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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사람들’의 친일 기록(6)조선일보 대해부 : 부록(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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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5.02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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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대훈(咸大勳, 1907~1949)-‘경찰학교 교장 된 러시아문학 전공자’

(…) 도쿄외국어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하던 1931년 홍해성·유치진·서항석·김진섭 등이 결성한 극예술연구회에 참여하여 러시아 작품을 번역·소개하는 데 힘썼다. 극예술연구회 창단 공연 작품인 고골리의 <검찰관>을 번역했다. 러시아 극작가 체홉의 <기념제>와 <벚꽃동산>도 번역했다.

일본에서 돌아와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여 사회부·학예부·출판부 기자로 활동했고, 1937년 조선일보 편집주임을 맡았다. 1938년 3월 극예술연구회가 해산한 후 유치진과 함께 ‘국민예술’을 표방한 신극 단체인 현대극장을 설립했다. 1941년 3월 부민관 소강당에서 열린 현대극장 결성식에는 조선총독부와 국민총력조선연맹·매일신보사 등 일제 유력 기관의 문화예술 관계자들과 연극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현대극장은 신체제에 적합한 우수 연극인의 육성과 국민연극을 담당할 인력 양성을 위해 국민연극연구소를 설립했다. 국민연극연구소는 1941년 4월 3일부터 제1기 연구생을 모집하여 5월 15일 본과 2년 과정과 별과 4개월 과정의 1기 연구생의 입소식을 휘문중학교에서 가졌다. 국민연극연구소는 연극 실무와 관련된 교육 이외에 일본어와 일본 역사, 시국과 관련한 정신교육에도 중점을 두었다. 함대훈은 국민연극연구소 개설 과목인 연극개론을 강의하는 한편 연구소의 기획위원과 소장직을 맡아 국민연극 이론의 체계화에 힘썼다. 현대극장이 목표로 하는 국민연극이란 “국가이념을 연극 속에 집어넣어 가지고 이 순화된 연극문화를 국민 대중에게 보급시키는 것으로 연극을 통해서 국민정신의 작흥(作興)과 결합시켜 대중을 교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국민연극운동은 “연극의 국민화 운동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국민연극운동은 현재 국민총력의 연극정책과 보조를 같이해서 그 유종의 미를 보여야 할 것”이라고 했다.

국가이념과 국민정신이란 곧 황국신민이 된 반도의 인간으로서 국민적 자각과 국민적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현대극장의 활동 방향을 국민연극 활동으로 분명히 지정했으며, 구체적인 실천 방법으로 농어촌 등에 “국민연극의 이념을 전달하고 연극문화를 침투”시키기 위해 이동극장을 활용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이동극장의 구성원은 국민연극연구소에서 국민정신으로 연극의 이론과 실제를 단련시킨 연극인들과 현재 유랑하는 연극인들을 합쳐 재편성·재훈련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제안은 국민연극의 활성화라는 점에서 조선연극문화협회의 방침과 매우 유사한 것이었다. 국민연극 이론을 바탕으로 운영된 국민연극연구소를 통해 신체제 연극을 담당할 인력을 준비한 현대극장은 본격적인 공연활동을 통해 연극계의 신체제운동에 앞장섰다. (…)
문학계에서도 활동했는데 1933년에는 임화와 함께 백철의 우경화된 인간묘사론을 공격하는 글을 발표했다. 그런가 하면 1935년을 전후하여 조선 문단에 행동주의가 소개되고 휴머니즘 논의가 시작되자 당대 평론가인 이헌구·홍효민·김문집 등과 지식인연맹 결성을 주장했다. (…) 1939년에는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1941년에는 간사로 활동했다. 1940년 11월 조선문인협회 산하 시국강연부대의 일원으로 문예보국강연회에서 강연했다. 1940년에는 조선일보사 출판부 주임으로 대표적인 친일 종합문예지 <조광>의 편집 업무를 담당했다.

