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언론역사 조선동아 대해부
‘최석채 주필 시기’의 조선일보 (1)조선일보 대해부 3권 -10장(3)
  • 관리자
  • 승인 2019.02.07 12:38
  • 댓글 0

박정희 우상화에 반대

박 정권은 1966년에 접어들면서 친미세력을 중심으로 박정희 우상화작업에 들어갔다. 박정희는 국내적으로는 한일회담과 월남 파병의 성공으로 친일세력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고, 미국에 대하여는 좌파전향자라는 의혹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친일세력은 그를 중심으로 재결집할 필요를 느꼈고, 그의 우상화작업을 통해 식민치하의 ‘영광과 안녕’을 회복할 구체적 계획을 진행해 갔다. 그 첫 번째 작업이 영화 관람할 때 국가원수인 박정희에게 기립박수를 보내자는 운동을 전개하려고 한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이것을 반대했다.

1966년 3월 29일자 사설(「과불여불급[過不如不及] / 뉴스영화에 기립박수가 다 뭐냐」)

보도에 의하면 문교부는 4월을 예절의 달로 하고, 범국민적인 예절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여 국기의 존엄성, 국가원수에 대한 예절, 아침인사, 공중도덕, 언어정화의 다섯 가지를 여행(勵行)하도록 조처하기로 하였다 한다. 국민에게 예절을 권장하는 일은 메말라가는 세태에 비추어 보더라도 필요한 일이므로 본란은 예절기간의 설정이나 예절지침의 제정 자체는 유익한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번에 문교부가 착상한 실천요강 중에는 우리로서 수긍하기 어려운 사항이 있으니 그것은 극장에서 국기와 국가원수에 관한 장면이 있을 때에는 참석자 전원이 기립 또는 박수로써 경의를 표하게끔 아나운서가 인도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본란은 여러가지 이유로 이러한 실천방도를 발상한 문교부 관리의 사고방식을 크게 나무라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국기와 원수에 대한 경의 표시를 이렇게 획일적·강제적으로 하는 데서 소기의 목적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는 그 자체가 유치하기 짝 없다. 경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면적인 것이지, 마치 “찬성하는 사람은 일어서라”는 식으로 그 표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여야만 목적을 이룩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로 경의 표시 과정과 방법이 소란한 데서 오히려 그 본지(本旨)와는 동떨어져서 형식에만 흐르는 반면에는, 강제기립과 강제박수로 말미암아 경의와는 반대의 감정을 관중들의 마음속에 생기게 할 염려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신체 발육이 덜 된 미성년자의 체구 정도가 앉기에 겨우 적당한 크기의 극장 좌석인지라 성인으로서는 무릎을 돌리거나 가려운 곳을 긁는 데도 옆 사람의 몸을 다쳐야만 가능한 비좁고 어두운 극장 안에서,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서거나 박수를 치는 경우의 소란과 잡답(雜踏)은 그러한 경의 표시 방법이 적당치 못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셋째로 예절을 지킨다는 것은 허례를 신장한다는 것과는 판이하고 정반대되는 일임을 문교부 관리는 망각 간과하고 있음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의 보도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우리의 현행 국민의례 순서가 장황하고 지루한 느낌이 있는 점을 지적하고 그 합리적 간소화 방안이 마련되기를 희망하였다고 한다. 우리는 박 대통령의 그러한 인상에 전적으로 공감을 표시하면서 그러한 생각과는 정반대의 허례허식을 꿈꾼 문교부의 착상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국기와 대통령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는 것은 국민으로서 소망스러운 일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경의 표시가 꼭 박수나 기립에 의하여만 된다는 법도 없고, 또 민주국가의 경우에 대통령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이치도 아울러 생각하면 이러한 기립박수 방법은 문교부가 진정 노리는 성과도 얻는 길이 아닌 동시에, 오히려 대통령을 욕되게 하는 길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점에서는 문교부 관리의 생각은 과잉충성과도 통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저것 생각해보면 모처럼 문교부가 추진 중이라는 예절의 달 행사는 이것을 그대로 실시한다면 오히려 부작용을 생기게 하는 정도가 더 클 것이라고 보이기 때문에 기립박수의 소동을 시행하지 않는 것이 정부로서는 현명한 방법임을 지적해 둔다. 듣건대 정부 내에서도 이론이 있어 곧 철회했다고 하니 만 번 다행이라 하겠으나 문교부에서 그러한 방안을 발상한 당무자의 사고방식 자체가 딱하기 그지없다.

