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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련 철폐투쟁과 제7대 대통령선거조선일보 대해부 3권 -1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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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2.20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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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은 박정희 정권이 사회 전체를 ‘병영화(兵營化)’하려고 갖은 힘을 쏟은 시기였다. 문교부가 1970년 12월 27일에 발표한 ‘대학교련교육의 시행요강’은 먼저 대학을 병영화 하겠다는 ‘신호’였다. 대학생들이 4년 동안 받는 수업 시간의 약 20%인 711시간을 교련에 할애하며, 군사교육을 맡을 현역 군인들을 대학에 배치한다는 것이었다. 문교부는 1970년 12월 21일 현재 학생 4백명 당 1명인 교련교관을 250명 당 1명으로 증원하기로 결정하고 1차로 전군에서 장교 540명을 선발했다(조선일보 12월 22일자).


조선일보 사설, ‘학원 병영화’를 정면으로 비판

문교부의 ‘시행요강’에 따르면 사회 진출을 준비해야 하는 대학 4학년생들도 170시간이 넘는 교련을 받아야 했다. 이런 정부 시책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높아지자 조선일보는 1971년 1월 30일자 사설(「대학교련교육의 문제점」)을 통해 ‘시행요강’을 비판했다.

문교 당국이 성안(成案) 발표한 ‘대학교련교육의 시행요강’은 지금 사회 각계에 커다란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대학 4년 수업시간의 약 20%인 711시간을 군사교육에 배정하고 이것을 다시 일반교육 315시간, 집체교육 396시간으로 나누어 이수시킬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 동 ‘요강’은 대학교육의 본질과 당면한 국방상의 요청과의 상충 속에서 각양(各樣)한 여론에 부딪치고 있는 것이다. 우선 북괴의 전쟁 준비와 도발행위가 가중되고 있는 현황에서 동 ‘요강’을 구상, 성안한 당국자들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우리는 이것이 내포한 몇 가지 중요한 문제점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총 수업시간의 약 20%를 군사교육에 배정하고 매주 3시간을 학생들이 강의 내지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대학의 목적에 비추어 과중한 부담이라는 것을 지적하게 된다. 이 비상시국에 그만한 정도의 군사교육은 별 문제가 아니라는 상식론도 나올 수 있겠으나 6·25 동란 중과 그 직후에도 대학생들에게 병역 연기의 특전을 주었던 것은 대학교육이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나라가 인식했던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대소를 막론하고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 위정자들에 보편화되어 있는 기준이다. 오늘의 격동하는 국제정세에서 국가안보의 난관에 직면하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다. 그리고 유독 우리나라라 해서 대학생의 군사교육이 대학 본래의 목적을 과중하게 억압해도 무방하다는 근시안적 사고가 통용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들리는 말로는 이러한 군사교육을 위하여 대학에 현역 군인이 배치되고, 학생들의 교육과 교관들의 집무를 위한 막사까지 설치할 것을 당국자들이 생각하고 있다고도 한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러한 조처는 학원의 분위기를 크게 위축시킬뿐더러, 심지어는 학원 병영화의 길을 트게 되리라는 것은 결코 기우에다만 돌릴 수 없는 중대한 사태라고 할 것이다. 과문의 탓인지 몰라도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도 대학에 그런 일은 없었다. 필요에 따라 대학에 군인이 배치된 경우에는 반드시 예비역 군인이 배치되어야 하고 학원 내에 막사를 마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들리는 말로는 큰 대학들의 경우는 배치될 현역 군인의 수가 20명을 넘을 것이라고 하니, 이렇게 된다면 이들과 대학 교직원들과의 마찰도 마찰이려니와 학원의 군사화·편제화라는 인상을 자아내리라는 것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 북괴의 호전성이 노정되면 될수록 민주국가는 민주주의적 방법으로 이에 대처하는 것이 떳떳하고 이것은 사상전에서도 이미 그들을 제압하는 소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맹점 많은 전기 ‘요강’보다는 차라리 종래의 학훈단(ROTC)이 합리적인즉, 이것을 부활, 강화시키는 것이 옳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사설은 1970년 말 당시로서는 언론계의 통념을 벗어난 강경한 논조를 펼치고 있다. 왜냐하면 중앙정보부 소속 간부급 직원이 주요 언론사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편집국장과 논설위원들뿐 아니라 취재부서와 편집부서의 담당자들에 “이 논설은 이렇게 고치라”거나 “이 기사는 아예 빼버리라”고 ‘지시’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기에 박정희 정권이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하던 ‘학원 병영화’를 정면으로 비판한 위의 사설은 그때만 해도 ‘온건한 보수신문’이던 조선일보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었다.


