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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운동과 반공지상주의조선일보 대해부 2권 -2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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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1.07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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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혁명의 가장 큰 목표는 민주화였다. 12년에 걸친 이승만의 독재와 종신집권 기도를 끝장내고 진정한 민주정부를 세우자는 열망이 학생을 비롯한 민중 사이에서 끓어올랐던 것이다. 2월 28일 대구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불을 댕긴 반독재투쟁부터 4월 26일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하던 때까지, 집회와 시위에서 통일이나 남북의 화해를 주장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지성을 대표하는 대학생들과 교수들이 발표한 성명서에도 통일과 분단 극복을 제창하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7·29 총선 시기에 시작된 통일논의

1950년대 들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많은 나라가 식민지배를 벗어나 독립을 하면서 제3세계에서는 민족주의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신생국가들은 1955년의 ‘반둥회의’를 거치면서 식민주의 배격, 내정간섭 반대, 강대국 중심의 방위조약 배격 등을 결의하며 ‘제3의 세력’으로서 국제사회에 부각되었다.

신생 독립국가들은 유엔에 새로운 회원국으로 가입하였고, 이에 유엔의 판도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당시는 유엔총회에서 매년 한국 통일문제가 논의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유엔의 판도 변화는 한국 통일문제에 대한 토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이 밖에 알제리 민족해방운동, 1958년의 쿠바 혁명 등 제3세계 국가의 민족혁명적인 분위기도 영향을 미쳤다.
한편 북한 정권도 이 무렵 대대적인 대남 통일공세를 전개하였다. 북의 수상 김일성은 1960년 8월 14일 남북 두 정부 대표로 구성된 ‘최고민족위원회’를 만들어 남북의 경제 및 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절하는 과도기적 단계를 거쳐 통일하자는 ‘과도적 연방제안’을 제시하였다. 나아가 자신들이 제공해줄 수 있는 물자와 설비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면서, 남북교류를 실시할 것을 적극적으로 제안하였다. 남한 사회는 여기에 어떤 방식으로든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287쪽).

김일성의 대남 제안이 나오기 전인 7·29 총선 기간에 남한에서는 혁신정당과 보수정당 사이에 통일문제가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다. 4월 혁명 직후 허정 과도정부 시기에 국가보안법이 약간 개정되고 언론의 자유와 정치활동의 자유를 확대하는 법들이 제정된 것이 통일문제를 자유롭게 논의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7·29 총선 기간에 활발해진 통일논의는 ‘중립화통일론’과 ‘남북협상론’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7월 10일자 조선일보 석간 1면의 사설(「통일방안엔 감시 방식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은 사회대중당이 제기한 남북총선거 정책이 안고 있는 문제를 중심으로 ‘조선일보 통일론’을 주장하고 있다.

