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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대 대통령 선거와 ‘사상논쟁’조선일보 대해부 3권 -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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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2.26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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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재건최고회의는 제5대 대통령선거를 1963년 10월 15일에 실시한다고 공고했다. 대선을 앞두고 야권은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있었다.

1963년 5월 13일 신민당은 제5대 대통령선거를 염두에 두고 구 신민당, 구 자유당, 구 민주당 일부와 무소속 등 4개 세력을 모아 민정당을 창당하였다. 쿠데타로 사라진 민주당의 복원을 내세운 재건 민주당은 63년 7월 16일 창당대회를 열고 박순천을 당수로 선출했지만, 대통령후보는 내지 않고 윤보선을 지지하기로 하였다. 윤보선에 대해선 “5·16에 의한 헌정 중단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야당의 대통령후보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민정당과 민주당은 윤보선의 지명도에 의지하는 길을 택하였다.
신정당은 허정을 대통령후보로 내세웠는데, 한동안 야당 후보 단일화 운동차원에서 야당을 통합하는 ‘국민의 당’ 창당 움직임이 일었다. (…)
9월 12일 민정당은 윤보선을, 9월 14일 국민의 당’은 허정을 대통령후보로 결정했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2권>, 218~219쪽).

9월 15일 대통령후보 등록이 마감되었다. 중앙선거위원회에서 추첨한 결과 장이석(신흥당), 송요찬(자민당), 박정희(공화당), 오재영(추풍당), 윤보선(민정당), 허정(국민의 당), 변영태(정민회)의 순으로 기호가 결정되었다.


군사정권, 전 내각수반 송요찬을 재구속

대통령후보 등록 마감을 앞두고 야권이 거세게 항의한 것은 군사정권에서 내각수반을 지낸 바 있는 송요찬을 육군본부고등군법회의가 9월 4일 재구속한 사건이었다. 그는 1963년 8월 8일자 동아일보에 박정희의 대통령 출마를 반대하는 내용의 글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기고한 것이 빌미가 되어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송요찬을 다시 수감한 사건은 야권의 강력한 비판에 부닥쳤다. 그가 자민당 후보로 대선에 출마를 하면 박정희의 약점을 공격하면서 표를 깎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9월 12일자 사설(「역사적인 선거에 임하는 혁명정부와 여당의 책임」)에서 송요찬 재구속 문제를 거론했다.

(…) 이미 자유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지명받은 사람이 영어(囹圄)의 몸이 되고 있다. 하기는 그의 구속은 지명받기 전에 있은 일이요, 또 법에 따른 절차와 혐의도 그렇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얼마 전에 구속적부심의 결과 석방되었던 것이며 또 재구속 당시엔 질병 치료차 병원에 입원 중이었던 사실에다가 군사혁명정부의 초대 비현역군인 내각수반이었다는 사실을 아울러 생각하고, 또 근자에 그가 혁명정권을 통렬히 비난한 일이 있었다는 사실이 국내외에 던지는 인상은 실로 미묘 복잡한 바가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그의 구속은 불필요한 오해의 실마리가 되었다고 할 것인데 그러한 오해는 대내적으로 국민 간에보다는 대외적으로 우리를 염려하는 우방 제국에 더욱 짙은 것이 사실이다. 이 점에서 혁명정부의 선처가 기대되고 있다 할 것이다. (…)
(…) 만에 일이라도 선거가 깨끗이 치러지지 아니하면 5·16 혁명과 그 혁명공약을 부인하게 되는 것이며 그보다는 더욱 크게 우리 백의민족이 자치 능력이 없다는 해석을 내릴 수 있으며 따라서 독립하여 나라를 차려가는 자질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내외의 준엄한 심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선거에 제하여 군사혁명정부와 여당의 책임이 심히 무겁다는 사실을 경고하면서 그 비상한 각오와 최선의 노력을 촉구한다.

6개 야당은 9월 19일, ‘옥중 출마’를 한 자민당 대통령후보 송요찬을 석방하라고 군사정권에 요구했다. “재야 6당은 공동성명을 내어 송 씨의 구속은 ‘가장 저열한 정치적 보복’이라고 비난, ‘정치도의 공명선거 그리고 신성한 법의 이름으로’ 송 씨의 석방을 요구하고 만일 당국자가 끝까지 완미(頑迷)와 불의를 계속할 때는 한 사람의 송 씨를 위해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도살에 항거하기 위해 극한적인 투쟁을 하겠다”고 선언했다(조선일보 9월 20일자 1면).

