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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채 주필 시기’의 조선일보 (2)조선일보 대해부 3권 -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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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2.13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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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이 저물어가면서 정치권에는 정체불명의 유언비어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박정희가 3선 개헌을 준비 중”이라는 것. 당시의 여론으로 보아 3선 개헌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이승만이 3선에 이어 종신집권을 꾀하다가 시민혁명으로 권좌에서 추방당한 지가 불과 10년이 채 안 되는 시기였다. 그런데도 소문은 끊임없이 나돌았다.


조선일보, 박정희의 3선 개헌에 무릎 꿇다

그러다 해가 바뀌면서 박정희는 1월 6일 연초 비서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어떤 정부라도 장기집권을 할 때 가장 무서운 부작용으로 일어나는 것이 타성”이라며 장기집권 의지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또 “자유당 때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들이 잘 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만 장기집권에서 오는 타성을 극복하지 못해 국민을 비관시켰던 것“이라고 부연해서 설명했다.

한편 같은 날 민주공화당 사무총장 길재호는 현행 헌법의 미비점을 보완해서 개정하기 위한 문제가 여당 내에서 신중히 검토되고 있다는 비공식 발언을 했다. 이어, 이튿날인 7일 당의장서리 윤치영은 사견(私見)임을 전제로 “필요하다면 대통령의 2차 이상 중임 금지 조항까지 포함해서 개헌문제를 연구할 수 있다”고 기자회견에서 발표했다. 북한의 도발위협 속에서 경제건설의 가속화를 위한 정치적 안정의 극대화를 위해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1969년 1월 8일자 조선일보 사설(「장기집권의 타성」)

박 대통령이 6일에 열린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장기집권에서 생기는 타성을 막지 못하면 무서운 부작용이 생긴다”고 경고했다고 알려졌다. 그리고 “타성은 결과적으로 국민과 정부를 이간시키며 정부와 국민 사이에 거리감을 만들어…정부와 국민이 따로따로 가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타일렀다. 그뿐더러 청와대에 대한 국민의 신망에도 언급, “청와대는 국민의 모든 희망과 여망이 걸려 있는 만큼 항상 청신하고 국민에게 희망을 갖도록 새롭고 건전한 집무자세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이 신년 초부터 이렇듯 심각한 자기반성을 이 나라의 ‘법과 권력’의 중심인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에게 촉구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흐뭇한 감명과 함께 커다란 의의를 부여하고 싶다. 우리가 금년의 ‘연두사’에서 솔직히 지적한 바 있듯이 이 나라 권력의 정점인 박 대통령의 굳센 지도역량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크면 클수록, 왕성한 사명감을 가진 지도자가 흔히 빠지기 쉬운 자기 과신 내지 자신 과잉에서 자칫 그 발밑을 들여다보는 현명을 게을리 했을 때 닥쳐올 국가운명의 향방을 심려하기 때문이다. 장기집권하면 타성이 생기게 마련이요, 그 타성의 내용이 어떤 것이든 그것이 바로 잡히지 않는 한 ‘국민을 비관시키게 되는 것’은 박 대통령이 술회한 그대로 동서의 역사상 예외를 볼 수가 없다. (…) 이미 8년이 가까운 집권기간이 흘러 ‘장기’라는 관사를 붙여도 좋을 박 대통령이 스스로 ‘타성’을 자계(自戒)하는 그 마음가짐이 우선 그지없이 믿음직스럽다.
박 대통령의 이러한 집권 자세를 더욱 구체적으로 반영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몇 가지 제언이 있다. 첫째, 기회 있을 때마다 주장해온 터이지만, 만성화한 부정부패의 발본색원 방책을 강구해야 할 때다. 새삼스럽게 지적할 필요도 없이 이 나라의 고질이요, 더구나 근래에는 분별없는 신흥귀족들의 국민의 눈을 거리낌하지 않는 사치풍조가 날로 달로 극성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제2경제’가 벌써 한낱 구호로 공전하고 있는 듯한 현실은 실로 한심함을 넘어 두렵기조차 한 것이다. “공포분위기가 부패분위기보다 낫다”는 말이 공산주의자를 비판하기 위한 임기응변의 재담일 수는 있어도, 부패의 만성화를 합리화해 줄 수는 없지 않겠는가. 둘째, 부익부 빈익빈의 타성을 바로잡아야 하겠다는 요망이다. 자본 축적을 위해서 부득이하다는 입론도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 누군가가 풍자한 것처럼 “다 떨어진 창문을 통하여 아름다운 조국을 보는 것도 불행이요, 화려한 궁전에 앉아 다 찌그러진 조국을 바라보는 것도 불행한 일”이다. 저임금·저소득층의 확대와 중산층의 계속적인 몰락은 전 국민의 동질성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오며 빈한층의 부유·권력층에 대한 ‘저들 의식(意識)’이 커지면 커질수록, 박 대통령이 염려한 ‘정부와 국민이 따로따로 가는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은 크게 증대된다 할 밖에 없는 것이다.

조선일보는 박정희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에서 한 지시를 믿고 이러한 사설을 쓴 것으로 보인다. ‘장기집권의 타성’이란 표현은 개헌의 야망을 호도하는 전형적인 기만술책이다. 개헌공작의 추진주체가 자기 자신뿐인데도 이것이 미리 알려지면 혼란이 올 것을 염려하여 마치 장기집권 의사가 추호도 없는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박정희는 이어 2월 4일 “국민들이 개헌에 대해 설왕설래하기 전에 공화당 간부들이나 소속 의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자진해서 찬반양론을 얘기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런 지시는 전날인 3일 공화당 의원총회가 개헌문제에 대해 찬반토론을 벌였다는 원내총무 김진만의 보고를 받고 내린 것이다. 그의 지시는 자세히 뜯어보면 “개헌은 한다”로 해석된다. 공화당 국회의원들에게 “어찌 감히 개헌문제에 대해 찬반토론을 하느냐, 개헌은 내가 결정하는 일이니 너희들은 입 닫고 있으라”라는 의미가 담긴 지시를 보낸 것이다.

