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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금조치와 김영삼 단식조선일보 대해부 4권 -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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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9.04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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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은 1983년 2월 25일 정치활동이 금지됐던 2백50명에 대해 규제를 해제하고 정치활동 재개를 허용했다. 1980년 국보위 정치쇄신위원회에 의해 정치활동이 가로막힌 지 2년이 훨씬 지난 뒤였다.

그러나 5공 출범 2주년(3월 3일)을 즈음해 발표된 해금자 명단에는 김대중과 김영삼을 비롯한 주요 정치인들이 포함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망명과 구속, 그리고 연금 상태에 놓여 있었다. 조선일보는 2월 26일자 1면에  정치활동 재개 허용을 ‘아주 잘 된 일’로 하면서 해금자들의 현실 인정을 강조했다.

25일 전두환 대통령은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의해 정치활동을 규제받고 있는 대상자 5백55명 중 2백50명을 규제조치에서 해제하는 단안을 내렸다. (…) 우리는 우선 이 정도 수의 피규제자들 만이라도 먼저 해제된 것을 아주 잘된 일로 환영하면서, 가급적 빠른 시기를 택하여 모든 인사들이 속속 해제될 것을 기대코자 한다.
(…) 혹자는 피규제자들의 해제조치가 이루어지면, 신당운동이 태동하거나, 기성정당 안에서 당권경쟁이 일어나거나, 또는 재야세력이 강경화하여 제5공화국의 정치질서에 동요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하는 추측을 했을는지도 모른다. (…) 이번 해제조치로 정국에 어떤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추측컨대 적지 않은 수의 인사들은 상당한 기간 정세의 돌아감을 관망하면서 신중히 행동할 듯하며, 일부 인사는 정치의 무상을 느끼거나 개인적 사정에 의하여 정치활동을 단념할는지도 모른다. 규제에서 풀려났거나 아직 풀리지 못한 인사들 중에는 인지상정으로서 자기는 억울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요, 정치인으로서의 목표를 잃고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와서 과거를 아무리 논해보아도 현실은 바뀌었다(2월 26일자 2면 사설).

조선일보는 5공 출범 2주년 이틀 전인 3월 1일자부터 3회에 걸쳐 전두환에게 찬사를 보내고 5공의 공적을 기리는 시리즈를 내보냈다. 「만나보면 아저씨 같은 정」 「신상필벌의 통치스타일」 「화기(和氣)로 안정 다진 제5공화국」 「의지로 이끄는 경제, 한자리 물가 기록」 등의 제목만 보아도 기획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3월 3일자 사설(「전 대통령의 시정 2년」)을 통해 전두환과 5공의 치적을 치켜세웠다. 이 사설은 그의 집권 2년이 ‘정치가 해서는 안 될 일과 정치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갈라놓은 재정초의 연대’였다고 칭송했다. 마치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듯하다.

지난 1월 한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한 나카소네 일본 수상은 이튿날 기자회견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인상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외유내강이랄까…. 자상하고 섬세하며 줏대가 있으나, 인정미가 넘쳐흘러 상대방을 퍽 편안하게 해주는 분으로 느꼈다.”
(…) 우선 전 대통령은 사람들끼리 거리감을 갖지 않고 화합 속에서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는 가운데 발전이 있을 수 있다고 믿고 있음에 틀림없다. 전 대통령의 이 같은 생각은 일찍이 군의 지휘관으로 있으면서 터득된 것으로,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교육받으면’ 사기가 오른다는 평범한 사리를 철리로 체험한 까닭이다.
(…) 이렇게 볼 때 전 대통령은 화목·가정·의리·신념·자상 등의 단어로 연결되는 어떤 덕목이랄까, 가치관을 지닌 지도자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런 가치관과 믿음들이 전 대통령의 오늘의 통치스타일로 그대로 이어져있다고 해서 과언이 아닐 것이다.<이현구 기자>(3월 1일자 3면 「전 대통령 취임 2년>➀).

전두환 대통령의 시정(施政) 2년은 정치가 해서는 안 될 일과 정치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갈라놓은 재정초의 연대였다고 할 수 있다.
1인 장기집권과 권모술수로서의 정치가 배격된 반면 단임 정신과 봉사하는 청렴정치가 제창되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해석과 관련해서는, 권위주의와 저항논리의 고질적인 악순환을 종식시키기 위해 대화와 협력의 미덕이 강조되었다.
사회적인 분야에서는 성숙한 사회로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일련의 개방 조치와 자율화 시책이 단행되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무리한 성장보다는 안정적인 정상 상태에의 정착이 강조되어, 인플레이션과 투기 성향이 현저히 견제되었다.
깨끗한 사회와 합리적인 풍토의 조성을 위해 지난 2년간의 국정기조는 권력형 부정부패의 척결을 가장 큰 역점사항으로 부각시켰다. 공직자 사회에 대한 지속적인 정화작업과 함께, 식민지시대 이래의 각종 부정(否定)심리와 비리가 의식개혁운동의 형태로 고취되었다. 70년대에 손상을 입었던 한국의 외교도 지난 2년간의 구시대 치유노력과 병행해서 괄목할 발전세를 보였다(3월 3일자 2면 사설).

