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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사람들’의 친일 기록(7)조선일보 대해부 : 부록(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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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5.09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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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만식(蔡萬植, 1902~1950)-“사회부 기자의 ‘레디메이드 인생’”

(…) 1924년 12월 <조선문단>에 단편소설 「세 길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25년 7월부터 1926년 10월까지 동아일보 기자와 학예부장으로 근무했다. (…)

(…) 1934년 9월 전후부터 1936년 1월까지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조선일보를 퇴사한 후 개성부로 이주하면서 전업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1928년 금광기술자와 투자자를 연결하는 금광 브로커를 했으나 금광사업은 실패했고, 이 체험을 살려서 매일신보에 1939년 6월 19일부터 11월 19일까지 소설 <금의 정열(情熱)>을 연재했다. 1939년 4월경 개성 송도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이두신 학생의 사상사건으로 약 두 달 동안 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같은 해 8월 <채만식단편집>(학예사), 12월 <탁류>(박문서관)을 발간했다. 1940년 장편소설 <태평천하>를 공동작품집 <3인 장편집>(명성사)을 통해 발표했다. 1941년 장편소설 <금의 정열>(영창서관)을 발간했다.

1941년 7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호국신사(護國神社) 어조영지(御造營地)’ 근로봉사에 참여했다. 11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해 경성부 아서원에서 열린 국민문학 실천을 위한 내선(內鮮)작가 간담회에 참석했다. 1942년 2월 10일부터 7월 10일까지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아름다운 새벽>을 연재했다. 12월 조선문인협회가 주관한, 징병제 선전을 위한 순국영령방문단의 일원으로 전라북도에 파견되었다. 특히 조선인 최초의 전사자로서 노몬한 사건(1939년 몽골과 만주 국경에서 일어난 소련군과 일본군의 대규모 무력충돌 사건)에서 죽은 일본 육군 항공병 지인태 대위의 유가족을 취재해 여러 군데 기고했다. 1943년 1월호 <신세대>에 발표한 「지인태 대위 유족 방문기-반도 최초로 진 군국(君國)의 꽃」에서 조선 청년들도 그를 본받아 ‘제국군인’이 되어 ‘천황 폐하’를 위해 온몸을 바치라고 선동했다. 「추모되는 지인태 대위의 자폭-유가족의 위문을 마치고」(<춘추>, 1943년 1월호)에서도 지인태의 편지를 소개하면서 “진충보국(盡忠報國)에 살며, 그 정신으로 죽음이 군인의 본분입니다. 서(西)으로 우랄 산맥을 넘고, 남으로 태평양을 건너 마음껏 날아다니면서, 폐하의 어능위(御稜威)를 팔굉(八紘)에 넓히고, 우리 황도를 동서에 선양하도록, 그 기백으로 이 광고(曠古)의 성전에 용왕매진하는 것이 우리 비행장사(飛行將士)들의 본망(本望)인 것입니다. (…) 이 성전을 완수하자면 살아 있는 몸만으로는 잘할 수가 없습니다. 사후의 혼백까지도 이 성업이 달성되기 전에는 흩어지지 아니할 각오입니다. 생명이 혼으로 화할 때란 조만(早晩)이 없습니다. 그때가 오면, 시기도 장소도 공(功)도 다 돌아보지 아니합니다. 오직 용약전진이 있을 따름”이라고 침략전쟁의 맹목적인 희생을 미화했다. 그리고 전사자의 아버지도 선전의 도구로 활용했다. “지 대위를 제국군인으로 길러내고 제국군인으로서 부끄럽지 아니한 전사를 하여 국가를 위하여 힘겨운 주춧돌이 되었으며, 그 이름이 야스쿠니(靖國)의 신역(神域)에서 천추에 빛나도록 한 데는 대위의 선친 지동선 노인의 감화와 힘이 컸음을 잊을 수가 없다. (…) 지 노인은 집안사람들이나 친구들더러 늘 하는 말이 ‘우리 조선 사람도 멀지 않아 제국군인으로 나설 때가 올 테니 두고 보라’고 하고, 또 ‘우리 막내둥이 인태는 기어코 군인으로 내보내서 한바탕 나라 일을 하고 이름을 떨치게 할 테라’고 하여 왔었다.”(「영예의 유가족을 찾아서 6)-위대한 아버지 감화(感化)」, 매일신보, 1943.1.18.)