교련 반대 시위를 극도로 축소 보도한 조선일보

1971년 새 학기가 시작되자 여러 대학에서는 문교부가 1970년 12월 17일 발표한 교련 강화 방침에 대한 비판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1971년 4월에는 대통령선거, 5월에는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될 예정이어서 박정희 정권이 학생운동을 통제하기 위해 학원 병영화를 강행하는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4월 2일 연세대생 5백여 명이 “교련 강화 반대”를 외치며 신촌로터리까지 시위를 벌인 데 이어 6일에는 서울대 상대, 고려대, 성균관대 학생들이 가두 진출을 시도했다. 교련 철폐 투쟁이 본격화한 것이었다.

이성과 자유의지를 지닌 젊은이라면 독재정권이 학원을 병영화 하려는 기도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학생들의 시위는 양식 있는 대중의 지지를 받기에 충분한 것으로서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져야 했다. 그런데 1971년 1월 10일자 사설에서 박 정권의 학원 병영화 시책을 정면으로 비판했던 조선일보는 막상 학생들의 교련 철폐 투쟁이 본격화하자 시위에 관한 기사들을 극도로 축소했다.

4월 7일자에 처음으로 나온 기사(「교련 등 규탄데모 / 서울대·고대·성대생들」)는 7면 한 귀퉁이에 2단으로 박혀 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4월 9일자 7면에는 「교련 반대데모 사흘째 / 서울대·연대·고대생들 가두로」라는 기사가 조그만 사진과 함께 실렸으나 3단으로 오그라들어 있었다. 4월 10일자 7면에도 3단 기사(「교련 반대데모 계속 / 4일째 4개 대학서」)로 다루어졌다.

조선일보는 4월 11일자 2면에 「학생데모와 냉각기간」이라는 제목으로 모호한 논조의 사설을 올렸다.

학생들이 군사훈련에 반대하여 가두시위를 벌이려다 경찰과 충돌한 최근 며칠 동안이 사태를 지켜보면서 우리의 심정은 매우 착잡했다. 또 다시 4월의 가로(街路)에서 학생과 경찰이 충돌 않을 수 없게끔 사태가 전개된 데 대한 안타까움이 있다. 군사교련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이미 명백히 밝힌 바 있어 되풀이하지 않겠지만, 어찌 하여 대화와 설득을 통해 합리적 해결을 찾지 못하고 가두에서 불행한 대결을 하게까지 되었는지 마음이 아픈 것이다. 또 마침 4년마다 한 번씩 있는 민주정치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대통령선거가 진행되고 있는 때라 이제까지는 비교적 조용하게 유지되어온 선거 분위기가 혹시라도 살벌해지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도 없을 수 없다. (…) 학생들이 진정으로 반대하는 것에, 그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항의 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또 정부당국, 구체적으로는 경찰은 사회질서를 유지할 책임이 있는 것이므로 가두시위를 저지하는 것을 나무랄 수는 더욱 없다. 이러한 대결에서 우리가 일차적으로, 또 최저한으로 바라는 것은 쌍방 간 감정의 이상 격화나 예측치 못한 불의의 사고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는 것은 피해야 하겠다는 것이다.
진퇴유곡의 대결에서 천만 다행스럽게도 수습의 실마리는 잡게 된 것 같다. 그것은 학생들이 스스로 냉각기간을 설정하였다는 것과 경찰 당국이 모든 연행학생을 석방하였다는 것이다. (…) 군사교련에 이의를 제기한 학생 측은 당초 정부 당국과의 충분한 토의를 요구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군사교련제도를 전면 반대하는 차원이 아니라며 교관을 현역으로 하느냐, 예비역으로 하느냐, 교과 내용을 얼마나 바꿀 것이냐, 얼마만한 시간이 적정한 것이냐 등등으로 조정의 여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우리는 냉각기간의 설정을 반기면서 이 기간 동안에 정부 당국, 대학 당국, 학생 사이에 성의 있는 대화가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군사교련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몇 갑절 중요한 선거의 분위기가 절대로 흐려져서는 안 되겠다는 기원에서이다.