야당인 신민당(대표 유진오)은 박정희의 2·4 발언에 충격을 받아 10일 “3선 개헌저지 범국민투쟁위원회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그리고 이민우 등 33명의 의원 공동명의로 3선 개헌 문제에 관한 질의서를 청와대로 보냈다. 그는 10일 이 질의에 대하여 “지난 1월 10일의 연두기자회견에서 밝힌 소신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답변서를 보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다시 말하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적어도 본인의 임기 중에는 이 헌법을 고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본인의 솔직한 심정이다. 그러나 국민이나 국회의원이 꼭 개헌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손 치더라도 지금은 그 때가 아니라는 것을 밝힌 바 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헌법 개정의 권한은 국회의원 여러분과 국민에게 있는 것이며, 대통령인 본인은 다만 헌법개정안의 공고와 확정된 헌법을 공포하는 권한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이 답변서에서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며 개헌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음을 내비친 것이다.


‘신문의 날’을 맞아 ‘편집의 자주’를 주장

당시의 정치는 박정희의 지시를 받은 중앙정보부가 하는 것이고 공화당은 정보부의 하수인 역할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특히 정보부의 언론통제는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정보부는 직원을 언론사에 상주시키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일선 취재기자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남산(중앙정보부 서울분실의 별칭)에 불려가는 일’이었다. 정보부는 연행한 언론인들을 지하실로 끌고 가서 무조건 두들겨 패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래서 언론사 간부나 기자들은 기사에 대한 자체 검열을 하기 일쑤였다. 중앙정보부의 노골적인 언론통제 방법이 효험을 발휘한 것이었다.

중정의 언론통제 방법으로는 이밖에도 기관원의 언론사 출입과 정보 수집, 보도지침의 하달 등이 있었다. 그리고 간부들에게 일정한 ‘촌지’를 정기적으로 지급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중정은 1965년부터 언론 통제를 위한 기초작업으로 주요 일간지 논조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했다고 한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국정원 측은 많은 자료를 소각했는데, ‘진실·화해위’ 조사에서는 조선일보 논조를 분석한 문건이 발견되기도 했다.

신문사가 ‘편집의 자주’를 말한다는 것은 자주가 없다는 뜻이다. 당시의 신문은 자주롭지 못한 신문제작을 하면서도 신문의 날을 맞아서는 자주를 주장했다.

1969년 4월 6일자 사설(「신문의 자주성 / 제13회 신문주간에 즈음한 우리의 자성」)

4월 7일은 제13회 ‘신문의 날’, (…) 과연 독립신문 이래의 전통적인 정신이 건전한가, 어떤가를 우리는 이때 다시 한 번 자성해볼 알뜰한 계기로 삼아, 올해 신문주간을 결코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은 심정이다. 솔직히 말해서 근래의 한국 신문은 어딘지 모르게 생채(生彩)를 잃어가고 있다는 독자들의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
(…) 굳이 변명의 자료로 내세우는 것은 아니나 신문도 하나의 기업이요, 기업인 이상 최근 수년래의 근대화 물결에 초연할 형편은 못되었다. 오히려 시대의 첨단을 걸어야 하는 매스미디어로서의 모든 시설 확충이 급선무였고, 따라서 급격한 기업화 과정이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경영의 합리화를 위한 자체 정비가 끽긴(喫緊)의 과제였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 같은 전환기에 처해서 우리 스스로 의식했건 못했건 간에 신문의 본질인 ‘사회의 공기’로서의 기능에 만족할 만한 향상을 기하지 못한 데서 오는 독자의 비판을 면할 길 없어졌다. 무엇보다도 눈부시게 발전하는 사회변동에 적응할만한 지면의 제공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모든 사실을 알리고, 활발한 비판을 가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기에 무척 애로를 수반했다. 올해 신문 주간의 슬로건으로 ‘신문의 자주’를 내건 것은, 우리 스스로 오늘의 신문계의 병리를 진단한 결과 다른 어떤 것보다도 신문경영의 자주성, 편집의 자주성이 더욱 확보되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주’는 밖으로부터의 어떠한 영향도 받지를 않는 독립체로서의 자율적인 자세를 의미하는 것이고, 신문의 자주란, 신문의 실질적인 주인공인 독자의 광범한 의사, 그 의사를 섭취 정리하여 가치체계를 세워야 하는 편집권 행사의 자율, 또는 그것을 뒷받침하는 경영의 자율 등 모든 독립성을 포함한 ‘신문의 자주’인 것으로 우리는 믿고 있다. 언론의 자유란 민주주의 기본명제요,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도 없이 민주정치를 가능케 하는 핵심적 권리이기도 한 것이다.

이 사설은 위에서 언급한 중앙정보부의 언론통제에 대한 항의성 글이다. 그러나 구렁이 담 넘어가듯 변죽만 울리고 있으니 독자가 그 깊은 뜻을 제대로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경영의 자주는 윤전기 도입과 신문 용지의 수입에 대한 자주를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당시에는 정부나 신문협회의 추천이 없으면 윤전기와 신문용지의 수입이 불가능했다. 신문협회는 늘 정부 기관지인 서울신문 사장이 맡고 있어서 정부의 입장을 대변할 뿐이었다. 근대화 바람에 기업은 날로 발전하며 광고 물량이 급팽창하던 추세여서 신문사의 입장에서는 고속윤전기와 증면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그러나 정부는 8면이 넘는 증면을 허가하지 않았다. 편집의 자주는 편집 간섭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정보기관원이 언론사에 상주하며 편집권을 행사하던 시절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이런 사설이 게재되었다는 것은 논설위원실의 분위기가 워낙 험악하여 정보당국자도 막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거나. 아니면 기관원이 원고를 검열하고 나서 “이 정도는 괜찮겠다”는 판단이 섰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공개적 개헌논의를 촉구한 조선일보

박정희는 4월 26일 북한에 의한 미군 정찰기 격추사건을 빌미 삼아 돌연 기자회견을 갖는 자리에서 “개헌은 안 했으면 하는 심정에는 변함이 없다. 헌법을 고치려면 정당한 이유가 필요하다”며 개헌 추진 의사를 공론화했다. “개헌은 이미 정국의 큰 이슈로 부각되었다. 이 문제에 대한 견해를 밝혀 달라”는 질문에 그는 “헌법이란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안 고치는 게 좋다는 생각이다. 내 임기 중에는 헌법을 고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라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이날 대통령의 기자회견에 관한 사설을 실었는데, 제목은 「신중한 대북 경고 / 박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사설은 박정희의 대북 경고의 정당성만 잔뜩 늘어놓고 개헌 부분은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다만 본문 안에서 ‘개헌문제’도 언급했다고만 표현했다. 조선일보는 이때까지도 개헌문제에 관한 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가타부타 의사 표시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경영상의 이유인지,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를 당시의 독자는 알 수 없었다.

