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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체제의 ‘용공 조작’과 ‘반혁명사건’조선일보 대해부 3권 -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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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1.28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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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재건최고회의는 7월 3일 오전 회의를 열고 최고회의 의장 겸 내각수반 장도영의 사표를 수리하고 부의장인 박정희를 의장으로 선출하는 한편 내각수반에는 국방부장관 송요찬(예비역 중장)을 임명했다. 박정희가 명실공히 군사정권의 최고 실권자로 등장한 것이었다.


박정희, 최고 실권자로 등장

장도영은 그날 오후 최고회의 공보실장 원충연을 통해 사임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혁명 당초부터 본인이 가진 능력과 경험으로써는 혁명 정권의 최고책임자로서 그 중책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깨달았으나 국가 비상시의 질서 유지를 위해 당분간 적임이 결정될 때까지 그 직을 맡았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국민들에 대한 당부도 곁들였다. “이 중책을 수임(受任)한 지 1개월 반이 경과한 오늘에 이르러서는 혁명 정권의 기초가 어느 정도 확립되어 앞으로는 더욱 강력한 정책 수행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므로 보다 적극적이고 국내외적으로 신망이 높은 인물이 절실히 요구됨을 스스로 느끼고 이에 사임하는 바이니 전 국민은 배전(倍前) 혁명과업 완수에 적극 협력하여 전 국민이 갈망하는 복지국가가 하루속히 이룩되도록 노력하여 주실 것을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조선일보 7월 4일자 조간 1면 머리기사).

장도영의 사임 성명에 관한 보도 바로 위쪽에는 「박정희 의장 담화 발표」라는 기사가 올라 있다.

5월 16일 군사혁명 이후 월여에 걸쳐 혁명과업 수행에 노고가 많았던 장도영 장군이 금반 일신상의 사정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직을 사임함에 따라 불초 본인이 의장의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그간 국민 제위의 절대적인 신임과 협조를 얻어 부패와 부정을 일소하는 혁명과업의 초기 목표를 우선 달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들 전도에는 과거 10여 년에 걸친 구 정권 하 적폐로 인하여 국민경제의 재건과 사회도의의 확립 등 허다한 난관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임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국민 여러분과 더불어 다시 한 번 5월 16일의 결의를 가다듬어 조속히 구악 일소에 결말을 짓고 국가의 기강과 민족정기를 앙양하는 동시에 사회적 경제적 모든 면에 있어서 국민생활의 향상을 기하여 공산주의의 침략을 저지하고 민주복지국가를 건설하는 데 총역량을 집중하여야겠습니다. (…) 국민 여러분은 이러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근본정신과 헌신적 노력을 12분 이해하고 온 정성과 힘을 총동원하여 범국민적 협조로써 우리들의 진정한 민주공화국 재건에 매진하여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배수의 진을 친 우리들에게는 이제 후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 앞에는 오직 전진이 있을 따름입니다.

조선일보는 박정희가 최고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7월 4일자 석간 1면에 박정희의 담화 내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설(「혁명 당국 수뇌부의 경질에 관하여」)을 실었다.

(…) 우리는 (…) 앞으로 더욱 강력한 정책 수행을 하는 구체적 내용으로서의 3대 과제의 수행에 최고회의와 그 영도 하의 내각이 앞으로 가일층 노력을 가다듬어서 좋은 성과를 올릴 것을 바란다. 그 중에서도 정책적인 창의와 실천적인 능력을 구비하여서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구악 일소와 민생의 향상에 부치는 우리의 관심과 주목은 큰 것이다. 첫째로 이러한 과업을 수행하는 지표를 요지부동하게 확립할 것이 무엇보다도 소망스럽다. 우리는 이 지표가 박 의장이 지적한 대로 ‘민주복지국가’를 건설하는 데 있다고 보는 견지에서 구악 일소나 국민생활 향상에 있어서의 기조는 모두 여기에 두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둘째로 강조할 것은 이러한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서는 선후의 분별과 경중의 비교를 치밀히 검토하여 중요하고 크고 급한 것을 먼저 착수하고 말초적이거나 시간을 그렇게 다투지 아니하는 것은 뒤로 돌려야 할 것이다. (…) 특히 오늘날과 같이 국가를 재건하는 이 중대한 비상시기에 있어서는 혁명과업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는 당국자나 이것을 수용 소화하는 처지에 있는 일반 국민으로서나 그 정신상 또는 신체상의 노력을 추호도 분산·허비하는 일 없이 오로지 국가재건의 중요한 과업 수행에만 집중하여야 하는 것이고 그러는 데서만 이 어려운 과업을 기약대로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 다시 최고회의와 내각의 지도 역량의 강화를 기대하여 둔다.