조선일보 9월 20일자 사설(「송요찬 씨의 구속을 해제함이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은 결론 부분에서 이렇게 촉구했다. “우리는 송 씨의 정치적 위치를 필요 이상으로 중시하거나 또는 재야 6당의 대정부 공세를 과대평가해서가 아니라, 후보자가 옥중에 갇힌 채 대통령선거전을 치렀다는 불명예스러운 선거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으며, 공정선거에 조금이라도 암영을 던질 여하한 사소한 일이라도 극력 피해야 할 오늘의 국민적 과제를 더욱 중시하는 데서 송 씨 구속 해제를 주장하는 것뿐이다.”


윤보선, ‘여수반란사건 관계자 현 정부에 있다’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은 “새 일꾼 바로 뽑아 황소 같이 부려보자”, 윤보선의 민정당은 “군정으로 병든 나라 민정으로 바로 잡자”라는 선거구호를 내세웠다. 그러나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정책 대결보다는 ‘사상 논쟁’이 큰 흐름을 이루었다. 폭발성이 강한 사상 문제의 핵심은 박정희의 좌익 경력이었다. 그 문제를 가장 먼저 제기한 후보는 윤보선이었다. 조선일보 9월 25일자 1면에 실린 기사(「여수반란 사건 관계자 / 현 정부에 있는 걸 상기 / 윤보선 씨 기자회견, 박정희 씨 정견방송을 공박」)는 ‘사상 논쟁’의 시발점이 된 윤보선의 ‘전주 발언’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민정당 대통령후보 윤보선 씨는 24일 상오 9시 반 전주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나는 여수에서 여수반란사건의 관계자가 지금 정부에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고 말했다.
그는 공화당 대통령후보 박정희 씨가 23일의 방송을 통한 정견발표에서 “이번 선거는 개인과 개인의 대결이 아니라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假飾)의 자유민주주의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사상과의 대결”이라고 말한 데 대한 논평을 요구받고 이 같이 말했다.
그는 기자회견 서두에서는 이 문제에 전혀 언급하지 않았었고, 회견이 끝날 무렵 박정희 씨의 정견에 대해 미처 기자들에게 질문할 여유를 주지 않은 채 혼자서 길게 말했다. 다음은 그가 한 말의 전부다.
“그 사람 착각한 것 아닌가. 내가 할 말을 그 사람이 했다. 모든 것은 국민이 판단할 일이다.
지금은 가장된 민주주의 즉 이질적 민주주의와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여수강연(23일)에서 특별히 느낀 것은 여수반란사건의 관계자가 지금 정부에 있다는 것이었다. 누가 민족주의이고 누가 비민족주의인가. 누가 공산주의자이고 누가 비공산주의자인가. 역사를 캐보자고 해. 이 다음에 이런 무책임한 소리를 누가 하면 국민이 규탄할 것이다. (…)”

윤보선의 전주 발언에 관한 기사가 실린 조선일보 1면 머리에는 「윤보선 씨 전주 발언 / 크게 정치문제화 / 어제 최고회의 긴급본회의를 소집 / 국가 안위에 관한 일 / 즉각 구속 주장 있었으나 미결론」이라는 기사가 올라 있다.

10·15 대통령선거전은 24일 윤보선 민정당 대통령후보의 전주 발언을 계기로 민주주의를 에워싼 사상적 대결의 양상을 짙게 하고 여야 간에 예기치 않던 격렬한 사상논쟁으로 발전, 커다란 선풍을 일으켰다. 24일 상오 윤 씨의 전주 발언이 전해지자 최고회의는 하오 3시 긴급본회의를 소집, 하오 4시 반까지 윤 씨 발언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대책을 협의했는데 박 의장이 합석치 않은 이 자리에는 공화당의 윤치영 의장, 장경순 사무총장이 잠깐, 그리고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박경원 내무장관, 이소동 치안국장 등이 참석했다.
긴급히 소집된 최고회의 본회는 윤 씨를 곧 구속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들이 오고갔으나 당장에 구체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고 “윤 씨 발언에 대한 더 자세한 보고를 들은 뒤”에 결정짓도록 했는데 이후락 공보실장은 기자 질문에 대답하면서 최고회의의 결론과는 상관없이 “수사기관은 인지 사건으로 윤 씨 발언을 수사하게 된 것이며 입건 여부는 수사 결과에 달린 것”이라고 말하고 그러나 “최고회의 자체가 고발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순사건 관련 왜 떳떳이 해명 못 하는가’