1942년 12월 26일부터 1943년 1월까지 만주국 젠다오성(間島省)이 초청하고 조선문인협회가 파견하는 형식으로 젠다오성 일대의 조선인 개척촌을 이석훈·이무영·정인택·정비석과 함께 시찰했다. 시찰 소감을 쓴 「간도행」(매일신보, 1943.2.17.~2.24)에서 간도 이주 조선인들은 조선이나 내지에 있는 조선인들 이상으로 ‘황국신민화의 열렬한 신념’으로 살고 있다고 칭송했다. 그리고 1943년 4월 <반도의 빛>에 발표한 산문 「농산물 출하(공출) 기타」에서는 간도 조선 청년들은 참으로 씩씩하여 ‘평복(平服)한 병정’과 다를 바 없다고 하면서 “진작부터 자위단 기지에 들어가 군대식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젊은이치고 총 한 방 법식대로 쏠 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내년의 징병제 실시를 앞두고 청년특별훈련에 있어서도 일본적인 예의범절 외에는 조선보다 한 걸음 앞선 성적을 보이리라.”는 평가를 전했다. 아울러 이주민들의 ‘국어’ 즉 일본어에 대한 습득열 따위를 전하는 등 만주에 이주한 조선인의 활동상을 적극 알리며 일제의 만주정책을 선전해 나갔다. (…)

문필활동을 통한 채만식의 친일행위는 1940년 7월호 <인문평론>에 발표한 「나의 꽃과 병정」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중일전쟁 개전 3주년에 즈음해 발표한 이 글에서 “대화(大和)민족의 역사적 오래고 오랜 숙망이요, 그 필연한 귀결로써 1억 총의의 세기적 경륜인 대륙건설이 드디어, 그날 그 시각에 북지(北支)의 일각 노구교에서 일어난 한 방 총소리를 신호 삼아 마침내 실제 행동의 제일보를 내디딘 지도 어느덧 3년에, 네 번째의 제 돌을 맞이하게 되었다. 동아의 천지에 새로운 질서가 펴질 전주곡이요, 따라서 역사의 웅장한 분류(奔流)”였다고 하여 침략전쟁을 찬양했다. 같은 해 11월 22, 23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대륙 경륜(經綸)의 장도(壯圖)-그 세계사적 의의」에서 “우리 일본에 의한 지나(중국) 대륙의 경륜은 한 우수한 민족으로서의 정당한 권리요, 따라서 하나의 세계사적인 필연인 것이다. 바야흐로 달성되어 가고 있는 동아 신질서의 건설이 즉 그 실천이다. 결코 과거의 구라파적인 침략과는 이념에 있어서나 수단방법에 있어서나 결과에 있어서나 전혀 범(範)을 달리한다.”고 했다. 그리고 1942년 12월 11일자 경성일보에 발표한 「포로의 시사(示唆)」에서 “만일 최후의 승리가 그들 것이 될 경우 대동아 전역에서 쫓겨나 성스러운 우리 국토에 야만인 병대(兵隊)가 뻔뻔하게 주둔을 할 것이다. 1억 동포는 연병장 부근을 느릿느릿 걸어가는 포로병보다 훨씬 더 비참한 모습이 될 것”이라고 한 뒤, 후회하기 전에 열심히 노력해서 최후의 승리를 맞이하자고 결전의식을 고취했다. (…)

침략전쟁에 문학이 어떻게 봉사해야 하는가에 대한 전쟁문학론은 1941년 초에 집중되어 발표되었다. 1941년 1월 10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대를 배경하는 문학」에서 “조선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일본제국의 한 개 지방에 불과한 자”라고 하면서 ‘신체제 하의 조선문학의 진로’는 오직 ‘신체제에 순응하는 방향’이라고 주장했다. (…)

1943년 8월부터 징병제가 시행되어 침략전쟁에 조선인이 강제동원되자 8월 3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홍대(鴻大)하옵신 성은」에서 “이로써 조선 땅 2400만의 백성도 누구나가 다 총을 잡고 전선에 나아가 나라를 지키는 방패가 될 자격이 생긴 것이다. 조선 동포에 내리옵신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성은 홍대무변(鴻大無邊)하옵심을 오직 황공하여 마지아니할 따름이다. 2400만 누구 감읍치 아니할 자 있으리요.”라는 식으로 진정한 ‘내선일체’를 향한 길을 열어준 ‘천황의 시혜에 감읍’하는 모습을 보였다.