장면 정권을 ‘용공’으로 몰다

최고회의는 7월 4일 ‘반공체제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반공법을 공포했다.

(…) 장면 정부가 제정하려다가 실패했던 반공법은 국가보안법과 경합되는 부분이 많고, 사회주의를 확대 해석할 수 있어 국가보안법보다도 학문·사상·양심의 자유나 정치·사회 활동의 자유를 더 제약할 수 있었다. 특히, (최고회의가 공포한) 반공법 제4조 1항의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국외의 공산계열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한 자”를 처벌하는 조항 등, 제4조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어서 두고두고 논란이 되었다. 국가보안법·반공법과 방대한 조직을 가진 정부 속의 정부인 중앙정보부의 감시망에 의해 극우반공체제는 이승만 정권보다 훨씬 공고해졌다(서중석, 한국현대사 60년>, 역사비평사, 2011, 96쪽).

최고회의가 반공법을 공포한 날인 7월 4일 오후 공보실장 원충연은 ‘전 민주당 정권의 용공정책 진상’에 관한 담화를 발표했다. 조선일보 7월 5일자 조간에 보도된 기사(「장면 씨 이하 전 민주당 정부 요인들의 / 용공 사실을 발표 / 세칭 ‘깜짝 놀랄 사건’의 진상」)에 담긴 담화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혁명 직후에 발족한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에서는 그 동안 불철주야 민주당 정부 요인들의 용공음모를 예의(銳意) 수사하여 오던 바 그 천인공노할 진상이 역력히 밝혀졌다. 그들은 국가와 국민을 보위해야 할 신성한 책무를 가졌으며 이를 수행하기 위하여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탁받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권력을 역이용하여 이 나라를 공산화할 무서운 용공음모에 가담하여 왔었다. 소위 국무총리 장면을 비롯하여 민주당정부에서도 가장 핵심이며 장면의 심복이었던 전 법무부장관 조재천, 전 내무부장관 신현돈, 전 내무부장관 현석호, 전 대검찰청 총장 이태희, 전 재무부장관 김영선, 전 상공부장관 주요한, 전 무임소장관 김선태, 전 외무부장관 정일형, 전 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 등이 모조리 이 어마어마한 사건에 관계되어 있다.

그날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 김재춘은 이 사건 관련자들은 구속 또는 연금 상태에 있다면서 연금되어 있는 장면의 구속 여부는 곧 결정될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일보는 위의 기사가 실린 7월 5일자 조간 1면, 그리고 같은 날자 석간 2면에 ‘군검경합동수사본부’가 발표한 「민주당 정권의 용공정책 진상」을 원문 그대로 실었다. 진실 여부에 대한 취재를 할 시간은 물론 없었을 것이다. 제1회의 제목은 「조총련서 거액 자금 도입 / 사건 인지하고도 수사를 등한」, 제2회의 제목은 「간첩과 접선·비호 / 용공분자를 관계(官界) 요직에 등용」이다.

최고회의 공보실장이 ‘천인공노할 사건’이라면서 민주당 정부의 국무총리 장면을 비롯한 각료와 고위 공직자들이 “이 나라를 공산화할 무서운 용공음모에 가담해 왔다”고 발표한 ‘민주당 정권의 용공정책 진상’은 결국 용두사미로 끝나고 말았다.