윤보선의 ‘전주 발언’을 계기로 불붙기 시작한 사상 논쟁은 야권이 박정희의 ‘좌익 경력’을 총공격하는 사태로 발전했다. 조선일보 9월 26일자 1면 머리기사(「불씨 튀기는 여야 사상 논쟁 / 어제 공명선거투위 합동강연으로 더욱 격화 / 박정희 씨의 불투명 비판 / 여순사건 관련…왜 떳떳이 해명 못 하는가 / 연사들 2년 간 실정(失政) 들어 공박」)는 상황을 아래와 같이 보도했다.

윤보선 씨의 전주 발언에서 비롯된 여야의 사상 논쟁으로 선거 붐 조성 기운을 짙게 한 10·15 선거전은 25일 하도 크게 성황을 이룬 공명선거쟁취 강연회(서울 교동초등학교)에서야당 인사들이 한결같이 박정희 씨의 사상천명을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사상 논쟁은 한결 불씨를 튀기게 됐고 바야흐로 제대로의 선거 붐을 이루게 됐다. 대통령 선거전이 시작된 뒤 서울서는 처음인 이날의 정치강연에는 2만여 명으로 보이는 청중이 동원됐었다.
여기서 민주당의 박순천 총재는 “윤보선 씨의 발언을 해명해주기 바라며 공산당과 같은 희미한 사람을 콜레라보다 더 무서워 한다”고 말했으며 자민당의 김준연 대표최고위원은 박정희 씨가 여순반란사건에 관여된 것으로 보도한 1961년 5월 26일자 <타임>(미국 주간지) 기사를 소개하여 불붙은 사상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김 씨는 “타임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면서 “타임지 보도에 의하면 박정희 씨는 한때 1948년의 여순반란사건을 도운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이승만 씨의 관리에 의하여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공산당의 조직망에 대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석방되었다. 그는 분명히 현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윤보선 씨를 고발키로 하고 허정 씨를 고발하려 하며 송요찬 씨를 잡아넣고 공명선거란 언어도단”이라고 비난, 청중들은 박수를 보냈다. 박순천 씨는 “사상적으로 불투명한 사람들이 실정을 거듭하여 나라를 병들게 하였으니 가만 둘 수 있겠는가”라고 군정당국을 비난한 다음 “김재춘 정보부장이 나에게 5·16 혁명은 저질렀다. 그러나 다시 역적이 되지 않기 위하여 공산당의 조직과 똑같은 공화당을 해체시키고야 말겠다고 말한 일이 있다”고 폭로했다.

조선일보는 9월 26일자 2면에 「어수선하여져 가는 대통령 선거전에 대한 소감」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대통령 선거전은 이제 중반전기에 접어들었는데 선거운동의 모습은 이상한 데로 번져가고 있는 것 같다. 문제의 실마리는 누가 진정한 민주주의자냐 하는 것을 주제로 일어났다. 먼저 박정희 후보가 이른바 구 정치인은 진정한 민주주의자가 아니라는 발언을 하였다. 이에 대하여 윤보선 후보는 여수순천반란사건의 관련자가 정부 안에 있는 듯하다고 말하고 또 박 의장의 사상을 의심한다고 맞섰다. 별도로 허정 후보는 합헌정부를 전복하고 쿠데타를 감행한 그(박 후보)의 사상적 근저가 의심스럽다고 발언하였다. 이렇게 되어 선거운동은 진정 ‘사상과 사상의 대결’인 듯한 양상을 빚어내게 된 것이다. (…) 한마디로 표현하면 일국의 원수를 뽑는 민주주의 절차가 이렇게 어수선하게 되어가는 데 대하여 우리는 역정을 내지 않을 수 없으며 정치라는 것이 이렇게 이전투구 식으로 행하여져야 하는가에 대하여 회의를 갖게 된다. (…)
(…) 우리는 여기서 이 불행한 시비가 나라에 도움 되는 방향으로 결말짓게 되는 길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여 보게 된다. 우리나라는 자유와 민주를 수호하기 위한 ‘과정적인 국시’로 서 반공을 생명으로 삼고 있으므로 반공의 반대는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처단되고 있는 터이다. 이러한 국가적 명제 하에서 반공이라는 테마로 남의 사상을 부정적으로 평할 때에 당한 사람은 개인이거나 집단이거나 한결같이 그에게 치명상이 되는 것이다. (…) 혁명공약으로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내세우고 소급 반공법을 제정하여 혁신정치인을 용공 혐의로 투옥한 현 군사정권의 요인을 에워싸고 윤 후보가 암시한 내용은 여러 모로 납득이 잘 안 가는 이야기다. (…)
(…) 거듭 말하거니와 선거전은 불행한 양상을 띠고 진행되고 있다. 불행한 정도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페어플레이화 하는 것은 바로 우리 지도자들이 총명을 테스트하는 가장 좋은 기회인 것이다. 제발 유권자들에게 백척간두에 처하여 선 듯한 아슬아슬한 마음을 일으키지 말게 하여주었으면 한다.