조선일보는 1971년 1월 30일자 사설에서 이렇게 주장한 바 있다. “6·25 동란 중과 그 직후에도 대학생들에게 병역 연기의 특전을 주었던 것은 대학교육이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나라가 인식했던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대소를 막론하고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 위정자들에게 보편화되어 있는 기준이다. 오늘의 격동하는 국제정세에서 국가안보의 난관에 직면하지 않은 나라는 거의 없다. 그리고 유독 우리나라라 해서 대학생의 군사교육이 대학 본래의 목적을 과중하게 억압해도 무방하다는 근시안적 사고가 통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박정희 정권은 전시도 아닌 평상시에 대학에 현역 군인들을 상주시키며 학생들에게 한 해 무려 7백시간이 넘는 교련을 강요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4월 11일자 사설 집필자는 자기 신문에 실린 1월 30일자 사설 내용을 잊었는지, 교련 반대 시위를 하는 학생들도 그것을 저지하는 경찰도 이해할 수 있다는 ‘양시론(兩是論)’을 펴고 있다. 이런 논리는 문제의 핵심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학생들에게 교련을 강요하는 주체는 대통령인 박정희 자신이고 그것을 반대하는 집단은 대학생들이기 때문이다. 경찰은 독재자의 명령에 따라 몽둥이를 휘두르거나 최루탄을 쏘면서 대학생들을 막고 있었을 뿐이다.

게다가 이 사설은 군사교련 문제보다도 선거가 몇 갑절이나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학원 병영화’를 취소할 생각이 전혀 없는 박정희가 ‘3선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는 데 주력하는 의미도 있는 교련 반대투쟁과 박정희가 종신집권으로 가는 길을 닦는 전초전인 대통령선거의 경중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논리적 모순이다.

학생들의 교련 반대 시위는 4월 13일부터 20일까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조선일보가 축소 보도하거나 외면하던 ‘교련 철폐투쟁’은 4월 13일자부터 사회면(7면) 머리에 오르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시위 자체가 아니라 ‘휴강이나 정상수업’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런 기사들 가운데 다수에는 요란한 컷 제목이 붙어 있었다.

· 「서울대 문리대·법대 / 오늘부터 임시 휴강 / 학교 당국, 학원 질서 유지 위해」(4월 13일자 7면 머리)
· 「서울사대·상대도 휴강」(4월 15일자 7면)
· 「서울대 공대·가정대도 휴강 / 교양과정부까지」 「고대선 오늘 중대 결정 / 어젯밤 교무회위서 결론 못 내려」(4월 16일자 7면)
· 「조용히 정상수업/ 사립대, 데모 요인 못 푼 채 냉각」(4월 18일자 7면)
· 「대학가 정상화 움직임 / 5개 대, 가두데모 않기로 / 공명선거 위해 자중 / 서울대생, 빨리 개강해 달라 건의」(4월 21일자)

조선일보 4월 22일자 사설(「학원 정상화를 위한 양식(良識)」)은 결론 부분에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학원을 정상화하고 문교 당국의 시정조치를 주시하기로 한 학생들은 단순히 선거 분위기를 흐리지 않는다는 소극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공명선거의 구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있다. 대부분이 그들 자신 유권자인 학생들이 이번 선거에 관심 있는 유권자로 참여할 뿐 아니라, 공명선거가 이룩되도록 감시하는 보다 교육 받고 민주의식이 투철한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준다는 것은 소망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사설이 ‘소망’한 바와 달리 대통령선거는 박정희 정권이 관권과 금권을 동원하고 영남 유권자들의 지역감정을 유발하는 추잡한 싸움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학생들이 공명선거를 위해 할 일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김대중과 중앙정보부의 대결’

1970년 9월 29일에 열린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 2차 투표에서 김대중이 김영삼을 눌렀다. 1차 투표에서는 총투표 885표 가운데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2표로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서 2차 투표에 들어갔다. 2차 투표에서 이철승의 지지를 얻어낸 김대중은 458표를 받아 410표에 그친 김영삼을 48표 앞서 대통령후보로 확정되었다. 언론은 물론이고 정치전문가들은 당수 유진산의 전폭적 지원을 받는 김영삼이 압승을 거두리라고 예상했으나 결과는 놀랍게도 김대중의 극적인 승리로 나타났다.

김대중은 당시 44세로, 김영삼(42세), 이철승(47세)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치열한 경쟁을 벌인 바 있었다. 그것이 53세이던 박정희를 크게 자극했음은 물론이다.

“10년 세도 썩은 정치, 못 살겠다 갈아보자” “논도 갈고 밭도 갈고 대통령도 갈아보자”라는 선거구호를 내건 김대중은 선거전 초반부터 뜨거운 바람을 일으켰다. 김대중이 대도시에서 유세를 할 때는 적어도 10만여 명의 청중이 모여드는 것이 보통이었고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강연회를 한 때는 1백만이 넘는 인파가 운집했다. 그래서 제7대 대통령선거는 초반부터 정책 대결보다는 어느 후보의 유세에 청중이 더 많이 모이는가에 쏠렸다.