1940년 11월호 <인문평론>에 「지원병훈련소 입영기」를 실었다. 지원병훈련소 1일 입영 체험을 하고 난 감상을 담은 글인데, 여기서 “반도인 지원병이 결코 내지(일본) 지원병사에게 떨어지지 않는 기쁨”을 전하며 “지원병제도 실시 이래 반도의 건아가 여기 열광적으로 입소 희망을 갖는다.”라고 주장하며 지원병훈련소의 제반 설비와 규율을 미화하고 선전했다. 이어 같은 해 12월호 <삼천리>에 「문사부대와 지원병-전시에 책무익다(責務益多)」를 실었다. “경애하는 지원병 제군!”으로 시작하는 이 글은 일제의 지원병 강제동원을 ‘병역의무를 가질 수 있는 특권’으로 미화하며 조선 청년들의 지원병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에는 조선문인협회에서 주관하는 순국영령 방문대의 일원으로 전라남도 일대를 돌며 징병제를 선전하는 강연활동을 벌였다. 1943년 8월 4일자 매일신보에 「장정(壯丁)의 각오」를 기고하여 “조선의 청년아, 육(陸)으로 바다로 가서 전장의 혼이 되라”고 강변하였고, 징병제도의 실시에 대하여 “조선 동포에게 커다란 의무와 은전을 갖게 한 것은 다만 만강(滿腔)의 감사가 있을 뿐”이라며 그 감격을 전했다. 같은 해 8월 10일부터 14일까지 매일신보에 「전시 수상(戰時 隨想)」을 연재해 징병제에 대한 출판으로 국민개병의 정신을 철저히 보급시킬 것과 해군특별지원병제도에 대한 선전계몽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43년에 소설 「북풍의 정열」을 발표하여 일제의 신체제를 미화했다.

해방 후 한성일보 편집국장, 미군정청 공안국장과 공보국장을 지냈다. 이후 소설 창작에 전념해 1947년 「청춘보」를, 1948년 「희망의 계절」을 발표했다. 1947년 국립 경찰전문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최정희(崔貞熙, 1912~1990)-‘부장에게 잉크병 던진 당돌한 여기자’

(…) 1934년 남편인 영화감독 김유영과 함께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계열 연극단체와 관련된 신건설사 사건에 연루되어 전주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8개월 후인 1935년 석방되었다. 1936년 6월부터 1937년 7월까지 조선일보 출판부와 학예부 기자를 지냈다. 초기에는 동반자 계열의 작품을 썼으나 출옥 후 여성들의 심리나 운명을 다룬 작품을 주로 발표했다. 1937년 4월호 <조광)에 작가 자신이 사실상의 등단작이라고 밝힌 「흉가」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 <삼천리> 발행인인 김동환과 실질적인 부부관계였다. 1939년 12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문예의 밤과 1940년 2월 평양에서 열린 문예대강연회에서 「자화상」을 낭독했고, 1941년부터 1942년까지 노천명·모윤숙과 더불어 조선문인협회 간사를 지냈다. 1941년 9월 임전대책협의회의 채권가두유격대에 참가했다. 같은 달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경성)으로 참여한 뒤 10월부터 1942년 10월까지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41년 12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결전문화대강연회가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릴 때 이하윤·김용제·노천명 등과 함께 시를 낭송했다(매일신보, 1941.12.3.). 같은 달 17일 경성 부민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조선임전보국단 결전부인대회에서 ‘군국의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강연했으며, 강연 내용은 1942년 5월호 <대동아>에 같은 제목으로 실렸다. 1942년 5월부터 경성방송국에서 근무했다. (…)

(…) 1941년 11월 12일부터 15일까지 매일신보에 연재된 ‘국민문학의 공작정담회’에 이선희·모윤숙과 함께 참가해 “우리들한테도 총을 잡는 그러한 마음의 준비가 없어선 안 될 것 같아. 그런 마음이 아니고는 국민문학도 국책문학도 안 써질 것 같으니까. (…) 일본인이 되려는 생각을 문화화하여야겠지요.”라고 국민문학에 임하는 자세를 밝혔다. 1942년 2월 조선임전보국단이 부인대 실천운동의 하나로 마련한 군복 수리 근로에 참여했다. 같은 해 5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주최로 ‘군국의 어머니 좌담회’가 열렸는데 다른 친일 여성인사들과 함께 “징병제 실시에 대한 결심과 준비를 평정(評定)”했다.

<반도의 빛> 1942년 7월호에 우리도 군국의 어머니라는 특집 중 하나로 게재된 「5월 9일」은 일본 각의에서 조선인징병제 실시를 결정한 5월 9일(실제로는 5월 8일-인용자)을 기념하면서 “우리의 아들을 훌륭하게 만드는 힘도 우리 어머니한테 있고 우리나라 일본을 세계에 빛나게 하는 것도, 우리 국민을 굳세게 자라나게 하는 힘도 우리에게 있습니다.”라며 군국의 어머니 역할을 강조했다. 「군국의 어머님들」(<반도의 빛>, 1944년 2,3월호)과 「군국모성찬(軍國母性讚)」(<반도의 빛>, 1944년 7월호)에서는 ‘군국의 어머니’를 실천하는 일본(내지)의 여성들을 차례로 소개했다. 일종의 인물 열전을 취한 이 글들에서 묘사한 일본의 여성은 어려운 환경에서 자식들을 잘 키워서 근대교육까지 받게 하지만 종국에는 아들을 전장에 보내고 일본의 전시 정책에 협력하는 강인한 어머니들이다.