친일파인 윤치영은 해방 후 한민당에 관여하다가 이승만의 귀국 이후에는 자유당, 그리고 박정희 군사쿠데타 이후에는 민주공화당원이 된 전형적인 철새정치인이었다. 그는 1968년에 공화당 의장 서리가 되었는데 아마 그의 입을 통한 개헌 공론화를 노린 박정희 술수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사견’임을 전제로 ‘개헌 불가피론’을 제기하자 조선일보는 그동안의 침묵을 깨고 “개헌하겠다면 떳떳하게 나서라”라며 ‘사견론’을 경솔하다고 반박했다.

1969년 5월 9일자 사설(「부질없는 개헌 논의」)

(…) 물론 헌법이라고 해서 절대로 손을 대서 안 되는 터부처럼 경원할 필요는 없다. 발전하  는 국가의 보다 나은 여건 형성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면 헌법인들 고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개헌발의권을 법적으로 막을 도리는 더욱 없다. 한데 문제를 그와 같은 법률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차원에서 논할 때 개헌에 관한 요즘의 정계 일부 동향은 어딘지 모르게 초조한 것 같은 느낌을 던지며 때와 장소를 가려 떳떳하게 소신을 내세우는 분별이 아쉬움을 아니 느낄 수가 없다.
(…) 그러나 집권당인 공화당의 경우는 다르다. 그야말로 당당하게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에 의한 이른바 ‘공화당 발의’라면 모르되, 이미 그러한 검토 단계를 지나서 당의 최고영도자인 박 대통령이 공식기자회견을 통해 “개헌문제보다 더 중요한 당면과제가 산적되어 있어 귀중한 시간과 정력을 낭비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서, 우리 당에선 공식적인 거론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천명했는데도 불구하고, 당의장 서리라는 중책을 지닌 사람이 비록 ‘사견’이라고는 하지만 자청한 기자회견 석상에서 제법 구체적인 거론을 하고 있다는 것은 정치적 양식에 어긋나지 않을까 하고 우리는 본다. 첫째는 당 총재의 지시 위배요, 둘째는 부질없는 물의를 일으켜 박 대통령이 영도하는 집권당에 대한 국민의 이미지를 흐리게 할 요소가 적지 않은 것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지금은 개헌 운운의 시기가 아니라, 긴박한 국제정세에 대처할 국가안보체제 확립에 국민들의 신경은 매우 민감해져 있는 것이다. “지금 그런 문제를 논할 시기가 아니다”라고 한 박 대통령의 담화에 대다수 국민이 공감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점 윤 서리의 발언은 경솔하다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 개헌문제를 거론할 절대적인 필요성과 거론해도 좋을 시기가 도달했다고 공화당이 판단했을 때 개헌논의의 정도를 걸어 국민의 활발한 비판을 받도록 권고한다.

조선일보는 이때부터 사실상 개헌 지지 쪽으로 방향을 튼 것 같다. 이 무렵 대학가에서는 ‘3선 개헌 반대데모’가 격렬하게 벌어지기 시작했지만 조선일보는 데모 상황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개헌문제를 다시 사설로 다루다

3선 개헌 추진운동이 박정희의 “개헌 하려면 정당한 이유 있어야” 발언(4월 26일 기자회견) 이후 공화당을 중심으로 교묘하고 강력하게 벌어지고 있는 것과 달리 야당과 대학생들은 더 적극적인 반대운동을 일으켰다. 그 동안 침묵하던 조선일보는 7월 초 박정희가 신민당 당수 유진오의 질의에 대한 답신의 형식을 빌려 ‘개헌문제’를 언급하자 이를 사설로 받았다.

1969년 7월 9일자 사설(「개헌 논의의 일보 전진」)

유 신민당 당수가 박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서한과 이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박 대통령이 7일 오후에 밝힌 공식 담화는 개헌문제를 둘러싼 최근 일련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중요한 포석으로서의 기록을 남겨놓은 셈이다. (…) 헌법상 개헌의 발의권이 국회와 국민에게만 부여되어 있고, 정부에 의한 발의권이 없는 이상, 행정수반으로서의 박 대통령은 개헌의 절차나 개헌 과정에 있어서의 정부의 의무와 책임을 냉정하게 헌법조문 그대로 ‘헌법 풀이’를 했을 뿐이며, 단지 “국민의 개헌에 대한 찬반의 의사 표시는 자유지만, 폭력적이거나 불법적인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부연하여 간접적이나마 지난달 하순부터 일어났던 대학생들의 데모에 대한 정부의 강경한 방침의 일단을 시사했다는 데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
(…) 우리가 일찍부터 지적해온 바 있듯이 개헌이란 중대 이슈는 그것을 원하는 측이나 원치 않는 측이나 간에 다 같이 암중모색의 선에서 헤매어왔고, 실상 쉽게 개헌문제를 표면화시키기에는 우리의 참담한 정치사나, 지금의 정치여건이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에 이상과 현실에 끼어 주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직선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학생들과 정치가의 입장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점 경위야 어찌 되었든 간에 개헌논의에 관한 ‘터부의 장막’을 걷어 올리게 만든 유 총재의 공개서한이나, 박 대통령의 공개답변은 어차피 한 번은 치러야 될지 모르는 개헌 파동을 향해서 일보 전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개헌저지투쟁을 위해서 그것이 플러스가 될는지, 마이너스가 될는지 후일의 역사가 평가할 일이지만, 신민당의 저지투쟁 전술에 근본적인 재검토가 가해져야 할 것이라는 것만은 지적해 두고 싶다. 특히 개헌에 대한 찬반의 의사 표현은 자유지만, 폭력적이거나 불법적인 것을 용인 않겠다는 박 대통령의 표명은, 물론 그것이 행정부의 수장으로서는 충분히 예측되는 답변이긴 하나 금후의 사태에 대한 정부의 확고한 기본방침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고 보고, 개헌문제에 큰 관심을 가진 국민들에게 심각한 음미(吟味)의 소재가 될 것이다.