사회대중당에서 ‘적당한 유엔 감시 하의 총선거’라는 정책을 내세운 것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듯하다. 어느 때나 논의될 수 있는 통일방안이고 보니 이것이 선거 때에 토의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남북총선거를 누가 감시하느냐 하는 문제는 통일 방안 중의 극히 작은 지엽문제에 불과한 것이고 근본문제는 다른 데 있다는 것을 이 기회에 말해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1954년 제네바회담 때에 우리와 참전 16개국 측에서는 유엔 감시 하의 남북총선거로써 남북통일을 성취시키자고 주장하였고 공산 측에서는 중립국 감시 하의 총선거를 주장하였던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감시방식 때문에 통일협상이 진전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감시는 누가 하든 간에 별반 기대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북한 사정을 웬 만치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짐작 못할 바가 아니다. 김일성 정권을 그대로 두고 선거를 실시한다면 유엔 이상의 강력한 기관에서 감시를 한다 하더라도 북한지역에서 공산당 이외의 인물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지역으로 말하면 유엔이 감시를 하거나 소위 중립국이 감시를 하거나 그 결과에 별 차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 그러므로 이에 관련된 문제는 감시방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약 3분의 1의 공산분자들을 국회에 받아들여 놓고도 우리의 민주제도가 아무런 동요를 일으킴이 없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 있다. 공산도당이 전 의석의 3분의 1밖에 차지하지 못하게 된다면 우리가 우세할 것만은 틀림없다고 하더라도 이에 안심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혹시 선거에 의하여 통일이 성취될 수 있다고 해도 이것이 공산당을 공인(公認)하는 결과가 될 것은 틀림없는 것이며 그렇게만 되면 수의 다소(多少)로만 우열을 다툴 수가 없게 될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공산도배들은 소련과 중공으로부터 막대한 운동자금을 얻어 들여 정계·재계·노동자·학생 할 것 없이 각 방향에 손을 뻗어 혼란을 야기하고 불법을 감행할 것이므로 도저히 정상적인 정치와 사회질서를 유지할 수 없게 되겠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회를 이용해서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일야지간(一夜之間)에 공산위성국으로 만들어버린 것과 같은 수단을 쓰리란 것도 염려치 않을 수 없다. (…)
(…) 우리의 통일이 성취되자면 공산진영에 일대 이변이 생기거나 그들의 정책에 일대 변화가 있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통일문제 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문제라고 할 것이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첫째는 공산진영이 전면적으로 붕괴되어야 할 것, 둘째는 소련과 중공 간에 중대한 알력이 발생하여 부득이 북한을 포기치 않아서는 안 되게 될 경우, 셋째는 대(對) 자유진영 관계로 보아 북한을 포기하는 것이 북한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유리하게 될 경우, 넷째는 어떠한 교환조건으로 북한을 포기하는 경우, 다섯째는 한반도 전역을 공산화시킬 목적으로 공산 측으로서는 다소의 모험이긴 하지만 우선 통일을 시켜보자는 것 등이다.

이 사설이 ‘주창’하고 있는 것은 한 마디로 ‘반공지상주의적 통일론’ 또는 ‘타율적 정세에 의한 통일론’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대중당이 총선거 시기에 내세운 정책처럼 ‘적당한 유엔 감시 하의 총선거’를 하면 ‘공산도당’이 국회 의석의 약 3분의 1을 차지함으로써 ‘공산당을 공인’하는 결과가 되고, ‘공산도배들’이 소련과 중공에서 막대한 자금을 받아 남한의 여러 분야에 손을 뻗어 혼란을 야기하고 불법을 자행하면서 결과적으로 ‘무정부 상태’를 빚을 수도 있다는 주장은 지나친 피해의식의 소산으로 보인다.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이 소련과 중국의 자금이 북한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감시할 능력도 없다면 구태여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는 데 동의할 까닭이 있겠는가? 그리고 ‘중립국’이 주관하는 총선거가 북한에 유리하게 치우치는 증거들이 발견되면 남한 정부와 대다수 국민이 그것을 용납하면서 남과 북의 의석 비율이 2 대 1이 되는 국회 구성에 찬동할 리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위의 사설은 ‘공산진영의 전면적 붕괴’ ‘소련과 중공의 알력으로 인한 북한 포기’ ‘자유진영에 대한 관계로 인한 북한 포기’ ‘교환조건에 의한 북한 포기’ ‘한반도 전역의 공산화를 위한 모험적 통일’이 ‘우리의 통일’ 성취를 위한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그 이후의 역사가 입증했듯이, 이것은 그야말로 ‘공상적 통일론’에 불과하다. 남과 북의 권력과 민중이 서로 실체적 존재를 인정하면서 평화적 공존을 모색하고 궁극적으로 하나 됨을 실현하는 생산적 통일론과는 한참 거리가 있는 것이다.


학생운동권의 통일운동

사회대중당이 내세운 ‘유엔 감시 하 총선거론’ 말고도 일부 혁신계 인사들은 ‘중립화통일론’을 주장했다. 중립화통일론자들은 한반도를 분단시킨 미국과 소련을 비롯해서 주변 강대국들이 한반도를 침략하지 않겠다는 ‘영토 보존’ 협정을 맺으면 한국은 외국과 군사동맹을 맺지 않고 군사원조도 받지 않는 방식으로 영세중립화 함으로써 통일의 길을 열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위의 두 가지 큰 흐름 말고도 ‘남북협상론’이 있었다. 남북협상론자들은 한반도의 분단 원인은 동서 양 진영의 대립 때문이 아니라 강대국과 약소국의 관계, 다시 말하면 남북 대립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통일은 외세의 간섭과 개입을 배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7·29 총선을 계기로 민간 차원의 논의가 활발해지자 4월 혁명의 주역인 학생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학생들이 통일논의를 적극적로 추진하자 법무부장관 조재천은 10월 31일 “극히 일부 학생 중에 남북한의 연립정부를 주장하면서 그들이 북한에 가서 북한 학생과 통일문제를 협의하겠다고 나서는 자가 있다”고 말하고 이들을 “공산 측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후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의 한국이 국내적으로 국제적으로 결코 낙관할 수 없는 것”이라면서 “배후에서 이를 이용하는 세력이 있다”고 말했다(조선일보 11월 1일자 조간 1면).

