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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에 찬물 끼얹은 허정 과도정부조선일보 대해부 2권-2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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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0.1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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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27일 대통령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했다. 1954년에 ‘사사오입’으로 개정된 헌법에는 대통령의 자리가 비면 부통령이 승계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장면이 4월 23일 부통령직을 사임했으므로 외무부장관으로서 수석 국무위원인 허정이 내각수반을 맡게 되었다. 과도정부 수반이 된 허정은 4월 28일 외무·내무·법무 3부를 제외한 9부 장관 가운데 6부 장관을 임명했다. 허정 과도정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외무-허정, 내무-이호, 재무-윤호병, 법무-권승렬, 문교-이병도, 농림-미정(未定), 부흥-전예용, 농림-미정, 상공-전택보, 보사-김성진, 교통-석상옥, 체신-미정

1948년 10월 이승만이 교통부장관으로 임명한 허정은 그와 오랜 인연을 맺은 측근으로서 이승만 정부에서 그 뒤 사회부장관, 국무총리 서리, 서울특별시장 등을 지냈다.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4월 28일 대법원장 조용순이 사표를 냈다. 그는 3·15 부정선거 직후 이승만과 이기붕을 찾아가서 축하인사를 할 정도로 ‘어용적인 법조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허정은 조용순에게 ‘번의’를 요청하면서 사표를 반려했다. 허정은5월 3일 5개 항목의 ‘시정방침’을 발표했다. 조선일보 그날 석간 1면 머리기사(「허세를 버리고 실질적 반공태세 강화 / 정부, 당면 5개 시정방침을 천명 / 대일외교 개선책으로 일본 기자 입국 허용 / 외원(外援) 효율적 사용에 주력」)는 그 내용을 이렇게 보도했다.

1) 현 정부는 과거보다도 일층 더 견실하고도 확고하게 반공산주의정책을 전진시킬 것이다. 허장성세하는 반공의 물질적 정신적 낭비를 없애고 이것을 유효하고 구체적인 대공(對共) 방위체제를 확립하는 데로 돌려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을 내용이 충실하고 자유가 충만한 반공보루로 만드는 것이 정부와 국민의 우선적 과업이다.
2) 부정선거의 처리에 있어 처벌의 대상은 부정을 강요한 고위 책임자와 국민에게 잔학행위를 한 사람에게만 국한될 것이다. 전단(專斷)정책을 후속(後續)함에 있어서 강압과 폭력으로 제정된 법률들을 폐기하고 또 불법적인 일체 행위를 봉쇄하는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단행하려 하는 것이다.
작금 정부 각 기관, 사회단체 또는 학원 등에서의 결의 사태(沙汰)와 그러한 압력에 의해서 발생하는 기관 간부들의 사직 사태는 정치, 경제, 사회 활동의 기능을 마비시키는 진공상태를 초래함으로써 금반 개변(改變)의 성과를 파괴하고 국가를 위기에 몰아넣을 우려가 있는 것이다.
3) 현재 오열의 적발 및 침입 방지와 치안 회복을 위해서 모든 필요한 조치가 급속히 진행 중이니 모든 관민들은 동요하지 말고 각자의 직책에 전심전력을 해야 할 것이다.
4) 한미관계 및 미국의 경제원조를 국내의 집권자 또는 그가 속하는 정당에 유리하도록 왜곡 악용하는 일이 없이 긴밀 성실히 협조하는 토대 위에 올려놓을 것이다.
5) 현 정부는 한국의 맹방들에 대한 종래의 우호태도를 일층 강화할 뿐 아니라 비공산 인방(隣邦)과의 관계를 시급히 조정하는 데 진력할 것이다. 특히 한·일관계의 정상화는 가장 중요한 외교문제의 현안인 바 정부는 회담 재개에 앞서 양국의 이해 증진에 일조가 되도록 약간 명의 일본 신문기자의 입국을 허할 방침이다.

허정이 발표한 ‘5개 시정방침’의 핵심은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단행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도 모순이었을 뿐 아니라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사임한 지 한 주 만에 나온 과도정부의 정책이 4월 혁명의 성과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뜨거운 반론을 일으켰다. 실제로 허정 과도정부는 1960년 8월 23일 장면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4개월 가까이 그런 정책을 밀고나갔다.