매일신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아름다운 새벽>에서는 전후방 구별 없는 일제 침략전쟁에서 ‘내지인’과 힘을 합쳐 전력을 다해 싸우는 조선인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특히 ‘총후’ 일본인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동경의 자세를 보였다. “2600년 동안을 일본 민족은 그 고유한 신앙인 신도(神道)를 주체로 불교 기타의 외래의 종교를 거기다 소화시켜 독자적인 경지를 열면서 꾸준히 정신생활을 쌓아 내려왔다. 일본 민족의 온갖 생활은 이 정신주의에서 출발한다. (…) 새삼스럽게 내선일체를 운위할 것도 없이 조선 사람은 ‘닛본징(日本人-인용자)이다. (…) 하루바삐 명실(名實)을 다 같이 추호도 다름이 없는 ’닛본징‘이 되어야 한다. 그리 하여야만 조선 사람으로서의 ’닛본징‘인 도리를 다함이려니와 동시에 ’닛본징‘으로서의 조선 사람이 진정한 행복도 누리게 될 것이다.”(매일신보, 1942.2.19.) (…)

(…) 1947년 <아름다운 새벽>(박문출판사) 전편(前篇)을 발간했다. 그러나 이 단행본은 원래 매일신보에 연재할 때 있었던 노골적인 친일 내용이 완전히 삭제된 채 발간되었으며, 이후 판본도 마찬가지다. (…) 1948년 10월부터 1949년 1월까지 <백민>에 「민족의 죄인」을 발표해 과거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해 반성했다.


노수현(盧壽鉉, 1899~1978)-‘연재만화 <멍텅구리> 그린 동양화의 거목’

(…) 1913년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서화미술회 부설 강습소 화과(畵科)에 입학해 1918년에 제4회로 졸업했다. 재학 중이던 1917년부터 안중식의 화숙(畵塾) 경묵헌(耕默軒)에서 이상범과 함께 그림을 배웠다. 서화미술회 강습소 학생 시절 안중식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 이 강습소는 1911년 이완용의 주도로 총독부 소속 건물을 빌려 설립된 기존 경성서화미술원의 교육기능을 이어받아 1914년에 출범했다. (…)

1917년 자작 김윤식이 조선총독부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개최한 문예백일장 시문서화의과대회(詩文書畵擬科大會)에서 그림 부문 1등을 차지했다. (…) 1921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삽화 및 만화를 그리는 미술담당 기자로 일하다가 1923년부터 조선일보로 옮겼다. 그해 3월 이상범·변관식·이용우와 함께 미술단체 동연사(同硏社)를 조직했다. 1924년 10월 조선일보에 향락 감정을 부추기는 4컷 만화 <멍텅구리 헛물켜기>를 연재해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

1931년에는 중앙일보 학예부에서 근무했으며, 1937년 10월부터 동아일보에서 근무했다. 1924년 4컷 만화 <멍텅구리 헛물켜기>로 성공했던 전력을 토대로 1941년 1월부터 3월까지 잡지 <신세대)에 46칸짜리 중편만화 <멍텅구리>를 수차례 연재했다. ‘멍텅구리’는 형식적으로는 만화였지만 그 내용은 일제의 시국시책인 ‘전시국민생활체제 확립기준안’을 위한 적극적인 홍보물이었다. 일제는 1940년 9월부터 경성을 비롯한 도회지에서 전시체제 생활규범으로 ‘전시국민생활체제 확립기준안’을 발표하고 실천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이는 1940년 천황의 측근 고노에 수상이 개념화한 ‘신체제’ 하에서 총독부가 벌인 전시 시책으로 1) 궁성요배·정오묵도·신궁신사 배례·외국어 사용 억제와 같은 ‘황국정신의 앙양’, 2) 6시 조기기상·청소·라디오체조·보행 장려·사치품 구매사용 폐지·저축 장려·회식폐지·장발 억제·장례 개선 및 화혼 폐지 등의 ‘생활의 쇄신’, 3) ‘연맹애국반의 기구 정비’와 같은 생활규범을 담고 있었다.

