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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쿠데타와 조선일보의 보도조선일보 대해부 3권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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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1.21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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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월 16일 0시 15분경 육군소장 박정희(당시 대구에 있던 제2군 부사령관) 일행이 서울 영등포 문래동의 6관구사령부에 도착하면서 군사쿠데타가 시작되었다. 새벽 1시 45분 해병여단 1개 대대가 차량들에 전조등을 켜고 서울시내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제6군단 포병단과 제1공수단도 출동했다. 해병여단 제2중대는 노량진의 한강대교 남쪽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헌병 제7중대와 맞닥뜨렸다. 해병대는 총격전 끝에 저지선을 뚫고 서울시내로 향했다. 새벽 3시 40분경 제6군단 포병단 병력이 용산구 이태원동 삼각지 로터리 부근의 육군본부로 쳐들어갔다. 4시를 조금 넘은 시각에는 해병대와 공수단이 서울시내 중심가로 진입했다.  쿠데타에 동원된 병력은 장교 250명, 사병 3천5백여 명이었다.


헌정을 뒤엎은 쿠데타

공수단 1개 소대는 남산 북쪽 자락에 있던 KBS(서울중앙방송국)으로, 해병대 주력은 치안국과 서울시청으로, 해병 수색소대는 중앙전신국으로 치달았다. 새벽 6시 KBS를 통해 ‘군사혁명위원회’의 이름으로 ‘혁명공약’이 발표되었다.

첫째,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재정비, 강화한다.
둘째,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비롯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셋째,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한 기풍을 진작한다.
넷째,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다섯째,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여섯째,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는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이른바 ‘혁명공약’은 무엇보다도 먼저 ‘반공’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 대해서는 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의 ‘좌익’ 전력 때문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이 있다(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다루기로 하겠다).

박정희와 김종필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5월 16일의 쿠데타는 명백히 헌법을 위반한 것으로서 주동자들은 사형 또는 무기징역을 받아야 마땅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7·29 총선으로 구성된 국회에서 선출한 국무총리 장면이 내각을 책임지고 있는 정부를 전복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쿠데타 주동자들은 실정법을 무시하고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는가 하면 공공기관과 방송국을 불법적으로 점거했다.

쿠데타세력이 ‘혁명공약’을 통해 주장한 대로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는” 일이 필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권자인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정권교체를 이룬 뒤에 합법적 절차와 방법을 통해 실행하도록 새 정부에 위임해야 하는 일이었다.

5·16 쿠데타는 결과적으로 국민이 세운 민주정부를 총칼로 뒤엎는 선례가 되었을 뿐 아니라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비명횡사한 뒤 그의 ‘군부 후계자들’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군사반란과 쿠데타를 일으키게 하는 ‘선례’가 되었다.


쿠데타에 관한 조선일보의 기사와 사설

5월 16일 오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호외’를 발행했다. 동아일보는 「오늘 미명(未明) 군부서 반공혁명」이라는 제목으로 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한 반면, 조선일보는 「오늘 새벽 군부 쿠데타」라고 표현했다.

그날 오전 9시 ‘군사혁명위원회’는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뒤 ‘포고 제1호’를 통해 언론 활동을 규제했다. 계엄령 제3항은 ‘언론·출판·보도 등의 사전검열’을 강제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은 보도를 일절 금지한다고 명시했다.

1) 적을 이롭게 하는 사항
2) 군사혁명위원회의 제 목적에 위반되는 사항
3) 반혁명적 선동·선전을 목적으로 하는 사항
4) 치안 유지에 유해한 사항
5) 국민 여론 및 감정을 저해하는 사항
6) 군 사기를 저해하는 사항
7) 군 기밀에 저촉되는 사항
8) 허위 및 왜곡된 사항
9) 기타 지시하는 사항

‘군사혁명위원회’가 이렇게 ‘보도 금지 사항들’을 발표했는데도 조선일보 16일자 석간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은 「군부쿠데타 군사혁명위 조직을 발표」라고 나와 있었다. 그런데 2면 머리기사 제목은 「군사혁명 하의 서울」이고, 그 옆의 기사 제목은 「미 의회, 쿠데타에 큰 관심」’이다. ‘혁명’과 ‘쿠데타’가 같은 지면에 섞여 있는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5월 17일자 조간 1면 머리기사 제목도 「군부 무혈 쿠데타 완전 성공」이라고 크게 뽑았다. 그리고 3면 머리기사에도 「군부 쿠데타 제일야(第一夜)」라고 표현했다.

