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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부진한 혁명과업조선일보 대해부 2권-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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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0.24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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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혁명의 주체는 아니면서도 그 혁명 덕분에 권력을 장악한 장면 정권에 대해 다수 국민이 바란 것은 3·15 부정선거 ‘원흉들’에 대한 심판이었다. 그것은 이승만 독재를 청산하고 민주정부를 세우기 위한 최우선 과업이었다.

부정선거 원흉 단죄를 망설인 장면 정권

허정 과도정부 시기인 1960년 6월 15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한 뒤 부정선거 원흉으로 구속된 사람들의 담당 변호사들은 그들에 대한 처벌 법규인 정부통령선거법 등이 개헌으로 효력을 잃었기 때문에 법원은 면소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살인, 횡령 등의 범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석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이와 함께 형벌불소급원칙이 부정선거 원흉에게도 타당한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초대 대법원장이었던 김병로는 하루 속히 특별법을 제정함으로써 혁명과업을 완수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미 죽은 법으로는 처벌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
이승만을 옹호하는 등 갖가지 이유를 대면서 변호사들이 무죄를 주장하는 가운데, 9월 26일 검찰은 내무부와 경찰 책임자인 최인규·이성우·이강학·최병학 등에게 사형을, 자유당 기획위원들에게는 4년 6개월에서 15년을, 국무위원이었던 송인상·신현확 등에게는 12년 등을 구형했다. 언뜻 보면 검사가 중형을 구형한 것 같았지만, 내무부 관련자를 제외하고는 언론에서 주장한 국가변란죄, 국가보안법 등을 적용하지 않고 허위공문서 작성, 직무유기 등을 적용하였는데, 그것은 이 사건의 결말을 시사했다. 장면은 9월 21일 부정선거 원흉 처단 문제는 현행법으로 되는 것을 보고서 결정하겠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특별법 제정을 반대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 관계자들과 성향이 비슷했기 때문인데, 정국의 불안은 특별법을 제정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더 커지고 있다는 점을 그는 간과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187~188쪽).

10월 8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린 ‘6대 사건’ 판결 공판은 대다수 국민에게 충격을 주었다. 조선일보 그 날자 석간 1면 머리에는 「6대 사건 검찰 공소 사실상 전면 파기 / 홍진기·조인구·곽영주는 무죄(발포 관계) / 유충렬만 사형 언도 / 부정선거 사범엔 처음으로 유죄 / 장 부통령 저격사건 전원 무죄 / 깡패 최고 5년」이라는 기사가 대서특필되었다.

8일 상오 11시 정각 서울지방법원 대법정에서 개정(開廷)된 발포명령사건, 정치깡패사건, 장면 박사 저격 배후사건, 대통령 암살음모 조작사건, 서울특별시 및 경기도 부정선거 원흉 사건, 제3세력 제거 음모사건 등 6대 사건의 판결공판은 발포명령 책임자로 유충렬에 극형인 사형, 백남규에 무기징역의 판결을 내렸을 뿐 기타 각 피고인들에 대해서는 법률상 제반 이유를 들어 유기징역 또는 무죄, 공소기각, 형면제, 심지어는 집행유예 등 각양각색의 선고를 내렸다. 특히 발포명령자에 있어서는 홍진기와 조인구, 곽영주 등이 모두 무죄로 되었으며 장 박사 저격사건은 전원이 무죄, 그밖의 선거법 위반 피고인 등에겐 판결이유에서 면소론을 채택치 않았고 처음으로 유죄 판결을 내렸다.
장준택 부장판사 주심, 김동정 판사 배석, 변호인단 입회하에 개정된 이날의 판결공판은 독재정권이 거꾸러진 지 173일, 7월 6일의 제1차 공판으로부터 따져 95일이 되기까지 연 23회의 공판과 3회의 현장검증을 거쳐 결실한 것인데 재판부는 48명의 피고인들을 일일이 사건별로 판결이유를 분리하여 약 2시간 반에 걸쳐 판결이유 요지만을 낭독, 마침내 일반측이 기대했던 바와 동떨어진 판결을 내림으로써 검찰의 공소는 사실상 전면적으로 파기된 것인데 피고인 등 가족석에서는 연상 박수가 튀어나왔으며 무죄를 판결 받은 피고인들은 소리 높여 울기도 하여 이채를 띠었다.

대중의 기대와 상식을 한참 벗어난 판결이 나오자 10월 8일 마산에서는1천여 명이 철야데모에 들어갔다. 판결을 내린 부장판사 장준택, 서울지방법원장 나향연, 판결에 관여한 판사들, 그리고 무죄로 석방된 피고인들은 피신했다.