1941년 <신세대> 1월호에 발표한 「멍텅구리-운전수편」은 다음과 같이 황국정신을 고취시켰다. ‘때는 비상시’, ‘국력 총동원하는 이때에…’, ‘대륙 제일선에서는…’, “야, 멍텅이 우리도 나라를 위해 일을 하세!”, “차라리 자동차 운전을 배워가지고 전선에 나감이 어떨까?”, “역시 바람이 제일이야 그럴 듯한 일일세”, “그럼 내일부터라도 운전수 지망…만세!”, “만세…만세….” 1941년 <신세대> 2월호의 「멍텅구리-알뜰살림편」에서는 신체제 ‘생활의 쇄신’을 위한 아이디어를 창안한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주인공은 물자를 아끼고 신체제에 부응하기 위해 계란 부화를 위한 소위 ‘알 까는 기계’를 설치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신체제 신시대에 그냥 있을 수야 없지. 그럼, 그래야 국민 된 도리란 말이야.” 1941년 <신세대> 4월호의 「멍텅구리-라디오체조편」은 생활의 쇄신 차원에서 일제의 시국 생활규범인 라디오체조를 다음과 같이 독려했다. “총후 국민 아침마다 라디오체조 / 우리도 이제 라디오체조를 합시다 / 오늘부터 온 동리가 다같이 / 어른 아이 남자 여자 모두 다같이 / 히히…토끼보다 더 재미있는 십분간 체조.” 이 모두는 1940년대 태평양전쟁을 위해 일제가 전쟁 지지열을 고양할 목적으로 창안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핵심 내용이었다. 이는 그림과 말풍선으로 이루어진 만화의 매체적 특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홍보한 것으로 당시 친일미술가 구본웅과 심형구 등의 주장과도 일치하는 좋은 본보기였다. 예컨대 구본웅은 1940년 7월 9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사변과 미술인」에서 “신동아 건설을 위하여 미술의 무기화에 힘쓸 것”을 힘차게 주장했다. 심형구는 1941년 <신시대> 10월호에 쓴 「시국과 미술」에서 신체제 아래에서 신문삽화·포스터 등을 그려 생산미술에 힘써서 멸사봉공하자는 식의 주장을 했다. 1941년 <신세대>에 연작으로 발표한 <멍텅구리>는 만화 매체를 적극 활용한 선전물로서, 당시 친일미술가들이 주장했던 ‘미술의 무기화’와 ‘생산미술’이라는 전쟁미술의 목적을 충족시킨 표본적 사례라 할 수 있다.

1942년 9월에는 황군위문 부채그림을 그려 조선총독부에 헌납했고, 같은 해 10월 조지야(丁字屋) 화랑에서 열린 조선남화연맹 제1회 전람회에 참여했다. 이 전람회는 남화정신에 기초한 화가들을 총망라해 채관보국(彩菅報國)의 결의를 공고히 하기 위해 고희동·이상범·김은호 등 조선인 28명과 카타야마 탄(堅山 垣)·미키 히로시(三木 弘) 등 일본인 화가들이 참가한 시국전람회였다. 출품작 판매수익금은 모두 일본 육해군에 헌납했다. 1942년 10월 개인전 출품작 「화양동(華陽洞)」으로 모던일본사의 후신인 신태양사가 주관한 제4회 ‘조선예술상’을 수상했다. 이 상의 목적은 당시 “전시 하에 반도의 예술문화를 위하여 꾸준히 노력한 공로자를 표창”하기 위함이었다.

해방 직후 조선미술건설본부 동양화부 위원장을 맡아 일했고, 1946년 미군정 하에서 설립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기 시작했다. 1946년부터 1960년까지, 1964년부터 1967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1961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학과 교수로 정년퇴직하고 명예교수가 되었으며, 1962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수상경력으로는 1955년 서울시문화상, 1958년 예술원 공로상, 1962년 대한민국 문화훈장 등이 있다. 1974년 마지막 개인전 ‘심산회고전’ 이후 1978년 9월 6일 사망했다.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안석주(安碩柱, 예명 또는 필명 安夕影, 창씨명 安田影, 1901~1950)-‘기자·화가·시인·소설가·배우·영화감독’

(…) 1921년 나도향의 동아일보 연재소설 <환희>의 삽화를 맡으면서 삽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기세가 주도한극 단 예술좌 제1회 공연에 출연했고, 1922년 토월회에 가입하여 신극운동에도 참여했다. 1923년에는 박영희, 김복진 등이 주도한 경향파 문학 작가 모임인 파스큘라에 참가하여 훗날 카프 결성에 관여했다.

1924년 (…) 동아일보와 시대일보를 비롯하여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맡기도 했다. 주로 미술활동을 했지만 소설 <인간궤도>와 <춘풍> 등을 집필했고, 영화 <노래하는 시절>(안종화, 1930), <바다여 말하라>(이규환, 1935), <춘풍>(박기채, 1935) 등의 각본도 썼으며, 카프 영화 <화륜>(김유영, 1931)의 각본가로 참여하기도 했다.