“5·16 첫날 「군 일부 쿠데타 일으키다」라는 표제는 검열군인들에 의해 당장 말썽을 빚었다. ‘군부’라고 할 것이지 왜 ‘일부 군인’이라고 했느냐는 것이었다. 이밖에 ‘혁명군이 육군사관학교를 접수했다’는 민족일보의 기사, ‘혁명정부는 앞으로 정부 형태를 내각책임제가 아니라 대통령책임제로 할 것’이라는 대한일보의 보도 등으로 관계기자들이 모두 구속, 실형을 받았다.”(송건호, <한국현대언론사>, 삼민사, 1990, 130쪽).

5월 18일자 조간부터 조선일보 지면에서는 ‘쿠데타’라는 용어가 완전히 사라졌다. 5월 19일자 조간부터 ‘군사혁명’을 노골적으로 찬양하고 미화하는 사설들이 실리기 시작했다. 「제2단계로 진입한 혁명과업의 완수를 위하여」가 첫 번째였다. 그 앞부분은 다음과 같다.

혁명이 있은 지 3일 만인 작(昨) 18일로써 대업의 제1단계는 끝났다. 이제 혁명은 바야흐로 제 단계에 돌입하여 혁명위원회가 당초에 선명(宣明)한 바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할 수 있는 제3단계를 지향하여 매진할 태세에 이른 것이다. 우리는 제1단계로서의 정권 장악이 군부에 의하여 무혈 평온리에 행하여진 것은 비단 혁명주체세력인 군부를 위하여서 다행한 일일 뿐 아니라 잠시 동안이나마 질서와 체제가 바뀌는 과도기를 당하여 지향할 바를 몰라 방황할 뻔하였던 대다수 국민에게도 극히 축복스러운 일이었다. 혼란에 휩쓸리어 일시 우려되었던 구 정권과의 관계도 늦게나마 장 내각이 비상계엄의 선포를 추인함과 아울러 총사퇴의 형식을 밟고 윤 대통령이 이를 확인 선포함으로써 명백하여졌다. 그 의의는 이번 혁명이 반공과 더불어 “미국을 위시한 자유국가 간의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할 것‘을 선명한 당연한 논리적인 귀결로서 요청되었던 민주적인 절차 이행을 완성시킴으로써 혁명의 법통이 완성된 데 있는 것이다.

이 사설 바로 밑에 실린 또 하나의 사설(「혁명의 공약과 국내외의 기대」) 역시 ‘혁명에 바치는 찬사’이다.

군사혁명이 완전히 성공함에 즈음하여 우리는 세 가지 점에서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첫째는 군사혁명이 무혈혁명의 전격적이었다는 것이요, 둘째로는 군사혁명위원회가 발표한 혁명공약에서 발견할 수 있고, 셋째로는 국내외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다 같이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러한 요소와 함께 혁명이 성공하게 된 것은 서상(敍上)한 중에서도 기실(其實) 혁명의 목적이며 정신인 혁명공약에 집약되어야 한다고 본다. (…) 과거의 비정(秕政) 내지 실정은 물론 민족사상의 분열과 혼란 그리고 민생고가 극심하였던 만큼 누구나 자기대로의 위기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고 어떤 형태의 구국운동이 절감되었던 것이다. 나아가서는 공산 적(敵)과 직접적으로 대치해서 부단히 그들의 침략 위협을 받고 있다는 데서 자유와 국토 수호라는 지상명제까지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사혁명은 이러한 불행한 여건 하에서 보다 나은 입장을 마련하기 위하여 감행된 것으로서 이것이 군사적인 단결과 함께 국내외적인 찬사와 지지를 받게 된 소이는 실로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군사혁명의 공약이 정당하고 그에 대해서 우리 국민은 물론 제 자유우방 국가의 기대가 클수록 혁명과업 완수의 중요성을 또한 명심하지 않을 수 없다. (…) 군에 대한 국민의 신임은 이번 혁명으로써 더 한층 두터워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럴수록 더 한 층의 군·민 합작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군의 대외활동을 중심으로 한 계몽교육 내지 군대 내 정신교육의 투철함이 있기를 바란다. 이는 국군의 단결 발전을 위해서나 당면한 혁명 완수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고 대내(對內)하여 국정의 쇄신은 물론 대외하여 공산 적에 이길 수 있는 처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궐기한 국군의 정신적인 기본자세라고 본다.

