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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이양 둘러싼 박정희의 ‘번의’ 시리즈조선일보 대해부 3권 -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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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2.19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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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1961년 8월 12일 ‘혁명공약’을 통해 약속한 바 있는 민정이양에 관한 계획을 발표했다. “1)정권을 이양하는 시기는 1963년 여름으로 예정하고, 2)1963년 3월 이전에 신헌법을 제정하며, 3)1963년 5월에 총선거를 실시하는 한편, 4)정부 형태는 대통령책임제를 채택하고, 5)국회의 구성은 의원 정수 1백명 내지 1백20명의 단원제로 할 것”이라고 밝혔다(조선일보 8월 12일자 석간 1면).

‘8·12 성명’의 진의를 명확히 파악한 사람들이라면 박정희가 순순히 민간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물러나리라고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5·16 쿠데타 이후 이른바 ‘혁명주체세력’이 초헌법적 조치들을 남발하고 ‘용공’ 또는 ‘반혁명사건’을 만들어내면서 구 정치인들과 일부 군부 사람들에게 회복 불능의 상처를 입힌 사실이 박정희와 김종필이 이끄는 군사정권의 실체를 여실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국민 여론이면 출마 불가피’

조선일보 1962년 6월 4일자 석간 1면 머리에는 「국민 여론이면 출마 불가피 / 박 의장 자신은 아직 불고려 / 이 공보실장, 대통령 추대운동에 언급 / 군대 감시 받는 것보다 / 그들을 정치 일선에 / 구 청조회 멤버 일부, 대통령에 박 의장을 추진」이라는 기사가 올랐다.

최고회의 이후락 공보실장은 4일 상오 앞으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대통령으로 출마할 것인가의 문제에 관해 “출마하는 것이 진정한 지배적인 국민의 여론이라면 혁명도 국민을 위해서 일으킨 박 의장인 만큼 그분도 출마가 불가피하지 않은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박 의장 스스로는 아직 출마할 것인가의 문제에 관해 아직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하면서 박 의장의 결심의 방향에 관해 그의 사견(私見)으로서 그와 같이 말한 것이다. 이 실장은 하루 수백 통씩이나 박 의장이 민간정부의 지도자가 되어줄 것을 희망하는 건의서와 지금의 군사정부를 그대로 계속해 달라는 건의서가 박 의장에게 직접 또는 자신에게 들어오고 있다고 말하고, 그 수는 한 시의 인구를 이룰만한 수라고 말했다.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심복이자 그의 ‘입’인 이후락이 ‘사견’을 말했다고 믿기보다는 ‘민간정부 대통령 박정희’를 만들기 위한 애드벌룬을 띠운 것이라고 해석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박정희는 ‘8·12 성명’ 발표 1주년을 맞은 1962년 8월 12일 “혁명이념을 강력히 계승·실천할 수 있는 새 정당의 출현을 희망한다”고 말하고 “내년에 세워질 민간정부가 과거와 같은 잘못된 모습을 탈피치 못한다면 민족의 비극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여당과 야당을 균등히 지원할 것이며, 8·12 성명 구상은 변경할 계획이 없고, 유능한 민정을 위해 국민의 협조를 바란다고 말했다(조선일보 8월 12일자 석간 1면).

10월 8일에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박정희의 ‘대변자’로 나섰다. 그는 3명의 외신기자와 회견한 자리에서 “내년 3월로 예상되는 다음 대통령선거에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출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박 의장 자신은 민정이양 후 정치와 완전히 손을 끊을 것을 원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혁명과업 수행 도상에 있는 한국의 현실적인 여러 여건으로 보아 그는 다음 대통령선거에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조선일보 10월 11일자 조간).

‘개헌안 국민투표로 확정’과 조선일보 사설

군사정권은 1962년 10월 8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개정하고, 10월 12일 ‘국민투표법’을 제정·공포함으로써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제도를 도입했다. 11월 3일 작성된 헌법개정안은 11월 5일 최고회의에 상정되어 재적 25명 가운데 출석자 23명의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대통령권한대행 박정희는 그날 개헌안을 공고했다.

새 헌법의 핵심 내용은 “1)대의정치제도를 확립하기 위한 건전하고 민주적인 복수정당제 2)4년 임기의 단원제 국회와 당적 이탈·변경, 정당 해산 시 의원직 상실 3)4년 임기의 대통령이 1차에 한하여 중임할 수 있는 대통령중심제 4)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제” 등이었다. 이렇게 마련된 헌법 개정안은 곧 국민투표에 회부되었다. 11월 5일부터 30일 간의 공고기간이 지난 12월 6일 새벽 0시를 기해 군사정권은 쿠데타 이후 내려졌던 계엄령을 해제했다. 같은 날 최고회의는 재적 25명 중 출석위원 22명 전원의 찬성으로 헌법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최고회의를 통과한 헌법개정안은 12월 17일 국민투표에서 투표율 85.28%에 78.7%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군사 정권은 이를 자신들에 대한 신임으로 간주한 반면, 야당은 조속한 민정 복귀의 열망으로 해석했다.

