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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9 총선 민주당 압승과 장면 정권 출범조선일보 대해부 2권-2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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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0.18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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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5월 2일에 이루어진 민의원의 결의에 따라 구성된 ‘국회의원선거법안 기초위원회’는 6월 7일 법안을 상정했다. 법안은 6월 22일 국회를 통과해 이튿날 공포되었다.


민주당 실질적으로 분당, 그러나 총선 압승

새로 제정된 국회의원선거법은 이승만 정권이 악용해온 ‘입후보 등록 방해’를 막기 위해 주민 추천 없는 신고제를 채택하는 한편 처음으로 부재자 투표제를 도입하고 릴레이식 부정투표 방지 조항을 신설했다. 새 국회의원선거법이 공포된 6월 23일자 조선일보 석간 1면에는 「민주당은 국민의 신망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집권이 확실해 보이는 민주당에 대한 ‘경고’를 담은 내용이었다.

과거 유일한 야당으로서 이 독재정권에 대항한 것이 민주당임은 삼척동자라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만치 국민들은 민주당을 무조건 지지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 정강정책의 호부(好否)도 별로 문제되지 않았고 인물의 여하에도 깊은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독재정권을 물리치고 국민주권을 도로 찾아야 하겠다는 열원(熱願)에서 나온 일임은 두말할 것 없는 것이다. “4월 혁명이 학생의거에서 시작되었고 이것이 성공을 보게 된 것도 주로 학생들의 힘임에 틀림없으나 반독재세력의 토대를 장만해 놓은 것은 민주당이라”고 민주당원 자신들이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그러나 일반 국민의 힘이 이보다 더 컸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민주당으로서는 더 겸허한 태도로 현 시국에 대처함으로써 국민의 신망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 경향 각지에서 볼 수 있는 민주당원들의 행동이 이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음은 과거 독재정권과 싸워온 민주당을 위하여 실로 유감천만한 일이다. 현 민주당 간부들은 민주당이 새 정권을 담당하게 될 것을 확신하고 있다. (…)
(…) 금후의 집권당은 국민이 자신의 대표로 선출할 국회의원의 분야에 의하여 결정될 일이고 막연하게 민주당이 집권당이 되리란 것을 단언할 수가 없다. 이번 선거엔 과거 국민으로부터 많은 불신을 받아온 현 의원보다 신인을 더 많이 지지할 듯하다는 것과 신인은 대부분 무소속이 되리란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 정세에 있으므로 민주당은 종전과 다름 없는 국민의 신망을 얻어야 할 터인데 선거도 하기 전에 벌써 집권당이 된 듯이 안하무인의 행동을 한다면 국민은 결코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
(…) 민주당은 금후 자당이 집권하더라도 결코 과거의 자유당과 같이 국민을 억압하는 일이 없을 것을 지금부터 국민 앞에 실천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특히 정치권력이 입법기관에 더 많아질 우려가 있는 내각책임제 개헌이 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허정 과도정부는 6월 27일, 제5대 민의원, 초대 참의원 선거를 7월 29일에 함께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후보 등록은 7월 2일 마감되었다. 233명을 선출하는 민의원 선거에는 민주당 305명, 사회대중당 129명, 자유당 55명, 무소속 1,009명이 등록했다. 참의원선거에는 무소속 129명, 민주당 61명, 자유당 13명, 사회대중당 6명이 등록했다.

7·29 총선거는 이승만 정권 시기인 1954년과 1958년에 치러진 민의원선거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정이 덜했지만 막걸리와 고무신이 오가는 등 혼탁한 면도 있었다. 유권자의 연령이 21세에서 20세로 낮추어진 7·29 선거에는 민의원의 경우 1천1백59만여 명의 선거권자 가운데 84.3%인 977만여 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민주당은 다수 언론의 예상과는 달리 유효투표의 41.7%를 얻어 전체 의석 233석 가운데 75%가 넘는 175석이나 차지했다. 무소속은 득표율 46.8%를 기록했으나 당선자는 49명뿐이었다. 혁신계는 사회대중당 4석, 한국사회당 1석에 그쳤다. 자유당은 2명의 당선자를 냈는데, 무소속으로 옥중 출마한 이재학을 포함해 구자유당계 10여 명이 당선되었다.