조선일보가 ‘군사혁명’을 미화하거나 ‘혁명과업’을 찬양한 내용의 사설은 꼬리를 물고 나왔다. 5월 말까지 나온 것들의 제목은 아래와 같다(이하 모두 석간에 실렸음).

· 「제2공화국의 붕괴와 최고회의의 사명」(5월 20일자)
· 「혁명내각의 발족과 우리의 기대」(5월 21일자)
· 「한 내무장관의 시정방침에 대한 기대」(5월 22일자)
· 「정당 사회단체 해체는 발전적 해소이기를 바란다」(5월 23일자)
· 「혁명기구의 완정(完整)과 민간 권위자의 등용」(5월 24일자)
· 「포고 제11호가 의도하는 언론 창달」(5월 25일자)
· 「장 의장 방미 계획 실현 시기와 의의」(5월 25일자 석간 제2사설)
· 「국제적으로 공고해진 혁명정부의 위치」(5월 27일자)
· 「본 궤도에 오른 부정축재 처리」(5월 29일자)
· 「국가재건기본법 제정에 관한 우리의 제언」(5월 30일자)


난데없이 나타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군부는 5월 18일 국무총리 장면으로부터 ‘비상계엄 추인(追認)’을 받는 형식으로 정권을 인수했다. 헌법에 따라 총선거를 치른 뒤 다수당이 국회에서 총리를 선출해서 내각을 구성하도록 하는 합법적 절차를 무시한 초헌법적 ‘정권 인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는 5월 19일 국가재건최고회의(이하 최고회의)라고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확대한 뒤, 이튿날 ‘혁명내각’ 구성원들을 발표했다.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장도영과 부의장 박정희는 최고회의에서도 같은 직책을 맡았다. 최고회의 위원은 김종호, 박임항, 김신, 채명신, 길재호 등 29명이었고, 고문은 김홍일과 김동하였다.

국가의 ‘최고통치기구’를 자임(自任)한 최고회의는 6월 6일 헌법 기능을 정지시키고 입법·행정·사법 3권을 장악한다는 내용의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공포했다. 비상조치법이 헌법을 대신하는 초법적 통치체제가 만들어진 것이다.

최고회의는 6월 10일 비밀첩보기관이자 실질적인 ‘국민 통제 조직’인 중앙정보부를 창설했다.

6월 6일자 조선일보 조간 1면에는 난데없는 기사가 나타났다. 「기성정치인은 반성 있기를 / 군부 단결 정치 안정 도모 / 김 중앙정보부장 혁명 경위를 언급」이 바로 그것이었다.

5·16 군사혁명을 성공시킴에 있어 주요한 역할을 하였고 현재 국가재건최고회의 중앙정보부장인 김종필 중령은 5일 앞으로의 한국 경제체제에 언급하여, “그 궁극적인 목표는 자유경제 체제이나 거기에 이르기까지 혁명 직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초기의 일정한 기한은 계획경제를 거쳐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하고 혁명 후 오늘날에 있어서도 “기성정치인들은 자기중심적인 책동을 저지르고 있는데 많은 반성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김 중령은 이날 하오 3시부터 동 5시까지 2시간여에 걸쳐 최고회의 본회의실에서 내외기자들과 회견하고 혁명이 성공하기까지의 경위에 대하여 문답하였는데 김 중령은 이번 혁명을 일으키는 데 사용된 자금 총액은 860만원이었다고 말하여 기자들을 웃기기도 하였다.