12월 6일 계엄령이 해제되었으므로 언론은 5·16 쿠데타 이후 1년 7개월 가까이 느끼던 압박에서 상당히 벗어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국민투표 결과가 나온 뒤 조선일보가 12월 19일자 조간 2면에 실은 사설(「국민투표에서 얻은 자신으로 신뢰에 보답하여야 한다」)은 쿠데타세력에 대한 찬양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 이번 국민투표에 있어서 투표율과 찬성률이 이토록 높았다는 것은 정부당국자가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국민의 혁명정부에 대한 지지도가 높고 대외적으로는 우리 국민의 정치적 의식이 강함을 충분히 입증”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좀 더 다른 각도에서 국민들의 양식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투표 전에 우리는 본란을 통해 강조한 바 있거니와 이번 국민투표는 굳이 혁명정부의 신념을 묻는 투표가 아닌 것이며 오로지 제3공화국의 기틀을 잡기 위한 새 헌법을 승인·확정시키는 정치적 절차였던 것이다. 환언하면 5·16 혁명과 혁명정부의 통치가 이미 뚜렷한 기성사실로 된 현 시점에서 국민들로서는 현 정부가 마련하고 공약한 민정이양까지의 스케줄을 여하히 받아들이느냐에 더욱 절실한 현실적 판단이 필요했고 그 판단력의 집약이 헌법안 확정에 대한 찬성으로 반영된 것이라고 우리는 본다. 사실 투표가 끝났으니 말할 수 있는 일이지만 만약 지금 이 순간에 있어서 내용의 잘잘못을 둘째 치고 당면한 헌법안이 유산이라도 되었더라면 다음에 닥쳐올 혼란한 사태가 어떠한 것인가는 국민 누구나가 다 잘 알고 있는 상식이었던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안정을 갈구하고 새로운 질서에 희망을 걸면서 던진 국민들의 한 표 한 표는 실로 눈물겨운 염원의 결정(結晶)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
당연한 결과이지만 새 헌법이 확정됨으로써 혁명정부는 더할 수 없는 자신과 힘을 얻었다. 그것은 금일 이후의 제반 스케줄에 관해서뿐만 아니라 반사적 작용으로 자연히 누리게 된 정치적 신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자신과 힘을 근거로 혁명정부는 첫째 무엇보다도 국민이 혁명정부를 신뢰한 만큼의 신뢰를 국민에게 아끼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현재까지 혁명정부와 국민 간의 신뢰관계가 두텁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민투표라는 민주주의적 절차를 통해서 비공식적이긴 하나 혁명정부의 고위층들이 예측한 것을 훨씬 넘을 정도로 국민들은 드높은 신뢰를 표시했다. (…) 엄격히 따지면 (…) 당분간은 비상조치법에 의하여 계속 혁명과업 완수에 필요한 입법을 할 수 있다 하겠으나 그와 같은 입법과 시책에 있어서도 새 헌법의 정신을 충실히 반영시킬 것을 우리는 기대하면서 역사적인 국민투표의 성공을 혁명정부와 더불어 경하해 마지않는 바이다.


‘대통령 출마 여부는 당 결정에 따라’

12월 22일 최고회의는 헌법개정안이 국민투표를 통해 가결되었다고 선포했다. 12월 26일 새 헌법이 공포된 데 이어 27일 박정희는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선거를 1963년 4월에 실시하고 국회의원 총선거는 5월에 치를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이에 앞서 박정희는 12월 22일, 5·16 쿠데타 이후 ‘정치정화법(정정법)’에 묶여 정치활동을 금지 당했던 기성정치인 169명을 제1차로 해금(解禁)한다고 발표했다.

1962년 민정이양에 대한 박정희의 ‘번의(翻意) 소동’ 제1막의 막이 올랐다. 1961년 ‘8·12 성명’을 통해 “정권이양에 앞서 진정한 민주질서를 만들어내고 구악 재발 방지를 위해 최소한의 기초작업을 완수한 후 물러나겠다”고 한 ‘공약’을 뒤집기 시작한 것이었다. 조선일보 12월 28일자 조간 1면 머리에 실린 기사(「최고위원 군복 벗고 참정[參政] / 대통령 출마 여부는 당 결정에 따라 / 박 의장 민정이양 일정을 발표」)에 ‘번의’의 내용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27일 3군 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을 제외한 최고위원 전원이 “군복을 벗고 민정에 참여하기로 결정했고, 자신도 최고위원의 한 사람으로 민정에 참여하기로” 했으며, 대통령 출마 여부는 당 결정에 따르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상오 10시 10분부터 11시 17분까지 최고회의 본회의실에서 385일 만에 내외기자와 회견한 그는 자신의 대통령 출마 문제는 “말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도 않으며 시기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그러나 당원으로서 당에서 결정을 내리면 복종해야 하는 것”이라고 출마 의사를 정식으로 표명한 것이다. (…)
박 의장은 최고위원들이 그동안 여러 차례 논의한 결과 군복을 벗는 것이 보다 국가를 위해 충실히 봉사하는 길이라고 결정했으며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공약 위배가 아니라고 말했다.

조선일보는 12월 28일자 조간 2면에 「박 의장의 기자회견담을 보고」라는 사설을 실었다.

(…) 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뜻을 천명한 것은 그것이 비록 이미 기정사실처럼 국내외에 인식되어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 정치사상 매우 중대한 ‘모멘트’를 제공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물론 혁명공약 제6항의 해석을 둘러싸고 혁명주체세력의 민정참여란 위약(違約)이 아닌가 하고 회의하는 일부 국민들의 이론(異論)이 없는 바 아니고 또 혁명공약의 문의(文意)를 따져 시비하는 의논도 있을 수 있으나 “최고위원도 군복을 벗으면 일반 민간인과 마찬가지며 일반 민간인이라면 누구나 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혁명당사자들의 거취를 우리는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이 길이 “공약에 보다 충실하는 것이고 민족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터이므로 우리로서는 구태여 논평할 만한 것이 못될 것 같으며 오직 군복을 벗고 나서기로 결정한 것을 다행으로 여길 뿐이다. 그리고 그 최종적 판단은 오직 주권자인 국민들의 투표로써 결정될 것이란 점도 더 말할 여지가 없다.
둘째로 박 의장은 자신의 대통령 출마 여부와 최고위원들의 입후보에 있어서 비례대표제를 택할 것인가, 지역대표로 출마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통틀어 앞으로 결성될 소속정당의 결정에 일임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당연한 말이면서도 함축 있는 시사(示唆)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다만 여기서 추단할 수 있는 것은 박 의장의 대통령 출마는 벌써 결정적인 사실로 볼 수 있고, 소속정당에서 결정만 한다면 대통령 출마를 사양치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리고 혁명주체세력이 중심이 되는 정당은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철저한 반공정신, 혁명이념을 계승”하는 것임을 밝히는 동시에 “차기 정권을 잡을 정당은 혁명이념을 계승하고 혁명공약을 완수할 정당이라야 할 것”이라고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혁명주체세력이 조직하는 정당이 범국민정당이 될 것이라는 부연(敷衍)과 함께 단연 제1당으로서 집권할 수 있다는 전망을 무언 중에 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사설은 박정희와 ‘혁명주체세력’에 대한 맹목적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왜 그런가?
이 사설은 무엇보다도 먼저, 5·16 쿠데타 당일 이른바 ‘군사혁명위원회’가 발표한 ‘혁명공약’ 제6항을 박정희와 최고위원들이 어기겠다는 것을 합리적 근거도 없이 정당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는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는 것은 그들이 말하는 ‘혁명이념’이 실현되면 군대로 돌아가겠다는 명백한 약속이었다. 그런데 박정희가 기자회견에서 말한 대로 “최고위원도 군복을 벗으면 일반 민간인과 마찬가지며 일반 민간인이라면 누구나 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는 것”이라는 어정쩡한 이유로 그들이 금과옥조처럼 내세우던 ‘혁명공약’을 어길 수 있는가?

