를 작성,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본격화하고 급진좌경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하는 ‘직업혁명가’로 자처하면서 동조자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계획표에서 81년에는 노동자·농민의 정당, 즉 사회주의정당의 주도를 꿈꾸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여의치 않자 이른바 노학연대 투쟁의 일환으로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키로 결심했다.
그는 지난 83년 9월 30일 유신 때 반체제운동으로 제적됐던 학생들을 모아 ‘민청련’을 발족, 의장직에 앉았다. (…) 당국은 김 씨가 의장으로 있던 지난 2월 ‘민추위’ 위원장 문용식 씨와 처음으로 접촉한 뒤 9월 7일 구속될 때까지 좌경운동권 학생의 폭력혁명 방법론 등에 관해 유인물 배포나 세미나 개최 등을 통해 광범위한 좌경의식화 학습을 시키며 구체적인 행동지침 등을 고무·선동해왔다고 말했다.
(…) 김 씨는 위로 세 형과 숙부·숙모·외숙모·외사촌형 등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이 월북하거나 처형된 주변 환경에서 태어났다. 이른바 월북가족에 대한 주위로부터의 냉대와 가난에 찌든 생활 등으로 어려서부터 국가와 사회에 대한 혐오감과 저항의식을 지녀왔으리란 것이 당국의 분석이다 (10월 30일자 10면 기사).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사건도 고문에 의한 조작이었다. 전두환 정권 하에서 벌어진 대부분의 시국사건이 그렇듯 이 사건 역시 5공 정권의 야만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김근태는 1985년 12월 19일 법정에서 자신이 받은 고문 사실을 진술했는데 전두환 정권의 인간성 말살에 대한 대표적 증언이었다. 그는 수없이 당한 전기고문과 물고문, 그리고 집단폭행과 성적인 모욕 등 인간으로서는 견뎌낼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을 진술했다. 그러나 조선일보는 12월 20일 11면에의 1단 기사로 김근태의 첫 공판이 방청 제한 때문에 중단되었다고 했다. 언론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비인간적 보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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