조선일보는 이 사설에서 박정희가 앞으로 학생들의 개헌반대운동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과 신민당의 개헌저지투쟁은 이제 지양해야 할 것이라는 두 가지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야당이나 학생들은 개헌반대투쟁을 접으라는 권고인 셈이다. 사실상의 개헌 지지 입장을 다시 한 번 밝힌 글이다.


박정희, “국민투표 해서 개헌안 부결되면 당장 정권 내놓겠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 이후 중대 현안을 놓고 야당이나 학생들의 반대가 치열해지면 의례히 ‘국민투표’ 카드를 꺼내기 일쑤였다. 그는 7월 25일 돌연 특별성명을 발표해서 국민을 놀라게 했다. 특별방송을 통해 발표된 특별담화는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될 때는 곧 나와 나의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임으로 간주하고, 부결될 때는 국민으로부터 불신임을 받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곧 나와 나의 정부는 즉각 물러나겠다”는 폭탄선언이었다. 그는 동시에 야당의 합법적인 개헌반대운동, 정부의 공정한 국민투표 관리 등 7개 항목을 여야 정치인들에게 제안했다.

조선일보는 박정희의 이런 발표가 나오자 바로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사설을 게재했다. 이런 반응은 당시의 조선일보 생리로 보아 이례적이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신속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1969년 7월 26일자 사설(「정권을 건 중대 결의 / 박 대통령의 7·25 특별담화가 뜻하는 것」’)

(…) 박 대통령이 이러한 이례적인 태도 표명을 함에 이르기까지 심리과정을 박 대통령의 특별담화 가운데서 추려보면 대략 다음과 같은 순서가 된다. 1)헌법은 되도록 고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박 대통령 자신의 생각과, 굳이 개헌의 거론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연말이나 내년 초에 가서 해도 늦지 않다는 견해를 이미 몇 차례나 명백히 밝혔고 2)그 이유로 개헌 논의가 국가안전과 경제건설에 미칠 악영향을 염려하기 때문이었는데 3)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헌 문제를 둘러싼 열띤 시비의 파문이 사회를 시끄럽게 하고 있고, 특히 야당은 정부 공격에 도를 지나쳐 4)이대로 두었다가는 남은 임기 2년의 정국을 혼미와 암담의 연속으로 몰아 넣고 말 것이 뻔하므로 5)이제 더 참을 수 없어 이왕에 거론되고 있는 개헌문제를 빠른 시일 안에 공화당이 발의해 줌으로써, 국회 결의를 거쳐 국민의 심판을 받아보겠다는 이론 전개인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개헌문제 관련하여 야당에서부터 가해오는 공격이 과연 정당한가, 어떤가를 국민투표에 묻고 만일 이에 패배하면, 국민의 신임을 잃은 이상 깨끗이 정권을 내놓겠다는 중대 결의를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박 대통령의 특별담화와 그의 7개항 제의를 접해서 우리는 매우 침통한 심경에 잠긴다. 우리가 아직 시기상조라고 보아온 개헌 논의가 지난 7월의 제70회 임시국회에서부터 본격적인 이슈로 등장하여 결과적으로 양성화를 촉진시켜, 끝내 4년 임기를 약속하고 국민이 선출한 현 정권의 진퇴를 거는 초헌법적 사태로까지 다다르고 말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든 비정상적인 정치현상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이것을 ‘개헌문제 이전의 정치 윤리의 기본문제’라고 설명하고 있으나 개헌문제와 현 정권의 신임을 전혀 별개 문제로 이해하고 있는 많은 국민들로서는 참으로 당혹할 정치국면에 제회(際會)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1)개헌을 찬성하고 현 정권을 지지하는 국민과 2)개헌을 반대하고 현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의 경우에는 아무런 망설임이 없는 명쾌한 찬반의 의사를 국민투표에 표시할 수 있겠으나 3)현 정권은 지지하되 개헌은 원치 않는 국민, 또는 그와 반대의 경우는 이론상 혹 있을지도 모르는 4)국가장래를 염려해서 개헌에는 찬성하나 현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 국민들은 ‘개헌안의 찬반을 통한 신임투표’에 어떻게 대처함이 가장 애국적이요, 현명한 주권자의 주권 행사가 될지 판단하기가 매우 난처해질 것이다. 더구나 지금 논의되고 있는 개헌 운운도 대다수 국민이 추측하고 있는 대로, 박 대통령에게 3선의 길을 틔워주기 위한 개헌안일 것은 틀림없다 할지라도, 그 개헌안의 구체적 내용 여하에 따라서는 찬반의 태도가 재검토되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렇게 분석할 때 박 대통령의 7·25 특별담화는 제3공화정 발족 이래 최대의 정치적 난관에 대결해 보겠다는 혁명가다운 비상한 결심의 피력인 동시에, 우리 국민에게 5·16 혁명 당시에 못지않은 새로운 정치관의 확립을 요구하는 중대한 시련이 과해졌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 사설은 제목부터 ‘정권을 걸었다’라는 극단적 표현을 씀으로써 국민을 위협한다는 느낌이 앞선다. 조선일보의 표현대로 ‘초헌법적 사태’는 박정희 스스로 개헌을 강요하기 위해 고의로 도출한 사건이지 결코 국민이 바라는 바는 아니었다.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고, 박정희 자신도 인정하였던 바 개헌에는 찬반운동이 가능한 것인데도 학생들의 반대운동을 탄압하는 정부의 태도는 오히려 비난받아야 할 일이었다.

그는 야당에 대하여 ‘정치윤리’를 말하고 있는데, 정치적으로 패륜한 자는 박정희 자신이었다. 쿠데타가 바로 헌법 파괴 행위이며, 한 번 저지른 죄악은 다시 반복하는 데 큰 고뇌를 느끼지 않는 법이다. 더구나 쿠데타는 총칼로 정권을 빼앗은 악행이기 때문에 자신의 손에서 총칼이 없어지지 않는 한 권력을 스스로 내놓은 예는 역사적으로 드물다.

설사 학생들의 반대운동이 좀 과격했다 하더라도 박정희 식 개헌 추진을 ‘민주주의의 파괴’라고 이해하고 있는 학생들이서 거리로 나가거나 단식농성 등의 행동을 한 것을 외면하는 조선일보의 자세는 온당치 못한 것이다. 결국 조선일보는 박정희의 7·25 담화를 계기로 박정희의 ‘혁명가다운’ 철권통치에 굴복하고 만 셈이다.