위의 사설은 “혁명당사자들의 결정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단정하고 있다. 조선일보의 그런 결론에 대다수 국민이 흔쾌히 동의할 수 있었을까?

게다가 이 사설은 박정희가 ‘8·12 성명’에서 명백히 밝힌 ‘민정 불참’ 공약을 어긴 데 대해서는 전혀 비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앞으로 국민과 야당, 심지어 양심적 현역 군인들이 박정희를 불신하고 그의 민정 참여를 반대하는 근거가 될 텐데도 조선일보 사설은 ‘무사통과’였다. 마치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혁명주체세력이 조직하는 범국민정당’의 기관지 같은 논조이다.


공화당 사전조직과 쿠데타세력 안의 갈등

1963년 1월 18일 민주공화당(이하 공화당) ‘발기 선언대회’가 열렸다. 김종필을 비롯한 발기위원 78명은 “자유민주주의의 새로운 기치를 들고 민족중흥의 의기(義氣)를 품고 오직 구국을 위한 선구적 정신으로 일어섰다”고 선언했다. 발기인들은 공화당 위원장으로 김종필을 만장일치로 선출했다(조선일보 1월 19일자).

1월 1일 정치활동이 허용되면서 ‘정치활동정화법’에서 풀려난 구 민주당 구파 중심의 인사들은 1월 24일 민정당 발기 선언문을 발표했고, 2월 1일에는 구 민주당 신파 중심으로 민주당 창당준비대회가 열렸다.

야당이 분열 상태로 정치활동을 재개한 반면, 쿠데타세력은 창당을 둘러싸고 심각한 내분에 휩싸였다.

(…) 중앙정보부와 재건동지회를 통해 은밀히 관제여당인 민주공화당을 만들고 있었던 김종필은 1962년 12월 23일 최고위원들에게 공화당 창당 상황을 보고했다. (…) 공화당 사전조직에서 소외된 김동하, 김재춘 등 군정 내 김종필 반대세력은 공화당의 이원(二元)조직과 공산당식 밀봉교육을 문제 삼아 공화당 창당에 반대했다. 김종필의 독주에 대한 비난이 계속되자, 최고회의는 1963년 1월 21일과 23일에 잇달아 회의를 열고, 김종필의 당직 사퇴와 중앙정보부의 당 관여 금지, 당 발기위원회 전면 개편을 박정희에게 요구했다(<한국민주화운동사1>, 377~378쪽).

조선일보(1962년 8월 21일 조간 8면 체제로 전환)는 쿠데타세력 안에서 김종필계와 반김종필계가 대립하는 상황에 관해 1월 24일자 2면에 사설(「혁명주체세력 내부의 이견과 그 근본원인을 해부한다」)을 실었다.

최고회의 외무국방위원장이던 김동하 씨가 혁명주체세력과의 일종 결별선언과도 같은 성명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그간 순탄한 조직 과정에 있는 듯이 보이던 민주공화당으로 하여금 심상치 않은 파란 속에 휩싸이게 된 것을 부정할 수 없다. (…) 명분이 각각 다르고 이유가 각양각색이라 할지라도 혁명주체세력이 생사를 같이하기로 맹서하고 거사하였던 불과 1년 8개월 전인 5·16 혁명 당시의 약속이 그 일각이나마 무너져, 현실정치에 발을 딛기가 바쁘게 보조의 혼선을 드러냈다는 것은 어느 모로나 유감이 아닐 수 없고, “과거의 정치악을 송두리째 뿌리 뽑아 참신한 정치풍토를 이룩해 놓겠다”는 혁명의 대의명분에 한 가닥 금이 가게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사태의 시비를 논하기 전에 혁명주체세력의 성예(聲譽)를 위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심사를 가진 소이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
(…) 우리로서 이 일련의 사태를 객관적으로 관찰할 때 몇몇 사람의 불평불만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폭발될 만한 원인이 혁명주체세력 안에 사실상 내재했고 이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이러한 사태의 재연(再燃)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원인이란 다름이 아니다. 혁명공약 제6항에 대한 해석을 뚜렷이 하지 않은 채 민정참여를 기정사실로 단정한 것이요, 원칙을 확립하기 전에 신당 조칙에 착수했다는 것이다. (…) 한마디로 말해서 혁명공약은 혁명을 일으킨 대의명분이요, 5·16 군사혁명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는 제6항을 변화된 정세에 적용시켜 “아직 혁명과업의 완전한 성취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부득이 민정의 이름 아래 군복을 평복으로 바꾸어 입고 참여해야겠다”는 이론으로 완전한 견해의 통일을 보았다면 솔직하게 그런 취지를 설득력 있게 국민 앞에 천명해야 했고, 그 기치 밑에 혁명주체세력의 굳은 재결속을 보았어야 할 일이다. “군복을 벗으면 민간인이 아니냐”는 이론이나 “애국하는 방법의 자유”와 같은 행동의 변법(辯法)으로써는 혁명공약 제6항에 관한 일점 의문이 없는 해석으로 받아들이기 힘드는 것이다. 따라서 명분의 대본(大本)이 공고하지 않은 까닭에 석연치 못한 곡해가 앞에 가로놓였고, 이것이 불평인사들이 반기를 드는 절호의 명분으로 내세우게 될 요소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니 혁명주체세력이 중심이 된 신당의 토대가 완전히 구축될 때까지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런 일이 재발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계엄령이 해제되고 정치활동이 재개되었기 때문인지, 이 사설은 혁명주체세력 안의 갈등과 대립을 걱정하면서도 그들이 ‘혁명공약 제6항’을 어기고 민정참여를 기정사실화하고, 원칙을 확립하지도 않고 신당 조직에 착수한 것을 비판하고 있다. 5·16 쿠데타 이후 조선일보에서는 보기 드물던 논조이다.