일부 과잉충성 공직자들이 극장에서의 국기 및 국가원수에 대한 ‘기립박수운동’을 전개하려는 데 대해 조선일보가 사설로 반대한 것은 적절한 일이었다. 이것은 민주국가의 정도언론이 가져야 할 기본자세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경쟁지의 주필에게 지면을 내주다

조선일보는 1966년 4월 7일 신문주간을 맞아 5면 전체를 ‘신문윤리강령 특집’으로 꾸몄다. 그 무렵은 박정희가 언론인의 부패를 여러 차례 지적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출입처 내에서는 언론인들에 대한 ‘촌지’ 거래가 난무했다. 특히 지방언론인들의 경우는 그 정도가 심했다. 언론사 경영주들이 자신의 배는 불려도 기자들에게는 월급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런 상황에서 ‘신문의 날’을 맞아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임원진을 개편하는 한편, 1957년 제1회 ‘신문의 날’ 때 제정된 신문윤리강령의 정신을 환기하고 다시 한 번 자체 정화운동을 펼치기로 했다. 조선일보는 이날 생존해 있던 ‘지사언론인(志士言論人) 6명(고재욱, 우승규, 유광렬, 유봉영, 주요한, 홍종인)’의 근황을 소개함과 동시에 5면에 동아일보 주필 천관우의 기고문(「신문윤리강령과 신문의 긍지 / 공중의 신뢰 기초로 ‘정신적 뇌물’조차 거부해야」)을 크게 실었다.

(…) 신문의 위력이라는 것도 굉장할 수가 있다. 런던타임스의 증흥지조(中興之祖) 딜레인이라는 이는 한 번 붓을 들면, 안으로 영본국의 정권이 두려워하고, 밖으로 대륙의 비스마르크가 떨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신문 이외의 사념(邪念)이 없었다. 그가 필정(筆政)을 쥔 30년 동안에 더 타임스는 세계의 신문계에 군림하는 터전이 이룩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무관의 제왕’이니 ‘사회의 목탁’이니 해서 신문이 대소고처에서 천하를 질타하던 시대는 지나갔다고들 한다. 그러나 세상에 하고많은 직업 중에서 하필왈(何必曰) 그 험하고 ‘실속’ 없다는 신문인이 되겠다 하고, 세상에 하고많은 사업 중에서 하필왈 남지 않는 장사라는 신문업을 하겠다는 데에는 무엇인가 남다른 생각과 느낌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신문의 긍지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긍지’란 어느 의미에서 신문이나 신문인에게 있어 자래(自來)의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능력만 있다면, 한번 노(怒)하여 제후(諸候)로 하여금 두려움을 품게 할 수도 있고, 가만히 앉아 있어 ‘천하’를 조용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 신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능력까지는 없더라도 붓의 위력이나 내 손에 붓이 있다는 위력에 제 나름의 도취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문주간이 ‘신문의 긍지’를 표방하였을 때 이런 자긍자대(自矜自大)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함은 더 말할 것이 없다. 사회의 떳떳한 위치에 서서 떳떳한 방향을 걸어가 공기로서 그 소임을 다하는 데서 오는 긍지를 이름이요, 사회의 정의라 한 번 믿는 다음에는 부귀의 유혹으로써도 빈천의 수난으로써도 위무(威武)의 위력으로써도 그 뜻을 어쩔 수 없는 소신을 가지고 이를 실현해 가는 데서 오는 긍지를 이름일 것이다.
신문윤리강령에 이르기를 “신문은 사회의 공기로서 그 공정성이 용인되고 신문인은 독특한 사회적 위치를 지닌다. 그러나 이는 오로지 공중이 신문에 의하여 사건과 문제의 진상을 파악하고 이를 판단의 기초로 삼는다는 신뢰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신문 최대의 책임은 공중의 이러한 신뢰를 기초로 하여 공공의 이익에 충실하게 복무함에 있다”고 하였다.
신문이나 신문인에게 긍지가 있어 이에 충실하겠다는 책임감에서 오는 것일 것이다. 신문의 긍지는 실로 공공을 위한다는 사명감을 제1의 기저로 삼는 것이고 자긍이 아닌 자계(自戒)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신문윤리강령은 ‘높은 품격과 긍지’를 요구하면서 “특히 저급한 행동이나 그 원인이 되는 행동은 일체 용납되지 않는다”고 말하였고, 그 실천요강에서는 이것을 풀이한 몇 가지 항목 중에서 “특히 강자에 영합하는 모든 행동을 피해야 하며 물질적 정신적임을 막론하고 뇌물을 요구하거나 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정신적인 뇌물’조차도 거부하는 자계가 바로 신문의 긍지의 한 측면인 것이다.
자유와 자율이 한 덩어리의 두 개 측면이라 한다지만 신문이 누려야 할 긍지도 그 긍지에 알맞은 사명감과 그 사명감의 실현에서 온다. 그것이 설령 지난의 길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향해서 우리 함께 한 걸음이라도 가까이 가보자는 데에 신문주간의 표방의 뜻이 있을 듯하다.