이 기사가 ‘난데없다’는 까닭은 김종필이 ‘국가재건최고회의 중앙정보부장’으로서 기자회견을 했다는 6월 5일에는 아직 중앙정보부가 설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앙정보부는 법률 제619호인 ‘중앙정보부법’에 따라 6월 10일 최고회의 직속기관으로 발족했다. 김종필이 “내가 중앙정보부장이다”라고 신분을 밝히고 기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그것은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기구의 수장을 사칭한 셈이 되고, 오히려 “닷새 뒤에 창설될 중앙정보부장 내정자”라고 했어야 할 것이다. 조선일보를 포함한 여러 매체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 중령’의 기자회견을 보도한 것은 고의적이든 미필적 고의적이든 명백한 오보(誤報)였다.

김종필은 5·16 쿠데타를 일으키는 데서 박정희 다음 가는 ‘제2인자’ 구실을 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지만, 5월 18일에 발표된 ‘군사혁명위원’ 30명의 명단에는 들어 있지 않았다.


군사 정권의 ‘군대식 사회 정화 운동’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사 정권은 ‘헌정 파괴’ 또는 ‘군사반란’에 대한 국내외적 비판을 의식했는지, 아니면 장면 정권보다 사회를 정화할 의지가 강하다는 것을 과시하려 했는지, 쿠데타 당일인 5월 16일부터 ‘깡패 소탕’에 나섰다. 이른바 ‘사회정화 운동’이었다.

군사 정권의 ‘사회정화 운동’ 가운데 일부는 대중의 호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쿠데타로 권력을 잡음으로써 그 어떤 것보다 심한 불법행위를 자행한 군부가 자신의 도덕성과 윤리의식을 강조하고 ‘구악 청산’의 의지를 보이려고 인권을 탄압한 것은 비판받아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건이 이미 수감되어 있던 이정재를 비롯한 ‘정치깡패들’을 거리로 끌어내서 피켓을 들려 ‘행진’을 시킨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무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받아야 할 피고인들일 뿐이었다. 그리고 댄스홀에서 춤을 추던 남녀들을 체포한 것도 지나치게 파쇼적인 행위였다. 그들이 계엄령을 어기고 ‘옥내’에서 집회를 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춤을 추고 있었다는 사실 만으로 체포한 것은 명백한 인권 유린이자 사생활 침해였다.

조선일보는 이런 사실들에 대해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은 채 군사정권의 ‘사회정화 운동’을 중계방송 하듯이 보도했다.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들의 제목은 아래와 같다.

· 「깡패 천5백명을 검거 / 전국에서 이틀 동안 / 군재에 회부 엄단할 방침」(5월 19일자)
· 「댄스광에 된서리 / 백주 춤추던 남녀 48명 군재(軍裁)에」(5월 21일자)
· 「깡패 생활 청산하겠다 / 이정재 선두로 2백명이 시가행렬」(사진과 함께, 5월 22일자)
· 「범법자 총 22,007명 / 깡패 4천2백명 / 치안국 발표, 무허가건축물은 331건」(5월 23일자)
· 「밤거리의 독버섯 일소 / 서울 사창(私娼) 근절에 6개 방침」(6월 10일자)
· 「최고 1년6월형을 언도 / 군재, 춤바람 등 38명에, 1명 무죄」(6월 10일자)
· 「축첩자 등 536명 해임 / 내무부 산하 공무원」(6월 11일자)


조선일보의 ‘박정희 띄우기’

조선일보는 1961년 6월 28·29일자와 7월 1일자 석간 2면에 「지도자도(指導者道)-혁명 과정에 처하여」라는 박정희의 글을 실었다. 이 글의 1회 앞부분에 붙은 ‘편집자 주’는 이렇다. “공보부에서는 27일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박정희 육군소장이 저술한 <지도자도>라는 팜플렛을 공무원 및 일반에게 배부하였다. 지난 16일자로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발행한 동 소책자(비매품)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나중에 드러난 사실이지만, 당시 최고회의 의장 장도영은 군사정권의 ‘얼굴마담’에 불과했고 실질적인 제1인자는 박정희였다. 조선일보가 주요 일간지와 달리 박정희의 글 내용을 ‘독점적으로’ 실은 것은 그런 현실을 반영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조선일보가 3회에 걸쳐 실은 「지도자도」 가운데 몇 대목을 소개하겠다.