박정희를 교주로 모시는 박정희교의 신도로서 중앙정보부를 맡은 이후락에게 떨어진 최대 과제는 대통령선거를 박정희의 승리로 이끄는 것이었다. 실제로 이후락의 활약은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어서, 후일 다음과 같은 평가가 나오게 되었다.
“71년 대통령선거는 분명 김대중과 중앙정보부의 대결이었다. 겉으로는 집권 공화당과 야당 신민당의 정권 경쟁이었지만 기실 줄곧 DJ와 중정의 싸움으로 전개됐다.”(김충식, <정치공작 사령부 남산의 부장들>, 동아일보사, 1992, 249쪽) (<한국현대사산책-1970년대편 1권>, 95쪽.

“이후락 정보부의 또 다른 주요 임무는 김대중 연설 청중 숫자에 관한 보도 통제였다. 차장보 등은 직접 동아일보를 드나들며 연일 김대중의 유창한 웅변에 쏠리는 인파가 부각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 바람에 4·27 선거를 열흘 앞두고 기자들의 불만이 폭발, ‘정보요원의 신문사 출입 금지’ ‘정보부의 언론 간섭 중지’를 결의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김충식, 같은 책, 301쪽).

그런 상황에서 1971년 4월 15일 동아일보사의 젊은 기자 30여 명은 ‘언론자유 수호 선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는 “우리는 우리의 명예를 걸고 정보요원의 사내 상주 또는 출입을 거부한다”는 요구사항이 들어 있었다. 4월 16일에는 한국일보, 17일에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19일에는 경향신문, 신아일보, 문화방송 기자들이 비슷한 내용을 선언을 했다.

그런데 정작 주요 일간지들에는 중앙정보부의 언론 통제 내용이 보도되지 않았다. 모든 신문이 박정희 후보 진영의 관권·금권 선거운동을 거의 기사화하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기사는 ‘대칭형’, 청중 사진은 박정희 편향

1971년 4월 27일에 치러지는 제7대 대통령선거는 군사쿠데타로 헌정을 뒤엎고 권력을 잡은 박정희가 ‘3선 대통령’이 되어 장기집권 또는 종신집권으로 가느냐, 아니면 야당 후보인 김대중이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루느냐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정치적 행사였다. 쿠데타세력의 민주주의 파괴, 자주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굴욕적 외교, 재벌을 비호하면서 저지르는 부정과 부패, 학원까지 병영화 하려는 전체주의적 행태, 대중문화조차 군사문화로 바꾸려는 야만적 행태 등에 분노를 느끼던 국민들은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기를 열망했을 것이다.

4월 초부터 선거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유권자들의 눈길은 박정희와 김대중의 유세 현장과 그것을 보도하는 언론에 쏠렸다. 특히 공화당과 공권력이 박정희를 부정한 방법으로 지원하는 지 여부가 큰 관심사였다. 그런데 거의 모든 매체가 박정희와 김대중의 움직임을 스포츠 중계 하듯이 전하면서 선거운동 기간에 저질러진 집권세력의 불법적 행위는 집중적으로 보도하지 않았다. 그런 현상은 조선일보에도 여실히 나타났다.

박정희보다 김대중의 유세장에 훨씬 더 많은 청중이 모여도 조선일보 지면에는 언제나 ‘대칭형’ 기사와 사진이 등장했다. 날짜별로 자료를 살펴보기로 하자.

