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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조선의 민족지 논쟁조선일보 대해부 4권 -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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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10.16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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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민족지 논쟁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그러나 1985년 일어난 두 신문 간의 민족지 논쟁은 뜬금없는 것이었다. 논쟁을 먼저 일으킨 쪽은 동아일보였다. 1985년 4월 1일자 창간 65주년 기념호 3면에서 고려대 명예교수 조용만이 기고문을 통해 조선일보를 ‘친일신문’으로 기술한 내용을 그대로 내보낸 것이 발단이었다.

그 기고문은 동아일보 창간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고,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민족진영의 동아일보와 함께 실업계신문인 조선일보를 허가했다며 조선일보는 ‘실업신문임을 위장한 친일신문’이라고 주장했다. 동아일보는 또 4월12일자 6면 상자기사에 “동아일보는 반일신문이며 조선일보는 친일신문”이라고 주장한 일본의 한 우익신문 자료를 소개했다. 그러자 조선일보는 4월14일자 3면에 논설고문 선우휘가 쓴 <동아일보 사장에게 드린다>라는 글을 내보냈다. 동아일보의 주장을 강하게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 도대체 동아일보가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람을 시켜서 동아일보만이 진정한 민족지이지, 조선일보는 친일지다 (…) 하여 선전한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될 무슨 어려운 사정이 있는 것입니까.
(…) 정확히 말하면 일제 위정당국은 조선일보를 대정실업친목회를 대표한 예종석에게, 동아일보는 박영효에게 허락해준 것입니다. 당시 박영효가 어떤 경력의 어떤 정치적 성향의 인물로서 일제당국으로부터 굳건한 신뢰를 얻고 있었다는 것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동아일보가 당시 민족주의자로 인정받아 민족주의 신문을 만들라고 허가받았다고 자랑하는 것은 웃지 못할 넌센스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창간 후 조선일보가 재빨리 옳은 주장과 바른 기사를 써서 사흘이 멀다 하며 밥 먹듯이 압수와 정간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을 동아일보는 무엇이라고 설명하겠습니까. 신문이란 누가 시작하건 간에 결국은 신문다운 신문으로 발전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그렇듯이, 신문도 그 성장발전 단계에서 그 가치가 평가되어야 할 것입니다.
(…) 반일·친일 논쟁이 에스컬레이트하면 어디까지 갈 것인지 상상도 안하십니까. 논쟁이 격화되면, 궁극적으로 인촌 선생까지도 욕보이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그래서 두 신문사가 서로 상처를 입을 때, 이 사회에 이로운 것은 무엇일까요. 이제 변명하거나 화해하는 기회는 잃어버리고 말았고, 오직 동아일보가 가만히 있는 사람을 비방한 행위에 대하여 사과할 일만이 남았습니다. 그러면 나는 조선일보 사원들과 함께 마음을 풀겠습니다.

동아일보는 선우휘의 글에 대한 대답으로 4월 17일자 3면 광고 난에 실은「애독자 제현에게 알려드립니다」라는 글을 통해 “조선일보가 친일신문으로 창간된 것은 사실 기록에서 착오가 없는 것”이라고 재차 설명하고 독자들의 계속적인 성원을 부탁했다. 조선일보와 더 이상의 논쟁을 하지 않겠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자 조선일보는 4월 19일자 3면에 ‘조선일보사’ 명의로 「우리의 입장: 동아일보의 본보 비방에 붙여」라는 장문의 글을 실었다. 동아일보는 그 태생부터 친일신문이었으니 차제에 민족의 정통과 이단의 옥석을 가리는 작업을 벌이자는 것이었다.

(…) 두 신문이 창간된 것은 3·1 운동이 계기가 된 일본총독부의 이른바 ‘문화정치’의 소산이었습니다. 그래서 총독부는 조선인 가운데 귀족·지주·상공인 등 예속자본을 그 대상으로 선정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중에서도 일부 토착귀족 지주세력은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을 계기로 형성된 식민통치의 가장 중추적인 동맹군이었습니다. 결국 귀족·지주·기성 친일언론인으로 혼성된 측에 허가된 것이 바로 동아일보였고, 상공인집단에 주어진 것이 조선일보였습니다. 동아일보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편집장이었던 이상협에게 발행 허가되었고 한일합방의 공로로 일본 후작의 작위를 받은 박영효가 초대 사장이었다는 구성을 보더라도 동아일보가 과연 어떤 성격이었던가는 자명한 일입니다.
동아일보는 또 17일자 신문의 글에서 동아일보 창간호와 창간특집호에 등장한 국내외 인사의 면면을 들어 동아일보가 ‘민족지’인양 호도했으나 바로, 그 축사의 대열에 10여명의 총독부 관리 및 친일인사가 들어있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동아일보가 더 이상의 반론을 제기하지 않음으로써 두 신문 간의 민족지 논쟁은 그 정도에서 마무리된 셈이었다. 그 사건은 조선일보의 주장대로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치고받기’였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일제강점기 이래 현재까지 보여온 행태를 보면 ‘민족지’라고 당당히 주장할 수 없음을 <조선일보 대해부> <동아일보 대해부> 총서를 보면 여실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일보가 1985년에 난데없이 ‘민족지 논쟁’을 벌인 까닭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판매부수와 정치적 영향력에서 뒤진 동아일보가 ‘정통 민족지’라고 주장하면서 조선일보보다 역사적으로 우위에 서 있다는 점을 대중에게 알리려고 시도한 일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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