이 글은 당시 동아일보 주필 천관우가 쓴 것이다. 조선일보는 천관우에 대하여 이 글의 말미에 “57년 제1회 ‘신문의 날’에 선포된 한국신문윤리강령의 기초위원․ 한국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 동아일보 주필‘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런 글이 동아일보의 경쟁지인 조선일보에 실릴 수 있게 된 것은 조선일보 주필 최석채(당시 편집인협회 회장)에게 정도언론에 대한 투철한 인식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보인다.

천관우의 주장은 시대를 떠나, 신문사의 입장을 떠나 언론계 종사자라면 어느 글자 하나 틀림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박정희 군사독재 초기 최석채, 천관우 같은 언론인이 함께 활동했다는 사실은 현대언론사에서 보기 드문 현상이었다.


4·19 혁명정신을 강조하다

박정희 정권은 5·16 쿠데타 이후 사실상 4월 혁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헌법에는 자신들의 ‘거사’가 4·19정신을 계승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지만 막상 고려대 학생들이 학교 선배들의 4·18 시위를 기려 안암동 캠퍼스에서 수유리 4·19기념탑까지 가겠다는 마라톤 행사를 허가하지 않았다. 대학생들이 군사쿠데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데 대한 불만과 대학생들의 반정부 시위 빌미를 주지 않겠다는 고려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4·19정신 계승을 다시 강조했다.

1966년 4월 19일자 사설(「4·19 어언 6주년」)