· 「대도시 대결…유세전 가열 / 어제 공화 광주, 신민 대전서」(4월 4일자 1면): 「세금·물가 등 내리겠다/ 대전을 행정상 부수도(副首都)로」(김대중)와 「박 후보 영도로 중흥을 / 야당 공약은 실현 불가능」(공화당 부총재 김종필)을 똑같이 5단으로. 사진도 같은 크기로 올리고 청중 수는 밝히지 않았다.
· 「공화, 오늘부터 영남 특별유세 / 신민, 전국에 참관인 독찰반」(4월 6일자): 「야, 당 통일도 안 돼 / 대중경제는 혼돈 경제」(김종필 고창 유세)를 「공정거래법 제정 / 외곡 도입 증가 실정 입증」’(김대중 대전 유세)보다 앞에 올림. 대도시인 대전의 김대중 유세장과 소읍인 전북 고창의 김종필 유세장의 청중 사진을 비교해보면 차이를 알기가 어렵다.
· 「집권 공방 대도시서 작렬(炸裂) / 박·김 후보 대전·부산 유세」(4월 11일자 1면): 「부정부패 뿌리 뽑겠다 / 박 후보, 나의 대결 상대는 북괴일 뿐」과 「거국내각 구성하겠다 /김 후보, 빈부·지역 등 4대 격차 해소」를 각각 5단으로 실음. 특이한 것은 박정희의 대전 유세 현장 사진 크기는 가로 6cm, 세로 3.6cm인 데 비해 김대중의 부산 유세 현장 사진 크기는 가로 5.5cm, 세로 3.6cm라는 점이다. 전자는 박정희가 올라선 연단 앞부분에 청중이 가득찬 장면을, 후자는 부산시내 옛 조선방직 앞 광장에 멀리 산자락까지 청중이 빽빽이 들어선 광경을 찍은 것이다. 육안으로 보아도 청중 수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사진을 교묘하게 조작했다.
· 「박· 김 후보, 유세서 안보 공방」(4월 16일자 1면): 「예비군 폐지 북괴 이익 / 박 후보, 야 집권하면 4·19 뒤 같은 혼란」 「4대국 보장 현실 추세 / 김 후보, 내정개혁으로 북괴 야욕 봉쇄’」 기사는 같은 5단으로 다루었으나 사진에 현격한 차이가 난다. 박정희가 유세를 한춘천과 김대중이 선거연설을 한 원주는 인구가 엇비슷한데, 박정희와 육영수가 연단에서 선 모습을 작게 하고, 꽃다발을 준 소녀를 안고 있는 김대중은 더 크게 함으로써 춘천 유세장의 청중 수가 훨씬 더 많게 보이도록 했다.
· 「4·27 결전 앞으로 1주 / 박·김 후보-24일 부산·광주, 25일 서울·대구서 격돌」(4월 20일자 1면): 4월 19일 김대중이 서울 장충단공원에서 가진 연설회에는 1백만이 넘는 청중이 모였다는 것이 현장을 취재한 기자들과 목격자들의 증언이었다. 그런데 김대중의 유세 현장 사진은 가로 6cm, 세로 4cm로, 김종필의 목포여고 연설회는 가로 5cm, 세로 4cm로 되어 있다. 얼핏 보면 전자의 사진ㅇ; 훨씬 큰 것 같지만 연단에서 김대중의 뒷모습을 크게 부각시키고, 김종필은 뒷머리만 나오게 함으로써 독자가 장충단공원의 ‘1백만 청중’을 실감할 수 없게 했다.
· 「여야, 숨 가쁜 입체작전 / 공화, 부동표 흡수에 총력 / 신민, 참관인 등 새 인물로」(4월 22일자): 4월 21일 박정희는 청주에서, 김대중은 남원에서 유세를 했다. 이 기사는 박정희의 현지 기자회견 내용에 「앞으로 4년 위험시기 / 최근의 북괴 무력 동태 경고」라는 제목을 붙인 반면, 김대중의 기자회견에는 「TV 공동토론 또 제의 / 1군 1의원제 선거구 개편」이라는 밋밋한 제목을 달아 박정희가 내세우는 ‘안보 위기설’을 돋보이게 했다. 그리고 특히, 박정희가 유세장에 들어서면서 오른손을 들고 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을 실은 데 비해 김대중은 연단에서 의자에 기대 앉아 그 옆에 서 있는 신민당 운영위 부위원장 고흥문을 상대로 ‘거만하게’ 보이는 표정으로 대화를 하고 있는 모습이 사진에 담겨 있다.
· 「박·김 후보, 마지막 결전 / 어제 부산·광주, 오늘 서울·대구서」(4월 25일자 1면): 선거 유세 기간에 대칭을 이루는 듯했던 조선일보의 기사 제목은 여기서 완전히 박정희 쪽으로 쏠렸다. 검은 바탕에 흰 글자로 세로 7단으로 뽑힌 이 기사의 부제목은 「한 번 더 뽑아주면 부정 일소하고 물러나겠다, 박 후보」이다. 그리고 박정희의 연설 요지에도 「과업 위한 마지막 출마 / 국민 단결 위해 재야인사 기용」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김대중 연설 요지의 제목은 「국방·반공에 독선 부당 / 주월국군 철수, 군복무도 2년」이다.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는 김대중이 4월 17일 전주 유세부터 “박 정권이 종신 총통제를 획책하고 있다”고 주장해온 데 대해 박정희 자신이 투표일을 사흘 앞두고 강하게 부정한 말을 부각시킨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디어(‘이번이 마지막 출마’-인용자)가 조선일보에서 나왔다는 게 흥미롭다. 박정희는 이미 군정 초기부터 당시 조선일보 사장 방일영의 집을 찾아가 사적인 교류를 가질 만큼 조선일보와는 가까웠는데, 박정희와 조선일보의 상부상조(相扶相助) 관계는 70년대 내내 지속된다. 조선일보 회장 방우영이 자신의 자서전 <조선일보와 45년>에서 밝힌 말을 들어보자.
“박 대통령의 부산 유세를 앞두고 이후락 실장이 본사를 찾아와 환담 중에 ‘결정적 묘안이 없느냐’고 물었다. 이때 최석채 주필이 ‘3선만 하고 더 이상 안 하겠다고 국민 앞에 공약을 하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인지 박 대통령은 부산 유세에서 처음으로 국민 앞에서 ‘이번만 하고 다시는 여러분께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박정희가 단지 말만 한 건 아니었다. 한 편의 신파극을 연출했다. 그는 4월 24일 부산 유세에 이어 25일 서울 유세에서는 눈물까지 흘리며 “더 이상 여러분들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라고 호소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말은 사실이었다. 김대중의 폭로 그대로 박정희는 이후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유신으로 국민의 투표권을 아예 박탈해버렸으니 말이다(<한국현대사산책-197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3, 139~140쪽).