‘사상 논쟁’에 불을 댕긴 것은 윤보선의 ‘전주 발언’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그 실마리를 제공한 것은 박정희가 9월 23일 아침 서울중앙방송국에서 10분 동안 내보낸 첫 번째 ‘정견 방송’이었다. 그는 “이번 선거는 개인과 개인의 대결이 아니라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자유민주주의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사상의 대결”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윤보선이 전주 유세에서 격렬하게 비판하는 사태를 일으킨 것이었다. 한국민주당에 뿌리를 둔 민주당 구파 출신으로서 동아일보의 강력한 지원을 받고 있던 윤보선, 자유민주주의자이자 철저한 반공주의자라고 공언해온 그를 박정희가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짜 자유민주주의자’라고 몰아부친 것은 단순한 인신공격이 아니라 야권에서 선두를 달리는 대통령후보에 대해 국민이 정치적 사형선고를 내려달라고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격앙된 야권 정치지도자들이 윤보선의 ‘전주 발언’에 대해 진실 여부를 밝히라고 요구했는데도 박정희와 최고회의는 납득할 만한 해명을 하지 않고 윤보선 등에 대한 구속 위협으로 대처했다.

위에 인용한 조선일보의 사설이 야권의 사상 공세가 선거전을 ‘불행한 양상’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하려면 박정희가 이끄는 군사정권이 그의 ‘여순반란사건 관련’ 여부를 해명하라고 촉구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 사설은 “혁명공약으로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내세우고 소급 반공법을 제정하여 혁신정치인을 용공 혐의로 투옥한 현 군사정권의 요인”에 대해 윤보선이 암시한 내용이 여러 모로 납득이 잘 안 간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혁명공약’ 제1항(“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한다”)은 박정희의 좌익 경력이 미국을 비롯한 ‘자유 우방’과 국민들의 불신을 살 것을 걱정한 쿠데타세력의 ‘전략적 포석’이었다는 점이 그 이후에 밝혀진 바 있다. 그리고 조선일보 사설이 주장하는 대로 ‘혁신정치인을 용공 혐의로 투옥한’ 사실이 어떻게 박정희의 ‘좌익 경력’에 대한 해명이 될 수 있는가? 박정희는 ‘일국의 원수’를 뽑는 선거에서 “나의 좌익 경력은 인정하지만 지금은 명백한 반공주의자임을 선서한다”라고 밝혔어야 옳지 않은가.


기록에 나타난 박정희의 ‘좌익 경력’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윤보선의 ‘전주 발언’을 시작으로 야권이 박정희에 대한 총공격의 소재로 삼은 ‘여순반란 사건 관련’ 주장은 사실이었을까? 김재홍(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언론인)이 <누가 박정희를 용서했는가>(책보세, 2012)에 쓴 글을 통해 진실 여부를 확인해 보기로 하자(참고로 말하면 이 글에 대한 박정희 유족의 공식적 반론은 아직 나온 적이 없다).