오늘은 저 위대한 4·19 의거가 이 강산의 지축을 흔들면서 1인 전제의 아성을 무너뜨린 지 벌써 제6주년이 되는 날이다. 희대의 부정선거와 부정부패와 강권통치로써 낡고 병든 정치권력은 그 쇠진한 운명을 연명해 보려고 불법과 비리를 거듭했고, 국민 대중을 암담과 절망 속으로 몰아넣으면서 이 나라의 국시인 민주주의를 세계적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던 것이 바로 4·19 전야의 정경이었다. 그러나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마산의 봉화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번져나가는 항거의 파도는 드디어 썩어빠진 자유당체제를 쓰러뜨려버리고 우리들의 민권을 빈사상태에서 구출해 냈던 것이다. 이 중대한 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민권운동의 선봉에 섰던 것은 젊은 학생 제군이었지만, 그들의 뒤에서는 정치인 언론인을 포함하는 전 국민적인 성원이 그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4·19는 단순하고 협소한 하나의 학생혁명이 아니라 시민적 혁명이었으며, 따라서 4·19의 영예는 우리 모든 국민들에게 다 같이 귀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항거운동의 중추세력은 엄연히 학생들이었으며, 이들 중 시위를 진압하려는 경찰의 총격을 받아 목숨을 잃은 자가 2백여 명에 달했고, 1천 명을 헤아리는 수가 부상했다. 승리의 기쁨에 수반되는 이 고귀한 희생은 전 민족적인 슬픔이요,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오늘 다시 한 번 이 젊은 민권의 용사들에 대해 충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4·19 이후 복잡하게 전개된 정치적 변동은 지도자나 국민들로 하여금 이 날의 의의를 망각 내지는 경시케 하는 경향을 보여주는 듯하다. 변천하는 세태의 물결에 편승하여 4·19 때 매몰되었던 구악급(舊惡級) 정치인들이 다시 고개를 들면서 이 위대한 거사의 의의를 말살함으로써 자기의 죄책을 무로 돌려보려는 의식적인 계획이 없진 않지만,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정권이 교체되어도 4·19의 가치는 누구도 말소할 수 없는 것이요, 피로써 쌓아올린 민주주의의 금자탑은 영구히 빛날 것이다. 현행 헌법의 전문이 4·19 의거를 긍정하고 정치가들의 선거연설에서 이 날이 찬양된다고 해서 4·19의 이상이 모두 실현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고질적 풍토병으로 되어 있는 선거부정과 그의 배경을 형성하고 있는 부정과 부패가 판을 치는 한 4·19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며, 그 정신은 새로운 형태로 되살아날 것이다. 오늘 4·19는 자유와 민권과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강력한 고무(鼓舞)로 되는 동시에 이것을 거역하고 부패에 탐닉한 자들에게는 무한한 공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4·19라는 사건은 이미 지나가버린 역사의 한 토막이 아니라,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위치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로 된 것이다. 진실과 허위, 자유와 압제를 판정하는 기준으로서의 4·19의 존재는 앞으로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아깝게도 꽃다운 청춘을 바쳐 우리의 젊은 세대들이 세워놓은 찬란한 기념비 앞에서 정치인, 위정자, 그리고 모든 시민들이 깊이 각성하고 다시 분발하여 이 날의 영광을 길이 빛내는 것이 우리들 후 세대의 최소한의 의무일 것이다.

이 사설은 본문에서는 4·19를 의거라고 표현하면서도 제목에서는 전혀 쓰지 않고 있다. 박정희 정권은 헌법 전문에서 4·19를 의거로 불렀다. 당시에도 혁명이라는 표현을 써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조선일보는 이 문제에 관하여 명확한 입장 정리가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또 이 사설에서 군사쿠데타와 4·19의 관계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조선일보가 이를 피해나간 것은 쿠데타세력의 눈치를 본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쿠데타세력은 집권 이후 4·19 정신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헌법 전문에 4·19 의거란 표현을 삽입한 것은 민심 무마용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4·19 때문에 쿠데타 명분이 사라지자 사회혼란이 오기를 기다려 거사 시기를 늦춘 것으로 역사는 평가하고 있다.


박정희가 집권 이후 기자회견을 기피한다고 비판

박정희는 5·16 쿠데타  이후 기자들을 잘 만나지 않았다. 언론계가 그의 집권을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 싫어서일 수도 있지만, 지지 세력은 아직 취약한데다 미국이 알게 모르게 내정을 간섭하는 일도 많았기에 자신의 정책을 소신껏 펼칠 수 없는 현실도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피살당할 때까지 언론을 존중한 적은 없었고, 오직 집권수단으로 활용만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조선일보는 그의 이런 기자 기피증을 지적했다.