조선일보는 10월 9일자 조간 1면 머리에 「6대 사건 1심 판결 결과에 / 정계에서 경악과 비난성 / 혁명정신 모독을 지적 / 법관 탄핵소추 결의안 제기 기세」라는 기사를 올리고 같은 날자 석간 1면에 「의외의 지법 판결은 국회, 검찰 및 법원의 공동책임」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6대 사건에 관한 8일의 서울지방법원 판결이 지나치게 관대했다는 것이 일반의 여론이다. 이 피고들을 이승만 독재에 협력한 원흉으로 보아온 우리 국민이 그러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법관들의 의견이 국민감정과 다를 수 있다는 점도 시인치 않을 수 없다. 왜 그러냐 하면 검거된 자에게는 반드시 형을 가해야 하고 검사의 구형이 있으면 대체로 그 구형에 따라야 한다고 하면 결국 법관은 있으나 마나하게 되겠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증거가 충분치 못하고 기소 내용이나 절차의 결(缺)이 있으면 무죄, 공소기각, 면소 등의 판결을 내릴 수도 있고 현행 법조문의 범위 내에서 형량을 결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검찰의 증거 수집이 소홀했다는 일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수인(數人)에 대해서는 너무나 중하였고 수인에 대하여는 너무나 경했다는 비난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하나 의심스러운 점은 꼭 현행법 만에 의존한다고 하면 정부통령선거법에 저촉된 것은 면소가 되어야 할 터인데 전기 선거법의 벌칙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만약 이것이 4월 혁명의 정신을 살리기 위한 것이라면 그 외의 범법해위에 대해서도 4월 혁명의 정신이 반영되었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는 이번 판결이 이 점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지적치 않을 수 없다. 따라서 법관의 법리 해석과 4월 혁명 정신의 반영 여부에 의문이 없을 수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판결이 내리게 된 데 대해서는 반드시 법관만을 책(責)할 수 없는 일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첫째 검찰의 기소 죄목이 적절치 못했다는 점을 들어야 하겠다. 이들 중의 대부분은 국가보안법에 의하여 기소되었어야 할 것이다. 보안법 이외의 형법상 죄목이 다수 열거되었지만 살인, 살인미수, 살인교사 이외의 것은 경형(輕刑)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둘째는 입법부의 소홀이다. 이번 판결에서 정부통령선거법이 그대로 적용되었지만 고등법원에서도 지법의 이러한 해석을 그대로 시인할까 하는 의문이 없을 수 없다. 국회는 당연 개헌과 동시에 이에 관한 법적 조치를 행했어야 할 것이다. 또 이러한 실수가 있었으면 국회는 특별법 제정을 빨리 했어야 할 것이다. 3·15 선거 당시에 지방의 말단 책임자로 있던 자까지도 공무원 정리 요청에 의하여 그 직에서 물러나게 되는 이때 그 당시의 국무위원 기타 중앙책임자로 있던 자들이 기(畿)개월에 불과한 형을 받고 또 집행유예를 했다는 것은 심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원흉급 인물을 처단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특별법이 있어야 할 터인데 5대 국회가 소집된 지 2개월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것을 제정 못한 책임은 입법부가 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사설은 이른바 ‘6대 사건’에 대한 서울지방법원의 판결이 ‘지나치게 관대했다는 것이 일반의 여론’이라고 전제하고 나서 국회와 검찰, 법원의 ‘공동책임’을 묻고 있다. 특별법을 제정하지 않으면 3·15 부정선거의 원흉들을 비롯해서 부통령 장면 저격사건 범인들을 엄정하게 처단할 수 없다는 것이 사설의 핵심이다.

그런데 당시 상황을 되짚어보면, 장면 정권의 주축인 민주당 신파는 물론이고 구파까지도 ‘혁명과업’을 성실하게 실천하기보다는 정국의 주도권을 잡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진정한 민주주의체제 확립을 위해 4월 혁명의 정신을 계승하고 발전시키겠다는 의지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사설의 ‘공동책임론’은 권력 주체의 보수적 태도, 나아가서 ‘반혁명적 행태’를 더 준엄하게 비판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격렬한 시위가 일구어낸 ‘혁명입법’

10월 8일에 나온 서울지법의 6대 사건 판결에 대한 비판과 불만이 여러 곳에서 폭발했다. 조선일보가 일련의 시위와 정치권의 동향을 보도한 기사들 가운데 중요한 것들은 아래와 같다.

