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언론역사 조선동아 대해부
‘최석채 주필 시기’의 조선일보 (1)조선일보 대해부 3권 -10장(1)
  • 관리자
  • 승인 2019.01.23 23:49
  • 댓글 0

1965년은 박정희 군사쿠데타가 발생한 지 4년이 지나는 해였다. 당시 조선일보에는 주필에 최석채, 편집국장에 김경환이 있었고 동아일보에는 주필에 고재욱, 편집국장에 천관우가 있었다. 최석채는 1951년 대구매일을 사직하고 경향신문을 거쳐 조선일보와 인연을 맺는다. 이후 1971년까지 조선일보에서 논설위원, 편집국장 그리고 주필을 지내다 1971년 조선일보를 떠난다. 따라서 이 시기 20년의 조선일보는 ‘최석채의 조선일보’라고 불러도 크게 틀린 것이 아니다. 한때 동아일보의 천관우와 더불어 박정희 비판의 양 거두였던 최석채는 같은 해 조선일보를 떠남과 동시에 같은 영남 출신인 박정희가 강제 통합한 경향신문과 MBC의 통합법인인 (주)문화방송 회장이 되었고, 천관우는 전두환 정권 시절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의장에 취임함으로써 모두가 변절 시비의 장본인이 되었다.


박정희에 대한 비판적 논조

1966년 1월 19일자 사설(「꿈과 현실의 중간-박 대통령의 연두교서를 비판한다」)

(…) 18일에는 항례에 따라 보통 ‘연두교서’라 불리는 대통령의 시정연설이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연두교서’는 행정수반의 자격으로 연두국회에서 행하는 시정연설인 것이며, 이해에 실천할 정책의 목표와 대강 및 기본자세를 국회에서 천명하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 연두교서의 성격을 이렇게 이해하면서 박 대통령의 66년도 시정연설을 자세히 음미해 볼 때 한마디로 말하여 작년도의 억센 시련을 무사히 극복한 안도를 바탕으로 공화당 정권의 ‘만만(滿滿)한 자신력’과 ‘꿈과 현실의 중간’을 아른거리는 ‘근대화의 진군나팔’을 불고 있는 것 같은 발랄한 생기를 가득히 담고 있는 연설이었다. (…)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꿈과 현실을 잇는 정치철학이 결여되어 있는 나열식 자체평가가 이 연두교서의 가장 큰 흠이요, 그것이 단지 다듬고 다듬은 시정연설의 결함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정(執政)의 기초 자체에 철학이 없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위구(危懼)를 아니 느낄 수가 없다.
이 ‘교서’의 내용을 대별하면 1)작년도의 회고 및 업적 2)올해의 목표 3)시정대강 4)국민에 대한 호소로 구별할 수 있다. 첫째 대목인 작년도의 회고에 있어서 박 대통령은 먼저 ‘격동과 변천 무상’했던 국제정세와 그렇기 때문에 매듭짓지 않을 수 없었다는 한일 국교정상화 문제와 우리의 ‘제2전선’인 월남에의 전투부대 파견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그리고 경제적인 성장을 이룩한 여러 가지 업적으로서 물가앙등의 속도완화, 경제성장의 목표초과 한수해(旱水害)에도 불구하고 평년작을 훨씬 상회한 양곡생산, 전력 77만㎾ 확보, 석탄 1천만 톤 생산 돌파, 울산정유공장 가동, 시멘트 1백72만 톤 생산시설 확보, (…) 그와 같은 통계가 실지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박 대통령과 함께 국민 모두가 기뻐해 마지않는 바이나, 문제는 이것이 ‘국정의 다냐’라는 것이다. 물론 경제성장 없이 사회안정을 기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이치이고 보면 대통령이 1에도 경제성장, 2에도 경제성장으로, 경제적 발전의 기초 구축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사회의 그 어느 부문보다도 더 중요한 문제라고 대결하는 것은 옳으나 경제만이 국정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더구나 공업국가의 기초를 마련할 제1차 5개년계획이 올해로써 끝나고 다음해부터는 제2단계인 ‘공업화를 이룩’하는 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첫 발을 내디딜 이 관두(關頭)에서 냉정히 이 현실을 분석해 볼 때 경제건설의 의욕에 넘쳐, 대기업 중심의 파행집중 조장 정책이 빚어낸 사회정의의 유린이 그 얼마나 해독을 끼치게 하고 있는가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될 일이다. 이 부익부 빈익빈이란 사회 양극현상이 일파만파로 정치·경제·교육·사회 등 각 부문에 전파되어가는 것을 도외시한 업적 과시가 바로 정치철학의 결여를 뜻하는 것이며 또한 모든 정책 수행의 대전제가 되어야 할 관기(官紀)의 일대 숙정책(肅淨策)에 대한 근본적인 방침이 엿보이지 않고 있어 날로 만연, 심화해가고 있는 부정부패 현상을 이대로 두고 과연 어떻게 믿고 따라갈 수 있겠는가. 이 점 우리로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 설명이 부족해서 그런지 ‘연두교서’는 그저 근대화, 근대화를 목메게 외치면서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뿐 무엇이 사회정의며 그 사회정의를 어떤 이념과 기조로 구현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꿈을 제시치 않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조국의 근대화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미래상”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대통령의 부르짖음이 있기는 하나 근대화란 다양의 개념을 지니고 있는 것인즉 덮어놓고 공업화 된다 해서 근대화가 되는 것은 아니며, 특히 아시아적 후진국가의 경우 공업화와 함께 그 첫 출발점에서부터 복지국가화를 목표로 하는 세밀한 비전이 없이는 사상누각의 한이 없지 않을 것이다. 교서는 작년의 회고와 업적에서뿐 아니라 올해의 목표나 시정대강에 있어서도 거의 같은 경향을 좇고 있으며 경제성장과 생산량의 증대에 중점을 두었고 기타 문제는 관념적인 역설에 머물고 있음을 본다. 다만 민족문화 진흥을 위한 ‘민족문화센터’의 건설을 약속한 것이 색다른 제시일 뿐 이렇다 할 새로운 시정방향을 그려 내놓지 못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