「징용열차」(<반도의 빛>, 1945년 2월호)는 징용에 나갈 것을 선동한 작품이다. 경기도 광주에 사는 착실한 머슴 병태는 결혼을 한 지 8개월 만에 징용 영장을 받게 되었다. 다른 응징사(應徵士)들과 함께 경성역에서 징용열차를 타게 된 병태는 아내와 헤어지는 게 못내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런데 열차 안에서 국민동원총진회(國民動員總進會)에서 파견된 사람들의 연설을 듣게 된다. 이들은 큰 것을 위해 사사로운 것을 버리자고 주장하고, 백색인종의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한편, 전쟁수행에 앞장설 ‘남자’의 위대한 힘을 찬양했다. 이에 응징사들은 모두 고무되었고, 병태 역시 비로소 자신이 영미를 구축(驅逐)하고 동양 민족을 구원할 중대한 사명을 가졌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

「야국초(野菊草)」(<국민문학>, 1942년 11월호)는 작품성이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는 친일소설이다. 한때 사랑했지만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떠나가 버린 옛 애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여자 주인공 ‘나’가 아들 승일을 데리고 지원병훈련소를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소설에서 훈련소의 하라다 교관은 “매년 지원병이 입소하면, 곧 그 가정 사정이라든지 부모 형제의 찬부 등을 조사합니다만, 언제나 모친 쪽의 반대가 많습니다. 수십만이라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렵게 선발된 광영자(光榮者)들입니다만, 이런 식으로 모친 되시는 분이 반대하거나 흐릿한 자는 성적도 좋지 않고, 간혹 탈출까지 하는 일도 생기는 겁니다. 아무래도 무지한 모친이란 눈앞의 맹목적인 애정만 알지, 크고 빛나는 미래 같은 건 조금도 의식하지 못해서…”라며 “반도의 청년이 훌륭한 군인이 되려면 우선 무엇보다도 어머니들의 힘이 크다.”라고 말한다. 부인 교화의 차원에서 군국의 어머니상을 강조하는 것이다. 또한 이 소설은 지원병훈련소의 잘 짜여진 일상, 훈련된 지원병들의 모습을 허구의 형식을 빌려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나’와 아들 승일은 지원병들의 절도 있는 생활과 건강함, 열정에 교화되어 제국의 군인이 될 결심을 더욱 다진다. 소설 마지막에서 여주인공은 “승일이를 위해 들국화를 아름다운 꽃, 강인한 꽃으로 가꾸기로 했습니다. 그게 제게 하셨던 당신의 행위에 대한 복수가 될 테니까요.”라고 다짐한다. 자신을 버린 당신의 행위에 대한 ‘복수’라고 말하는 이유는, 명예와 지위를 가진 이른바 지식인 남성이 지닌 부도덕성과 개인주의를 폭로하고 그와는 반대로 아들을 일본 제국주의를 위해 바치는 군인으로 키우리라 결심하기 때문이다. 소설 제목인 들국화는 강인함으로 무장된 어머니와 장래 황군으로 나설 아들을 비유한 것이다.

「여명(黎明)」(<야담>, 2942년 5월호)은 기독교 계통의 여학교를 나온 세 여성이 서양 중심의 세계에서 벗어나 신체제에 접근하는 모습을 그렸다. 경자는 부민관에서 미국과 영국을 비판하고 동양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고, 은영은 대중 연설을 할 정도로 적극적이지는 않지만 서양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친구 혜봉을 설득한다. 혜봉은 서양인 교장과 영어선생에 대한 추억 때문에 ‘영미귀축(英米鬼畜)’ 논리에 동조하지 못한다. 하지만 학교에서 군국주의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서양(인)을 악으로 여기는 것을 보고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서’ ‘동양사람 된 자격’을 갖기로 결심한다는 내용이다.
「환영(幻影)의 병사」(<국민총력>, 1941년 2월호)는 조선인 여성 영순과 일본인 군인 야마모토(山本勇) 사이의 애정을 통해 내선일체 논리를 구현한 작품이다. 야마모토는 조선에 주둔하다가 중국 전선으로 가는데, 거기서 영순이 써준 한글의 모양을 하고 있는 조선의 가옥 구조와 중국의 가옥 구조가 닮았다는 것을 발견하고 “지나와 조선과 일본은 아주 오래 전의 신대(神代)로부터 연결되어 있다.”고 확신한다. 영순 역시 일본 군인을 통해 전쟁을 자기 것으로 느끼게 된다. 내선일체뿐만 아니라 동양의 발견 및 이를 주도하는 일본정신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