전 경향신문 사장 한창우와 전 조폐공사 사장 선우종원이 ‘반혁명행위사건’으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을 뿐이다. 그 사건은 장도영이 최고회의 의장으로 있던 때에 기소된 것이었다. 1961년 8월 29일 혁명재판소 제5심판부에서 열린 첫 공판에서 담당 검찰관이 읽은 공소장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피고인 등은 1961년 오전 11시경 서울 종로구 견지동 심상석의 집에 모여 1)유엔군으로 하여금 계엄령을 선포하게 하여 혁명군을 격퇴하도록 하는 방법과 2)유엔군 탱크부대로 하여금 확성기를 장치하여 혁명군을 원대 복귀 명령하도록 하는 방법 3)전 국무총리 장면의 육성으로 민주당 정부와 총리는 건재하니 국민은 동요하지 말라는 녹음을 하여 동경의 유엔군 방송을 통해 방송하는 방법을 모색했을 뿐만 아니라 4)이한림 전 1군사령관을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하여 정부군을 조직하고 혁명군을 격퇴하려고 기도했다(조선일보 8월 29일자 석간 8면).

혁명재판소의 소환장을 받고 9월 7일 법정에 나간 장면은 “5월 17일 한창우가 찾아와 군사혁명은 이미 성공했으니 빨리 나와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기에 밖의 정세도 들어보느라고 약 10분간 대담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군사혁명인 만큼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가진 매그루더 미8군사령관에게, 정권이양을 하겠다는 나의 뜻을 알리려고 했다면서 “사태 수습이란 곧 정권이양을 뜻하는 것이었다”고 말함으로써 한창우의 진술을 뒷받침했다. 한창우에게는 ‘반혁명’ 의사가 없었다고 단언한 셈이었다(조선일보, 9월 8일자 석간 2면).

검찰은 한창우에게 사형을 구형했으나 심판부는 9월 16일 오전에 열린 공판에서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적용해서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재판장은 검찰의 반혁명행위에 대한 공소 부분은 증거가 없어 범죄가 되지 않아 무죄라고 밝혔다(조선일보 9월 16일자 석간 3면).

1999년 당시 대통령이던 김대중은 ‘운석 장면 박사 탄신 100주기 추모미사’에 참석해서 추모사를 했는데, 그 가운데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 5·16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의 말처럼 5·16 직전이 나라가 붕괴의 직전에 있었는가, 정반대입니다. 그때 4·19가 일어나고 시민들이 데모 한 번 안 하는 사람은 병신이라고 할 정도로 데모를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정부가 폭력적인 진압이 아니라 시위를 평화적으로 유도하는 노력을 해서 결국 5·16 직전에는 시위도 거의 없어지고, 시위가 있어도 국민들도 별 관심을 안 가질 정도로 안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면 정권을 그대로 두었으면 나라가 망할 것 같아서 5·16을 일으켰다” 이렇게 말한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
(…) 5·16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이 신문지 양면에 걸쳐서 깨알 같은 글씨로 민주당 부패상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군사재판을 했습니다. 그러나 재판 결과는 어느 장관이 외국 출장가 있는 동안에 누가 중고품 냉장고 하나 갖다 놓은 것만이 유죄가 되고, 나머지는 전부 무죄가 되었습니다. 5·16 직전에 그렇게 천하를 뒤엎다시피 떠들어댔던 사건이 결국 군사정권의 손에 의해서 무죄가 되었습니다. 부패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입니다(<위키백과>, ‘장면’ 항목에서).


‘장도영 일당 반혁명사건’

1961년 7월 9일 아침 신문을 손에 잡은 사람들은 자기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로 다음과 같은 기사 때문이었다.