영화계에서는 <먼동이 틀 때>(1927)의 미술감독과 주연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1930년에 서광제·이효석·안종화·김유영 등과 함께 시나리오작가협회를 창립했으며, 1937년 <심청>으로 영화감독이 되었다. 1940년에는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전속감독으로 입사했으며, 친일영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지원병>(1941)을 연출했다. (…)

1940년 조선영화인협회의 상무이사를 맡았으며, 같은 해 내선일체를 이루기 위해 사회의 지도급 지식인들을 우선 교육해야 한다는 취지로 결성된 황도학회에 안종화, 이창용, 이규환 등과 함께 영화계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1년 영화인기능심사위원회 위원을 맡는 등 일제의 정책에 적극 부응했다. 그 외에도 근로문화인부대 활동,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등의 친일활동을 펼쳤다.

영화 연출, 조직 참여뿐만 아니라 평론활동도 열심히 했는데, 매일신보에 당시의 대표적인 친일영화 <그대와 나>를 두고는 “내선 문화교류의 예술, 영화인 열의와 협조에 감사”한다는 평을 남겼다. 지원병훈련소를 하루 견학한 후 <삼천리> 1940년 12월호에 「문화인도 입소 필요」라는 제목으로 “지원병훈련소의 견학은 비록 하루에 지나지 않았으나 영원히 내 맘에서 사라지지 않을 감격을 받았습니다. 열성으로 교시해 주시는 교관들의 말씀도 기억이 새롭거니와 반도의 청년들이 여기서 정신의 훈련, 육체의 훈련을 받는 데서 국가의 간성이 될 수 있고 황국신민으로서의 의무를 깨달으리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대학 출신까지도 이 훈련소에 입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썼다. (…)
영화 기획 분야에 대해서는 「조선영화가 가져야만 하는 일본정신 앙양」이라는 표현을 썼고, 이 글의 마무리 부분에서는 “안종화 씨가 매일신보에 ‘신체제와 영화’의 소론에 있어서 황국신민으로서 이 시국에 대처할 것도 영화인이겠지만, 다시 말하면 강습회에서 향산광랑(香山光郞: 이광수) 씨의 강의와 같이 영화인도 카메라를 총검으로 출정한 병사요, 조선영화는 병참기지의 영화로서 중차대한 역할이 있으므로 오로지, 협회의 존재는 영화인으로 하여금 그런 의미의 훈련도장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등록 이후 협회의 모든 사업은 문화 영역에 있어서 광범위한 활동이 요구될 것이니, 우선 내지의 대일본영화인협회와의 연락도 재의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화인들은 협회를 중심으로 오직 전진이 있을 뿐이다.”라고 조선영화인협회를 중심으로 일제에 충성할 것을 강력하게 제안했다.

일본군의 싱가포르 함락에 대해서는 매일신보 1942년 2월 19일자에 「동양문화의 빛날 때」라는 제목으로 “어쨌든 우리는 다만 황군께 감사를 드려야 하고 이 감사하는 맘으로 총후의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영화정신대’까지 주장했는데, 매일신보 1941년 12월 18일자에 조선영화인협회 상무이사 야스다 사카에(安田榮) 명의로 「대동아전과 영화인의 임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서 “외래문화에 젖어온 사람들로서 과거에 일반의 생활에 있어서 적으나 크나 그릇된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으매 여기에 문화인들의 큰 반성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미영(米英) 영화를 양키이즘으로 보고 이에 젖었던 영화인들을 비판하면서 정화가 필요하다고 한 후 “오늘날에 예술의 정화라는 것은 자의(自意)로 돌아오는 데 있다. 이 예술뿐 아니라 반도인 전체가 자의를 깨닫지 못했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이 자의라는 것은 곧 황국신민이 되는 것이요, 황국신민이 되는 때는 일본정신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 (…) 황국신민다웁게 되고 이러는 데는 나를 버리고 폐하의 적자로서 조국을 위해 생명까지 바치기를 울어 맹서하였다. (…) 그러려면 여기서 우리 영화인들도 영화정신대가 되자는 것뿐이다. 이것이 오늘의 영화인의 나아갈 길이요, 시국에 처한 영화인의 임무라고 생각한다.”라고 주장했다. (…)

해방 후, 조선영화건설본부 내무부 부장을 맡다가 조선영화건설본부가 조선영화동맹으로 결합된 후 중앙집행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1946년 좌우대립 시기에는 우익 영화인들의 결집체인 영화감독구락부 결성을 주도하는 데 한몫했다. 이 시기에 중앙일보사 고문, 민주일보사 편집위원과 문화부장으로 근무했고, 1948년 정부 수립 후에는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사단법인 대한영화사 전무이사, 대한영화협회 이사장, 서울시예술원 문화위원을 역임했다. 또 1947년 서울중앙방송국 3·1절 기념 어린이 노래극 <우리의 소원은 독립>의 주제가 「우리의 소원」을 작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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