경찰, 서울대 법대 도서관에 난입

9월 대학이 개학하자 학생데모는 날로 격렬해져 갔다. 도서관에서 고시공부만 하던 서울대 법대생 60여 명도 9월 1일 오후부터 도서관 2층을 점거하고 “개헌을 하려거든 우리가 다 굶어죽은 다음에 하라”는 「단식 제1선언문」을 발표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75시간 만에 강제해산 당했다. 조선일보는 사흘 뒤 이 사건을 사설로 다루었다.

1969년 9월 6일자 사설(「왜 이래야만 하는가」)

“왜 우리는 이래야만 합니까.” 나흘간의 개헌반대 단식투쟁을 끝내고 기진맥진하여 교수들의 부축을 받아가며 농성장을 떠나던 서울법대 학생들은 이렇게 폐부를 찌르는 절규와 함께 울음보를 터뜨렸다 한다. 단식투쟁을 하던 학생들과 그것을 말려야 하는 교수들은 구수지간(仇讐之間)일 수 없는 사제지간이기에 눈물을 머금고 말리는 교수들이나 울음보를 터뜨린 학생들 간에는 그 때 가슴 아픈 공감의 교류가 있었을 줄 안다. (…)
(…) 그렇지만 오늘날 학생들의 학생운동관에 대해서는 기성세대로서 몇 마디 할 말이 있다. 첫째로, 학생들은 그들의 지성과 신념에 따라 그들의 의사를 명백하게 표시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지난 4·19의 감격과 기억이 아직도 새로워 그럴지는 몰라도, 사회가 학생들의 마음대로 좌지우지된다는 생각은 지양해야 할 줄 안다. 적대관계가 아닌 공동연대사회에서 학생들이 행사하여야 하는 힘은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도덕적 힘인 것이다. 그리고 그 도덕적 힘은 학생들의 명백하고 결연한 의견 표명으로 족히 행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의 주장이 당장 관철될 것 같지 않다고 자포자기에 빠지는 것은 좋게 말해 성급하고, 나쁘게 말해 과대망상이라고까지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며 내일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할 것이다. 역사란 연면한 것이며, 지금의 학생운동은 내일을 위한 오늘의 축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내일을 사는 세대다. 오늘 이 시점에서 누구에게도 굽힘이 없이, 두려움이 없이, 그들의 양심에 따른 주장을 명쾌히 하였다면 그것으로 그들의 사명을 다한 것이며 젊은 세대에게 내일을 기대할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이와 같은 말들이 “왜 우리는 이래야만 합니까”라고 외치는 학생들에 대한 충분한 답변이 될 수 있을지 두렵다. 그러나 고뇌하고 있는 것은 학생뿐만이 아님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이 역사적 순간에 처하여 사회성원 모두가 어떻든 회의하고 고뇌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일보의 사설은 광주학생사건이나 4·19를 격려하던 지난날의 논지와는 모순되는 것이다. 더구나 농성학생들의 강제해산 과정을 보도조차 하지 않다가 며칠 뒤 사설로 다루었다. <서울법대 학생운동사>(블루프린트, 56쪽)는 바로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국일보는 당시의 상황을 소상하게 보도했는데 제대로 기사를 쓸 수 없었던 당시에 또 다른 한 언론은 ‘왜 우리는 이래야만 합니까!’라는 단식학생들의 마지막 선언을 표제로 보도를 하기도 했다.” 여기서 또 다른 언론은 조선일보의 이 사설을 일컫는 말이다.

이 사설의 요지는 한 마디로 말하면 “성명이나 발표하면 그만이지 왜 농성을 하느냐”며 학생들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를 대변하는 글이다.


신민당, 세 의원 변절에 당 해체를 결의

개헌안의 국회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악전고투하던 신민당은 소속의원인 성낙현, 조흥만, 연주흠이 돌연 당명을 어기고 공화당 의원들과 함께 개헌안 발의에 동조 서명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9월 5일 정무회의 결정에 따라 6일 의원 총회를 열고 당 해체를 결의했다. 소속의원 44명 전원으로부터 제명원을 받아 제명 조치하는 한편, 신당 발기 서명을 받고 7일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신민당 해산 결의를 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했다. 한편, 제명조치된 44명의 의원은 새로 신민회로 국회교섭단체 등록을 했고, 변절자 세 의원은 자동적으로 제명되었다.

1969년 9월 7일자 사설(「신민당의 자폭전술」)

신민당은 마침내 당의 해체란 초비상수단을 오늘 소집되는 임시전당대회를 통해 감행할 방침이다. 목적은 순전히 이른바 ‘3 변절의원’이라는 조흥만, 성낙현, 연주흠 세 사람을 국회의 사당에서 축출함으로써 개헌안의 국회 표결 전에 단 한 표라도 저지에 유리한 지보(地步)를 확보해 두겠다는 배수작전인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과 같은 신민당의 처지를 직시할 때, 이미 가타부타의 거론 단계를 지나, 개헌 저지를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릴 수 없는 막다른 길에서 스스로 그 길밖에 없다고 당론이 정해졌다면 우리로서 굳이 말릴 생각은 없다. 죄가 있다면, 억지 양당정치의 이상만 좇아 무소속 입후보 금지니, 당적이탈 금지니 하는 따위의 한국의 정치풍토에 어울리지도 않는 비현실적인 조항을 삽입해놓은 1962년 당시의 개헌작업 자체가 오늘의 화근을 배태시켰다고도 할 수 있다. 더구나 신민당은 개헌을 추진하는 공화당의 해석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하여, 이번 개헌안을 정상적인 정치문제로 인정하질 않고, 민주주의 정신을 뒤엎는 장기집권체제의 강화를 뜻하는 초헌법적인 도전이라고 처음부터 규정하여 당 운명을 건 투쟁을 하고 있는 터이다. 정상적인 상태 하의 헌정 개념을 토대로 한 비판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자폭론이겠지만, 위헌이 아니고 불법이 아닌, 방편적 당 해체라도 감행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이 결코 정도는 아닐지라도 무모한 짓이라고 탓할 수는 없다. 그뿐만 아니라 조·성·연 세 의원이 당론을 무시하면서도 의석에 미련을 갖고 탈당하지 않는 비도덕적인 행동에, 신민당 역시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를 응징하여 당론을 방어하려는 정치도의적인 포석도 되는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와 같은 초토작전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신민당은 심각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재검토해봐야 할 것이다. 첫째, 헌법, 정당법, 국회법 등 관계법규는 오늘의 이와 같은 초비상사태까지 염두에 두고 제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석상 다소의 무리가 수반될만한 대목이 없지도 않은 것이다. 자칫 잘못하여 이 때문에 또 다시 한 파란을 겪어야 할 국면이 벌어진다면 가뜩이나 긴장된 정국에 신민당의 배수의 진이 뜻하지 않은 부작용으로 가열될 우려도 있는 것이다. 둘째로 신민당이 3 의원의 의석을 박탈하는 데 성공한다 해도 과연 그로써 개헌안의 국회 통과를 저지시킬 자신이 서 있는가 어떤가, 그러한 자신도 없으면서 당 해체를 서두른다면 결국 다음의 국민투표 과정에서 신민당은 막심한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비록 물샐 틈 없이 짜인 재건스케줄대로 진행시킨다 해도 당 해체 전과 당 해체 후의 정정이 꼭 일치한다고 낙관할 수만은 없을 줄 안다.