1966년 4월 22일자 사설(「박 대통령과 기자회견」)

제주도를 시찰 중이던 박 대통령은 19일 서귀포관광호텔에서 그곳까지 수행한 신문기자 일행과 대담하는 기회를 가졌었다. 비록 미리 예정된 공식회견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참으로 오래간만의 기자접견이었다. 우리의 기억에 잘못이 없다면 박 대통령은 대통령직에 취임한 1963년 12월 17일 이래 오늘에 이르는 2년 반 동안 65년 정초에 내외기자단과 단 한 번 공식회견을 가졌을 뿐, 그밖에는 간혹 지방 시찰 중에 느닷없이 행해지는 대담 같은 것을 예외로 한다면 신문기자 회견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의 기자와의 대담은 매우 중요한 기록이 된다. 그 자리서 박 대통령이 피력한 정국 종횡담의 내용은 정치 경제의 다기(多岐)에 걸쳐 열 손가락을 꼽아도 모자랄 정도이며, 그 가운데는 우리로서 견해를 달리하는 문제도 적지 아니하다 하겠으나, 어쨌든 국민들이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 당면한 여러 가지 중요문제에 대한 최고집권자의 소신이 분명하게 소개된 것만은 의의 깊은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근래에 와서 이 기자회견이 경시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고,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일부러 기자회견을 꺼리는 경향조차 있는 것 같다. 물론 이와 같은 비민주적인 정치 분위기가 형성되기까지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줄 안다. 첫째로는 대통령이나 국무총리가 직접 진두에 나서서 모든 국정을 지휘하지 않으면 안 될 현 실정에서 너무나 바쁘다는 것, 둘째로는 어쩌다가 모처럼 기자회견을 하면 야당이나 언론계의 반응이 선의로 하는 비판보다 정부 공격을 위한 비난이 앞선다는 한국적 정치풍토, 셋째로는 대답하기 난처한 구체적 문제 제기…등등이 지금까지 권력층의 측근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기자회견 기피증의 대략의 원인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기탄없이 말해서 이것은 모두 이유가 안 된다. 첫째 것은 성의의 문제일 것이며, 다시 말해서 집권자가 간직하고 있는 민주정치와 여론이라는 기본인식 여하에 달렸다고 본다. 그리고 둘째의 것은 기자회견을 폐쇄하다시피 만든 그 자체에 더 큰 원인이 있는 것이고, 한 달에 한 번씩 정도라도 정례 기자회견이 마련된다면 차츰 그와 같은 비생산적인 정치풍토는 개선될 것이 틀림없으며 오히려 대통령의 정례 기자회견 제도가 가지는 정치적 가치가 점점 커지고 그 활용 여하로 정치풍토 개선의 촉진작용을 할 수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셋째의 것은, 우리로서 말하자면 그러한 구체적인 기자 질문이 나옴으로써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는 만일 그의 총명을 가리는 인의 장막이 있다면 과감히 걷어치울 수 있는 제도적 장치로도 될 수 있는 것이요, 앉아서 민정을 샅샅이 살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지 않겠는가고 우리는 생각한다.

이런 조선일보의 사설이 발표된 이후 박정희가 어떤 반응을 보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주장이 정당하고 언론계의 일반적 정서를 반영하는 글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헌법절차에 의하지 않은 정권교체는 반대

조선일보는 쿠데타에 의한 정권교체의 부당성을 지적함과 동시에 이미 5년이 지난 시점에서 기정사실을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4·19 정신을 계승하고 민족번영의 굄돌이 되게 하는 일이 5·16 정권의 당면과제임을 강조했다.

1966년 5월 15일자 사설(「앞으로의 과제 / 5·16 다섯 돌을 맞이하여」)