박정희의 세 번째 변신은 광복군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조선경비사관학교를 거쳐 국군 장교가 된 후 극좌 공산주의 세력인 남로당의 군사부 프락치가 된 일이다. (…)
1946년 10월 당시만 해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이어 중앙인민공화국 등 남로당을 중심으로 한 좌익계가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좌익세력의 집권이 유력시되는 상황이었다. 박정희는 국군 장교였지만 주저하지 않고 집권가능성이 큰 남로당에 가입했다. 그렇게 군내 남로당 프락치가 된 것이다.
박정희의 남로당 가입은 변신의 차원이 아닌 명백한 ‘반란행위’였다. 당시 남한은 단독정부 수립의 하나로 국군의 전신인 남조선국방경비대를 발족시켰으며 우파 민족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그 지도이념이었다. 조선경비대의 주요 임무는 좌익계열이 사주한 폭동이나 파업을 진압하는 것이었다. 그런 조선경비대의 장교가 공산주의 남로당에 가입한 것은 반란행위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당시 조선경비대에 침투한 남로당 조직은 1948년 한 해에만 4·3 제주폭동, 10·19 여순반란, 11·2 대구반란 등 일련의 소요사태를 일으켰다. 박정희는 여순반란건이 일어난 후 군내 남로당 프락치 검거와 숙군 선풍 과정에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검거되었다.
이때 검거된 피고인들의 공통된 죄목은 “1946년 7월경부터 1948년 11월경에 이르는 동안 대한민국 서울 기타 등지에서 각각 남로당에 가입하고 군내에 비밀세포를 조직하여 무력으로 합법적인 대한민국 정부를 반대하는 반란을 기도”하였다는 것이었고, 이들 가운데 박정희의 죄과는 ‘군 병력 제공자’로 적시되었다. 반란 기도 혐의로 기소된 박정희는 1948년 12월 30일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무기형을 언도받았으나 그런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도 예의 눈부신 변신술을 발휘하여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남로당 비밀조직원의 명단을 몽땅 넘기고 그대가로 혼자만 풀려난 것이다. 그 후 조선경비대는 1천여 명의 장교와 하사관을 투옥하거나 처형하는 등 대대적인 숙군 조치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리스트’가 요긴하게 사용되어 남로당 비밀조직을 일망타진하는 데 크게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박정희는 이렇듯 출세를 위해서나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조국이든 동료든 배신을 밥 먹듯이 했다(310~311쪽).

1963년 9월 26일자 조선일보 사설의 집필자가 박정희의 이런 ‘좌익 경력’을 알고도 윤보선을 비롯한 야당지도자들의 사상 공세를 무분별한 것이라고 비판했는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박정희, 15만여 표 차이로 윤보선에 승리

대통령선거가 중반전을 넘어섰을 때 국민의 당 후보 허정이 “협상으로는 단일화가 어려우므로 후보를 사퇴한다”고 발표하면서 “오직 군정 종식의 일념뿐”이라고 강조했다. 그의 사퇴로 박정희, 윤보선, 허정의 3파전은 군사정권을 대표하는 박정희와 실질적인 재야 단일후보 윤보선의 양자 대결로 압축되었다.

10월 5일 대전에서 유세에 나선 박정희는 “이번 선거는 사대(事大)와 신진세력의 대결이지만 이념의 본질에는 다를 바 없다”면서 사상 논쟁이 부적절한 것이라고 공격했다. 대전에서 강연회를 연 윤보선은 “반혁명자는 박정희 씨 자신”이라고 몰아붙이면서 “공화당 외곽단체인 YTP의 정체를 밝히라”고 요구했다(조선일보 10월 6일자 1면).

10월 9일 윤보선은 경북 안동 유세에서 공화당은 “공산당 돈을 가지고 공산당 간첩이 와서 공산당 식으로 조직한 사이비 민주정당”이라고 단정하면서 “공화당은 보수정당도 아니고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정당도 아닌 불법조직”이라고 비난했다. 같은 날 부산에서 연설회를 가진 박정희는 “구 정치인들이 지금 와서 5·16 혁명을 부인하려는 것은 물에 빠진 자를 건져놓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것과 같은 꼴”이라고 비난한 뒤 “야당들이 나를 빨갱이로 몰고 있으나 나는 육군소위로부터 구 정권 때 육군소장으로 있을 때까지 군 요직을 맡아 보았다”고 말하고 “내 사상과 신분이 의심스럽다면 과도정부나 민주당 정부는 왜 나를 그대로 두었으며 윤보선 씨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 그는 왜 나를 그대로 두었느냐”고 반문했다(조선일보 10월 10일자 1면).