조선일보는 이 사설에서 박정희의 공화당 정권을 민주적 정당으로 인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신민당이 이번 개헌안을 “정상적인 정치문제로 인정하질 않고 민주주의를 뒤엎는 장기집권체제의 강화를 뜻하는 초헌법적인 도전”으로 보고 있다고 비판하는 데서 그 의중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민주주의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장기집권 포석의 3선 개헌안’임을 알고 있었다. 박정희의 3선 개헌 강행은 훗날 ‘유신체제 출현’ 등 영구집권의 시작이었던 것으로 한국현대사는 기록하고 있다. 중립을 표방한다던 조선일보가 이런 사설을 썼다는 것은 한때 강직한 언론인의 표상이었던 주필 최석채가 서서히 변절해 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이런 사설을 쓴 뒤에도 변함없이 중도를 말하며 독자에게 사과 한 마디 한 적이 없다.


개헌안 변칙처리

민주공화당은 1969년 9월 14일 새벽 2시 50분, 야당이 국회의사당에서 농성 중인 가운데 길 건너편 국회 제3별관으로 소속 의원들을 몰래 소집해서 단 몇 분 만에 박정희의 3선 길을 틔워주는 헌법개정안을 변칙 처리했다. 조선일보가 그때 사설을 어떻게 썼는지 살펴보자.

1969년 9월 14일자 사설(「개헌안의 변칙통과」)

개헌안은 14일 새벽 기어코 국회를 통과하였다. 제안서명 의원 수가 118명이었으므로 이보다 4표가 더한 122표의 가표가 나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귀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동안의 물 끓듯한 국론의 소재와 걷잡을 수 없는 정국의 저류로 미루어 볼 때 이토록 공화당계가 단결한 힘을 과시한 것은 역시 5·16 군사혁명 이래의 그들의 연대의식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아 그릇됨이 없을 것이다. 한데 우리가 심각한 환멸감을 아니 느낄 수 없는 것은 적어도 국가운명에 관계되는 역사적 순간이라 해도 좋을 이 중요한 국회 표결이 국회 본회의 장에서 엄숙하게 진행되지 못하고, 엉뚱하게도 제3별관에서 공화당계끼리 따로 표결하는 기상천외의 변칙적 방법으로 처리되었다는 사실이다. 감쪽같이 야당의원들이 모르게 이런 변칙을 감행한 여당이나 실력농성 전술로 저지투쟁을 벌인 야당이나, 모두 제각기 할 말이 있고,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 헌정사상에 또 하나의 새로운 큰 오점을 남긴 것만은 슬픈 일이다. 왜 여당은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한 강자의 입장에서 좀 더 아량과 인내를 발휘 못했는가. 하루 이틀 표결을 연기하여 질서 있는 표결을 위해 야당과 협상한들 그것이 뭐 그렇게 국가대사에 큰 영향이 있겠는가. 또 야당 역시 아무리 ‘민주헌정 수호’라는 비장한 결의 아래 개헌 저지를 위해 싸운다 해도 표결을 못하게 실력으로 대결했다는 사실은 소장파의 설움을 이해하면서도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더구나 지난날의 ‘개헌’과는 달라 최종 심판이 ‘국민투표’라는 더 큰 절차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개헌안인즉, 싸울 대로 싸우고 표결에서 떳떳하게 반대의 의사 표시를 하여 중과부적으로 패배한다 해도 의연히 다음의 결전장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개헌안을 둘러싼 국회에서의 한 고비는 넘긴 셈이다. 그러나 민주원리에 비추어 볼 때 그 표결방법의 유무효는 별도로 치고 실은 이제부터가 더 큰 고비인 것이다. 정부는 국회에서 통과된 것으로 인정하여 개헌안을 빠른 시일 내에 공고함으로써 주권자인 국민의 마지막 심판을 받을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국민투표제도란 원래 간접민주주의의 결함을 보완하기 위한 제도인 것으로 국민이 자신들의 대표란 선량일지라도 모든 것을 백지위임한 것이 아니고, 유보된 중요안건에 한해서는 국민 스스로가 재심의한다는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개헌안은 바로 이애 해당한다. 따라서 국회에서의 표결 결과는 국민투표에 회부하는 필수적 요건은 될지언정, 국민투표를 좌지우지할 힘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회에서 통과되었다고 해서 일이 다 끝난 것처럼 허탈에 빠지거나, 자포자기 할 까닭은 절대로 없는 것이다. 허무하지만 이 시점에서 우리가 엄숙히 다짐하고 싶은 것은 첫째 국민투표 과정의 공정한 진행을 위해서 정부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요구이다. 이에 관해서 다시 우리는 논급할 기회가 있겠으나 우선 자유로운 분위기의 보장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일 것이다. 기탄없이 말해서 야당이 최후일각까지 국회에서 극한적인 저지투쟁을 전개한 것도 이 ‘공정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믿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며, 또 그러한 불신을 살만한 징후가 적잖이 노정되고 있는 것이다. 어시호 개헌반대진영은 새로운 전열을 가다듬어 질서 있는 대국민 설득의 포진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은 비록 약하고 대세를 이기지 못하는 것 같아도 우리 국민의 민주역량이 결코 석일(昔日)의 유가 아닌 것임을 알아야 한다. 둘째로 이제 집약적인 시위의 대상목표이던 국회 표결의 고비를 넘겼다고 보지 않을 수 없게 된 이 마당에서 휴강 중에 있는 각 대학이 조용히 공부할 수 있는 질서가 하루 속히 잡히도록 학원당국과 학생들의 현명을 요망한다.