내일로써 5·16도 다섯 돌이다. 생각하면 세월도 빠르다는 감이 깊다. 아마 그만큼 이 5년간이 다사다난 세정(世情)이 변하고 민심도 변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때 5·16에 대해선 4·19의 연장이냐, 아니냐, 혹은 쿠데타냐 혁명이냐와 같은 논쟁으로 꽃을 피운 적이 있었다. 우리는 5·16의 의의가 어떠하든 민주국가에서 헌법절차에 의하지 아니하는 어떠한 정권교체도 반대하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에서 5·16 같은 방법이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나, 다만 이미 5년 전이나 되는 기정사실을 지금 어찌 할 수는 없고 문제는 5·16이 어떻게 하면 4·19 정신을 계승할 수 있고, 민족번영의 굄돌이 될 수 있게 하느냐에 금후의 과제가 남았다고 본다. 정부는 지금 진행 중인 5개년계획을 추진함에 있어 ‘일하는 해’ ‘더 일하는 해’를 슬로건으로 내세워 힘을 기울여 건설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 같다. (…) 그러므로 좀 더 건설사업이 훌륭한 것이 되고 하루빨리 조국이 자립국가로서 통일의 날을 촉진시키기 위해선 아직도 시정할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므로 여기에 대한 몇 가지 우리의 소견을 피력하고자 한다.
첫째, 5·16 직후에 볼 수 있었던 불타는 듯한 의욕이 5년간이라는 세월 동안에 거의 사라진 것 같고, 오늘날엔 부정부패가 오히려 대규모 지능화하였다는 비난조차 들리며, 폭력 역시 다시 고개를 들어 밤엔 불안해서 혼자 거리를 못 걷겠다는 말까지 들려오고 있다. 이것은 5·16을 계승한 현 정부가 사회 명랑화에 실패하였다는 증좌로밖에 볼 수가 없다. 둘째는 사회에 미만한 불신풍조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일찍이 오늘날처럼 서로 불신하고 서로 경계하며 살아야 하는 시대를 경험하지 못했다. 그간 여러 사람에 의해 여러 기회에 논란된 바 있지만, 동포끼리 서로 믿고 의지하여 살지 못하고 오히려 서로 의심하고 살아야 한다면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정부는 이 점 깊이 유의하여 불신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반성 검토해 주기 바란다. 셋째는 현 정부가 앞장서 건설을 외치고 있으면서도 민중의 참여의식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홀로 독주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건설이란 행정력의 강화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민중의 자발적 에너지 동원에 달려 있다. 그런데 행정부는 때때로 지적되듯 불도저행정이라는 비난을 듣고 있고 요란한 건설의 슬로건에 비해 민중 속에 참여의식을 앙양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유감이라 아니 할 수 없다. 4·19는 민중이 주체였고, 때문에 사회엔 그들의 참여의욕이 팽배해 있었다. 불행히도 4·19는 민중의 팽배한 참여의욕을 이끌만한 리더십이 없어 혼란을 초래했지만 거꾸로 5·16은 ‘강력한 리더십’만 과잉하여 민중 속에 주체적인 참여의식을 앙양시키지 못한 데 고민이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5·16이 4·19의 연장이냐 아니냐로 논쟁을 벌이는 것은 무의미하다. 5·16이 진정 4·19의 계승이 될 수 있는 길은 5·16의 주체자들이 4·19 직후와 같이 민중에게 참여의식을 앙양시켜 건설이 정부의 일이 아니요 바로 자신의 일이라는 의욕을 북돋워 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 사설은 5·16 이후 5년간 나타난 국정의 문제점을 잘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민중의 의욕이 사라져버린 정부만의 건설로는 조국 근대화를 이룰 수 없다는 지적은 박정희 정권의 독주를 경고하는 것으로 들린다. 서민은 늘 소외되어 가난한데도 정부는 재벌 육성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들이다. 박정희라는 한 개인의 강력한 리더십은 유신독재로 이어져 민주주의를 파괴하더니 마침내 리더의 피살이라는 비극으로 종말을 고했다.