· 「판결의 불만 각처서 폭발 / 9일 하오 경무대 앞서도 / 대통령에 원흉 처벌을 요구」 「석방자 다시 구속 / 이 검찰총장 추진 언명」 「10일 새벽 일단 해산 / 5천의 마산 시민 데모」 (10월 10일자 석간)
· 「11월 중순까지 혁명입법 완수 / 11일 민의원서 만장일치 가결 / 개헌한 내(來) 15일 내 제출 / 형법불소급 원칙에 예외 규정」 「재감시 규정 포함 / 혁명 뒤처리 특별입법에 착수」 「혁명의 열매 찾아 포효하는 4월 사자 /혁명 입법 의사당 앞서 절규」 (10월 11일자 석간)
· 「민주반역자 처리법안 통과 / 의회 절차 생략하고 즉시 참의원에 회부 / 석방자 재구속도 규정 / 혁명법 제정까지 잠정적 조치」(10월 12일자 석간)
· 「제2공화국 첫 개헌안 발의 / 오늘 하오에 공고, 11월 13일경 표결 / 현저한 반역자들 / 특재·특검도 구성」(10월 17일자 석간)
· 「반민주행위자의 공민권 제한 / 자동케이스도 심사제로 / 법사위 제1소위안을 수정 채택 / 위헌론 들고 찬반 논쟁 /부정선거 관련자 법안도 통과」(11월 1일자 조간)
· 「자동케이스 두기로 /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을 번의 결의 / 4월 상이학생들 압력에 의해, 민의원 법사위」(11월 2일자 석간)
·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법안 / 오늘부터 본회의서 심리 / 금융통화위원도 삽입 / 폭행상해 등엔 최고가 15년형」(11월 15일자 석간)
· 「처벌 범위를 대폭 축소 / 부정선거처벌법안 수정 통과 / 기소된 자로 대상 국한 / 일부 삭제·자금제공자 첨가 / 사형 삭제는 좌절」(12월 17일자 조간)
· ‘특별재판 및 특별검찰부 조직법안 / 민의원안대로 무수정 통과 / 각종 수정안 모두 부결 / 참의원, 상고 규정 기도도 좌절」(12월 18일자 조간)
· 「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안 / 참의원 수정안 부결코 민의원안 확정 / 문제의 자동케이스 존치 / 재석 167명 중 가 161 부 6표」(1961년 1월 1일자 조간)

1960년 10월 17일 민의원에서 발의된 헌법개정안은 헌법 부칙에 관한 것이었다. “3·15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정행위를 한 자, 부정행위 항의에 살상 등의 행위를 한 자를 처벌하고, 1969년 4월 26일 이전에 부정축재를 한 자에 대한 행정상 또는 형사상 처리를 하기 위한 특별법을 둘 수 있으며, 이 형사사건들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조항을 부칙에 삽입했다.

민의원은 11월 23일 재석 200명 가운데 191명의 찬성으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참의원은 11월 28일 재석 52명 가운데 44명의 찬성으로 개정안을 무수정 통과시켰고, 정부는 이튿날 개정헌법을 공포했다. 그에 앞서 민의원은 11월 5일 ‘4대 특별법안(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안,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안, 부정축재처리 특별법안, 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부 조직법안)’을 마련한 바 있었다. 민의원과 참의원을 제일 먼저 통과한 특별재판소 및 특별검찰부 조직법안은 12월 23일자로 공포되었다.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안은 12월 29일 민·참의원을 통과해 12월 31일 공포되었다.

국무총리 장면과 민주당은 공민권 제한 대상자를 축소하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1960년 11월 15일 부정선거 원흉의 한 사람으로 꼽히던 장경근(자유당 강경파, 전 내무부차관)이 일본으로 도주하는 사건이 터졌다. 구속되었다가 보석 허가를 받고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그가 아내와 함께 비밀리에 달아난 것이었다. 그 사건은 혁명입법에 소극적이던 장면 정권과 민주당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부정선거 원흉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여론이 들끓었기 때문이다.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소가 거둔 미미한 성과

혁명과업 가운데 가장 중요한 반민주행위자 처벌을 위해 수사와 기소를 맡은 특별검찰부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특검부장 물망에 오른 사람들이 몸을 사리면서 사양했기 때문이다. 민의원은 1961년 1월 12일에야 특검부장을 가까스로 선출할 수 있었다. 그 자리를 맡게 된 대구고검 검사장 김용식은 이승만 정권 시기에 대구고법원장이었는데 이승만의 연임 거부로 물러났다가 4월 혁명 이후에 검사장으로 임명된 사람이었다.