허정은 5개 시정방침의 첫 번째 항목으로 “반공정책을 한층 강화한다”는 것을 내세웠다. 이승만 정권이 ‘북진통일’과 ‘멸공통일’의 외길로 치달아 왔는데 반공정책을 강화하겠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이었을까? 이승만의 유아독존적 반공정책을 반대해온 미국을 향해 허정 과도정부가 ‘온건한 반공정책’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메시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정방침 세 번째 항목인 ‘한·일관계 정상화’는 한국을 동아시아의 ‘반공 교두보’로 삼고 일본을 적극적 협력자로 만들어 미국, 한국, 일본의 삼각동맹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한·일관계 정상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는 미국의 확고한 정책에 허정 과도정부가 ‘화답’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5개 시정방침이 발표된 이튿날인 5월 4일자 조선일보 석간에는 그 방침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모순된 점을 지적하는 기사나 사설은 보이지 않고 인사문제에 초점을 맞춘 기사(「민주혁신을 역행하는 과정[過政] / 경찰 인사 계기로 문책 기세 / 숙청은커녕 재등용 / 신임 국장엔 발포·고문 책임자 포함 / 민주당 측 항의 / 시정 않으면 이 내무 불신임」)가 올랐다.


처단해야 할 이승만을 해외로 도피시킨 허정

허정 과도정부의 인사정책은 처음부터 4월 혁명을 외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국무원 구성에 처음부터 자유당 당적을 가진 자를 기용한 것이나, 각부 차관급 및 지방 장관, 경찰국장, 정부 산하 관서장에 아부파들이 상당수 발탁되고 승진한 것이 비판의 대상이었다. 특히 제2차 마산 시위와 4·19 봉기 유혈진압에 대해 책임이 있는 이동환 내무부차관과 조인구 치안국장이 유임된 것이 비판의 표적이 되었다. 4월 혁명 후 처음 있은 5월 3일 경찰 인사도 문제였다. 경찰은 이승만 정권의 악정과 3·15 부정선거 등 여러 선거 부정의 하수인이어서 신중히 인사를 했어야 했는데, 각도 경찰국장과 경무관급 인사에서 발포 명령자 등 악질적인 행위를 한 경찰을 기용한 것이다. 이는 민심에 정면으로 역행하는 처사로서 악감을 샀다. 다음날 이호 내무부장관은 전날의 인사를 취소했지만, 5월 6일 내무부는 서울시 경국장을 유임시켰고, 취소된 경무관 인사 중 3명을 그대로 재임용했다. 여론이 비등하자 김창숙, 이강, 김병로, 신숙 등으로 구성된 ‘국민각계 비상대책위원회’ 지도위원은 5월 6일, 시국수습책으로 1)과도정부 개편 2)현 경찰 간부와 모든 공무원의 승진을 중지하고 일제 잔재 경찰을 재등용하지 말 것 3)친일파 및 이승만 정권 아부파를 과도정부의 모든 기구에서 제거, 숙정할 것 4)공명선거를 방해한 법령을 즉시 철폐할 것 5)자유당 및 자유당 산하 사이비 애국단체를 불법화하여 즉시 해체할 것 등 5개항을 제시했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164쪽).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혁명의 주역인 학생들과 시민들은 당연히 3·15 부정선거의 원흉을 처단하라고 요구했다. 검찰은 부정선거의 ‘기획자’이자 ‘집행책임자’인 전 내무부장관 최인규를 5월 3일 구속했다. 이튿날에는 전 치안국장 이강학, 5월 7일에는 ‘자유당 정부통령선거대책위원장’ 한희석이 검찰에 자수해 모든 부정은 자유당 당무회의에서 결정했다고 진술했다.