박정희, ‘시국수습안 수락하면 민정 불참’

1963년 2월 16일 국방부에서 각 군 수뇌회의가 열렸다. 회의 참석자들은 박정희의 민정 참여에 반대한다고 결의했다. 한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의 케네디 행정부도 같은 견해를 박정희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박정희는 2월 18일 기자회견을 열고 ‘정국 수습 9개안’을 발표했다. 민정이양을 둘러싼 박정희의 ‘번의’ 시리즈 속편이 나온 것이었다.

조선일보 2월 19일자 1면 머리기사(「오는 23일까지 각 정당 찬부 확답 기대 / 수락되면 민정에 불참 / 혁명과업 계승·정쟁 지양 / 군의 중립·정치 불보복」)는 그 내용을 자세히 보도했다.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18일 상오 혁명의 정당성과 헌법의 권위를 인정하고 민정이 4·19 및 5·16을 계승한 것을 확약하며 혁명주체들은 그들의 의사에 따라 정치적 거취를 정하고 유능한 예비군인을 우선 기용한다는 것 등 아홉 가지 시국수습방안을 제시하고 이 제안이 모든 정당인과 정치지도자들에 의해서 수락된다면 그는 민정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고 정정법에 발묶인 기성정치인들을 특수한 경우만 제외하고 전면 해제할 것이며 선거를 5월 뒤로 미루겠다고 약속하는 중대 성명을 했다. 그의 이 조건부 약속은 지난 13일부터 5일 동안 그의 측근자들과의 광범한 접촉을 통해 정국수습방안의 형식으로 내외기자들에게 공표되었다. 박 의장은 각 정당이 이 제의에 대한 수락 여부를 앞으로 5일 이내인 25일까지 밝혀줄 것을 요구하고 이를 수락할 때는 “본인은 지체 없이 군·정당 대표, 정치지도자들과 만나 그것을 엄숙히 준수할 것을 선서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일보는 호외까지 내면서 박정희의 ‘중대 성명’을 서둘러 보도했다. 창당을 준비하고 있던 야권의 민정당은 “공식으로 아무 이의 없다”, 민주당은 “결과적으로 수락은 불가피하다”고 박정희의 ‘시국수습안’에 찬동했다.

그것이 민정 참여를 위한 박정희의 ‘정치적 쇼’인지, 아니면 진심이 담긴 민정 참여 포기 선언인지는 조금 더 두고 보아야 할 일이었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성급하게도 2월 19일자 2면에 박정희의 ‘2·18 성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설(「제3공화국 건국 도상의 전환점에서」)을 내보냈다.

지난 수일 동안 심각한 정국 동요에 따른 제 문제에 대하여 그야말로 숨 막히는 듯한 긴박감에 사로잡혔던 우리는 원만한 민정이양을 통하여 제3공화국을 창건하는 길을 트기 위하여 발표된 박정희 의장의 2·18 성명을 보고 안도의 숨을 쉬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
(…) 박 의장의 9개조 제안은 이것을 수락하는 데 인색하여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
우리는 이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앞으로 정치가 명랑하여지고 그러한 좋은 환경 속에서 이 나라의 민주정치와 경제건설이 전 국민의 흔연한 참가 속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바탕이 이 2·18 성명을 계기로 하여 마련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우리의 기대는 정치인들의 고도(高度)한 애국적인 정치활동에서 비롯한다. 우리는 그래서 정치인들이 일체의 소승적인 태도에서 과감히 벗어나서 이 2·18 성명을 지지하는 데서 제3공화국의 발판을 마련하게 될 것을 진심으로 부탁하는 바이다. 끝으로 우리는 박정희 장군이 이번에 보여준 탁월한 식견과 그 우국적 정열을 치하하는 동시에 이 성명이 이 나라에서 다시는 4·19나 5·16 혁명과 같은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게 하는 초석이 될 것을 염원하면서 그의 영도 하에서 혁명주체 세력이 일체가 되어서 제3공화국의 민주적 창건에 노력을 다하여 줄 것을 당부한다.


공화당 창당과 박정희의 ‘민정 불참’ 선언

공화당창당준비위원장 김종필은 1963년 2월 20일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나 초야의 몸이 되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공직 사퇴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본인은 이 나라의 강력한 정치와 새 질서 확립을 위해 거름이 되겠다고 열과 성을 다하여왔으며, 이러한 신념에서 민주공화당의 창당을 위하여 그 산파역을 맡고 나섰으나 이러한 일들이 본인의 소임이 아니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조선일보 2월 21일자 1면).

2월 25일 김종필은 외유(外遊) 길에 올랐다. 이른바 ‘자의반(自意半) 타의반(他意半)’의 외유였다. 미국의 압력도 작용했다. 미 대사 버거는 이미 1월 24일 미 국무성에 보낸 전문에서 박정희가 김종필을 일체의 공직에서 사임시켜 외국에 보내겠다는 연락을 해왔다고 보고했으며, 이에 국무성은 버거의 보고를 치하하는 답신을 보냈다.
그러나 김종필이 만든 민주공화당은 건재한 만큼 그는 다시 돌아오게 돼 있었다. 그가 떠난 다음날인 2월 26일 민주공화당 창당대회가 열렸다. 총재엔 법조계의 원로인 정구영이 선출되었고, 당의장엔 김정렬이 지명되었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2권>, 176~177쪽).