참의원선거에서 민주당은 득표율 39.0%로 58석 가운데 31석(53%)만을 차지했다. 무소속이 20석(득표율 49.3%)이나 가져갔다. 자유당 후보는 4명이 당선되었지만 구자유당계를 포함하면 20여명이 당선되었다. 상원 격인 참의원의 의석 분포 때문에 민주당 정권은 부정선거 원흉이나 부정축재자 처벌 등 당면 문제를 처리하는 데 애로에 부닥칠 것이 분명해 보였다.


국무총리 선출 둘러싼 신·구파의 사생결단

총선 이튿날인 7월 30일자 조선일보 석간 1면 머리기사 제목은 「정국 초점, 민주당 분당 여부에 / 신파, 내각 안분(按分) 포기 / 구파, 분열 가능성 증대 / 원내 절대 다수의 전망이 서자」였다. 그 옆에 자리잡은 사설(「민주당의 대승과 경계해야 할 금후의 정국」)은 민주당의 압승이 일으킬 정치적 파장을 진단하면서 대응책을 제시했다.

(…) 민주당의 집권이 확정된 오늘에 있어 어떠한 것들이 문제화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당면한 첫째 문제는 민주당은 그대로 단일 당으로 나갈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신구 별로 분당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원칙으로 말하면 정강정책이 꼭 같으면서도 당원 각 개인의 그룹 감정이 있기 때문에 분당을 한다는 것은 정당한 정치인의 행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개인 간의 감정 때문에 당을 분립(分立)하게 한다면 무수한 소당(小黨)이 난립될 우려가 있을 뿐 아니라 과거 왕조시대의 사색파쟁과 같은 결과를 초래할 지도 모를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일면으로 보면 3분의 2 이상을 차지한 일당이 있는 반면에 이에 대립될 수 있는 야당이 없다고 하면 자연 일당독재의 형태가 될 것은 틀림없는 것이며 따라서 민주당은 아무 거리낌 없이 국정을 운영하게 될 것이므로 이 역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신국회의 개회와 동시에 시급히 정계 개편이 행해질 것을 바라지 않을 수 없다. (…) 정계의 전면 개편과 동시에 민주당의 분당이 불가피하게 될지도 모를 것이다. 과연 이와 같은 정계 개편이 있을지 없을지는 지금 예측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것이 여하히 되든 간에 민주당으로서는 이 시기에 자기반성과 동시에 일대 결의가 필요하리라고 본다. 지금 국민 간에는 금후 민주당이 과거의 자유당과 마찬가지로 또는 그 이상의 독재를 행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깊어가고 있다. 혹시 이것이 사실화하는 때가 온다면 이에서 더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4월 혁명이 한갓 민주당에게 정권을 넘겨준 결과밖에 더 될 것이 없을 것이며 독재부패는 그대로 계속될 것을 의미하게 되겠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그렇게 된 다면 또 다시 4월 혁명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국가와 민족은 더 심한 곤경에 함입(陷入)케 될 것이다. 전 국민은 지금 전 시선을 민주당에 주집(注集)하고 있는 터인즉 민주당으로서는 과거 자유당 하에서 맛본 고난을 잊어버리지 말고 어디까지나 전 국민의 의사에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최대 최선의 주의를 가해야 할 것이다.

이 사설은 7·29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민주당이 견제세력 없이 독재화함으로써 자유당처럼 혁명에 부닥칠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는데, 그 이후의 사태 전개를 보면 민주당 신·구파의 분당으로 집권당이 허약한 정권이 되고 결국 1961년에 5·16 쿠데타를 당하게 된다.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은 명목상 국가원수일 뿐 국정에 대한 실질적 권한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부여된 가장 강력한 힘은 국무총리 지명권이었다. 7·29 총선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윤보선, 김병로, 허정 등이 대통령 물망에 올랐다. 선거가 끝나자 민주당 신파는 대통령직은 구파에게 주고 국무총리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뜻을 명백히 밝혔다. 그에 비해 구파 쪽에서는 윤보선과 김도연이 총리가 되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구파 내부에서 표 대결을 벌인 끝에 대통령에 윤보선, 총리에 김도연을 내세우기로 결정이 되었다.