(…) 정부 내에서 부정선거를 지도한 것은 최인규, 홍진기(당시 법무부장관), 김정렬(당시 국방부장관), 등 6명의 국무위원으로 구성된 6인위원회인 것으로 밝혀졌다. (…) 5월 18일을 전후해 송인상(당시 재무부장관), 홍진기, 자유당 간부 이중재와 정기섭 등이 구속되었다. 5월 23일 자유당 강경파인 장경근, 박만원과 유각경이 구속되었고, 이재학, 임철호 등 6명의 자유당 간부에 대한 구속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
사태가 이렇게 되자 1959년 3월에 국무위원들로 6인위원회를 구성하고 최인규를 내무부장관에 임명하는 등 사실상 3·15 부정선거를 총지휘한 이승만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같은 책, 165~166쪽).

5월 29일자 조선일보 석간 1면 머리에는 「이승만 박사 하와이로 망명 / 29일 아침 극비리 출발 / 김포공항서 허 수반·이 외무차관이 전송 / 정부서 여권과 전세기 알선」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랐다.

4월 혁명으로 인하여 대통령직에서 하야한 이승만 박사는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29일 상오 8시30분 김포공항에서 ‘씨 에이 티’ 편으로 김포공항을 떠나 하와이로 망명의 길에 올랐다. (…) 공항에는 허정 수석국무 위원과 이수영 외무차관만이 그를 전송하였으며 이 박사 부처는 정부 측에서 특별전세로 마련한 씨 에이 티 기에 올라 그가 일제 때 망명생활을 한 하와이로 다시 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 박사가 이날 극비리에 떠나게 된 것은 허정 수석국무위원의 적극적인 알선으로 28일 하루 동안에 외교관 여권을 발급하고 체미(滯美) 경비 등의 일체 환불(換弗) 조치를 마쳤으며 미국대사관으로부터 1년간의 효력을 갖는 입국사증(비자)을 얻어 이 박사에게 수교한 것이라 한다. 주한미대사관 당국자에 의하면 이번 이 박사의 망명은 “전적으로 한국 정부의 알선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동 사증은 기한 만료 후 다시 연장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 박사가 이날 떠나게끔 된 것은 수일 전부터 허 장관과 매카나기 미대사 사이에 수차에 걸쳐 충분히 협의되었던 것이며 27일 하오 30분간에 걸친 양자 비밀회담에서 모든 계획에 완전히 합의를 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허 장관은 이날 아침 그의 전송을 하고 돌아온 후 이 박사의 도미(渡美)는 “망명이냐 휴양이냐”라는 기자 질문에 “3개월 동안의 휴양으로 믿는다”고 말하고 그밖의 질문에는 일체 언급을 거절하였다. 한편 외무부 당국이 이 박사 부처의 망명에 외교관여권을 발급하고 더구나 막대한 금액으로 민간항공기의 전세까지 마련해주는 등 모든 처사에 대해서 정계에서는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으며 정부 당국에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조선일보의 이 기사 바로 옆에는 「이승만 박사의 망명과 혁명정신의 방황」이라는 사설이 실려 있다.