2월 27일 정치지도자들과 각 군 책임자들이 서울시민회관에서 ‘정국 수습을 위한 선서식’을 가졌다. “역사상 처음 있는 식에서 46명의 정당 대표 및 정치인들은 박 의장이 지난 18일 내세웠던 9개 항목의 정국 안정을 위한 수습방안의 이행을 엄숙히 선서했으며 박병권 국방부장관을 비롯한 육·해·공군 참모총장 및 해병대사령관은 ‘군의 정치적 중립을 견지하고 새로운 민정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그 모임에 참석한 박정희는 정치인들의 선서와 서명날인이 끝나자 “본인은 민정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며 지난번 제안에서 밝힌 바대로 정정법에 의한 정치활동 금지를 전면 해제할 것”이라고 약속했다(조선일보 2월 28일자 1면).

정치지도자들과 3군 참모총장, 그리고 해병대사령관까지 참석한 선서식에서 박정희가 ‘민정 불참’ 의사를 명확히 하는 성명서를 낭독한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자 야당인 민정당과 민주당은 “사실상 군정이 종식되었다”면서 기뻐했다. 주요 일간지들의 기사도 흥분 일색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8일밖에 지나지 않은 3월 7일, 박정희는 강원도 원주의 1군사령부를 시찰하는 자리에서 장병들에 대한 ‘훈시’를 통해 묘한 발언을 했다. 조선일보 3월 8일자 1면 머리기사(「국민에 해독 끼치고 질서 문란케 한 / 기성정치인은 일선에서 물러나야 / 정국이 다시 혼란해진다면 / 방임하는 것이 애국이냐 / 방관 않는 것이 애국이냐 / 나는 모 외국인 질문에 이렇게 반문했다」)에는 그의 발언 요지가 요약되어 있다. 박정희는 그 자리에서 “정치인도 군에 간섭 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월 27일의 선서식에 참석해서 정치지도자들과 각 군 최고지휘관들 앞에서 ‘민정 불참’과 ‘정치활동 금지 전면 해제’를 공약한 박정희가 원주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린 것을 보고 야당과 국민들은 경악했을 것이다.

조선일보 3월 16일자 1면은 마치 ‘비상사태’를 맞은 듯이 1면 머리에 사설(「일부 군인들의 탈선행동에 경고한다」)을 올리고 그 옆에 관련기사(「장병 약 80명을 체포 / 어제 최고회의 앞서 건군 이래 처음인 군인데모 / 정치에 관여했기 때문 / 수도방위사령관이 체포 명령」)를 내보냈다. 이 기사는 군인들의 데모 경위를 이렇게 보도했다.

(…) 몇 사람의 육군소령을 포함한 위관급 육군장교 약 50명이 30여명의 하사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15일 낮 12시 10분부터 최고회의 앞마당에서 쿠데타음모사건을 규탄, 박병권 국방부장관의 사임을 요구하며 계엄령의 선포를 주장, 군정을 연장하든지 박정희 의장이 직접 민정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는 데모를 감행, 두 시간 만에 전원 수도방위사령부에 연행돼 갔다. 이들 현역 장병은 여섯 가지 요구사항을 내세워 큰 제지를 받지 않은 채 데모를 계속했다. 김진위 수도방위사령관이 현장에 나와 해산을 명령했으나 그들은 “박 의장이 이 자리에 나올 때까지는 죽어도 물러갈 수 없다”고 버티었다.


1면 머리의 사설은 아래와 같이 격앙된 어조로 시작된다.

현역군인 수십명이 최고회의로 몰려들어 데모를 했다 한다. 동기나 이유를 따질 겨를도 없이 명색 민주공화국에서 이런 일이 과연 있을 수 있는 것일까. 국방장관을 위시해서 3군 참모총장과 해병대사령관이 국민 앞에 ‘군의 정치적 중립’을 선서한 것이 바로 16일 전의 일이 다. 그런 선서가 없었다고 한들, 군인이 정치에 관여를 해서 어떤 결과가 초래될 것인가는 고금의 역사가 소연(昭然)히 가르쳐주고 있는 바다. 하물며 5·16 혁명으로 군이 통치를 하고 있는 이 마당에 그 혁명정부의 예하에 있는 젊은 장교들이 떼를 지어 통수계통을 문란하고 정치적 구호를 내걸어 행동한다는 것은 하극상의 기풍, 그 극에 달했다 해도 잘못이 아니요, 군율을 무시함이 이에 더할 바 없음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그에 가담한 수효가 기십명에 불과하거나, 사려가 미숙한 혈기에서 온 소치라 할지라도 군인 된 본령을 망각한 이들의 사고 기저가 벌써 국가의 화근이니 국민 된 자 추호의 동정이 있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 정치에 눈을 떴거든 군복을 벗고 정치운동으로 나서라. 왜 비겁하게도 신성한 군복을 걸치고 무기를 지닌 특권을 향유하며 군율을 어기고, 국법을 짓밟고, 국민의 이름을 함부로 남용하는가. (…) 우리는 정녕코 이런 소아병적 혈기야말로 국가를 백척간두의 위기로 몰아넣는 반민주적 군국주의의 남상(濫觴)임을 개탄하면서 군법의 추상 같은 발동을 ‘전 국민의 이름’으로 강력히 요구한다. 당국은 이들의 엄단을 발표한 바 있지만 만에 일이라도 이런 사태에, 같은 군대의 부하라 하여 조금이라도 온정이나 무마가 가해진다면 일파만파로 연쇄반응은 그칠 줄을 모를 것을 우리는 심우(深憂)한다. ‘울며 마속(馬謖)을 참(斬)한’ 제갈공명의 비장한 공심(公心)이 절실히 요청되며 민주주의 만년의 기초를 확립하기 위하여서 차제에 군의 강철 같은 단결과 함께 군 책임자들의 단호한 결의가 있어야 할 줄 안다.