전두환 정권의 해금조치와 언론의 ‘치적’ 미화에도 불구하고, 1983년에도 민주인사들과 학생들에 대한 탄압이 계속됐다. 학원가에서는 시위를 하다 부상하거나 사망하는 경우가 생기는가 하면 강제징집 후 군부대에서 의문사도 속출했다. 3월 8일에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의 김현장과 문부식이 대법원으로부터 사형 확정 판결(후에 감형)을 받기도 했다.

노동자의 투쟁은 정권의 강한 탄압을 무릅스고 가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영삼이 5월 광주 항쟁 3주년을 맞아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그는 단식에 앞서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구속인사의 전원 석방과 전면 해금, 해직교수 및 근로자, 제적학생의 복직·복교·복권, 언론통제의 전면 해제, 정치활동 규제의 해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요구했다. 전두환정권은 김영삼의 단식투쟁이 대중에 끼칠 정치적 영향이 심각하다고 보고 언론보도를 통제했다. 단식 3일째 동아일보가 정치면 가십난에서 그 내용을 다루었을 뿐이다.

조선일보는 김영삼이 단식 중단을 선언한 뒤인 6월 10일자에 비로소 ‘김영삼 씨 단식 중단’ 기사를 종합한 데 이어 3면 정치가십난에 그간의 사정을 보도하는 것으로 그 사건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외국 언론들은 그 뉴스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정치적인 이유로 지난 5월 18일부터 단식을 벌여온 전 신민당 총재 김영삼 씨는 단식 23일째인 9일 오전 입원 중인 서울대학병원에서 단식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정치쇄신특별조치법에 의해 정치활동을 규제받고 있는 김 씨는 지난 5월 18일 정치 피규제자 해금을 비롯한 몇 가지 정치적인 요구를 제시하고 서울 상도동 자택에서 단식을 시작했었다. 김 씨는 단식 8일째 되던 지난 5월 25일 상도동 자택에서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병원에서도 단식을 계속했었다.

김 씨는 단식 17일째였던 지난 3일부터 매일 10% 포도당 2천cc, 아미노산 용액 5백cc의 링거액을 맞아왔고 이온수·보리차 등 음료수를 섭취하면 서 의사의 가료를 받아왔으나 이 링거액을 맞기 전까지의 17일 간은 물과 소금만을 섭취한 것으로 전해졌다. (…) 김 씨는 앞으로 당분간 병원에서 요양한 뒤 퇴원할 것으로 알려졌다(6월 10일자 1면 기사).

갖가지 억측과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정치현안의 내용은 전 신민당 총재 김영삼 씨의 단식 사건임이 9일 공개됐다. 김 씨가 단식을 시작한지 23일 만에 사건 자체의 종결과 때를 같이해 국민에게 전달된 셈. 그동안 이 사건에 대한 표현은 ‘최근의 관심사’로부터 비롯해 ‘정세의 흐름’, ‘시국문제’, ‘정치현안’에 이르기까지 시간마다 모습을 달리해왔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은 정치현안과 시국문제의 내용을 정확히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신문 보도가 가까운 길을 두고서도 돌아가야만 했던 동안, 사실과 표현 사이의 거리가 넓어져 가면서 갖가지 풍설과 유어비어가 그 그늘에서 커왔다. 최근의 관심사와 정치현안이 신문지상에 모습을 내민 이후 신문사에 걸려온 전화는 부쩍 늘어났다(6월 10일자 3면 기사).

김영삼의 단식은 한국의 정치적 상황을 세계에 알리고 민주인사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계기가 됐다. 미국에 망명 중인 김대중은 6월 4일 “김영삼 씨를 구출하라”는 플래카드를 목에 걸고 워싱턴 집회에서 데모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반정부투쟁을 위한 공동전선을 구축하기로 하고 ‘백의종군하는 자세로 하나가 되어 손잡고 나가겠다’는 ‘8·15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 성명에서 두 사람은 “국민 여러분, 우리들의 부족하였음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고 여러분의 민주전열에 전우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두 사람은 국민과 함께 그 뜻을 받들어 민족과 민주제단에 우리의 모든 것을 바칠 것을 엄숙히 맹세하는 바입니다”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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