8월 5일자 조선일보 조간 1면 머리에는 「민주당 사실상 분당」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구파가 ‘단독 집권’을 선언하고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겸점(兼占)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신파는 ‘구파 내 분열공작’을 하면서 ‘무소속 포섭 등으로 집권을 강구한다’는 기사가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국회 개원 이틀을 앞둔 8월 6일 민주당 신파와 구파는  당선자대회를 열었다. 이제 분당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8월 12일 오전에 열린 민·참의원 합동회의에서 대통령 선출을 위한 무기명비밀투표가 실시되었다. 민주당 최고위원이며 민의원 의원인 윤보선이 재석의원의 3분의 2가 넘는 208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위는 29표를 얻은 독립운동가 출신의 김창숙이었다. 윤보선은 “당선된 이상 편파적인 입장을 떠나 총리 지명을 공정히 하겠다”고 밝혔다.

대통령 윤보선은 8월 16일 자신과 같은 구파 소속의 김도연을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하면서 헌법 제16조에 따라 민의원의 동의를 요청했다. 조선일보는 같은 날짜 석간 1면에 「김도연 씨 총리 지명과 민의원의 중한 책무」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올렸다.

(…) 다른 나라의 경우라면 민주당의 영수라고 해야 할 장면 씨가 지명되는 것이 원칙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이것이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즉 장면 씨가 민주당의 대표최고위원임에는 틀림없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민주당 신파의 영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구파 측에서는 이미 동파의 결의로써 김도연 씨를 총리후보로 내세웠고 윤 대통령도 자신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에 이미 동의한 바 있었다고 전해진 것으로 보아 양자택일이 불가피하게 것이다. 이와 같은 비정상적인 방법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이유도 역시 민주당이 이름만의 한 정당이고 그 실 내용은 2개 당의 합체에 불과하다는 데 있는 것이다. (…)
김도연 씨를 총리에 지명한 것이 국회의 동의를 얻게 된다면 그대로 조각이 개시될 것이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제2차로 장면 씨를 총리에 지명할 것은 틀림없는 것이며 (…) 제2차에도 동의를 얻지 못하면 부득이 민의원에서 선출하게 되리란 것은 헌법 조문에 의하여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다. (…) 우리 국민은 누가 총리가 되느냐 하는 문제보다도 어떻게 해야 유능 유위한 인물을 망라한 내각이 조직될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그 내각이 민의원에서 절대다수의 지지를 얻어 강력해질 수 있으며 이에 따라서 정국이 안정될 수 있을까를 더 중시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는 데는 두 가지 요건이 구비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는 총리의 역량이 그와 같은 탄력내각을 조직할 수 있어야 할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의원 의원들이 이런 방향으로 결집되어야 하는 것이다. 김도연 씨가 국회의 동의를 얻을 가능성 여부와 부결될 때 국회가 누구를 선출하느냐 등사(等事)를 지금 예단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 230명의 민의원 의원이 이것을 결정할 것만은 틀림없는 것이므로 총리후보자를 포함한 전 의원들은 신중하고도 올바른 판단을 내림으로써 제2공화국의 첫 내각이 국민의 여망에 어긋나지 않는 내각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8월 17일 오후 열린 민의원 제6차 본회의에서 국무총리 인준 표결을 한 결과, 김도연은 재석 224표 가운데 찬성 111표, 반대 112표를 받았다. 재적(227석) 과반수인 114표에서 3표가 모자라서 인준은 부결되었다. 8월 17일 대통령 윤보선은 장면을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하고 국회에 동의를 요청했다. 19일 오후에 열린 민의원 제8차 본회의에서 장면은 재석 225표 가운데 찬성 117표, 반대 107표, 무효 1표로 재적 과반수보다 3표가 많은 찬성으로 국회 동의를 얻는 데 성공했다. 민주당 구파와 신파의 집권 경쟁에서 신파가 천신만고 끝에 승리한 것이었다.