박정희는 ‘군인 데모’에 관한 보고를 받은 뒤 “군인이 데모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크게 화를 내면서 “데모를 한 장교들을 엄격히 군법으로 다스리라”고 지시했다(조선일보 같은 날자 1면 기사).

조갑제가 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5: 김종필의 풍운>(조선일보사, 1998, 250쪽에는 군인 데모 사건은 박정희의 경호실이 조직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박정희, ‘군정 4년 연장’ 전격 제의

민정이양을 둘러싼 박정희의 ‘번의’ 시리즈는 1963년 3월 16일 막바지로 치달았다. 조선일보 3월 17일자 1면 머리와 그 밑에 실린 관련 기사들의 제목이 ‘급작스런 번의’의 내용을 요약해서 보여준다.

· 「박 의장, 군정 4년 연장을 제의 / 최단 시일 내 국민투표에 붙여 가부를 결정 / 정치활동은 즉시 중지 / 국민투표서 신임 못 얻으면 / 민정에 참여 않고 정권 이양 / 국민투표서 가결될 경우 5개 시책 내용- 초당파적으로 정부에 인재 등용, 최고회의 개편하고 민간인 참여, 정계 중진으로 자문기구를 구성, 민정이양 위한 연구기관을 설치, 양당제도 위해 분위기 조성 노력」
· 「박 의장 성명 내용 / 15일 밤에 알았다 / 한·미회담서 버거 대사에 통고」
· 「정치활동은 정지하고 / 기본권도 일부 제한 / 비상사태수습임시조치법 공포」
· 「4월 말에 실시될 듯 / 군정 연장 위한 개헌안 국민투표」

박정희가 ‘민정 불참’을 명백히 공약한 ‘2·27 성명’을 철석 같이 믿고 민간정부 수립을 위한 절차 발표를 기다리고 있던 야당 정치인들과 언론은 그가 ‘군정 4년 연장’을 제의하자 충격과 분노를 삭일 수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가 ‘군정 4년 연장’을 제의한 ‘3·16 성명’을 발표한 지 이틀 뒤인 3월 18일 최고회의 법사위원장 길재호는 언론에 대한 계엄령이나 다름없는 조치를 발표했다. 조선일보 3월 19일자 1면에 실린 기사(「찬·부 사설 게재할 수 없다 / 사견도 선동적 내용이면 저촉 / 벽보 첨부나 비라 살포 안 된다」)는 다음과 같다.

최고회의 길재호 법사위원은 18일 “군정 연장의 개헌안에 관해 개인 의사 표시라 할지라도 일체의 선동적인 내용은 그 찬부를 막론하고 법에 저촉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 길 위원은 “그러나 이 같은 의사를 여러 사람(예를 들어 서너 명) 앞에서 밝히는 행위는 선동을 위한 것으로 간주하며 벽보나 삐라를 뿌리는 것도 선동행위로 간주되어 법에 저촉될 것”이라고 밝혔다.
비상사태수습을 위한 임시조치법(이하 임시조치법)의 해설을 위한 기자회견에서 그 같이 밝힌 길 위원은 “신문사도 동법 제3조(언론 출판의 제한)에 명시된 기타의 단체로 간주한다”고 밝히고 “개헌안에 관한 찬부의 사설을 게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것이 “신문의 일체 기능 정지를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그는 “그렇게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국민의 공정한 판단에 장해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찬부의 선동적인 언사를 금지시키도록 비상사태를 위한 임시조치법이 마련된 것이라고 밝힌 길 위원은 “이 법의 폐기 여부는 국민투표가 끝난 다음에 가서 봐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이 법을 어기는 이는 동법 벌칙뿐만 아니라 비중에 따라 다른 법을 적용하여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열흘 넘게 사설 중단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3월 17일자부터 열흘이 넘도록 사설 없는 신문을 펴냈다. 임시조치법에 ‘저촉’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인지, 군사정권의 언론 탄압에 저항하기 위해서인지 명백히 밝히지는 않았다. <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신문 그 이상의 미디어, 조선일보>(조선일보 90년 사사 편찬실, 2010, 이하 <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에는 그 동기와 과정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혼란스런 정국 속에서 군사정부는 3월 16일 군정 연장을 제의하면서 ‘비상사태 수습을 위한 임시조치법’을 함께 공포, 정치활동을 정지시키고 언론·출판과 집회·결사의 자유를 제한했다. 그러나 민정이양을 주장해온 조선일보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당당히 대응했다. 우선 조선일보는 이 비상한 상황에서 3월 17일자부터 3월 28일자까지 12일 간 언론사상 초유의 ‘무사설(無社說) 신문’ 발행이라는 획기적인 결정을 했다. 당당하게 소신을 주장할 수 없게 하는 임시조치법의 제약 밑에서 검열을 받으면서 사설을 쓰느니 차라리 사설을 싣지 않는 편이 낫다고 결정한 것이다. 그것은 언론 통제에 대해 침묵으로 항의한 것이었다.
조선일보 사설은 12일 동안의 침묵 항거 끝에 3월 29일자에 부활했다. 이는 최고회의가 28일 ‘임시조치법’의 언론제한 적용 대상에서 신문사나 통신사 등 언론기관은 제외된다는 유권해석을 내렸기 때문이다. 당시 최고회의가 후퇴한 것은 언론계의 거센 저항 때문인 것으로 해석됐다(201~202쪽).

미국 국무부는 3월 25일 군정을 연장하려는 한국 최고회의의 의도는 “안정되고 효율적인 정치에 대한 위협”이라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군사정권에 대해 미국 행정부가 보기 드물게 강경한 ‘경고’를 보낸 셈이었다.

조선일보는 3월 29일자 1면에 「3·16 성명을 철회하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올렸다. 박정희가 ‘군정 4년 연장’ 제의를 한 지 13일만의 일이었다. 그 사설은 평소보다 한 급 높은 4호 활자로 인쇄되었다.