30명의 검찰관과 각 도마다 15명씩으로 구성된 조사위원을 중심으로 한 특검은 1월 17일 서울 용산의 육군 헌병감실에서 정식으로 출범했다. 그러나 정부에서 예산이 제때 집행되지 않아 엿새 동안 수사는 커녕 운영방침도 세우지 못한 채 시간을 허비하다가 1월 25일경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그날부터 공소시효 만료일인 2월 28일까지는 겨우 35일밖에 남지 않았다.

3월 1일자 조선일보 석간 2면 머리에는 「특검백서 / 공소시효 완성 /기소율 2.5%」라는 기사가 올랐다. 2월 28일 오후 12시 현재 입건 886건, 기소 31명, 도망 185명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들 가운데 구속기소된 사람은 전 법무부차관 신언한, 전 민의원 김철안, 전 성균관대 총장 이선근, 전 서울시장 임흥순, 전 자유당 기획위원 이중재 등 26명으로 특검 검찰관 수보다도 적었다. 부정선거 원흉으로 꼽히던 한희석(당시 참의원) 등 13명은 불구속기소되었다.
이렇게 미미한 특검의 활동 실적에 대해 조선일보는 3월 1일자 석간 1면에 「특검 활동의 일단락에 대한 소감과 앞으로 남은 과제」라는 사설을 실었다.

(…) (특검의) 성과는 국민의 기대나 또 심지어 특별검찰부가 애초에 세웠던 목표보다는 훨씬 미흡한 것인 점에서 우리는 실망을 감출 수 없다. (…)
우리는 이와 같이 특검 활동이 용두사미 격이 되고 말 것을 염려하여 일찍이 특검의 탈선적 수사 태도에 일침을 가한 바 있으니 그것은 특검이 일반 국민에게 범죄의 고발을 권유하는 투서 장려책을 쓰려는 데 대하여 경고한 것이었다. 과연 그러한 투서 장려의 결과가 특검의 중점적인 사건 취급을 방해했던 까닭인지 도중에 이르러 투서는 받지 않는다는 비명까지 울린 바 있었다. 특검이 일반 사법기관과 또 특검의 보조자 격인 경찰과 유기적인 상호협조를 결여한 데서도 그 원활한 활동이 저해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던들 관계 재판서류의 송달을 에워싸고 대립을 보거나 대부분 국내의 어느 곳에 숨어 있을 혐의자 근 2백명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좋지 못한 요인들로 말미암아 3·15 부정선거의 모의 집행 및 자금관계에 걸친 체계 있고 종합적인 적발이 잘 되지 못한 감이 있고 또 발포 관계 책임자의 규명에 있어서도 당초의 호언장담과는 달리 신통치 못한 결말을 빚어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도망 중에 있는 185명의 명단 속에는 예컨대 이른바 ‘자유당 소장 10인조’에 속하는 알맹이 부정선거 원흉들이 끼어 있다. 또 자금관계에 있어서도 ‘조달자’라는 개념의 모호성과 더불어 흐지부지한 일괄 불기소 처리를 하였다. 발포관계에 있어서도 특검의 활동으로 새로운 사실을 포착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이미 일은 결말지어져 가게 되고 앞으로 남은 문제는 일반 재판에서 넘어온 사건과 더불어 이번에 특검이 기소한 사건에 대한 공소 유지라 할 것이다. 그러나 도피자들에 대한 수사지휘권을 행사하는 것도 특검이 앞으로 할 중책이다. 우리는 한편으로 국민의 냉정과 침착을 호소하면서 특검이 이제 앞으로 남은 임무를 성실히 이행하여 유종지미를 맺기를 부탁한다.

전주지방법원장을 지낸 변호사 문기선을 소장으로 한 특별재판소는 1961년 1월 25일 5개 재판부로 구성되었다. 2월 4일부터 본격적으로 재판을 시작한 특별재판소는 특별법이 제정되기 전에 일반 법원이 맡았던 부정선거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까지 겸했다. 5월 16일 박정희가 주동한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날까지 특별재판소가 접수한 사건은 103건, 관련자는 263명이었다. 그 가운데 특별재판소가 처리한 것은 4월 17일 내무부사건에 대해 최인규에게 사형을, 이강학에게 징역 15년을 선고한 경우 등에 불과했다. 내무부사건조차 연합심판부의 확정판결까지 가지 않았으므로 특별재판소가 제대로 처리한 것은 단 한 건도 없는 셈이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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