(…) 망명이든 여행이든 간에 이승만 박사 부처가 돌연 한국을 떠났다는 사실은 혁명 과정에 있는 우리나라의 정치현실상 중대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첫째 4월 의거를 표면으로는 민주혁명이니 민권혁명이니 하여 혁명적 의의를 강조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정변으로 깔아뭉개려는 반혁명 세력의 대두가 크게 경계되고 있는 작금의 정치 조류인 것이니 불투명한 성격이긴 하나 이 박사의 ‘망명’은 자유당의 잔당을 비롯한 그들 반혁명세력에 가하게 될 심리적 충격이 막심할 것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고 둘째는 12년간 악정의 총체적 책임자로서 혁명 후 속속 폭로되고 있는 구악의 제 사건에 이승만 박사의 형사적 책임을 요구하는 혁신계 정당의 활발한 움직임과 결부시켜 추리할 때 심신의 괴로움에 못 이겨 단순한 해외여행이 아니고 정치적 망명을 시도한 것이 아닌가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셋째로 모든 비정(秕政)의 책임자인 이 박사가 이화장에서 여생을 즐길 수 있다는 자체가 4월 유혈혁명의 의의를 감쇄시키고 혁명과업의 수행에 음양으로 장해가 되고 있다는 일부 여론에 비추어 이 박사의 이한(離韓)은 3·15 부정선거 뒤처리를 위시한 구질서의 숙청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 설 수 있다는 것이다. (…)
(…) 역사는 엄숙한 심판을 내려 그에게 반민주적인 독재정치가라는 낙인을 찍고 90 노구를 이끌어 조국을 등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것이 이 박사 개인이 아닌 우리 국민의 비극이요 후세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불가피한 비극임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이러한 비극은 이 박사로써 종지부를 찍고 다시는 이 나라 민주역사에 그와 같은 독재정치가 가 고개를 치켜들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 냉철한 이성과 확고한 결의가 없어서는 안될 일이다. 당면해서 무엇보다도 4월 의거를 정변으로 종결짓고자 도량(跳粱)하는 반혁명 세력을 경계해야겠다. 4월 혁명을 진정한 민주혁명으로 결실시키자면 정치혁명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혁명 사회혁명 문화혁명이 완성되어야 하거늘 영도세력이 없었던 4월 혁명은 과도정부라는 변태적 교량(橋梁)을 걸고 구 국회가 그대로 잔존하여 지금 혁명이냐 정변이냐를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구질서의 상징인 이승만 박사가 한국을 떠나버렸다는 이 엄연한 현실을 계기로 하여 반혁명적 반동세력을 완전히 봉쇄하고 ‘혁명다운 혁명’을 지향하여 일로 매진할 수 있는 국내 태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첫째 과도정부는 이승만 정권의 연장 같은 애매한 태도를 지양하고 3·15 부정선거의 뒤처리에 혁명정신을 반영하는 일대 용기를 보여줄 것과 둘째 신질서 재건을 기하는 각 정당 정파의 뚜렷한 정치적 목표를 선명히 하여 혁명과업에의 정진을 국민 앞에 공약할 것이며 그것을 행동으로 증명해주기를 우리는 요구한다. 셋째로 국민들은 혁명정신의 냉각을 경계하여 자유당 잔당 분자를 비롯한 반동세력의 발호를 막지 못하고 혼란만을 거듭한다면 4월 혁명의 의의가 완전히 상실될 염려도 없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일종의 환몽(幻夢)으로만 돌릴 수 없는 심각한 정국의 양상임을 우리는 냉정히 비판해야 할 것이다.

이 사설은 1960년 5월 29일 당시의 한국이 ‘혁명 과정’에 있었다고 전제하면서 이승만의 ‘망명’이 ‘자유당의 잔당을 비롯한 반혁명세력’에 가하게 될 ‘심리적 충격’을 중요한 요소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승만이 그의 ‘형사적 책임’을 요구하는 혁신계 정당의 활발한 움직임 때문에 심리적 괴로움을 못 이겨 ‘정치적 망명’을 시도한 것이라고 추리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승만이 한국을 떠난 것이 3·15 부정선거의 뒤처리를 위한 구질서 숙청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승만이 갑자기 한국을 떠난 사건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는 과도정부 수반 허정과 주한미국대사 매카나기가 ‘야합’해서 그를 하와이로 도피시켰다는 사실이다. 허정은 이승만의 정치적 제자이자 측근이라는 인연을 떠나서, 3·15 부정선거를 비롯해서 12년 동안 저질러진 악정과 학정, 그리고 민주주의 파괴의 총책임자인 이승만이 과도정부 뒤에 수립될 정식 정부의 정당한 심판을 받을 수 있도록 그의 신병을 확보해두어야 하는 책무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위의 사설은 이 점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허정의 월권 또는 직무유기에 못지않게 심각한 것은 주한미국대사가 4월 혁명의 심판을 받아야 할 ‘국사범’ 이승만의 해외도피를 방조하거나 허정과 함께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용납할 수 없는 내정 간섭인 동시에, 앞으로 세워질 정부가 법정에 세워 합법적으로 처단해야 할 이승만에게 갖은 편의를 제공해서 미국에 ‘입국’시킨 행위였다.