이 사설은 박정희의 연두교서 문제점을 제대로 지적한 것으로 평가된다. 박정희 정권과 언론의 긴장관계가 아직 지속되고 있던 시기인데도 대통령의 연두교서에 “정치철학이 없다”고 지적하고, 나아가 그의 전용특허였던 ‘조국근대화’에 대하여 따져드는 표현을 쓴 것은 용기 있는 주장이었다. 주필 최석채나 편집국장 김경환이 재임 중이기에 이런 사설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당시의 논설진 가운데는 쟁쟁한 인사들이 여럿 있었다. 그 무렵만 하더라도 한국의 언론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쌍벽을 이루며 군사정권에 맞서던 시절이었다. 다음해인 1967년 총선거를 앞둔 공화당 정권은 이후 점차 언론에 대해 재갈을 물리기 시작한다.


동아일보의 어려움에 동참

1967년 총선거는 박정희 정권에게는 사실상의 군사정권을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름하는 중대한 의미를 갖는 선거였다. 또 박정희가 영구집권 야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개헌이 절대과제였는데 개헌작업을 하려면 국회 의석의 3분의 2를 장악해야만 하는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1964년 대통령선거에서 갖은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고서도 신민당 후보 윤보선을 가까스로 이긴 경험을 가진 박정희와 공화당이 져서는 결코 안 되는 총선거였다. 이미 김대중의 대중 동원력을 간파한 박정희는 목포에서 출마하는 그를 낙선시킬 묘안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고, 목포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야당 지지 분위기를 바꾸지 않고는 총선 승리의 가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특히 신종매체인 민영방송, 특히 DBS라디오가 등장해 수도권에서 높은 청취율을 보이고 있는 데 대하여 제동을 걸어야 했다.

1960년대에는 3개의 민영방송이 새롭게 라디오전파를 발사하고 있었다. 라디오 청취율은 꽤 높은 편이었다. 1961년 12월에는 MBC가, 1963년 1월에는 동아일보 자매사인 동아방송(DBS)이 그리고 1964년 5월에는 중앙일보 자매사인 라디오서울이 각각 언론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특히 DBS는 개국 당시부터 정치성이 강했는데 6·3사태로 정국이 극도로 혼란할 때 <‘앵무새> 프로그램에서 학생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집필자 이종구(당시 동아일보 외신부장), 김영효 담당 PD , 최창봉 방송부장 등 동아일보 사원 6명이 구속되는 불상사를 당했다.

이처럼 자유언론정신이 투철했던 DBS가 총선거에서 공화당에게 불리한 방송을 할 것을 걱정하던 박정희 정권은 전파관리법을 개정하여 ‘방송허가 취소’가 가능한 처벌조항을 만들어 방송을 견제할 준비를 갖춰나갔다.

1966년 1월 23일자 사설(「방송도 언론이다」)