(…) 사실 5·16 혁명은 지난날의 우리의 지도자라고 하는 자들이 확고한 지도자도를 갖지 못함으로써 국민을 도탄에 빠뜨리게 하고 국가를 누란의 위기에 몰아넣은 결과 불가피하게 취해진 조치였다. 지금 국가재건의 선두에 나선 우리 지도자들이 또 다시 그 길을 그르친다면 국가와 민족을 다시 구해낼 수 없는 마지막 궁지에 몰아넣고 말 것이다. 이제야말로 국가 존망을 판가름하는 때이다. 국가의 번영과 안전을 가져오기 위하여 우리는 올바른 지도자를 시급히 확립해야 한다. 특히 혁명기에 처해 있는 지도자도란 영웅적이라야만 한다. 우리 사회가 불타오르겠다는 기름[油]이라 한다면, 이 바다에 점화 역할을 해주는 신화적 작용이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안일주의, 이기주의, 방관주의 및 숙명론자로부터 탈각(脫却)하여 피지도자(국민)가 부르짖는 것을 성취하도록 이끌어 나가야 한다(제1회에서).

지도자는 대중과 유리되어 그 위에 군림하는 권위주의자나 특권계급이 아니라 그들과 운명을 같이하고 그들의 편에 서서 동고동락하는 동지로서의 의식을 가진 자라야 한다. 국민을 지도함에 있어서 친절하고 겸손하며 모든 어려운 일에 당하여 솔선수범하여 난관을 돌파하며 사(私)를 버리고 오직 국민을 위하여 희생한다는 숭고한 정신을 그는 가져야 한다. 지도자로서 가지는 모든 권력의 연원은 국민이다. 자기 스스로 창조한 권력도 초인간적 존재로부터 수여된 여하한 특권도 있을 수 없다. 지도자는 모름지기 대중에 깊이 뿌리박고 전근대적 특권의식을 버리라.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이 정권과 장면 정권의 전철을 밟게 될 뿐만 아니라 이제는 다시 조국을 소생시킬 방도를 잃게 될 것이다(제2회에서).

반만년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올바른 지도자도를 확립하지 못한 까닭으로 해서 때로는 외침을 받았고 나라가 분열되고 서로 싸우고 할퀴고 꼬집고 했으며 대부분의 시기를 통하여 국민은 빈곤에 허덕이었다. 무너진 구 정권만 하더라도 만약 그들 지도자들이 진실로 국민을 대표하고 사랑하고 민주주의 이념에 투철하고 성의를 가졌더라면 그들이 무능했을망정 나라가 이와 같은 궁지에 빠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결국 나라의 안태(安泰)와 민족의 번영은 지도자도의 확립에 있다고 해서 과언은 아니다.
이제 국가재건의 성스러운 과업의 완수에 국민을 이끌고 나갈 지도자의 책임은 실로 중대한 바가 있다. 그들은 현존하는 위기를 극복하고 국태민안의 확고한 기틀을 세워놓아야 하며 영세만대의 지도자를 위하여 과거 우리가 가져본 바 없는 진정한 ‘지도자도’를 계승해주어야 한다. 이와 같은 미풍의 전통을 다음 위정자에게 정치가의 의무로서 본보기로 넘겨줄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미 자립할 수 있는 민족성의 개조를 포함하는 민족의 굳은 단결과 아직도 세계에서 최저 생활수준을 배회하고 있는 빈곤 타파를 위한 군사혁명과업의 완수를 보게 될 것이다(마지막 회에서).

박정희가 이 글을 쓴 날부터 1979년 10월 26일 죽음을 당하기까지 그런 ‘지도자도’를 걷지 않았다는 사실은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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