이 사설의 제목은 ‘변칙통과’이나 본문에서는 ‘변칙처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통과’는 국회법상의 용어이지만 ‘처리’는 그렇지 않다. 사설 필자의 착오인지 아니면 고의성이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조선일보는 국민투표가 좋은 제도인양 기대하지만 박정희의 눈에는 통과의례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도 정부 정책이 국민투표로 부결된 예는 흔치 않았다. 그런데 민주주의 역사가 일천한 이 땅에서, 더구나 군사정권이나 다름없는 박정희 정권 아래서 국민이 박정희를 표로 심판한다는 것은 연목구어나 다를 것이 없었다. 이제 박정희의 출마용 3선 개헌은 확정되었는데, 이 개헌은 제헌 이래 한국 헌정사상 여섯 번째였다. 그 개헌들은 모두가 정권 장악 또는 연장을 위한 것이었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

아무튼 일제강점기에 조선일보가 일제의 폭력 앞에 무릎을 꿇고 식민체제 강화의 일익을 담당해 주었듯이 이제 박정희체제의 일환으로 편입되어 중도 지향의 신문이란 미명 아래 고속성장의 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때부터 조선일보는 한동안 경쟁지인 동아일보와는 상반된 길을 걷게 된다.

1969년 9월 16일자 사설(「야당의 정권투쟁 선언」)

개헌안의 변칙처리에 큰 충격을 받은 야당은 14일 아침 의원총회를 열고 지금까지의 ‘개헌 저지투쟁’을 덧붙여 ‘박 정권 타도운동’을 전개하기로 하는 한편, 원내투쟁의 당면 표적으로서는 이효상 의장에 대한 불신공세를 줄기차게 펴나갈 것을 결의했다고 한다. 그동안 일부 풍설로 나돌던 ‘의원직 사직’과 같은 자폭방법을 피하고, 한 달 후에 다가올 국민투표에서 이 신념을 관철시키기로 했다는 것은 참으로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우리는 본다. 자칫하면 허탈과 자포자기로 흐르기 쉬운 이 시점에서 재빨리 전열을 가다듬어 다음의 회전에 대비하는 야당의 이성을 높이 평가해도 좋기 때문이다. 야당이 14일의 변칙처리에 의한 개헌안 처리를 용납할 수 없다고 선언하여, 그 ‘무효화 투쟁’을 외치고 나선 데는 야당으로서는 충분히 그럴 만한 근거가 있다. 첫째 국회법상에 명문은 없으나 “사람은 두 발로 걸어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회의는 국회 본회의장에서 하는 것이 자명한 법칙이니 굳이 국회법에 그런 규정을 안 두었다 뿐인 것으로, 이 허점을 이용하여 여당계만으로 비밀히 회의장을 옮겼다는 사실, 둘째 국회의장이 야당 총무단에 명백히 “13일은 밤 12시로 자동 산회가 되었고 일요일은 결의가 없으니 개회하지 않는다”고 언명해놓고 감쪽같이 속인 것은 언어도단의 사술이며, 셋째 새벽 기습국회의 근거로 내세운 국회법 제8조 2항은 ‘휴회 중’의 집회에 적용할 조문이지 휴회가 아닌 ‘산회’ 중의 집회에는 얼토당토않은 불법이라는 것, 넷째 비밀리에 표결한 것은 ‘의사공개원칙’에 저촉된다는 점 등을 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14일 새벽의 ‘개헌안 처리’는 ‘불법’이고, 그런 ‘불법처리’에서 통과된 개헌안은 무효라는 주장이다.
물론, 야당이 아무리 ‘불법·무효’를 선언해도 현 정권이 그 말에 귀를 기울일 만한 반성이 있을 것 같지는 않고, 또 법적으로 소송을 제기해도 현실적으로 그러한 법정투쟁에 별다른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야당 스스로가 잘 알고 있을 터이다. 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정치투쟁’에 집중시켜 한걸음 더 나아가 정권타도 운동으로 전진시켰다는 것은 국민의 입장에서 야당이 결코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 것이다. 오히려 지난날 박 대통령의 7·25 담화에서 “국민의 신임을 얻지 못하면 곧 물러나겠다”고 한 선언에 대한 반향에서 신민당 측이 “지금 박 대통령 정부가 물러서도 우리는 곧 정권을 담당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밀겠다”고 점잖은 태도를 보인 것을 대부분의 식자층은 정권투쟁을 목적으로 조직되고 있는 야당으로서는 너무나 송양지인(宋襄之仁)을 발휘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개헌안을 제출한 측도 이번 국민투표가 비단 개헌안에 대한 찬반만을 묻는 것이 아니라 박 대통령과 그의 정부에 대한 신임을 묻겠다고 공언하고 있는데 비추어 개헌안의 변칙처리에 격분하여 야당이 ‘정권 타도’라는 새 기치를 선명히 한 것은 이 점 결과적으로 개헌 찬반에 관한 국민투표의 복잡한 성격에 부(符)를 같이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어차피 올해의 개헌파동은 5·16 이래 불투명한 상태로 대치해 오던 정권투쟁이 이제야 명백한 이슈를 내걸고 국민의 신임을 묻는 본격적인 정권투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舊) 신민당은 이런 중대한 역사적 분기점에 선 것을 깊이 인식하고 한시바삐 당 재건 절차를 서둘러 조그마한 잡음도 없이 일치단결하여 국민의 신임을 획득하도록 필사적 노력을 경주해 주기 바란다. 그것이 바로 합헌적이고 합법적인 정권투쟁의 남은 단 한 가지 방법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이 사설은 그동안 조선일보가 펼쳐온 ‘개헌 불가피론’과 다소 모순되는 논지를 보이고 있다. 물론, 9월 14일 개헌안 변칙처리 이후 여론은 극도로 악화되었을 것이고 조선일보가 이를 모를 까닭이 없다. 그래서 야당의 편에서 정권타도 운동을 지지하는 듯한 태도로 돌아선 것이나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야당 측이 이런 논조를 반길 것 같지는 않다. 야당 스스로가 박 정권이 국민투표에서 패배할 경우 즉각 정권을 넘겨주더라도 이를 받지 않고 제3세력을 지원하겠다는 입장이니 말이다. 아무튼 독자를 우롱하는 글이다.