조선일보는 8월 19일자 석간 1면에 「정국 안정을 위하여 거국내각을 제안함」이라는 사설을 실었다. 그러나 깊어질 대로 깊어진 민주당 신파와 구파의 갈등과 대립은 거국내각 구성보다는 분당을 재촉했을 뿐이다.


장면 내각 출범과 두 동강 난 민주당

8월 23일 오전 11시 45분 제2공화국의 초대 내각이 구성되었다. 내각의 절대다수를 민주당 신파가 차지한 내각 명단은 다음과 같다.

외무부장관 정일형, 내무부장관 홍익표, 재무부장관 김영선, 법무부장관 조재천, 국방부장관 현석호, 문교부장관 오천석, 부흥부장관 주요한, 농림부장관 박제환, 상공부장관 이태용, 보건사회부장관 신현돈, 교통부장관 정헌주, 체신부장관 이상철, 국무원사무처장 오위영, 무임소장관 김선태

이 가운데 민주당 구파는 교통부장관 정헌주뿐이고 무소속 2명, 원외 1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신파였다. 국무총리 장면은 구파를 내각에 기용하려고 했지만 구파가 자신들이 추천한 인사를 쓰고 소환권도 구파 의원총회에 맡겨달라고 요구하자 “독자적인 원내교섭단체를 가진 구파와 연립내각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부했다.

조선일보 8월 23일자 석간 1면의 사설(「제2공화국의 첫 출발인 장면 내각의 성립을 보고」)은 초대 내각을 아래와 같이 평가했다.

(…) 우리는 이 장면 내각이 그들에게 부하된 역사적 책임을 짊어지고 다사다난한 제2공화국의 운명을 어떻게 개척해 나갈 것인가에 심심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으며 또한 전체 국민의 체감(體感)에 직결된 앞으로의 책임내각정치의 운영을 직시하려 하는 바이다. 그러나 솔직히 평해서 이번 조각은 7·29 총선에 국민들이 투표를 통하여 표시한 정치적 책임과는 거리가 먼 것이고 또한 총리 인준에 앞서 장면 총리가 공언한 ‘거국 내각’ 또는 ‘인물 본위의 내각’이라는 기대에도 크게 어긋났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그 책임이 신파에 있건 구파에 있건 간에 국민들이 ‘민주당’이라는 정당에게 안정세력을 부여했는데도 불구하고 신·구파가 이렇다 할 대의명분도 없으면서 예각적인 대립을 노현(露顯)시켜 급기야 분당 불가피의 정국으로 몰아넣고 말았다는 것은 정상적인 정치도의가 아닌 것이며 신파 일색에다가 구파에서 일탈된 단 1명의 원외 각료를 끼어서 구성한 이번 내각이 과연 금후 얼마마한 안정을 지녔을까 매우 불안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
어차피 제2공화국의 첫 국무원은 장면 씨를 수반으로 하는 민주당 신파 단독내각이란 성격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책임내각으로서의 공동운명을 걸머져야 하기 때문에 더 강력한 행동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필연적인 결과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그 반면 민주당 신파는 국회 내의 안정세력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 여간 노력치 않는다면 강력한 정치를 행할 수 가 없는 난국에 봉착할 것은 너무도 명료한 일이라고 하겠다. (…) 이번 내각은 난마와 같이 흐트러진 국정을 바로잡고 혁명과업의 완성과 경제위기의 극복에 비상한 결의와 각오가 없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신파만의 단독 조각이라 할지언정 국민들은 민주당이 공약한 제반 정책을 신뢰하고 민주당에 귀중한 표를 던진 것이니 신파가 집권하건 구파가 집권하건 그 공약을 실천해야 할 정치적 책임에 아무런 변동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장면 내각은 신파 단독집권이라고 하여 민주당의 공약을 배반할 수 없는 것이며 국민들은 철저한 감시를 통하여 민주당 내각의 공약 실천을 촉구치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장면 내각으로서는 이와 같은 중대한 시련을 극복하고 내각책임제의 원활한 운영과 더불어 국리민복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기 위해서 초비상적인 각오가 있을 줄 믿어마지 않는 바이지만 우리로서 특히 관심을 피력치 않을 수 없는 것은 초대 내각 운영의 선부(善否)는 곧 제2공화국의 전도를 복(卜)할 것인즉 아무쪼록 4월 혁명의 고귀한 의의를 각명(刻銘)하여 새로운 나라의 새로운 정치에 임하는 새로운 정치도의를 실천함으로써 험난한 정국을 수습해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 사설은 신파 일색의 장면 내각이 안고 있는 정치적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새로운 나라의 새로운 정치에 임하는 새로운 정치도의를 실천”해 달라고 주문하고 있다. 그러나 장면 내각의 앞길에는 험난한 장애물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8월 31일 민주당 구파는 ‘구파동지회’라는 이름으로 민의원에 원내교섭단체 등록을 했다. 거기 가입한 의원은 86명이었다. 같은 날 무소속 의원 48명으로 구성된 ‘민정구락부’도 등록을 마쳤다. 국무총리 장면은 9월 2일 ‘구파의 교섭단체 등록은 사실상 분당행위’라고 비난하면서 “장관 다섯 자리를 줄 테니 수락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구파는 아무런 응답도 없이 9월 3일 원내총무에 유진산, 부총무에 이민우와 김영삼을 선출했다.