해방 후 전조선문필가협회(1946), 한국문학가협회(1949)의 추천회원에 이름을 올렸다. 6·25전쟁 당시 남편 김동환이 납북된 후 공군종군작가단 창공구락부에서 활동했으며, 1957년 <주부생활>지 주간을 지냈다. (…) 1959년 제8회 서울시문화상을 받았으며, 1964년 <인간사>로 제1회 한국여류문학상을 수상했다. 1969년 한국여류문학인회 회장을 지냈고, 1970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과 소설가협회 대표위원 등을 지냈다. 1972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83년 3·1문화상을 수상했다.


노천명(盧天命, 1911~1957)-“오만하고 고독한 ‘슬픈 사슴’”

(…) 이화여자전문학교 재학 당시 「밤의 찬미」를 <신동아>(1932년 6월호)에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했으며, 이 해 12월 극예술연구회의 제7회 공연에 참여하는 등 1938년까지 극예술연구회 동인으로 활동했다. (…) 1937년 조선중앙일보 기자를 그만두고 5월부터 1939년 1월까지 조선일보사 출판부에서 발행하는 잡지 <여성>을 편집했으며, 1938년 첫 시집 <산호림(珊瑚林)>을 간행했다.

1941년 7월 7일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호국신사(護國神社) 어조영지(御造營地) 근로봉사’에 참여했다. 8월에 조선문인협회의 간사, 12월에 조선임전보국단 산하의 부인대 간사로 일했다. 1942년 2월 13일부터 조선임전보국단 군복수리 근로에 참가했으며, 2월 27일부터 29일까지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저축강조의 결정대강연회에서 연사로 활동했다. 5월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주최 ‘군국의 어머니 좌담회’(‘건국의 새 어머니가 될 우리의 감격과 포부’)에 참석했다. 9월 조선문인협회 문학부 간사를 맡았으며, 11월 5일 경성을 방문한 ‘대동아문학자 대표’ 환송식에 참여하여 시 「만주문학자 대표 오영(吳瑛) 여사에게」를 낭독했다. 12월 4일부터 8일까지 징병제 선전을 위해 조선문인협회가 주관한 순국영령방문단의 일원으로 경상남도에 파견되었다. 같은 달 8일 조선문인협회·조선연극문화협회·동양극장이 공동 주최한 대동아전 1주년 기념 국민시낭독회에서 시를 낭독했다.
1943년 매일신보사에 입사하여 학예부 기자로 활동했다. (…) 1945년 2월 25일 「흰 비둘기를 날려라」, 「진혼가」 등 9편의 친일시가 실린 제2시집 <창변(窓邊)>을 간행했다. (…)
노천명의 시는 주로 여성(어머니 혹은 누나)의 목소리를 통해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의 무운을 기원하거나 전쟁에서 죽은 병사들을 추모하는 내용, 학병 출전을 권유하는 내용, 일본군의 승전을 찬양하는 내용, 후방에 있는 여성으로서 마음가짐을 가다듬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1942년 1월 <삼천리>에 시 「‘젊은이들에게」를 발표했다. ‘미영격멸특집’으로 꾸며진 <삼천리> 1월호는 ‘전쟁시집’란에 이광수·주요한·노천명·김동환 등 4인의 작품을 게재했다. 이 작품에서 “늙은 영국을 대해서 / 저 혼혈아 아메리카를 향해서 / 제국은 드디어 선전을 포고했다 / 정의를 위해 대동아 건설을 위해서 / 우리는 불수레를 달렸다”는 말로 일본의 선전포고 행위를 미화하면서 ‘이 땅의 젊은이들’이 “조국을 위해 인류의 평화를 위해 / 그들 젊은 가슴속에 장미처럼 피어오르는 붉은 마음”을 품고 전쟁에 적극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