전파관리법을 개정하려는 정부의 의도가 알려져 크게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차관회의에서 통과된 것이 국무회의에서는 일단 보류되어 관계 부처 간에서 개정 법안을 재검토하기로 하였다고는 하나 개정 구상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고 헌법이 보장한 ‘언론의 자유’와 관련하여 그 저촉 여부를 심의하기 위한 조처로 보이는 만큼, 정부의 인식 착오가 없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사전에 견해를 밝혀둘 필요를 느낀다. 첫째로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방송이나 통신의 내용이 언론이냐 아니냐 하는 점일 것이다. 만일 ‘언론’이 아니라면 정부가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한도 내에서 이것을 규제할 수 있다고 보아야 옳은 것이고, ‘언론’이라면 ‘허가’나 ‘취소’를 포함하는 정부의 통제권은 법률로써도 인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 우리 헌법상의 당연한 해석일 것이다. 원래 언론·출판·집회 결사의 네 가지로 표시는 달리 하였지만 이것을 통틀어 ‘의사 표현의 자유’로 묶을 수 있으며, 현대 민주정치를 가능케 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의 하나임은 말할 나위가 없고, 우리 헌법도 제18조에서 이 원칙을 명백히 해놓았다. 그런데 통신의 경우 그 제18조 ③에서 “신문이나 통신의 발행시설…” 운운한 데서 명백하듯이 ‘언론’임에 다툴 여지가 없다. 다만 방송만은 ‘방송’ 두 자를 헌법 명문에 삽입하지 않고 있으므로 혹 일부에서 방송은 얼마든지 규제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의사 표현의 자유’ 속에 ‘방송’이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세계의 웃음거리일 것이다. 우리 헌법은 그것이 언론의 범주인지, 또는 집회의 범주인지든 간에 ‘절대적 자유’의 예외적 규정을 두어 검열을 할 수 있는 대상으로 영화와 연극도 의사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제18조 속에 같이 열거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대중적 의사 전달의 첨단을 걷는 이기인 방송이나 텔레비전을 이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우긴다는 것은 넌센스도 이만저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방송은 분명히 ‘언론’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둘째로 전파관리법이 결코 위헌이 아니고 정부가 통제를 하고 있다는 사실과 이 통제권에 의해서 방송국이 ‘전파관리법에 의한 허가’를 받고 영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부가 방송에 통제를 가할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실은 이에 근거한 것으로 우리는 생각하는데, 문제는 전파관리법이 규제할 수 있는 한계와, 규제할 수 없는 범위를 변별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닐까. 세계적으로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전파관리는 정부의 권리로 되어 있으며, 여기 이의를 제기할 이는 별로 없을 줄 안다. 다만 누구의 소유도 아닌 대기 속의 전파를 정부가 관리한다는 것은 전파관리법의 제1조(목적)에서 말하듯 “전파의 합리적인 관리를 함으로써 공공의 복지를 증진…”하자는 데 있는 것이며, 바꾸어 말하면 광화문 네거리서 교통순경이 교통정리를 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인 것이다. 그렇다면 방송국이나 통신사 또는 신문사, 상사가 설치하는 텔레타이프 등 무선의 주파를 배정하고 관리하는 정부의 통제권 역시 이 기술적인 목적과 한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다. 만약 주파수의 혼선을 막기 위하여 또는 시설의 향상과 합리적인 관리를 위해서 전파관리법을 개정하려는 것이라면 우리로서 별 이견이 없으나, 알려진 바와 같이 ‘방송의 내용’을 대상으로 하여 어떠어떠한 특정범죄에 해당할 때 ‘무선국’의 허가를 취소하여, 실질적으로 ‘방송국’의 허가를 취소하는 강권을 발동할 근거로 삼으려는 당국자의 구상이라면, 그것은 터무니 없는 위헌이요,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월권의 사태라 아니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방송국이나 통신사에 대하여 전파관리상 필요한 기술적인 규제나 시설의 관리를 강화하는 것은 입법사항에 속하는 정부권한이라 할지라도 ‘방송’ ‘통신’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헌법 제18조가 보장한 ‘의사 표현의 자유’에 속하는 것이며 일반법 이외에 가사 전파관리에 빙자하여 방송국 통신사를 규제하려고 해도 그것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는 헌법 제32조 ②에 의해서 엄격한 입법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사설은 동아일보가 사흘 전인 20일자 1면에 3단으로 실은 「내년 선거 앞둔 언론규제? /  반공법 등 저촉되면 방송국 허가 취소 /  전파관리법 개정안 심의, 벌칙 강화 / 체신부가 입안 공보부와 협의」 제하의 기사를 보고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로서는 DBS의 존폐를 둘러싼, 몹시 신경이 쓰이는 박 정권의 입법 동향이었다.

조선일보는 당시 방송이 없었다. 그래서 늘 신문과 방송을 겸비한 동아일보에 대하여 열등감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두 신문사는 1920년대 창간 이래 경쟁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광산갑부 방응모가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한 이후부터 동아의 김 씨와 조선의 방 씨는 견원지간이 되었다.

선의의 경쟁관계를 넘어 사활을 건 싸움이 자주 일어났다. 그런 조선일보가 동아일보의 처지를 보고 지원적 성격이 강한 이런 사설을 쓰게 된 것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이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동아일보가 망하면 조선일보도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상식인 것이다. 두 신문사는 언론윤리위원회 파동 때도 공동보조를 취한 바 있었다. 이는 당시 조선일보에서 최석채, 송건호, 양호민 등을 비롯한 참다운 언론인들이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대여론에 직면한 집권 민주공화당은 1월 26일 당무회의에서 전파관리법 개정안 중 허가 취소 조항을 삭제하게 된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저작권자 © 자유언론실천재단,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