장도영 중장 등 44명을 체포 / 지난 3일에 이미 단행 / 최고회의 발표, ‘반혁명세력 구성’ / 박 의장 암살 기도 / 행동 직전에 타진 / 장 중장만은 자택 연금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는 9일, 전 최고회의 의장 겸 내각수반 장도영 중장 등 44명을 지난 3일 체포했다고 발표하였다. 이날 하오 1시 최고회의 공보실 발표에 의하면 그들은 “파벌 구성과 권력욕에 급급한 반혁명세력 일당”이라고 지적하였다. (…)
발표된 사건 전모: (…) 이들은 강철 같은 대동단결로써 혁명과업을 조속히 완수하는 것이 구국의 첩경임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기대를 배반하여 혁명정부 내에 의식적으로 파벌을 조성하고 혁명주체세력에 대한 모함을 일삼아왔을 뿐더러 박정희 부의장을 비롯한 혁명세력의 암살 제거와 반혁명 행동을 모의함으로써 국가를 누란의 위기에 몰아넣으려던 직전 발각되어 당국에 일망타진된 것이다. (…)
당초 박정희 소장은 혁명 2개월 전에 부패한 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 오직 군사혁명 성취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고 장도영 중장에게 그 계획을 내시(內示)하면서 그의 협력을 권했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었다. 5월 15일 혁명군이 행동을 개시하자 장 중장은 배반자들의 밀고를 받아 헌병 2개 중대를 동원, 혁명군에 대한 발포를 명령하게까지 하였다. 그는 혁명군을 지휘 중인 박정희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즉각 행동을 중지하고 집으로 되돌아가도록 명령하는 한편 출동 준비 중인 혁명군에게 출동정지명령을 지시하고 장교를 파견하여 그 행동을 제지시켰다. 그 후 박 장군이 보낸 혁명의 필요성과 장 중장의 호응을 요청하는 간곡한 서신을 받고도 혁명군에 대한 발포령을 지속하였다. (…) 장 중장은 16일 하오 4시경에야 겨우 혁명 가담을 수락한 연후에 있어서도 1군사령관과 모 군단장 및 사단장에게 혁명군 진압을 위한 출동 준비를 지시하고 혁명에 대한 매그루더 대장의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라는 구실 하에 혁명 다음날인 17일 혁명군 일부의 철수를 주장하기까지 했었다.
박정희 장군을 비롯한 혁명주체세력은 당시 장 중장의 이러한 행동경로를 잘 알면서도 이 나라와 이 겨레를 위한 혁명 완수와 동족 간의 비극을 끝내 피한다는 일념에서 모든 소절(小節)을 버리고 육군참모총장으로서의 장 중장을 혁명지도자로 추대, 오로지 그가 혁명 대의에 헌신할 것을 바라면서 최고회의 의장직을 비롯하여 내각수반, 국방부장관 등 국가의 전권을 위임하였었다.

이 발표문은 박정희가 이끄는 ‘혁명세력’이 장도영의 ‘반혁명적 행위’를 5·16 이전과 이후에 알았으면서도 ‘혁명의 성공’을 위해 그에게 국가의 전권을 위임했다고 밝히고 있다. ‘반혁명분자’를 전략상 ‘혁명지도자’로 추대했다고 고백한 셈이다.

최고회의가 발표한 체포자 44명 명단에는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들어 있었다.

· 주모자: 예비역 육군대령 김일환(전 인천 HID 대장), 육군준장 송찬호(전 최고위원), 육군대령 박치옥(전 공수단장, 전 최고위원), 육군대령 문재준(육군헌병감), 육군대령 최재명(감찰위원장), 육군중령 김제민(전 최고위원)

조선일보는 7월 10일자 석간 1면에 「반혁명사건의 발표에 부친다」라는 사설을 실었다.