동양통신 ‘군사기밀 누설’ 필화 사건

쿠데타세력은 집권 이후부터 언론과 언론인을 극도로 경시했다. 걸핏하면 테러를 자행했고, 언론인을 정보기관으로 강제 연행, 협박하고 고문하기 일쑤였다. 국회 공개회의에서 거론된 사실을 보도했다는 이유로 언론인을 구속했던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동양통신 군사기밀 누설 필화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 <해피켐퍼스사> 발행 <한국언론 10대 수난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1968년의 동양통신 군사기밀 필화는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언론인이 조사 받은 기록을 남겼으며, 군사기밀의 정의와 보도 한계에 관해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사건이다. 이 사건은 7월 24일 서울지검 공안부가 동양통신 편집부장 이주호, 사회부장대우 김광순, 기자 전제열 등 3명을 「전투태세 완비 3개년 계획 확립」 기사와 관련하여 군사기밀 누설 및 반공법 위반 혐의로, 사회부장 김홍설은 범인 은닉 혐의로 구속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튿날부터 8월 1일까지 8일 동안에는 문제된 동양통신 기사를 전재한 경향신문, 대한일보, 신아일보를 비롯해서 이 기사를 전재하지 않은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포함한 8개 중앙 일간지와 5개 방송국 및 2개 통신사의 편집국 간부와 기자 등 30명을 소환하여 조사했다. 이 사건은 1972년 2월 대법원에서 무죄로 확정될 때까지 3년 7개월이 걸렸는데 국회와 언론계 및 학계에서 오랫동안 거듭되던 국가안보와 언론자유, 군사기밀의 한계에 대해서 법원이 주목받을 만한 판례를 남겼다. 특히 판결문은 보도관제 요청이나 󰡐오프 더 레코드󰡑가 법률적 구속력이 없다는 점을 명백히 했다. 또 정부의 보도관제 요청에 대한 언론의 협조문제, 󰡐공개된 군기도 군사기밀이냐󰡑 하는 문제 등에 대한 법원의 유권해석 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되는 판결이었다.

이 사건 발생 이후 군사기밀보호법은 개정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군 관련 보도는 더욱 위축되었고 이후 아직까지도 군 관련 사항은 언론의 성역으로 남아 있는 곳이 너무 많아졌다. 지금은 사단장 인사이동마저 군사기밀사항에 속하게 되어 보도가 금지되고 있다.

1968년 8월 6일자 사설(「파문 수습의 실마리 / 동양통신 필화 사건과 국방장관의 경질」)

5일 최영희 국방장관이 해임되고 그 후임으로 합참의장이던 임충식 대장이 예편과 동시에 취임하게 되었다. 개인 최영희 씨로 보아서는 재임기간 불과 5개월 남짓한데 뜻하지 않았던 ‘군기누설’ 사건이 확대됨으로써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된 것이 무척 괴롭고도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겠고, 이 점 한 가닥의 동정을 아니 느낄 수가 없다. 그러나 일국의 장관이란 공인의 입장에서 볼 때, 박 대통령의 이번 재단(裁斷)은 지극히 당연한 조처이며, 사건의 정치적 확대를 막기 위해서도 적절한 판단이었다고 보아 우리는 환영해 마지않는다. (…) ‘군기’냐 아니냐를 판단해 낼 최고책임자인 국방장관이 국회 공개회의에서 낭독 설명한 사항을 보도했다고 해서 군기누설이니 이적이니 하여 떠들어본들 그 책임이 결국 어디로 돌아가는 것이겠으며, 국회의 국방위원장이 기자들에게 공개한 내용을 보도한 것을 가지고 기밀누설이라고 입건해본들 어쩌자는 것이겠는가. 요컨대 판단을 잘못한 국방장관이 인책할 수밖에 달리 파문을 수습할 길은 없는 것이며, 이것이 경종이 되어 정부·국회는 물론 언론계를 포함한 모든 국민들이 군기보지(軍機保持)에 대한 경각심을 더 한층 높임으로써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든다면, 최 국방의 퇴진은 국가이익을 위한 큰 밑거름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와 함께 걷잡을 수 없이 파문이 확대되어 가던 동양통신 사건의 해결을 위한 실마리가 된 것만 해도 다행이다.
여기서 우리는 정부당국의 제2의 결단을 강력히 요망한다. 이미 최 국방장관을 해임함으로써 이번 군기누설 책임의 종국적 규명이 내려진 것으로 믿는다. 그렇다면 그로 인하여 입건되어 있고, 구속되어 있는 언론인들은 원점으로 돌려 공소를 취하하는 조처가 마땅히 뒤따라야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보람이 있을 것으로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법리적으로 따져도 사태는 명백한 것이다. 즉 군사기밀에 해당하는 사항은 당연히 국회 비공개회의에서 다루어야 할 것을 착오건 실수건 국방장관이나 국방위원장이 비공개회의 결의를 하지 않고 공개회의에서 다루었다는 데서 사건의 발단이 된 것임이 명백해진 이상 그 이후의 보도과정은 문제가 될 것이 없는 것이다.