조선일보의 두루뭉술한 대선 관련 사설들

조선일보가 4월 10일자부터 25일자까지 내보낸 대통령선거 관련 사설들은 지극히 상식적인 주장이나 ‘민주주의 원론’ 또는 공명선거 등을 소재로 삼고 있었다. 제목만 보아도 그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 「여야 후보의 대도시 유세」(4월 10일자)
· 「선거운동 과정의 공명성」(4월 14일자)
· 「선거전과 경제질서」(4월 17일자)
· 「공명선거에, 오해 살 짓은 삼가라」(4월 18일자)
· 「앞으로 1주일」(4월 20일자)
· 「종반전의 국민 참여의식」(4월 23일자)
· ‘공무원의 몸가짐’(4월 24일자)
· 「선거의 의의를 되새긴다」 「선거질서를 마지막까지 지키라」(4월 25일자)
· ‘제7대 대통령 선택의 날, 오늘의 상황을 냉정히 판단한 한 표를」(4월 27일자)

위의 사설들 가운데 그래도 공명선거를 해치는 관권 개입을 거론한 4월 18일자 사설을 보기로 하자.

화창한 4월이다. 창경원의 ‘밤 벚꽃놀이’도 15일부터 그 막이 열렸고, 온갖 꽃들이 만발하여 이 강산을 화려하게 수놓게 될 날도 눈앞에 다가왔다. 앞으로 얼마 동안 꽃을 찾는 행락 상춘객들이 떼를 지어 산야와 고적, 유원지로 몰려갈 것도 예년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 그런데 일부 측이 정치적 이유로 이러한 봄놀이를 강제하려는 낌새를 보이고 있는 것은 여간 유감된 일이 아니다. 보도에 의하면 서울시에서는 일요일인 오늘(18일) 각 과별로 야유회를 계획케 했다 하며, 서울시내 많은 국영기업체들에서도 이날 봄놀이 혹은 야외 운동경기를 위한 스케줄을 짜게 했다는 것이다. 오비이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우연’이 일치된다. 이 날이 신민당 대통령후보의 서울 유세일이란 데서 억측을 가한다면 공무원들로 하여금 야당 유세를 못 듣게 하려는 의식적인 야유 계획이 아닌가 하는 오해의 여지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가 없다. 이날 서울시내 몇몇 보건소가 전례 없이 관내 다방 및 그 밖의 접객업소에 대해 업주와 종업원 등을 일정한 장소에 집합토록 하고 있는 처사 역시 이러한 오해를 더욱 짙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라 할까. 백 국무총리는 관하에 지시를 내려 “신민당의 서울 유세일인 18일에는 모든 관공서나 기업체가 휴일 근무를 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했고, 서울시에서도 17일 긴급지시를 통해 각 과별로 계획하고 있는 야유회 등이 자연발생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이를 중지하라고 관하 각 기관에 명령했다는 것이다. 시민 일반의 오해를 막고 공명정대한 선거 분위기를 끝까지 유지시켜야 한다는 입장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지시들을 내렸다는 것은 늦게나마 잘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공휴일인 18일에 야유회다, 특별근무다 하는 계획을 세운 관공서나 기업체 중에는 물론 전혀 타의가 없는 스스로의 의사에서 한 것도 많을 줄 안다. 그러나 대통령선거전이 종반에 접어들면서부터 점차 고조되고 있는 이때 하필 야당 유세가 있는 휴일을 택하여 그런 계획을 세웠다는 것은, 외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는 목적에서라 하더라도 외를 따는 오해를 유발하게 되기 십상인 것이다. 그 중에는 중간간부들이 과잉충성을 하기 위해서 그런 계획을 세운 기관이나 기업체도 없지 않을 것이라면 그 밖의 모든 선의의 계획까지 한속내로 비치고 말 것이란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적어도 공무원이나 국영기업체의 직원쯤 되면 이번 선거에 어떤 태도로 임할 것인가는 이미 마음속으로 작정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의식분자들을 대상으로 앞서 적은 것과 같은 얄팍한 계획을 짠다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어리석은 짓이다. 앞으로 공명선거에 오해를 살 모든 일들이 없기를 거듭 당부해두고 싶다.