10월 15일 저녁 제5대 대통령 선거 개표가 시작되었다. 개표 초반에 박정희보다 앞서 나가던 윤보선은 한때 23만여 표 차이의 우세를 보였고 16일 새벽 3시까지도 2만여 표를 앞서 있었으나 16일 오후부터 역전당하기 시작했다. 17일 오후에 끝난 개표 결과 박정희는 유효투표의 46.6%인 472만여 표를, 윤보선은 45.1%인 454만여 표를 얻었다. 차이는 겨우 15만여 표였다.

조선일보는 10월 18일자 2면에 「박정희 씨의 대통령 당선에 대한 축하와 기대」라는 사설을 올렸다.

최후의 일순까지 아슬아슬한 막상막하의 시소게임을 벌려오던 대통령선거의 개표도 마침내 끝났다. 먼저 제3공화국의 첫 대통령으로 당선의 영광을 차지한 박정희 씨와 여당인 민주공화당에게 축하의 뜻을 아끼지 않는 동시에 이 난국을 타개해야 할 중책 완수를 위해 건투 있기를 충심으로 빌어마지 않는다. 그러나 개표 결과가 여실히 증명하듯이 민의의 소재는 참으로 미묘한 것이 있다. 당락의 차이가 불과 15만여 표 차이라는 근소한 차이라는 사실에 내포된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점은 정권 담당자로서 신중히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생각한다. 더구나 박정희 공화당 총재는 군사혁명이라는 비상수단에 의해서 헌정을 중단시키고 3권을 한 손에 장악한 강대무비한 권력자로서 새로운 정치질서의 구상 아래 모든 유리한 여건을 총동원하여 방대한 조직망을 폈었고 유족(裕足)한 정치자금의 뒷받침이 있었을 것이라고 예측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권자의 36%, 총투표자의 43%에 해당하는 득표로써 간신히 이겼다는 것은 그만큼 강력한 민의의 반발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므로 결코 이에 외면해서는 안 될 일이다. 물론 무엇보다도 우리 국민의 민주의식이 두 차례의 혁명을 치른 결과 놀랄 만큼 높아졌다는 것과 둘째로는 혁명정부가 최초 확언한 그대로 공명선거를 보장한 그 훌륭한 태도를 여기서 재확인하게 된 것은 더 할 수 없이 기쁜 일이다. 그러나 솔직한 민심이 표시한 집계표를 해부해 볼 때, 왜 이렇도록 반군정의 기세가 팽배했던가. 특히 한국의 심장이라 할 수도 서울에서 야당 후보와 겨루어 7대 3이라는 압도적인 열세를 면치 못했다는 것은 비단 지난 2년 5개월의 군정 실적에 대한 가치 평가에만 그칠 일이 아니라, 금일 이후의 정치의 향방에 대하여 심각한 시사를 던지는 좋은 자료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
(…) 군인의 정치 관여를 군인이 얼마나 경원(敬遠)하는 것인가는 이번 선거 결과로써도 모를 리 없다고 할 때, 새 민정은 어디까지나 혁명적 기질을 축으로 하는 민간 우위의 원칙이 확립되어야 할 것이라 믿는다. 대통령당선자에게 기대하고 싶은 일들을 열거하자면 우리의 오늘 이 순간의 심정으로써는 거의 무궁무진, 한이 없을 정도이겠으므로 구체적인 문제는 뒤로 미루며 오로지 선거공약과 선거 유세 중의 약속을 신뢰하기로 하고 우선 뜻 깊은 선거를 통해 당선된 박정희 후보의 건강과 함께 이 나라 민주정치의 굳건한 발전을 소원하는 바이다.

이 사설은 박정희의 당선을 축하하면서 ‘참으로 미묘한’ ‘민의의 소재’를 지적하고 있다. 이 글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목은 조선일보가 5·16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사용한 표현으로 보인다. “더구나 박정희 공화당 총재는 군사혁명이라는 비상수단에 의해서 헌정을 중단시키고 3권을 한 손에 장악한 강대무비한 권력자”, “솔직한 민심이 표시한 집계표를 해부해 볼 때, 왜 이렇도록 반군정의 민심이 팽배했던가.” “특히 한국의 심장이라 할 수도 있는 서울에서 야당 후보와 겨루어 7 대 3이라는 압도적인 열세를 면치 못했다는 것은 비단 지난 2년 5개월의 군정 실적에 대한 가치 평가에만 그칠 일이 아니라”, “군인의 정치 관여를 군인이 얼마나 경원하는 것인가는 이번 선거 결과로써 모를 리 없다고 할 때” 등이 바로 그것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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