중앙정보부의 지배 아래 놓인 한국 언론

중앙정보부는 1960년대 중반부터 한국 언론을 통제하기 시작한 뒤 3선 개헌 작업을 ‘무난히’ 마쳤다. 이제 남은 과제는 박정희를 제7대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일이었다.

7대 대선은 1971년 봄의 일이다. 야당인 신민당은 그해 9월 29일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열어 김대중을 후보로 미리 확정했다. 당시의 신문들은 대선 관련 보도를 하면서 야당후보 기사를 1면 머리에 올리지 못했다. 동아일보만이 가끔 예외적 편집을 통해 김대중을 부각시켰다. 박정희는 국가원수라는 미명 아래 늘 1면 머리감을 제공했고, 김대중은 그 아래로 밀려 있었다. 마치 군소정당 후보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 언론은 중앙정보부를 ‘남산(정보부 서울 분실이 있던 곳)’으로, 정보부가 파견한 정보요원을 ‘기관원’이라 불렀다. 기관원들은 매일 아침 기자들의 출근시간에 맞춰 편집국으로 ‘출근’했다. 그리고 편집국장 석으로 가서 정보부로부터 받아온 기삿거리를 보여 주며 “이것은 줄여 달라, 이것은 키워 달라, 또 이것은 쓰지 말라”고 말했다. 이것은 일종의 지시였다. 이에 대해 반발하는 간부는 거의 없었다.

외근하며 일선에서 취재하는 기자들은 너무 우울했다. 열심히 취재를 해서 송고해도 보도되지 않는 일들이 허다해서 불만이 쌓여갔다. 내근기자들은 데스크가 기관원의 협박이나 회유 또는 지시에 너무 고분고분 순응한다고 말했다.

그런 언론통제 상황에서 조선일보는 이례적인 사설 하나를 썼다.

1970년 6월 4일자 사설(「우리의 언론자유」)

이달 하순에 서울서 개최될 세계펜클럽대회를 앞두고 일본대표단 가운데의 한 여류평론가가 이에 찬물을 끼얹는 언동을 자행했다고 전한다. 어떤 인물이 또는 어떤 국가가 서울대회에 참가하거나 말거나, 그 자체는 각각 사정이 있기 마련이기에 별로 대수로운 일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문제는 그 발언의 내용이다.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펜대회 및 자유중국에서 열리는 아시아작가대회에 일본이 참가하기로 한 것은 이들 국가의 언론탄압 피해자들을 더욱 괴롭히는 것”이라 하여 참가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 여류작가의 성분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며, 또한 알 필요도 없다. 다만 외국의 작가나 평론가들 가운데 흔히 우리 한국과 자유중국을 동열에 세워놓고, 지독하게 언론의 자유가 없는 사회로 규정하는 편견이 있다는 소리를 들어오기는 했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비난당해 보기는 근자에 없던 일이라, 한편으론 괘씸하기 그지없고 또 한편으로는 우울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다. 동열이라고 했으나 자유중국의 실태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는 여기서 논외로 해야겠다. 왜냐하면 자유중국과 한국이 다르다고 하면, 우리도 함께 자유중국의 언론이 부자유스럽다는 편견에 동조하는 결과가 될 것이고, 그렇다고 자유중국의 언론정책을 정당화시키자니 자료가 부족해서 억지춘향격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도 우리 한국의 언론실태가 해외의 거울에 그렇게도 추하게 비쳐져 있다면 이것은 참으로 중대한 일이다. 언론이 부자유스럽다는 말은 바로 민주주의사회가 아니라는 동의어로 통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비록 그것이 일부 인사의 편견일지라도 우리에겐 그저 쓴웃음만 짓고 묵살해버리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이야기라 아니할 수 없다.
(…) 한 두 사람의 악의에 찬 한국 중상을 결코 과대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근 외국인의 눈과 입에, 우리의 ‘언론자유’에 관한 평가가 그리 탐탁스럽지 못하게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언론관계자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기초의 존립에 절실한 반성자료로 삼지 않으면 안 되겠다. 때마침 한 편의 시가 던진 파문이 국회에서 여야 대치의 극한상황까지 초래하고 있다. 이 소동이 언론에 대한 탄압이냐 혹은 정권투쟁의 변형이냐 하는 규정은 별개의 명제로 돌리더라도 표면에 나타난 쟁점은 또 한 번 우리의 ‘언론자유’가 해외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호개(好個)의 자료가 될 것만은 분명할 것 같다. 왜 우리의 ‘언론자유’는 이다지도 창피스럽게 살아야 하는가, 한심한 생각에서 저절로 한숨만 나온다.

조선일보는 당시 언론이 정보부의 철저한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런 사설을 썼다. 언론탄압의 실상을 제대로 쓰든가, 아니면 침묵하든가, 양자택일하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지만 그러지 못했다. 일본 평론가가 한국과 자유중국에는 언론자유가 없으며, 그런 나라에서 열리는 펜클럽대회나 작가회의에 참가하는 것은 ‘언론탄압 피해자들’을 괴롭히는 결과가 된다고 말한 것은 옳은 지적이었다. 다만 당시의 국민정서로 봐서 일본인이 그런 지적을 한 것이 유쾌하지만은 않았을 수도 있다. 조선일보의 지적과 같이 “왜 우리의 언론자유는 이다지도 창피스럽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심과 노력이 모아져야 했다.

난세를 제대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불의한 권력과 싸우는 일은 목숨을 거는 위험이다. 그래도 붓을 들고 하루하루의 사초를 작성하는 사람은 권력과 싸우든, 아니면 붓을 던져야 옳다. 조선일보는 최석채가 주필을 맡으면서 나름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잠시로 그친 것 같다. 이제까지 읽어본 조선일보의 사설들 가운데서 직필의 상징인 동호지필(董狐之筆)이라고 칭송받을 만한 글을 찾기는 어려웠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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