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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의혹 사건’과 공화당 불법 창당조선일보 대해부 3권 -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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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2.12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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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정권이 언론 탄압과 통제에 주력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민정이양’에 대비해서 ‘혁명주체세력’이 참가할 정당을 비밀리에 만들기에 앞서 그런 작업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려면 언론을 침묵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거액의 정치자금을 조성하기 위해 군사정권이 일으킨 것이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으로, ‘증권 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회전당구 사건(세칭 빠찡꼬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증권 파동’을 ‘중계’하기만 한 조선일보

‘4대 의혹 사건’ 가운에 가장 규모가 크고 많은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친 것은 김종필이 부장으로 있던 중앙정보부가 개입한 ‘증권 파동’이었다.

1962년 조선일보 석간 1면에는 「매물 속출로 후퇴 / 주력주 등 1할 내외로」라는 제목의 2단 기사가 실렸다.

대한증권거래소 서울증권시장의 28일 전장(前場) 시황은 월말 결제자금과 긴급수요자금에 압박을 받아 매물이 속출함으로써 1,2개 주식을 제외한 모든 주식의 시세는 1할 내외까지 후퇴하였다. 대증과 연증이 1할 5푼 이상 후퇴하였고 인기주인 한전주도 1할 정도 후퇴하였으며 그 외에 은행, 해공, 미창 등 각 주식도 거의 같은 폭으로 후퇴하였는데 경방주와 조흥은 신주만은 미신(微伸)이었다. 이러한 장세는 월말로 끝나는 보통거래의 결제 또는 그 외의 월말 수도(受渡) 등의 결제자금 조달을 위한 방매에 불안의 인기가 가세한 탓으로 예측된다.

이것이 나라 안을 뒤흔든 ‘증권 파동’의 시작이었다. 하루 사이에 거의 모든 주식 가격이 10%나 떨어졌다면, 그것은 단순히 ‘결제자금 조달을 위한 방매’ 때문이라고 볼 수 없는 사건이었다. 공기관을 비롯한 강력한 조직의 개입이나 ‘작전’ 없이 그런 돌발적 사태가 빚어질 수 없음은 물론이다.

6월 1일자 조선일보 석간 1면에는 「주식 거래를 중지 / 증권거래 대리인들 자진해서」라는 기사가 아래쪽에 2단으로 실렸다. 그 기사는 1면 머리에 오른 요란한 제목에 눌려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반혁명 사건의 윤곽 판명 / 주동인물은 김상돈·조중서·김인칙 등 / 김 중앙정보부장, 수사 내용 일부를 발표 /6월 23일에 쿠데타 계획 / 우선 과정(過政), 8·15에 정권이양 / 41명이 중심·포섭된 자도 1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내용이었다. ‘전 민주당 간부들과 일부 예비역 간부들’이 관련된 ‘반혁명사건’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이 사건은 흐지부지 되다시피 했다.

5월 31일자 조간 1면에 「2백억 긴급 융자 /대증과 연증의 일시 증권자금」, 6월 3일자 조간 1면에 「프리미엄률은 주당 30환 / 연증증자주, 7일부터 일반 공모」라는 기사를 조그맣게 실은 조선일보는 6월 4일자 석간 1면에 「증권시장의 5월 말 위기의 재발을 막기 위하여」라는 사설을 올렸다. 그 이전 한 주 동안 조선일보를 주의 깊게 본 독자들은 지면에서 ‘증권시장 위기’의 징후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설이 느닷없이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지나치게 상기(上氣)하여 과열 상태라고 인정되어온 증권시장이 드디어 어려운 고비를 겪게 되고야 말았다.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증권업의 역사가 짧고 또 이에 상장되는 증권이 종목이나 수량이 소규모로 국한되어 있어서 모든 점이 미흡하고 생소한 것을 염두에 두면 이러한 어려운 고비는 지금은 그 미치는 영향의 규모나 범위가 적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와 같은 어려운 고비는 앞으로 얼마든지 더 있을 수 있는 것이며 더욱이 정부나 증권업계는 물론이요 일반 국민이 다 함께 바라는 것처럼 앞으로 증권업의 비중이 커지면 커질수록 금후에 있을 증권업 파동은 국민경제, 나아가서는 나라의 발전에 거의 치명적인 타격을 줄 것이 뻔하다. (…)

기왕에도 우리는 증권업계의 건전한 성장 발육을 위하여 기회가 있는 때마다 제언과 비판을 하여온 터이다. 이제 5월 말의 수도(受渡)를 계기로 하여 표면화된 그 간의 기형적 발자취에 서 우리는 증권업계가 다시는 그러한 고비를 피하면서 걸어가야 할 지표를 계시 받은 것 같다. 첫째로 증권 투자에 참가하는 일반 인사들에 대한 계몽과 지도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