조재천이 통일논의를 하는 학생들이 ‘공산 측의 후원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 바로 이튿날인 11월 1일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 발기대회가 열렸다. 서울대 안의 여러 사회과학서클 회원들이 참여한 그 대회를 주도한 학생들은 조직의 이름을 ‘민족통일전선’으로 할 예정이었으나 학교 측이 너무 과격한 명칭이라고 지적하자 민족통일연맹(약칭 민통련)으로 이름을 고쳤다. 민통련 발기대회에서 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대정부 건의문’을 발표했다.

1) 기성세대는 남북분단의 비극을 야기케 한 도의적 책임을 통탄하고 통일에 대한 새 세대의 정당한 발언을 묵살 내지 억압할 자격이 없음을 시인하라.
2) 남한의 모든 정당 및 사회단체는 패배의식을 철저히 불식하고 남북한총선거에 대비하여  공산당과 대항하기 위하여 연합할 기틀을 마련하라.
3) 정부는 조국통일문제에 대하여 현실에 입각한 적극외교로 전환하라. 장국무총리는 여사한 외교의 일환으로 한국 통일문제만을 협의하기 위하여 미국과 소련을 특별 방문하고 미·소 지도자와 회담하라.
4) 세계인권선언에 의하여 보장된 인간의 기본권인 통신의 자유를 남북한에 하루바삐 시행하라(같은 책, 292~293쪽).

서울대 민통련은 본격적 통일운동단체로는 처음 결성된 것이었다. 민통련이 국무총리 장면에게 “한국 통일문제만을 협의하기 위하여 미국과 소련을 특별 방문하고 미·소 지도자와 회담하라”고 한 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철저한 친미주의자로 알려진 장면이 냉전시대 미국의 적대국인 소련을 찾아가서 한반도 통일에 관한 회담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면은 11월 2일 오스트리아식 중립화는 한국의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날 저녁 열린 긴급각료회의에서는 중립화통일론과 남북교류론을 주장하는 학생단체들을 제재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날 밤 국회는 긴급회의를 열어 “남북통일은 대한민국 헌법 절차에 의하여 유엔 감시 하에 인구 비례에 따라 자유선거를 실시함으로써 실현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보수언론은 서울대 민통련 발기와 그 단체의 ‘통일론’에 대해 장면 정권보다 훨씬 더 극렬한 반응을 보였다. 조선일보가 11월 3일자 석간 1면에 올린 사설(「근본적 문제를 망각한 통일론은 무용하다」)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 특히 금년에는 7·29 선거 때에 입후보자의 입에서 중립론이 나오기도 했고 이것은 그후 대학생들의 토론문제가 되었으며 최근에 와서는 심지어 남북연방론까지 학생들의 입에 오르내렸다는 말이 있고 또 서울대학 법대생들 간에는 한국의 통일문제를 연구할 기관인 ‘민족통일연맹’을 결성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때인 만치 우리의 통일문제는 전일의 어느 때보다도 더 국민의 관심을 끌게 하였다. 우리는 과거 본란에서 통일문제에 관한 견해를 누차 표명한 바 있었지만 유엔 감시니 중립국 감시니 하는 것이나 남북총선거니 북한만의 선거니 하는 것은 하나의 기술문제에 불과한 것이고 이런 문제보다 먼저 결정해야 할 근본문제가 있다는 것을 여기서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통일방안 중의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는 공산주의를 불법화시킬 수 있는 통일이냐 그렇지 않고 공산주의를 인정하는 통일이냐 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한 아무런 결정이 없는 통일방안은 결국 허무한 방안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욕망으로 말한다면 공산주의 없는 통일이라고 하겠다. 만약 공산주의를 인정하는 통일이고 보면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안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구 8억이 넘는 양대 공산국가가 접경해 있는 우리로서는 그러한 불안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 (…)
(…) 공산주의자를 위한 통일방안이 위험무쌍한 것은 췌언(贅言)할 바 없는 것이지만 현 국제정세 하에서는 무력에 의한 통일이 불가능하고 또는 소련이나 중공이 이미 획득해 놓은 북한지역을 특별한 이유 없이 포기하리라고도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현재의 평화통일이란 것은 결국 공산주의를 용인하는 통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며 그렇다면 국가 존망이라는 위험을 각오치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용공적인 통일이 가능하리란 것은 소련이나 중공은 북한이라는 미끼를 내놓고 남한까지도 병탄하려는 야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공산주의자가 공공연히 한국에 나설 수 있다고 하면 남한의 민주주의쯤은 문제없이 와해되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만치 우리로서는 존망의 기로에 설 각오 없이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며 만약 국제사정상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하면 미리미리 이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준비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태세를 갖추는 것이며 그러하기 위하여는 먼저 정신무장에 힘쓰는 동시에 공산주의를 인정하는 서구의 자유 제국(諸國)과 일본 등의 국정(國情)도 잘 연구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후에야 비교적 완전한 통일방안이 결정되리라고 본다.