(…) 현역뿐 아니라 예비역 군인과 민간인마저 포섭한 반혁명음모의 전모는 앞으로 주모자들의 자백과 조사에 따라 그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지만 우선 당국이 발표한 바에 의하여 그 윤곽이 밝혀진 범위 내의 사실만 하더라도 족히 전 국민의 가슴에 심대한 충격을 주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무엇보다 우리는 혁명이 일어나자 혁명주체세력으로부터 협력을 권장 종용받은 바 있고 그 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장으로서 또한 혁명내각의 수반 및 국방장관으로서의 그의 이름 밑에 수다한 포고와 영(令)과 담화와 성명서가 혁명 후 국민생활 전반에 걸친 규범을 선포한 혁명 최고책임자인 장 중장이 혁명 자체에 대하여 당초부터 비협조적이었다는 사실에 일경(一驚)을 금할 수 없는 바이다. 그러한 사실에는 혁명주체세력의 나라와 겨레를 위한 일념이 뒷받침하고 있었음이 밝혀져 그 고충은 납득된다 하더라도 전국민이 혁명 발발인 5월 16일부터 지난 3일에 이르는 49일 간 혁명 자체를 부인한 인물의 이름으로 혁명과 민주주의와 과업에 관하여 계몽되고 편달되었다니 우리 국민으로서는 기만당한 유감이 원한으로 변함을 억제하기 어려우며 이 나라 국민만이 지닐 수 있는 비애가 아닌가 싶어 살맛조차 상실하여 가는 허탈감을 가눌 수 없는 것이다. 추호의 신념 없는 행동에 시종(始終)하고 하등의 경륜도 없는 장도영 중장의 성명 3자는 이중인격·무책임·기만의 상징이 아닌가 하여 당분간은 우리 국민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거기 더하여 우리의 분노와 비애를 자아내는 것은 장 중장이 혁명 수행의 전권을 맡고도 그것을 보국(報國)의 기회로서 소화하기 이전에 자기세력의 부식(扶植)을 위한 파벌 성장의 수단으로 사용하여 행정부는 물론 군부 말단에 이르기까지 자파 일색의 인사 배치를 자행함으로써 혁명정신을 모독하는 조치와 포진을 계속하였다는 사실이다. (…)
(…) 국민의 열원(熱願)이 혁명군부에 의한 간접침략의 독소 발아(發芽)를 일소 삼제(芟除)함과 아울러 군부가 철석같은 단결로써 여하한 공산무력침략도 막아낼 수 있는 전력을 국민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이 기회에 혁명당국은 더욱 뼈저리게 느껴주기 바라마지 않는다. 아울러 혁명주체세력으로서는 다시는 장 중장과 같이 혁명정신이 희박한 분자들과 일시적 편의상의 이유로 타협하거나 용납 추대하는 과오를 범하여 그러한 반혁명분자로 하여금 반혁명적 책동이나 세력 부식 행위가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까지 방지되지 못하고 묵인 허용되는 일이 없도록 한층 더 혁명과업 수행에 충실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명확한 혁명의식에 투철하고 최고위원 각자가 한 건 한 건의 의안을 심의 표결할 때는 감히 이러한 반혁명행위를 야기시킬 여지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언론의 기사는 물론이고 논설도 어떤 ‘사실’이 명백한 증거로 뒷받침되는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뒤 독자에게 전달해야 한다. 그런데 위의 사설은 최고회의가 발표한 ‘사실들’만을 근거로 바로 1주 전까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자 내각수반으로서 행정부를 이끌어오던 장도영의 ‘반혁명행위’를 기정사실로 단정하고 있다. 아직 기소되지도 않았으며 법원의 확정판결을 받지도 않은 그에게는 당연히 ‘무죄 추정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는데 이 사설은 그런 법적인 원칙은 무시한 채 ‘반혁명분자들’을 향해 비분강개하면서 독설을 퍼붓고 있다.

게다가 이 사설은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세력이 ‘거사’ 이전부터 장도영의 기회주의적 처신과 ‘반쿠데타적 언동’을 파악하고도 ‘군사혁명의 얼굴’로 이용하고 나서 버렸다는 사실은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최고회의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박정희와 그 추종자들이 장도영이 “행정부는 물론 군부 말단에 이르기까지 자파 일색의 인사 배치를 자행”하도록 방관할 리 없었다는 사실조차 이 사설은 외면하고 있다.

더욱 딱한 것은 주필이나 논설위원의 손을 거쳤을 이 사설에는 주어와 서술어, 목적어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 조잡한 문장이 수두룩하다는 점이다. ‘과연 전문적 문필가가 썼을까’ 할 정도로 의심이 간다.

7월 9일 집에 연금된 장도영은 8월 22일 예편 당했다. ‘반혁명사건’으로 기소된 장도영 등 26명에 대한 첫 공판이 1961년 10월 27일 혁명재판소 제1심판부(재판장-대령 고영보)에서 열렸다. 장도영은 12월 2일 법정에서 구속되었다. 1962년 1월 10일 제1심판부는 장도영과 전 내각수반 비서실장 이회영에게 사형을, 김일환·정원상·박치옥·문재준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3월 10일 혁명재판소 상소제2부(재판장-대령 육장균)는 ‘군 복무상의 전공(戰功)을 참작’한다는 이유로 원심을 파기하고 장도영 등 6명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5월 2일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장도영 등 8명의 기결수들에 대한 형집행면제 조치를 내렸다. ‘반혁명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1심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장도영을 겨우 몇 달 만에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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