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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의 감격과 조선일보 복간 움직임조선일보 대해부 2권-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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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5.16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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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정오, 경성 중앙방송국의 라디오 중계를 통해 일본 ‘천황’ 히로히토의 목소리가 울려나오기 시작했다.
히로히토는 떨리는 음성으로 ‘조서’를 4분 10초 동안 읽어 내려갔다. 그는 아시아에서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은 ‘제국의 자존과 동아의 안정을 바랄 뿐인 것이고’ 타국의 주권을 배척하고 영토를 침범한 것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고 발뺌을 했다. 일본 제국의 ‘대원수’로서, 이른바 ‘대동아전쟁의 총책임자’인 사람으로서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었다. 게다가 그는 ‘황조황종’ ‘신민’ ‘국체’ ‘적자’ ‘적성’ ‘신주’ 같은 말들을 온 세계를 향해 공공연히 외침으로써 그가 이끌던 일본이 항복의 순간에도 ‘신국(神國)’임을 강조했다.


해방의 감격과 환희가 온 나라를 휩쓸다

8월 15일 아침부터 서울 시내 여러 곳에는 ‘금일 정오 중대 방송, 1억 국민 필청(必廳)’이라는 벽보가 나붙어 있었다. 라디오 앞에 모여 앉은 조선 사람들은 히로히토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비록 ‘항복’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일제가 연합국에 무조건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일본어가 서툰 어린이들은 어른들의 해석을 듣고 ‘해방’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은 해방이 오기 9년 전인 1936년 35세의 젊은 나이에 장티푸스로 숨졌다. 그가 남긴 시 「그날이 오면」은 1945년 8월 15일을 정확히 ‘예보’한 것이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일제가 조선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한 1905년부터 따지면 만 40년 만에 찾아온 해방이었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와 곳곳의 소읍에서 라디오가게 앞에 모여 히로히토의 방송 내용을 듣고 난 사람들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듯이 해방의 감격과 환희로 온몸을 떨며 만세를 불렀다.


‘주식회사 조선일보 재창립위원회’를 만들다

해방의 감격에 온 나라가 들썩거리던 1945년 8월 중순 조선일보 전 사장 방응모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계초 방응모>(이동욱 지음, 방일영 문화재단, 1996)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계초가 해방의 소식을 들은 것은 의정부에서였다. 이 감격의 소식을 듣자마자 장손 일영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려 했다. 그러나 타고 갈 차도 없었다. 궁색해진 것이다. 그래도 신문사를 다시 차리고 신문을 복간해야만 하겠다며 서둘러 상경했다. 해방은 계초에게 오랜 칩거 생활을 마무리짓게 하고 또 다시 투지를 불태우게 한 사건이었다(403쪽).

이 기록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빙성이 박약하다. 동아일보사 사주 김성수와 함께 언론계에서 가장 두드러진 친일파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방응모가 해방이 되었다고 서울의 ‘대명천지’에 선뜻 나설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가 오랜 칩거 생활을 마무리지었다는 것은 또 어떤 근거에서 나온 말인가? 방응모는 1945년 3월에 이미 잡지 <조광>의 발행인으로 취임해서 8월 10일 조선일보가 폐간된 뒤에도 바쁘게 움직였다. 1941년 1월에는 조선일보사의 이름을 ‘동방흥업주식회사’로 바꾸고 사장 자리를 차지했다. 1944년 9월에는 군수산업체인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설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감사역을 맡았다. 해방 직전까지 일제의 ‘성전’을 찬미하고 ‘대동아공영권 건설’에 앞장서야 한다고 대중을 향해 외치던 그가 언제 ‘칩거’할 여유가 있었단 말인가?
‘조선일보 90년 사사(社史) 편찬실’이 집필·제작한 <간추린 조선일보 90년사-신문 그 이상의 미디어, 조선일보>(조선일보사, 2010)에는 해방 뒤 방응모의 행적이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광복을 맞은 감격에 온 나라가 들떠 있던 1945년 8월 어느 날, 일제 하 폐간 당시 조선일보 인쇄부장이었던 김한호는 방응모 사장의 연락을 받았다. “김 부장, 우리 조선일보를 다시 일으켜 봅시다.”
방 사장의 연락에 김한호는 뛰는 가슴으로 안방 장롱 서랍을 열었다. 그는 5년 전 잘 싸서 장롱 깊숙이 넣어 놓았던 조선일보 동판 제호를 꺼냈다. 조선일보가 폐간되던 1940년 8월 10일, 사장 방응모는 “언젠가 이것을 다시 사용하게 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일세. 나보다는 김 형이 더 오래 살 테니 잘 보관해 두게”라며 김한호에게 맡겼었다. 5년 만에 다시 빛을 보게 된 제호를 감격스럽게 껴안으면서 김한호는 13살 딸에게 “내 대에서 이것이 빛을 보지 못하면 너희 대에 물려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광복을 맞자마자 혼란스런 정치적 상황 속에서 방응모는 민족의 의사를 대변할 조선일보의 복간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8월 하순 방응모를 발기위원장으로 하는 ‘주식회사 조선일보사 재창립위원회’가 구성됐다. 그리고 옛 사원들을 하나둘씩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135~136쪽).

방응모는 1945년 9월 의정부 집에서 ‘조선일보 부활’을 위한 첫 모임을 열었다. 편집부 차석(次席)이었던 성인기, 인쇄부장이었던 김한호 등 20여명이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방응모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우선 신문부터 복간하겠다”면서 “어떤 비상수단을 쓰더라도 복간은 이루어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 복간작업은 악전고투와 같았다. 편집위원회라고 이름은 달았으나 겨우 9명이 신문 발간을 준비하려니 연일 밤샘작업이 이어졌다. 폐간 때의 편집 국원 54명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인원을 충원해 복간호가 나올 즈음에는 너댓명이 늘어나 있었지만 역시 태부족이었다. 월급은 하루 점심 한 그릇씩 사 먹기에도 빠듯할 정도였다. 그러나 다들 조선일보를 다시 세상에 내놓는다는 사명감 하나로 버텼다(같은 책, 137쪽).

그들이 일제강점기에 친일로 얼룩진 조선일보를 쇄신해서 ‘해방된 민족사회의 대변지’를 만  들려는 ‘사명감’에 불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조선일보는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관리자  freemediaf@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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