이 사설의 요지는 공산주의가 사라지지 않는 한 한반도에서 통일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장면 정부가 주장하는 “대한민국 헌법 절차에 의하여 유엔 감시 하에 인구 비례에 따라 실시하는 자유선거”조차 공산주의를 불법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되면 공산주의를 인정하는 통일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단호한 주장을 펼친 이 사설은 결론 부분에서 ‘엉뚱한 대비책’을 제시하고 있다. “소련이나 중공이 북한이라는 미끼를 내놓고 남한까지도 병탄하려는 야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국제사정상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면 “공산주의자들과 싸워 이길 수 있는” 태세를 갖추기 위해 “공산주의를 인정하는 서구의 자유 제국과 일본 등의 국정도 잘 연구해보아야” 하리라는 것이다. 소련과 중공이 남한을 병탄하는 경우에 대비해서 서구의 나라들과 일본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다. 게다가 “그러한 연후에야 비교적 완전한 통일방안이 결정되리라고 본다”고 했는데, 이것은 ‘소련과 중공에 병탄당한 뒤의 통일방안’인가 아니면 그렇게 되기 전의 통일방안인가?

서울대 민통련은 1960년 11월 18일 3백여 명의 학생이 참가한 가운데 정식 결성대회를 열고 “학생과 일반인들의 통일의식을 고취하고 통일문제에 관련된 다양한 견해와 방법론을 연구 비판하는 것”이 설립 목적이라고 밝혔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기 직전인 1961년 5월 초까지 전국의 18개 대학과 경북고등학교에 학생 민통련 조직이 결성되었다.

민통련에서 활동했던 학생들은 통일문제를 남북의 민족적 통합 같은 좁은 차원에서만 사고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내건 구호와 발표한 취지문에는 ‘경제적 비극’ ‘냉전의 제물’ ‘미국 정부의 종속 정책’ 등이 표현이 자주 등장하였다. 이들은 분단 극복 문제를 경제문제,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종속·예속 문제와 긴밀한 관련 속에서 사고하였다. 그런 만큼 이들의 통일운동은 남북통합의 당위성과 필연성을 강조하고, 그 방법론을 모색하는 차원만이 아니라, ‘한미경제원조협정반대투쟁’과 ‘2대악법반대투쟁’ 등 다양한 정치·외교·경제적 쟁점을 포괄하면 전개되었다. 민통련이 여타의 학생운동세력과 구분되는 특징은 단지 통일을 소리 높여 외쳤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한국 사회의 문제를 보다 구조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서 해결하려 했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통일운동은 대중적인 관심과 호응을 끌 수 있으면서도, 다양한 현실의 구조적인 문제를 종합적으로 논의하고 제기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같은 책, 296~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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