그런데 이렇게 중대한 문제들은 전혀 거론하지 않은 채 “구질서의 상징인 이승만 박사가 한국을 떠나버렸다는 이 엄연한 현실을 계기로 하여 반혁명적 반동세력을 완전히 봉쇄하고 ‘혁명다운 혁명’을 지향하여 일로 매진할 수 있는 국내 태세를 갖추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주장한 조선일보의 사설은 강경한 용어들에 기대어 공허한 ‘혁명론’을 펼치고 있는 데 불과하다.
이승만은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의 요양병원에서 병사한 뒤 7월 27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사후 50년이 가까워지는 2014년 현재까지 보수세력은 그를 ‘국부’로 추앙하고 있으며 진보세력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처음부터 수렁으로 몰아넣은 ‘주범’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부정선거 원흉 처단과 부정축재자 처벌에 소극적

6월 2일 허정은 부정선거 원흉 처벌은 관대히 하겠으며 더 이상의 검거는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언론에는 “불과 기십 명의 원흉이 검거되고 1백여 명이 도태되었을 뿐인데, 부정선거를 자행한 일선 책임자들은 거의 모두 승진하거나 영전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부정선거 처리에 버금가는 과제는 부정축재자 처벌이었다. 당시 재벌이나 대기업은 이승만 정권과 결탁하거나 권력의 비호를 받지 못하면 부를 쌓을 수가 없었다. 극도의 빈곤에 시달리던 대다수 국민은 4월 혁명 뒤에도 ‘건재’하는 부정축재자들을 응징하지 않는 허정 과도정부를 비난했다. 5월 10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는 “부정축재자의 재산을 몰수하는 조항을 새 헌법에 넣으라”고 요구하는 데모가 벌어졌다.

조선일보는 5월 12일자 석간 1면에 「과도정부의 빗나간 성격과 부정축재자에 관한 문제」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올렸다.

(…)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문제인데 이것은 당연히 개헌안에 삽입해야 할 것을 민주당에 추종하는 자유당 국회가 이를 거부한 것만 보더라도 그것을 광정(匡正)할 의사가 없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고 또 거기에 야합한 민주당 의원들의 사고방식을 알 수가 있을 듯하다. 법률불소급의 원칙(헌법 제23조)이 엄재(嚴在)함에도 불구하고 특별법의 제정 운운으로 호도하고 있는 것은 어불성설의 궤변이니 과시(果是) 조세법과 현행헌법상의 추징금 규정을 어느 정도 발동할지 두고 볼 일이다. 자유당 정권하 12년의 죄악에 살찐 부정축재 군상은 말할 것도 없고 외국 원조 불(弗)과 협잡정치 덕분으로 거재(巨財)를 이룩한 기십 개 재벌을 어떻게 요리할는지 알 수 없으나 이것을 그대로 둔다고 할 때 다음 정권의 부패는 명약관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유재산의 보장과 부정축재의 묵인을 동일시할 수 없는 만큼 과도정부가 할 수 있는 과업은 우선 부정축재의 실태라도 샅샅이 밝혀 명백히 해놓고 국민 앞에 공개함으로써 발본색원의 처리방법을 신정권에 일임해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허정 과도정부는 6월 1일부터 20일까지 부정축재 자수기간을 두었다. 장면 정부가 수립된 뒤인 8월 31일 재무부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부정축재한 24명 46개 업체에 대해 5년간의 탈세액 109억 환과 그중 최근 2년간의 탈세액에 대한 벌과금 87억 환 등 총 196억 환을 국가에 환원하라고 통고했다.

허정 과도정권이 이승만 체제를 청산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허정은 이승만이 가장 신뢰한 측근의 한 사람이었고, 과도정부의 관리나 경찰, 판검사는 거의 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복무했던 자들이었다. 허정은 부정축재자와 부정선거 원흉을 미온적으로 처리해 그들로 하여금 증거를 인멸하고 재산을 도피할 기회를 주었을 뿐 아니라 시민들의 혁명전신을 냉각시켰다. 그는 부패한 군 고위 지휘관을 숙정하지 않았고, 경관은 자리바꿈만 했으며, 부정공 무원을 그대로 눌러 앉혔다. 그렇지만 권력에 대한 미련을 갖지 않고 3개월여 동안 관리내각을 지키고 별 무리 없이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한 것은 평가할 만하다(<한국민주화운동사 1>, 1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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