당시 동양통신 필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은 국방부와 검찰당국을 크게 비판했다. 국법도 제대로 모르는 한심한 국방관료도 문제였지만 법률 적용에 대한 소신도 없이 언론인을 구속한 검찰도 호된 비판을 받았다. 여기에는 중앙정보부의 작용이 있었을 것으로 당시 언론계는 짐작하고 있었다.


광주학생사건을 부각시키는 사설

박정희가 가장 싫어하는 집단이 학생이었다. 대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고등학교 학생까지 경계했다. 4·19가 고등학생들에 의하여 초기 점화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9년 일어난 광주학생사건은 전국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 왔다. 일제가 큰 충격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이렇게 역사적 의미가 큰 사건이지만 박정희는 한 번도 광주학생사건을 격려하거나 기념하는 연설을 하지 않았다. 이 행사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1968년 11월 3일자 사설(「학생운동의 지각[知覺]」)

오늘은 학생의 날이다. 1929년 이날 일제의 총검을 박차고 민족의 해방을 위해 학생들이 궐기하여 우리의 자주정신을 세계에 과시한 뜻 깊은 날인 것 이다. (…) 선배들이 남겨놓은 찬란한 전통은 면면히 젊은 가슴 속에 불타올라 국가위기 시에는 새로운 정열로 폭발하여 때로는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4·19 의거로 나타나고, 때로는 민족주체성을 발휘하는 6·3 의거로 나타났다. 젊음은 젊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미 하나의 보배요, 자랑이다. 그중에서도 학생들은 젊음의 정화(精華)요 핵이라 아니할 수 없다. (…) 오늘 제16회 학생의 날을 맞아 우리는 전통에 빛나는 한국 학생의 사명이 중하고도 크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려 한다. (…)
그러나 일제치하에서는 민족해방을 위해 때로는 3·1 운동이나 11·3 운동과 같은 피의 분노로 폭발하기도 하고, 동경 유학생들의 ‘브나로드’ 운동에서 엿볼 수 있듯이 농촌계몽운동으로 나타났다. 우리 4·19는 신생독립국이 품은 부조리 앞에 젊은 학생들이 가장 절실하게 고뇌하고 분노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지금 대서양 양편에서 스튜던트 파워의 물결을 거세게 하고 있는 학생운동도 사실 우리의 4·19가 봉화의 구실이 됐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은 국제학생운동에 있어 하나의 선구 역할을 했다 해서 과언이 아니다. (…) 우리의 바로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학생들만이 가지는 젊음과 이성은 한편으로 자칫하면 좌절하기 쉽고 방황하기 쉬운 대중을 일깨워주는 지도적 사명이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자칫하면 독주하기 쉽고, 타락하기 쉬운 위정자를 포함한 기성세대에게 늘 ‘소금’이 되는 역할을 맡아야 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이 사설은 1929년 11월 3일 광주의 고보 학생들이 일본인 학생들과 조선인 학생들의 차별 철폐를 주장하며 일으킨 만세사건을 기리기 위해여 제정된 ‘학생의 날’을 기하여 작성된 글이다.

해방 후부터 매년 정부는 ‘학생의 날’을 기념해 왔으나 1972년 10월 유신 직후인 1973년 2월 30일 정부가 주관하는 각종 기념일을 통폐합할 목적으로 제정된 대통령령(‘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하여 폐지되었다. 1984년 9월 22일 국가 기념일로서 ‘학생의 날’이 다시 부활되었다. 이후 2006년 2월 9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3선 개헌을 앞둔 박정희가 학생들의 움직임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던 시기였다. 조선일보는 바로 그 무렵에 이 사건을 상기하는 사설을 내보낸 것이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저작권자 © 자유언론실천재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