이 사설은 독자들을 우중(愚衆)으로 여기는 ‘작문’의 표본 같다. 사설의 앞부분을 ‘봄날의 꽃놀이’에 대한 감상적 문장들로 채운 뒤 ‘억측’을 전제로 거론한 것이 “공무원들로 하여금 야당 유세를 못 듣게 하려는 의식적인 야유 계획”이다. 그러나 국무총리 백두진이 그런 일이 없도록 하라고 ‘지시’한 것이 다행이라는 점을 위의 사설은 강조한다. 결론 부분에서는 “공무원이나 국영기업체의 직원쯤 되면 이번 선거에 어떤 태도로 임할 것인가는 이미 마음속으로 작정하고 있다”고 단정하면서 그런 ‘의식분자들’을 대상으로 “얄팍한 계획을 짠다는 것은 더할 수 없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나무란다. 박정희 정권의 서슬이 퍼렇던 1971년 4월에 공무원들과 국영기업체 직원들이 공명선거 의식에 투철해서 상급자의 ‘야유회 참가’ 지시를 거부할 수 있다고 믿는 국민이 과연 있었을까?


‘정권을 훔친 박정희’

4·27 선거 개표 결과, 박정희는 총유효투표의 53.2%인 6백34만여 표를 얻어 5백39만여 표(45.3%)에 머문 김대중보다 94만여 표를 앞선 것으로 드러났다.

4월 30일 재야단체인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대선에 대한 성명서를 통해 4·27 선거는 “‘유례가 드물 만큼 행정조직과 금력에 의해 지능적으로 치밀하게 계획된, 원천적 부정의 토대 위에서 실시’된 선거라고 평가했다. 선거가 평온을 유지한 것은 단지 행정력에 의한 치밀한 부정 계획의 결과였을 뿐이라는 것이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565쪽).

강준만은 <한국현대사산책-1970년대편 1권>에서 제17대 대통령선거를 다룬 장(章)의 제목을 ‘정권을 훔친 박정희’라고 붙였다. 아래 인용하는 글에 그 이유가 자세히 나온다.

(…) 선거가 끝나고 박정희는 94만여 표밖에 차이 나지 않은 것에 대해 “하마터면 정권을 도둑맞을 뻔했다”고 말했다지만, 정작 정권을 도둑맞은 건 김대중이었다.
1971년 국가예산은 5천2백42억 원이었는데, 박정희는 이 선거에서 국가예산의 10%가 넘는 6백억~7백억 원을 썼다(6백억 원은 김종필, 7백억 원은 강창성의 증언). 입석버스 요금이 15원, 연탄 한 장 20원, 커피 50원, 정부미 80kg이 7천 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지금 기준으로 따지면 조(兆) 단위를 넘는 엄청난 돈이었다.
박 정권은 대선 자금을 위해 한국에 진출해 있는 미국계 기업들에게서 약 8백50만 달러를 거두어 들였다. 여기엔 거대 석유기업인 칼텍스사가 제공한 3백만 달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박정희에게 정치헌금을 내고 한국의 거대한 석유산업을 사실상 집어삼켜 버렸다. (…)
(…) 심층취재로 박 정권의 부정선거를 폭로한 거의 유일한 기사는 울산의 개표 부정을 다룬 대구 <매일신문> 5월 1일자와 6일자 기사였다. 울산 주재기자 한종오는 자신이 개표장에서 본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 데에 의심을 품고 취재를 한 결과 울산시장이 중앙정보부의 지시를 받고 투표 결과를 조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당시 신민당의 울산 지구당 위원장이었던 최형우도 울산·울주 지역의 개표 결과를 보고 경악했다.
“각 투표함마다 김대중 후보 지지표가 10표를 넘지 않았다. 내가 살고 있던 우정동의 경우 집안 식구들의 것만 합쳐도 12표였고 친척들과 친구들의 것을 합치면 1백표가 훨씬 넘었다. 그런데도 김대중 후보 지지표가 집안 식구들 숫자에도 못 미치는 7표밖에 나오지 않은 것이었다. 개표 부정이 얼마나 심했으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인가. 분노 이전에 수치심으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최형우, <더 넓은 가슴으로 내일을>, 깊은 ᄉᆞ랑, 1993, 62쪽). (이상은 강준만의 위의 책, 135~139쪽에서).