둘째로 증권업자들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여야 할 것이다. (…) 재무부장관은 증권업자가 고객 또는 기타의 위탁자로부터 증권 매매를 수탁할 때에 법에 정한 대로 감독을 명확히 하고 있는가, 그리고 일단 위임 받은 후에는 신의와 성실로써 이것을 이행하는가를 감독권을 발동하여 감시·견제하여야 하며 또 증권업자의 영업용 자금을 항시 파악하여 무모하게 대량 매매할 수 있는 법외의 길을 봉쇄하는 데 그 소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박 의장의 지시로 6월 중에 있을 증권계에 대한 감사에서도 이러한 점이 구명(究明)되어질 것을 기대하거니와 우리의 보는 바에 의하면 아무리 투기가 성행한다 하여도 이 두 가지 점만 철저히 이행되면 증권시장의 위기는 미연에 방지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정부의 감독권이 제대로 수행되자면 재무부에 새로운 보조기구를 두어서 이 방면의 일을 전담케 하여야 할 것으로 본다.

이 사설은 증권시장에서 대대적으로 ‘작전’을 벌이고 있는 ‘검은 손’의 정체를 파악하지도 못한 채 증권 투자에 참가하는 일반인들에 대한 계몽과 지도, 그리고 증권업자들에 대한 감독만으로 증시의 위기를 막을 수 있다는, 단순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박정희는 6월 7일 “증권 파동을 미리 막지 못한 재무부 책임자들을 인책하고 내각수반이 이미 제시한 증권 거래 방식 및 운용관리 개선방안을 적극 실시하여 파동을 신속히 수습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는 조선일보의 사설처럼 교과서적 처방을 하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6월 9일 오후 7시 반에 ‘증권 파동’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일보 6월 10일자 조간 1면 머리에 대서특필된 화폐개혁이 바로 그것이었다. 화폐개혁에 관한 기사들은 1면을 뒤덮었다. 제목은 아래와 같다.

· 「화폐개혁을 단행 / 10 대 1로 절하·환(圜)을 원으로 호칭 / 어제 밤 긴급 통화조치법 공포 / 박 의장 담화, 경제 안정에 기여 / 혁명 초부터 개혁 기도」

· 「서울 오늘 중에 신고 / 액면 50 환 이하 구화는 7월 10일까지 병용 / 구권은 1주일 내 예입」

· 「6종의 신권 발행 / 1원·5원·10원·50원·100원·500원 / 한국은행에서 공고」

· 「퇴장자금 산업화 / 1주일 동안의 서민생활이 걱정」

증권시장은 6월 11일부터 휴업에 들어갔다. 주식에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본 사람들(속칭 ‘개미들’)은 시장이 문을 닫자 속수무책으로 땅을 쳤을 것이다.

6월 27일 최고회의 산하 증권파동특별감사단 단장 유양수는 이렇게 발표했다. “정부가 증권시장의 건전한 육성책을 강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증권시장 관리기관과 증권업자 등이 국가적 사명과 증권업 본연의 임무를 잊어버리고 눈앞에 있는 이익 추구에만 혈안이 되어 부당한 경쟁을 자행하여 이번의 파동을 일으켰던 것이다.”(조선일보 6월 27일자 석간 1면).

조선일보는 7월 3일자 석간 1면에 「증권시장의 발전에 기대한다」라는 사설을 실었다. 이 사설은 결론 부분에서 원론적인 ‘희망사항’을 되풀이 썼다. “우리는 정부와 거래소 당무자들이 하루바삐 시장이 재개되도록 노력하기를 요망하는 동시에 단시일 내에 재개할 수 없는 경우에는 재개를 가로막는 애로와 난관이 무엇인가를 공개하기를 바란다. 신임 방 이사장 이하 거래소 진용이 쇄신된 것을 계기로 하여 진정한 자본시장으로서의 거래소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관계당국자들의 노력을 당부한다.”

증권시장은 정식 휴장 32일 만인 7월 13일 오전에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나 시장은 갈팡질팡하다가 7월 말에 붕괴 상태에 빠졌다. 조선일보는 8월 5일자 조간에 처음으로 ‘공개조작론’에 관한 기사(「시세, 폭락을 거듭 / 증권시장, 공개조작론도 대두」)를 4단으로 실었다. “서울증권시장은 주력주인 대증주가 증자에 의한 번식률을 제외하고도 최고시세 6원으로부터 13전에까지 격락(激落)함으로써 가격 파동이 휘몰아치고 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증권업계에서는 정부당국의 소극적인 시책에 비난을 퍼붓는가 하면 관계자 사이에서는 시장공개조작론이 대두하고 있어 이제는 막다른 골목에서 새롭고 적극적인 시장 육성책이 제기되고 또한 혹종(或種)의 암시도 있음직한 시기 같다.”

증권 파동의 책임자인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나중에 최고위원들의 추궁에 대해 당당하게 말했다고 한다.