박 의장의 2·18 정국수습 성명과 2·27 정치인 선서로써 이 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에 희망과 확신을 가졌던 우리는 박 의장의 3·16 성명에 접하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음을 여기 솔직히 표명한다. 회고하면 우리는 본란을 통하여 8·12 성명에서 혁명정부가 2년 간의 군정을 실시하겠다고 내외에 공포하였을 때에 당시로서는 그 기간이 너무 길다는 일부 여론을 물리치고 그것이 긴 기간이 아님을 주장하였던 것이며, 다시 작년의 후반기부터 이 나라의 조야(朝野)를 시끄럽게 하였던 박 의장의 민정 참여 문제에 있어서도 박 의장이 군복을 벗고 대통령선거에 입후보 하는 것은 아무도 그 권리를 범할 수 없는 당연한 일이라 하여 또한 일부의 여론을 배격하였던 것이다. 그 후 국민투표로 제3공화국의 헌법이 확정된 데 이어서 정초부터 정치활동이 재개되고 나서 어려운 사태가 벌어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즉 작년 5월 말에 있은 증권 파동의 여파로 나날이 심각의 도를 가하여 온 산업계의 변조(變調)와 통화개혁의 실패가 가져온 부작용에 가하여 작년부터 흉작으로 인한 곤란 등등은 모처럼 애쓴 혁명정부의 근 2년간에 걸친 경제정책의 성과를 저지하는 불행을 가져왔으며 이러한 불행에 설상가상격으로 뒤덮친 혁명세력 내부의 공개화한 불화와 일부 정치인들의 탈선적인 언동은 마침내 혼란과 무질서를 나타나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전도의 빛을 내다보는 실마리를 찾기 어렵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누란의 고비에서 이를 극복하여 숨 막히는 긴박상태를 제거한 것이 바로 박 의장의 2·18 정국수습 성명이었던 것이다. (…)
(…) 아무리 현명한 지도자나 아무리 총명한 민족인들 그 당시의 그 판국에 그 이상으로 현명한 정국수습방안을 내기 어려웠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가 한국민임을 더 이상 없이 만족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우리의 자부와 긍지는 이제 3·16 성명에 접하고 일락천장(一落天仗) 격으로 말할 수 없이 충격을 받았음을 여기 솔직히 표명한다. 우리는 박 의장과 혁명주체 제위의 애국심과 우국적 정열을 여전히 믿고자 한다. 그러나 2·18 성명의 애국과 총명을 어제도 오늘도 최상의 것으로 평가하는 우리는 3·16 성명에서 표현된 민족의 진로에 도저히 찬동할 수 없음을 크게 유감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
(…) 우리는 박 의장과 그가 영도하는 혁명요인들이 5·16 혁명의 순수한 동기를 살린 2·18 성명에서 보여준 그 총명과 용기를 여기서 다시금 높이 평가하면서 혁명의 금자탑으로 이룩하여 놓은 2·17 선서를 엄숙히 재확인하고 3·16 성명을 철회할 것을 진심으로 호소한다. 박 의장과 혁명요인들의 그와 같은 용기와 총명은 그 당자는 물론 민족의 역사를 길이 빛나게 할 것임을 우리는 확신하여 의심하지 아니한다.
독자 여러분께: 그동안 본지는 사설을 쓰지 않았습니다. 떳떳이 소신을 주장할 수 없는 법의 제약 하 본의 아닌 무문(舞文)으로 국가대사를 논하기보다는 오히려 침묵을 지키는 것이 언론의 정도(正道)라고 믿은 신념에서였습니다. 독자 제위의 현찰(賢察)과 해량(海諒)을 바라는 바입니다.

박정희가 ‘3·16 성명’을 통해 군정을 4년 동안 연장하겠다고 ‘제의’한 이튿날부터 조선일보는 사설을 싣지 않았다. 그 성명에는 ‘군정 연장’이라는 내용만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군정 연장의 개헌안에 관해 개인 의사 표시라 할지라도 일체의 선동적인 내용은 그 찬부를 막론하고 법에 저촉되는 것”이라는 요지의 임시조치법을 공포한다는 항목도 그 성명에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일보는 위의 사설 끝에 붙인 ‘독자 여러분께’라는 글에서 “떳떳이 소신을 주장할 수 없는 법의 제약 하 본의 아닌 무문으로 국가대사를 논하기보다는 오히려 침묵을 지키는 것이 언론의 정도라고 믿은 신념” 때문에 사설을 싣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위에 소개한 3월 29일자 사설에 나오듯이 조선일보가 “3·16 성명에서 표현된 민족의 진로에 도저히 찬동할 수 없”었다면 꼭 침묵을 지키는 길을 선택해야 했을까? 군사정권이 악법으로 언론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을 정당하게 비판하면서 박정희의 군정 연장 기도가 민족의 앞날을 캄캄하게 만드는 ‘제2의 쿠데타’라는 사실을 마땅히 지적해야만 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언론의 길이 아닐까?

게다가 위의 사설은 3·16 성명을 철회하라고 요구하면서도 박정희가 민정이양을 둘러싸고 되풀이한 ‘번의’에 대해서는 전혀 비판을 하지 않는 채, 2·18 성명에 나타난 ‘박 의장과 혁명주체 제위의 애국심과 우국적 정열’을 ‘최상의 것’으로 평가하는가 하면 ‘혁명의 금자탑으로 이룩하여 놓은 2·17 선서’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헌정을 뒤엎은 쿠데타세력에 대해 이런 존경심을 품은 언론인들이 작성한 사설이 3·16 성명 발표 열흘이 넘어서야 지면에 나타난 사실을 ‘용기’의 표현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박정희의 ‘번의’ 시리즈 막을 내리다

4월 1일 박정희는 야당인 민정당 청년당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2·27 선서는 정권을 꼭 넘겨주고자 한 것이 아니라 기성정치인들에게 반성할 기회를 주려고 한 것”이라고 말하고 “3·16 성명을 지키기 위해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을 걸기라도 하겠다”고 강조했다(조선일보 4월 2일자 1면, 이하 모두 조선일보 기사 인용).