조선일보는 9월 7일자 석간 1면에 올린 사설(「민주당은 신·구파 싸움을 조속히 종결시켜라」)을 통해 “우리의 정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 민주당의 신·구파 분쟁이며 이것이 민주당의 우환일 뿐 아니라 제2공화국의 전도를 위태롭게 하는 것임은 국민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사설은 “신·구파는 정정당당하게 현 정국과 의원(議院)정치의 상도(常道)를 통하여 솔직한 의견을 토로하고 또 상대편의 의견을 들어줄 아량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요청했다. 독자적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없게 된 행정부는 9월 7일 내무부장관 홍익표, 국방부장관 현석호, 상공부장관 이태용, 국무처장 오위영을 사임시키고 나머지 각료 전원의 진퇴 또는 재배치 문제를 총리에게 일임하기로 결정했다. 1차 내각이 구성된 지 보름 만에 실질적으로 해체하기로 한 셈이었다. 구파를 상대로 내각 참여 교섭에 나선 신파의 수장 장면은 9월 12일 대폭 개편된 내각 명단을 발표했다. 구파에서 국방부장관에 권중돈, 부흥부장관에 김우평, 교통부장관에 박해정, 보사부장관에 나용균, 교통부장관에 박해정이 기용되었다. 나중에 체신부장관으로 입각한 조한백을 포함해서 구파는 각료 15명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되었다.

10월 11일 헌정 12년 역사상 최초로 시위대가 국회의사당의 단상을 점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날자 조선일보 석간 1면 기사는 그 경위를 이렇게 보도했다.

(…) 민주당 신·구파 파쟁으로 소일해오다 뒤늦게서야 혁명입법을 사작하려던 국회는 11일 민의원 본회의 도중 갑자기 뛰어들어 의장단(議長檀)을 점거해버린 4·19 부상학생 때문에 의정사상 처음 보는 난장판이 되어버렸다.
이날 아침 국회의사당 앞에서 6대 사건에 대한 서울지법 판결 규탄 데모를 벌이고 있던 백의(白衣)의 부상학생 약 60명은 이날 상오 11시 반 본회의장 앞으로 밀치고 들어가 의장단을 점거, 정쟁 지양과 국회 해산을 고함치며 호읍(號泣)을 쏟다가 동 11시 55분 자율적으로 물러났다. (…) 이날 경비 중인 수백 명의 경관과 국회 경위들을 밀어젖히고 의사당에 뛰어든 부상학생들은 “정쟁국회는 즉시 해산하라” “민주당 국회는 이때까지 무엇을 했는가?” “너희들(의원)은 다 나가라. 우리가 정치하겠다” “우리에게 총을 쏘아라”는 등 제가끔 한마디씩 고함쳤으며 그 가운데는 단상의 유리컵을 깨뜨려 할복하려던 학생들도 있었다.

민주당 신파와 구파 의원들은 시위대 앞에서 앞으로는 정쟁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악수를 나누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인 10월 12일 구파는 신당을 발기하기로 결의한 뒤 13일에는 구파동지회를 신민당으로 출범시키겠다고 발표했다.