일본군의 무운을 비는 내용을 담은 「기원(祈願)(<조광>, 1942년 2월호)」에서는 “신사(神社)의 이른 아침 / 뜰엔 비질한 자욱 머리 빚은 듯 아직 새로운데 / 경건히 나와 손 모으며 기원하는 여인이 있다. / 일본의 전 아세아의 무운을 비는 청정한 아침이어라 // 어머니의 거룩한 정성 / 아내의 간절한 기원 / 아버지를 위한 갸륵한 마음들… / 같은 이 시간 방방곡곡 신사가 있는 곳 / 아름다운 이런 정경이 빚어지고 있으리.”라고 총후 여성의 정신자세를 노래했다. 일본군이 싱가포르에서 연합군을 상대로 이긴 것을 기념하기 위해 발표한 「싱가폴 함락」(매일신보, 1942.2.19.)에서는 “아세아의 세기적인 여명은 왔다 / 영미의 독아에서 / 일본군은 마침내 신가파(新嘉坡)를 뺏어내고야 말았다 // 동양 침략의 근거지 / 온갖 죄악이 음모되는 불야의 성 / 싱가폴이 불의 세례를 받는 / 이 장엄한 최후의 저녁 / 싱가폴 구석구석의 작고 큰 사원들아 / 너의 피를 빨아먹고 넘어지는 영미를 조상하는 만종을 울려라”라고 일제의 승전을 해방으로 미화했다. 특히 이 작품은 ‘동아 민족’의 침략자로 규정된 ‘영미’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면서 ‘남양의 슬픈 형제’에게 형제애를 드러내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
(…) 「흰 비둘기를 날려라」(매일신보, 1942.12.8)는 일본군의 진주만 습격 1주년을 맞아 전투에서 숨진 일본군의 명복을 비는 내용이다. 특히 진주만 폭격에서 숨진 일본군의 충성 뒤엔 뛰어난 ‘아홉 어머니’, ‘굳센 일본의 아내’가 숨어 있다는 점을 환기하면서 “추녀 끝 드높이 나부끼는 / 일장깃발도 유난히 선명한 이 낮 / 고운 처녀들아 꽃을 꺾어라 / 푸른 하늘에 흰 비둘기를 날려라”로 끝을 맺었다. (…)

전쟁이 말기로 접어들면서 친일시 내용이 일본군의 승리를 찬양하는 것에서 전쟁동원 논리를 전파하는 것으로 변해갔다. 1943년 8월 5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가 대표적이다.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쟁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 이 영광의 날 / 나도 사나이였다면 나도 사나이였다면 /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이라고 하여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전쟁터로 나갈 것을 요구하고 있다. (…) 1944년 12월 대동아전쟁 3돌 기념 특집호로 제작한 매일신보(사진판)에는 가미카제특공대로 나가 전사한 조선인 군인 사진과 함께 노천명의 「군신송(軍神頌)」도 실려 있다. 「군신송」은 “이 아침에도 대일본 특공대는 / 남방 거친 파도 위에 / 혜성 모양 장엄하게 떨어졌으리 // 싸움하는 나라의 거리다운 / 네거리를 지나며 / 12월의 하늘을 우러러본다 / 어뢰를 안고 몸으로 / 적기(敵機)를 부순 용사들의 얼굴이 / 하늘가에 장미처럼 핀다 / 성좌처럼 솟는다”라고 노래하여 병사들의 죽음을 ‘거룩한 역사’를 완성하기 위한 ‘아름다운 희생’으로 미화했다. (…)

친일시 이외에도 단상·논설·참관기 등을 통해 친일 문필활동을 하였다. 1941년 12월 12일자 매일신보에 「전쟁은 이제부터 본격 시작-동양의 평화를 지키자」를 기고하여, “영미를 우리가 먹느냐 먹히느냐 하는 국가흥망의 중대한 짐은 우리 여성들의 두 어깨에도 지워진 것”이기 때문에 여성들도 “제일선에서 총을 드는 절박한 마음으로” 총후가정과 직장을 지켜 마침내 동양의 평화를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필 「싸움하는 여성」(<조광>, 1944년 10월호)에서는 “ (…) 대동아전쟁의 승패는 결국에 있어서 적국 여성들과 일본 여성의 근로의 투쟁에 있을 것입니다. (…) 유복자의 외아들을 전지로 바치는 늙은 어머니도 있습니다. (…) 여자 정신대는 이때 우리 여성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길인 줄 압니다”라고 하여 총후 여성으로서의 생산 증대에 노력할 것을 주장했다. (…)

해방 후, 서울신문(매일신보의 후신) 문화부에서 근무하다 1946년 사직하고 부녀신문사에 입사하여 편집차장으로 활동했다. 6·25전쟁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았다가 1950년 6월 하순 문학가동맹에 참여했다. 9·28수복 후 부역자처벌특별법에 의해 20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이헌구·김광섭 등 문인들의 석방운동으로 1951년 4월 출감했다. 1951년 4월 가톨릭에 입교하여 영세를 받았다. 1952년 자신의 혐의에 대한 해명의 뜻을 담은 소설 「오산이었다」를 발표했다. (…) 2001년 이후 노천명문학상이 제정되어 매년 시·수필·평론 등 9개 부문에서 시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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