“새 정당을 조직하려니까 돈이 많이 듭니다. 정당을 만드는 데 국고금을 쓸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증권시장에서 조달하여 쓴 것입니다. 원래 증권시장은 투기꾼들이 모이는 곳 아닙니까. 재미 보는 사람도 있고 손해 보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지요. 이 방법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CIA가 부족한 공작비를 보충하는 방법으로 썼는데 우리도 그 방법을 모방해보았습니다.”(조갑제,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5>:김종필의 풍운>, 조선일보사, 1998, 196쪽). (…)

피해액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다. 선의의 투자자 5천242명이 138억원의 피해를 입었다는 설이 있다(한용원, <한국의 군부정치>, 대왕사, 1993, 252쪽). 63년 3월 28일 미 안보회의가 케네디에게 올린 한국 정세보고서엔 “김종필이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증권 조작을 통해서 2천만~3천만 달러를 벌었다”고 썼다(<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권, 154쪽).

‘워커힐 사건’, 새나라자동차 사건, 빠찡꼬 사건

워커힐은 중앙정보부 제2국장 석정선 등이 주동해서 1961년 9월 서울 성동구 광장동의 부지 18만 평을 수용한 뒤 휴가를 받아 일본으로 가던 주한미군을 유치하려고 만든 종합위락 시설이었다. 공사 도중 산업은행이 융자를 거부함으로써 시설 공사가 어려워지자 교통부장관 박춘식, 관광공사 사장 신두영은 62년 8월 13일부터 63년 2월 21일 사이에 법적으로나 업무상 아무런 관계가 없는 정부주식 출자금 5억3,590만여 원을 워커힐 이사장 임병주(당시 중앙정보부 제2국 제1과장, 중령)에게 전용 가불하게 해서 워커힐을 지었다. 임병주는 그 가운데 막대한 자금을 횡령했다. 중앙정보부는 교통부장관과 각 군의 공병감에게 압력을 넣어 61년 9월부터 62년 2월 사이에 4,158대의 각종 장비와 연인원 24,078명을 무상 노역하게 하는 등의 부정행위를 저질렀다. 이 사건으로 석정선과 임병주는 타인의 권리행사 방해와 횡령, 신두영 등은 업무상 배임 등 죄로 63년 3월 13일 서울지검에 송치되었다(<한국근현대사전>, ‘4대 의혹 사건’ 항목에서).

중앙정보부는 무대장치부터 시멘트에 이르기까지 일제품을 무관세와 무검사로 수입하면서 150만여 달러의 부당이득을 취했다.

“62년 봄 일본의 주간지들은 앞 다퉈 “한국의 군사정권이 미군 장병을 끌어들이기 위해 술과 여자와 도박판 위주의 위락시설을 짓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 언론도 62년 10월 “이 시설은 매춘굴, 카지노, 미인 호스티스 등을 갖추고 있다고 보도했으며, 이에 미국 부인단체가 유엔군사령부와 한국 정부에 강력 항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워커힐은 원래 목적인 미군 장병 유치엔 실패해 적자경영을 면치 못했으며, 그 대신 박정희가 기생파티를 위해 자주 이용했다(같은 책, 155쪽).

새나라자동차 사건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 1961년 12월 한일회담 재개를 위한 교섭을 명분으로 일본에 가서 야사다상사 사장인 재일동포 박노정을 만나 자동차공업에 관한 의견을 나눈 데서 비롯되었다. 그 뒤 박노정은 회사 전무인 안석규를 한국에 파견해서 중앙정보부 차장보 석정선과 접촉하게 했다. 안석규는 석정선의 도움으로 새나라자동차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정부는 관공용 자동차 4백대를 수입할 계획을 세우고 대행 업무를 안석규에게 맡겼다.

“62년 5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자동차공업 보호법’을 제정해 향후 5년 간 자동차 부품 수입을 무관세로 했고, 이런 바탕 위에 새나라 조립공장이 건설된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완성된 일본산 소형 자동차 2천여 대를 관세 없이 수입해 시중 업자에게 팔아 넘겨 이익을 취하는 방식이었다. 수입가격은 1대에 13만원인데 25만원으로 팔아 약 2억5천만원의 이익을 취했다. 물론 이 돈은 공화당 창당기금으로 사용되었다.”(같은 책, 157쪽).

‘빠찡꼬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그때까지 금지되어 있던 도박기구인 회전당구대(빠찡꼬)를 일본에서 5백대나 수입하게 해주고 영업 허가를 내준 대가로 돈을 챙긴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김태준 등이 관세법 위반, 문서위조 및 동행사죄로 1963년 3월 15일 수도방위사령부 보통군법회의에 넘겨졌다.

워커힐·새나라자동차·빠징꼬에 중앙정보부가 깊숙이 개입한 사건들이 터진 뒤 조선일보에는 그 진상에 관한 기사가 보이지 않았다. 특히 중앙정보부 간부들이 법원이나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은 데 관한 기록도 조선일보에서는 확인할 수가 없다. 조선일보를 포함한 언론이 군사정권의 핵심인 중앙정보부를 ‘불가침의 성역’으로 여겼다는 증거이다. 쿠데타세력이 주장하는 민주당의 ‘구악’보다 군사정권의 ‘신악’이 훨씬 더하다고 언론이 보도하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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