11월 8일 구파는 신당발기주비(籌備)대회를 열고 결당대회는 1961년 초에 갖겠다고 발표했다. 그 날자 조선일보 석간 1면에는 구파가 만드는 신당이 정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고 평가하는 내용의 사설(「민주당 구파의 발당과 촉구되는 양당제도의 확립」’)이 나왔다.

(…) 민주당 분당론이 처음 나타나자 일부 국민 간에는 분당이 정책상 대립에서가 아니라 인적 관계에서라는 점에서 대의명분이 없다고 평했던 것이지만 일부에서는 분당을 계기로 하여 민주당의 내분이 완전 해소되고 또한 국내 정계가 안정될 수만 있다면 도리어 전화위복이 되리라는 견해를 표시해왔던 것이다. 장기간의 우여곡절을 거듭한 끝에 이루어진 결정인 만큼 우리는 이 신당이 건전하게 발전할 것을 바라는 바이지만 신당 지도자들은 발당에 앞서 우선 국민 앞에 명백히 해두어야 할 두 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첫째 민주당 구파 당원들을 중심으로 한 신당이 결코 구파 당원들의 사익(私益)만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공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정당’이라는 사실을 천명(闡明) 실천하라는 것이다. 특히 민주당의 분당은 전기한 바와 같이 인적 관계에 있었던 만큼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공익보다도 일부 정치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듯한 오해를 받기 쉽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당 지도자는 우선 이미 내세운 정강과 정책을 실천하는 동시에 의원내각제도 하에서 없지 못할 건전당이 되어야 할 것이며 이 사실을 국민에게 적극적으로 주지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둘째 신당 지도자들은 정당의 본질적 요건이라고 할 수 있는 조직과 정책 실천에 대해서도 신중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으로 안다. 정당의 정강정책은 당의 조직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만큼 그 조직이 민중을 토대로 한 전국적인 것이 되어야 할 것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그 정책도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고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이어야 함은 췌언(贅言)할 필요가 없다. (…) 우리는 4월 혁명 후 반년이 넘도록 계속되어온 민주당의 내분과 국내의 정치 불안이 구파의 신당 조직을 계기로 해소되게 된 것을 다행하게 생각하는 한편 이 구파 중심의 신당이 우리나라의 건전한 야당으로서 길이 발전하여 하루 속히 양당제도가 확립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 사설은 그릇된 현실 인식과 정치 전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정책상 대립’이 아니라 ‘인적 관계’ 때문에 정쟁을 일삼던 신파와 구파 가운데 구파가 분당함으로써 민주당의 내분이 해소되고 국내 정계가 안정되리라는 예측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본 것이다. 그리고 정권을 잡은 신파 못지않게 ‘사익’을 도모해온 구파가 만드는 신당이 어떻게 ‘민중을 토대’로 한 전국적 조직을 통해 정강정책을 실현할 수 있겠는가?

이 사설의 논지는 같은 날자 1면 머리에 실린 기사 내용과도 걸맞지 않는다. 「당 성격은 민주당과 대동소이 / 구파보수신당 발기주비대회서 강령·정책·선언문 채택」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구파의 신당은 신파가 확대 개편할 민주당과 다름없는 보수정당인데 어떻게 양당제도의 한 축으로서 혁명과업 수행을 위한 경쟁을 할 수 있을까? 당시 4월 혁명이 진정한 민주화라는 결실을 보기를 열망하던 국민들은 학생과 시민의 피와 희생에 힘입어 집권한 민주당이 보수적 한계 안에서나마 단합해서 혁명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최대한으로 노력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민주당 구파가 발기주비대회를 여는 과정에서 민관식을 중심으로 신파와의 합작을 주장하는 ‘합작파’가 생겨 11월 21일 의원 23명이 민주당에 가입했다. 그 결과 민주당은 국회 재적 의원의 과반수보다 7명이 많은 124명을 확보하게 되었다. 민주당과 신민당이 원내교섭단체 등록을 마친 1960년 11월 26일 현재 의석 분포는 민주당 126명, 신민당 65명, 민주구락부 34명, 무소속 8명이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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