박정희의 대통령 당선이 발표되자 조선일보는 4월 29일자 2면에 「박 대통령의 3선 확정」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 먼저 우리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의해서 떳떳이 투표를 통하여 국민 절대 다수의 신임을 획득한 박정희 대통령에게 아낌없는 축하를 보내려 한다. 당선의 기쁨은 앉아서 수월하게 얻은 것이 아니라, 지난 10년간의 집권실적을 엄숙히 심판 받는 치열한 선거전을 치렀고 전국을 누비면서 마지막 임기가 될 4년간의 집정공약을 되풀이 다짐한 끝에 안겨진 승리의 영광이란 데서 더욱이 보람 있는 순간의 감격은 값있는 것이다. (…) 이번 선거가 다소의 말썽은 있었고, 또한 앞날의 민주 궤도를 위해 반성해야 할 여러 가지 문제점을 제기하곤 있지만, 그래도 과거에 경험했던 거의 절망에 가까웠던 혼란한 선거전의 면목을 어느 정도 일신시켜 만족하다 할 수는 없으나 우리 선거풍토에 일보 전진의 도표(道標)를 세우게 한 것만은 틀림없고 그럼으로써 국민의 참여의식을 적극 고취했다는 데서 선전분투한 공화·신민 양당의 당직자들을 비롯, 많은 선거 관계자들의 노고를 우리는 높이 평가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 중대한 민주과업에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한 대다수 유권자들의 현명한 주권의식과 올바른 주권 행사를 찬양해 마지않는 바이다.(…)
(…) 민주주의는 다수결에 복종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는다. 박 대통령을 지지한 절대 다수표는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박 대통령을 지지하ㅈ; 않았던 그 많은 표도, 마찬가지로 이 나라의 엄연한 주권자인 것이다. 선거에 의해서 당선된 공직자는 자기를 지지해준 국민만의 공직자가 아닌 것이고 전 국민에 봉사할 공직자인 것이며 또한 박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해도 당락이 판명된 그 순간부터는 전 국민이 그를 지지하고, 그를 지도자로 하는 우리 공동운명체의 영위에 추호의 간극이 있어서도 안 될 것이다. 선거 전의 과정에서는 있는 힘을 다하고, 할 말을 다해서 정권투쟁을 했더라도 일단 선거가 끝나면 깨끗이 정상적인 사회로 돌아가 같은 운명 밑에 단결하여, 보다 튼튼하고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노력하는 민주주의의 슬기를 이젠 발휘해야 할 때다. 주권자의 사명은 정말 이제부터다. 위대한 승리는 막중한 책무를 짊어지는 것이고, 위대한 패배는 막대한 채권을 갖는다고 한다. 이 격언이 어김없다면 불을 뿜던 제7대 대통령 선거전의 열매는 지금부터 여야 양당의 협조와 전 국민의 공동보조로써만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원칙에 의해서 떳떳이 투표를 통하여 국민 절대 다수의 신임을 획득한 박정희 대통령” “중대한 민주과업에 유종의 미를 거두게 한 대다수 유권자들의 현명한 주권의식과 올바른 주권 행사” 같은 이 사설의 표현은 당시 대통령선거 결과가 관권 개입과 ‘부정한 개표’ 등으로 좌우되었다는, 야당과 재야단체들의 주장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그리고 선거 유세 현장과 투·개표장에서 취재를 했을 조선일보 기자들이나 선거전을 주의 깊게 지켜본 독자들은 이 사설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치 정부기관지에 나온 글 아니면 계엄령 아래서 검열을 받으며 작성한 논설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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