박정희는 4월 8일, ‘군정 4년 연장’을 국민투표에 붙이겠다던 3·16 성명의 핵심 내용을 뒤집어 “9월 말까지 국민투표를 보류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국민투표냐 총선거냐’에 관해서는 9월에 각 정당과 협의해서 결정하고, 임시조치법을 폐지하고 정치활동을 재개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4월 9일자 1면).

4월 30일 내각수반 김현철은 중앙청에서 각의가 끝난 다음 비밀간담회를 가진 자리에서 “박정희 의장은 다음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기로 결심하였으며 그에 따라 연내에 민정이양을 할 것도 곧 공식으로 발표할 것”이라고 밝혔다(5월 1일자 1면).

5월 5일 오후 윤보선, 박순천 등 7명의 재야정치지도자들은 서울 교동국민학교에서 3만여 명의 시민이 모인 가운데 ‘군정 연장 반대 대연설회’를 열고 박정희의 대통령선거 출마에 반대하면서 “피란할 길 없는 국난 극복에 총궐기하자”고 호소했다(5월 7일자 2면).

5월 27일 민주공화당은 제2차 전당대회에서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를 대통령후보로 지명했다. 박정희는 “절차상의 시간을 달라”면서 후보 수락을 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5월 28일자 1면).

6월 1일 박정희는 AP통신 기자와 인터뷰를 한 자리에서 “대통령으로 출마하는 경우 군복을 벗을 것”이며 “야당의 불평을 들어 선거법을 개정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재건의 기초는 이미 달성했으며 혁명정부 내 부패를 은폐하지 않겠다”고 밝혔다(조선일보 6월 2일자 1면).

박정희는 7월 27일 최고회의 공보실장 이후락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10월 중순에 대통령선거를, 11월 중순에 국회의원 총선거를 치르도록 하겠으며 국회는 12월 중순에 소집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7월 28일자 1면).

마침내 1963년 8월 30일 오전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지포리에 있는 제5군단 비행장 안에서 박정희의 전역식(轉役式)이 열렸다. 조선일보 8월 31일자 1면 머리기사(「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대장 전역식 / 혁명 악순환 없도록 민정 참여 굳게 결심」)를 보기로 하자.

(…) 5·16 군사혁명의 영도자였던 그는 전역의 인사를 통해 “군사혁명을 일으킨 한 책임자로서 2년에 걸친 군사혁명에 진정 종지부를 찍고 혁명의 악순환이 없는 조국 재건을 위해 항구적인 국민혁명의 대오, 제3공화국의 민정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고 그의 진로를 밝혔 다.
박 의장은 또 “비분강개, 눈물을 머금고 겨레가 피로에 지친 새벽에 혁명의 총부리를 돌렸기 때문에 군복을 벗는다”고 예편하는 연유를 밝히고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하자”고 호소했다.
박 의장의 군대생활의 종지부는 김성은 국방부장관이 “육군대장 박정희 명(命) 예비역 편입”이란 짤막한 국방부 일반명령을 낭독함으로서 찍어졌다.

‘민간인 박정희’는 8월 31일 오전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공화당 제3차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 지명 수락 연설을 한 뒤 총재로 선출되었다. 번의에 번의를 거듭하던 그의 ‘정치적 쇼’가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9월 2일자 2면에 「박 의장의 대통령 입후보 확정과 혁명정부가 가질 금후 자세」’라는 사설을 올렸다.

(…) 작년 가을경부터 박 의장의 거취 문제를 에워싸고 일어난 물 끓듯한 찬부 양론과 몇 차례 번복된 중대성명으로써 갈피를 못 잡게 되었던 국내 정세를 회고한다면 그 잘잘못은 후세 역사의 심판에 일임하기로 하고 혁명 주체세력의 차기 민정 참여 방침은 가까스로 움직일 수 없는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 그동안 군사혁명의 상징으로서 박 의장이 되씹은 인간적 고뇌는 자신의 고취에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소위 8·12 성명으로써 민정이양 스케줄의 대강(大綱)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오늘의 이러한 사태는 전혀 예기치 않았을 것이다. (…) 청천벽력과 같은 3·15 번의성명 이래 4·8 재번의성명 등으로 박 의장의 출마 의사가 거의 굳어져갔음을 간파했던 모든 국민이긴 하나 막상 평복으로 갈아입은 박 의장의 입으로, 공식 출마선언이 있게 된 금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을, 혁명 2년유여의 지나간 나날에 새삼 천사만회(千思萬懷)의 솟구쳐 오름을 금할 수가 없다. (…)
(…) 군사혁명이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어느 권력체제가 더 적합한 것인지는 상식에 속한 문제이겠으나, 과도기적 권력의 공백을 피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다면 최소한 중간적 과도정부로서의 성격을 엄격히 지켜나가야 할 줄 안다. 어름어름 넘겨 군사혁명정부인지, 중간적 과도정부인지 분간을 못할 만한 형태로 선거기간을 관리하게 된다면 국정상의 손실이 이에 더할 바 없는 것이며 박 의장이 금과옥조로 부르짖는 ‘역사상 최초로 공명정대한 선거’ 태세에 흠이 갈 수 있음은 물론, 제3공화국의 새 아침을 맞이하려는 국민의 벅찬 염원에 일말의 의구를 불식하지 못하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박 의장의 입후보 확정이라는 중대한 정치적 포석 뒤에 올 조리 정연한 혁명정부의 태세 정비가 있기를 바라면서 이를 주목하는 바다.

이 사설은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기로 한 결정에 ‘덕담’을 보내면서 최고회의 체제의 군사정권이 ‘공명정대한’ 선거 관리를 해달라고 당부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천진한 낙관’을 바탕으로 한 것인지는 10월에 치러질 대통령선거 과정과 결과로 여실히 입증되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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